사랑할 때와 죽을 때
1
죽음은 소련의 대평원에서는 아프리카와는 다른 느낌을 갖게 한다. 아프리카에서도
영국군이 발사하는 격렬한 포화로 인해 전선에서의 시체는 오랫동안 묻혀지지 않은 채
그대로 뒹굴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태양의 움직임은 빠르게 다가왔다. 밤이 되면 숨이 콱 막힐 듯한 공기가
바람과 함께 전해져 왔다. 공기가 사자의 몸에 충만하고 사자들은 이국의 별빛 아래
유령처럼 자리에서 꿈틀꿈틀 일어났다. 마치 아무런 희망도 없는 최후의 전투에
참가라도 하고 있는 듯이. 그것도 이튿날이 되면 이미 움츠려들기 시작하여 그대로 땅
속으로 잠겨 드는 것처럼 대지에 방치되고 있었다.
그것은 나중에 운반할 때는 몹시 가벼워져 있었다. 몇 주일 지나서 발견된 시체는
해골만이 남고 갑자기 커진 군복 속에서 바짝바짝 말라갔다. 그것은 모래와 태양과
바람 속에서 건조해진 주검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소련에서의 죽음은 기름으로
인하여 끈끈하고 악취를 풍겼다.
며칠 동안을 계속해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 녹기 시작했다. 한 달 전에는 2 미터 이상이나 쌓였던 눈이었다. 파괴된
마을은 처음에는 까맣게 그슬린 지붕만이 보였다. 그것이 조금씩 조금씩 눈 속에서
묵묵히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창이 얼굴을 내밀었다. 3, 4일이 지나자 아치로
된 입구가 나타났다. 나중에는 눈 속으로 통할 수 있는 층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눈은
계속해서 녹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시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체는 오래 전부터 파묻혀 있었다. 마을에서는 11월에서 다음 해 4월에 걸쳐 여러
번의 전투가 있었다. 점령했다가는 포기하고 방치했다가는 도로 탈환했다. 그후
눈보라가 휘몰아치면서 삽시간에 시체들을 깊이 묻어 버려 위생병들조차 쉽게 찾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치 간호사들은 피로 물들인 침대 위에 시트를 펼치는 것처럼
거의 매일 내리는 흰 눈이 그 비극을 잠시나마 가려주었다.
최초로 나타난 것은 1월의 전사자였다. 이것은 제일 위에 빳빳하게 누워 있다가 4월
초에 눈이 녹기 시작하자 모습을 드러냈다. 시체는 바짝 얼어붙어 있었으며 얼굴은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시체는 마을 뒤에 있는 언덕에 마치 널빤지를 묻는 것처럼 매장되었다. 먼저 눈을
삽으로 치우고 얼어붙은 땅을 파서 무덤을 만드는 일은 매우 힘들었다.
그것도 독일인의 시체만 묻어주고 소련인의 시체는 그대로 목장 안에 버려뒀다.
소련인의 시체까지 매장해줄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아군이 이 마을을 장악할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연대는 후퇴하고 있다. 소련인의 시체는 현재
진격중인 소련군이 직접 매장하면 될 일이었다.
12월의 전사자 곁에서는 1월의 전사자가 갖고 있던 무기가 발견되었다. 총이나
수류탄, 그리고 철모는 시체보다 깊숙히 묻혀 있었다. 시체가 걸치고 있던 헐렁해진
군복 안쪽에 붙어있던 명찰은 쉽사리 떼어낼 수 있었다. 마치 익사하였을 때처럼 잔뜩
벌린 입에는 물이 괴고 있었다.
이런 시체는 운반할 때는 그대로 경직되고 있었으나, 들것에 실려 움직일 때마다
한쪽 다리가 흔들려 사자가 누군가를 부르는 듯이 보였다. 동공은 젤리처럼 광채를
상실하고 눈이 녹아 천천히 흘려 나왔다. 마치 소리 없이 울고 있는 것처럼.
갑자기 며칠씩이나 얼어붙었다. 눈의 표면이 잔뜩 굳어지면서 얼음이 되었다. 눈은
줄지 않았다. 마침내 바람이 불어대기 시작했다.
흰눈 속에서 회색의 물체 하나가 나타났다. 그것은 허공을 향하여 잔뜩 움켜 쥔
주먹이었다.
"저기에도 하나 있어." 샤우워가 말했다.
"어디?" 임메르만이 물었다.
"저기 교회 앞이야. 파낼까?"
