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소설&드라마

레마르크 作 - 사랑할때와 죽을 때 - 17

淸山에 2011. 9. 3. 15:53

 

  

  


** 
 
 

 

 
 
 
  작렬하는 섬광 속에서 그레버는 눈앞에서 철모를, 그 밑의 하얀눈, 크게 벌린 입
뒤로 수류탄을 던지려고 움직이는 적군의 팔을 보았다. 그는 재빨리 보충병의
수류탄을 빼앗아 움직이는 팔을 향해서 던졌다. 수류탄이 폭발했다.
  "안전핀을 뽑으란 말야!" 그는 보충병에게 호통을 쳤다.
  "당기지 말고 젖히라구!"
  두 번째의 수류탄은 불발이었다. 그는 다시 수류탄을 던지면서 적군의 수류탄이
자신을 향해서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가 바닥에 바짝 엎드리는 것과 동시에, 등에
채찍으로 두들겨맞는 듯한 충격과 흙덩어리가 내려덮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손을 뒤로 뻗으면서 고함을 질렀다.
  "빨리, 빨리! 수류탄을 내 놔!"
  그는 수류탄이 넘겨지지 않자 비로소 뒤를 돌아다보았다. 뒤에 있던 보충병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의 손에 잡힌 것은 물컹한 살덩어리였다. 그는 수류탄을 찾아서
마지막 두 개의 안전핀을 뽑았다. 적군의 그림자가 포탄 구덩이를 살며시
기어오르다가 훌쩍 뛰어넘는 것이 보였다. 그는 진흙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이제는 잡혔다. 잡혀버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구덩이의 한쪽으로 달라붙었다. 이대로
있으면 진흙더미가 보호해 줄 것이다. 낙하산 조명탄의 빛이 보충병의 사지가 갈가리
찢겨져서 사방에 흩어진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추고 있었다. 수류탄이 보충병의 배에
맞아 폭발한 것이다. 그의 몸이 그레버를 구해준 셈이다.
  그는 포탄 구덩이 속에서 머리를 내밀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오른쪽
진지에서는 기관총을 발사하고 있었다. 드디어 왼쪽 진지에서도 사격을 개시했다.
진지가 활약하고 있는 한 절대로 절망할 필요가 없다. 양쪽의 진지에서는 이 지점에
빗발 같은 탄알을 퍼붓고 있다. 적들은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다. 아군 진지의
일부분이 겨우 돌파됐을 것이다.
  그는 진지의 뒤쪽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머리가 지근지근했지만 의식만은 점점
또렷해졌다. 선명한 상념이 의식 속에 있었다. 이것이 노련한 병사와 보충병의
차이였다. 보충병은 지레 겁을 먹고 당황하기 때문에 한층 위험하다. 만약에
소련군들이 전진해 온다면 죽은 척하고 있으면 된다. 진흙탕 속에서 사람을 찾아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는 구덩이에서 기어나와 다음 구덩이 속으로 재빨리 뛰어들었다. 그는 물을
한모금 마시고 나서 다시 기어나왔다. 그 구덩이 속에는 시체가 둘 있었다. 그는
앉아서 기다렸다. 그때 수류탄 소리가 들리고 왼쪽의 진지 근처에서 폭발하는 게
보였다.
  소련군이 진지를 돌파해 양쪽에서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기관총이 불을 토하고
있었다. 이윽고 수류탄의 폭발음이 잠잠해지더니 이번에는 사격을 개시했다.
  그레버는 순식간에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적군은 또 공격을 가해 올 것이다.
놈들은 큰 구덩이부터 하나하나 병사들을 찾아낼 것이다. 작은 구덩이 속에 들어가
있는 게 안전하다. 갑자기 사나운 빗발이 쏟아졌다. 기관총에서 불이 번쩍번쩍 하다가
잠시 중단되더니 내리 포격이 시작되었다. 오른쪽 진지에 직격탄이 명중했다. 비가
내리는 전선의 아침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그레버는 여명이 떠오르기 전에 탈출할 수 있었다. 그는 무작정 뛰어가다가 움직일
수 없게 된 전차 뒤에서 샤우워와 두 사람의 보충병을 만났다. 샤우워의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으며 보충병은 배가 찢어져서 창자가 나와 있었다. 상처를 동여맬 만한 게
전혀 없었지만 설사 붕대를 감는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차라리 빨리 죽는 편이
좋았다. 다른 보충병은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 그는 포탄 구덩이 속에 추락을 했는데
질퍽질퍽한 바닥에서 왜 다리가 부러졌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전차 속에는
새까맣게 탄 승무원들의 해골이 보였다.
  연락 장교가 왼쪽 진지에서 빠져나왔다.
  "진지 옆으로 집합!" 그는 목이 쉬어 소리가 재대로 나오지 않았다.
  "저 구덩이 속에도 누가 있는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위생병이 있습니까?"
  "모두 죽었거나 부상당했다."
  장교는 진지로 갔다.
  "군의관을 데려올게."
  그레버는 배에 빗물이 스며들고 있는 보충병을 향해서 말했다.
  "없으면 붕대라도 갖고 오겠어."
  보충병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진흙위에 누워 있었다.
  "들것에 태워서 너를 끌고갈 수는 없어."
  그레버는 다리가 부러진 병사에게 말했다.
  "이런 진창을 끌고다닐 수는 없어. 우리에게 매달려서 성한 다리로 깡충깡충 뛰란
말야."
  그들은 양쪽에서 부상자를 부축하면서 구덩이쪽으로 조금씩 옮기고 있었다.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한 발자국도 걸음을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보충병을 진지 근처에 있는 벽의 잔해 뒤에 세우고 위생병이 발견할 수 있도록
벽에 철모를 걸어놓았다. 그 근처에 소련병이 두 명 엎어져 있었다. 한 사람은 목이
달아나 버렸으며 다른 사람은 땅에 쓰러져서 주위를 온통 빨간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들은 더욱 많은 소련병들의 시체를 보았다. 그에 못지않은 아군의 시체도
발견되었다. 라에는 왼쪽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한 시간 후에 보급기 한 대가
하늘에서 여러 개의 상자를 투하했다. 그러나 너무 앞쪽으로 떨어뜨렸기 때문에
적군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다시 7 명으로 숫자가 늘어났다. 오른쪽 진지에도 몇 명인가가 모여 있었다. 마츠
소위는 전사했다. 라이네케 특무상사가 지휘를 대신해서 하고 있었다. 탄약은
조금밖에 남지 않았고 수류탄 투척병들은 모두 전사하였다. 그러나 중기관총은 아직
쓸만했다.
  징벌 중대로부터 열 명의 지원병이 왔다. 그들은 탄약과 통조림 등을 운반해 왔고
들것을 가지고 와서 부상병들도 실어갔다.  그중의 두 사람은 미처 전진하기도 전에
공중으로 날아가버렸다. 포격으로 오전 중에는 일체의 연락이 차단되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비가 그치고 태양이 얼굴을 내밀었다. 전방의 날씨는 순식간에
