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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 소년이 격은 한국전쟁(5회)

淸山에 2011. 3. 31. 15:39

 

 

 
 
 
14세 소년이 격은 한국전쟁(5회)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꼭 읽히고 싶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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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의 참전(參戰)


라디오와 신문에서는 자랑스럽게 국군의 평양입성을 대대적으로 전해왔다. 최선봉에 선 한국군 제6사단은 압록강 물을 수통에 떠다가 리승만 대통령에게 바쳤다는 "늬우스"도 있었다. 리승만 대통령이 숙원 하던 '북진통일'이 눈앞에 다가오는 듯 했다. 전쟁이 터진지 다섯달이 지났다. 미제(美製)의 대량살상무기를 퍼붓는 한국군과 UN군의 물량공세에 인민군은 물론 북한 땅에서는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편 8년간 항일투쟁(제2차 國共合作)과 4년간의 국공내전(國共內戰)후 1949년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했다. 같은 해 12월 장개석(蔣介石) 국민당정부는 타이완(臺灣)으로 국민당 정부를 옮겨야 했다.), 1950년 10월1일 중국 역사상 최초로 중국전역을 평정한 중공군(八路軍이 주축)으로서는 오랜 내전으로 지칠 대로 지쳐 북한을 도와줄 여력이 없다고 판단한 맥아더 미 극동군사령부는 중공군의 한국전 참전을 예상치 못 했다.


인민군이 압록강까지 밀리자 김일성은 중공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중화인민공화국 주석(主席) 모택동은 10월19일에 4개 군단과 3개 포병사단 등 30만명의 중공군을 한국전에 참전하도록 마지막 명령을 내렸고, 만주에 중공군 50만명을 대기시켰다. 모택동(毛澤東)은 소련의 공중지원과 군사물자 원조를 조건으로 "중국인민지원군"이라는 명목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했다. 10월 하순에 한국군에 의해 중공군 포로가 잡혔으나 미군측은 신뢰하지 않았다고 했다. 11월6일에야 맥아더 총사령관은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을 뒤늦게 인지하고 공식 성명했다. 중공군의 한국전 참전에 모두가 긴장했다.


당시 미소(美蘇)의 첨예한 냉정 속에서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 전체가 또 다시 세계대전(大戰)으로 휘말릴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극동의 작은 땅 한반도는 미소(美蘇)간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격돌하는 대리전을 치러야 하는 불행한 희생양이 아닐 수 없었다. 2차 대전 후 평화로운 세상을 기대하던 우리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3.8선이 그어진 것처럼, 다시 한번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약소국(弱小國) 한국의 비애(悲哀)인 것이다.


<사진 - 모택동(毛澤東) 중공 주석(主席)과 주덕(朱德)중공군총사령이 한국전에 참전할 중국인민지원군 검열(사열)을 하고 있다.>


<사진 - 한국전 참전 중공군사령관 팽덕회(彭德懷)와 김일성>


 <사진 - 압록강을 넘을 준비하고 있는 30만 중공군 / 1950년 10월 김일성이 압록강까지 쫓기자 중공군 지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중국은 팽덕회(彭德懷)를 사령관으로 30만 대군을 보냈다.>


전황(戰況)은 다시 역전


제공권(制空權)을 완전 장악한 미 공군 중폭격기의 융단폭격과 전폭기의 로켓포공격 기총소사 네이팜탄의 위력과 UN 16개 지상군의 막강한 화력은 누구나 천하무적으로 알았지만 12월에 들어서자 요란한 승전보(勝戰報)에 뒤섞여 들려오는 전황은 엇갈리고 있었다. 
곧 백두산에 태극기를 꼽을 것 같더니 중공군에게 밀린다는 소식에 국민들에게는 또 다시 불안감이 밀려왔고, 여유 있는 사람들은 소문 없이 남쪽으로 피난을 간다고들 했다. 지난 여름 숱한 고생을 하고 겨우 살아남은 우리가족들이 또 다시 전쟁의 화마(火魔)속으로 내몰려야 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루하루 다가오는 악몽 같은 검은 그림자가 가슴을 조여 왔다. 이웃집들이 한집씩 남쪽으로 떠나기 시작했고, 가까운 친척들이 인사도 없이 대구로 부산으로 벌써 떠났단다. 어린 마음에 찾아온 것은 섭섭함 뿐만이 아니라 각박하고 무서워진 세상인심이다.