"소용없어. 바람이 불면 자연히 눈이 녹겠지. 저기는 눈이 2 미터는 쌓여 있을 거야.
이 마을은 상당히 낮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어. 그래도 자네는 얼음 속에 구두를
적시고 싶은가?"
"바보 같은 소리 마라!" 샤우워는 야전취사장 쪽을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무엇을 먹여줄지 모르겠군."
"캐비지야. 그래 봐야 돼지고기가 빠진 감자이지만"
"캐비지라 이번 주에 들어서서 벌써 세번째."
샤우워는 바지를 벗고 소변을 보기 시작했다.
"일 년 전에는 커다란 무지개와 같은 오줌을 누었었는데."
그는 괴로운 듯이 말하였다.
"군대식으로 당당하게 말야. 나는 기분이 좋았지. 식사는 일급이었고 오직
전진뿐이었어. 그래도 좀처럼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그런데 지금은 소변도 군인처럼 볼 수 없게 됐단 말야. 아무런 희망도 없어."
임메르만도 배설 동작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오줌 싸는 것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군대만 그만둘 수 있다면."
"나도 그래. 그렇지만 이런 상태로 가다가는 영원히 군대를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아."
"그렇지. 죽을 때까지 영웅감이야. 아직도 무지개 같은 오줌을 갈기는 자들은
친위대 놈들뿐 일거야."
"그자들이라면 가능할 거야. 추잡한 일은 우리들이 해치우고 있는데 명예는 그들이
가로채고 있어. 우리는 2주일이나 3주일 동안을 싸워 겨우 도시를 점령하지. 그러면
뒤에 처진 친위대들이 와서 우리들보다 앞서 당당하게 입성하는 거야. 그자들이
환대를 받고 있는 꼴이라니! 그들은 언제나 두터운 외투에 고급장화를 신고 먹음직한
고깃덩어리도 도맡아 버리지."
임메르만은 히죽히죽 웃었다.
"그렇지만 그놈들도 이 도시를 가로채지는 못했어. 놈들도 지금은 우리와 같은 꼴을
하고서 퇴각하거든."
"우리와 같지는 않지. 우리는 사로잡은 자들을 사살하거나 불태우지는 않으니까."
"자네 오늘은 왜 그러지?" 임메르만은 언쟁을 중단하면서 놀란 얼굴로 물었다.
"자네는 갑자기 인간적인 면에서 얘기를 시작했어. 그렇지만 슈타인브레너가 엿듣지
않도록 조심해. 헌병대에 끌려가고 싶지 않거든. 저기 교회 앞의 눈이 내려앉는군.
이번에도 시체의 한쪽 팔이 나타나겠지."
샤우워는 그쪽을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눈이 녹는다면 내일쯤에는 십자가 위에 걸리겠지. 여기는 공동묘지의
정면이야."
"그러면 저기가 공동 묘지란 말인가?"
"물론이지. 아직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나? 전에도 한번 이곳에 주둔한 적이 있어.
10월말의 마지막 공격 때였지."
샤우워는 식기에 손을 뻗쳤다.
"식사 운반차가 왔다! 빨리 해. 그렇지 않으면 썩은 국물밖에 오지 않을 테니까."
팔은 차츰 길어졌다. 눈이 녹고 있는 것이 아니라 팔이 서서히 지면에서 솟아
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위협을 하고 있거나 구원을 청하는 손짓으로 보였다.
중대장은 걸음을 멈추었다. "저기 솟아 있는 건 무엇이냐?"
"소련군입니다. 중위님."
라에 중위는 색이 바랜 소매 끝을 주시했다.
"저건 소련군이 아니다."
뮤케 특무상사는 장화 속에서 발가락을 움직였다. 그는 중대장의 태도가
못마땅했다. 그는 부동자세로 중대장 앞에 서 있었다. 군대의 규율은 일체의 개인적
감정을 허용하지 않았다.그러나 속으로는 중위를 멸시하고 있었으므로 발가락을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미련한 녀석 같으니! 보기 흉하다고? 꼭 시체를
처음 보는 놈 같군.
"저것은 독일군이다."
"사흘 동안 소련군의 시체밖에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튼 부하들을 시켜 즉시 파내도록 해. 그러면 알게 될 테니까."
라에는 자기 숙소로 돌아갔다.
"교만하고 멍청한 놈. 따뜻한 난로 옆에서 졸고 있다가 철십자 최고 훈장이나
자랑하겠다는 거야? 나도 네놈만큼 공은 세웠지만 그 따위 훈장 같은 것은 거저 줘도
안 받겠다."