무더워지고 진흙이 말라 딱딱해졌다.
  "적은 경탱크로 공격해 올 거야." 라에가 말했다.
  "제기랄, 대전차포는 어디 있지? 대전차포가 없으면 우리는 전멸이다!"
  폭격은 멈추지 않았다. 오후에 융카 보급기 한 대가 다시 날아왔다. 보급기는
메사슈미트기의 호위를 받고 있었다. 적군의 슈트르 모빅기가 나타나서 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적기 두 대가 격추됐다. 이어서 메사슈미트기가 두 대 떨어졌다. 융카기는
앞으로 전진할 수 없었다. 보급상자는 훨씬 후방으로 떨어졌다. 메사슈미트기가
적기에 맞서 공중전을 전개하였다. 아군기는 소련기보다는 훨씬 속력이 빨랐다.
그러나 공중에는 아군기의 세 배에 해당하는 적기가 까맣게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아군기는 부득이 달아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튿날, 시체 썩는 냄새가 바람에 실려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레버는 진지 안에
앉아 있었다. 아직도 22 명이나 남았다. 라이네케도 이와 비슷한 숫자의 병사들을
반대편에 집합시켜 놓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전사했거나 부상당했다.
처음에는 120 명의 병사들이 있었다.
  그레버는 식사를 마치고 총기를 닦고 있었다.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단지 한 개의 기계에 불과할 뿐이다. 그는 거기에 앉아서 대기하고 잠을 자고
언제나 자기 자신을 방어할 태세를 갖추고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적군의 탱크가 급습했다. 대포와 기관총 때문에 진지는 밤새껏
고립되어 있었다. 한밤중에 끊긴 무전은 몇 번이나 복구했으나 연결되는 즉시
절단되었다. 중대로부터 약속된 지원병은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독일의 포병은
조금씩 약화되어 갔다. 소련군의 포화는 치열했다. 진지는 두 번이나 직격탄을
받았지만 견뎌내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진지라고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바다
한가운데에서 폭풍우를 만난 배처럼 흙탕물 속에 잠겨있는 콘크리트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레버는 어깨에 경상을 입었지만 상처에 코냑을 약간 뿌렸을 뿐이다. 진지는
이제는 폭풍우를 만난 선박이 아니라 대해의 밑바닥에서 흔들리고 있는 잠수함이었다.
시간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병사들은 어둠 속에 뭉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레버는 불과 2주일 전에 거닐었던
고국의 도시는 이미 까맣게 잊었다. 휴가와 함께 엘리자베스라는 여인도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가 죽음과 죽음 사이에 내재한 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은 오로지 진지가 있을 뿐이었다.
  소련군의 경탱크대가 전진을 개시했다. 보병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중대는
탱크를 그대로 통과시키고 뒤따르던 보병에게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달아오른
기관총의 총신이 병사들의 손에 화상을 입혔다. 그들은 쏘고 또 쏘고 마구 갈겨댔다.
소련군의 대포는 이미 그들을 포격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탱크 두 대가 반전을
하면서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기관총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병사들은 틈을
노려 간간이 저격했다. 진지가 비틀거린다고 느끼는 순간 콘크리트가 갈라졌다.
  "수류탄!"
  라이네케가 고함을 질렀다. 그는 한 다발의 수류탄을 어깨에 걸치고 입구쪽으로
갔다. 그는 사격이 일제히 끝나자 진지의 엄호를 받으며 밖으로 기어나갔다.
  "기관총 사수는 저 탱크를 공격하라!" 라에가 명령했다. 기관총은 불꽃을 내며
라이네케를 엄호했다. 라이네케는 한 다발의 수류탄으로 탱크를 폭파할 목적으로
천천히 우회하면서 탱크에 접근해 갔다. 그러나 그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소련군의
기관총이 다시 불을 뿜어댔다.
  이윽고 한 대의 전차가 사격을 멈췄다. 아무도 탱크가 폭발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해치웠다!" 임메르만이 소리를 질렀다.
  기관총은 다른 탱크를 향해 실탄을 퍼부었다. 드디어 탱크는 방향을 돌리더니
자취를 감췄다.
  "여섯 대를 격파했다!" 라에가 외쳤다.
  "놈들이 되돌아온다. 기관총은 일제히 사격 개시!"
  "라이네케는 어디 있지?"
  엠메르만이 물었다. 모두들 대답하지 않았다. 그후 라이네케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오후에도 저항을 계속했다. 양쪽의 진지는 무너진 지 오래됐지만 사격은
멈추지 않았다. 탄약이 바닥이 나 있었다. 병사들은 휴대용 식량을 먹고 구덩이 속에
괴인 흙탕물을 마셨다. 힐슈만은 손에 관통상을 입었다.
  태양이 구름을 뚫고 빛을 쏘아댔다. 진지는 피비린내와 화약냄새가 진동했으며
평원에 버려진 시체들은 잔뜩 부풀어올랐다. 잠들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잤다. 진지가
현재 고립되어 있는지, 후방과의 연락이 가능한지도 알 수 없었다.
  밤이 되자 포격은 한층 더 격렬해졌다. 점점 소리가 커지던 포격이 갑자기 딱
그쳤다. 그들은 적군의 대습을 예상하고 밖으로 기어나갔다. 부동자세로 두 시간
이상을 기다려도 적군은 조용하기만 했다. 이 초조한 두 시간이 대격전보다 병사들을
더욱 애타게 했다.
  드디어 소련군이 공격을 시작했다. 중대는 두 대의 기관총으로 싸워야만 했다.
그들은 포탄 구덩이 속에 진을 치고 그것으로 간신히 사수하고 있었다. 적군은 다시
후퇴를 했다. 소련군은 그들을 실제보다 강력하게 보고 있었다. 그 덕분에 그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두 번째의 공격으로 샤우워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즉사했다. 샤우워의 주검 앞에서
힐슈만이 허리를 구부리고 달리다가 푹석 넘어졌다. 그레버는 그를 구덩이 속으로
끌어당겼다. 총탄에 명중된 그의 가슴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그레버는 그의 상처를
살피다가 피에 젖은 지갑을 발견하고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이미 그의 어머니가
받았던 전사통지서는 이제 사실이 되어 버렸다.
  아군은 제2의 방어선에 당도했다. 잠시 후, 또 후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예비진지가 제1선이 되었다.
  그들은 다시 후방에서 집결했다. 중대에서 살아 남은 사람은 30 명 정도였다.
이튿날은 지원을 받아 원래의 120 명으로 충원되었다.
 
