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없이 다가온 신부가 뒤에 서 있었다.
집사가 두세 마디 설명하자 신부가 제지했다.
"베벨, 전능하신 하느님을 모독하는 게 아냐. 이분들이 여기서 밤을 새워야 하는
것만도 실로 가슴 아픈 일이다."
신부는 그레버를 보았다.
"내일 지낼 곳이 마땅치 않으면 밤 9시에 제7관으로 오시오. 나는 비덴데이크라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그 자리를 떠났다.
"자, 우리를 안내해 주시오! 하느님의 하사관님, 소령님이 당신에게 명령을
내리셨소. 당신은 복종해야 돼. 교회는 몇 세기에 걸쳐 성공한 유일한 독재체제다.
마당이 어디요?"
집사는 성기실을 지나 그들을 뜰로 안내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미사용의
법의가 살짝 드러나고 있었다.
"신부님의 묘 위에서 잠을 자면 안되오. 알겠소?" 베멜이 투덜댔다.
"저기 회당 옆에서 자란 말이오. 그리고 절대로 함께 잘 수 없소. 따로따로 자야
하오. 옷도 벗을 수 없고."
"구두는?"
"구두도 안되오."
그들은 회당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레버는 텐트와 모포를 잔디 위에 깔고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녀는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뭐가 그리 우습지?"
"그 집사의 하는 짓이 너무 우스워서. 그리고 당신도."
"알겠어."
그레버는 가방을 벽에 기대어 놓고 그 앞에 배낭을 베개처럼 놓았다. 그때 갑자기
여자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싫어! 싫어요! 아아 아."
비명은 숨가쁜 절규로 변했다.
"조용히 하라고!"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여자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조용히 하라니까!"
다시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순간, 비명소리가 뚝 그쳤다.
"저러니까 우리는 지배자적 민족이지. 꿈 속에서도 명령에 복종하고 있으니."
그들은 자리에 누웠다. 그들이 차지한 벽쪽으로는 두 사람밖에 없었다. 폭탄으로
파괴된 탑 뒤로 둥근 달이 걸려 있었다. 신부들의 오래 된 무덤가에도 한줄기의 빛이
내리고 있었다. 뜰 중앙의 장미넝쿨 속에 커다란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23
교회의 무너진 탑 주위에 제비가 날아다녔다. 아침햇살이 모든 것들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레버는 스토브를 싼 보따리를 끌렀다. 취사가 허가되어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병사들의 습관에 따르기로 했다. 그는 반합을 들고 수도를 찾아다녔다.
수도는 석상 뒤에 있었는데 붉은 턱수염의 사내가 입을 딱 벌린 채 거기에 잠들어
있었다. 그는 외발이었다. 사내가 벗어 놓은 의족이 바로 옆에 놓여 있었다.
그레버는 회당 안을 슬쩍 들여다봤다. 과연 집사가 말한 대로 잠자리는 남녀가
따로따로 마련되었으며 남쪽에는 여자들만 모여 있었다.
그가 돌아오자 엘리자베스가 일어나 있었다. 그녀는 회당 안에서 보았던 혈색 없는
얼굴들과는 달리 생기가 돌았다.
"세수할 곳을 발견했어. 사람들이 모여들기 전에 가지. 종교단체는 언제나
위생시설들이 불충분해. 신부들의 세면장을 알려줄게."
그녀는 웃었다.
"당신은 여기서 커피나 끓이세요. 어쩜 도둑맞을지도 몰라요. 어느 쪽으로 가면
되죠?"
그는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녀가 뜰을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찌나 잠을
곱게 잤는지 옷은 금방 다림질이라도 한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사랑스런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하하, 주님의 마당에서 음식을 끓이는군!"
집사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더구나 슬픔의 면류관 상 앞에서!"
"기쁨의 면류관은 어디 있소? 있다면 그리로 가겠습니다."
"여긴 전부 신성한 땅이오. 당신은 신부님들이 잠들어 있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가?"
"난 지금까지 공동묘지를 돌아다니며 밥을 지어 먹었소."
그레버는 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로 가면 좋은지 말하시오. 여기에도 주보나 임시 취사장 같은
게 있소?"
"주보?"
집사는 마치 썩은 과일이라도 씹은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여기에 말이오?"
"나쁘진 않을 것 같소."
"당신 같은 이단자들은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리스도의 성역에 음식점이라니!
그야말로 신에 대한 모독이다!"
