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누가 있다!" 그는 소리를 질렀다. 바닥을 파헤치면서 머리를 더듬었다. 머리가
잡히지 않았으므로 손을 잡아 당겼다.
"어디 있는지 말해 봐! 어디 있어?"
"여기야." 생매장된 사내는 거의 그의 귓전에서 속삭였다.
"당기지 마. 눌려있어."
손이 다시 움직였다. 그레버는 바닥을 파헤쳤다.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다! 누구 좀 와 줘!"
자리가 비좁아서 두 사람 이상 작업할 수가 없었다.
그레버는 슈타인브레너의 목소리를 들었다.
"저리 가! 얼굴을 밟지 마! 이쪽부터 파내자!"
그레버는 옆으로 비켰다. 동료들은 암흑 속에서도 민첩하게도 작업을 계속했다.
"이건, 누구나?" 샤우워가 물었다.
"누군지 모르겠어." 그레버는 허리를 숙였다.
사내는 입을 움직였으나 그레버는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기왓장을
들어내거나 바닥을 파헤치고 있었다.
"아직 살았나?" 슈타인브레너가 물었다.
그레버가 얼굴을 문질러 보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모르겠어. 이삼 분전에는 숨이 붙어 있었는데."
소리가 들려왔다. 그레버는 사내의 얼굴 가까이 대고 크게 외쳣다.
"지금 꺼내 줄게! 내 말이 들리나?"
그는 미세하나마 볼에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슈타인브레너와 샤우워와 슈나이더는
헉헉 숨을 내쉬며 바쁘게 움직였다.
"이젠 아무 소리도 없군."
샤우워는 야전삽으로 무엇인가를 내리쳤다.
"여기 큰 돌이 박혀서 꼼짝도 안 해. 불과 도구가 있어야겠어."
"불은 안돼!" 뮤케가 소리를 질렀다.
"성냥을 켜면 끝장이다."
공습중에 불을 켜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쯤은 우리도 잘 알고 있어!"
"이 상태로는 안되겠어. 앞이 보일 때까지 기다려야 해."
"그래."
그레버는 벽을 기대서서 하늘을 노려보았다. 아무 것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지만 이런 일은 무수히 많았다.
그는 묻힌 사내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먼지와 흙을 닦아내고 입술을
만지다가 손가락이 이에 가 닿았다. 살짝 손가락을 무는 게 느껴졌다. 차츰 세차게
깨물다가 갑자기 힘이 빠졌다.
"아직 살아 있어! " 그레버는 큰소리로 말했다.
"연장을 찾으러 사람이 갔다고 말해 줘."
그레버는 다시 입술을 만져 보았다. 이미 무감각해져 있었다. 그레버는 움직이지
않는 그의 손을 꼭 잡은 채로 공습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마침내 도구를 갖고 와서 생매장된 사내가 구조됐다. 그는 라메르스로 , 빼빼마르고
언제나 안경을 끼고 있던 병사였다. 1 미터 가량 떨어진 바닥에 뒹굴고 있는 안경이
보였다. 안경은 그대로 있었으나 라메르스는 죽어 있었다.
그레버는 슈나이더와 함께 보초를 섰다. 짙은 안개 속에서 화약 냄새가 자욱한
가운데 교회의 한쪽이 파괴되고 있었다. 중대장 숙소도 마찬가지였다. 라에는 죽었을
것이라고 그레버는 생각했다. 그러자 건물 뒤에서 껑충이는 그의 모습을 보였다. 그는
교회의 정리작업을 감독하고 있었다. 부상병이 몇 사람인가 생매장되고 있었다. 남은
사람들은 밖에 눕혀 놓았다. 그들은 맨땅에 모포나 천막을 깔아 놓은 위에 누워
있었다. 그들의 눈은 하늘을 향해 열려 있었다. 구제를 바람이 아니라 하늘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레버는 폭탄구멍이 크게 뚫어진 곳으로 갔다. 구멍 속에도 안개가 끼여들고
있었다.
"저것은 무덤으로 알맞겠군." 슈나이더가 말했다.
"저 속에 가득 찰 만큼 많이 죽었어."
그레버는 고개를 흔들었다.
"저걸 메울 흙은 어디서 나지?"
"구멍 옆을 긁으면 돼."
"그래도 무덤이 지면보다 낮을 거야. 새로 파는 것이 좋아."
슈나이더는 붉은 수염을 문질렀다.
"묘지는 지면보다 높아야만 하는가?"
"아니, 다만 습관적으로 그럴 거야."
그들은 함께 걸어갔다. 그레버는 라이케의 무덤에서 십자가가 사라져버린 걸
보았다. 폭풍으로 어딘가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슈나이더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휴가는 틀렸군."