  그레버는 야전병원에서 프레젠버어그를 만났다. 막사에 임시로 설치된 병원은
시설도 아주 빈약했다. 그레젠버어그는 왼쪽 다리에 부상을 입고 있었다.
  "먼저 자르고 보겠다는 거야. 그래서 내일 후송되게 손을 써 놨지. 경험있는
의사에게 보이고 싶어서."
  프레젠버어그는 쇠로 된 틀을 무릎에 끼고 야전용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의 간이
침대는 활짝 열린 창가에 있었다. 창 밖에는 대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바람에 실려 온
야생화의 향기와 병실의 썩는 냄새가 대비를 이루었다.
  "라에는 어떻게 되었니?" 프레젠버어그가 물었다.
  "팔을 맞았어. 경상이지."
  "입원했나?"
  "중대에 남았어."
  "그렇겠지."
  프레젠버어그의 얼굴이 움직였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절반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많이 있어. 라에도 그렇지."
  "어째서?"
  "체념이지. 희망도, 갈 곳도 없으니까."
  그레버는 양피지처럼 창백한 프레젠버어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럼, 자네는?"
  "글쎄 모르겠어. 우선 이것부터 어떻게 해야지."
  그는 쇠틀을 가리켰다.
  평원으로부터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상한데." 프레젠버어그가 말했다.
  "눈이 내리고 있을 때, 이 나라에는 절대로 여름이 오지 않을 것 같았어. 하지만
여름은 어김없이 왔고 벌써 지긋지긋하단 말야."
  "그래."
  "고국은 어때?"
  "글쎄 도저히 양쪽을 결부시킬 수 없어. 휴가와 전투를. 전에는 그게
가능했는데 지금은 안돼.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어. 도대체 무엇이 진실인지 모르겠어."
  "그걸 아는 사람은 없어."
  "나만은 알고 있다고 자부했었지. 그곳에 있을 때는 이만하면 됐다고 만족했었는데
이제는 모든 게 뒤죽박죽이야. 고국에서 나는 다시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고
결심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해."
  "자넨 고통이 심하겠군."
  프레젠버어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에는 생각지도 못한 게 있었어. 모르핀. 한 대 맞았는데 아직도 효과가 있어."
  "병원 열차가 오나?"
  "구급차지. 그게 가장 가까운 역까지 부상병들을 수송하는 거야."
  "여긴 1 명도 남지 않게 될 거야. 이제 자네마저 가 버리는군."
  "아마도 놈들은 다시 우리를 만나게 할 거야. 그때 다시 와야지."
  그들은 서로 마주보았다. 두 사람은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난 그것을 믿어. 적어도 모르핀이 떨어지지 않는 한."
  그는 그레버에게 손을 내밀었다.
  " 조심하게." 그레버는 겨우 한마디했다.
  "물론이지. 지금은 물이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야지. 생명의 원시적인 충동이야.
옛날엔 이렇지 않았어. 그것도 일종의 기만에 지나지 않을 거야. 그래도 그속에는
희망의 조각이 묻혀 있었어."
  그레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젠버어그는 야릇한 미소를 절반만 보였다.
 
