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크리스마스
1950년12월말 모두가 떠난 서울은 날이 갈수록 동네가 쥐죽은 듯 조용하다. 어쩌다 동네에서 만난 모르는 사람들에게 인사는 안하고 스치지만 반가웠다. 저분은 어떤 피치 못 할 사정으로 이날까지 피난을 못 가셨을까?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란 이런 뜻인가 보다. 어쩌면 죽을 수도 있는 날을 앞두고 힘들고 외로움을 함께 하는 낯선 이웃이라도 있다는 건 어린 녀석에게도 작은 위안인가 보다. 전쟁 중 한 겨울 생존의 기본인 식량과 땔감의 공급이 막막한 이제부터 텅 빈 서울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연로(年老)한 사람들이 외롭게 지켜야 했지만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창덕궁 고목(古木)들도 그 많던 철새들을 멀리 보내고 500년 고도(古都)를 외로운 사람들과 함께 의연하게 지키고 있었다.
1950년12월 24일 밤 이었다. 나는 교인은 아니었지만 간간이 부처님과 예수님에 대한 얘기는 흘려들었다. 예년 같으면 크리스마스이브엔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새벽까지 집집을 돌아다니며 찬송가를 불렀지만 이날은 이처럼 조용할 수가 없었다. 아기 예수의 말구유도 일찌감치 남쪽으로 피난을 가셨나 보다. 가난하고 힘들고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태어나셨다는 아기 예수는 먼저 남쪽으로 떠나 간 그들에게 찾아 가셨을까? 아니 하느님은 진정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분이신가?
노환으로 거동조차 어려운 가엾은 우리 할머니를 보살펴 드려야 할 우리 가족들은 함께 살고 함께 죽기로 했지만 老할머니에게 찾아와 따뜻한 위로의 한마디라도 전해 줄 이웃조차 없다는 게 서러워 눈물을 흘렸지만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다는 하느님이 보낸 아기예수는 외로운 소년의 눈물 속에 함께했다고 믿어도 보았다. 아니면 정한수를 떠놓고 군대 간 아들의 안위를 조석으로 비시는 이웃 할머니가 정성스럽게 모시는 그런 절대자(絶對者)라도 상관이 없었다. 전쟁의 혼돈 속에선 구원(救援)의 선(善)도 외면하는가?
1950년의 크리스마스 캐롤은 간간이 들려오는 포성으로 대신했다. "고요한 밤"은 아니었어도,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서울을 뜨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는 "거룩한 밤"이었을까? 철없는 어린 녀석은 뒤척이며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어떻게든 서울을 탈출해야 살 수 있다는 엉뚱한 결심을 다짐하고 어림도 없는 계획을 꾸미며 잠이 들었다.
<사진 - LST(Landing ship for tank=전차 양육함)를 타려고 몰려든 함흥 피난민들>
암흑천지(暗黑天地)
지난 1948년5월14일에 북한은 남한에 송전(送電)을 중단해 남한 공장의 5%만이 가동된다고 했으니 가정용 전등은 초저녁에만 잠시 켤 수 있었다. 아예 가정에서는 촛불이나 석유 등잔을 밝히고 살았고 점포들에서는 카바이드 불로 밝혔다. 더구나 한국전쟁이 터지고 난 후 부터는 모두가 저녁을 일찌감치 먹고 자야했다. 어쩌다 한집에 있는 라디오로도 뉴스를 들을 수 없어서 누가 시작을 했는지 콩알만 한 게르마늄 광석을 구해 "광석 라디오"로 만들어 HLKA 서울방송국을 듣거나 '미국의 소리' 방송 뉴스를 들으며 전세(戰勢)가 궁굼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뉴스들이 입소문으로 퍼졌다.