노환(老患)으로 거동조차 불편한 할머니를 엄동설한에 누가 어디로 어떻게 모실까? 가엾은 우리 할머니! 한산이씨(韓山李氏 範字 稙字) 명문에서 태어나 지필묵(紙筆墨)을 언제나 가까이 하셨던 할머니. 봄이면 앞뒤마당에 꽃나무를 모종하시고 정향나무(丁香=라일락)의 향기를 즐겨 하시던 할머니. 한말(韓末) 때 불란서 공사의 귀부인으로 ‘파리’에도 오랫동안 계셨던 분이셨다. 어딜 가시나 당당하셨던 멋쟁이 할머니가 이렇게 안전한 피난대책도 없이 전화(戰火)에 휘몰려 초라한 최후를 맞을 것인가? 손자들을 가장 사랑하셨던 할머니! 왜정치하(倭政治下)와 해방 후 혼란 속에서 이재(理財)에 밝지 못해 가계(家計)는 기울었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냉엄한 현실에 적응치 못한 가계(家系)였다. 앞뒤 사정을 짐작한 어린 가슴에도 가엾은 할머니에 대한 연민의 정이 아프게 메어왔다. 


<사진 - 1951년 미 공군 중폭격기가 북녘에 폭탄을 퍼붓고 있다.>



<사진 - 1950년 12월9일 중공군의 참전으로 혹한 속에 후퇴하는 유엔군>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


중공군은 한국전쟁에 30만명의 인민의용군을 투입했지만 누가 보아도 미 공군이 제공권(制空權)을 완전히 장악하고 UN의 이름으로 참전한 16개국 지상군의 무제한한 화력(火力) 앞에는 견딜 수 없어 머지않아 리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미 극동군 총사령관이 주장했던 북진통일(北進統一)의 날이 올 것을 아무도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12월에 들어서면서 최전선의 날씨는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면서 서부전선은 압록강과 동부전선은 혜산진(惠山鎭-우리나라 최고의 蓋馬高原 甲山)까지 밀고 올라간 최전선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희비(喜悲)가 엇갈렸고, 신뢰를 잃은 정부 발표에 또 다시 서울시민들은 불안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해 할 수 없었지만 중공군에게 밀리고 있었다.


손자병법(孫子兵法)을 최대한 활용했다는 중공군은, 미 공군의 융단폭격과 전투기들의 폭탄 세례를 피하는 전략이었겠지만, 낮에는 쉬고, 밤만 되면 침투 잠복해서 북과 꽹가리를 치고 날라리(피리)와 나팔을 불면서 떼 지어 몰려오는 인해전술로 기습 돌진하며 중공군의 사기를 진작하는 고전적 전술을 원용했다고 했다.
거기에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혹한에 견디지 못하고, 수면부족의 미 지상군들의 home sick을 최대한 자극하여 사기를 저하시키는 기상천외의 심리전술 앞에 보급로가 멀어지고 끊기며, 너무 앞서나가 포위까지 당하자 최신병기로 무장된 UN군(한국군과 미군이 중심이지만)의 과학적 최신 전략전술도 중공군의 어눌한 고전적 심리전술 앞에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속수무책으로 다시 퇴로(退路)를 찾아야 했다.


당시에 내가 듣기로는 중공군들은 모두가 총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모두가 ‘방망이 수류탄‘은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전사자가 생기면 총을 지급받지 못한 중공군이 그 총을 받아서 싸웠다고 할 만큼 소총의 수도 모자랐다고 하지만 중공군의 인해전술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고 했다. 한밤중에 기습적으로 엄청난 숫자로 몰려와서 사살하면 또 그만한 숫자가 계속 물밀듯이 몰려오는 인해전술에는 당할 수가 없다고 했다. 혹한 속 전쟁의 경험이 없고 사기가 저하된 미 지상군들은 ‘작전상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를 하게 되자 맥아더 미 극동군 총사령관은 만주폭격과 중국연안봉쇄, 대만의 국부군(國府軍=蔣介石 군대)의 사용 등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트루먼 대통령과의 의견대립으로 1951년 4월 맥아더는 미 극동군총사령관의 지위에서 해임되었다. 귀국 후에는 레밍턴 랜드 사장으로 취임하였고, 정치적으로는 공화당 보수파(保守派)에 속하여 공화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적도 있다.