  그레버는 중대가 배치돼 있는 마을로 돌아왔다. 짙은 저녁놀이 하늘의 색깔을
바꾸고 있었다. 비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질퍽하던 땅이 굳어졌고 버려진 밭에서
이름모를 꽃들과 잡초가 자라났다.
  일선에서 포성이 울려퍼졌다. 불현듯 모든 것들이 낯선 존재로 다가오며 각각의
결합체가 산산이 흩어지는 것 같았다. 그레버는 이런 느낌을 왕왕 느꼈었다. 한밤에
문득 눈이 떠지고 자기 자신의 위치가 어딘지 분명치 않을 때, 이런 기분에
사로잡혔었다. 그러나 그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인간은 언제든지
원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은 공포가 아니었다. 그레버는 두 손을 주머니에 감추고 주위를 돌아다보았다.
늘 대하는 광경이었다. 황폐한 논과 밭, 소련의 석양, 그리고 아득한 전선에서
번쩍이는 섬광 변함이 없는 전선의 풍경과 함께 절망의 오한이 심장을 찌르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 속에서 만져지는 엘리자베스의 편지를 떠올렸다.
  그녀의 따뜻함과 사랑의 감정이 손바닥으로 퍼져서 가슴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그것은 말끔히 정리된 방안을 밝히는 램프가 아니라 늪가의 어지러운 도깨비불이었다.
그 뒤를 따라가면 갈수록 수렁은 점점 깊어질 뿐이었다. 그는 돌아가는 길을 찾기
위하여 불을 밝히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는 집을 세우기도 전에 불을 먼저 밝혔던
것이다. 그는 그 불을 폐허더미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빛은 폐허를 더욱 쓸쓸하게
장식하였을 뿐이다. 그는 고국에 있을 때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그 빛을 열심히 뒤쫓았다. 따라가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믿으면서.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착오였다.
  그는 엘리자베스의 편지를 꺼내 읽어보았다. 석양의 붉은 노을이 똑같은 색으로
종이를 물들였다. 그는 편지의 내용을 암기하고 있었지만 또 다시 편지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는 그럴수록 자꾸만 고독해졌다. 휴가는 그토록 짧았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도 길었다.
  그는 편지를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엘리자베스의 편지를 본부에 와 있던
부모님의 편지와 함께 소중하게 간직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부질없는 일이다.
프레젠버어그의 말이 옳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지긋지긋하다. 나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데 세계의 고민까지 떠맡을 수는 없다. 엘리자베스! 어째서 자기는 그녀를 마치
잃어버린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올렸을까? 나는 그녀의 편지를 갖고 있다. 그녀는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다!
  마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마을을 재건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거리에는
가로수가 폐허를 따라서 길게 이어졌다. 옛날에는 폐허 대신에 정원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을 것이다. 이제 옛자취는 간 데 없고 보충병이 버찌를 줍고 있었다.
      27
 
