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한국전쟁 史

14세 소년이 격은 한국전쟁(4회)

淸山에 2011. 3. 31. 15:41

 

 

 
 
 
14세 소년이 격은 한국전쟁(4회)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꼭 읽히고 싶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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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9.28 서울수복

서울을 점령한지 불과 한 달 안에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대구(大邱) 북방 7km까지 남진한 인민군은 8월초 낙동강 연안에서 한국군과 미군들과의 대치하며 남한 점령의 최후 일전(一戰)을 겨루고 있었다. 한국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다부동(多富洞=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전투는 인민군이 부산까지 밀고 내려가 남한을 완전 점령하느냐? 이를 격퇴하느냐? 하는 국운을 건 싸움이었다. 예컨대 낙동강 서쪽 구미(龜尾) 약목(若木) 간 5.6km * 12km(=67.2 평방km) 안에 미 공군의 B-29 중폭격기 98대가 3,234(=960톤)개의 폭탄을 26분 동안 쏟아 붓는 융단폭격을 했다. 낙동강 연안전투에서 인민군 사망자 6,867명, 다부동 전투에서 사망자 5,690명 등 8월 한 달 동안 12,000명이 사망했고, 한국군 2016명 미군 1,282명 경찰 111명 등 3,409명이 사망할 만큼 치열했는데 이곳에서 한국군 30~40%의 병력 손실이 있었고 이 전투에 신병(新兵)보충으로 참가한 한국군의 많은 수는 급박한 상황에서 일보(日報)에도 기록하지 못한 병사들이었다. 그들이 오늘날 ‘무명용사’로 국립묘지에 묻힌 청장년들이다.

이처럼 낙동강 전투에 미군의 본격적인 전투참여와 폭탄의 물량공세로 피아가 밀고 밀리는 교착전이 계속되고 있을 즈음 유엔군 측은 인민군들을 그들의 후방에서 공격하여 보급로를 차단하고 병력과 장비를 섬멸한다는 계획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었다. 미 극동군총사령관 맥아더 원수(5성장군)의 계획이 인천바다의 조수간만(潮水干滿)의 차와 항공지원의 항속거리밖에 있다는 이유로 성공하기 힘들다는 미군 수뇌부의 반대에 부딪치기도 했으나
“북한군 지휘관들도 당신들과 같이 훌륭한 장군들이다. 여러분이 인천상륙작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북한장군들도 불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인천 방비(防備)가 소홀 할 것이다. 이 허점을 친다면 성공할 수 있다. 사실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이렇게 설득한 맥아더는 역시 전략가이고 명장이고 전쟁의 영웅이었다.


유엔군 제7합동기동부대의 항공모함을 포함 미주리함과 순양함, 구축함 등 261척의 함정에 미 해병 1개 사단, 한국해병 제1연대, 미 육군 7사단, 한국육군 17연대로 구성된 총 병력 75,000명으로 9월15일 첫 작전으로 수도 서울의 점령을 포괄하는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었다.


<사진 - 함상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



패주하는 인민군들이 농사꾼 복장으로 갈아입고 관악산 쪽으로 들고 튄지 몇 분 후였다.
뚝방 앞 누렇게 벼가 익어가는 논으로 허리도 굽히지 않고 총을 든 미군들이 동내로 몰려들어온다. 껌을 씹기도 하고 담배(chewing tobacco)를 씹으며 누런 침을 뺏으면서 긴장한 모습으로 총을 겨누며 오고 있었다. 내가 밖으로 나가 미군들을 맞았으나 그들은 관악산 쪽으로 달아나는 인민군들을 뒤쫓고 있었다. 최전선이 서울 쪽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인천에 맥아더 장군이 해병대를 이끌고 상륙했단다. 이날부터 밤새도록 조명탄으로 밤을 밝히고 포탄 떨어지는 소리가 지축을 뒤흔들더니 9월28일 서울을 되찾았다.


