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소설&드라마

레마르크 作 - 사랑할때와 죽을 때 - 16

淸山에 2011. 9. 3. 16:01

 

  

** 

 

 
 
  그녀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는 슬퍼. 내일 당신과 작별할 생각을 하면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아. 비탄에
잠기지 않으려면 한 가지 해답밖에 없어 당신을 만나지 않았던 것으로 하는
거지.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난 슬픔 대신에 공허함을 안고 떠나겠지."
  엘리자베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표현 방법이 서툴렀는지도 몰라. 내 말을 이해할 수 있겠지?"
  ". 당신은 멋지게 표현하셨어요. 그 이상 더 어떻게?"
  그녀는 일어나서 그에게로 왔다. 그는 그녀를 느끼는 순간 견딜 수 없는 불꽃이
온몸에 타올랐다. 그는 모든 것은 하나이고, 출발은 귀환이며, 소유는 상실이며, 삶은
죽음이며, 과거는 미래임을 알았다. 항상 닿는 곳마다 돌처럼 변하지 않는 영원의 상이
존재하고 있으며, 아무것도 말소할 수 없다 그때 그는 대지가 활처럼
팽창해지더니 순간적으로 튕겨나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엘리자베스를 꼭
안고서 그녀와 함께 오로지 한곳을 향해서 뛰어들고 있었다.
  마지막 날 오후였다. 그들은 정원에 앉아 있었다. 고양이가 살며시 그 앞을
지나갔다. 새끼를 밴 고양이는 주위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느릿느릿 걸었다.
  "전 아기를 낳고 싶어요." 엘리자베스가 갑자기 말했다.
  그레버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기? 어째서?"
  "어머나! 왜라니요?"
  "어린애! 이렇게 소란한 시대에! 당신은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럼요?"
  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보았다.
  "엘리자베스, 난 지금 당신에게 키스하고 부드럽게 굴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돼.
아직 어린애에 대한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
  "당신은 그런 생각을 하실 필요가 없어요. 그것은 당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저도 확신은 없어요."
  "어린애! 우리가 이 전쟁에 알맞게 성장한 것처럼 그애도 자라면 새로운 전쟁을
겪어야 되겠지."
  또 고양이가 다가오더니 부엌으로 통하는 길을 살금살금 걸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거의 매일 태어나고 있어요."
  그레버는 히틀러 유겐스트나 자기 부친을 고발했다는 어린이가 떠올랐다.
  "왜 그런 말을 하지? 결국 희망에 지나지 않겠지. 그렇지 않을까?"
  "당신은 아이가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잘 모르겠어. 평화의 시대라면 또 얘기가 다르겠지. 난 이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우리 주위는 모두 황폐하였고 대지는 몇 년이고 방치될 거야. 이런 환경 속에서
어떻게 어린애를 바랄 수 있지?"
  "그러니까 필요하죠."
  "그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교육시키기 위해서죠. 만약에 이런 사태를 비판하는
모든 사람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야만인들만 애를
낳아야 하나요? 만일 그렇게 된다면 누가 이 세상에 참다운 정의를 실현할 수 있죠?"
  "당신은 그런 뜻에서 애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아요. 이건 지금 막 떠올랐어요."
  그레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의견에 반대할 만한 이유는 한 가지도
없었으며 너무도 지당한 말이다.
  "당신은 어찌나 머리가 비상한지 내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 아직 결혼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실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어. 그런데도 당신이 불쑥 어린애 얘기를
끄집어내니."
  엘리자베스는 웃으면서 일어났다.
  "당신은 이 문제의 가장 단순한 면을 모르고 있는 거죠. 결국 제가 원하는 건
당신의 아이라는 거라구요. 그럼 전 위테 부인과 밤참을 상의해보겠어요."
 
  그레버는 정원에 혼자 앉아 있었다. 하늘은 온통 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오늘
하루도 끝나버렸다. 오늘은 시간을 훔치고 있었다. 휴가를 24시간이나 넘긴 것이다.
그는 출발계는 제출했지만 아직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한 시간 후에는 출발해야
한다.
  그는 다시 한 번 우체국에 가 보았다. 그러나 부모님으로부터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위테 부인은 엘리자베스를 계속 머물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이 집의 지하실을
조사해 보았다. 지하실의 깊이는 충분하다고 할 수 없었으나 퍽 견고한 편이었다.
라이프니치의 공설 방공호도 가 보았다. 그곳은 시내에 있는 방공호에 못지않은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평온 속에서 있었다. 부엌에서 냄비와 접시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긴 휴가였다. 그에게는 3주간이 아니라 3 년이었다. 두 사람은 대지를 꾹 딛고
서 있는 것 같았지만 언제나 위태위태했다.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갑자기 벽이
쓰러지면서 벽 저쪽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먼 미래가 흔들렸다. 처음에 휴가를 나왔을
때는 자기 자신을 지탱해 줄 무엇인가를 찾아내 소유하고 싶다고 희망했었다.
