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소설&드라마

레마르크 作 - 사랑할때와 죽을 때 - 14

淸山에 2011. 9. 3. 16:08
 

   **

 

  

걸음으로 뛰어갔다. 그레버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다보고 손을 흔들었다. 이윽고 광장의 끝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레버는 전선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전선에서는 일단 작별하고
나면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절대로 알 수 없다. 이런 긴장을 행복한 신혼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덟 시에 폴만이 집에서 나왔다.
  "자네 먹을 거라도 있는가? 빵은 조금 있는데."
  "고맙습니다. 우린 배불리 먹었습니다. 카타리네 교회에 다녀올 동안 짐을
맡아주시겠습니까?"
  "좋아."
  그레버는 짐을 옮겼다. 요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자네가 돌아왔을 때, 내가 없을지도 몰라. 천천히 두 번, 그리고 재빨리 두 번
노크를 해. 요셉이 열어줄 테니까."
  "집시의 생활과 마찬가지입니다.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폴만은 지쳤다는 듯이 희미하게 웃었다.
  "요셉은 그런 생활을 3 년간이나 계속하고 있어. 처음 몇 개월 동안은 전차 속에서
밤을 세웠지. 밤새껏 빙빙 도는 거야. 그것도 공습이 있기 전 얘기지, 지금은 그렇게
할 수도 없어."
  그레버는 배낭에서 쇠고기 통조림을 한 개 꺼내서 폴만에게 주었다.
  "남은 겁니다. 요셉에게 주십시오."
  "고기인가? 자네도 필요할 텐데?"
  "괜찮습니다. 그에게 주십시오. 그런 사람들이 살아남아야 합니다."
  노인은 잠자코 있다가 구석에 놓여 있던 지구의를 빙그르르 돌렸다.
  "여기를 보게. 이게 독일이야. 엄지손가락으로 가려버릴 수도 있어. 지구의 미세한
일부분이지."
  "그야 그렇죠. 그렇지만 그 일부분이 세계의 큰 부분을 정복했습니다."
  "비록 정복은 했지만 신망은 얻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가 정복한 부분을 그대로 차지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10
내지 20 , 아니면 50 . 승리는 유력한 설득자도 등장시킬 겁니다."
  "우리는 승리하지 못했어."
  "그것은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될 수 있다."
  폴만은 지구의를 계속 돌리고 있었다.
  "세계는 정지하고 있지는 않아. 일시적으로 자기의 조국에게 절망했다고 세계를
믿지 않으면 안된다. 일식이라는 게 있긴 하지만 밤이 영구히 지속될 수 없지. 적어도
이 지구상에서는 절대로."
  폴만은 다시 지구의를 반대로 돌렸다.
  "자네는 다시 시작할 만한 일이 남았느냐고 물었다. 교회는 소수의 어부들과 카타콤
안의 몇몇 충실한 사람들, 로마의 투기장에서 살아 남은 소수인들로 시작됐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나치는 뮌헨에서 맥주를 마시던 소수의 광신자로부터
시작됐습니다."
  폴만은 싱긋 웃었다.
  "그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전제정치가 오래 계속되는 법은 없어. 인류는 편안한
대로를 걸어서 진보해오진 않았어. 항상 밀거나 찌르고 전진이나 후퇴, 경련을
일으키면서 한 발자국씩 내디딘 거야. 우리들 인간은 너무 교만했어. 우리는
피투성이의 과거를 정복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난 나가 봐야 해." 그는 모자를
들었다.
  "이건 선생님께서 주신 스위스의 그림책입니다. 비에 젖었습니다. 전 꿈과 희망을
잃었었지만 이 책을 보고 되찾았습니다."
  "잃어버린 꿈을 다시 찾을 필요는 없어."
  "있습니다. 그밖에 또 무엇이 있을 수 있습니까?"
  "신념이다. 꿈은 언제라도 새롭게 창조할 수 있어."
  "그렇군요.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목을 매어 죽는 편이 더 현명할 것입니다."
  "자네는 아직 젊어." 폴만은 외투를 입었다.
  "이상하다 나는 청춘이라는 걸 전혀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봤어."
  "저도 그랬습니다."
  요셉의 말이 옳았다. 카타리네 교회의 집사는 짐을 맡아주었다. 그레버는 배낭을
그곳에 맡기고 주택과를 찾아갔다. 주택과는 학교의 표본실로 옮겨져 있었다.
표본실에는 지도와 진열품을 나열한 유리상자가 아직도 보존되어 있었다. 유리상자를
통해서 알코올병에 담긴 파충류들이 보였다. 직원은 매우 친절한 백발의 부인이었다.