"샤우워!" 그는 부르짖었다.
"임메르만, 이리로 와! 삽을 들고 오란 말야. 또 누가 있지? 그레버! 힐슈만!
베르닝! 슈타인브레너! 너는 이 작업을 감독해. 저기 보이는 손이다. 그것을 파내서
아군이면 잘 매장하는 거야. 내기를 해도 좋아. 저것은 절대로 아군이 아니다.!"
슈타인브레너가 다가왔다.
그는 어린애 같은 가느다란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얼마야?"
뮤케는 잠시 동안 망설였다. "3 마르크. 군표 석 장이다."
"다섯. 나는 5 마르크 이하로 내기한 적은 없어."
"좋아. 5 마르크다. 그렇지만 꼭 지불해야 돼."
슈타인브레너는 웃었다. 창백한 얼굴에 금발이 빛나고 있었다.
나이는 열아홉살로서 천사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야 물론. 뮤케, 또 다른
조건은?"
뮤케는 슈타인브레너를 두려워하며 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열성당원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뮤케는 담배를 꺼내들었다.
"됐어. 담배는?"
"좋지."
"총통께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아. 슈타인브레너!" 임메르만이 빈정댔다.
"닥쳐!"
"너야말로 얌전히 계시지."
"기분이 몹시 상쾌한 모양이군."
임메르만은 웃었다.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있나. 네가 무슨 뜻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도 잘 알고 있어.
나는 총통께서는 절대로 담배를 피우시지 않는다는 말밖에 안 했어. 여기 증인이 네
사람이나 있어. 총통께서 담배를 피우시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
"그만들 해!" 뮤케가 소리쳤다.
"빨리들 파내. 중대장의 명령이다."
"좋아, 가자." 슈타인브레너는 뮤케가 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도대체 언제부터 근무시간에 담배를 피워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지?" 임메르만이
빈정거렸다.
"지금은 근무중이 아냐." 뮤케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자. 우물쭈물하지 말고 빨리 시체를 파내. 힐슈만, 너도 해!"
힐슈만이 다가왔다. 슈타인브레너는 히죽히죽 웃었다.
"너에게는 안성마춤의 일이지. 너희들 유대인의 피를 더욱 빛나게 해줄 테니까."
"나는 4분의 3이 아리안이야." 힐슈만이 반박했다.
슈타인브레너는 담배연기를 그의 얼굴에 내뿜었다.
"그것은 내가 알 바 아니다. 너의 4분의 1은 유대인이야. 총통의 자비로 너는
영광스럽게도 독일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소련의
돼지들을 빨리 파내. 저 돼지놈들은 어찌나 냄새가 지독한지 중위님께서는 견딜 수가
없으시다고."
"이건 소련군이 아냐."
그레버가 말했다. 그는 혼자서 송판조각으로 시체의 팔이나 가슴께의 눈을 파내고
있었던 것이다. 축축한 군복이 뚜렷하게 보였다.
"소련군이 아니라고?" 슈타인브레너는 그레버에게로 가까이 와서 내려다봤다.
"과연 독일군의 복장이군." 그는 얼굴을 돌렸다. "뮤케! 소련군이 아냐. 내가
이겼어!"
뮤케는 무거운 걸음걸이로 다가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구덩이를
들여다보았다.
"잘 모르겠는데."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일주일 동안 소련군의 시체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이것은 12월에 파묻힌
녀석일 거야."
"어쩌면 10월일는지도 몰라." 하고 그레버가 말했다.
"그때 우리 지대가 이곳을 통과했었으니까."
"바보 같은 소리 마라. 그 당시의 시체가 아직까지 남아있을 리 있는가."
"있지. 우리는 여기서 소련군과 야간전투를 했었고, 적들은 후퇴했었지."
"맞아." 샤우워가 말했다.
"우리 편의 시체는 발견하는 즉시 전부 매장했어. 그것은 분명해."
"분명하긴 무엇이 분명하단 말야! 10월에 많은 눈이 내렸고 우리는 그대로 전진하고
있었어."
"너는 그 말을 두 번이나 했어." 슈타인브레너는 그레버를 노려 보았다.
"다시 한번 들려주지. 그때 우리는 반격을 개시하여100 킬로미터 이상이나 전진하고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후퇴하고 있단 말이지?"
임메르만은 경고하는 것처럼 그레버를 손끝으로 쿡 찔렀다.
"그러면, 우리가 전진하고 있다는 말인가?"그레버는 개의치 않고 반문했다.
