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옛시조 모음

귀거래사 - 도연명

淸山에 2011. 7. 1. 16:00

 

 

 
 
도연명

   陶 淵明 (365-427) 이름은 潛, 淵明은 그의 字다. 東晋 哀帝 建元 원년(365, 신라 내물왕 10년) 심양의
柴 桑에서 났다. 어릴 때부터 榮利를 생각하지 않고 글읽기를 좋아했다.

부모는 늙고 집안은 가난하여, 주의 際酒가 되었으나 마음에 맞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덜아왔다.
35살 때 다시 彭澤의 수령이 되었으나, 고을의 督郵가 오게 되어, 이속들의 말이, 의관을 정제하고 뵈어야
한다 하므로,  내 어찌 5말 쌀을 위해 향리의 어린아이에게 허리를 굽히랴 하고, 그자리에서 벼슬을 내어놓고
고향으로 돌아와, 저 유명한 <歸去來辭>를 지었다. 뒤에 또 著作郞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취임하지 않고,
고향에서 술과 국화를 즐기며 지내다가, 文帝 元嘉 4년(427, 신라 눌지왕 11년) 63살로 죽었다.
 
세상에서 그를 靖節先生이라 일컬었다. 그의 시는 평이하고 담박하면서도 깊은 의취가 있다.
그는 낙천주의자였고, 또한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다. <陶淵明集> 8권이 있다.
 
 
 

  

 

 

 귀거래사
          자, 돌아가련다.
          고향 전원이 황폐해지려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오
          이제껏 자신의 존귀한 정신을 천한 육체의 노예로 삼았으나
          어찌 슬퍼 탄식하여 홀로 서러워 하리
          지나간 인생은 후회해도 이미 쓸데 없음을 깨달아
          장래 인생을 쫓아 갈 수 있음을 알았네
          실상 내가 인생길을 갈팡질팡한 것은 오래지 않았나니
          지금이 바른 삶이요, 어제까지 그릇됨을 알았네
          고향가는 배는 흔들흔들 움직여 가볍게 흔들리고
          바람은 솔솔 옷깃에 불어 온다
          길손애게 고향이 얼마나 머냐고 물어 보며
          새벽빛 아직 희미하여 길 떠나지 못함을 한스러워한다.
          마침내 우리 집 대문과 지붕을 보고 기뻐서 뛰어갔네
          머슴들도 기뻐 마중나왔고
          꼬마들은 대문께서 기디리고 있네
          집 마당의 세 줄기 오솔길은 황폐했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나를 반기어
          꼬마 손을 끌고 방에 들어가니
          술이 가득 독에 담겨
          항아리와 잔을 끌어당겨 혼자 마시며
          마당의 나무 보고 웃음짓는다
          남쪽 창가에 기대어 내키는대로 움직이고
          무릅이나 들어갈 좁은 방이라도 편안히 있음을 알았네
          동산은 날마다 취향있는 경치로 바뀌고
          대문은 달았으나 언제나 닫힌 채로다
          지팡이 짚어 늙은 몸 부축하여 걷다가는 쉬고
          때때로 머리 들어 주위를 살핀다
          구름은 산 굴속에서 나와서는 흘러가고
          새는 날기가 싫어져 둥지로 들어가네
          저녁 햇빛 그늘져 서산에 지려하고
          나는 마당의 외솔을 쓰다듬으며 거니네.

