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한국전쟁 史

14세 소년이 격은 한국전쟁(1회)

淸山에 2011. 3. 31. 15:46

 

 

 
 
 
14세 소년이 격은 한국전쟁(1회)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꼭 읽히고 싶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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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창 맨 아래에 있는 1회(2009/01/05)부터 읽으시기 바랍니다.
 
 
 

 

 
 


- 2009년 신년특집으로 민병설 연구위원님의 한국전쟁 체험기가 연재됩니다. 한국전쟁을 격은 세대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가운데 한국전쟁을 격은 세대가 그때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매우 가치있고 귀중한 작업이라 생각됩니다. -(편집자 주)



한국전쟁 발발

2009년은 한국전쟁 발발 60년째 되는 해이다. 열네살 철부지가 60년전에 겪었던 공포와 기아의 전쟁중 아픈 기억들을 더듬어 적어내는 일은 빛바랜 '퍼즐'조각을 찾아 맞추는것 처럼 시작부터 쉬운일이 아니여서 며칠을 헤멨다.


또렷한 듯 희미한 기억속에 1950년 6월 그해 여름은 몹시 무더웠고 이른 장마속 눅눅한 습도로 찜통처럼 푹푹 쪄댔다.
해방 후 혼란기를 거치면서 일제치하처럼 서울은 식량배급제가 계속되었고, 3.8선에서는 남북간에 총성이 자주 오갔으며, 북에서 보내던 전기가 중단되고, 수없이 많은 단체들이 생겨나고, 좌우(左右)의 충돌이 잦았으며 아침이면 대문밖에 생소한 삐라가 뿌려져있었다. 많은 요인(要人)들이 암살되는가 하면,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이 대공산권 극동방어선을 필리핀과 오키나와로 물리는, 소위 "애치슨 라인"을 발표해 남북간 군사력의 균형을 잃게 되었다. 단전(斷電), 단수(斷水)마저 잦았던 때라 많은 서울시민들은 먹고사는 생존문제에 단순히 집착하는 소시민일수 밖에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날인가 서울시내 곳곳에서 이동차량방송에서 나오는 숨가뿐 소리가 내게도 스쳤다.
"국군장병은 속히 귀대하라! 괴뢰군이 남침했다! 국군장병은 속히 귀대하라!"
이게 무슨 소리인가? 청천벽력이 아닌가? 모처럼 휴가나온 국방군(국방경비대)들이 긴장속에 귀대길에 오르고 있었다. 신문마다 호외(號外)를 뿌리고 라디오에서도 긴박한 소식을 전하니 어른들의 표정은 굳어져있었다.
"전쟁이 났단다!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쳐 들어왔다!"
당시 3.8선 근방에선 가끔 총성은 있었지만 이번엔 '진짜' 전쟁이 터졌다! 6.25 한국전쟁이 터진 것이다. 불안한 마음이 조금은 있었다. 어린 나로선 실감하지는 못했지만 불안과 흥미(?)속에 밤잠을 설치며 하루 이틀이 지났다.
 

1950년6월25일 새벽4시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내려오는 인민군

 

리승만의 거짓방송


6월26일부터 라디오에서 계속되는 방송은 리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노회한 목소리였다.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십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국군의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 우리 국군은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할 것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 국군은 적을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 이후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이승만과 그의 내각은 서울시민들을 버리고 이미 수원으로, 대전으로, 대구로, 부산으로 먼저 도망가며 소위 국부(國父)로 자처하던 리승만은 정동에 있던 HLKA 방송국을 통해서 녹음방송을 보내면서 서울시민들을 속였던 것이었다.


(*이승만은 ‘리승만’으로 표기했고 영어로는 ‘Syngman Rhee’로 표기했었다.) 
 