"전선을 단축하고 있는 거야." 임메르만은 중간에 나서서 비웃는 듯한 눈초리로
슈타인브레너를 노려 보았다.
"이미 일년이나 지났어. 작전상의 필요 때문이야.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라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지."
"손에 반지를 끼고 있는데." 그때 갑자기 힐슈만이 말했다.
뮤케는 허리를 숙였다.
"금반지다. 결혼반지야."
모두들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틈을 타 임메르만은 그레버에게 재빨리 속삭였다.
"조심해. 저놈은 항상 기회만 노리고 있거든."
"너야말로 조심해. 저놈은 나보다 너를 더 감시하고 있어."
"나는 상관없어. 나는 어차피 특별휴가 같은 건 바라지도 않으니까."
"이것은 우리들 연대의 배지다!" 작업을 계속하고 있던 힐슈만이 소리쳤다.
"그렇다면 소련군이 아니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군. 그렇지?" 슈타인브레너는
뮤케를 돌아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그래. 소련인이 아냐."
뮤케는 성난 듯이 대답하였다.
"5 마르크. 10 마르크쯤 걸 것을 잘못했는데. 자, 얼른 내놓게."
"지금 여기 없어."
"그럼 어디 있단 말인가? 국립은행에라도 맡겨두고 있단 말인가? 빨리 내놓으란
말야!"
뮤케는 사나운 눈초리로 슈타인브레너를 노려보았다. 그는 지갑을 꺼내
슈타인브레너에게 돈을 지불하였다. 그레버는 허리를 구부리고 힐슈만의 작업을
거들어주고 있었다.
"아 이것은 라이케 같은데." 그레버가 말했다.
"뭐라고?"
"우리 중대의 라이케 소위야. 여기 견장이 있어. 봐, 오른쪽 집게손가락의 끝이
없잖아."
"바보 같은 소리 하지마. 라이케는 부상당하고 본국으로 송환됐다고 들었어."
"라이케가 분명하다."
"얼굴을 씻겨 보자."
그레버와 힐슈만은 발굴작업을 계속했다.
"조심해." 뮤케가 호통을 쳤다.
"머리를 찍지 말란 말야."
드디어 얼굴이 눈 속에서 나타났다. 아직도 눈으로 가려져 있는 눈은 마치 조각가가
버려둔 미완성의 작품처럼 보였다. 파란 입술 사이에 금니 하나가 햇빛에 빛나고
있었다.
"라이케임에 틀림없어. 그때 여기서 부상당한 자는 라이케뿐이었으니까."
"눈을 털어내 봐."
그레버는 잠시 주저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눈을 털어냈다.
"라이케가 맞다!"
뮤케는 몹시 흥분했다. 그는 문제의 시체가 확인되자 직접 작업을 지휘했다.
"들어올려. 힐슈만과 샤우워는 다리를 들고 슈타인브레너와 베르닝은 팔을 들어.
그레버, 너는 목을 들어! 자, 여럿이 힘을 합해서 올리자."
시체가 움직였다.
"다시 한번. 하나, 둘, 셋, 올려!"
시체가 다시 움직였다. 시체 밑에 형성된 구덩이에 공기가 스며 들며 공허한 소리를
울렸다.
"특무상사님, 다리가 빠졌습니다!" 힐슈만이 부르짖었다.
"내려놓아!" 뮤케가 명령을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시체는 밑으로
굴러떨어지고 힐슈만의 손에는 장화만이 들려 있었다. 장화 속에 괴인 물로 다리가
썩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속에 다리가 들어 있나?" 임메르만이 빈정거렸다.
"장화를 옆에 두고 더 파 들어가." 뮤케가 힐슈만에게 명령했다.
"이렇게까지 됐을 줄이야 이봐, 임베르만, 너는 가만히 있어! 죽은 사람에게는
애도의 뜻을 표하는 것도 몰라?"
임베르만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뮤케를 바라보았지만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시체를 덮었던 눈이 모조리 제거되었다. 축축한 군복속에서 서류와 지갑이
발견되었다. 필적이 잘 분간되지는 않았지만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레버가 말한
대로 작년 가을까지 이 중대의 소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라이케 소위였다.
"중대장께 보고해야겠다. 여기서 대기하고 있도록."
뮤케는 중대본부로 달려갔다. 그곳은 이 마을에 남은 유일한 건물이었다. 라에는
불이 타오르고 있는 난로 곁에 앉아 있었다. 뮤케의 보고를 받자마자 라에는 시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는 잠시 동안 라이케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감겨주어라."