     
          돌아가련다.
          세상 사람과 교유를 끊고
          세상과 나는 서로 잊고 말지니
          다시 한번 관리가 되어도 거기 무슨 구할 것이 있으료
          친척과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며 기뻐하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시름을 지우련다
          농부가 찾아와 애게 봄소식 알려 주니
          이제는 서쪽 밭에 갈이를 시작하자
          어떤 때에는 장식한 수레를 명하고
          어떤 때는 한 척의 배를 노저으리니
          작은 배 저어 깊은 시내 골짜기를 찾아가고
          장식한 수레 타고 험한 언덕 나아가리라
          길가의 나무는 생기있게 자라고
          샘물은 졸졸 흘러 가네
          모든 만물 봄을 기뻐 맞이하고
          내 생은 곧 사라짐을 느끼네
          아 그저 그런 것인가
          육체가 이 세상에 깃드는 것이 얼마 동안이리오
          어찌 마음이 명하는대로 생사를 운명에 맡겨 두지 않으며
          어찌 이제 와 덤벙거리며 어디로 가려 하는가
          돈도 지위도 내 바라는 바 아니요
          신선의 세계도 기약할 수없네
          따뜻한 봄볕을 그리워하여 홀로 산과 들 거닐고
          또한 지팡이 세워 두고 밭의 풀을 뽑는다
          아님 동편 언덕 올라가 느긋히 시를 읊고
          맑은 강물 흐르는 곳에서 시를 짓는다
          하늘에 맡겨 죽으면 죽으리니
          천명을 즐기며 살면 그뿐, 근심할 일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歸園田居
          少無適俗韻  性本愛丘山
          誤落塵綱中  一去三十年

               전원에 돌아와서
          차라리 허튼 세상엔 뜻도 아니 맞았어
          어쩌자고 나는 산이 자꾸만 그리운 것이냐
          보살필 일도 없는 것을 헤매이다간
          그대로 서른 해가 섬적 지나깠구나.
          (귀원전거 6수중 한구절)
          
               擬挽歌辭
          千秋萬歲後  誰知榮與辱
          但恨在世時  飮酒不得足

               만가에 비겨서
          오랜 세월이 흘러간 이후
          뉘 있어 너와 나의 이야길 하리
          오직 한되는 일이 남아 있노라
          세상엔 내 마실 술이 그리도 없거니와.
          
               飮酒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
          此中有眞意  欲辨已忘言

               국화 따 들고
          동녘 울밑에 심은 국화 제철이여
          따든채 남산을 조용히 바라보노니
          해질 무렵 먼 산은 진정 아름다워라
          저물어 뭇새들도 깃 찾아 돌아오고
          여기 우리 살며 느끼는 끝없는 기쁨이 있어라
          무어라 이것을 모집어 이를길도 없구나.

 

 

 

 
 