"그건 모독이 아니오. 그리스도가 약간의 빵과 생선으로 몇 천명을 배불리 먹게
했다는 건 당신도 잘 알 것이오. 자, 비키시지. 지금은 전시야."
"주임 사제 비덴데이크님께 너의 모독을 고하겠다!"
"마음대로 하라구, 이 살쾡이 같은 놈아. 난 쫓겨나면 그만이야!"
집사는 짐짓 위엄을 보이면서 물러갔다. 그레버는 빈딩그의 유산 가운데 하나인
커피 봉지를 뜯고 냄새를 맡았다. 그는 커피를 끓일 준비를 서둘렀다. 그윽한 향기가
피어오르며 즉시 반응을 일으켰다. 무덤의 그늘에서 잠들어 있던 사내가 재채기를
하면서 가까이 왔다.
"한잔, 어때?"
"비켜주게. 여기는 하느님의 집이야. 여긴 시주를 주진 않아, 받기만 하지."
엘리자베스가 오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경쾌한 걸음걸이로
걸었다.
"어디서 커피를 얻었죠?"
그녀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빈딩그의 유산이지. 빨리 마시지 않으면 저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밟히고 말거야."
태양은 어느새 슬픔의 면류관 석상 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그레버는 배낭에서 빵과
버터를 꺼냈다. 주머니칼로 빵을 자르고 버터를 발랐다.
"진짜 버터군요. 이것도 역시 빈딩그의?"
"모든 것을 거기서 얻었지. 이상해 그는 내게 무척이나 친절했는데 난 녀석이
결코 좋아지지 않았어."
"그럴 수도 있어요."
엘리자베스와 그레버는 나란히 배낭 위에 앉았다.
"저는 일곱 살 때 이런 식으로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난 빵장수가 되고 싶었어."
그녀는 유쾌하게 웃었다.
"대신에 빵을 공급하는 사람이 되었군요. 지금 몇 시나 되었을까요?"
"짐을 정리해 놓고 공장에 바래다 줄게."
"아녜요. 그보다는 되도록이면 이 양지쪽에 오래 있도록 하세요. 짐을 싸려면
시간이 너무 걸리고, 또 전부 맡기려면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니까. 회당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요."
"알았어. 여기서 담배를 피워도 되겠지?"
"글쎄요? 그렇지만 당신에겐 상관없겠죠."
"쫓겨날 때까지 나 하고 싶은 대로 해야지. 오늘은 옷을 홀랑 벗고 잠을 잘 수 있는
곳을 찾아내야겠어. 비덴데이크 사제에게 가고 싶지 않지?"
"폴만 선생님 쪽이 낫겠어요."
"8시 10분 전이야. 당신 출발해야 돼. 공장으로 마중 갈게. 만약에 무슨 일이 있을
경우, 위테 부인의 정원이나 바로 이 자리야."
"알겠어요." 엘리자베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의 휴가기간 동안에 하루종일 떨어져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군요."
"오늘밤은 뜬눈으로 새우는 거야. 그러면 허무하게 보낸 하루를 충당할 수 있지."
그녀는 그에게 키스를 하고 급히 나섰다. 그레버는 누군가의 웃음소리를 듣고 화가
나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젊은 여자가 사내아이를 붙잡고 원기둥 사이에 서 있었다.
아이는 여자의 머리카락을 잡고, 여자는 아이를 부둥켜안고서 킬킬거리고 있었다.
그는 짐을 꾸리고 반합을 닦으러 갔다. 의족의 사내가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이봐."
그레버는 걸음을 멈추었다.
"커피를 마신 건 자네가 아니었나?"
"맞아. 우린 남김없이 마셔버렸지."
"그것은 나도 알아."
사내는 커다란 파란색의 눈을 갖고 있었다.
"내가 말하는 건 찌꺼기야. 그걸 버리려거든 나를 주게. 재탕을 할 수 있으니까."
"좋아."
그레버는 찌꺼기를 모조리 그에게 주고 짐을 맡기기 위해 예치소로 갔다. 경망한
집사와 한바탕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처음으로 대하는 붉은 코가
나와 있었다. 그는 성찬식의 포도주 냄새를 풍기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지기는 불에 탄 아파트의 창가에 앉아 있다가 그레버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레버는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 편지 온 게 없나?"
"있지. 당신 부인 앞으로. 수취인이 쿠루제로 되어 있어. 그러니까 틀림없겠지."
