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한국전쟁 史

14세 소년이 격은 한국전쟁(2회)

淸山에 2011. 3. 31. 15:44

 

 

 
 
 
14세 소년이 격은 한국전쟁(2회)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꼭 읽히고 싶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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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창 맨 아래에 있는 1회(2009/01/05)부터 읽으시기 바랍니다.
 
 
 

 

 
 
- 2009년 신년특집으로 민병설 연구위원님의 한국전쟁 체험기가 연재됩니다. 한국전쟁을 격은 세대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가운데 한국전쟁을 격은 세대가 그때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매우 가치있고 귀중한 작업이라 생각됩니다. -(편집자 주)



인민군 탱크 앞세워 서울 입성


6월28일 해맑은 아침이다. 동내 악동들과 어울려 동관대궐(東關大闕=창덕궁) 앞으로 인민군을 보러가잔다. 내가 살던 곳이 원서동(鍾路區 苑西洞-노인들은 원동이라 불렀다) 북쪽 창덕궁의 선원전(璿源殿=창덕궁 안에 조선 역대 왕들의 어진(御眞)을 모신 전각) 앞 이였으니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위장막과 나무가지로 뒤덮힌 우람한 인민군 탱크가 아스팔트에 깊은 자국을 패며 원남동(苑南洞) 쪽에서 구름다리를 거쳐 수없이 달려오는데 중간에는 말마차로 끌고 오는 야포도 있고 따발총을 메고 오는 인민군도 있었고, 오토바이에 달린 사이드카에 긴 가죽장화를 신고 타고 오는 장교인 듯한 인민군 등 모두가 내게는 신기하고 무섭기도 했지만 국군에 비해 훨씬 잘 무장된 인민군이었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 보았던 국군의 무장은 타이어바퀴가 달린 장갑차 정도가 기계화부대였다는 것에 비하면 국군이 사흘만에 서울을 내 줄 수밖에 없었다는 판단 이였다. 탄창이 가로 붙고 연발로 쏘아대는 기관총처럼 숭숭 구멍이 난 총신이 신기하기도 해 속으로는 탄성이 공포감으로 바뀌곤 했다. 탱크위에서 상반신을 드러낸 인민군은 연도에 나와 있는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며 수도 서울에 입성한 자신에 찬 개선장군의 모습이었다.  
동내 아이들이 모여들었고. 그곳에 모인 어른들은 언제 준비했는지 인공기를 흔들며 인민군의 서울입성을 환영하며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연도에 모인 사람 중에는 낯익은 동네 어른들과 젊은이들도 많았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뒤바뀐 것이다. 끝없는 인민군들의 서울 입성을 정신없이 보다 집으로 왔다. 


<사진> 50년 6월 28일 시청 앞을 지나며 세종로로 향하고 있는 인민군의 소련제 T-34 탱크.


 

사당의 위패를 태우다

아마 다음날인 6월29일이였나 보다. 우리 집은 부잣집은 아니었지만 동내에서 큰 한옥으로 뒷 마당에는 사랑방과 선조들의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祠堂)이 있었다. 아버님과 어머님의 표정이 굳어지시더니 이른 아침부터 무엇인가를 결심하신듯 하셨다. 집안 분위기가 이토록 무겁게 가라앉은 것은 본적이 없었다.


"공산당은 사당까지 집안에 모시고 있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 집안이 부자는 아니지만 무산대중 편에 선 그들은 우리집안을 반동분자로 보고 그냥 놓아주지 않을꺼다. 더구나 세상이 바뀌고 혼란한데 먼 훗날을 생각하면 어린 자식들이 선조들의 사당을 지키기는 어려울 뿐 만이 아니라 자칫 선조들을 욕보일 수 있으니..."
하시면서 뒷마당에서 위패들을 하나씩 불에 태우셨다. 엄숙한 분위기에 눌려 나는 지켜만 보고만 있었다. 앞날을 멀리 내다보시고 판단하신 아버님의 침통한 결심 앞에 한 여름의 땡볕에서 나는 온몸이 굳어 있었다. 씻을 수 없는 불효(不孝)를 범하셨다고 여기시는 아버님의 침묵의 자책을 나는 나이가 들면서 헤아려 본다.


인민군이 찾아오다


또 하루가 지나고 난 오전에 대문을 요란하게 두들기는 소리에 나가보니 인민군과 사복을 한 사람이 집으로 들어와 집안을 샅샅이 둘러보며 묻는다. 사복을 하고 앞세웠던 사람은 낯은 설지만 아마도 그동안 동네에서 지하활동을 했던 남로당원 이였을 게다. 따발총을 멘 인민군이 아버님에게 묻는다.  


"이집에서 국방군에 나간 동무는 없습네까?"
"우리 집에는 보다시피 어린 아이들 뿐이요"


몇 가지를 더 묻고 되돌아갔지만 함경도 청진에서 내려와 우리 집에 살던 국방군 소위의 어머니는 태연한척 했지만 뒷마당 빨래 줄에 아들의 군복을 널고 그 위에 이불로 덮은 것을 찾아낼까 두려워 사색이 되면서도 멀쩡한 마당에 비질을 하며 딴청을 하고 있었다.


인민군 일행은 먼 친척 뻗되는 옆집 조카네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따발총을 조카에게 겨누며 "손들어! 국방군 간나 쌔끼!"