1950년당시의 리승만 대통령


 
 인민군의 서울 입성 


"동두천 까지 들어왔데!" "의정부까지 들어왔데!"
천둥번개가 치면서 이른 장마비가 억수로 퍼붓는데 대포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면서 불안이 자꾸만 부풀어 왔다. 언제나 그랬지만 호사가들은 밤잠을 설치면서도 새로운 뉴스를 동네방네 전하는 사람은 그 때도 있었다. 귀청을 째는 대포소리가 들리고 기관총의 가파른 소리가 들리더니 지축을 흔드는 탱크의 캐터필터 굉음이 무섭게 서울 시내를 깔아 뭉개면서 밤잠을 설친 시민들은 각자가 입을 다물고 군대 적령기의 젊은 사람들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동내 부인들과 할머니들이 여기저기서 수군대기 시작한다.
"미아리까지 들어왔다!" "아냐! 창경원을 지나 구름다리도 지났단다!"


전쟁이 터지기 사흘만인 6월28일 아침에 포성과 총성이 가까이 들리더니 서울이 인민군에게 함락되었다. 우리들은 창덕궁과 종묘를 잇는 다리를 구름다리라고 불렀다 

1950년 6월 28일 중앙청을 거쳐 남대문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 인민군 탱크들.


 

서울을 끝까지 지킨 용감한 국방군


6월28일 새벽에 요란하게 대문을 두둘기는 소리에 모두가 곤한 새벽잠에서 깨었다.
해방후 함경도 청진에서 남하해서 우리집에 세들어 사는 가족이 있었는데 그 집 아들 김○휘 소위가 군복에 수류탄을 가슴에 주렁주렁 매단 채로 노모와 가족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찾아온것이다.
"어머니! 급하게 인사드리러 찾아왔습니다! 지금 인민군 탱크를 까 부시러 갑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충혈된 눈이지만 부동자세로 거수경례와 힘찬 목소리로 유언같은 말을 남기고 황급히 문밖으로 튀어나갔다. 참으로 애국심이 대단한 용기있는 국방군 소위는 효심도 깊은 젊은 청년이였다. 어린 나였지만 이렇게 전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제야 전쟁을 실감했다. 아직도 총성이 따갑게 울리고 콩 볶듯한 기관총 소리가 점차 가까이 오는데 김소위의 노모는 아들이 떠난뒤 정한수를 떠놓고 자식의 안위를 빌고 빌면서 자식이 국방군임을 감추려 집에 남았던 군복들을 숨기고 있었는데...  
이후 소식이지만 김○휘 소위는 한강다리가 끊어진 뒤에 수영으로 한강도강에 성공했고 살아서 돌아왔다. 
 

6.25때 폭파한 한강 인도교



한강 인도교/철교 폭파와 최창식 공병감


1950년 당시에는 한강에는 기차가 다니는 한강철교와 사람과 차량이 다니는 인도교(사진) 두다리뿐이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기 까지 3일이란 짧은 시간안에 대부분의 서울시민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리승만 대통령의 서울사수 방송을 믿고 있다가 극히 일부 고위층과 시민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를 원망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주저앉아 인민군의 서울 입성을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인민군이 서울근교까지 내려왔던 6월28일 새벽(2시30분경)에 한강철교는 국방군 공병대에 의해 폭파되었다. 다리를 폭파한 시간 다리위에는 500명~800명의 피난민들이 있었고 차량 50여대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더 많은 국방군을 한강이남으로 도하시키려는 작전에 차질을 빚었다고 해서 이 모든 책임을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지워 50년 9월 21일 부산에서 사형에 처했다고 했다. 상부의 명령에 따라 한강다리를 폭파한 최창식 대령 그 부인의 항소로 1964년 무죄가 선언되었다. 당시 국방부장관은 신성모씨였고, 육군참모총장은 채병덕 장군이였다. 
채병덕 장군은 한국전쟁 패전의 책임을 면치 못한 채 부산 방어의 최전선에서 함정에 걸려 36세인 50년7월27일 인민군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한강철교 폭파장면

 

                                                                            Posted by 민병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