그렇지만 아기 같은 것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는 나뭇잎 사이로 차츰 짙어가는 저녁 노을을 바라보았다. 아기에 대한 생각은
끝이 없을 것이다. 벽에 묶인 생명이 그것을 초월할지도 모른다는 것,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생명이 자신이 볼 수도 없는 미래의 생명에 전달하기 위한 확실한 소유물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 그는 불가사의함을 느꼈다.
 
  "기차는 6시에 출발해. 짐은 다 꾸려놓았어. 그럼, 난 여기서 헤어지고 싶어.
지금 내 앞에 있는 당신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며 떠나고 싶어. 요전에 왔을 때는
어머니가 정거장까지 따라왔었지. 부득이 따라오시겠다는 거야. 나나 어머니나 무척
힘든 일이었어. 난 그것을 잊기 위해 긴 시간을 소모했지. 언제나 역에서 울고 있는
여자만 보였어. 당신, 내 심정을 이해하겠어?"
  "."
  "좋아. 그럼 내 말대로 하는 거야. 당신은 내가 다시 군대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지
말란 말야. 난 여기서 이대로 작별하고 싶어. 이 돈을 받아. 일선으로 가면 돈 같은 건
필요없어."
  "저도 돈은 필요없어요. 에른스트, 내게 필요한 돈은 스스로 벌어서 쓰겠어요."
  "일선에선 돈을 쓰고 싶어도 쓸 데가 없어. 이것으로 우선 옷을 사라고. 당신
모자에 어울리는 멋진 옷으로."
  "저는 이 돈으로 당신에게 선물을 보내겠어요."
  "아무것도 보내지 마. 거기에는 여기보다 먹을 것이 많아. 그보다 당신 옷을 사라고.
이것으로 부족할까?"
  "충분해요. 구두까지 살 수 있는 걸요."
  "그럼 됐어. 이왕이면 금색 구두를 사요."
  "알겠어요. 금색으로 사서 두었다가 당신이 돌아올 때 신고 마중가겠어요."
  그레버는 배낭에서 어머니에게 드리려고 가지고 왔던 흙색의 성상을 꺼냈다.
  "이건 내가 소련에서 얻은 거야. 당신이 갖고 있어."
  그녀는 성상을 받지 않았다.
  "싫어요. 그건 다른 사람에게 주세요. 이만 가 보세요. 그걸 받으면 마지막 이별이
될 것만 같아요."
  그는 성상을 바라보았다.
  "이건 파괴된 집에서 얻었지.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했군."
  그는 성상을 도로 배낭에 넣었다. 그것은 많은 천사들을 새겨 넣은 성 니콜라이
상이었다.
  "상관없다면 교회로 가지고 가겠어요. 우리가 하룻밤 잔 적이 있는 카타리네
교회로."
  "거기서는 받지도 않을 거야. 서로 종교가 다르니까.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위임
받은 사람들이 서로 배척하고 있지."
  그는 이 성상을 쿠루제의 유해와 함께 브류멜 신부의 묘 속에 묻지 않은 게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만약에 그렇게 했다면 이중으로 신을 모독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걸었다. 그의 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배낭은 무겁고 역까지의 길은 멀기만 했다. 첫번째 모퉁이를 돌고 난 후, 많은 거리를
지나쳤다. 아직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에서 나던 향수 냄새가 그의 몸에서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이내 후덥지근한 공기 속의 썩은 냄새와 뒤섞여버렸다.
  둑을 넘었다. 린덴 거리의 안쪽 가로수들은 새까맣게 그슬려 있었다. 그 반대쪽은
개울로 막혀 있었으며 지푸라기와 부서진 침대의 조각들이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
  '만약에 지금 당장 공습이 시작된다면 나는 대피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발차 시각에
늦어도 구실이 생기는 셈이다. 내가 다시 엘리자베스에게로 돌아간다면 그녀는 뭐라고
할 것인가?'
  그는 생각을 해 보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정거장에서 기차의 발차
시간이 늦어지고 있기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대화를 다시 시작해야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다. 공습중에는 기차도 떠날 수 없으므로 그는
예정대로 기차를 탈 수 있을 것이다.
  기차는 이미 출발 준비를 완료하고 있었다. 몇 개의 객차에는 '군 전용차'라고 씌여
있고 보초가 서류를 조사하고 있었다. 그레버가 하루 늦은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레버는 기차에 올라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에 다시 세 명의
병사가 승차를 했다. 하사관과 상처가 남아있는 병장, 나머지 한 사람은 포병이었다.
포병은 자리에 앉자마자 무엇인가를 먹기 시작했다. 임시 취사차가 역 구내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젊은 학생 간호사가 철제 스와크치카를 브로치 대신 단
연상의 간호사와 함께 나타났다.