"안됩니다, 중위님."하고 그레버가 말하였다.
"눈두덩이 썩었습니다."
라에는 포탄으로 파괴된 교회를 바라보았다.
"저쪽으로 운반하도록 해. 관은 있나?"
"관은 전부 남겨놓고 왔습니다."하고 뮤케가 보고했다.
"특별한 경우를 생각해서 약간 남겨두었었는데 지금은 모조리 소련군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슈타인브레너는 킬킬거리고 웃었다. 라에는 웃지 않았다.
"만들 수 있는가?"
"시간이 좀 걸릴 것입니다." 그레버가 대답했다. "아마 마을에는 적당한 판자조각도
없을 겁니다.
라에는 머리를 끄덕였다.
"시체를 천막 위에 눕혀라. 거기에 싸서 묻기로 하자. 무덤을 파고 십자가를
만들어."
그레버와 샤우워, 임메르만, 베르닝 네 사람이 시체를 교회로 운반했다. 힐슈만은
묘한 표정으로 아직도 다리의 일부가 붙어 있는 장화를 들고 뒤를 따랐다.
"뮤케 특무상사!"
"네!"
"게릴라 포로들 네 명이 오늘 이곳에 압송된다. 내일 아침 일찍 총살하도록 하라!
상사의 소대에서 지망자를 모집하도록 해. 지망자가 없으면 지명으로 차출한다."
"네, 알겠습니다."
"도대체 어째서 우리가 집행해야 되지? 이런 혼란한 때에."
"제가 하겠습니다." 슈타인브레네가 유일한 희망자였다.
"좋다." 라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응대했다. 그는 눈을 치우고 만든 길을 성큼성큼
걸어갔다. '또 난로가로 가겠지.' 하고 뮤케는 생각했다. '접시나 닦을 녀석
같으니라구! 게릴라를 서너 명 총살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놈들은 우리의 전우를 수백 명씩 죽였는데.'
"소련놈들이 빨리 오면 라이케의 무덤도 함께 파게 하면 될 텐데."
슈타인브레너는 말했다.
"놈들을 전부 부려먹는 거야. 내 생각이 어때, 상사."
"난 아무런 상관도 없어." 뮤케는 잔뜩 화를 내고 있었다.
'빼빼 마른 얼굴에 안경을 걸친 전봇대 같은 놈! 제1차 대전때의 중위 골동품.
승진도 못하는 멍청이 같으니라고. 중대장이라고? 지휘관의 자격이 없다.'
"너는 라에를 어떻게 생각하지?"
슈타인브레너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멀뚱멀뚱 거렸다. "그자는
우리들의 중대장이 아닌가?"
"그밖에는 어떤가 말야."
"그밖에라니?"
"아무것도 아냐." 뮤케는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일어섰다.
"이만하면 깊이가 충분하지요?"
가장 나이가 많은 소련군 포로의 독일어는 듣기가 거북할 정도였다.
흰 턱수염을 기르고 무척 파란 눈을 한 그는 칠십 세 가량 되어 보였다.
"닥쳐라, 볼셰비키. 물을 때만 대답해." 슈타인브레너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는 원기왕성했다. 그는 유난히 눈에 띄는 여자 게릴라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몹시 젊고 생기가 있어 보였다.
"더 깊이." 그레버가 말했다. 그는 슈타인브레너, 샤우워와 함께 포로를 감시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무덤이오?" 소련인이 다시 괴상한 독일어로 물었다.
슈타인브레너는 가볍게 구덩이로 뛰어 내리면서 노인의 빰을 세게 갈겼다.
"이놈의 늙은이 닥치라니까! 이 것이 무엇이냐고?"
슈타인브레너는 싱글싱글 웃었다. 파리의 날개를 뜯고 있는 어린이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무덤은 당신네들 것이 아냐." 그레버가 대신 말해주었다.
소련인은 꼼짝하지 않고 서서 슈타인브레너를 노려보고 있었다 .슈타인브레너도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상대방을 경계했다. 소련인이 자기에게
덤벼들 것이라고 단정하고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소련인을 사살했다할지라도 비난할 사람은 없다. 이 노인은 이미
사형선고를 받았기 때문에 정당방위의 여부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슈타인브레너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순간적으로 자기 자신을 망각하리만큼 소련인을 도발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장난인가, 살인을 합법적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 때문인가? 그레버는 판단이 서질
않았다.