두 사람은 귀를 기울였다. 전선은 갑자기 활기를 띠었다. 낙하산 조명탄과 로켓탄이
지평선을 향해 불꽃을 내뿜었다. 포화가 차츰 심해지고 규칙적으로 변해갔다. 지뢰의
폭발음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연속 집중 포격이군." 슈나이더가 말했다.
"우린 다시 전선으로 배치될 거야."
"그래."
그들은 다시 귀를 기울였다. 슈나이더의 말 그대로였다. 지금 들려오고 있는 것은
국지전이 아닌 것 같다. 격렬한 대포의 사전 공격이 불안정한 전선의 전면에 걸쳐
가해지고 있다. 내일 새벽에는 총공격이 시작될 것이다. 소련군은 2주일 전처럼
안개에 싸여서 전진해올 것이다. 그때 우리 중대는 마흔 두명이나 잃었다.
휴가는 날아가 버렸다. 사실, 귀가를 믿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부모님께도 알리지
않았다. 입대한 후로 겨우 2주일 동안의 휴가를 받았다. 벌써 2 년 전의 일이었고,
스무 살이 되었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허무할 뿐이었다.
"어느 쪽으로 돌 텐가?" 슈나이더가 물었다.
"어디든. 오른쪽으로 갈까?"
"좋아, 난 왼쪽을 돌아보지."
안개가 점점 짙어만 갔다. 마치 걸쭉한 수프 한가운데를 건너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표면을 슈나이더의 목이 헤엄쳐가고 있었다. 그레버는 마을 오른쪽을 돌아보았다.
마을은 안개 속에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끝머리에서 일고 있는
전선의 불꽃을 바라보았다. 포격은 열기를 더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탕! 탕! 총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슈나이더였다. 그때 낮게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허리를 낮추고 안개 속에서 총을 겨누었다.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디야?"
"여기다!"
그는 안개 위로 머리를 내밀다가 재빨리 옆으로 비켜섰다. 어디서고 총알이
날아오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가까운 곳에서 소리가 났다. 그러나 짙은 밤안개 때문에
좀처럼 거리를 측정할 수가 없었다. 서서히 슈타인브레너의 모습이 나타났다.
"개새끼들! 슈나이더의 머리를 쏘았어!"
게릴라들이 안개를 방패로 삼아 침투한 것이었다. 슈나이더의 붉은 수염이 좋은
표적이 되었다. 놈들은 모두 잠들었다고 단정한 모양이었다. 발굴 작업으로 놈들의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슈나이더를 사살했다.
"안개 때문에 더 이상 추적할 수 없었어!"
슈타인브레너의 얼굴은 안개에 젖어 축축해졌고 눈이 번쩍번쩍 빛났다.
"조를 편성해서 다시 순찰한다. 라에의 명령이다. 너무 멀리 가지 않도록."
"알았어."
그들은 서로를 분간할 수 있는 사이를 두고 앞으로 나갔다. 슈타인브레너는
날카롭게 안개를 훑어 내리며 미끄러지듯 전진했다. 그는 유능한 병사였다.
"한 놈 잡고 싶어." 그는 빠르게 속삭였다.
"이 속에서라면 멋지게 해치울 수 있을 거야. 찍소리도 못하게 놈들의 입에 헝겊을
쑤셔넣고 팔과 다리를 벌려놓은 다음에 시작하는 거야. 눈알을 뽑으려면 힘껏
잡아당겨야 해. 너는 잘 모를 거야."
"나도 알지." 그레버는 말했다.
그는 슈나이더를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에 그가 오른쪽으로 돌고 내가 왼쪽으로
갔었더라면 죽은 사람은 나다! 그러나 감동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군인은 우연히 살아남기도 하는 것이다.
다른 조와 교대할 때까지 찾아 헤맸지만 한 사람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일선에서
타타타 기관총 소리가 들려왔다. 공격이 개시되었던 것이다.
"드디어 시작되었다!" 슈타인브레너가 외쳤다.
"최전선에 있었더라면! 이런 공격이라면 보충병이 많이 필요하지. 2, 3일만 싸우면
하사관이 돼."
"아니면 전차에 깔려 빈대뗙이 되겠지."
"바보 같은 소리 마! 그따위로 생각했다간 출세는 꿈도 못 꾸지. 최전선이라고 다
죽지는 않아."
그들은 지하호로 기어 들어갔다. 슈타인브레너는 모포를 깔아 잠자리를 마련했다.
그레버는 그를 응시했다. 이 스무 살 난 청년은 고참병 열 사람이 해치운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혼자서 죽였다. 그것도 전투에서가 아닌, 후방의 강제 수용소에서. 특히
그만의 방법으로 무자비하게 살해한 걸 자랑으로 알고 있었다.
그레버는 잠을 자려고 애썼지만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전선의 굉음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슈타인브레너는 곧 잠이 들었다.