다음날부터 국도에는 연일 지프차 탱크 수륙양용장갑차 야포 지엠씨 트럭으로 군인들을 태우고 비포장 국도에 먼지를 날리며 북으로 달리고 있었다. 우리도 빨리 서울 집으로 가자고 했지만 한강을 건너는 도강증(渡江證)이 없으면 건널 수 없다고 한다. 며칠이 지나 상류 쪽으로 한강을 건넜다. 급하게 생사를 확인할 가족들의 안부가 화급했다.


다동(茶洞)에 사는 큰누나 집으로 찾아갔다. 이게 웬일인가! 집 전체가 폭격을 맞아 거친 평지로 폭삭 가라앉았다. "여기가 지하 방공호(防空壕) 자리다. 이 밑에서 죽었을 꺼다! 여기를 파보자!“ 돌과 토막 난 나무기둥 벽돌을 들어 올리면서 시체라도 찾자고 했다. 이때 앞집 아주머니가 찾아와
"윤씨 댁은 수유리 화계사(華溪寺)로 피난 가셔서 안전하다"고 했다.


한편 관훈동 고모 댁에 피신중인 둘째 누이에게서도 기별이 왔다. 바로 옆집에 떨어진 박격포탄 파편이 창문을 뚫고 날라와 베고 자던 베개에 꽃혔으나 기적적으로 다친 데는 없었다.
머리와 불과 몇cm 옆에 파편이 박혔단다. 착한 둘째 누나를 하늘은 기적으로 살려 주셨다. 다음날 아침 집안 이곳저곳에 박히거나 떨어진 파편조각을 바께스로 잔뜩 담았을 정도로 위험했단다. 유리창은 모조리 깨지고, 지붕 위 기와장이 날라 가고 깨졌는데 관훈동 고모 댁 가족 모두 무사했다.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 했다. 이렇게 우리 가족 모두는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사진 - 월미도에서 사살 당한 인민군 시체들>


 
전쟁의 참상

지난 7월에 떠날 때 본 서울이 아니다. 서울의 많은 건물들이 내려앉았다. 길가에 널려 있는 건 끔찍하게 훼손된 시체들이다. 사람 썩는 냄새가 역겹게 코를 찌르고 타다 남은 건물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갈아 앉은 건물에서 통곡하는 가족들! 부녀자들! 아이들! 서울의 9월은 지옥의 한 모퉁이다. 지옥(地獄)은 하느님이 사람을 선별해 보내는 곳이 아니다. 인간 의 욕심이 스스로의 울타리를 치고 만들어 낸 곳이 아닌가! 생각이 다르다는 핑계를 앞 세워 야욕을 숨기며 살육을 정당화 하는 전쟁! 과연 한국전쟁은 예외인가? 


아마도 서울시내에서는 격렬한 시가전(市街戰)이 있었던 것이다.
지난 7월경 인민군들은 시가전을 예상을 했는지 주택가 골목입구마다 페인트로 "막다른 골목"을 표시했던 생각이 난다. 서울근교 산에서는 간혹 총성이 들렸는데 퇴각하는 인민군 패잔병과의 교전이었을 게다. 포성이 점점 멀리 들리는 게 쾌조의 북진(北進)인 것이다.


초저녁에 도착한 동내는 그동안 모두가 어디 숨었다 나타났는지 골목마다 조금은 활기가 있다. 군 적령기 동원의 대상자들은 벽장이나 지하에 몇 달을 숨었다 나와서 얼굴은 창백하고 수염과 머리는 자랄 대로 자라있었다. 하지만 납치되었거나 의용군에 끌려간 사람들의 가족들은 가슴은 어떠했을까?