  "게릴라!"
  슈타인브레너는 입술을 씹으며 소련인들을 주시했다. 그들은 마을 광장에 서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각각 2 명씩 있었는데 여자 한 명은 무척 젊게 보였다. 그들은
모두 오늘 아침에 끌려왔다.
  "게릴라 같진 않은데." 그레버가 말했다.
  "틀림없다. 왜 아니라고 하지?"
  "가난한 농부처럼 보이는데!"
  슈타인브레너느 히죽히죽 웃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이 세상에 죄인은 하나도 없어."
  '그건 그렇다. 네 녀석이 훌륭한 증거지.'
  라에가 왔다.
  "이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중대장이 물었다.
  "여기서 체포했습니다." 특무상사가 대답했다.
  "일단 감금하고 나서 명령을 기다릴까요?"
  "여긴 할 일이 산더미 같다. 왜 연대로 보내지 않았지?"
  라에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연대는 이미 일정한 위치가 없었다. 본부에서는
사람을 파견해서 포로들의 말을 들어 보고 나서 그들에 대한 지시를 내리는 게
고작이었다.
  "마을에 영주의 저택이었던 집이 있습니다." 슈타인브레너가 말했다.
  "거기에 창고가 있는데 문도 단단하고 쇠창살도 있습니다."
  라에는 그를 보았다. 슈타인브레너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에게
맡기면 포로들은 탈주를 기도할 것이고, 그것이 곧 그들의 최후가 될 것이다.
  라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레버, 자네가 이들을 감시하게. 슈타인브레너에게 창고의 위치를 파악해서 안전
여부를 조사하도록. 그리고 반드시 보초를 세우고 나에게 보고하라."
  포로 중의 한 사람은 다리를 절뚝거렸으며 젊은 여자는 맨발이었다. 슈타인브레너가
젊은 사내의 등을 툭 쳤다.
  "이 새끼야! 빨리 도망가!"
  사내가 뒤돌아섰다. 슈타인브레너는 키들키들 웃으며 팔을 들었다.
  "달아나! 달아나라구! 넌 자유의 몸이다!"
  인이 무슨 말인가를 소련어로 빠르게 말했다.
  젊은 사내는 달아나지 않았다. 슈타인브레너는 장화로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달아나란 말야! 이 바보새끼야!"
  "그만둬!" 그레버가 제시했다.
  "넌 라에의 명령을 들었지?"
  "이놈들을 여기서 달아나게 하면 어떨까?" 슈타인브레너가 속삭였다.
  "남자만 말야. 10 미터 가량 갔을 때 뒤에서 쏘는 거야. 여자들은 감금했다가
어두워지면 젊은 여자를 끌어내는 거지."
  "더 이상 간섭하지 말고 어서 꺼져! 포로들의 지휘는 내가 맡았어."
  슈타인브레너는 젊은 여자의 풍만한 가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여자의 짤막한
치마 아래로 미끈한 다리가 보였다.
  "놈들은 어차피 총살당할 거야. 우리가 아니면 보안부가 직접 처치하겠지. 그러니까
우리는 저 젊은 여자를 즐겁게 해줄 필요가 있어. 넌 휴가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되니까."
  "닥쳐! 넌 네 신부감이나 생각하고 있어! 친위대 사령관의 따님 말야. 라에가
너에겐 창고의 위치를 알려주라고 했을 뿐이야!"
  그들은 하얀 집으로 통하는 길을 걷고 있었다.
  "여기야."
  슈타인브레너는 말끔히 수리된 작은 건물을 가리켰다. 건물은 석조물로서 쇠창살
문은 밖에서 자물쇠를 채우게 돼 있었다.
  그레버가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마구간이나 창고로 사용했던 게 분명했다. 포로들은
도구가 없으면 밖으로 탈출할 수 없었다. 그는 일일이 검사를 해서 도구가 없는 것을
확인해 두었다.
  그는 문을 열고 포로들을 한 사람씩 들어가게 했다. 따라온 두명의 보충병이 총을
겨누면서 보초를 섰다. 그레버는 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웠다.
  "물에 빠진 원숭이새끼 같군."
  슈타인브레너가 눈동자를 굴리면서 말했다.
  "바나나! 바나나! , 이 원숭이들아! 바나나가 먹고 싶지 않나?"
  그레버는 보충병들을 돌아다보았다.
  "너희들은 이곳을 지키는 거야. 만약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모두 너희들
책임이다. 나중에 교대시킨다."
  "너희들 가운데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는가?" 그는 포로들에게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나중에 짚을 보내주기로 하지. 가자." 그레버는 슈타인브레너에게 말했다.
  "푹신푹신한 침대도 바치지."
  "가자! 너희들, 철저히 경계해야 돼. 알겠나?"
  
  그는 창고가 안전하다는 것을 라에에게 보고했다.
  "두 사람을 차출해서 감시하도록! 며칠 후, 정세가 호전되면 처리할 수 있겠지."
  "알겠습니다."
  "인원이 더 필요한가?"
  "아닙니다. 창고는 안전합니다.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좋아, 그렇게 하자. 보충병은 빠른 시일내에 전투 기술을 습득해야 된다."
  라에는 도중에 말을 중단했다. 그는 무척 불안해 보였다.
  "전황은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 그럼 가 봐."
  그레버는 소지품을 챙겼다. 그의 소대에는 그가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명밖에
없었다.
  "간수가 되나?" 임메르만이 물었다.
  "그럼, 거기서는 실컷 잘 수 있겠지. 보충병들을 훈련시키는 것보다 훨씬 낫지."
  "잘 틈이 어딨어. 일선이 어떤지 알고 있나?"
  "엉망진창이겠지."
  "소련군이 여러 개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있어. 겨우 한 시간 동안 별별 소문이 다
떠돌고 있지 적들이 대공세를 취했어. 또 후퇴하게 될 거야."
  "독일 국경을 넘어 퇴각한다면 이 전쟁이 중지될 것 같나?"
  "?"
  "아니."
  "나도 역시. 도대체 조국의 누가 전쟁을 중지시킬 수 있지? 물론 참모본부는 어림도
없고. 절대로 책임을 떠맡지 않을 거야."
  임메르만은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앞서 전쟁때는 급히 임시내각을 수립해 뒷처리를 시킬 수도 있었지. 불쌍한
바보들은 목을 내밀며 휴전에 서명을 하고 일주일만에 조국을 배반했다고 비난을
받았어. 그러나 그런 일은 두 번씩이나 있을 수 없지. 전체주의 정부의 전면적인
패전뿐이야. 교섭상대가 될 당이란 게 없어."
  "공산당을 제외한다면 말이지." 그레버가 씁쓸하게 말했다.
  "난 잠이나 자겠어. 내 멋대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말하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소망이야."
  그레버는 배낭을 들고 야전 취사장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수프, , 소시지 등을
받았다.
 