모두가 피난길에 오른 1950년12월말 경에는 점포문도 모두 닫았다. 석유등잔도 붙일 수 없는 지경에서 뉴스조차 들을 수 없으니 눈앞도 마음도 암흑천지였다. 뉴스에 목마른 세상만큼 답답하고 어두운 사회는 없나보다. 버려진 사람(棄民)이란 이런 것인가? 이때부터 전세(戰勢)에 관한 뉴스와 판단은 포탄소리의 크고 작음이나, 미 공군 전투기들의 행방으로 오늘은 어디쯤 전선(戰線)이 형성되었음을 짐작 할 뿐이다. 저녁이면 높이 날라 집을 찾아 가는 이름 모를 겨울새 울음소리가 외로운 아이들의 겨울밤을 짙게 덮고 갔다.
<사진 - 1950년12월28일 끊어진 한강철교, 그 옆이 임시로 만든 부교(浮橋)>
간절한 애원 "나는 살고 싶어!"
고난의 1950년을 불안한 나날로 보내고 아무 감동도 없는 1951년의 새해를 맞은 지도 며칠이 지나 "서울 철수의 날" 1월 4일의 해도 기울고 있었다. “1.4후퇴”라 했다. 오늘이 피난 갈 사람들은 모두 서울을 떠나는 마지막 날이다. 지난 주에 속으로만 세웠던 내 피난계획을 어른들에게 차마 말씀 못 드리고 혼자 앓으며 포탄소리에 선잠을 깨며 자며 뒤척였다.
1월5일의 아침이 밝았다. 서울을 떠나야 할 사람들은 다 떠난 날이다. 한강의 부교(浮橋)도 벌써 폭파되었단다. 서울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절망을 안겨주는 소식이다. 떠날 생각조차 안한 사람들에게도 다가오는 운명처럼 희망의 문을 굳게 잠가버리는 것이었다.
앓아 누워계신 할머니를 뵈면 내가 꾸민 황당한 피난계획도 설명 할 말이 떨어지질 않는다. 상의할 분은 오직 내말을 들어 줄 만만한 어머니뿐이다. 오늘 떠나지 않으면 꼭 어떻게 될 것만 같은 초조함으로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었다. 당돌하게 말씀 드렸다.
"어머니 저 피난 갈게요. 피난가지 않으면 죽을지도 몰라요. 동생들을 데리고 가겠어요!"
"老할머니가 누워계셔서 우리가 피난을 못 갔지만 이 추운 겨울에 네가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가다니? 너희들끼리만 보낼 수 없다!"
"어머니! 나는요 다 계획이 있어! 어머니! 동생들 데리고 살아 올 자신 있어요! 어머니!“
이렇게 몇 번이고 떼를 쓰며 우겨댔다.
가당치도 않은 어린 자식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셨지만 나는 대청마루 앞 댓돌에 서서 이렇게 수없이 어머니께 허락을 호소하며 울면서 애원했다. 살고 싶다는 어린 자식의 애원 앞에 얼마나 괴로워 하셨을까? 눈물을 감추면서 어머니는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추위도 잊고 마루에 걸터앉은 철없는 녀석은 '정말 내가 해 낼 수 있을까'하면서 안방에 누워계신 老할머니의 힘없는 기침소리에 저렇게 불편하신 몸으로 얼마나 더 사실까? 하는 불길한 생각으로 가슴이 조여 오는 아픔으로 새삼 죄스러웠다. 그래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보살펴 드린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방으로 들어가신 어머니가 부르신다.
"이거 입어봐라 맞을지 모르겠다"
어머니께서는 이불 소창을 뜯어 솜을 두둑히 넣고 누벼서 우리 삼형제의 조끼를 짧은 시간에 만들어 입혀주셨다. 이렇게 따듯한 조끼는 처음 입어보았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했는데 어머니는 우리가 떠나는 길에 조끼를 만들어 주심으로 어린 아들의 피난길을 허락하셨다. 엄동설한에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음을 아파하시면서 피난 갈 보따리까지 싸 놓으셨다.