동내 인민위원장의 동생이 잡혔다. 양팔이 뒤로 묶이고 가슴과 등에 "김일성 아들" "스탈린 손자" 라고 써 붙이고 동내 방내로 종을 돌리고 있었다. 수 십명이 그 뒤를 따랐고, 몇몇 사람은 그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질 발길질을 하며 따귀도 후려치며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그중 한사람은 오랫동안 모군일을 하는 건장한 아저씨인데 9월27일 밤 인민위원회에 잡혀가 구름다리 앞에서 여러 사람을 가로 세워놓고 한사람씩 총살을 했단다. 자기 차례가 왔을 때 총을 쏘는 순간 쓸어졌는데 아픈데도 없어 총알이 피해갔다고 생각해서 죽은 척 하다가 그들이 원남동 쪽으로 달아난 후에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 왔다고 했다. 이런 아저씨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양팔이 묶인 사람은 성난 군중 속에서 죽음을 각오한 사람처럼 말없이 이런 수모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90여일 만에 전세(戰勢)가 바뀔 줄은 아무도 예상을 못 했다. 어느 쪽이던 패자(敗者)는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때마침 헌병이 나타나서 짚차에 실고 갔으나 그 후 소식은 모르겠지만 혼란한 전쟁 중이라 살아남기는 어려웠겠다. 조석(朝夕)으로 인사하며 지내던 이웃 간에 이토록 살벌한 원수지간으로 바뀐 이런 세상이 내겐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할머니께서는 잠자리만 잡아도 “살려고 태어난 미물이지만 죽여서는 안 된다”고 노상 내게 말씀하셨는데, 그가 누구든 사람의 귀중한 목숨을 사람의 손으로 죽어야 하는 이 (思想)이란 게 뭔가? 잡은 사람도 잡힌 사람도 왜 죽여야 했으며, 왜 죽어야 했는지를 아이들과 그 후손들에게 어떻게 알아듣게 설명할 수 있을까?


참으로 기이한 일은 두어 달 집을 비운 사이에 우리 집 기와지붕 위 여기저기에 두자높이의 풀이 기괴하게 자라고 있었다. 사람이 살고 있을 때는 없었던 일인데... 사람의 몸에서 뿜어내는 기(氣)가 있나 보다. 몇몇 알려진 이웃 인민위원회 간부들의 집들은 흉가(凶家)처럼 비어 있었다. 그중 한집은 박격포탄에 명중돼 폭삭 내려앉았다. 바로 이 집이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일본 왕이 떨리는 목소리로 ’무조건 항복 한다‘는 라디오 생방송을 나와 함께 듣던 친구네 집이기도 하다. 그때 해방의 순간을 맞은 것이다. 해방의 깊은 뜻도 모른 채. 


<사진 - 1950년9월28일 서울시 서대문구 아현동에서의 시가전(市街戰)>

<사진 - 폐허가 되어버린 서울 서울시가와 피난민들(1950년 9월28일 서울수복당시)>



 전후에 달라진 사람들

전쟁이 일어난 지 불과 석 달 만에 서울 사람들은 많이 변하고 있었다. 전쟁을 겪으면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는가보다. 전통적으로 서울 사람들은 배가 골아도 장사를 하지 않았다. 한국전쟁 전 까지도 서울 사람들은 체면을 우선하고 사회적으로 층하(層下)를 두며 마음 한구석에서 사농공상(士農工商) 순으로만 세상을 나누는 무능한 사람들이었을까?


내가 사는 원서동은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더 많았지만 그 동네에 가게라고는 단 두 곳 밖에 없었고, 싸전도 한두 군데뿐이고 계동(桂洞)에 가야 육고기간, 생선전, 청요리 집, 아이스크림 집, 한약방(桂山한의원-한국 최초의 한약방)등만이 있을 만큼 점포들은 드물었다.