  이상할 만큼 조용한 오후였다. 보충병들이 짚을 갖다 놓았다. 일선에서 계속 포성이
들려왔지만 그것도 오늘만은 기세가 꺾인 것처럼 느껴졌다. 창고 앞에는 잔디가
깔리고 옛날에 산책을 하던 길의 가장자리에는 꽃이 피어 있었다.
  그레버는 창고의 맞은편에 보이는 정원 속에서 작은 집을 발견했다. 그곳에서도
창고를 감시할 수 있었다. 그 안에는 책도 꽤 여러 권 있었으나 모두 비에 젖어서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는 그중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을 한 권 찾아냈다. 그는
이내 책을 덮었지만 삽화가 그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다름아닌 그리움이었다. 본문이
프랑스어로 시작되는 책에는 무척 낭만적인 삽화가 들어 있었다.
  그는 산책길을 따라서 걷다가 연못가로 나왔다. 연못에는 피리를 부는 반인반양의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 석상도 책과 마찬가지로 제1차 대전 이전부터 존재한
시대의 유물이었다. 그레버가 태어나기 이전의 시대였다. 전쟁도 또한 시대의
소산물이었다.
  그는 연못가를 한 바퀴 돌고 나서 포로들을 가둔 창고로 되돌아왔다. 그는 쇠창살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처음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나중에 따로 만든 것이었다. 어쩌면
이 저택과 정원의 소유자가 저 쇠창살 안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노파는 잠이 들었고 젊은 여자는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남자들은 선 채로
기울어 가는 태양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레버를 쳐다보았지만 여자는 결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포로 중에서 가장 연장자가 그레버의 거동을 일일이 주시했다.
그레버는 그곳을 떠나 풀밭에서 마음껏 뒹굴었다.
 
  저녁이 되자, 보충병이 포로들의 식사를 운반해 왔다. 저녁식사는 완두콩 수프에
멀겋게 물을 탄 것이었다. 보충병은 포로들이 그것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접시를 가지고 돌아갔다. 잠시 후 돌아온 보충병이 그레버에게 보급된 담배를
내밀었다. 담배는 다른 날보다 훨씬 많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나쁜 징조였다. 훌륭한
식사와 담배의 다량 보급은 절박한 전투 전날에 한해서 지급이 되었다.
  "오늘밤은 두 시간 이상 교육받을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보충병이 말했다. 그는 심각한 눈초리로 그레버를 보았다.
  "전투 연습과 수류탄 투척과 총검술입니다."
  "중대장님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무엇을 벌하기 위해서 그러는 게 아냐."
  보충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치 동물원에 갇힌 짐승이라도 구경하는 것처럼
소련인들을 쳐다보았다.
  "저들도 역시 인간이야."
  그레버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소련인입니다."
  "그래, 소련인이다. 총을 겨누고 여자만 한 사람씩 밖으로 나오게 해."
  그레버는 지시를 내렸다.
  "모두 구석으로 가. 그리고 할머니 혼자서 나오도록 해. 나중에 모두 나오게 해줄
테니까."
  연장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을 했다. 포로들은 시키는 대로했다. 보충병이 총을
겨눈 가운데 노파가 앞으로 나왔다. 그레버는 물을 열어 노파를 밖으로 끌어내고 다시
잠궜다. 노파가 통곡을 했다 노파는 총살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 여자에게 말해. 다만 용변을 보게 하는 것뿐이라고."
  그레버는 연장자에게 말했다.
  연장자가 얼른 노파에게 말했다. 노파는 이내 조용해졌다. 그레버와 보충병은
저택의 한쪽으로 노파를 데리고 갔다. 노파가 그곳에서 나오자, 이번에는 젊은 여자를
밖으로 나오게 했다. 젊은 여자는 조심스럽게 행동을 했다.
  남자들의 경우는 더욱 간단했다. 그는 그들을 창고 뒤로 끌고가서 한눈 팔지 않고
지켜 서 있었다. 젊은 보충병은 사투라도 벌이는 듯한 태세로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레버는 다시 문에 자물쇠를 단단히 채웠다.
  "가슴이 두군거리던데요." 보충병이 말했다.
  "그래?"
  그레버는 총을 내려놓았다.
  "돌아가도 좋다."
  그는 보충병이 눈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담배를 한
개비씩 나눠 필 수 있도록 노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성냥불도 쇠창살 안으로 넣어
주었다. 포로들이 모두 담배를 피기 시작했다. 담뱃불이 어둠 속에서 빛나며 그들의
얼굴을 밝혀주고 있었다.
  그레버는 젊은 여자가 눈에 띄자 엘리자베스가 못 견디게 보고 싶었다.
  "당신, 참으로 좋은 사람."
  노인이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 아주 천천히 말했다.
  노인은 쇠창살에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전쟁 졌다. 독일군 당신은 좋은 사람."
  "바보 같은 소리 마라."
  "상관없소 갑시다 우리들과 가겠소?"
  주름투성이의 얼굴이 젊은 여자를 향했다가 다시 그레버에게로 돌아왔다.
  "우리 함께 갑시다 그리고 숨어서 우리와 좋은 생활, 우리는 아무 죄
없어."
  그 말은 매우 선명하게 전해졌다.
  그레버는 그곳을 떠났다. 그들은 아무런 죄도 없을 것이다. 무기도 발견되지 않았고,
게릴라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만약에 그들을 풀어준다면 나는 무엇인가 보람있는 일을
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죄없는 인간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달아날 수는 없다. 그쪽으로는 갈 수 없다. 언제나 탈출하고 싶다고 갈망하는 그만의
세계로 도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샘터까지 거닐다가 다시 돌아왔다.
  "가세요. 좋소 우리와 함께."
  그레버는 담배와 성냥을 노인에게로 디밀었다.
  "이거 피라고. 오늘밤은."
  "삽시다 당신은 젊어. 그러면 당신은 전쟁, 끝입니다 당신, 좋은
사람 우린 죄가 없습니다."
  그것은 비록 낮았지만 결의가 든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살아요' 하는 말을
암거래 상인이 '버터'하고 유혹하는 것 같았다. 매춘부가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절박한
심정으로 속이려는 것처럼. 마치 그것을 흥정이라도 하고 있는 듯이.
  그레버는 그 소리에 차츰 이끌려가는 자기 자신을 느꼈다.
  "닥쳐!" 그는 노인에게 호통을 쳤다.
  "다시 한 번 그런 소리를 했다간 상부에 보고하겠다."
  그는 주위를 순찰했다. 일선은 더욱 소란해지고 있었다. 첫번째 별이 나타났다.
갑자기 고독에 사로잡히면서 차라리 참호의 악취 속에서 전우들과 함께 자는 편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잠을 청하기 위해 정원의 작은 집에 짚을 깔았다. 잠이 든 사이에 포로들이
탈출을 시도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선은 굉음으로 요란했다. 비행기가 요란스럽게 하늘을 날고 기관총이 콩 볶는
소리를 연달아서 냈다. 거기에 뒤섞여서 폭탄이 폭발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레버는
귀를 기울였다. 그야말로 대전투가 벌어진 것 같았다. 만약에 놈들이 창고를 파괴하고
탈출한다면 그는 밖으로 나와 창고로 갔다. 포로들은 모두 잠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노인의 창백한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 창고에서 벗어났다.
  밤이 깊어졌다. 그는 일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됐음을 알았다. 대포는 아군
진지를 훨씬 넘어서 포격하고 있었다. 이제는 마을에서 가까운 곳에서도 포탄이
터졌다. 그레버는 아군 진지가 얼마나 약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교전의 단계를
하나하나 분석해 볼 수도 있었다. 곧 전차대의 총공격이 시작될 것이다.
 