그레버는 편지를 받았다. 그는 문지기가 묘한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그것은 게슈타포로부터 온 편지였다. 가슴이 철렁했다. 봉투를 뒤집어보니까
이미 뜯어 본 흔적이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언제 왔지?"
"어젯밤."
그레버는 문지기가 읽어 보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엘리자베스에게 오전 11시
30분까지 출두하라는 통지서였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 11시가 거의 다 되고 있었다.
"좋아, 겨우 도착했군! 이 편지가 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렸지."
그는 편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또 없나?"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문지기는 무엇인가를 찾는 듯한 눈초리로 반문했다.
그레버는 웃었다.
"우린. 아파트가 필요하지. 적당한 곳이 없나?"
"몰라. 당신은 계속 있을 건가?"
"곧 떠나야지. 그러나 내 아내는 방이 필요해."
"그래?" 문지기는 고개를 흔들었다.
"만약에 구해준다면 수고한 값을 톡톡히 낼 텐데!"
"그래?" 문지기가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레버는 그곳을 떠났다. 문지기의 시선이 등에서 느껴졌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건물의 잔해를 흥미진진하게 쳐다보는 척하다가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았다.
그는 길모퉁이를 돌자 재빨리 편지를 꺼냈다. 인쇄물이었기 때문에 편지에서는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엘리자베스의 이름과 날짜만이 찍혀 있었다.
그는 종이쪽지를 잔뜩 노려보았다. 거기서 죽음의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그레버는 카타리네 교회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다.
"에른스트!"
그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요셉이 군용 외투를 입고 서 있었다. 그는 그레버를 못 본
것처럼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그레버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느릿느릿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성기실 옆
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요셉이 조심스럽게 눈짓을 했다. 그레버는 제단 앞으로
갔다가 다시 주위를 살펴보고 나서 그의 옆에 앉았다.
"폴만이 잡혔어." 요셉이 속삭였다.
"뭐라고요?"
"오늘 아침에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어."
그레버는 문득 폴만의 체포가 엘리자베스의 출두 통지서와 무슨 관련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요셉을 보았다.
"폴만 선생님이!" 그는 겨우 한 마디를 했다.
요셉이 고개를 들었다.
"또 무슨 일이 있나?"
"아내에게 호출장이 왔습니다."
"언제 출두하라고 했지?"
"오늘 11시 30분입니다."
"호출장을 갖고 있나?"
"네."
그레버는 요셉에게 편지를 넘겨주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잡혀가셨죠?"
"잘 몰라. 돌아가 보니까 문 앞의 돌이 다른 곳에서 뒹굴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걸
짐작할 수 있었지. 폴만이 끌려가면서 그 돌을 걷어찼던 거야. 그게 암호였어. 한 시간
후에 폴만의 책들을 자동차에 싣고 있는 것을 보았지."
"뭔가 선생님과 관련될 만한 게 있었습니까?"
"그런 건 없을 거라고 생각해.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건 모조리 묻어버렸어. 물론
통조림도."
그레버는 요셉이 들고 있는 쪽지를 보았다.
"마침 선생님께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여쭤 볼 생각이었지요."
"그래서 나도 여기로 온 거야. 게슈타포의 끄나풀이 잠복해 있는 게 확실해."
요셉은 호출장을 돌려주었다.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모르겠습니다.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도망가지."
요셉이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나 혼자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볼 생각입니다."
"만일 자네 부인에게 용건이 있다면 자네에겐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을 걸세."
그레버는 등골이 서늘했다. 그러나 요셉은 사실을 그대로 말했을 뿐이다.
"만약에 아내를 체포할 생각이라면 폴만 선생님의 경우와 똑같은 식으로 체포했을
겁니다. 무엇인가 다른 일이 있을 수도 그래서 일단 제가 먼저 갈 생각입니다."
그는 자신이 없게 말했다.
"그렇다면 달아날 필요는 없어."
"부인은 유대인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얘기가 다르지. 유대인이라면 달아나야 해. 부인이 지방으로 여행을
떠났다고 할 순 없을까?"
"안됩니다. 근로봉사자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잠시 생각했다.
"어쩌면 자네 말대로 다른 일인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구태여 호출장을 보낼 필요가
없을 텐데."
"장인이 강제수용소에 있습니다. 아내와 함께 한집에 살고 있던 여자가
밀고했는지도 모릅니다."
요셉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장인의 체포와 관련이 되는 서류들은 모두 찢어버리게. 편지라든가 일기 같은 걸
말야. 그런 다음에 혼자 가 보게. 자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지?"
