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신년특집으로 민병설 연구위원님의 한국전쟁 체험기가 연재됩니다. 한국전쟁을 격은 세대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가운데 한국전쟁을 격은 세대가 그때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매우 가치있고 귀중한 작업이라 생각됩니다. -(편집자 주)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서울시민들
한강다리가 끊기니 육로나 기차 길이 막혀 큰길에는 어쩌다 인민군의 차량들이 오갈뿐 인공치하(人共治下)의 서울은 지방에서 올라와야 할 식량수송로가 차단되었다.
전쟁이 터지고 며칠이 지나자 대부분의 집에서는 식량이 떨어지기 시작해 조금 남은 쌀이나 보리쌀로 끼니수를 줄이거나 죽을 쑤어먹었으나 더 지나자 바닥이 나니 싸전이나 가게들은 문을 닫은 곳이 많아졌다. 이때 북한 화폐도 함께 사용하긴 했는데 북한 화폐를 신기한듯 몇 번 보기는 했어도 사용한 적은 없었다. 남쪽 화폐와 1:1로 사용한 것으로 기억된다.
먹을 것이 귀하니 사람들은 뚝섬같은 채소밭을 찾아가 채소를 사다가 쌀이나 보리 혹은 밀가루를 조금 넣고 죽도 아닌 '풀떼기'를 쑤어 먹기도 했다. 풀떼기란 말도 처음 들었다.
어린 나이지만 난리 통이라 배고픈 티도 못 내고 함께 견디며 참아왔지만 한참 먹을 나이에 먹이지 못하는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지금도 어쩌다 꿈에서 만나 뵈면 뜨겁게 가슴으로 울면서 잠을 깨곤 한다. 형제들이 많아 넉넉히 차례가 오지 못했지만 속이 안 좋다고 한 수저라도 내게 더 덜어주셨던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이 철없는 불효 자식에게는 늦게서야 오래도록 지울 수 없는 아픔으로 밀려오곤 했다.
이렇게 연명하는 것도 한계에 달해 외가댁이 있는 시흥 쪽으로 식량을 구하러 여러번 아버지와 함께 나섰다. 한강나루에서 나룻배를 타고 노량진을 거쳐 영등포를 지나 시흥으로 가는 신작로(新作路)를 따라 두어시간 걸으면 마장교(馬場橋) 바로 직전 지금의 신대방동에 도착한다. 외삼촌은 피난 가셨고 삼촌댁과 우리 또래 아이들뿐인데 그곳에도 식량은 바닥이 나기 직전이다. 밭에 나가 챙길 수 있는 채소를 뽑아오거나, 멀리 떨어진 농촌을 찾아가 옷가지를 주고 보리쌀이라도 바꿔 오는 날은 행운이다.
해방 전후에 생필품은 절대 부족이었다. 예를 들면 선생님이 자기반 학생들을 세워놓고 운동화나 학생복을 검사해서 가장 낡은 옷이나 운동화 신은 학생 10명 정도를 찾아내서 그 10명에게만 상품교환권을 주면 그 표를 가지고 가야만 지정된 곳에서 운동화나 학생복을 살 정도로 생필품이 귀했다. 그러니 옷가지는 말 할 것도 없었다. 광목(廣木-무명으로 짠, 폭 넓은 표백도 안 된 천)이나 세탁비누조차 배급을 받았을 정도니까 시골은 그나마 더 귀했나 보다. 물론 돈 많은 사람들은 그때도 남대문시장 같은 야미시장(暗市場의 왜말)에서 일제 밀수품까지 모든 것을 살수는 있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다
이렇게 먹을 것을 찾아 가까운 시골을 한번 다녀오면 한주일 정도는 겨우 견딘다.
하지만 배를 채우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하는 줄은 미처 몰랐다. 용산쪽 한강 나루터를 가자면 번번이 인민군이 군수물자를 나루까지 옮겨 달라고 하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한강다리 위에는 언제나 미 공군 정찰기가 떠서 아래를 내려다보거나 사진을 촬영하는지 온종일 한강 상공을 맴돌고 있었다.