나보다 3살 위의 조카는 중학교 5학년으로(당시는 중학교가 5년제) 3학년부터(?)는 학도호국단으로 가입되어 제식훈련과 집총훈련 등 군사훈련을 받았는데 조카가 학도호국단의 얼룩무늬 단복을 입고 있어서 국방군 패잔병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새파랗게 질린 조카는 한참을 설명한 후에야 인민군은 총구를 내렸지만

"미안하오 동무! 동무도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 반동 리승만 도당으로 부터 공화국 남반부를 해방하는 용맹한 인민군대를 위해 의용군으로 지원 하시요!" 하고 다음 집으로 향했다. 

모두가 새파랗게 질렸고 이런 일이 있고난 후부터 그 학도호국단 단복을 입었던 조카는 어딘가에 은신했다.  
 

<사진> 학도호국단의 제식훈련 장면


 

인민군의 선무공작(宣撫工作)


인민군은 서울에 입성하자마자 큰 도로변(창덕궁 앞)에서 깊이 떨어져있는 우리 동네까지 찾아와 아이들을 모아놓고 '바리깡'으로 이발도 해주고 '김일성 장군'등 생소한 노래를 가르치면 10여살의 세상모르는 아이들은 신나게 따라 부르기도 했다. 인민군들은 아이들이 가장 흥미로워 하는 따발총을 보여주었는데 국방군들이 가지고 있던 일본제 9.9식 소총에 비하면 참으로 위력이 엄청나구나 생각했다. 아이들의 관심을 이끈 인민군은 신바람이 났다. 
"공화국 북반부에서 만든 따발총인데 시가전(市街戰)에서는 가장 뛰어난 총"이라고 자랑했다. 아이들에게 비스켓도 나누어주며 "아버지는 어디계시냐? 형들도 있느냐? 무슨 일을 하시느냐?" 하며 동내 이웃사정을 아이들을 통해 파악하려 했던 모양이다.


인민군은 장교나 사병할 것 없이 하나처럼 사용하는 용어가 토씨 하나도 똑같으니 놀라운 일이였다. 그들의 말을 다 알아 듣지는 못 했어도 세뇌(洗腦)하는 사상교육이 놀라웠고 섬짓했다. 공화국북반부, 김일성 장군, 인민해방군, 무산대중, 리승만 도당, 남반부 해방, 미 제국주의...등 이런 생소한 낱말들이 짧은 시간동안 어린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휘저었다.


불안한 사람들


해방직후부터 밤이면 간혹 누군가가 써댔지만, 인공(人共)치하가 들어서자 서울은 동네마다 담벼락에 붉은 페인트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 "조선노동당 만세" "위대하신 김일성 장군 만세!" 또는 "미 제국주의의 주구 리승만..."라고 썼고 또 재빠르게 동네마다 그동안 지하에서 활동하던 남로당원들이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지식인들과 동내 유지들을 찾아다니며 인민위원회에 나와 함께 일하자고 설득을 하고 다녔다. 우리 동네에서는 동경유학을 다녀온 최○○란 사람이 인민위원장이 되어 아버지를 찾아와 함께 일을 하자고 제의했지만 적당한 핑계로 자리를 모면하고 "세상이 혼란스러울 땐 나서는 일은 아주 위험하다"고 하시면서 불안해 하셨다.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들리는 소문이 누구는 인민위원회에 잡혀갔다 내무서(인공 치하에서경찰서)로 넘어갔다. 누구는 요즘 소식이 없고 그 가족들도 보이지 않는다.
길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보이질 않고 많은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어느 집에서는 쌀 몇십 가마가 나와 빼앗아 나누어 주었단다. 어느 집에서는 生고무 몇톤이 나왔는데 그런 모리배들 때문에 인민들이 도탄에 빼졌다는...등 소문이 퍼졌다.
밤이면 끊긴 한강다리를 수면 밑으로 가교를 놓아 군수물자를 나르는 일에 젊은이들을 데려다 '노력동원'을 시켰고, 인민위원회에서는 의용군 모집에 앞장섰다.  


최○○ 인민위원장과 이웃에서 사는 모 화백(畵伯)의 손자는 할아버지가 위험에 처하자 할아버지를 살려주는 대신 인민의용군에 지원해 나갔다 했으나 아직도 소식이 없다.
그때 아는 친구 중엔 15~16세짜리도 인민의용군(人民義勇軍-인민군 정규군을 돕기 위한 지원병)을 지원했는데 이런 방법을 썼다. 학교 강당이나 극장에서 무료로 북한영화, '석화(石花)'를 무료로 상연하고 나면 누군가가 무대로 나가 적기가(赤旗歌)나 '김일성 장군' 등의 노래를 가르치며 분위기를 띄우고
"학생동무 여러분! 우리의 용맹한 인민해방군은 3일 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부산까지 밀고 내려갔습니다.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 리승만 도당을 공화국 남반부에서 몰아낼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학생동무 여러분! 우리 모두 인민해방군을 도와 인민의용군에 지원합시다!"고 선동 하면서 박수와 함께 만장일치의 분위기로 의용군 지원을 유도해서 15~16세의 어린 학생들까지도 의용군으로 몰아갔으니 전쟁(戰爭)터로 몰릴 수 있다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고학년 중학생들은 불안해 시골로 가거나 다락이나 비밀스런 지하실 같은 곳으로 잠적했다.


<사진> 한국전쟁 때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간 장정들



(3회 예고)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서울시민들
*죽을 고비를 넘기다.
*서울을 떠나다
*배고픈 아이들
*패주(敗走)하는 인민군

                                                                                          Posted by 민병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