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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엔기념공원 주묘역에서 본 상징구역. 유엔기를 포함해 21개 참전국의 국기가 휘날리고 있다.
부산 유엔기념공원 60년 悲歌
연분홍 꽃잎이 분분히 흩날리고 있었다. 길과 풀밭 위에 떨어진 꽃잎들은 강물이 잔바람에 헤적이듯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배꽃이 지기를 기다렸다 핀다는 왕겹벚꽃나무. 공원을 찾은 사람들은 연분홍 꽃잎을 지르밟으며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곳을 찾아가고 있었다. 4월 말의 부산 유엔기념공원 풍경이다.
기자가 부산 유엔기념공원(UNMCK)을 가보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지난 4월 23일자 조선일보 1면은 노란색 우비를 입은 채 옛 전우의 묘비 앞에 고개를 숙인 노병(老兵)들의 사진을 실었다. 사진 설명은 ‘영연방 참전 용사 230명이 가평 전투 60주년을 맞아 한국을 방문했다’고 되어 있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이런 의문이 들었다. 무엇이 노신사들을 부산까지 오게 했을까. 호주와 캐나다에서 한국의 부산까지 오려면 비행기만 최소 10~14시간을 타야 하는데.
지난 4월 27일 오전 10시 유엔기념공원을 찾았다. 공원을 둘러보는 코스는 추모관→상징구역→주묘역→유엔군전몰장병추모명비→유엔군위령탑→무명용사의 길→돈트 수로→기념관 순이다.
자원봉사 안내원 최구식씨의 안내를 받으며 이 코스대로 움직였다.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추모관에서 15분짜리 ‘브리핑 필름’을 보았다. 6·25전쟁의 발발,
유엔군의 참전, 유엔군의 희생 그리고 기념공원의 조성에 관한 내용이다.
6·25전쟁 3년간 유엔군은 4만896명이 숨졌다. 유엔기념공원은 1951년 4월 조성됐다. 꼭 60주년이 됐다. 현재 유엔기념공원에는 11개국의 전사자 2300명이 안장돼 있다. 기자는 이 동영상에서 뜻밖의 구절을 접하곤 가슴이 짠했다.
“모든 병사에게는 어머니가 있다. 아들의 희생은 어머니에게 아직도 고통과 슬픔이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이 땅에 피를 뿌린 유엔군 병사들. 어리석게도, 기자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병사들의 죽음을 어머니와 연결시켜 생각하지 못했다. 어머니…. 그랬다. 그들은 어머니의 아들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이었고, 어여쁜 소녀의 애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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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터키군 참전비, 프랑스군 참전비(중간 위), 그리스군 참전비(중간 아래), 노르웨이군 참전비, 필리핀군 참전비(좌로부터)
낙동강 전투에서 스러진 젊음들
추모관에서 나와 검은색 대리석 문을 통해 망자(亡者)의 세계인 묘역으로 들어섰다. 묘역의 맨 위쪽에는 상징구역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에 이르는 길은 아주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참배객들은 왼편으로 도열한 왕겹벚꽃나무를 사열하며 올라간다.
상징구역에 들어서자 뜻밖에도 한국인 이름의 묘비가 보였다. 하나, 둘, 셋…. 모두 36기였다. 미군에 배속돼 이들을 지원하는 한국 군인 카투사로 참전한 이들이었다. 왼편 모퉁이에 일병 홍옥봉의 묘가 보였다. 홍옥봉 일병은 1950년 9월 10일 전사했다. 전사 장소는 경남 창녕군. 홍옥봉 일병의 묘는 다른 35기의 묘비와는 다른 게 있었다. 합장묘였다. 아내 박봉금씨가 2002년 8월 1일 남편 곁에 묻혔다. 꽃다운 나이에 청상(靑孀)이 된 새색시는 52년간 남편을 그리워 하다가 죽어서야 남편 곁으로 갔다는 이야기 아닌가. 전쟁이 앗아간 남편을 잊지 못해 남몰래 베갯잇을 적셨을 그 수많은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정삼문 병사를 비롯한 다른 병사들의 묘비를 하나씩 훑어 내려갔다. 놀랍게도 전사 장소가 창녕과 영산에 집중돼 있었다. 경남 창녕군 영산면은 낙동강을 끼고 있다. 저 유명한 자연습지 우포늪이 창녕군에 있다.
다시 전사 일시를 확인해 나갔다. 8월에 전사한 김주리 일병을 제외한 35명이 모두 9월 2~10일에 전사했다. 이 중에서 9월 3일에 전사한 사람이 11명이었다. 창녕과 영산, 낙동강이라는 고유명사만 듣고 금방 6·25전쟁의 한 장면을 떠올린 사람이 있을 것이다.
전쟁 초기의 가장 치열했던 한 장면이 낙동강 방어선. 카투사 36명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 공산군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위험에 빠진 조국을 지키다 그렇게 청춘의 꽃봉오리가 꺾인 것이다.
유엔군이 인천 앞바다를 통해 상륙한 게 9월 15일. 속수무책으로 패퇴를 거듭하던 전세를 일시에 뒤바꾼 게 인천상륙작전이다. 일주일에서 보름만 견뎌냈다면 카투사 35명은 목숨을 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한 장면과 조우하게 될 줄은 몰랐다.