  "당신의 이름을 임시수용소의 명단에 기입해 두겠어요. 주소가 있나요?"
  "없습니다."
  "그러면 가끔씩 문의해 보세요."
  "도움을 줄 수 있습니까?"
  "어려워요. 당신보다 먼저 신청한 사람이 6000 명은 돼요. 직접 찾아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는 얀푸라츠로 돌아와 폴만의 방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잠시 기다렸다가 남아있는 엘리자베스의 물건을 확인하기 위해서
마리가로 갔다.
  엘리자베스의 아파트는 문지기가 살던 층까지 불에 타 있었다. 방금 소방대가
다녀갔는지 여기저기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엘리자베스의 소지품은 물론이고
밖으로 들어냈던 안락의자도 남아있지 않았다.
  문지기가 자기 아파트의 커튼 뒤에 있는 것이 보였다. 그레버는 문지기와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옛날의 일이었으며 이제 새삼스럽게 지킬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알폰스를 만나기로 결심했다. 어쨌든 양식이 필요했다.
 
  단지 그 집만이 폐허가 되어 있었다. 황수선화가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빛났으며
나무들은 바람에 흔들렸다. 그렇게 거리는 아침햇살을 받으며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빈딩그의 집만이 까맣게 타 정원에 생긴 폭탄구멍을 향하여 기울어져 있었다.
구멍 속에는 더러운 물이 잔뜩 고여서 그 속으로 파란 하늘이 들여다보였다.
  그레버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꼼짝않고 서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알폰스에게만은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단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천천히
건물에 접근했다. 그 화려했던 수영장은 형태가 완전히 무너지고 사슴의 뿔이 풀밭
위에 서 있었으며 고급 융단이 야만족 정복자의 깃발처럼 나뭇가지에 걸려 펄럭였다.
나폴레옹 브랜디병이 화단에서 뒹굴었다.
  그레버는 술병을 잘 살펴보고 나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뒤로 돌아갔다. 부엌의 입구는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다. 문을 열자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기척이 들렸다.
  "크라이네르트 부인입니까?" 그는 큰소리로 물었다.
  잠시 후, 대답 대신에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더니 가정부가 밖으로 나왔다.
  "불쌍하신 주인 어른! 그렇게도 친절하셨는데!"
  "왜 그러오? 그 사람이 부상이라도?"
  "죽었어요. 그분은 돌아가셨어요. 그렇게 좋은 분이었는데!"
  "죽었어?"
  "주인께서는 지하실에 피신해 계셨는데 그 지하실까지 파괴되었습니다."
  "이 집 지하실은 대형폭탄엔 견디지 못합니다. 그런데 왜 사이델푸라츠의 방공호로
가지 않았죠? 여기서 얼마 걸리지도 않는데."
  "주인께선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저."
  크라이네르트 부인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여자 손님이 계셨어요."
  "뭐요? 대낮에?"
  "그날 밤부터 여기 머물고 있었죠. 블론드 머리의 몸집이 큰 부인이었지요.
대장님은 그 부인을 좋아하셨답니다. 제가 치킨 요리를 갖다 드리고 나서 공습이
시작됐어요."
  "그럼, 그 부인도 죽었소?"
  ". 대장님은 파자마를 입은 채로, 부인은 얇은 잠옷을 입고 있었어요. 그런
모습으로 발견되었지요. 저로선 어떻게 할 수도 없었죠. 대장님의 시체가 그런 식으로
발견되다니."
  "그런 것은 상관없소. 그보다 더 훌륭하게 죽을 수 있는지 모르겠군."
  "하지만 너무 갑자기 당한 일이라."
  "그것은 90이 되어도 마찬가지요. 장례식은 언제요?"
  "모레 9시입니다. 벌써 입관을 했지요. 보시겠어요?"
  "어디 있소?"
  "지하실 창고에 있습니다. 집의 뒤쪽으로는 정면에 비해 피해가 거의 없는
편이지요."
  그들은 부엌을 지나서 지하실로 갔다. 지하실은 깨어진 유리조각들이 한쪽 구석에
모아져 있고 바닥에 쏟아진 포도주와 통조림 냄새로 가득했다. 지하실 한가운데에
관이 안치되어 있었다.
  "어떻게 관을 금방 구했소?"
  "당에서 마련해 주셨습니다."
  "장례식은 여기서 하오?"
  "그렇습니다."
  "나도 참석하겠소."
  "돌아가신 대장님께서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그레버는 부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생전에 대장님은 항상 당신을 좋아하고 반기셨지요."
  "그렇소.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대장님을 시기하지 않는 사람은 당신뿐이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또 당신은 일선
군인이시고."