소련인은 꼼짝하지 않았다. 피가 코에서 수염으로 흘러 내렸다. 만약에 내가 이와
똑같은 경우를 당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장 죽더라도 적에게 달려들 것인지,
단지 몇 시간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 굴욕을 참을 것인가) 그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노인은 천천히 허리를 숙여 곡괭이를 들었다. 슈타인브레너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사살할 자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노인은 그대로 작업을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슈타인브레너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거기에 드러누워."
노인은 곡괭이를 놓고 조용히 옆으로 누웠다. 슈타인브레너가 구덩이 밖으로
기어올랐을 때, 눈덩어리가 노인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길이는 충분한가?" 그는 그레버에게 물었다.
"충분해. 라이케는 키가 큰 편이 아니니까."
노인은 위를 향해 눈을 크게 떴다. 하늘의 푸른빛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입가의 흰
수염이 숨을 들이실 때마다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슈타인브레너는 잠시 동안
그대로 누워있게 했다.
"나와!" 이윽고 슈타인브레너는 명령했다.
노인이 천천히 올라왔다. 축축한 흙이 외투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하고 나서 슈타인브레너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너희들의 무덤을 파러 간다. 그렇게 깊이 팔 필요는 없어. 여름에
여우들이 너희들의 시체를 파먹어도 상관 없으니까."
이른 아침이었다. 한줄기의 빨간 띠가 지평선을 가르고 있었다. 밤사이에 다시
얼어붙은 눈이 바삭바삭 부서졌다.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묘혈은 매우 침침했다.
"제기랄!" 하고 샤우워는 투덜거렸다.
"별놈의 일을 다 시키는군. 도대체 왜 우리가 해야 하는가 말야? 어째서 보안부
녀석들에게는 시키지 않지? 뭐니뭐니해도 그자들은 총살의 전문가가 아닌가. 이런
일에까지 우리를 부려먹다니 벌써 세 번째야."
그레버는 손에 총을 들었다가 감촉이 너무 싸늘해서 장갑을 끼었다.
"보안부 녀석들은 후방에서 몹시 바쁠거야."
"맞았어. 그자들은 최일선에 나타나지 않아. 슈타인브레너가 전에 보안부에
있었지?"
"그놈은 강제 수용소에 있었어. 반장인가 뭔가 했었지."
다른 사병이 왔다. 잔뜩 신나 있는 것은 슈타인브레너뿐이었다.
"알겠나? 그것들 가운데 암컷이 한 마리 있어. 그것은 내게 맡겨."
"너에게 맡기면 어떻게 하겠단 말인가?" 샤우워가 물었다.
"여자와 재미 볼 시간이 어디 있어. 진작에 서둘렀어야지."
"해보았어." 하고 임메르만이 대답했다.
슈타인브레너는 화가 나서 뒤를 돌아보았다.
"누가 그 따위 말을 했지?"
"하지만 그녀가 끝내 뿌리쳤어."
"웃기지 마. 내가 그 빨간 암소를 해치우려고 마음만 먹으면 식은 죽 먹기니까."
"그렇게 간단치 않을 걸."
"그만들 둬." 샤우워는 담배를 씹어댔다.
"여자를 혼자서 사살하고 싶다면 제발 그렇게 해. 나는 그런 일같은 건 흥미없어."
"나 역시."그레버였다.
다른 병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날이 차츰 밝아졌다. 힐슈만은 시계를
보았다.
"이봐, 이런 일에 뽑힌 것을 감사히 생각해. 너의 눈물어린 유대인 근성을 뜯어
고치기 위해서는 좋은 기회지. 총살이라." 슈타인브레너는 탁 하고 침을 뱉았다.
"이런 깡패놈들에게는 아까울 정도야! 탄약의 낭비지. 목을 졸라 죽여야 돼."
"어디서 졸라 죽이지?"샤우워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에 나무라도 있는가? 우선 교수대라도 세울까? 그런데 그건 무엇으로
만들지?"
"왔다." 그레버가 냉정하게 말했다.
뮤케가 네 명의 소련인을 데리고 나타났다.
앞뒤에 두 명씩 병사가 붙어 있었다. 늙은 소련인이 앞장 서고 바로 뒤에 여자와
젊은 사나이들의 순서로 오고 있었다. 네 사람은 묵묵히 묘혈 앞에 한 줄로 섰다.
여자는 살짝 구덩이 속을 내려다보았다. 빨간색의 모사 치마를 입고 있었다.