하루는 노량진에서 먹거리를 한짐 지고 나룻배를 타려는데 인민군이 "동무 같이 탑시다!"한다. 뉘라서 거절하랴! 인민군 두 명과 함께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오는데 용산쪽 나루에 거의 도착했을 때 언제 우리 탄 배를 찾아냈는지 하늘에서 세이버 제트기(F-84)가 우리가 탄 나룻배를 향해 무섭게 내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인민군 둘과 함께 탓으니 먹이 깜을 찾은 독수리처럼 거의 수직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하강하면서 기관포를 "탕 탕 탕 탕..." 사정없이 난사하는데 순간 죽었구나 하면서도 모래사장으로 뛰어내려 엎어졌는데 아마도 2,30발은 퍼붓는 것 같았지만 뱃사공까지 5명 모두는 무사했다. 살았구나! 모두 살았다! 혼이 빠져 한참을 엎어진 채로 있다가 고개를 돌려보니 아버지도 일어나셨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한순간이다. 그동안 길에서 본 많은 시체중 하나가 될 뻔 했다. 하늘이 도우신 구사일생(九死一生)이다. 우리들을 쫓던 제트기도 멀리 날라 가고 있었다. 목숨을 잡히고 식량을 구해 와야 하나? 식량 보따리를 찾으려 뱃전으로 가면서 생각했다. 어린 녀석을 보고는 명중시킬 수가 없었는지? 아니면 서툰 조종사였나? 목숨을 살려 준 조종사에게 한국전에서 임무를 끝내고 무사히 귀국했으면 했고, 나룻배에 함께 탓던 인민군 병사도 어느 집 귀한 자식이니 부모를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했다.
가끔은 내려 꼽는 제트기를 향해 따발총으로 응사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초라한 대응이었다. 인민군들도 보급로를 위해 한강수면 밑으로 밤새도록 시민들을 동원해 부교(浮橋)를 설치하고 보급품을 나르긴 했지만 미 공군기들은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매일 그것을 찾아내고 폭파하느라 한강 위에는 언제나 정찰 비행기나 폭격기들이 맴돌고 있었다.
<사진> 북한 출격 - 북한의 상공에서 공격을 감행하는 미공군기.
서울을 떠나자
"이렇게 몇 번을 시골로 다닌다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다. 네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지고 온 음식을 내 목으로 넘길 수 없다. 더구나 며칠 전에도 최○○ 인민위원장이 다시 찾아와 아버지를 인민위원회에 나오라고 당부를 하고 갔는데 심상치 않다. 모두 외가댁으로 가자!
그 곳이 시골이라 그래도 안전 할 꺼다.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우리 가족 모두가 찬성했다. 다음날인가 가볍게 보따리를 싸고 이른 아침에 인민위원회가 있는 원서동 길을 피해 마루터기를 넘어 중앙중학교가 있는 계동(桂洞)길을 따라 황급히 종로 을지로 남대문 용산을 거쳐 나룻배를 타고 시흥 외가집으로 찾아갔다. 대가족이 먹을 것을 찾아갔으니 농사짓는 시골집인들 반가워 할 일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도 인민위원회가 생겨 시골동네의 많은 것을 관장하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잡혀갔고 몇몇 사람은 설쳐대고 있다고 한다. 농촌에서 그들 인민위원회에 대해 수군수군 했다. 그들은 벼 한 포기에서 벼의 낱알이 몇 개가 달렸으니 논 한마지기에서 쌀을 얼마 수확한다는 통계를 내서 추수할 때 꼼짝없이 공출(?)을 하게 될 거라는 풍문이 돌고 있었다. 분위기가 냉랭했다. 아마도 왜정치하에서 식량을 공출(供出)해 갔던 억울한 기억을 했을 게다.
시골의 몇몇 지주들은 꼼짝도 못하고 소작인들이나 머슴(?)들이 자기 앞으로 돌아올지도 모를 지주들의 논밭을 넘보고 있다고들 했다. 밭에 나가면 주인이 따로 없다. 누구나 다 거두어간다. "네것 내것이 어디 있느냐"고도 했다.
막상 찾아간 시골이지만 밭에 먹을 것이라고는 호박밖에 없다. 토마도도 한물이 갔는지 작고 파란 것뿐이다. 호박은 남았는데 그것도 청둥호박도 아니고 애호박도 아닌 호박만이 있어 그걸 삶아서 조선간장에 찍어 먹었다. 그것도 하루에 한 끼 정도다.
한 여름 푹푹 찌는 더위에 삶은 호박을 먹고 나면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이 현기증이 나고 무더위 속에서 진땀을 흘리며 장신 없이 잠에 빠져든다. 앞날이 캄캄한 그때는 언제 끝날 줄 모르는 전쟁 속에서 이렇게 굶주리는 날들이 계속될 것만 같아 절망만이 있을 뿐 이었다.