  그레버는 잠깐 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조금 후회가 되었지만 아무런 느낌도 안
드는 자신이 울고 있는 여자 앞에서 부끄럽다는 생각을 잠깐 했을 뿐이다.
  "이것을 모두 어떻게 할 생각이오?" 그는 저장품을 보았다.
  "필요한 대로 얼마든지 가져가세요. 어차피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차지할 텐데요."
  "부인이 보관하는 게 좋겠오."
  "제 몫은 따로 두었어요. 그레버씨, 필요한 건 전부 고르십시오. 여기 오셨던
당원들도 깜짝 놀라고 있어요. 저장품이 많으면 절대로 좋지가 않아요. 꼭 혼자서
은닉한 것 같으니까."
  "아마 그렇겠지."
  "그러니까 많이 갖고가세요."
  "가족은?"
  "아버지가 계십니다. 대장님께서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잘 알고 계시죠?
하여튼 물건은 다른 창고에도 많이 있어요. 무엇이든지 잔뜩 골라 보세요."
  "필요한 건 무척 많소. 그런데 어떻게 운반을 하겠소?"
  "몇 번이라도 다시 오세요. 어차피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갈 바에야 그레버씨, 당신은
군인입니다. 안락의자에 앉아 세월을 보내는 나치 당원들보다 더 많이 가질 권리가
있어요."
  어쩌면 그럴는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도, 요셉도, 폴만도 분명히 권리가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사양한다면 바보밖에 안된다.
  얼마 후, 그 집에서 벗어났을 때 그는 비로소 자기가 알폰스와 함께 죽지 않은 것은
정말 우연의 일이었음을 깨달았다.
 
  요셉이 문을 열었다.
  "빠르군요." 그레버가 말했다.
  "자네가 오는 걸 보고 있었지." 요셉은 문에 뚫린 작은 구멍을 가리켰다.
  "내가 아까 뚫어 놓았지. 다소 도움이 돼."
  그레버는 테이블 위에 꾸러미를 놓았다.
  "저는 교회에 갔었는데 집사가 오늘밤은 거기서 묵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소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젊은 사람이었나?"
  "나이가 많던데요."
  "그분은 나를 교회의 직원으로 꾸며서 일주일 동안이나 숨겨 주었어. 갑자기 검색이
있었는데 오르간 속에 숨었었지. 젊은 녀석이 밀고를 했기 때문이야. 그 녀석은
종교적 반유대주의자였어. 그런 것도 있지. 우리가 2000 년 전 옛날에 그리스도를
죽였다는 거야."
  그레버는 꾸러미를 풀었다. 주머니에서는 정어리와 고기 통조림이 나왔다. 요셉은
그것을 보고 있었으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상당한데!"
  "나눕시다."
  "나눌 정도로 여유가 있나?"
  "보시다시피 유산을 상속 받았습니다. 돌격대장에게 말입니다. 마음에 걸립니까?"
  "천만에. 오히려 입맛이 더 나는군. 자넨 이런 선물을 받을 만큼 돌격대의 간부들을
잘 아나?"
  "어쨌든 대장만은 친했지요. 그다지 악의는 없는 사람이었죠."
  요셉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인간은 동시에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걸 믿지 않으십니까?" 그레버가 물었다.
  "자네는 그것을 믿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약해서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 경우엔."
  "그렇게 해서 돌격대의 대장이 될 수 있을까?"
  요셉은 웃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지. 살인자는 언제나 살인자지. 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상식인데. 그런데 실제로는 그것도 존재의 일부분일 뿐, 살인자가 되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끔찍한 불행을 야기시키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단 말야.
그런가?"
  "그렇습니다. 하이에나는 언제나 하이에나지요. 하지만 인간은 더 다양한 존재인
것입니다."
  요셉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제 수용소의 대장 중에는 제법 유머가 풍부한 사람이 있어. 또 매우 친절한
친위대원도 있지. 또한 선한 면만을 보고 끔찍한 일에 눈을 가리면서 시대의 일시적인
소산으로 자신을 기만하는 사람도 있어. 그들은 탄력성있는 양심을 갖고 있지."
  "그리고 두려워하는 인간도."
  요셉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레버는 침묵을 지키다가 침착하게 말했다.
  "저는 당신을 돕고 싶습니다."
  "난 혼자야. 잡히지 않으면 살아남는 거지." 요셉은 마치 남의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족은?"
  "있었지. 동생이 하나, 누이들이 둘, 또 아버지와 처자식이. 모두 죽어버렸지. 둘은
맞아죽고, 하나는 병으로 죽고, 나머지는 독가스로."
  그레버는 그를 묵묵히 쳐다보았다.