날이 밝았다. 전선은 혼란스럽고 들뜨고 있었다. 전차가 출동하고 남쪽의 진지는
이미 허물어졌다. 비행기가 하늘을 정찰하고 수송대가 평원을 달려갔다. 부상병이
후송되고 중대는 전원 대기 상태에 있었다.
10시에 그레버는 라에의 호출을 받았다. 중대장은 아직 남아있던 석조가옥의 한
구석을 숙소로 삼고 있었다. 방은 서늘했다. 테이블 위에는 알코올 램프와 커피가
놓여 있었다.
"자네의 휴가통지서가 왔어." 라에는 말했다.
"허가가 내렸어. 어때, 뜻밖이지?"
라에는 그레버에게 악수를 청했다.
"잘 다녀오게. 빨리 출발하라고."
그레버는 방에서 나와 사무실로 갔다. 사무병은 스탬프를 찍고 서류를 넘겨주었다.
"재수 좋은데!"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특별 휴가라! 이렇게 전투가 심한데!"
"내가 선택한 건 아니야."
그레버는 지하호로 들어갔다. 그는 소지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어머니에게 드릴 소련의 성상이 있었다.
힐슈만이 종이쪽지를 들고 그레버 앞에 서 있었다.
그렇다, 휴가가 취소 당한 것이다!
"출발하나?" 힐슈만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레버는 휴, 한숨을 쉬었다.
"이건 우리 집 주소야. 안부를 전해줄 수 없을까?"
"알았어." 그는 그것을 받았다.
그레버는 구급차의 운전석 옆에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 차는 마을을 우회하면서
짚단으로 표시한 도로를 달렸다. 교회 앞에서 중대가 정렬해 있었다.
"전선으로 출동하는 거야." 운전병이 말했다.
"큰일 났는 걸. 도대체 소련군은 어디서 많은 대포를 몰고 왔지?"
"아메리카야. 아니면 시베리아겠지. 시베리아에 공장이 많은 모양이야."
그레버는 장화에 모포를 끌어다가 덮었다. 순간, 자신이 탈주병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른 중대원들은 모두 여기 있는데 혼자 고국으로 돌아간다. 모두가 전선으로
출동해야 한다. 나는 휴가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가 쫓아와서 다시 끌고 가지나 않을까.
2, 3 킬로미터 가량 달리자 부상병을 실은 차가 도로에서 미끄러져 눈 속에 박혀
있는 모습이 보였다. 거기서 차를 세우고 차 안의 부상병들을 살펴보니 두 사람이
죽어 있었다. 시체를 내리고 눈 속에 묻혔던 사람들을 태웠다. 그레버는 세 사람을 다
태울 때까지 도와주었다. 두 명은 다리를 절단했고 한 명은 얼굴에 큰 부상을 입고
있었다. 뒤에 남겨진 사람들은 저주를 퍼붓거나 비명을 질러댔다. 그들도 모두
부상병이 갖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는 버려질 것 같은 공포감을.
그들은 계속 달렸다. 운전수는 등을 뒤로 젖혔다.
"두달 전이야. 기아가 고장났어. 차가 서 버렸지. 들것에 누워있던 우리는 모두 꽁꽁
얼어버렸어. 겨우 도착해서 보니 여섯 사람이 살아 있었어. 온몸이 언 채로."
그는 잎담배를 꺼내서 씹었다.
"걸을 수 있는 부상병들이 도로를 따라 걷고 있었어. 눈보라가 몰아치는
밤이었는데도. 그들이 우리 차에 덤벼들었어. 문이나 발판에 마치 벌떼처럼 매달리는
거야. 발길로 차 버렸지."
그레버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을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보이는 건 먼 하늘과 끝없이 펼쳐지는 벌판뿐이었다. 차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렸다. 한낮의 태양이 던지는 빛으로 새하얀 눈이 창백하게 보였다. 그때 갑자기
가슴에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비로소 죽음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 바퀴 자국이
남은 눈이 1 미터,1 미터 멀어져 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길이만큼
안전하다. 서쪽으로 향한, 지평선 저편에만 존재했던 안전이었다.
운전수가 기어를 바꾸려고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레버는 담배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 운전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나는 피우지 않아. 씹을 뿐이야."
5
열차가 정지했다. 위장한 정거장이 햇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정거장 주위에 있던
몇몇 집들은 이미 잿더미가 된 지 오래였다. 그 뒤로 임시로 세워진 막사는 지붕과
벽이 모두 위장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선로에는 차량들이 대기해 있었고 소련인
포로가 짐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이 역에서 지선이 본선과 연결되고 있었다.
부상병은 막사로 운반되었다. 걸을 수 있는 병사들은 벤치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특별휴가를 받은 병사가 서너 명 더 도착했다. 그들은 원대복귀가 두려워서
되도록 눈에 띄지 않도록 행동했다.
지루하고 초조한 시간이었다. 멀리서 비행기의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이
근처에 엄폐된 비행장이 있는 모양이다. 잠시 후, 비행편대가 정거장 위를 빙빙 돌면서
위로 상승하자 마치 종달새가 날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그레버는 잠시 깜박했다.