歸去來兮 귀거래혜
자, 돌아가자.
田園將蕪胡不歸 전원장무호불귀
고향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旣自以心爲形役 기자이심위형역
지금까지는 고귀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而獨悲 해추창이독비
어찌 슬퍼하여 서러워만 할 것인가.
悟已往之不諫 오이왕지불간
이미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 없음을 깨달았다.
知來者之可追 지래자지가추
앞으로 바른 길을 쫓는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實迷塗其未遠 실미도기미원
내가 인생길을 잘못 들어 헤맨 것은 사실이나, 아직은 그리 멀지 않았다.
覺今是而昨非 각금시이작비
이제는 깨달아 바른 길을 찾았고, 지난날의 벼슬살이가 그릇된 것이었음을 알았다.
舟遙遙以輕 주요요이경양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흔들리고
風飄飄而吹衣 풍표표이취의
바람은 한들한들 옷깃을 스쳐가네,
問征夫以前路 문정부이전로
길손에게 고향이 예서 얼마나 머냐 물어 보며,
恨晨光之熹微 한신광지희미
새벽빛이 희미한 것을 한스러워한다.
乃瞻衡宇 내첨형우
마침내 저 멀리 우리 집 대문과 처마가 보이자
載欣載奔 재흔재분
기쁜 마음에 급히 뛰어갔다.
僕歡迎 동복환영
머슴아이 길에 나와 나를 반기고
稚子候門 치자후문
어린 것들이 대문에서 손 흔들어 나를 맞는다.
三徑就荒 삼경취황
뜰 안의 세 갈래 작은 길에는 잡초가 무성하지만
松菊猶存 송국유존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꿋꿋하다.
携幼入室 휴유입실
어린 놈 손 잡고 방에 들어오니,
有酒盈樽 유주영준
언제 빚었는지 항아리엔 향기로운 술이 가득,
引壺觴以自酌 인호상이자작
술단지 끌어당겨 나 스스로 잔에 따라 마시며,
眄庭柯以怡顔 면정가이이안
뜰의 나뭇가지 바라보며 웃음 짓는다.
倚南窓以寄傲 의남창이기오
남쪽 창가에 기대어 마냥 의기 양양해하니,
審容膝之易安 심용슬지이안
무릎 하나 들일 만한 작은 집이지만 이 얼마나 편한가.
園日涉以成趣 원일섭이성취
날마다 동산을 거닐며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門雖設而常關 문수설이상관
문이야 달아 놓았지만 찾아오는 이 없어 항상 닫혀 있다.
策扶老以流憩 책부노이류게
지팡이에 늙은 몸 의지하며 발길 멎는 대로 쉬다가,
時矯首而遐觀 시교수이하관
때때로 머리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본다.
雲無心以出岫 운무심이출수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돌아 나오고,
鳥倦飛而知還 조권비이지환
날기에 지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올 줄 안다.
以將入 영예예이장입
저녁빛이 어두워지며 서산에 해가 지려 하는데,
撫孤松而盤桓 무고송이반환
나는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이고 있다.
歸去來兮 귀거래혜
돌아왔노라.
請息交以絶遊 청식교이절유
세상과 사귀지 않고 속세와 단절된 생활을 하겠다.
世與我而相違 세여아이상위
세상과 나는 서로 인연을 끊었으니,
復駕言兮焉求 복가언혜언구
다시 벼슬길에 올라 무엇을 구할 것이 있겠는가.
悅親戚之情話 열친척지정화
친척들과 정담을 나누며 즐거워하고,
樂琴書以消憂 낙금서이소우
거문고를 타고 책을 읽으며 시름을 달래련다.
農人告余以春及 농인고여이춘급
농부가 내게 찾아와 봄이 왔다고 일러 주니,
將有事於西疇 장유사어서주
앞으로는 서쪽 밭에 나가 밭을 갈련다.
或命巾車 혹명건차
혹은 장식한 수레를 부르고,
或棹孤舟 혹도고주
혹은 한 척의 배를 저어
旣窈窕以尋壑 기요조이심학
깊은 골짜기의 시냇물을 찾아가고
亦崎嶇而經丘 역기구이경구
험한 산을 넘어 언덕을 지나가리라.
木欣欣以向榮 목흔흔이향영
나무들은 즐거운 듯 생기있게 자라고,
泉涓涓而始流 천연연이시류
샘물은 졸졸 솟아 흐른다.
善萬物之得時 선만물지득시
만물이 때를 얻어 즐거워하는 것을 부러워하며,
感吾生之行休 감오생지행휴
나의 생이 머지 않았음을 느낀다.
已矣乎 이의호
아, 인제 모든 것이 끝이로다!
寓形宇內復幾時 우형우내복기시
이 몸이 세상에 남아 있을 날이 그 얼마이리.
曷不委心任去留 갈불위심임거류
어찌 마음을 대자연의 섭리에 맡기지 않으며.
胡爲乎遑遑欲何之 호위호황황욕하지
이제 새삼 초조하고 황망스런 마음으로 무엇을 욕심낼 것인가
富貴非吾願 부귀비오원
돈도 지위도 바라지 않고,
帝鄕不可期 제향불가기
죽어 신선이 사는 나라에 태어날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懷良辰以孤往 회양진이고왕
좋은 때라 생각되면 혼자 거닐고,
或植杖而耘 imggui-geo-41-1-1-3.gif 혹식장이운자
때로는 지팡이 세워 놓고 김을 매기도 한다.
登東皐以舒嘯 등동고이서소
동쪽 언덕에 올라 조용히 읊조리고,
臨淸流而賦詩 임청류이부시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
聊乘化以歸盡 요승화이귀진
잠시 조화의 수레를 탔다가 이 생명 다하는 대로 돌아가니,
樂夫天命復奚疑 낙부천명복해의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무엇을 의심하고 망설이랴.
 