  "강제수용소에서?"
  "그렇지." 요셉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거기는 설비가 아주 편리하게 되어 있어."
  "그래서 당신은 탈출한 겁니까?"
  "탈출했지."
  "당신은 우리를 얼마나 증오할까요?"
  요셉은 어깨를 으쓱했다.
  "증오한다! 그건 일종의 사치야. 증오한다면, 그야말로 경계심을 잃게 되니까."
  그레버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밖에는 잿더미가 높게 쌓여 있었다.
  "자네는 다시 일선으로 돌아가나?"
  요셉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당신을 쫓는 악당들이 좀더 권력을 연장할 수 있도록 싸우기 위해
돌아갑니다. 당신을 체포해서 교수형에 처할 수 있게 말입니다."
  요셉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 않으면 총살될 것 같아서 가는 겁니다."
  요셉은 대답하지 않았다.
  "만약에 탈주를 한다면 놈들은 내 부모님과 아내를 강제수용소로 보낸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가야만 합니다."
  요셉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저는 갑니다. 제 말이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몇 백만
명의 인간에게 얽매인 이유입니다. 당신은 저를 경멸할 겁니다."
  "그렇게 자책하는 게 아냐." 요셉은 타이르는 것처럼 말했다.
  그레버는 그를 응시했다. 그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도 자네를 경멸하지 않아. 단지 자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지.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렇다면 난 폴만 선생님을 경멸해야 하나?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도와주는 사람을 경멸할까? 그들이 없었다면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자네는
아직도 순진해."
  요셉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것은 마치 유령의 미소처럼 그의 얼굴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사람은 너무 떠들어 대면 못 써. 그리고 반성해서도 안돼. 지금은 더욱. 마음이
약해지니까. 그러기엔 아직 일러. 자기 자신을 위험에서 지킬 방법만을 생각해야 돼."
  그는 통조림을 책 뒤에 감추어 놓았다.
  "이건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될걸세. 고맙네."
  그의 그런 행동이 몹시 서툴러서 자세히 살펴보니 손가락의 관절 부분이 하나도
보이지를 않고 손톱은 모두 빠져 있었다. 요셉은 그레버의 시선을 느꼈다.
  "강제수용소에서의 기념이지. 거기 소대장의 휴일놀이의 희생이 되었지.
소대장은 크리스마스에 양초 대신 이 손가락에 불을 붙였어. 차라리 발가락을
사용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남의 눈에 쉽게 발각될 우려는 없지. 항상 장갑을
끼고 있을 수도 없고."
  그레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헌 군복과 급료부를 드린다면 도움이 되겠지요? 불에 타버렸다고 하면
그만입니다."
  "고마워.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어. 난 루마니아인으로 변장할 생각이니까. 폴만
선생이 그런 묘안을 생각했지. '철의 전선'의 일원으로 당원 행세를 하는 거야.
얼굴은 제법 루마니아인과 비슷해. 상처도 공산당 놈들에게 당했다고 하지. 자네는
침구와 가방을 다 가지고 가겠는가?"
  그레버는 자기가 방에서 나가기를 요셉이 바라고 있음을 알았다.
  "당신은 여기에 계시겠죠?"
  그레버는 자기 몫으로 남겨놓았던 통조림을 모두 그에게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많이 갖고 다닐 수도 없어. 난 곧 이곳을 떠나야 해."
  "담배. 담배를 잊고 있었다. 거기에는 담배가 많습니다. 갖고 올까요?"
  요셉의 표정이 변했다. 그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풀리며 입 언저리에 잔주름을
만들었다.
  "담배?" 마치 친구의 소식이라도 듣는 것처럼 반갑게 말했다.
  "그거라면 얘기가 다르지. 담배는 양식보다도 중요해. 물론 기다려야지."
      22
 
  카타리네 교회의 회당에는 이미 많은 군중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슈트케이스나 보따리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대부분이 여자와
아이들이었다. 그레버는 침구와 가방을 들고 사람들 틈에 섞여 있었다. 말상을 한
노파가 그의 옆에 앉았다.
  "피난민이라고 쫓아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여러 가지 소문을 들었어. 먹을 것이
별로 없다느니, 농부들이 아주 인색하다는 얘기를."
  "저는 그래도 상관없어요." 깡마른 아가씨가 대꾸했다.
  "전 여기서 빠져 나갈 수만 있다면 좋겠어요. 무슨 일을 당할진 모르지만 죽음보단
낫겠죠. 우리들은 소유물을 모두 잃었으니까, 도움을 받는 게 당연해요."