"그렇습니다. 아침에 받았기 때문에 공장에 있는 아내에게 연락할 수가 없었다고
말할 생각입니다."
"그게 좋겠군. 자네야 어차피 일선으로 돌아갈 몸이니까. 자네에겐 손대지 않겠지.
부인의 은신처가 필요하다면 내가 알려주지. 좌우간 다녀오게. 우린 오후에 여기서
다시 만나세."
요셉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비덴데이크 신부님의 고해실이야. '외출' 이란 표찰이 걸려 있는 곳이지. 그 표찰이
걸리면 한두 시간 동안 편안하게 잘 수 있지."
그레버는 밖으로 나갔다. 지금까지 교회 안의 싸늘하고 어둑한 곳에 있었기 때문에
밖으로 나오자 햇빛에 눈이 부셨다. 따가운 햇빛은 게슈타포의 도구가 되어 그에게로
쏟아졌다. 그는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이 손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달아난 것 같았다. 벤치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는 남자는 자기로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평화의 상징처럼 보였다. 거리에서 대화를 나누고 웃음을 터트리는
것은 그에게는 이미 별세계의 풍경이었다.
그레버는 게슈타포의 건물로 들어가서 호출장을 제시했다. 친위대원은 호출장을
대충 보더니 그를 부속 건물로 데리고 갔다. 통로는 어디에나 환기되지 않는 사무실
특유의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지정된 방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그 방에는 이미 세 사람의 남자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사내는 안마당을 향한 창가에 서 있었다. 그는 두 손을 뒤로
돌리고 피아노라도 치듯이 오른쪽 손가락으로 왼쪽 손등을 두드렸다. 다른 두 사내는
의자에 앉아 정면만 주시하고 있었다. 그레버가 들어서자,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리고 바라보다가 얼른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안경을 쓴 친위대원이 들어오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레버는 문에서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자네가 여기에 무슨 볼일이지?"
친위대원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일반적으로 군인은 군법회의의 권한 밑에 놓여
있었다.
그레버는 편지를 제시했다. 친위대원은 그것을 읽어내려갔다.
"이건 당신에게 보낸 게 아냐. 쿠루제양 앞으로 발송했어."
"그녀는 제 아내입니다. 우린 얼마 전에 결혼했습니다. 지금 아내는 군수품
공장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제가 대신 출두했습니다."
그레버는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 가지고 온 결혼 증명서를 꺼냈다. 친위대원은
단안을 내릴수 없는지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기 시작했다.
"좌우간, 지하실의 72 호실로 가 보게."
그는 그레버에게 서류를 돌려주었다. 지하실은 게슈타포의 건물 중에서도 가장
평판이 나쁜곳이었다.
그는 계단을 하나씩 내려갔다. 그를 향해서 걸어오고 있는 두명의 남자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모든 위험이 시작되고 있는 사람과 자유의 몸이 되어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서로 교차되었다.
72 호실은 굉장히 큰 방이었는데 칸막이를 이용하여 몇 개의 사무실로 나뉘어져
있었다. 직원이 그레버에게서 편지를 받아들었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 대신에 출두한
이유를 설명하고 결혼증명서를 제시했다.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을 대신해서 서명하겠소?"
"네"
직원은 두 통의 서류를 책상 너머로 건네주었다.
"여기에 서명을 한 다음에 이렇게 쓰시오. 엘리자베스 쿠루제의 남편이라고. 그리고
결혼한 날짜와 호적과의 이름을 기입하도록. 서류 한 통은 가져가도 좋소."
그레버는 아주 천천히 서명을 했다. 인쇄물을 읽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무슨 내용인지도 전혀 모르고 서명만 하기는 싫었다.
"그런데 그 재는 어디로 갔지?"
그는 마침내 호통을 쳤다.
"홀트만, 넌 또 엉망진창이로군. 빨리 쿠루제의 꾸러미를 가져오란 말야."
칸막이 저쪽에서 누군가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레버는 자신이 검속중인
수인 베른하르트 쿠루제의 유골 수령증에 서명했음을 알게 되었다. 서류에는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사인을 밝히고 있었다.
직원은 칸막이 뒤쪽으로 갔다가 담배상자를 가지고 나타났다. 상자는 밤색 종이로
포장을 한 다음에 끈으로 묶여 있었다.
"이것이 재다." 직원은 졸린 눈으로 그레버를 응시했다.
"자네는 군인이니까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는 없지만 절대 침묵을 지켜야만 한다.