(박일봉 옮김)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도연명이 진나라 심양도 팽택 현령으로 재직하던 41세 때 지은 작품이다. 다섯 말 쌀의 봉급을 위해 상급 기관의 관리들에게 굽신거려야 하는 벼슬을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 결의를 술회한 작품이다. 처음에는 고향의 전원이 황폐해졌음을 걱정하여 거기에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밝힌다.
 
집에 돌아간 그는 한적한 생활에 만족을 느끼고 마음 속으로 즐거워 한다. 앞으로의 생활에서도 자연의 추이에 몸을 맡기고 유유자적하면서 살겠다는 뜻을 말한다. 안심 입명의 경지에 도달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또 어떤 분을 이 글을 진나라가 망한 다음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지조를 나타낸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글의 마지막에서 '자연의 조화에 따라 돌아가니 무릇 천명을 즐기되 다시 무엇을 의심하랴' 한 대목에서는 도연명의 인생관이 나타나 있다.
 
 
dia_bluve.gif 심화 자료
 
귀거래사(歸去來辭)
 
 歸去來辭는 중국 진(晉)나라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운문(韻文). 405년(진나라 의회 1) 그가 41살 때 마지막 관직이었던 팽택현(彭澤縣)의 영(令)자리를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의 심경을 노래한 것으로 초사체(楚辭體)를 따른 전문(全文) 240여 자(字)는 각운(脚韻)이 다른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귀거래혜(歸去來兮)>로 시작되는 제l장은 관리생활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심경을 읊었고, 제2장은 집에 도착한 기쁨을 노래했다.
 
 제3장은 고향에서의 생활과 그곳에서 얻은 철학을 담았으며, 제4장은 자유를 누리면서 자연의 섭리에 몸을 맡겨 살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자신의 모습을 노래했다. 이 작품을 쓴 동기를 밝힌 서문에는 원래 성격에 맞지 않는 관직을 누이동생의 죽음을 구실로 그만둔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양(梁)나라의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簫統)의 《도연명전(陶淵明傳)》에는, 감독관의 순시를 의관속대(衣冠束帶)하고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오두미(五斗米;적은 봉급)를 위해 향리의 소인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고 하며 그 날로 사직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 작품은 도연명의 기개를 나타내는 이러한 일화와 함께, 은둔(隱遁)을 선언한 일생의 한 절정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도연명의 대표작이며 전원생활에의 지향을 노래한 문학으로서 소명태자의 《문선(文選)》에도 실려 있다. 후한(後漢) 장충(張衝)의 《귀전부(歸田賦;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농삿일을 한다는 내용)》 등 그보다 앞선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나, 후세 문학에 끼친 영향면에서 가장 높이 평가되며 또한 많은 그림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circle01_blue.gif 도연명 陶淵明
 
陶淵明 (병)Tao Yenming (웨)Tao Yenming. 365~427.
중국의 대표적 시인으로 이름은 잠(潛). 호는 오류선생(五柳先生). 연명은 자이다. 동진(東晉) 말기부터 남조(南朝)의 송(宋:劉宋이라고도 함) 초기에 걸쳐 생존했다.
 
생애
 

강주(江州) 심양군(尋陽郡:지금의 장시 성[江西省] 주장[九江]) 시상현(柴桑縣:지금의 싱쯔 현[星子縣])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남방의 토착 사족(士族)으로, 북조로부터 내려온 귀족이 절대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당시의 남조 사회에서는 영달의 길에서 소외된 압박받는 계층이었다.

 

그러나 도연명이 평생 동경했던 증조부 도간(陶侃:259~334)은 동진 초에 장사군공(長沙郡公)·대사마(大司馬:최고군사령관)까지 승진했고, 할아버지 도무(陶茂)도 무창(武昌)의 태수(太守)로 재임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은둔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어머니는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환온(桓溫)의 장사(長史:막료장)였던 맹가(孟嘉)의 넷째 딸이었다. 도연명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아들이었던 것 같다.