  "며칠 전에 라인란트에서 피난민을 태운 열차가 이곳을 통과했는데 정말
처참했지요. 피난민들은 멕크렌부르그로 보내졌어요."
  "그곳은 부농들이 많이 사는 곳인데."
  "부농!" 노파는 성난 듯이 소리를 내고 웃었다.
  "농부들과 함께 살려면 뼈빠지게 일해야 돼. 그래도 배불리 먹을 수 없지. 이런
사실은 총통님께 알려야 해!"
  그레버는 두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등 뒤로 교회에 딸린 정원의 녹음이
눈부시게 빛났다.
  "우린 무료로 숙소를 제공받아야 해요. 우린 전쟁의 희생자니까요. 전쟁의 희생자!"
아가씨는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붉은 코의 집사는 어깨가 축 늘어지고 바짝 마른 남자였다. 그에게 게슈타포의
수배를 받는 사람을 숨겨 줄 수 있는 용기가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집사는 사람들을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번호표를 나누어주고 나서
같은 번호가 적힌 번호표를 일일이 짐에 붙였다.
  "오늘밤, 너무 늦지 마십시오." 그는 그레버에게 말했다.
  "교회는 그다지 여유가 없습니다."
  카다리네 교회는 대단히 큰 건물이었다.
  "여유가 없다고요?"
  "그렇습니다. 건물은 크지만 숙소로 사용하는 건 아랫방과 복도뿐입니다."
  "늦게 온 사람들은 어디서 잡니까?"
  "회당에서도 자고 마당에서도 잡니다."
  "교회의 방들은 모두 방공시설을 갖추고 있습니까?"
  집사는 부드러운 눈길로 그레버를 보았다.
  "교회를 처음 세울 때는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암흑의
중세시대였으니까요."
  그레버는 정원을 지나서 밖으로 나왔다. 교회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교회의
꼭대기에 높게 세워져 있던 탑이 쓰러지고 유리창도 대부분이 부서졌다. 참새들이 그
창가에 앉아 지저귀고 있었다. 완전히 무너져버린 신학교 바로 옆에 방공호가 있었다.
그레버는 안으로 들어갔다. 방공호는 교회에 소속되어 있던 옛날의 술창고를 보강한
곳이었으므로 술통을 놓던 받침대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공기가 축축하고 싸늘했다.
  방공실 안 깊숙한 곳에 무거운 쇠고리와 사슬들이 사각으로 새겨진 천장의 돌에
걸려있는 게 보였다. 지하실은 술창고가 되기 전까지는 이단자나 마녀의 고문실로
사용되었던 사실을 그레버는 알고 있었다. 그들의 손은 쇠사슬로 묶여 천장에
매달려서 자백할 때까지 새빨갛게 달군 부젓가락으로 고문을 당했다. 고문에 견디지
못하고 자백을 하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그리스도적인 사랑의 이름으로 처형을
당했던 것이다. 모는 것이 옛날과 조금도 다름없다고 그레버는 생각했다.
강제수용소의 고문자들은 훌륭하신 선배들로부터 그대로 전수를 한 셈이다, 그리고
그들 역시 똑같은 제자를 대대로 갖게 될 것이다.
  그레버는 아드러가를 거닐고 있었다. 저녁 6시였다. 그는 하루종일 방을 찾아
헤맸지만 허사였다. 지칠 대로 지쳐서 오늘은 단념하기로 결심했다.
  이 지역은 그야말로 잿더미만 남아 있었다. 그는 무작정 걷고 있다가 갑자기 눈이
번쩍 뜨였다.
  처음에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폐허 한복판에 작은 2층집이 서 있었던 것이다.
약간 기울어졌지만 아직도 모든 게 그대로인 채로. 그는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기뻤다.
  어느 쪽으로 가든지 조금만 걸어 가도 딴 세계에 온 것처럼 폐허만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아담한 정원 속에 서 있는 이 집은 기적적으로 구원된 것이다. 정면의
문에는 '위테 여관 겸 레스토랑'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는 열려져 있는 정원의 문을 지나서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는 유리창 한 장
깨지지 않은 것을 보고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문 옆에는 하얀 반점이 있는 갈색 사냥개 한 마리가 잠들어 있고
화단에는 꽃들이 활짝 핀 모습으로 반기고 있었다.
  홀은 텅 비어 있었다. 선반에는 잔 서너 개가 놓여 있을 뿐, 술병은 보이지 않았다.