  그레버는 깜짝 놀라 잠을 깼다. 포탄은 이미 마을 위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는
창고를 바라보았다. 쇠창살로 소련인들이 꿈틀꿈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멀리서
슈타인브레너가 달려오고 있었다.
 
  "후퇴다!"
  슈타인브레너가 고함을 질렀다.
  "소련군이 방어선을 돌파했다. 전원 마을에 집합! 모두 소지품을 휴대하고."
  그는 그레버에게로 달려왔다.
  "저 안에 있는 놈들을 즉시 처치해야지."
  그레버는 자신이 긴장하고 있음을 느꼈다.
  "명령서는?"
  "명령서?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냐! 넌 적군이 공격해 오는 소리도 안 들려?"
  "들린다."
  "그럼, 잘 알겠군. 놈들을 끌고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대로 처치하자구."
  슈타인브레너의 눈이 파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안돼. 여기 책임자는 나야. 명령서가 없으면 어서 꺼져!"
  슈타인브레너는 웃었다.
  "알겠어. 그럼, 네가 놈들을 쏘아라."
  "싫다!"
  "너나 나, 한 사람은 놈들을 처치해야 돼. 함께 끌고 갈 수는 없어. 이 병신아, 빨리
하란 말야. , 나도 협력하지."
  "안돼. 쏘지 마."
  "안된다고?"
  슈타인브레너는 눈을 치떠보았다.
  "안돼?"
  그는 천천히 되뇌었다.
  "넌 네가 한 말을 알고 있나?"
  "알고 있어."
  슈타인브레너의 안색이 변했다. 슈타인브레너가 권총을 잡는 순간, 그레버는 총을
들고 그를 쏘았다. 슈타인브레너가 비틀거리다가 앞으로 쓰러졌다. 그는 아이처럼
한숨을 쉬었다. 그의 손에서 권총이 미끄러졌다.
  그레버는 물끄러미 시체를 바라다보았다. 포탄이 정원 위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창고로 걸어갔다. 이윽고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활짝 열었다.
  "가라!" 그레버는 말했다.
  소련인들은 그를 웅시했다. 그들은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총을
떨어뜨렸다.
  ". 어서 나가란 말야!"
  그는 손가락을 펴 보이면서 말했다.
  젊은 남자가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 밖으로 내딛었다. 그레버는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슈타인브레너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왔다.
  "살인자."
  그는 말했다. 그러나 누구를 향한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슈타인브레너를
들여다보았지만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살인자!"
  그는 다시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것은 슈타인브레너와 자기 자신과 그밖에 전쟁을
일으키고 그 전쟁의 희생자가 된 숱한 사람들을 향한 병사의 절규였다.
  그때 여러 가지 상념이 서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그의 안에서 돌멩이가 하나
튀어나간 것 같았다. 무엇인가가 영구히 결정되고 말았다. 이미 아무런 실체도 느낄
수 없었다. 무슨 일이든지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탈진한 몸이 허공으로
날아 오르지 않도록 꼭 붙들고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머리가 빙빙 돌았다. 그는
한걸음 한걸음 걷고 있었다. 그 무엇인가 중대한 일을 저질러야 한다!
  그는 소련인들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젊은 여자를 앞세우고 한 덩어리가 되어
허겁지겁 달아나고 있었다. 젊은 사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사내는 뜻밖에도 총을 들고 있었다. 그는 총을 치켜들고 겨누었다. 그레버는 검은
총구를 보고 있었는데, 그것이 차츰 확대되었다. 그는 크게 부르짖고 싶었다. 급히
소리를 질러야 할 것들이 무수히 많았다.
  그레버는 총에 맞은 것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그의 시야에 잡초가 들어왔을 뿐이다. 밟혀서 짓이겨진 한 포기의 풀이 점점
키가 커지고 있었다. 그는 전에도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이 언제였을까?
그는 도저히 기억해 낼 수 가 없었다. 마침내 풀이 무럭무럭 자라나 온 하늘을 가리게
되었다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작품 해설)
  (E. M. 레마르크의 삶과 문학세계)
 