종달새. 평화.
"휴가증!"
그는 두 명의 헌병이 외치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들은 단 한번도 위험에 처한
적이 없는 것 같은 얼굴로 절도있게 행동하고 있었다. 군복은 깨끗했고 무기가
번들번들 빛을 발했다. 그들은 지나치게 씩씩했으며 건장해 보였다.
병사들은 묵묵히 휴가증명서를 꺼냈다. 헌병들은 하나하나 조사하고 나서 급료부를
요구했다.
"너희들은 셋째 막사에서 식사를 한다." 나이 많은 헌병이 말했다.
"깨끗이 씻어라. 도대체 그 꼴들이 뭐냐! 돼지새끼처럼 하고 고향에 가고 싶나?"
그들은 셋째 막사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개새끼들!" 텁석부리 사내가 씩씩거렸다.
"말이야 번지르르하지. 후방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우리를 죄인 취급해?"
"저놈들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소속 연대를 잃은 자들을 몇 십명이나 사살했어." 다른
병사가 말했다.
"자넨 스탈린그라드에 있었나?"
"거기 있었다면 지금 여기 있을 수 있겠나? 그 지옥 구덩이에선 단 한 사람도
도망칠 수 없었어."
"이봐!" 나이가 많은 하사관이 말했다.
"너희들 일선에선 제멋대로 지껄였지만, 죽고 싶지 않으면 지금부터 입 다물어.
알았나?"
그들은 식기를 들고 줄을 서서 오랫동안 기다렸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꼼짝않고 있었다. 이런 일에는 이미 만성이 되어 있었다. 마침내 고기와 야채가
조금씩 섞이고 감자조각이 몇 개 떠 있는 수프를 한 국자씩 받았다.
헌병들을 욕했던 병사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헌병들도 이런 걸 먹을까?"
"야, 쓸데없는 걱정마." 하사관이 비웃었다.
그레버는 수프를 마셨다. 집에 돌아가면 어머니가 요리해 주실거야.
그들은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헌병이 재조사를 시작했다. 부상병들이
쉴 새 없이 도착했다. 새로운 일단이 도착할 때마다 귀향장병들은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뒤에 남겨지게 될 것 같아서.
마침내 자정이 지나서야 열차가 편성되었다. 날씨는 더욱 추워지고 하늘에는 별들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은 별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전쟁터에서 이미 잊고 지내던
것이었다. 단지 전쟁과 결부되어 좋고 나쁘고가 결정되었다.
부상병들이 먼저 열차에 실려졌다. 그들 중 세 명이 다시 내려 오게 되었다. 그
동안에 죽어 있었던 것이다. 들것은 역 구내에 방치되어 사자들의 얼굴이 드러나고
있었다.
다음에는 보행이 가능한 부상자들 차례였다. 그들은 세밀하게 조사를 받았다.
저들과 함께 타지 말아야겠다고 그레버는 생각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머리 위에서
비행기의 폭음이 들려왔다. 아군기라는 것을 알았지만 자꾸만 몸이 떨렸다. 전선에
있을 때보다도 더 두려웠다.
"휴가증!"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귀향장병들은 급히 서둘렀다. 헌병이 마지막 점검 때 발급했던 종이쪽지를 다시
받고 있었다. 그들은 재빨리 열차에 올라탔다. 이미 부상병 몇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귀향장병들은 한 곳에 뭉쳐 있었다. 헌병이 다시 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기차에서
내려 정렬한 다음에 다른 칸으로 끌려갔다. 거기에도 부상병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레버는 되도록이면 창가에서 떨어져 가운데로 갔다. 포탄의 파편이 날아 와 무슨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기차는 출발하지 않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모두들 발차만을 바라고 있었다. 이윽고
밖이 조용해졌다. 두 사람의 헌병이 병사 한 명을 양쪽에서 잡고 가는 것이 보였다.
소련인 한 패가 탄약상자를 나르고 있었다. 친위대 두세 명이 큰소리로 떠들며
다가왔다. 그래도 기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부상병들이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렇게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레버는 머리를 뒤로 기댔다. 기차가 출발하면 잠을 잘 생각으로 눈을 감았다.
잠은 올 것 같지 않았다. 소음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다른
사람들의 눈이 들어왔다. 오로지 눈동자만이 불안하게 반짝반짝했다.
기차가 쾅 하고 움직였다가 다시 정지했다.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것이 두 개 밑으로 내려졌다. 또 두 사람이 죽은 것이다.