몇 달 사이에 격은 생활고 때문인가? 골목 어귀마다 노점들이 줄을 섰다. 지금의 낙원시장은 그때 운현궁 앞이나 천도교 앞에 늘어선 노점상이 낙원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몸빼를 입고 허리에 전대(錢帶)를 차고 열심히 장사하는 것을 서울의 여염집 부녀들은 놀라움으로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북에서 내려와 극성맞게(?) 장사를 한 사람들은 당시에는 종로4가를 중심으로 있던 "배우개시장"을 동대문까지 늘려 오늘의 동대문시장을 형성하는데 주역이 되었고, 남대문시장 도깨비시장 등 확장에도 같은 역할을 했다. 맨몸으로 내려와 갖은 고생을 하며 먹고 살며 아이들 가르치며 악착하게 살아야 했던 북한 피난민 아줌마들을 ‘또순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 이었고, 몫 돈을 마련하는 계(契)모임도 이때부터 번지기 시작했다. 얌전(?)했던 서울 부녀자들이 체면 따위는 벗어버리고 돈 버는 방법을 조금씩 이들에게서 배웠던 것 같다.


전쟁발발 얼마 후 얘기이긴 하지만 어찌 보면 한국전쟁의 발발을 기점으로 그동안 남아 있던 농경문화권의 윤리나 가치관의 허상들을 급격하게 마감하는 계기가 되었던 게 아닌지? 사람들의 마음은 피폐해 지면서도...


청계천 수표교(水標橋) 밑은 해방 후까지 물고기가 살만큼 맑았는데 물자가 귀하던 당시 뒤로 흘러나온 미 군복을 검은색으로 염색하거나 회색으로 탈색해 입을 수 있도록 도라무통(Drum 통)을 半동강을 내서 솥으로 쓰며 군복을 염색이나 탈색을 해 팔았는데 그 본거지가 청계천 이였고 이곳 역시 생활고에 시달린 북한 피난민들의 생활 터전 이였다. 청계천 변에 하꼬방(왜말-판자집)을 짓고 살아 생활 오수(汚水)와 염색물감을 흘려보내 이때부터 청계천이 심하게 오염되기 시작했다.


그 후 얘기지만 당시 남대문시장에는 한 시간 안에 1개 사단을 완전무장 할 만큼 미군 군복을 비롯한 군수 물자가 쌓여있었다고 하는 농담도 했다. 지금 남대문시장 쪽에 많은 천막 파는 집이나 등산용품 파는 집들의 원조(?)가 그렇게 자리 잡았다. 


사람이 무섭다

9.28 서울수복. 1950년9월28일 3개월 만에 서울이 수복되었다. 흩어졌던 사람들이 동내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인공(人共)이 물러간 자리에 청년들이 모여 동내마다 치안대(治安隊)를 결성하고 밤이면 딱딱이를 치면서 야경(夜警)을 돌고, 인공 3개월 동안에 인공에 부역한 사람들을 찾아내는 일이 우선 이였나 보다. “빨갱이 들를 찾아 잡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인민군보다 동내 빨갱이가 더 못된 짓을 했다!"
"저놈은 회색분자야!"

빨갱이도 여러 층으로 나눈다고 했다. 
‘수박 빨갱이’-겉은 파랗지만 속은 진짜 빨갱이란다.
"사과 빨갱이"-겉은 빨갛지만 속은 아니야! 많은 증인들이 있어 사과 빨갱이는 풀려났다. “토마토 빨갱이”-오랫동안 들어 내놓고 활동한 겉도 속도 빨간 남노당원을 말한다. 
하지만 사상전쟁의 혼란 속에서 "저놈 빨갱이다!"하면 쉽게 풀려날 도리가 없었을 게다. 월북한 사람도, 납북된 사람도 많았고, 중간지대에 있던 억울한 죽음도 많았을 게다.


서울수복 후 우리 동내에서는 젊은 사람들은 창덕궁 안에서 죽은 시체들을 묻어주는 일에 한동안 동원되었다. 인공치하 동안 그곳에 인민군 특수부대(?)가 자리 잡고 반동분자들을 잡아들여 심문하고 사살하기도 해서 창덕궁 북쪽 숲속에 수 십 구의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삼복을 지난 탓일까? 더러는 알아 볼 수도 없는 시신들도 많았고, 떠난 지 얼마 안 된 시신도 있었는데 마스크도 없이 시신을 수습하는 사람들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송장 썩는 냄새였다. 세상에서 가장 참기 힘든 냄새는 야채 쓰레기도 죽은 동물도 아닌 시신의 부패인 것 같다. 누군가가 “세상에서 가장 심한 악취(惡臭)는 사람 썩는 냄새인 것은,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가장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맞는 얘기 같았다.              