    1. 생애와 작품
  망명 작가인 레마르크(Erich Maria Remarque) 1898 , 독일의
오스나브뤼크에서 태어났다.
  레마르크는 18세의 어린 나이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몇 차례나 사선을
넘었는데, 이때 체험한 전쟁의 참상이 후에 발표한 그의 소설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종전 후 한때 시골의 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한 적도 있으나 얼마 후
퇴직하였다. 그 동안의 경위는 그의 두번째 작품인 '귀로'의 주인공에게 투영되어
있다. 실의와 좌절에 빠진 나날을 보내던 레마르크는 몇몇 직업을 전전하다가 9
년간이나 무명의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29 년 제1차 세계대전의
전장에서의 체험을 소재로 한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발표, 기록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일거에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했다. 이 책은 18개월 동안에 25개국어로 번역,
발행부수만도 350 만을 넘었다.
  이것은 한 병사의 눈에 비친 전쟁의 갖가지 양상의 기록이고, 같은 입장에서 전후의
양상을 그린 것이 제2작이 되는 1931 년에 발표한 '귀로'이다. 두 작품이 모두
반전적인 감정이 노골로 드러나 있었기 때문에 그는 나치스의 박해를 받았다.
  레마르크는 33 년 나치스가 정권을 잡자 스위스로 이주했다가, 39 년에 미국으로
망명해서 시민권을 얻었다. 나치스는 그의 작품에 판금 분서 처분을 내렸고, 아울러
그의 독일 시민권을 박탈하였다.
  그후의 레마르크는 헤밍웨이를 비롯한 미국 작가의 영향도 받았는데, 망명해
있으면서도 그의 붓은 꺽일 줄을 모르고 잇따라 문제작을 발표했다.
  3국으로부터의 정치적 망명자의 비운을 그린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를 낸 후,
파리를 무대로 한 '개선문'을 발표해 발행부수가 200 만이 넘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계속해서 망명가 소설 '생명의 불꽃'을 내놓는 등 전쟁을 모티브로 독자들에게
인간의 절망과 공포를 일깨우고 생명의 존엄성을 재확인시켰다.
  그리하여 전쟁이란 괴물이 사랑도 앗아간 '사랑할 때와 죽을 때' 1954 년에 출간,
세계적으로 명성을 더욱 다지면서 망명 작가 중에서도 가장 행복한 생애를 마쳤다.
일찍이 전쟁의 허무함을 뼈저리게 느낀 레마르크는 세계의 평화를 호소하면서 1970
72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소설은 현대 인간의 운명을 흥미 깊은 줄거리 속에 시대적 비평과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알맞게 뒤섞어가며 효과있게 썼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것이 그의
처녀작 '서부전선 이상없다'에 이미 나타난 것을 생각한다면, 이 작가가 현대라는
시대에 대하여 얼마나 예민한 예술적 후각을 가지고 있었던가를 엿볼 수 있다.
 
  2. '사랑할 때와 죽을 때'에 대하여
  레마르크의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사랑할 때와 죽을 때'도 전장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전쟁에 의해서 파괴된 세대의 삶과 죽음'을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소련의 대평원. 인류가 만들어낸 비극인
전쟁이 그 끝을 향해서 소용돌이치고 있을 때, 독일군은 적국의 전선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패전의 그림자를 느끼고 있었다.
  주인공 그레버는 전쟁터에서 2 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지만 고향의 거리는 전쟁을
치르는 동안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져 있었다. 전쟁에 참전해서 그가 무수히 보아 온
것은 아무렇게나 버려진 시체와 죽음의 냄새였다. 그러나 고국에는 오히려 전선보다
더한 비정함이 감돌았던 것이다.
  그가 간신히 찾아간 집은 폐허더미가 되어 있었고 양친은 행방불명이었으며,
꿈꾸던 평화 대신에 불신과 억압. 기아와 도둑질이 난무했다.
  짧은 휴가기간 동안에 소년시절의 친구 엘리자베스와의 재회와 사랑, 그리고
이별 주인공은 사랑하는 아내와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비로소 완전한
자유와 행복이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그가 누렸던 일상의 삶 속에서 존재했음을
깨닫는다.
  주인공 그레버는 소유는 상실이며 출발은 곧 귀환임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키면서,
그가 그토록 거부했던 그 전쟁 속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도 역시 전쟁의 희생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일선으로 돌아와보니 이미 많은 전우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그레버 자신도 죽음이 그의 가까이에 있음을 느낀다. 드디어 전선이 무너진 채
아무 명분도 없는 대전투가 벌어진다. 마침내 전쟁이란 괴물은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모두 집어삼키고 만다.
  1954 년에 발표된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인간성에 대한 신뢰와 불신이 조화되지
않는 갈등, 현실의 압도적인 부조리에 직면한 인간 속에 생겨나는 절망과 삶의 충동,
낡은 가치와 그 수호자들에 대한 젊은 세대들의 자포자기적인 분노가 특히 잘 나타나
있다.
  비인간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인간성의 회복을 호소해 대중의 호응을 받은
이 작품은, 2차 세계대전이 남긴 빼어난 전쟁소설로 지금도 많은 독자를 사로잡고
있다.
 
 
 
 
 
 퍼온글 원본 : 레마르크. 사랑할 때와 죽을 때(전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