산 사람을 위하여 자리 두 개가 생겼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헌병, 친위대, 포로 갑자기 평원이 나타났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기차는 다시 정지할 것이다. 그러나 기차는 계속
미끄러지듯 나아갔으며 바퀴의 불규칙한 동요가 차츰 규칙적인 율동으로 변하고
있었다. 탱크와 대포가 보였다. 물끄러미 기차를 바라보고 있는 군인들. 그레버는 몹시
피로했다. 집 집으로 가는 것이다. 그는 웬지 기뻐할 수가 없었다.
눈이 내리는 아침이었다. 그들은 어느 정거장에서 커피를 배급받았다. 정거장은
작은 도시의 끝에 있었다. 도시라고 해봐야 텅 비었고 시체가 들것에 실려 운반되고
있었다. 기차는 다른 선로로 바꾸는 중이었다. 그레버는 커피 대용품을 받아 자리로
돌아왔다. 마음놓고 빵을 타러 갈 수도 없었다.
헌병들이 기차 안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경상자들을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경상자는 이곳의 위수병원에 남아 있어야만 했다. 이 소식이 빠르게 열차
안으로 퍼졌다. 팔을 다친 병사들은 몸을 숨기기 위하여 변소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앞 다투어 안으로 들어가려고 필사적이었다. 문이 열리려는 순간, 그들은 미친 듯이
서로 끌어당기고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왔다!" 갑자기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허겁지겁 흩어졌다. 두 사람이 변소 안으로 들어가서 쾅하고 문을 닫았다.
이 소동으로 쓰러진 병사는 찰과상을 입은 팔을 노려보고 있었다. 빨간 오점이 붕대에
번져 점점 확대되고 있었다. 또 한 사내는 승강구와는 반대쪽의 문을 열고 고심하던
끝에 눈보라 속으로 나갔다. 그는 기차의 바깥쪽에 몸을 착 붙이고 숨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별수 없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문을 닫아!" 누군지 낮게 외쳤다.
"닫지 않으면 발각된다.!"
그레버는 문을 닫아 주었다. 밑에 매달려 있는 사내의 창백한 얼굴이 살짝 보였다.
"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단 말이야!" 붕대에 뭉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부상병이 말했다.
"난 두 번씩이나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는데, 그때마다 전선으로 돌아가야 했어. 난
집에 가고 싶어. 그만한 일은 충분히 했단 말이야"
그는 다치지도 않은 특별 휴가병들을 증오스런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조사관이 왔다. 두 사람은 차 안을 조사하고 다른 두 사람이
밖에서 잔류 명령을 받은 부상병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 중의 하나는 하급
군의관이었다. "나가." 그는 부상 진단서를 재빨리 훑어보고 나서 무심히 말하고 다음
사람에게로 갔다.
한 사람이 명령을 받고도 꼼짝하지 않았다.
"나가란 말야, 영감." 군의관의 뒤를 따르던 헌병이 말했다.
"안 들려?"
사내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의 어깨에 걸린 붕대가 보였다.
"나가! 밖으로 나가!" 헌병이 다시 소리쳤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무 것도
귀에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정면만 노려보고 있었다. 헌병은 그의 앞에 두 팔을
벌리고 섰다.
"너! 특별 호출을 받고 싶나? 일어서!"
사내는 여전히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다.
"일어서!" 헌병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말하는 소리가 안 들리나? 이 새끼, 넌 군법회의감이야, 알았나?"
"걱정하지 마라!" 젊은 군의관이 말했다.
"미리 걱정하지 말고." 군의관은 장미빛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넌 피가 흐르고 있다." 군의관은 변소 앞에서 다투고 있던 다른 부상병에게
말했다.
"붕대를 갈아야 되니깐 밖으로 나가!"
"나는." 사내는 뭔지 말하고 싶어했다. 그때 다른 헌병이 군의관이 붕대를
갈아야 된다고 말한 병사에게 달려들어 한쪽 팔을 잡는 것이 보였다. 헌병들은 그
병사를 끌어내서 일으키고 있었다. 병사는 얼굴은 움직이지도 않고 가느다란 비명만
질렀다. 지원 온 헌병이 이번에는 그의 허리를 잡고 가벼운 짐짝을 들어내는 것처럼
차 밖으로 밀어냈다. 그는 기계적으로 행동했다. 병사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군의관이 물었다.
"붕대를 갈면 이 기차를 다시 탈 수 있습니까, 군의관님?" 피를 흘리며 사내가
물었다.
"잘 조사하기로 하지. 그렇게 될 거야. 여하튼 붕대를 다시 감아야 해."
사내는 비참한 얼굴로 나갔다. 그는 하급 군의관을 '군의관님'이라고 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헌병은 변소문을 열려고 했다.
"그렇지." 그는 멸시하듯이 말했다.
"이놈들은 항상 얼빠진 생각만 하고 있어."
"문을 열어!" 큰 소리로 명령했다.
문이 열리더니 병사 한 명이 밖으로 나왔다.
"이 새끼, 교활한 놈!" 헌병이 호통을 쳤다.
"왜 거기에 처박혀 있었나. 숨박꼭질이라도 하나?"