 

도연명의 첫번째 관료생활은 29세 때 자기가 살고 있던 강주의 좨주(祭酒:州의 교육장)로 취임한 것이었으나 곧 사임했다. 2번째 관료생활은 35세 때 당시 진(晉)나라 최대 북부군단(北府軍團)의 진군장군(鎭軍將軍)인 유뢰지(劉牢之)의 참군(參軍:참모)으로 취임한 것인데 이것 역시 곧 그만두었다. 3번째는 유뢰지의 휘하를 떠난 직후, 36~37세 무렵 형주(荊州:지금의 장링[江陵]) 자사(刺史) 환현(桓玄)의 막료로 취임한 것이다.

 

그러나 며칠 안되어 모친상을 당해 고향인 심양으로 돌아가 3년상을 치렀다. 이후 강주자사·참군 및 팽택(彭澤) 현령(縣令) 등의 관료생활은 고향에서 가까운 심양군 안에서 지냈다.

 

도연명이 10여 년에 걸친 관료생활을 최종적으로 마감하고 은둔생활에 들어간 시기는 의희(義熙) 원년(405) 11월 41세 때였다. 그는 팽택 현령이 된 지 겨우 80여 일 만에 자발적으로 퇴관했다. 퇴관의 결정적인 동기에 관해서는 다음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해말에 심양군 장관의 직속인 독우(督郵:순찰관)가 순찰을 온다고 하여 밑의 관료가 "필히 의관을 정제하고 맞이 하십시오" 하고 진언했더니, 도연명은 "오두미(五斗米:월급)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의 소인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있을손가"라고 말한 뒤 그날로 사임하고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宋書〉 隱逸傳).

 

 또 한편으로 이때의 사퇴 동기에 관해서 도연명 자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취임해서 어느 정도 되자 집에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럭저럭 벼가 익거든 빠져나가려고 생각하던 차에 누이의 부음이 들려오자 조금도 참을 수 없게 되어 스스로 사임하고 집에 돌아왔다"(〈歸去來辭〉 序). 이때 나온 작품이 유명한

〈귀거래사〉·〈귀전원거오수 歸田園居五首〉이다.

 

이리하여 도연명은 이후 죽을 때까지 20여 년 간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고향에 은거한 지 3년째 되는 해에 갑작스런 화재로 생가가 타버리자 그는 일가를 거느리고 고향을 떠나 주도인 심양의 남쪽 근교에 있는 남촌(南村:또는 南里)으로 이사해서 그곳에서 만년을 보내게 되었다. 이사한 후 술을 좋아하던 그는 차츰 빈궁한 생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사를 함으로써 잃어버린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강주의 장관 왕홍(王弘)을 비롯해서 은경인(殷景仁)· 안연지(顔延之) 등 많은 관료·지식인과 친교를 맺을 수 있었다. 그가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후에 남조 송의 내각과 문단의 지도자가 된 왕홍과 안연지를 친구로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연명의 시문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4언시(四言詩) 9수, 5언시 115수, 산문 11편이다. 이중 저작연대가 명확한 것이나 대강 알 수 있는 것은 80수뿐이다. 그밖의 것은 중년기 이후, 즉 그가 은둔생활을 보낸 약 20여 년 간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작품

 

도연명의 작품으로 가장 특색있고 후세까지도 중시되고 있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5언시이다. 우선 5언이라는 형태는 육조시대를 통해 시인들이 특히 애호한 보편적인 형식이었고 그의 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시가 특히 주목되고 애송되는 까닭은 고요하고 자연스러운 읊조림과 멀리 세속의 티끌을 넘어서서 맑고 깊은 운치를 칭송하는 시의 경지 때문이다. 예부터 특히 유명한 〈음주이십수 飮酒二十首〉 중의 제5수를 예로 들어보자.

 

"마을 안에 엮어 놓은 오두막집, 그래도 시끄러운 수레소리 들리지 않네/어떻게 하면 이렇게 되는가요? 마음이 멀면 사는 곳도 외진다오/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꺾어 드니 그윽이 보이는 남산(南山)/산기운이 석양에 아름답고 나는 새들도 무리지어 돌아가누나/이 가운데 있는 참뜻, 설명하려고 하나 이미 말을 잊었도다."