사망통지는 일체 허락되지 않는다. 신문에 내거나 우편으로 알릴 수도 없다. 장례식도
물론 금지다. 알겠나?"
"알았습니다."
그레버는 담배상자를 받아들고 그곳에서 벗어났다.
그는 엘리자베스에게는 비밀로 하기로 했다. 그녀가 나중에 알게 되느냐는 우연에
맡기기로 했다. 그러나 알아 낼 수 없을 것이다. 게슈타포는 더 이상 통지를 하지
않을 테니까. 현재의 고민, 그녀를 혼자 남겨두어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지금
그녀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잔인한 짓이다.
그는 카타리네 교회로 걸음을 재촉했다. 거리에는 생기가 넘쳐흘렀다. 위협이
사라지고 그것이 주검으로 변해서 돌아왔다. 그렇지만 낯선 인간의 주검이었다. 그는
이미 그런 주검에 익숙해져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몇 번
보았을 뿐이다.
그는 옆구리에 낀 담배상자를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쿠루제의 유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재일 것이다. 홀트만이 다른 재를 내놓을 수는 얼마든지 있다. 강제수용소
직원들이 이런 일에 일일이 신경을 쓰는 일은 절대로 없다. 대량 소각에 있어서
개개인의 재를 따로 구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화부가 삽으로 떠서 봉지에
담으면 그것으로 끝나버린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하는지 그레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잔학한 행위와 관료주의가 결부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유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망설였다. 어딘가의 폐허에 묻어 버릴 수도 있다.
아니면 공동묘지에 묻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허가를 얻어야 하고 또
묘 자리도 필요하다. 그러면 엘리자베스가 눈치를 채게 된다.
그는 교회로 들어서서 베덴데이크 사제의 고해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고해실에는
'부재중'이라는 표찰이 걸려 있었다. 그는 녹색의 커튼을 젖혀 보았다. 요셉이 그를
보았다. 그는 금방이라도 그레버를 걷어차며 달아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레버는
그곳을 지나쳐서 성기실 옆의 좌석으로 갔다.
이윽고 요셉이 왔다. 그레버는 담배상자를 가리켰다.
"이것이었습니다. 장인의 유해입니다."
"이것뿐인가?"
"네. 그런데 폴만 선생님의 소식은?"
"아니."
그들은 함께 유해상자를 보았다.
"담배상자로군. 흔히 봉지에 넣어 주는데 이건 실제로 관인 셈이지. 어디에 모실
생각인가? 이 교회에?"
그레버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결정을 내렸다.
"회당의 뜰로 하겠습니다. 거긴 공동묘지와도 같으니까."
"그런데 당신은?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습니까?"
"저 옆문으로 빠져나가서 혹시 수상한 자들이 없는가 보고 오게. 난 이곳을 떠나야
해. 이제부터 반유대주의자인 집사가 당번이야."
"알겠습니다."
그레버는 태양 아래에 서 있었다. 잠시 후에 요셉이 밖으로 나와서 그레버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행운을!"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행운을 빕니다."
그레버는 되돌아갔다. 때마침 회당의 정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날개에 빨간 반점이
있는 두 마리의 나비가 흰꽃이 만발한 나무 주위를 날아다녔다. 그레버는 묘지를
조사하기 위해서 그쪽으로 갔다. 무덤은 세 개나 폭삭 허물어져 있었다.
그는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한 카톨릭 교도의 유해임을 쪽지에 적어 상자에 넣었다.
나중에라도 상자가 발견될 경우를 생각해서였다.
그는 대검으로 잔디를 자르고 바닥을 파서 상자를 묻은 다음에 흙을 뿌렸다.
다행히도 이 유해가 베른하르트 쿠루제의 것이라면 그는 성역에서 안식처를 얻은
셈이다.
그레버는 회당의 돌담에 기대고 앉았다. 돌담은 햇볕을 오랫동안 받아 따뜻했다.
어쩌면 신을 모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베른하르트 쿠루제는 카톨릭 신자였다.
신자들은 화장이 금지되어 있다. 그렇지만 지금은 전시니까 교회에서도 묵인할
것이다.
아니다. 쿠루제의 유해가 아니라 개신교 교도나 정통파 유대인을 포함한 다른
희생자들의 유해일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 없을 것이다. 여호와의 신도, 개신교의
신도도 굳이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리에서 무명용사의 묘를 본 적이 있었다. 무명용사의
묘는 프랑스의 위대한 전투를 기념한 개선문 밑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도록
장식되어 있었다. 그에게는 신부 브류멜의 묘비가 세워져 있고 그 밑에 담배상자가
묻혀 있는 잔디밭이 그것과 동등하게 느껴졌다.