제 1소대의 뮬러 소위가 중대장 숙소에서 왔다. 라에 중위 대신에 사형 집행에
참석하기 위해서.
우스운 얘기지만 형식적인 절차가 갖추어졌다. 네 사람의 소련인이 게릴라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정식으로 재판을 받고 살 수 있다는
가망도 없이 사형 선고를 언도받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확증할 필요가 있는가?
그들은 무기를 소지하고 있다고 고발당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장교 입회하에
총살당하기 직전인 것이다. 마치 그들이 불법이라도 한 것처럼.
뮬러 소위는 21세로서 이 중대에는 약 6주일 전에 배속되었다. 그는 사형수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면서 선고문을 읽었다.
그레버는 묘혈 앞에 침착한 태도로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젊고
어린애를 몇 명이라도 낳을 수 있을 것 같은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뮬러가 읽는 것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것이 자기의 사형선고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자기의 건강한 혈관을 강하게 맥박치고 있는 생명이 몇 분 후에는
영원히 정지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싸늘한
아침공기에 몸을 맡긴 채 서 있었다.
그레버는 뮤케가 뮬러에게 속삭이는 것을 보았다. 뮬러는 고개를 들었다.
"그건 나중에 하면 안되는가?"
"지금이 좋습니다, 소위님. 간단합니다."
"좋아 자네 좋을 대로 하게."
뮤케는 앞으로 나왔다.
"저자에게 구두를 벗으라고 해." 독일어를 아는 늙은 소련인에게 말하면서 젊은
포로를 가리켰다.
노인은 그 사나이에게 나지막한 어조로 말을 전했다. 깡마른 사나이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 듣지 못하고 있었다.
"야, 이놈아!" 뮤케가 소리를 질렀다.
"구두를 벗으란 말야!"
노인은 되풀이하여 말했다. 사내가 겨우 알아듣고 잽싸게 구두를 벗었다. 한쪽
구두를 벗을 때 다른 쪽의 다리가 균형을 잃어 비틀거렸다. '어째서 저리 서둘지?
한시라도 빨리 죽고 싶은 걸까?' 하고 그레버는 생각했다.
사내는 자기의 구두를 두 손에 들고 그것을 비굴한 태도로 내밀었다. 좋은
구두였다. 뮤케가 다시 호통을 치면서 옆을 가리켰다. 사나이는 구두를 그곳에 놓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더러운 붕대가 감긴 맨발로 눈 위에 섰다. 누런 발가락이
붕대를 뚫고 앞으로 나왔다. 사내는 멋적은 듯 발가락을 구부렸다.
뮤케는 다른 사람들도 천천히 조사했다. 여자가 끼고 있던 모피 장갑을 구두 옆에
갖다놓도록 명령했다. 그는 잠시 빨간 색 치마를 쳐다보았다. 슈타인브레너는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뮤케는 여자의 치마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라에가 자기 방에서
사형 집행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뒤로 물러났다.
여자가 소련어로 재빨리 지껄였다.
"소원을 물어 봐." 뮬러 소위의 얼굴이 몹시 창백했다. 그가 이런 자리에 참석한 건
처음이었다.
뮤케는 늙은 소련인에게 물었다.
"저 여자는 소원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당신네들을 저주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 여자는 당신들과 소련의 땅을 밟은 독일인들을 저주한다고 말하고 있소!
당신들의 자식도 저주하고 있소. 당신들이 우리를 사살하는 것처럼 우리의 자손들이
언젠가는 당신네들의 자손들을 사살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소."
"무례한 계집년 같으니라구." 뮤케는 여자를 노려보았다.
"저 여자에게는 어린애가 둘 있소. 나도 자식이 셋이오."
"뮤케, 이만하면 됐다." 뮬러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병사들은 차려 자세를 취했다. 그레버는 자기의 총에서 싸늘함을 느꼈다. 강철의
냉기가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감쌌다. 그의 곁에 힐슈만이 서 있었다. 비록
창백한 표정이었지만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레버는 제일 왼쪽의 포로를
겨누기로 했다.
최초로 사형집행 명령을 받았을 때는 공중을 향해서 발사했었다. 그것은 이미 옛날
이야기다. 그런 짓을 해 보았자 총살당하는 자에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다른
병사들도 일부러 과녁을 빗나가게 했었다. 결국 재사격을 해야만 했고 포로들은 두
번씩이나 공포의 순간을 느껴야 했다. 한 여자는 목숨을 살려주는 줄로 알고 무릎을
꿇어 눈물을 흘렸었다. 그는 그 여자를 다시 생각해 내는 것이 싫었다. 어쨌든 그런
일은 또 일어나지 않았다.