"설사에 걸렸습니다. 대개 변소라는 건 그 때문에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흥, 하필이면 지금 말이지?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병사는 상의를 올려 보였다. 거기에는 철십자 일급 훈장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일부러 헌병의 가슴을 쳐다보았다. 물론 훈장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당신이라면 믿을 거야."
헌병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군의가 끼여들어서 병사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나가 주게."
"내가 어떤지 아직 보지도 않았소."
"붕대를 보면 알 수 있어. 어서 나가!"
"알았소."
병사는 히죽히죽 웃었다.
"자, 이 칸은 이제 끝났지?" 군의는 신경질적으로 헌병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헌병은 특별 휴가병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들은 각자 증명서를
손에 들고 있었다.
"네, 전부 끝났습니다."
변소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병사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의 얼굴에서 땀이 비오듯
흐르고 있었다. 그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친구는 갔나?" 그는 거의 속삭였다.
"그런 모양이야."
병사는 자리에 앉아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마에 식은 땀이 흘렀다.
"난 그를 위해서 기도하겠어." 마침내 그는 입을 열었다.
모두 고개를 들었다.
"뭐?" 누군가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자넨 헌병을 위해서 기도하겠단 말인가?"
"아니. 나와 함께 변소에 숨어 있던 그 친구를 위해서야. 그는 나더러 변소에
남으라고 했어. 자기가 멋지게 처리하겠다고. 그 녀석, 어디 있지?"
"밖에. 그 녀석, 멋지게 했어. 그 새끼들의 약을 잔뜩 올려놓고도 뒷조사를 받지
않게 했지."
"난 그를 위해서 기도하겠어."
"아아, 좋아. 마음대로 해."
"진심이야. 내 이름은 율겐스야. 난 정말 그를 위해 기도를 드릴 테야."
"그래 좋아! 그만 잠자코 있어. 내일 기도하자고! 아니면 기차가 떠날 때까지
기다려." 누군가가 말했다.
"기도를 하겠어.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집에 가야 해. 다시 병원으로 끌려가면
다시는 집에 갈 수 없어. 난 독일로 돌아가야 해. 아낸 겨우 설흔 여섯 살인데 암에
걸렸어."
"그는 고뇌에 가득 찬 눈초리로 한 사람씩 번갈아서 보았다. 한 사람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런 일은 너무 흔했다.
기차는 한 시간 후에 출발했다. 문 밖으로 나간 병사는 두 번 다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아마도 붙잡혔을 것이라고 그레버는 생각했다.
정오에 하사관이 한 명 들어왔다.
"이발하고 싶은 사람은 없는가?"
"뭐라고?"
"나는 이발사다. 프랑스에서 들여온 고급 비누도 가지고 있지."
"기차가 달리고 있는데, 이발할 수 있나?"
"물론이지. 난 지금 장교실에서 오는 길이야."
"얼마야?"
"50페니히. 반 마르크지. 이 정도면 싼 편이지."
"좋다." 한 사람이 돈을 꺼냈다.
"조금이라도 피가 보이면 돈을 안 주겠어."
이발사는 면도기를 꺼내고 주머니에서 빗과 가위를 꺼냈다. 머리칼을 담아 놓는
커다란 봉지도 있었다. 그는 창가에 서서 면도날을 갈기 시작했다. 새하얀 비누
거품도 만들어졌다. 그는 능숙한 솜씨로 가위를 놀렸다.
세 사람째 깎고 그레버가 네 번째로 앉았다. 이미 끝난 세 사람은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햇볕에 타 붉게 얼룩이 지고 비누거품으로 하얗게 된 턱이
햇빛에 빛나고 있었다. 반은 군인의 모습이었고, 나머지는 행복한 가장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레버는 면도날이 살을 스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 순간만은 집에라도 있는
것처럼 마음이 들떴다. 이발사가 상관이기 때문에 더욱더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깨끗한 양복이라도 입고 있는 느낌이었다.
기차는 오후에 다시 한 번 정거했다. 밖에는 야전 취사차가 와 있었다. 모두들
나가서 자기 몫을 받아 가지고 왔다. 율겐스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는 마치 다치지
않은 오른손 바닥에 눈에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손을 맞대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밤이 되어서야 국경에 도착했다. 모두 기차에서 내렸다. 휴가병들은 한곳에
모였다가 소독실로 끌려갔다. 옷을 벗어주고 벌거벗은 채로 앉아 몸에 붙은 이를
잡았다. 방안은 따뜻했으며 석탄산의 냄새가 강하게 나는 비누도 있었다.
그레버는 정말 오랜만에 따뜻한 방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전선에서도 이따금
난로를 피우는 때가 있었다. 그러나 불 가까이 가야만 온가를 느낄 수가 있었다.
방안은 구석까지 훈훈했으며 나중에는 뼈마디까지 부드러워졌다.