"우린 오늘밤 어디서 자죠? 교회?"
"아냐. 기적이 일어났어. 오늘 위테 부인에게 갔었어. 거기서 빈 방을 하나 얻었어.
부인의 딸이 거주하던 방인데 며칠 전에 시골로 간 모양이야. 우린 거기서 묵을 수
있어. 그리고 내가 떠난 후에도 당신은 그 방을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짐은 벌써
옮겼어. 당신의 휴가는 어떻게 됐지?"
"네, 받았어요. 이제 당신은 나를 기다리지 않아도 돼."
"고마워! 오늘밤은 밤이 새도록 얘기하다가 내일 낮에 실컷 자기로 하지."
"응. 별이 나올 때까지 정원에 앉아 있어요. 전 그전에 모자를 사야 해요."
"모자를?"
"오늘 같은 날은 모자를 사야 해요."
"모자는 왜? 오늘밤에 쓸 작정인가?"
엘리자베스는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것도 그렇죠.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모자를 사는 상징적인
행동이죠. 모자는 깃발을 의미해요. 행복할 때도 사고 불행할 때도 살 수 있는. 당신은
이해 못할 테죠."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하나 사기로 하지. 그리고 당신의 자유를 축하해야지.
그것이 저녁식사보다 더욱 중요해. 그런데 모자를 파는 가게가 있을까? 아,
의료권은?"
"갖고 있어요. 그리고 전 모자를 파는 가게를 알고 있어요."
"좋아. 당신의 금빛 드레스에 어울리는 모자를 사지."
"어떤 모자이든지 사기만 하면 돼요."
진열장의 유리가 부서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들은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모자 두 개가 걸려 있었는데 하나는 조화가 꽂혀 있고 다른 하나는 부드러운 새깃으로
장식을 한 모자였다. 어느 것도 엘리자베스에게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그레버는
그녀와 모자를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백발의 부인이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상점은 창문마다 등화관제가 되어 있었다.
그레버는 두 여자의 대화가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문 옆에
놓인다 부서져가는 의자에 앉았다.
여주인은 전등을 켜고 상자에서 재료를 끄집어 냈다. 회색의 어두컴컴하던 가게가
마술의 동굴로 변했다. 파란색, 빨간색, 장미색 등 현란한 모자의 색깔이 확
타올랐다가 구석구석 퍼져나갔다.
모자들은 그 좁은 공간에서 축제라도 즐기는 것처럼 현란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림
속에서 방금 빠져 나온 것처럼 빛의 홍수 속을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그레버는 묵묵히
그런 색의 세계를 지켜 보고있었다. 그는 두 여자의 속삭이는 듯한 대화를 내용도
모르면서 듣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샘물이 조용히 흘러가는 소리처럼 평화롭게
들렸다. 그레버는 이 현실과 동떨어진 행복 속에 서서히 잠기고 있었다.
24
하늘에는 무수한 별이 떠 있었다. 돌담을 기어오른 야생의 포도넝쿨이 소리없는
시계의 추처럼 바람에 휘날렸다.
"전 지금 울지 않아요. 혹 눈물을 보이더라도 조금도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우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무엇인가가 그렇게 시키고 있는 거에요. 때때로 울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러나 그건 너무 행복하기 때문이죠."
그녀는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대고 가슴에 안겨서 눈을 감고 있었다. 침대는 검은
호두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똑같은 호두나무로 된 화장대가 구석에 있고, 창가에는
작은 테이블과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전 몹시 행복해요. 지난 2주일 동안에 너무 많은 일이 생겨서 내 안에 모두 채울
수 없을 정도라고요."
"난 당신을 어느 시골에 있게 하고 싶어."
"당신이 떠난 다음에는 전 어디에 있으나 마찬가지에요."
"그렇지 않아. 시골은 공습을 받을 우려가 적으니까."
"곧 여기도 폭격이 끝나겠죠. 시내도 이제 폐허가 다 됐으니까요. 전 이 방이 몹시
마음에 들어요. 더구나 위테 부인도 있고."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전 곧 안정을 찾을 거에요. 제가 지금 흥분해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전 지금
몹시 행복해요. 단조롭고 지루한 암소의 행복에는 비할 수도 없어요."
"암소의 행복? 그런 건 아무도 바라지 않아."