 

여기에서는 자연의 경치와 하나로 융합되는 마음속에서 대자연의 진실 가운데로 침잠하는 도연명의 담담한 자태를 엿볼 수 있다. 시의 표현에 있어서도 당시 궁정 문단에서 유행하던 화려한 기교와는 정반대로 거의 기교라고 할 만한 것 없이 자기의 감회를 자연스럽게 읊조리고 있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표현을 지향하며 자연스러움과 순박함을 동경한 도연명의 문학은 그의 시에서만 표출된 것이 아니었다.

 

그의 〈귀거래사〉·〈도화원기 桃花源記〉·〈오류선생전 五柳先生傳〉 등의 산문도 역시 같은 표현방식으로 지어진 주옥 같은 작품들이다. 이들 산문 가운데 특히 〈오류선생전〉은 후세에 도연명 상(像)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자전적인 작품이다.

 

도연명의 시문에는 확실히 고요하고 맑은 심경을 읊조린 작품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세속을 초월한 작품이 그의 시문 전부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다. 편수가 그다지 많지 않고 또 후세에 그렇게 유명한 작품이 되지는 못했어도 그의 시문 가운데에는 쇠락한 운명의 슬픔을 읊은 것이라든가 가난한 생활의 괴로움을 호소한 것, 행복한 세상사람들을 부러워한 것, 죽음의 공포를 두려워한 것 등 세속적인 작품도 적지 않다.

 

 도연명이 그 생애를 통해서 스스로 정신생활의 이상으로 여긴 것은 앞에 들은 〈음주이십수〉의 시에도 나오는 ' 진'(眞)의 경지였다. 이 '진'이라는 개념은 도연명의 경우 철학적·사상적인 것이라기보다 문학적·감성적 색채가 강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내용적으로는 자연 그 자체를 의미하는 '순'(淳)이라든가 '박'(朴)이라는 개념으로 바꿔도 좋을 것이다. 더욱 구체화해서 말하면 하늘 높이 자유로이 나는 '새'나 깊은 물 밑에서 자유로이 헤엄치는 '물고기'의 경지가 이에 해당한다. 이는 '지교'(智巧)나 '대위'(大僞)와는 정반대의 개념이기도 하다. 요컨대 도연명이 말하는 '진'은 개인의 완전한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며, 복희(伏羲)·신농(神農)이 다스리던 이상적 상고시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도연명은 중국 역사상 거의 유일한 본격적인 은일시인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매우 높다. 그의 친구였던 안연지의 〈도징사뢰 陶徵士〉는 그의 고결한 인품을 칭찬한 것이었고, 〈송서〉 은일전을 비롯한 각 정사(正史)에 있는 도연명의 전기와 양(梁)나라 소통(簫統)의 〈도연명전 陶淵明傳〉 등도 마찬가지였다. 또 이상하게도 화려한 남조 문학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는 '궁체'(宮體)의 시종(詩宗)이었던 양나라의 간문제(簡文帝:503~551)도 형인 소통과 마찬가지로 열렬한 도연명 숭배자였다.

 

도연명의 인품과 시문은 이미 육조시대에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양나라 강엄(江淹:444~505)이 한(漢)부터 진송(晉宋)까지의 시인 30명의 시를 모방해서 지은 〈잡체시 雜體詩〉 30수(〈文選〉 권31)에서는 도연명을 조식(曹植)·육기(陸機) 등의 유명한 시인과 나란히 열거하고 있다. 같은 양나라 사람 종영(鍾嶸)의 〈시품 詩品〉에서도 도연명의 5언시에 중품(中品)의 품격을 매겨놓고 또 "고금 은일시인의 으뜸"이라고 판정하고 있다.

 

 그러나 특히 도연명을 중국 역사상 최고의 시인이라고까지 절찬하여 결정적으로 높이 평가한 사람은 북송(北宋)의 위대한 시인 소식(蘇軾:1037~1101, 호는 東坡)이었다. 이렇게 하여 은일의 성자(聖者), 세속을 초월한 대시인으로서의 이상적 도연명 상은 확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