  "커피!" 하사관이 말했다.
  "잠깐만 보자고!"
  "우리가 아냐." 병장이 대답했다.
  "저것은 처음으로 출정하는 보충병 수송대에게 주는 거야. 전에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아마 연설도 있는 모양이야. 우리에겐 그런 게 필요없지만."
  피난민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짐을 들고 두 줄로 서서 커피가 끓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친위대 장교 두 명이 멋진 승마복 차림에 장화를 신고 학처럼
구내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휴가를 끝내고 돌아가는 병사들 세 명이 객실로 들어섰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창문을 열고 상반신을 밖으로 내밀었다. 밖에는 아이를 안은
여자가 서 있었다.
  그레버는 아이에게 눈길을 주고 나서 여자를 바라보았다. 색깔이 바랜 여름 옷
밖으로 여자의 주름잡힌 목덜미와 축 늘어진 유방이 드러나 있었다.
  "그럼, 하인리히!" 여자가 말했다.
  "그래. 조심해, 마리. 그리고 사람들에게 안부 전해요."
  "."
  그들은 묵묵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악기를 든 사나이들이 그 여자의 옆에 서
있었다.
  "멋있는데!" 병장이 말했다.
  "젊으나 젊은 대포밥들이 음악의 전송을 받으며 출전한다. 이런 건 이미 옛날에
집어치워야 했는데."
  "우리에게도 커피 한 잔쯤 선심 쓸 수 없을까?" 하사관이 말했다.
  "뭐니뭐니 해도 우리는 고참병의 자격으로 출전하는 거다!"
  "밤까지 기다려야지. 그러면 나오는 게 있을 거야."
  행진의 발자국소리와 구령이 들려왔다. 보충병이 도착했다. 그들은 거의 전부가
연소자들로 채워져 있었으며 건장한 연장자는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연장자들은
돌격대나 친위대에서 밀려난 사람들이었다.
  "수염을 깎을 필요가 없지." 병장이 말했다.
  "저것 좀 보게, 저 젊은이들을! 어린애가 아닌가 말야. 일선으로 가면 저 사람들을
안고 싸워야 되겠지."
  보충병들은 정렬을 했다. 하사관이 큰 소리로 구령을 하자 곧 정숙해졌다. 누군가가
연설을 시작했다.
  "창문을 닫아!"
  병장이 창 밖의 아내를 바라보고 있는 사내에게 말했다.
  사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연설자의 음성은 마치 양철 성대에서 나오는
것처럼 꽝꽝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레버는 좌석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하인리히는 계속 창가에 서 있었다. 병장이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그는 슬픈 눈빛으로 마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마리도 똑같이
남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가 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연설이 끝났다. 악기를 든 사나이들이 '독일 국가' '홀슈트 뷔셀'
연주했다. 차내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보충병들이 지정받은 객차에 오르기 시작했다. 간호사가 커피를 들고 그들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잠시 후 간호사가 기차에서 내릴 때에는 손에 빈통이 들려져
있었다.
  "갈보년 같으니라구!" 병장이 말했다.
  "고참병을 말려죽일 작정인가?"
  구석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허겁지겁 먹고 있던 포병이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갈보라고 했다. 그건 그렇고 넌 대체 뭘 먹고 있는 거냐?"
  포병은 샌드위치를 다시 먹기 시작했다.
  "돼지고기." 그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돼지고기라." 병장은 객실 안에 있는 병사들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동의를 구했지만 포병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인리히는 여전히 창가에 서 있었다.
  "숙모님께도 안부 전해." 그는 간신히 말했다.
  "."
  그들은 다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왜 출발을 안 하지?" 누군가가 물었다.
  "벌써 6시가 지났어."
  "아마 장군을 기다리고 있을 거야."
  "장군이라면 비행기로 가시겠지."
  그들은 다시 반 시간을 더 기다렸다.
  "이제는 그만 가 보라구." 하인리히는 기다리는 동안 가끔씩 되풀이하여 말했다.
  "기다리겠어요."
  "꼬마에게 저녁을 먹여야지."
  "천천히 먹여도 괜찮아요."
  두 사람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요셉에게도 안부를." 하인리히가 말했다.
  포병은 잠들어 있었다. 이윽고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 잘 있으라구. 마리."
  "당신도, 하인리히!"
  기차의 속도가 차츰 빨라졌다. 마리는 기차를 따라 함께 뛰어오고 있었다.
  "꼬마를 잘 키워야 해."
  "알았어요. 하인리히, 당신도 조심하세요."
  "알았어! 알았어."
  그레버는 객차의 옆에 바짝 붙어서 달리고 있는 여인의 수심에 찬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치 남은 몇 초 동안만이라도 하인리히를 볼 수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듯이 달리고 또 달렸다.