"그래야 오랫동안 견뎌낼 수 있을 것만 같아요."
"난 다만 그것을 인정할 수 없을 뿐이야."
엘리자베스는 그레버를 보았다.
"당신, 졸리지 않아요? 실컷 자고 싶지 않으세요? 내일밤이 지나면 그렇게 할 수도
없어요."
"기차 안에서도 얼마든지 잘 수 있어. 도착하려면 2, 3일 걸리니까."
"침대에서 잘 수 있을까요?"
"아니, 내일밤만 지나면 야전용 침대나 건초 위에서 자야 해. 곧 익숙해지지. 이제
더워지잖아. 겨울이 견디기 힘들지."
"또 겨울을 소련에서 보내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이런 식으로 후퇴만을 계속하다가 겨울까지는 폴란드나 독일에 주둔하게 될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그다지 춥지는 않아."
이번에는 '언제 다시 휴가를 오시나요?' 하고 물을 차례다. 이제 그런 것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녀는 물어야 하고 나는 대답할 의무가 있다. 빨리 끝내는 것이
좋다. 나는 지금 완전히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다. 그때였다. 밤의 정적을 깨고
사이렌 소리가 크게 들렸다.
"여기 있기로 해요. 전 옷을 입고 허겁지겁 방공호로 달려가긴 싫어요."
"알았어."
그레버는 테이블을 한쪽으로 밀어붙이고 밖을 내다보았다. 밤하늘은 맑고 창문으로
달빛이 들어왔다. 현실과 동떨어져서 마치 꿈속의 밤을 맞이한 것처럼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한 밤이었다. 위테부인이 문 밖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부인의 얼굴은
몹시 창백했다. 그는 창문을 열었다.
"지금 막 깨우려던 참이었어요." 부인은 소음 속에서 소리를 질렀다.
그레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공호 라이프니츠가." 토막토막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손을 흔들었다. 부인은 집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창가에 서서 기다려
보았다. 부인은 다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녀도 집에 남아 있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는 오히려 그게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부인은 이 집을 떠날 필요가 없다. 정원과 집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력의 보호를
받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무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으며 포도넝쿨조차도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평화의 작은 섬은 파괴의 폭풍을 거부라도 하듯이 화사한 달빛
아래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레버는 뒤돌아 섰다. 엘리자베스는 일어나 앉아 있었다. 어꺠에서 구부러진
부분에 부드러운 그늘이 지고 유방이 실제보다 더 크게 보였다. 그녀는 갑자기
먼곳에서 온 사람처럼 밖의 소음에도 아랑곳 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세계의 종말에 직면해 있는 정원처럼 신비로운 베일에 싸여있는 듯이 보였다.
"위테 부인도 그대로 집에 남았어."
"이리 오세요."
그는 침대를 향해 걸어가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거울 속에 있는
얼굴은 그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남자였다.
"어서요."
그는 그녀에게로 머리를 숙였다. 그녀는 가슴에 그를 안았다.
"난 조금도 무섭지 않아요."
"오늘밤에는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는 자기 자신이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믿음은
정원이나 집, 엘리자베스의 어깨와 그를 충만시킨 고요한 달빛과 연결된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는 다시 힘주어 말했다.
그녀는 몸을 덮은 천을 바닥에 던지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누워
있었다. 그녀의 허리에서부터 탄력있는 긴다리가 죽 이어졌다. 나신은 어깨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면서 가늘어졌다가 다시 배꼽 근처에서 오목해지고 있었다.
넓적다리는 살이 잔뜩 부풀어올라 양편으로부터 검은 삼각형을 향하여 돌입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젊은 여자의 성숙한 육체로서 이미 소녀의 신체는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몸을 바짝대고 다리를 감았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손이 서로 얽혀서 상대를 사로잡고, 깊은 곳으로 받아들였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약간의 틈도 없이 오로지 두 육체만이 존재했다. 그것은 최초의
요란한 격정이 아니었다. 서서히 흐르다가 한곳에서 범람하여 모든 게 소용돌이치면서
마침내 자기를 잊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아득한 곳으로부터 돌아와 있었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자신이 얼마나 멀리 떠났었는지 알 수 없었다. 밖은 조용했다. 무엇인가 착각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옆으로 누운 채 다시 귀를 기울였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폭발하는 소리도 안 들리고 고사포도 날지 않는다. 그는 눈을 감고 똑바로 누웠다.
다시 눈을 떴다.
"오지 않았어. 엘리자베스."