벽쪽으로 붙은 세 개의 테이블이 있고 그 주위에 의자들을 놓았으며 가운데 테이블
위에는 티롤 지방의 풍경화가 걸려 있었다. 히틀러의 초상화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중년의 부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색이 바랜 푸른색 브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하이 히틀러' 대신에 '구텐 아벤트'라고 인사를 했다. 그레버는 그녀의
인사를 받으면서 실제로 그런 기분을 느꼈다. 저녁에는 누구나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는 다만 마실 것을 얻을 생각이었다. 목이 타는 것처럼 갈증이 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밤 엘리자베스와 함께 이곳에서 지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여기서 저녁식사를 할 수 있습니까?"
  부인은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배급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급히 말했다.
  "여기서 식사를 할 수 있다면 근사한 추억이 될 겁니다. 뜰에서라면 더욱. 나는 곧
일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나와 아내의, 2인용 배급표를 갖고 있습니다. 만약에
좋으시다면 통조림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 집에는 콩 요리밖에 없습니다."
  "좋습니다. 오랫동안 먹어보지 못했지요. 여덟 시쯤 와도 되겠습니까?"
  "언제라도 오세요. 준비해 놓을 테니까."
 
  그레버의 옛 집터에 있던 표찰 밑에 편지가 꽂혀 있었다. 어머니로부터 온 편지로
전선으로부터 반송된 것이었다.
  그는 겉봉을 뜯었다. 편지의 내용은 매우 간단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일 시를 떠난다.' 편지에는 행선지를 알리지 않았다. '너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조심하기 위한 안전조치에 지나지 않는다.
  날짜를 보았다. 그가 귀국하기 일주일 전에 부친 것이었다. 편지에는 공습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항상 검열을 경계하고 신중을 기하셨다.
편지를 부친 그 다음날 폭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훨씬 전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부모님께서 지방으로 옮기실 리가 없다.
  그는 편지를 읽고 나서 천천히 주머니에 넣었다. 양친은 살아 계시다
이번에는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주위를 돌아다보았다. 하겐가도 역시 폐허가
된 다른 거리와 똑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다. 18번지를 에워싸고 있던 공포와 고뇌는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지금은 고요와 깨어진 벽돌더미가 있을 뿐이었다.
  그는 심호흡을 크게 했다. 아무런 기쁨도 느낄 수 없었다. 항상 지고 다니던 무거운
짐이 벗겨졌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두 분은 살아 계시다. 이것으로 무엇인가가
끝났다. 그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마지막 공습이 있던 날, 이 거리에도 폭탄이 떨어졌다. 입구의 정면만이 위태롭게
남아있던 그 집도 완전히 붕괴되어 버렸다. 언제나 '사람 찾기' 구실을 해주었던
문짝이 벽돌더미 속에 박혀 있었다. 그레버는 머리가 돌아버린 공습 경비원이
궁금했다. 마침 그 당사자가 거리를 가로질러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군인 아저씨, 아직도 여기 있었나?"
  "그렇소. 당신도 여기 있었군."
  "자네에게 온 편지를 보았나?"
  "보았소."
  "어제 오후에 왔어. 이제 자네 편지를 떼어버려도 되겠지? 다섯 사람이나 그 자리를
기다리고 있어."
  "아직은 곤란하오. 2, 3일만 참아 주시오."
  "지금이 중요해."
  공습 경비원은 선생님이 학생을 꾸짖기라도 하는 듯이 날카롭고 준엄하게 말했다.
  "자네는 내가 많이 봐줬어."
  "당신은 신문의 편집인이라도 되오?"
  "공습 경비원은 질서유지를 위해서 여러 가지를 한다. 요전에 공습이 있고 난 후,
아이를 잃어버린 미망인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발표할 장소가 없다."
  "그럼 내 자리를 사용하시오. 내 우편물은 옛집으로 오니까."
  경비원은 그레버의 종이쪽지를 뜯어서 그에게 주었다. 그레버가 그것을
찢어버리려고 하자 경비원이 급히 막았다.
  "군인 아저씨, 돌았는가? 그런 건 찢는 게 아냐. 그건 자기의 행운을 찢는 거나
마찬가지야. 한번 구원을 받으면 언제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지. 그 쪽지를 지니고
있는 한은."
  "그 말이 맞는 것 같군."
  그레버는 쪽지를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나 역시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소. 당신은 어디서 살고 있소?"
  "나는 떠나야만 했지. 으슥한 창고를 하나 발견했어. 지금은 거기서 쥐들과 함께
재미나게 살지."
  그레버는 고개를 들었다.
  "나는 협회를 하나 만들 생각이야. 가족이 폐허 속에 묻힌 사람들을 위해서다.
우리는 협력해야 돼. 안 그러면 시에서 아무 대책도 세워주지 않아. 적어도 사람이
묻혀있는 장소라면 어디든지 목사가 기도를 올려야 해. 신성한 장소가 되도록. 어때?