  그때 그는 언뜻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녀는 정거장의 창고 뒤에 서 있었다!
그때까지 기차 안에서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순간적으로
믿어지지 않았지만 오직 그녀의 얼굴만이 뚜렷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하인리히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잠깐만 비켜!"
  그레버는 갑자기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어째서 정거장까지 혼자 왔는지 이유 같은
것은 알 필요도 없었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보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말을 잊고
있었다.
  그는 하인리히의 목덜미를 뒤로 끌어당겼다.
  "리자에게도 안부를 전해!" 하인리히는 소란한 차량의 굉음을 누르겠다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비켜줘! 내 아내가 저기 있어!"
  그레버는 한쪽 팔로 하인리히의 어깨를 잡아서 세게 당겼다. 하인리히는 뒷발질로
그레버의 무릎을 걷어찼다.
  "조심하라고!" 하인리히는 소리를 질렀다.
  여자의 목소리는 이미 들리지 않았다. 그레버는 하인리히의 무릎을 걷어차고 어깨를
흔들었다. 하인리히는 한쪽 손으로 창문을 잡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기차가 방향을
바꾸었다. 그레버는 하인리히의 어깨 너머로 간신히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자꾸만 작아지면서 그대로 창고 앞에 서 있었다. 그레버는
하인리히의 지푸라기 같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흔들었다. 아마도 그녀는 흔드는
손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의 손인지는 끝내 모르고 말 것이다. 정거장은 이미
보이지 않고 멀어지기만 했다.
  하인리히는 맥없이 창가를 떠나버렸다.
  "이 새끼." 그레버는 하인리히에게 충동적으로 달려들려다가 멈추고 말았다.
  하인리히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레버는 올렸던
손을 내렸다.
  "악당!"
  "그게 무슨 소리야?" 병장이 물었다.
      25
 
  이틀 후, 그는 소속 연대의 소재지를 찾아내고 중대본부에 보고했다. 특무상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다만 사무병이 홀로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마을은 그레버가 전에
보았던 위치보다 120 킬로미터나 서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여긴 어때?"
  "지독하지. 휴가는?"
  "그저 그렇지. 뭐 달라진 것이라도 있나?"
  "그야 많지. 우리가 지금 어디 위치하고 있는지 보면 알걸."
  "모두들 어디 갔지?"
  "일개 소대는 참호를 파고 있고 또 한 소대는 시체를 묻고 있어. 오후에 돌아올
거야."
  "여러 가지 변했나?"
  "차차 알게 되겠지. 자네가 여기를 출발했을 때 누구누구 있었는지 난 잘 몰라.
보충병들이 많이 왔어. 모두 어린애들이야. 마치 겨울철 파리새끼처럼 맥없이
죽어가고 있지. 전쟁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어. , 중사 하나가 새로 왔어.
선임 하사관이 죽어버렸거든. 뚱보 마이네르트 말야."
  "일선에서 전사했나?"
  "아니야. 변소에 앉아 있다가 비계덩어리와 함께 공중으로 날아갔어."
  사무병은 하품을 했다.
  "형편이 어떤지는 곧 알게 될 거야. 그런데 자넨 왜 고국에서 다리에 파편이라도
맞지 않았지?"
  "글쎄. 그럼 좋았을 텐데. 가장 좋은 생각은 살아있는 동안엔 떠오르지 않는
법이야."
  "나 같으면 며칠 더 놀다 오겠어. 네 하나 빠졌다고 해서 신경을 쓰는 자는 아무도
없어."
  "그것도 돌아오고 나서야 생각나던걸."
  그레버는 마을을 살펴보았다. 마을은 그가 전에 주둔하고 있던 전방이나 다름이
없이 어디나 황폐되어 있었다. 한가지 다른 게 있다면 눈이 녹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것이 축축했다. 진흙은 마치 구두를 벗기려는 것처럼 꽉 잡고 놓지 않았다.
그러므로 큰길에는 송판을 길게 깔아놓았고 사람들은 그 위로만 다녔다.
  날씨는 따뜻했다. 그레버는 고국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전방에서 따스함을 느꼈다.
그는 전선의 굉음에 귀를 기울였다. 격렬한 포성이 높아졌다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사무병이 지정한 방공호를 찾아서 빈 자리에 소지품을 놓았다. 그는 한 이틀 늦게
귀대하지도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는 밖으로 나왔다. 마을의 전면에는 참호가 여기저기에 있었지만 지금 그곳은
물로 채워졌고 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물에 젖어 있었다.
  그레버는 되돌아왔다. 거리에서 중대장인 라에를 만났다. 라에는 안경을 걸친 학의
모습을 하고서 송판 위를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다. 그레버는 그에게 보고를 했다.
  "자네는 운이 좋았어. 자네가 출발하고 나서 모든 휴가가 취소되었지."