‘노병(老兵)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북진통일을 주장하던 한국 사람들은 맥아더의 주장에 동조했지만, 극동에서 또 다시 세계대전의 빌미를 막았다는 트루먼 대통령의 판단이 지혜로웠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사진 - 1951년 초 눈 덮인 강원도 횡성지역에서 진군 나팔소리에 돌진하는 중공군 병사들>



'루머'


1950년12월의 서울은 몹시 추웠다. 탐스러운 함박눈이 밤새도록 내리면 아이들 무릎 밑까지 빠졌다. 지붕 끝 처마마다 길게 고드름이 매달리면 그것을 따서 칼싸움도 하던 동네 악동 녀석들이 보이질 않는다. 모두들 남으로 피난을 갔단다. 동네 집들이 한두 집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지난 6월에 겪은 고통들을 다시 되풀이 할 수는 없었을 게다. 당장 눈앞에 불똥이 튀지 않는 한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외로운 것은 없나보다.
  

12월부터 서울에는 '루머'가 퍼졌다.
"중공군이 처 들어오면 부녀자들을 모조리 강간을 당한다"
"청장년들은 의용군으로 전선으로 끌려가거나 아니면 총살 당한다"
"군인과 경찰가족들은 살아남지 못한다"

 
정부는 지난 6월에 서울시민의 90%이상이 서울에 남아있어서 인민군에게 부역을 했거나 인민군으로 끌려갔거나 납치를 당한 일을 후회했다. 그 후에 들은 얘기지만 국군의 병력 보충을 위해서도 전략적으로 90%의 서울시민들을 피난시키는데 '루머'는 성공했다고 한다.


1.4후퇴 후 중공군이 서울에 들어와서 서울시민들이 거의 피난 간 것을 보고는 지난 여름 인민군들이 서울을 점령하고 어떻게 했기에 이토록 인심을 잃었느냐고 했다고 전한다. 아마도 그것은 해방 후 좌우(左右)로 갈라진 정치적 단체들의 극한적 대립과 투쟁 속에서 쌓여진 앙금들이 한국전쟁을 겪으며 노골적으로 표출된 악감(惡感)들이 서로가 “죽여도 된다”는데 까지 스스로 정당성(?)을 갖지 않았을까? 씻을 수 없는 우리 민족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사진 - 언제 떠날지 모르는 기차, 석탄을 실었던 무개차량에도 남행기차라면 타야했다.>

 

1.4 후퇴


아이들은 잘 몰랐지만 1951년1월4일은 서울을 완전히 철수하는 날로 정한 날이었다.
1월 4일전에 서울을 떠나야 산다고 했다. 12월말 서울의 기차역들은 피난민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이고 아비규환(阿鼻叫喚)이다. 질서와 통제란 말은 혼란과 무질서로 바뀌었다. 이들 중 짐 보따리를 잃은 사람은 약과이고, 군중 속에서 어린아이의 손을 놓쳐 찾고 있는 엄마, 엄마를 잃고 엄마를 찾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추운 겨울 공중에 얼어붙곤 할 뿐 날씨보다 더 차가운 각박한 인심 속에서 모두가 내 가족 내 새끼 챙기는데 정신을 팔 뿐인데 어찌하랴?


트럭이란 트럭은 전부 남행이고, 힘없는 더 많은 사람들은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남으로 남으로 걸어 갈수 밖에 없었다. 정부도 누구에게 도움을 주지도, 정부에 바랄수도 없는 버려진 서울시민들은 스스로 목숨을 건져야 하는 자구책만이 있을 뿐이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세(戰勢)를 지난 6개월간의 체험으로 나름대로 숙지한 서울시민들은 또 다시 서울이 피아간(彼我間)의 최전선으로 대치되는 서울이 포화의 불구덩이가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살아남기를 바랄 수 없는 생사의 기로에서 객사(客死)를 각오하고 혹독한 추위 속에 뒤늦게 남행의 길을 무작정 떠날 수밖에 없는 외로운 사람들이었다. 
 
  

<사진 - 북한에서 탈출하는 피난민들>


(6회)예고
*거룩한 크리스마스
*암흑천지(暗黑天地)
*간절한 애원 “나는 살고 싶어!”
*어머니의 따듯한 사랑
*동행이 나타나다

                                                                                 - Posted by 민병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