내 말을 알아 듣겠나?"
  "알겠소."
  "그런 짓은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 물론 자네는 아니지만. 자네는
따분한 편지를 받았어!"
  그의 초췌한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지면서 고뇌와 격조의 표정이 나타났다. 경비원은
다급히 돌아서더니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레버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그는 부모님이 살아계신 것을
엘리자베스에게는 당분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엘리자베스는 혼자서 공장 앞 광장을 가로질러서 그레버에게로 걸어왔다. 그녀의
키가 훨씬 작게 보였다.
  "전 휴가를 얻었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얼마나?"
  "사흘. 마지막 사흘이죠."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사정 얘기를 했더니 휴가를 허락했어요. 나중에 작업시간을 충당해야하지만, 그런
건 조금도 상관없어요. 일거리가 많을수록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죠."
  그레버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침내 우리는 헤어져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여러 가지 사실을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서로 마주보았다. 두 사람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적이
없는 광장에 서서 언제까지나 그렇게 서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진실한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레버는 공장에서, 방공호가 아니면 방안에서 고독하게 기다리고 있을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믿을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다시 위험
속으로 떠나야 하는 그레버를 보고 있었다. 절망감이 그들을 엄습했다. 그와 동시에
무한한 애정이 두사람의 머리 위로 쏟아져내렸다. 그들은 사랑이라는 마법에 취해서
그 자리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한없이 무력했으며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다.
  "그럼, 우린 앞으로 사흘 동안 함께 있게 되었군."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보였다.
  "그래요. 내일밤부터."
  "고마운 일이군. 우리에겐 2주일이나 마찬가지야. 전처럼 날짜를 계산한다면 말야."
  "그래요."
  "우린 어디로 가죠? 그리고 어디서 자죠."
  "교회의 회당에서. 날씨가 따뜻하면 뜰에서 자도 돼. 이제부터 우린 콩으로 근사한
저녁식사를 하는 거야."
 
  폐허 한가운데에 꿋꿋이 서 있는 위테 레스토랑의 모습이 보였다. 그레버는 그
건물이 무사하게 서 있는 게 순간적으로 이상하게 생각되어서 마치 신기루처럼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들은 정원을 지나서 안으로 들어섰다.
  "어때?"
  "전쟁이 들어올 수 없는 평화의 집 같군요."
  "오늘밤부터는 계속 그럴 거야."
  꽃밭에서는 그윽한 꽃향기가 풍겨오고 있었다. 주인이 화단에 물을 뿌린 것이다.
사냥개가 꼬리를 흔들면서 돌아다녔다.
  위테 부인이 다가왔다. 부인은 깨끗하게 세탁된 흰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뜰이 좋으시겠어요?"
  ", 뜰에서. 그리고 전 세수를 하고 싶은데"
  "이리로 오세요."
  부인은 엘리자베스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2층으로 안내했다. 그레버는 부엌을
지나서 정원으로 나왔다. 정원에는 적색과 흰색의 테이블 덮개를 덮은 탁자와 의자 두
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 위에 접시와 컵들이 놓이고 물주전자도 있었다.
  그는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서 마셨다. 물은 차고 포도주보다 달콤했다. 정원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넓고 아늑했다.
  엘리자베스가 왔다.
  "이런 곳을 어떻게 알았죠?"
  "우연이지."
  "참으로 아름답군요. 그런데 이상해요. 전 이곳이 전혀 낯설지가 않아요."
  "나도 이곳을 처음 보았을 때 그런 느낌이 들었었어."
  "모든 게 옛날처럼 보존되어 있는 것 같아요. 당신과 나, 이 정원이 그렇지만
무엇인가, 눈에 띄지 않는 어떤 게 빠진 것만 같아요. 그것만 있으면 모든 건 옛날
그대로의 모습일 것 같아요."
  그녀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부인이 콩 수프를 가지고 왔다.
  "배급표를 드리겠습니다. 많진 않지만, 이만하면 충분할 겁니다."
  "이렇게 많이는 필요없어요." 부인이 말했다.
  "완두는 항상 있는 거니까 소시지 값만 받겠어요. 그리고 뭘 좀 마시겠어요? 맥주가
약간 남아 있는데."
  "좋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맥주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부인이 곧 맥주를 가지고 왔다. 그레버는 두 개의 잔에 맥주를 가득 부었다. 그들은
맥주를 마셨다. 맥주는 굉장히 차고 맛이 좋았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면서 천천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두워졌다. 탐조등의 불빛이 어두운 하늘에 길게 줄을 그었다. 그 빛은 구름을
뚫고 더 높은 곳을 향해서 올라갔다. 부인이 수프를 더 가지고 왔다.