  그는 그레버를 보았다.
  "어때, 다녀온 보람이 있었나?"
  ", 있었습니다."
  "잘됐군. 여기는 흙탕물 속에 앉아 있는 것과 같지. 모두 일시적일 거야. 곧 강화된
예비진지로 후퇴하겠지. 예비진지를 보았나? 그곳을 지나왔겠지."
  "아닙니다."
  "보지 못했나?"
  "."
  "여기서 40 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지."
  "그곳을 통과한 것은 어젯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때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렇겠지."
  라에는 그레버의 표정을 집요하게 살폈다. 그는 무엇인가를 그레버에게 묻고 싶은
눈치였다.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자네 소대장이 전사했어. 뮬러 소위 말야. 신임 소대장은 마츠소위야."
  "알겠습니다."
  라에는 지팡이로 축축한 땅을 쿡쿡 찔렀다.
  "이 모양으로 땅이 질면 소련군도 대포와 전차를 앞세우고 전진하지는 못할 거야.
덕분에 우리는 부대를 재편성할 수 있지. 모든게 일장일단이 있는 법이야. 안 그래?
돌아와 줘서 고맙네. 지금은 젊은 보충병을 훈련해야 할 고참병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그는 흙탕물을 건너뛰었다.
  "그곳은 어때?"
  "여기와 비슷합니다. 공습이 빈번합니다."
  "그렇게 심한가?"
  "다른 도시는 잘 모르겠지만 하루 건너 한 번씩 공습이 있었습니다."
  라에는 그에게 확실한 정보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레버는 침묵만을
지켰다.
   
  오후에 분대원들이 돌아왔다.
  "휴가병!" 임메르만이 말했다.
  "왜 이런 난장판으로 돌아왔지? 어째서 탈영하지 않았어?"
  "어디로?"
  임메르만을 머리를 긁적거렸다.
  "스위스로."
  "그걸 모르고 있었군. 탈영병을 위한 특별 호화 열차가 매일 스위스로 출발하고
있어. 폭격을 받지 않도록 지붕에 적십자를 새기고 말야. 그리고 스위스 국경에는
'환영'이라고 쓰인 개선문이 나란히 서 있는데 말이지? 그런데 넌 언제부터 그런 말을
마음대로 하게 되었지?"
  "나는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은 해. 우린 지금 후퇴하는 중이야. 패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100 킬로미터씩 퇴각할 때마다 말이 조금씩 자유로워지지."
  임메르만은 옷에 묻은 진흙을 털어냈다.
  "뮬러는 죽었어. 마이네케와 슈나이더는 후송을 했고. 뮤케는 엉덩이를 맞았는데
바르샤바에서 죽은 모양이야. 그리고 또 베르닝! 그는 오른쪽 다리를 잃고,
출혈이 너무 심해 죽어버렸어."
  "힐슈만도." 그레버가 말했다.
  "힐슈만? 그 녀석이 왜?"
  "녀석도 죽었지?"
  "바보 같은 소리 마! 그래, 저기 앉아 있잖아."
  그레버는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과연 임메르만의 말대로 힐슈만은 술통 위에
앉아 반합을 열심히 닦고 있었다. 맙소사!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아니, 저 녀석 어머니는 힐슈만이 죽었다는 보고를 받고 있었는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그레버는 힐슈만에게로 갔다.
  "네 어머니를 만났었지."
  "그게 정말인가? 그럼 약속을 잊지 않았군? 난 네가 찾아가리라고는 생각지도 않고
있었어."
  "어째서?"
  "난 여지껏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기대한 적이 없거든."
  그레버는 그가 거의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우리 어머닌 어떠셔? 내가 잘 있다고 전해드렸나?"
  "힐슈만, 네 어머니는 네가 전사한 걸로 알고 있어. 중대로부터 통지가 왔었나 봐."
  "뭐라고? 그런 일이 어떻게?"
  "네 어머니가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어."
  힐슈만은 그레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난 거의 매일 어머니께 편지를 보내고 있는데?"
  "어머니는 그 편지는 네가 전에 보낸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어.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나? 힐슈만은 딱 한사람뿐이야."
  "그건 그래. 누군가 고의로 그런 짓을 한 게 아닐까?"
  "일부로 그런 장난을 할 녀석이 있을까?"
  "혹시나 슈타인브레너가."
  "그 녀석, 아직도 살아 있었나?"
  "물론이지. 그 녀석은 특무상사가 죽고 나서 이틀간 본부에서 근무한 적이 있지.
마침 사무병이 입원을 했고."
  "만약에 그런 짓을 했다면 그야말로 악랄한 문서위조 행위지."
  "그렇지."
  "그런 문서에는 라에가 서명하도록 되어 있어."
  "우리 어머닌 그것을 알지 못해. 우리 어머니에겐 어떤 서명이나 마찬가지야."