해만 뜨면 언제나 정찰기나 제트 전폭기가 하늘을 날고 남으로 향하는 인민군을 향해 기총소사를 퍼붓는 광경을 가까이 보면서 철없는 아이들에게는 흥미진진한 구경꺼리였다.
<사진> 6.25 당시 피난민 대열엔 젊은이는 없고 노인들과 부녀자뿐.
배고픈 아이들
삼복더위의 한복판에서 밥 먹듯이 굶고 몇 달을 지나니 사람이 짐승만도 못하게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이 먹을 것뿐이다. 어린 마음에도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닫아버리는 것이 낫다 싶었다.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어린 녀석이 죽고 싶다는 세상까지 온 것이다. 어쩌면 "죽고 싶다"는 건 "살고 싶다"는 절실함일지도 모르겠다.
우물물만 마시고 두 세끼가 아니라 2,3일을 굶는 것이 예사였으니 푹푹 삶아대는 더위에 정신조차 흐려지는 것 같았다. 언제쯤 사람답게 살 수 있을까? 희망이 보이질 않는다. 어른들은 "산다는 게 죄(罪)"라고 하셨는데 아이들이 사는 것이 무슨 죄인가?
안쓰러운 얘기이지만 하늘높이 하얀 꼬리를 그리며 북쪽으로 멀리 날라 가는 중폭격기를 보거나 한강 쪽으로 네이팜탄을 토하며 다시 솟아오르는 제트기를 보고 있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배고픔을 잊고 달래는 시간 이였다.
저건 B-29 중폭격기, F-84 전투기, F-86전투기, 정찰기... 아이들은 모두가 항공기 판별 전문가가 되었다. 9월에 들어서도 벼는 여물지 않고 속에는 우유 같은 진한 수분뿐이다. 좀 기다리면 쌀밥을 먹을 수 있단다. 언젠가는 이름 모를 잎이 살찐 풀을 따다가 데쳐먹기도 하고 나무껍질을 먹어보기도 했는데 빈속을 채우기도 어렵거니와 먹을 수도 없었다. 차마 함께 고통을 받고 있는 어머니에게는 배고프단 말은 못하겠다. 철이 들어서가 아니라 아이들은 전쟁 속 어려움에서 이렇게 순치(馴致)되었나 보다.
<사진> 한국전쟁 속에 배고픈 아이(사진-데이비드 던칸)
패주하는 인민군
외가 집 창문으로 가까이 보면 시흥으로 가는 국도에 관악산 쪽에서 내려오는 넓은 개천에 다리(마장교)를 쌕쌔기(제트기)가 폭파하는 바람에 그 옆에서 참외를 팔던 노인이 붕 떠서 날아가기도 했다. 가끔은 국도변으로 찾아가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시체를 보러 가면 기겁을 하지만 생사가 걸린 위험에도 아이들의 호기심은 언제나 우선이다.
노인들은 모이면 정감록 얘기를 했고 아주머니들은 어디서 들었는지 달밤이면 대야에 물을 담고 거울을 담그고 보면 거울에 비친 달에서 태극무늬가 보인다고 했다. 그건 곧 국군이 들어온다는 기대였나 보다.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은 낙동강 전투가 치열하다느니 곧 부산이 인민군에 점령당할 날이 머지않았느니 임시정부가 제주도로 옮긴다느니 했는데 한참을 지나 대포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기관총 소리가 콩 볶듯 하더니 조용해졌다.
별안간 인민군 패잔병들이 이 동네로 몰려오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가 허겁지겁 대문 안으로 들어서더니 인민군복을 벗어버리고 아무 옷이나 달란다. 총도 안든 군인도 있었다. 거절할 수 없어 옷 몇 벌을 내주었다. 밀짚모자도 달란다. 전폭기가 저공비행으로 도망치는 인민군을 향해 기총소사를 퍼붓고 있었는데 인민군들은 관악산 쪽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20대 전의 애띤 인민군들도 있었다. 핫바지에 밀짚모자를 쓰고 농사꾼으로 변장한 인민군들은 도주하면서 미 공군 전폭기의 기총소사를 피하는 위장이었다.
<사진> 부산 인근에서 벌거벗은 채 줄맞춰 이동 중인 인민군 포로들의 모습당시 AP통신의 맥스 데스포 기자가 사진에 담았다. (■ 자료출처 : 맨스필드연구소)
(4회) 예고
*인천 상륙작전/9.28 서울수복
*전쟁의 참상
*전후에 달라진 사람들
*사람이 무섭다
*철새들의 수난
Posted by 민병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