그 속에는 덮고 잘 이불과 겨울옷 몇 가지와 전구에 씌워 천을 덧대고 기운 양말 등이 전부였나 보다. 어머니가 안아주시는 순간 나는 가슴에 뜨거운 불길 같은 것이 왈칵 올라오며 어머니의 따듯한 사랑에 다시 눈물이 솟았다.
"동생들 데리고 무사히 다녀오너라! 먼저 시흥 외삼촌댁으로 찾아가거라!"
"어머니! 이 조끼를 입으면 어떤 추위에도 견딜 수 있어! 꼭 살아 돌아올 거야! 나 자신 있어! 어머니!!"
포탄에 희생될 수도 있는 엄동설한에 정처 없이 길을 떠나는 어린자식들을 보내는 어머니의 아린 가슴을 나는 얼마나 헤아렸을까? 먼 길을 떠나는 자식들의 용기를 꺾을까 끝내 눈물을 내보이지 않으려고 하셨지만 이슬이 맺힌 눈빛으로 대견스러운 당신 자식으로 자라 살아 돌아오는 날을 기원하셨으리라. 이후 많은 밤들을 뜬눈으로 지새웠을 어머니에겐 나는 불효자였다. 왜 나는 그때 "어머니 사랑해요!" 하는 말을 남기지 못했는지? 그때는 "사랑"이란 말을 쓸 줄도 모르는 숙맥(菽麥)이었나 보다.
“이 세상에 효자는 없다. 효자는 모두 어미가 잘한 것만 감싸서 효자”라고 하셨던 어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14살의 철없는 어린 아들의 엉뚱한 피난계획을 믿어주신 어머니의 괴로운 결단이 고마웠다. 하지만 동생들과 함께 살아 돌아 와야 할 책임감이 내 작은 몸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구체적인 대책도 없이 무작정 남쪽으로 가겠다는 것이 험한 세상을 모르는 내 어리석은 생각일지 모르지만, 언젠가 오늘의 결정을 포기해서 후회할 날이 온다면 그것은 내가 가고 싶은 내 길이 아니지 않은가?
<사진 - 1950.12.18 대구역. “총알을 요리조리 잘 피해서 어예든동 살아오이라.” “어무이 걱정 꽉 붙들어 매이소. 어무이 아들 아잉기요. 내는 꼭 살아 돌아올 깁니다.”>
동행이 나타나다
우리 옆집에는 항렬(行列)로 형님 벌 되는 학자 한분이 계셨는데 해양학(海洋學)의 전문가로서 해방 후 방송국에서 오랫동안 해양에 대한 강의도 하시고, 해방 후 우리 해군 창설자의 한 분이신데 형수 되시는 분은 내 당숙모의 형님이 되시는 풍양 조씨(豊壤趙氏)시니 가깝고도 먼 집안인데 호칭이 어린 내게는 혼란스러웠다. 바로 옆집에 사셨는데 담을 터놓고 살아올 만큼 한 집안처럼 어려울 때 서로 상의하고 조석(朝夕)을 걱정하며 살아왔다.
그 날 아침부터 소란을 핀 내주장에 동조하셨는지 아들 ○基(16세) △基(13세) 둘과 피난을 함께 떠나라고 하신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피난 대열은 12살에서 15살까지의 남자 녀석 다섯 명이 되었다. 철없는 나는 내주장이 이웃에도 동의를 얻은데 좀 더 용기와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먼 길을 떠나야하는 불안과 공포감은 조금은 줄어든 것 같았고 어머니도 조금은 마음에 안정을 찾으신 듯 했다. 모두들 피난 보따리를 둘러메고 어른들께 작별의 인사를 드리고 집을 나섰다. 아직도 한겨울의 칼바람이 매섭게 빰을 때리듯 스쳐가는 1951년 1월 5일. 해가 서산에 기울려 하고 있었으니 오후 4시경 쯤 되었을까?
(7회)예고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다
*흑석동에서 첫날밤을
*잊지 못할 할머니
*한밤중에 총을 들이댄 중공군(中共軍)
- Posted by 민병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