  그레버는 슈타인브레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악질적으로 장난을 했군. 도저히 믿을 수 없는데. 그런데 그 병신 같은 새끼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나를 교육시키기 위해서겠지. 난 유대인의 피가 섞여 있어. 우리 어머닌 뭐라고
말씀하셨지?"
  "의외로 침착하셨어. 넌 즉시 어머니께 편지를 보내야 돼. 내가 말한 것을 그대로
쓰는 거야. 내가 방문했던 일을 기억하실 테니까 말야."
  "어머니에게 편지가 도착하려면 오래 걸리겠지."
  그레버는 힐슈만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았다.
  "함께 중대본부로 가지. 본부에서 정정 전문을 치게 하는 거야."
  "그건 안돼."
  "? 그 이상의 일도 할 수 있어. 우리는 슈타인브레너를 고소할 수도 있는 거야."
  "안된다. 난 도저히 할 수 없어. 난 그것을 증명할 수가 없어. 더구나 고소도 할 수
없단 말야. 넌 그것을 모르겠어?"
  "알겠어, 힐슈만." 그레버는 거칠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이런 일은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을 거야."
  그레버는 저녁을 먹고 나서 슈타인브레너를 만났다. 슈타인브레너는 햇볕에 그을린
건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눈이 재빠르게 무엇인가를 탐색하고 있었다.
  "고국의 사기는 어때?"
  그레버는 반합을 내려놓았다.
  "우리는 국경에 도착해서 친위대 장교로부터 국내의 정세를 한마디도 발설해서는
안된다고 경고를 받았어. 그렇지 않으면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슈타인브레너는 웃었다.
  "난 친위대 소속이야. 내게는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어."
  "그렇다면 더욱 말할 수 없지. 엄벌이란 군의 계획을 사전에 내통한 자로서
총살형을 받는 거야."
  슈타인브레너는 웃음을 딱 그쳤다.
  "넌 그럴듯하게 말하고 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다만 대위가 우리에게 했던 말을 되풀이했을 뿐이야."
  슈타인브레너는 교활한 눈초리로 그레버를 훑어보았다.
  ", 결혼했지?"
  "어떻게 알았지?"
  "난 무엇이든지 알고 있지."
  "본부에서 보았군. 알면서 왜 묻지? 넌 본부는 잘 가지 않았잖아?"
  "난 내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는 언제든지 본부에 있을 수 있어. 나도 이번에
휴가를 가게 되면 결혼할 생각이야."
  "정말인가? 그런데 누구하고?"
  "결혼 상대자는 친위대 사령관의 따님이야."
  "그야 그렇겠지."
  그레버가 빈정거렸지만 슈타인브레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혈통이야 서로가 일급이지."
  그는 자신의 말에 열중해 있었다.
  "난 노르딕 프리지안계이고 여자 쪽은 라인 섹슨계이지. 우린 양친으로부터 모든
원조와 인종상의 연금을 받기로 돼 있어. 아이들은 당연히 교육상의 특권을 받는다.
당에서 부여하는 이익의 일체를 수령할 수 있어. 5 년이 지나면 내 아내는 모범적인
어머니로서 부인 부대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을 수 있지. 만약에 쌍둥이나 세 쌍둥이를
낳는다면 총통께서 직접 이름을 지어주시는 거야. 그렇게 되면 난 일생을 보장받는
거지. , 상상해 보라고!"
  "지금 상상하는 중이야."
  "바로 민족의 품종개량이지. 우리는 유대인을 근절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순혈종인
게르만인도 개조해야 돼. 새로운 지도자상의 민족으로 말야."
  "넌 유대인을 많이 근절시켰나?"
  슈타인브레너는 히죽히죽 웃었다.
  "만일 네가 내 행동기록을 본다면 그런 걸 물어보는 게 미안할거야. 그 무렵에는 참
멋있었지!"
  그는 비밀이라도 털어놓을 듯이 그레버에게로 몸을 내밀었다.
  "난 말야. 전속 신청을 했어. 친위대 사단으로 복귀하려고. 거기로 가야 멋지게
솜씨를 발휘할 수 있지. 또 출세할 수 있는 기회도 많고. 아주 규모가 대단하지.
더러운 소련놈들에게는 일일이 군법회의 같은 게 필요없어. 그냥 송두리째 처치해
버리는 거야. 전엔 한나절 만에 폴란드인과 소련인 배반자들을 300 명이나 해치웠지.
그래서 여섯 사람이나 공로훈장을 받았어. 여기서 체포하는 건 시시한
게릴라들뿐이야. 그런 건 아무리 죽여 봤자 훈장을 받을 수 없어. 네가 없는 동안에
고작 6, 7 명을 처치했을 뿐이야. 소탕부대나 친위대의 보안부에선 하루에도 몇 천
명씩 잡아들이고 있지. 그러니까 출세를 하려면 그리로 가야 돼."