그는 멍청히 앉아 이를 잡아 죽였다. 그의 머리카락에는 이가 득실득실하였다.
온몸이 풀리면서 졸음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전우들의 창백한 육체와 동상에 걸린
발과 손이 보였다. 그들은 군인이 아니라 벌거숭이 인간이었을 뿐이다. 화제가 갑자기
바뀌었다. 이미 전쟁 따위와는 무관했다. 그들은 먹을 것과 여자 외에는 흥미가
없었다.
"마누라에게는 애가 있어." 베른하르트라는 사내가 말했다. 그는 그레버 곁에 앉아
손거울을 이용해 겨드랑이의 털에 붙은 이를 잡고 있었다.
"난 두 해나 집에 못 갔는데 태어난 지 14개월이나 됐더군. 그 여자는 내
자식이라고 우겨대는 거야. 내 어머니는 소련인의 피를 받은 것 같다고 편지에
적었어. 게다가 그녀는 10개월 전부터야 어린애에 대한 얘기를 적어 보내기 시작했지.
어떻게 생각하지?"
"뭐, 흔한 일이지." 대머리 사내가 관심 없다는 투로 말했다.
"시골에는 소련 놈들과 붙어서 생긴 애들이 얼마든지 있어."
"난, 그런 화냥년은 쫓아내 버린다." 다리에 붕대를 감고 있던 병사가 참견을 했다.
"더럽거든."
"더러워? 그게 무슨 뜻이지?" 대머리의 사내가 어처구니가 없었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전시에 그런 일은 어쩔 수 없어. 애는 사내인가, 계집애인가?"
"사내. 여편네는 나를 닮았다고 썼더군."
"사내라면 기르는 것이 좋아. 농장에서는 항상 일손이 모자라니까."
"절반은 소련인이야."
"상관 있나? 소련인은 아리아인이야. 조국은 군인을 많이 필요해."
베른하르트는 거울을 치웠다.
"그리 간단치만은 않아. 네가 그런 일을 당해도 그렇게 말할 건가?"
"그럼 생산요원인 고향의 황소 같은 놈들이 네 마누라에게 애를 낳게 하는 편이
좋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아."
"그러면 돼잖아?"
"그녀는 나를 기다릴 수도 있었어." 베른하르트는 멋적다는 듯이 말했다.
대머리는 어깨를 움츠렸다.
"기다리는 여자도 있고 기다리지 않는 여자도 있어. 몇 년씩 집을 비우면 자기
마음대로 안되는 법이니까."
"넌, 결혼했나?"
"아니. 다행히도 난 미혼이야."
"소련인은 아리아인이 아냐." 지금까지 듣고만 있던 생쥐 같은 남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모두가 그를 보았다.
"그건 잘못 알고 있는 거야." 대머리가 반박했다.
"그자들은 아리아인 족이다. 그들도 한때는 우리와 동맹국어였어."
"놈들은 야만족이야. 볼셰비키 야만족인 것만은 분명해."
"너희들, 둘 다 틀린다." 털복숭이 사내가 말했다.
"소련인이 우리와 동맹을 맺고 있을 때는 하등 인종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래."
"그렇다면 아이를 어떻게 하지?"
"조국에 인도하지." 생쥐가 권위를 내세우며 말했다.
"고통없는 안락사다. 방법이 있겠나?"
"그럼 아내는?"
"그건 당국에서 알아서 할 일이야. 낙인을 찍거나 삭발을 하거나 강제수용소를
보내거나 교수대겠지."
"당국은 마누라에게 아직 아무 짓도 안 했어." 베른하르트가 말했다.
"당국에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거야."
"알고 있어. 어머니가 밀고했거든."
"그래? 당국도 병이 전염되어 썩어버렸군. 그놈들도 강제수용소나 보내지. 아니,
교수대가 좋을까?"
"아아, 제발 날 좀 가만 내버려둬."
베른하르트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때까지 방안을 왔다 갔다 하던 사내가 그들에게로 왔다.
"분명한 건 우리들은 초인이고 다른 놈들은 모조리 하등 인종이다. 지금 보통
인간은 누굴까?"
"스웨덴인." 대머리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아니면, 스위스인이다."
"천만에, 야만인이야." 저음이 말했다.
"도대체 백색 야만인이란 있을 수가 없어." 생쥐가 응수했다.
"없다고?" 저음은 그를 노려보았다.
그레버는 꾸벅꾸벅 졸았다. 저마다 여자에 대한 화제로 핏대를 올리는 중이었다.
그는 여자에 대한 상식이 빈약했다. 그들의 인종론은 그가 사람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는 것과 판이하게 달랐다. 사람은 각계나 출산의 능력 따위로 구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자기가 참전했던 국가의 매춘부 몇 명밖에는 거의 여자를 모르고
있었다. 그 여자들은 독일의 여자 청년단들처럼 사무적이었다. 그러나 매춘은 그
여자들에게는 하나의 직업이었다.