6·25전쟁 당시 참전국은 전투병 파병국 16개국과 의료 지원단 파견 5개국을 합쳐 모두 21개국. 이 중 17개국의 병사들이 전사했다. 상징구역에는 참전국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가장 먼저 만나는 기념비가 그리스 참전 기념비. 이어 필리핀, 태국, 터키, 콜롬비아, 뉴질랜드, 노르웨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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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질랜드군 참전비, 영국군 참전비, 호주군 참전비, 캐나다군 참전기념동상 (좌로부터)
고국의 흙 한 줌 옆에 놓고
유엔기념공원에서는 매일 오전 10시 알파벳 순서대로 국기 게양식을 연다. 매월 2·4주 토요일 오후 2시에는 53사단 소속 군악대가 알파벳 순서대로 국기 게양식에 맞춰 해당 국가의 국가(國歌)를 연주한다.
노르웨이는 전투병을 보내지 않고 의료 지원단만 보냈으나 3명이 전사했고, 이 중 한 명이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돼 있다. 2007년 하콘 마그누스 노르웨이 왕세자 부처가 유엔기념공원을 방문했다.
터키는 21개 참전국 중 유일한 이슬람 국가. 터키 병사 462명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 터키 정부는 기념비에 시(詩)를 새겨놓았다. 터키 국기가 걸린 게양대 밑부분에 유리 상자가 놓여 있었다. 터키의 성지(聖地)에서 퍼온 흙이 담겨 있는 통이 여러 개 보였다. 무슬림들은 종교적 관습에 따라 나라의 부름을 받아 대의를 위해 싸운 나라를 조국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육신은 그 나라에 잠들어 있지만 혼은 자신이 태어난 조국으로 돌아간다고 믿는다.
1973년 10월, 콜롬비아 국방장관은 스페인어와 한국어를 나란히 적은 묘비를 세웠다. ‘자유를 위한 콜롬비아 사람의 죽음은 그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상징구역에 있는 기념 조형물 중 미학적으로 눈길을 끄는 것은 뉴질랜드 기념탑. 한눈에도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문양이 직사각형 석판에 새겨져 있다. 모코(Moko). 모코는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 여성의 턱 문신으로, 성인을 상징한다. 옆에는 기념탑에 대한 한글 설명이 보였다.
“…이 디자인은 전시에 국가를 위해 복무했던 모든 이들의 어머니로서의 뉴질랜드를 나타내며, 또 양옆으로 흘러내리는 물길로 육군과 해군이 밑에서 유엔과 합쳐지는 것을 보여준다. 기념비의 측면을 따라서 45개의 파인 자국들이 있다. 이것 하나 하나는 한국전쟁 중 전사한 군인들에 대한 뉴질랜드의 상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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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찰리 그린 묘와 아내 올윈 그린의 책.
안장자 영국이 가장 많아
영연방 국가 중 안장자 순으로 보면 영국 885명, 캐나다 378명, 호주 281명, 뉴질랜드 34명,
남아공 11명이다. 미국은 전사자 대부분의 유해를 본국으로 봉환했다. 영국, 캐나다, 호주는 워낙 전사자 수가 많다 보니 주묘역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영국은 자국 병사들의 묘역 맨 앞에 앉아 있는 사자 동상을 세워놓았다.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에도 넬슨 동상의 기단부에 네 마리의 앉아 있는 사자가 사방을 주시하고 있다.
캐나다는 동상을 세워놓았다. 무장을 하지 않은 군인이 서 있다. 군인은 오른팔로 소녀를 안고 있고, 왼손을 소년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소녀의 조막만한 손에는 단풍 잎사귀 10개가 들려 있고, 소년도 단풍잎 11개를 들고 있다. 그런데 소년이 들고 있는 잎사귀 가운데 무궁화꽃 잎사귀가 보였다. 모두 세어보니 21개. 단풍잎과 무궁화꽃이 각각 21개였다. ‘21’은 캐나다군 전사자 516명 중 유해를 찾지 못해 조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유엔기념공원에도 안장되지 못한 실종자 숫자였다. 동상 기단부에는 영어와 한글로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는 캐나다의 용감한 사람들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호주 역시 특별한 참전비를 세워놓았다. 기념비의 전면(前面)이 비바람을 맞지 않도록 굴처럼 만들었다. 뒷면에는 호주 군인들의 전투 상황도를 한반도 지도와 함께 아예 동판으로 새겼다. 그리고 ‘호주와 한국전쟁’이라는 글을 새겨놓았다.
“1950년 6월, 호주는 북한의 남한 침공을 방어하기 위한 유엔의 호소에 최초로 응대한 국가 중 하나였다. 호주군은 한국전쟁의 지상, 해상, 공중전에 참가했으며 그중에서도 가평, 마량산 및 37도선 주변의 전투에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가, 1950년 9월 이후 지연전을 포함한 치열한 지상전에서 크게 활약했다.…호주군의 희생은 한국 국민에게 자유 수호의 상징으로 기억될 것이며, 이는 양국 간의 밀접한 사회·경제·교육 교류로 길이 보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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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옥봉, 휴머스턴, 헤론 병사의 합장묘.(위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