  그레버는 대평원의 붉은 노을을 바라보았다. 새가 저녁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슈타인브레너라는 사나이는 완전한 당의 소산물이다. 녀석은 건강하며 완벽하게
육체적 단련을 받았지만 자기자신의 사상은 찾아볼 수 없고 완전히 비인간적으로
훈련됐다. 이 녀석에게는 총기 수입이나 체조나 살인이나 모두 똑같은 일에 속한다.
  ", 힐슈만의 어머니에게 사망통지서를 발송했지?"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
  "난 이미 알고 있었지."
  "그래? 네가 무슨 수로?"
  "알고 있어. 장난치고는 그럴듯하던데."
  슈타인브레너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는 남이 비웃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언제나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만족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너 역시 그렇게 생각하나? 통지서를 받아 든 그 할멈의 상판을 상상해 봐!
그렇다고 내가 어떻게 되는 것도 아냐. 힐슈만 녀석은 무서워서 끽 소리도 못할
테니까. 사무적인 착오라고 해명하면 그것으로 끝나버리는 거야. 흔히 있는 일이니까."
  그레버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용기가 대단해."
  "용기? 그만한 일에 무슨 용기가 필요하겠나! 장난으로 할 수도 있지."
  "그렇지 않아. 반드시 용기가 필요하지. 그런 짓을 하면 다음에는 자기가 죽게
되니까."
  슈타인브레너는 통쾌한 듯이 웃어댔다.
  "바보 같은 소리 마라! 그건 할머니들이 지껄이는 미신이야."
  "절대로 미신이 아냐. 그런 짓을 하는 인간은 자기 자신의 죽음을 초래하고 있는
거야.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봐, 설마 그게 진실이라고 단정하는 건 아니겠지."
  "난 진심으로 믿고 있어. 너도 믿어야 해. 이건 옛날부터 전해지는 게르만 민족의
신앙이야. 난 네 장화를 신고 싶지는 않아."
  "머리가 돌았군!"
  슈타인브레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제 웃지 않았다.
  "난 그런 못된 짓을 한 녀석을 둘이나 알고 있어. 둘 다 죽어버렸지. 한 놈은
그래도 운이 좋았던 편이야. 실탄이 사타구니에 명중했으니까. 덕분에 성불구자가
되었지. 너도 그 정도로 면죄를 받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쌍둥이나 세 쌍둥이는 낳을
수 없어. 그야 물론 다른 녀석이 대신 수고 좀 하면 되겠지만. 당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건 피가 순수해야 한다는 것이니까. 개인은 전혀 문제가 안되는 거야."
  슈타인브레너는 그레버를 잔뜩 노려보았다.
  "이봐, 너 정말 이상해졌구나. 넌 전에도 그랬었나?"
  슈타인브레너는 꼼짝않고 서 있다가 이윽고 그 자리를 물러났다. 그레버는 상체를
약간 뒤로 젖혔다. 일선으로부터 굉음이 들려오고 까마귀가 어지럽게 날아 다녔다.
그는 전방을 한 번도 떠나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자정에서 2시까지 척후를 나갔다. 그의 순회 구역은 마을을 한 바퀴 도는
것이었다. 곳곳마다 파괴된 건물의 잔해가 전선의 포화를 배경으로 새까맣게 서
있었다. 포구에서 토해내는 섬광으로 명암이 공존하면서 깜박깜박 하늘이 흔들렸다.
  아무런 예감도 없이 일시에 고통이 밀려왔다. 그는 여행중의 며칠 동안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마비되고 허탈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지금 온몸을 갈가리
찢어 놓는 것처럼 고통이 되어 새롭게 각인되고 있었다.
  그는 그대로 서서 기다렸다. 이런 마음의 흐트러짐은 적어도 냉정하게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평정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고 다만 모든 것을 상실했다는 고통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영구히 잃어버린 것이다. 어디를 보아도 가교는 없었다. 그는 그의 내부로
온 신경을 돌렸다. 미세하나마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진창에 빠진 구두를 빼내려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구두의 밑창에 축축한
흙뭉치가 착 달라붙어 있었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소리없이 흘렀다.
  "지치겠는데." 샤우워였다.
  그는 파괴된 가옥 앞에 서 있었다.
  "적어도 사방 1 킬로미터 이내는 엿들을 수 있지. 그런데 넌 무엇을 하는 거야.
체조라도 하나?"
  "샤우워, 결혼은 했을 테지."
  "물론이지. 농장을 갖고 있는데 결혼을 안 할 수 있지. 여자가 없으면 농장은
지탱할 수 없어."
  "결혼한 지 얼마나 됐지?"
  "15 년 그런데 왜?"