"발사 준비!"
그레버는 조준기를 통해 포로를 보았다. 흰 수염과 파란 눈을 한 노인이 보였다.
가늠자는 그의 얼굴을 둘로 나누었다. 그레버는 가늠자를 내렸다. 전에 누군가의
아래턱을 명중시킨 적이 있었지. 가슴을 겨누는 것이 안전했다. 그는 힐슈만이 총구를
위로 쳐드는 것을 보고 포로의 머리 위로 발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뮤케가 보고 있어. 정조준을 해." 앞을 보면서 속삭였다. 힐슈만은 총구를 약간
내렸다.
"발사!"
그레버는 노인이 몸을 일으켜 자기를 향해서 달려온다고 생각했다. 순간, 잔뜩
부풀어오른 듯하다가 벌떡 나가자빠졌다.
노인의 몸은 반쯤 무덤 안으로 던져지고 나머지는 구덩이 밖으로 나와 있었다. 다른
두 사나이는 자기가 서 있던 자리에 쳐 박혀 있었다. 구두를 빼앗긴 사나이는 최후의
순간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었다. 포로들은 아무도 결박을 하거나 눈을 가리지
않았었다.
그러한 절차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는 앞으로 쓰러졌으나 죽지는 않았다. 두 손을 짚고 몸을 일으키더니 얼굴을
들어 병사의 등허리를 노려보았다. 슈차인브레너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른 자들은 여자를 겨누지도 않았던 것이다.
늙은 소련인은 무덤 속에서 신음소리를 내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다만 여자만이
병사들을 노려보면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그나마 독일어를 아는 노인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여자는 더 이상 앞으로 전진할
수 없는 개구리처럼 팔을 쭉 뻗은 채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잠시도 쉬지 않고 욕설을
퍼부어댔다.
뮤케가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모르고 욕설을 퍼붓던 여자는 마침내 목에서 총구를
느꼈다. 여자가 재빨리 고개를 돌려 뮤케의 손등을 물었다. 뮤케는 비명을 지르면서
왼손으로 여자의 아래턱에 일격을 가하고는 여자의 목에 총을 발사했다.
"어째서 그렇게 서투른가!" 뮬러는 소리를 질렀다.
"조준할 방법도 모르나?"
"여자는 힐슈만의 담당입니다., 소위님." 슈타인브레너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힐슈만은 아냐." 그레버가 끼어 들었다.
"조용히 해!"
그는 뮬러를 힐끔 보았다. 뮬러는 창백한 표정이 되어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뮤케는
다른 포로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젊은 사나이의 귀에 되고 다시 한번 권총을
발사했다. 그는 권총을 거두었고 여자에게 물렸던 손등을 손수건으로 감았다.
"의무대가 어디지?"
"우측에 있는 세 번째 건물입니다, 소위님."
"가 보라고."
뮬러는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여자는 축축한 땅 위에 쓰러져 있었다.
"구덩이 속에 쓸어 넣고 흙을 덮어라."
그는 어쩐지 약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2
그날 밤, 천둥소리와 같은 굉음이 땅을 뒤흔들었다.
밤하늘에는 포화의 섬광이 번쩍번쩍 빛을 내며 포물선을 그었다. 열흘 전에 연대는
최전선으로부터 후퇴하고 지금은 예비대로 배치되고 있었다. 소련군은 시시각각으로
접근해왔다.
전선은 매일같이 이동했고 이제는 뚜렷한 경계조차 없었다. 소련군이 벌써 수
개월에 걸쳐 공격하고 있었으며 연대는 계속 후퇴만 했다.
그레버는 잠을 깼다. 요란한 소리 때문에 잠은 이미 멀리 달아났다. 그는 구두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밤공기는 신선하고 따뜻하기까지 했다. 오른쪽 숲속에서 포탄이 파열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낙화산 조명탄의 불꽃이 공중에 가볍게 뜨더니 밑으로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득한 저편에서 서치라이트가 비행기를 찾고 있었다.
그레버는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잔뜩 빛나고
있었다. 별은 그의 눈에 들어왔지만 어떤 감정도 일지 않았다. 그저 비행사에게는
좋은 밤이라고 생각했다.
"휴가를 즐기기에는 좋은 날씨지."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건넸다.
보초를 서고 있던 임메르만이었다. 연대는 예비대로 배치되고 있었지만 게릴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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