"왔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그들은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레버는 바닥에 버려진 흰 천과 활짝 열려진 창문을
바라보았다. 밤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은 원래의 고요 속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창밖의 포도넝쿨이 다시 바람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그림자가 거울 속에서 움직이고, 밖에서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눈을 감은 채 입을 벌리고 깊은 숨을
쉬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오랫동안 먼
곳에 가 있다. 그도 그렇게 자신을 망각하고 싶었다. 그녀에게서 두려움 같은 게
느껴졌다. 그녀는 어딘가에, 그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곳에 가 있는 것이다. 그를
두렵게 하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갑자기 혼자만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허전함이
밀려왔다. 그는 엘리자베스 옆에서 고독감을 느꼈다.
엘리자베스가 눈을 떴다.
"비행기는?"
"모르겠는데."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배가 고파요."
"나도 그래. 먹을 건 얼마든지 있어."
그레버는 자리에서 일어나 빈딩그의 통조림을 갖고 왔다.
"이것은 치킨이야. 토끼고기, 설탕에 조린 과일도 있어."
그레버는 통조림을 땄다. 엘리자베스가 가만히 누워서 기다리는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그녀는 아직도 신비로운 어둠 속에 있었으므로 재빨리 분주한 주부로
변신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물건을 볼 때마다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난 알폰스에게 나쁜 짓을 한 것만
같아."
"그 사람도 남에게 악한 짓을 했었어요. 그것으로 상쇄할 수 있어요. 당신 장례식에
갔었나요?"
"아니. 제복을 입은 당원들이 들끓어서 그만두었지. 다만 힐테브란트 연대장의
조사를 들었을 뿐이야. 힐테브란트는 우리 모두 알폰스를 본받아 그의 유지를
완수해야 한다고 말했어. 적군과 싸울 때는 냉혹하고 무자비해야 한다더군. 그러나
빈딩그의 최후의 소원은 그게 아니야. 알폰스는 파자마 바람으로 잠옷만 걸친 채
블론드의 여자와 창고에 있었으니까."
그레버는 고기와 과일을 위테 부인이 빌려준 접시에 담았다. 그리고 빵을 자르고
포도주를 땄다. 엘리자베스는 옷을 입지 않고 침대 앞에 서 있었다.
"당신은 군용외투나 깁고 있는 여자 같지는 않아. 마치 매일같이 체조라도 하는 것
같군."
그녀는 웃었다.
"체조라고요? 체조는 절망했을 때 하는 게 아닌가요?"
"그런가? 난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
"절망했을 때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체조를 하거나, 지칠 때까지
뛰어다니거나 방 청소를 하고, 머리가 아플 때까지 머리를 빗기도 해요."
"효과가 있나?"
"절망이 쓰러뜨리기 전까지는.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을 때 말이죠.
최후의 절망에 빠지면 쓰러지는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리고 생명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죠. 숨을 쉴 수 있을 만큼의 알량한
생명이죠. 생활을 위한 목숨이 아니구요."
그레버는 잔을 들었다.
"우린 우리의 나이에 비해 너무 많은 절망을 알고 있어. 잊어버리도록 해야지."
"우린 또 잊는 거에 너무 능숙하거든요. 그것도 함께 망각하고 싶어요."
"좋았어. 토끼고기를 먹게 해준 크라이네르트를 위하여!"
그들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레버는 두 개의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달빛이
술잔 속에 들어 와 있었다.
"모두들 잠든 밤에 일어나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정말 좋군요."
"그래. 당신은 젊고 건강한 하느님의 딸이야. 군용 외투의 노^36^예가 아니고. 나도
이 순간만은 군인이 아냐."
"그런 뜻에서 또 한 잔!"
"마셔야지."
엘리자베스는 잔을 내밀었다.
그레버는 웃었다.
"그와 동시에 우린 비탄에 잠기고 심각한 대화를 나누어야만 했어. 그런데 우린
토끼 한 마리를 거의 다 먹고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거든."
"그게 좋아요."
"만약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게 선물이라고 할 수 있어."
"그건 일선에서 배운 철학인가요?"
"아니지. 여기서 배웠지."
"어쨌든 좋아요. 우리가 그것을 배울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약간의 행운이 필요할 뿐이지."
"우린 그것도 발견했나요?"
"그렇지. 우린 지상에 있는 걸 모두 찾아냈어."
"이미 끝나버렸으니까 당신은 슬프시겠죠?"
"끝난 게 아냐. 약간 변했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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