누가 자기 쪽에 협조하지 않았거나 나와 생각이 달랐다는 이유로 동족의 손에 살육 당해야 한다면 어느 한쪽의 씨가 마르기 전까지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이런 야만적 행위가 계속되어야 하는지? 사상이란 게 뭣인지도 몰랐지만 무지한 것은 사상을 앞세운 무서운 인간들이다.


<사진 - 대전에서 희생된 민간인들>

<사진 - 1953년 남대문시장 안 풍경>



철새들의 수난(受難)

낮에 본 끔찍한 시신들이 얼른거려 쉽게 잠을 잘 수가 없었지만 철없는 녀석들은 그런 전쟁의 뒷얘기들이 화제일수 밖에 없었다. 이웃의 악동들 중 보이지 않는 몇몇은 인민위원회에서 일을 보았던 부모들을 따라 월북을 했거나 어디론가 잠적했다고 했다.

"xx 아버지는 사상가(思想家)"란다. "xx 삼촌은 밤이면 담벼락에 붉은 페인트로 김일성 장군...이라고 썼는데 월북 했데" 알듯 모를듯한 생소한 '사상가'란 말들을 쉽게 했지만 불과 석 달 만에 함께 뒹굴며 가깝게 지내든 동내 친구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두고두고 서운했다. 옛날 전쟁처럼 땅 따먹기 싸움이 아닌 사상의 전쟁은 이처럼 어린 친구들도 갈라놓았다. 생각이 다르면 남이 되고. 죽이고 죽을 수도 있는 세상이 되기도 하는 세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늦가을의 을씨년스러운 날씨는 걸친 옷이 시원치 않아서인지 야윈 팔뚝에 소름이 돋기도 했지만, 창덕궁 돌담 넘어 고목 위에 수없이 날라드는 왜가리나 황새 떼들의 멋진 비상(飛翔)과 사뿐한 안착을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지켜보는 것이 낙이였고 위안이기도 했다. 외롭고 심심할 땐 창덕궁의 날라든 철새 떼를 지켜보는 것이 오랜 즐거움이었는데 창덕궁 안에 인민군들이 들어와서는 총질을 하고 그 화약 냄새에 황새와 왜가리 수가 많이 줄었다고 했다.

내가 어려서 바라보고 좋아했던 세 가지는 별(星)과 눈(雪)과 철새(鳥)들이었다. 모두 하늘에 뜨거나 내리거나 나는 것이다. 그것이 어려서부터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고 꿈이고 친구 같은 것 이였다. 별 없는 밤하늘, 눈 안 내리는 겨울, 철새가 찾아오지 않는 숲은 아이들이 꿈꾸며 사는 평화로운 세상이 아니지 않은가?

귀하게나 볼 수 있는 별똥의 신비로운 비행대신 표적을 찾는 예광탄(曳光彈)이 날라 가는 밤하늘과, 밤새도록 쌓인 눈밭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발자국이 아닌 잔인한 살육의 붉은 흔적들이, 전쟁의 총소리로 철새들도 달아난 고목위에 빈 새집들을 말없이 바라보는 아이들에게 주는 상실감을 어른들은 알기나 했을까?


<사진 - 지금은 멸종 위기의 황새지만, 50년까지는 수 백 마리가 창덕궁에 날아들었다.>

<사진 - 왜가리 무리>



(5회)예고

*중공군의 참전
*전황(戰況)은 다시 역전(逆轉)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
*“루머”
*1.4후퇴

                                                                              - Posted by 민병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