  "많이 드세요. 젊은 분들은 많이 드셔야 합니다."
  "저희들은 아주 훌륭한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샐러드와 치즈를 가져오겠어요."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게 갖춰졌군요."
  "달과 정원이 있고, 음식은 풍족하게 있고 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멋져요!"
  "사람은 항상 이렇게 생활하고 있었어. 모두들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던
거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여기선 폐허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군요. 정원의 나무들이 폐허를 가려주고 있어요.
아직도 이런 곳이 남아 있었다니!"
  "전쟁이 끝나면 그런 나라로 가야지. 어디를 가나 파괴되지 않은 거리, 밤이 되면
불을 환하게 밝히고 공습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나라로."
  "우리들을 받아줄까요?"
  "스위스 같은 나라는 받아주겠지."
  "그럼 스위스의 화폐가 필요하겠군요. 어떡하죠?"
  "카메라를 갖고 가서 거기서 팔면 돼. 그러면 2, 3주일은 충분할거야."
  엘리자베스는 허리를 잡고 웃었다.
  "그렇지 않으면 보석이나 모피외투를? 우리가 갖고 있지도 않는."
  부인이 샐러드와 치즈를 가지고 왔다.
  "여기가 마음에 드세요?"
  ", 대단히. 더 있어도 괜찮겠죠?"
  "물론, 오랫동안 계셔도 좋습니다. 그럼 커피를 갖고 오겠어요."
  "커피까지? 오늘은 우리가 왕이라도 된 것 같군."
  엘리자베스가 또 웃었다.
  그레버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공장에서 나올 때의 지친 표정과는
정반대로 밝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생활한다는 건 아름다운 일이죠. 우린 그것을 거의 모르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에겐 당연한 일도 우리에게는 멋진 모험이에요. 배급표가 필요없는 식사,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상점, 주위를 돌아보지 않아도 얘기를 할 수 있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든가 이를 위하여 긴 세월이 필요하겠죠. 그러나 공포심은
차츰 사라지고 가끔씩 떠오른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들의 기쁨으로 변할 거에요."
  "그래." 그레버는 겨우 대답했다.
  "그럴 거야, 엘리자베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앞날에는 많은 행복이 기다리고 있군."
 
  그들은 그 집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 동안에 위테 부인은 잠들어 있었으므로
그들은 단 둘만의 호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달이 높게 떠 있었다. 대지와 싱싱한 푸른 잎의 냄새가 한층 더 강렬하게 전해졌다.
그 향기가 잿더미에서 나는 냄새를 몰아내고 있었다. 관목의 사이사이로 고양이가
쥐를 쫓고 있었다. 시내에는 쥐가 들끊었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화의 섬을 떠나는 것만 같았다.
  "몹시 늦었군요." 그들이 교회에 당도하자 집사가 말했다.
  "잘 곳이 없소."
  오늘 아침에 만났던 사람이 아니었다. 젊은 집사는 깨끗이 이발을 하고 있었으며,
그의 태도는 완고하고 도도했다. 요셉을 고발한 자가 바로 이 녀석임에 틀림없다고
그레버는 생각했다.
  "마당에서 잘 수도 없겠습니까?"
  "거긴 피난민들이 더 많소. 그런데 당신들은 어째서 임시수용소에 가지 않소?"
  자정이 다 됐는데 이런 질문을 하다니.
  "우린 하느님을 더 믿고 있습니다."
  집사는 날카롭게 그레버를 쳐다보았다.
  "여기서 자겠다면 푸른 천장 아래서 자야 하오."
  "상관없습니다."
  "당신들은 결혼했소?"
  "그렇습니다. 왜 그러시죠?"
  "여기는 하느님의 집이오. 결혼하지 않은 남녀는 함께 잘 수 없소. 회당에는
남자부와 여자부가 따로 마련되어 있소."
  "부부도 마찬가지입니까?"
  "물론이오. 회당은 교회의 소유니까. 여기서는 육적인 욕망이 존재할 수도 없소.
그리고 당신들은 결혼한 것 같지가 않소."
  그레버는 결혼 증명서를 꺼냈다. 그는 니켈로 된 테의 안경을 걸치고 나서 달빛에
그것을 비추고 읽어 보았다.
  "며칠 안됐군."
  "종교문답 가운데 기간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조항은 하나도 없소."
  "교회에서 식을 올렸소?"
  "이보시오, 우린 몹시 피로하오. 내 아내는 하루종일 공장에서 중노동을 했소.
이의가 있으시다면 우리를 쫓아내보시오. 그러나 그리 간단하진 않을 것이오."
  "무슨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