그들은 옷을 원래대로 입었다. 갑자기 다시 사병이 되고 병장이 되고 상사가 되고
하사관이 되었다. 소련인의 아이가 생긴 사나이와 저음의 계급은 하사관이었다.
생쥐는 호위병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하사관이란 사실을 알자 몸이 움츠려들면서
침묵을 지켰다. 그레버는 상의를 살펴보았다. 아직 따뜻하고 초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그들은 막사로 전원 집합했다. 나치스의 정치장교가 일장 연설을 했다. 그는 뒤에
총통의 사진이 걸려있는 연단에 서서 '지금 조국으로 돌아가려는 제군들은 중대한
책임을 지니고 있다.'는 말부터 시작했다.
"전선의 상황을 일체 말해서는 안된다. 정세, 위치, 군대 배치, 이동에 대해서도
절대로 입에 담지 마라. 도처에 스파이가 침투하고 있다. 침묵을 지키는 것만이
안전하다. 함부로 비밀을 누설시킨다면 엄중한 처벌을 받을 것을 각오하라. 쓸데없는
비판도 반역행위이다. 전쟁은 총통의 지휘를 받는다. 정세는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
소련군은 섬멸 직전에 놓여 있다. 아군은 반격을 가하고 있다. 군대에 대한 보급은
일급이며 사기는 왕성하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지명이나 군대의 위치를 발설하는
건 반역죄이다. 민심 교란도 마찬가지이다."
장교는 일단 연설을 중단했다. 그러나 갑자기 어조를 바꾸어 말했다. "총통께서는
귀대 장병들에게 특별히 선물을 하사 하셨다. 식료품 꾸러미를 하나씩 줄 것이다.
이것은 군대의 보급은 윤택하며 전쟁 중에라도 선물을 가지고 갈 수 있다는 증거로서
고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반드시 전달해야 한다. 만약에 도중에 혼자서 먹어치우면
처벌을 받는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각자 목적지의 정거장에서 조사를 실시한다.
하이 히틀러!"
모두들 차려 자세를 취했다. 그레버는 국가를 합창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도 노래하지 않고 있었다.
"라인란트 지방의 휴가병은 삼 보 앞으로!"
그의 생각과는 다른 명령이 내려졌다.
몇몇 병사가 앞으로 나갔다.
"라인란트 지방의 휴가는 취소한다." 장교는 사무적으로 말했다.
그는 맨 앞에 서 있는 병사를 바라보았다.
"넌, 그럼 어디로 가겠나?"
"쾰른입니다."
"라인란트는 제한한다고 지금 말했잖아. 어디로 가고 싶나?"
"쾰른입니다." 병사는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저는 쾰른 출신입니다."
"쾰른에는 갈 수 없어. 그래도 모르겠니! 그 대신 어디로 가냐고?"
"다른 도시는 가고 싶지도 않습니다. 처자가 쾰른에 있습니다. 휴가 증명서는
쾰른행으로 되어 있습니다."
"쾰른은 안된다. 당분간 쾰른으로 가는 건 금지됐다."
"금지라고요?" 병사는 깜짝 놀랐다.
"왜요?"
"야, 너 미쳤나? 도대체 질문은 네가 할 일인가, 당국에서 할 일인가?"
대위가 와서 장교에게 귓속말을 했다. 장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함부르크와 알사스의 휴가병은 앞으로!"
다들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라인란트 출신은 이곳에 남아라! 나머지는 선물 푸대를 받도록. 좌향좌! 앞으로
갓!"
휴가병은 정거장 앞에 서 있었다. 잠시 후 라인란트 출신들이 걸어왔다.
"어떻게 되었지?" 저음이 물었다.
"네가 들은 대로."
"그럼 어디로 갈 건가?"
"로덴부르크로. 거긴 누님이 살고 있어. 도대체 로덴부르크에 가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내 가족은 쾰른에 살고 있었어. 쾰른은 왜 못 가는거지?"
"모두들 같이 로덴부르크에 있을 거야."
"그렇지 않아. 내 마누라와 누님은 도저히 함께 살 수 없어. 대체 쾰른은 어떻게 된
걸까?"
그는 주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눈물이 괴고 두꺼운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다들 집에 돌아가는데 난 왜 못 가는가 말야? 마누라와 자식들은 어디 있는
거야?"
"잠깐만." 저음이 말했다.
"별 수가 없어. 아내에게 전보를 치게. 그럼, 로덴부르크에서 만날 수 있어."
"여비는 누가 지불해 주지? 잠은 어디에서 자고?"
"네가 쾰른에 갈 수 없다면 네 마누라도 절대로 그 곳에서 나올 수 없어." 생쥐가
말했다.
"확실해. 규칙이란 건 대개 그런 거니까."
"어째서 그곳을 나올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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