  "결혼하고 나서 그런 긴 세월이 지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무슨 소리야! 도대체 무엇이 어떻다는 말인가?"
  "자네를 항상 묶고 있는 쇠사슬 같은 것 말야. 무엇인가 항상 가슴속에 머물고
있으면서 언제나 그곳으로 가고 싶어 하나?"
  "쇠사슬이라니, 무슨 뜻인가? 물론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하지. 솔직히 오늘도
종일 그런 생각을 했어. 지금은 씨앗을 뿌리고 나무를 심어야 하는 시기지! 그런
생각을 하면 미칠 것만 같아."
  "난 자네의 농장에 대해서 묻는 거 아니라 마누라에 대해서 묻는 거야."
  "그것도 마찬가지야. 아까도 말했지만 농장은 여자가 없으면 절대로 안돼. 그런데
그게 어떻게 됐다는 거야? 물론 걱정이야 되지. 더구나 임메르만은 전시의 포로들은
혼자 있는 여자와 동침한다는 말을 멋대로 지껄이고 있어."
  샤우워는 코를 풀었다.
  "그 녀석은 이렇게 떠들어대지. 여자가 한 번 남자 맛을 알게 되면 남자 없이는
도저히 안된다는 거야. 반드시 다른 사내를 찾는다는 거야."
  "아아, 바보 같으니라구!" 그레버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그 쓸개 빠진 놈은 여자란 다 똑같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야말로 바보의
온상이지."
      26
 
  그들은 이미 구별할 수 없었다.
  얼굴은 물론이고 군복조차 제대로 분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병사들은 철모를
보거나 목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아군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참호는 이미 오래 전에
무너져 내렸다. 유산탄의 구덩이와 방어진지의 꾸불꾸불한 선이 바로 전선이었다.
전선은 항상 변하고 있었으며 이미 비, 굉음, 야음, 폭발의 섬광, 흙탕물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드디어 제공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적군의 비행기가 분쇄한 것이다. 굵은
빗발이 사납게 뿌려지고, 그와 함께 폭탄이나 수류탄이 유성처럼 날아들었다.
  탐조등의 불빛은 흩어진 구름 사이를 요란하게 왔다갔다했으며 고사포의 포화는
격동하는 지평선의 굉음을 뚫고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불덩이가 된 비행기가 순식간에
추락하고, 예광탄이 불을 토하는 비행기를 쫓아서 먼 곳으로 사라졌다. 황백의 낙하산
조명탄은 허공을 밝히고 있다가 벼랑에서 떨어져나가 듯이 사라졌다. 그러면 다시
맹렬한 사격이 발사된다.
  12일째였다. 처음 사흘은 방어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철조망을 가설한 진지는
포격을 잘 견뎌냈다. 마침내 외곽의 진지가 붕괴되었다. 방어선에는 적군의 전차가
돌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몇 킬로미터 후방에서 대전차포가 전차대의 돌파작전을
저지시켰다. 미명의 하늘 아래에서 전차가 마치 뒤집어진 딱정벌레처럼 전복되어
바퀴를 공전시키고 있었다.
  징벌대대는 길을 정비하고 무전을 복구하기 위해서 투입되었다. 그들은 거의 엄호도
받지 않고 작업을 해야 했으므로 두 시간 동안에 반 이상이 희생되었다. 전투기의
엄호도 없는 폭격기가 철조망 진지를 향하여 저공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6일째는
진지의 절반 이상이 쓸모없게 되어 버렸다. 진지는 단지 엄폐물에 지나지 않았다.
소련군은 야습을 기도했으나 그대로 격퇴되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노아의 대홍수가 시작된 것 같았다. 병사들은 이제
동료의 얼을 보고도 구별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제각기 포탄 구덩이의 질퍽한
속을 같은 보호색을 지닌 벌레처럼 기어다니고 있었다.
  중대는 간신히 두 개의 기관총을 장치한, 파괴된 진지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곳의
배후에는 소수의 투척병이 서 있었다. 다른 병사들은 포탄 구덩이와 파괴된 돌벽의
잔해 뒤에 잠복하고 있었다. 라에가 한쪽 진지를, 마츠가 다른 하나의 진지를 방어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사흘이나 사수했다.
  이틀째, 탄약이 거의 바닥났다. 소련군은 간단하게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잠잠했다. 해가 기울어 질 무렵, 독일군의 비행기 두 대가 날아와서
탄약과 식량을 투하했다. 병사들은 그중의 일부를 끌어당겨서 게걸스레 먹어치웠다.
야간에 원군이 도착했다. 공병대가 통나무 길을 완성했다. 한 시간 후에는 포병에
의한 준비 포격도 없이 기습적으로 공격이 감행되었다. 전방 50 미터 거점에서
소련군이 갑자기 공격을 개시했다. 소련군이 던진 수류탄 중에는 불발탄도 여러 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