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한강을 건너다
1951년 1월 5일 늦은 오후 15살에서 10살까지의 꼬마 피난민 5명 일행은 아무도 기다려주지도 않은 남쪽을 향해 무작정 집을 나섰다. 동네집들이 더러는 포탄으로 흉물스럽게 주저앉았고 창덕궁을 지나 운현궁(雲峴宮)을 거쳐 종로로 나오니 가로수나 전봇대에 탄환을 맞아 패인 자국들이 수없이 눈에 띄었고 포탄을 맞고 뼈대만 남아 검게 그을린 건물들이 휑하니 뚫린 창으로 삭풍이 넘나든다.
지난 가을 유엔군이 인천상륙을 거처 서울수복(50년9월28일) 때 있었던 치열했던 시가전(市街戰)의 흔적들이 모두가 떠난 지금 더욱 을씨년스럽다. 뒤로 본 중앙청도 그을린 채 석양빛에 초라하다. 전주(電柱)가 더러는 동강이 나 매달린 전선들이 탄력을 잃고 바람에 흔들리고 남대문 지붕에 쌓인 눈이 괴이한 바람소리와 함께 흩날리며 꼬마들의 피난길에 안위를 빌어주는 듯 했지만 아이들은 갈 길이 바쁘다.
서울역 광장에 그 많던 사람들을 다 실어 날랐는지 눈 먼지만 날리고 있다. 이렇게 가로등 하나 없이 버려진 서울은 해가 지면서 어둠 속에 조용히 얼어붙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삼각지를 지나 전쟁의 피해가 심했던 용산에 이르렀을 땐 어두움이 짙게 깔렸다. 어디서 출발해 왔는지 많은 피난민들이 얼어붙은 한강으로 몰려들었다. 우리 일행도 피난민 대열에 섞여 어른들의 뒤를 밟으며 한강 백사장 아래로 내려갔다.
지난 여름 시골에서 식량을 구해 인민군 병사와 함께 나룻배를 타고 오다 전폭기의 공격목표가 되어 기총소사를 당하고도 살아남았던 용산 쪽 나루터가 바로 이곳인데 오늘은 얼음 위를 건너야 하다니! 어디 우리들뿐이랴. 한강나루에 얽힌 수많은 사람들의 한(恨)을 얼음으로 굳게 덮고 한강은 묵비(黙秘)하고 있었다. 끊어진 인도교와 철교를 원망할 겨를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건너는 곳은 얼어붙은 한강 빙판길이다. 해가 지고 어두운 후에도 한강엔 수없이 몰려들었다. 우리가 건너기 며칠 전 밤에 벌써 한강 부교(浮橋)마저 폭파했단다.
겨울방학이면 가끔은 스케이팅하러 몰려 온 즐거운 빙판이지만 오늘 첫발을 디디는 순간은 마치 등 뒤에서 누군가가 떠밀어 건너가는 것처럼 두려웠다. 얼음바닥이 가라앉기라도 한다면 하는 무서운 상상에서 한동안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한겨울 강바람은 아이들의 얼굴을 에이는 듯 했지만 공포감은 추위를 잊을 만큼 넘어섰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그 많은 피난민들이 아무도 안내나 지휘도 하지 않았는데 모두가 성급한 마음을 자제하고 차례를 지켰다. 모두가 한 줄로 서서 질서를 지키고 건너가고 있었다. 빙판에 미끄러진 사람에게 손길을 건네주고 격려하면서 얼어붙은 한강 빙판을 한발 한발 내딛고 있었다. 우리 앞을 걷는 몇몇 어른들은 새끼줄로 신발과 발등을 동여매서 미끄러운 빙판에서 “아이젠'을 대신하고 있었다. 건너는 도중에 얼음이 강추위에 팽창(膨脹)하며 갈라지는 금속성이 날카롭게 온몸을 찌르듯 전해올 때 마다 온몸이 오그라드는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때마다 경험이 많으신 어른들이 "얼음의 두께가 있어서 절대로 내려앉지는 않는다"는 위로의 말씀을 들려주셨다. 아이들은 공포의 침묵 속에서 서로를 향해 안도의 미소를 주고받았지만 얼음이 갈아 앉을 수도 있다는 공포에서 쉽게 벗어나 질 못 했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똑같은 피난길인데 기차를 서로 먼저 타겠다고 난리를 치던 기차역에 비하면 늦게 출발해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가려는 이들 역시 모두가 다급한 혼란 속에서도 외길에 한 줄로 서서 건너는 이런 피난민 집단의 여유로운 모습이 내겐 작은 감동이었다.
<사진 - 1951년1월 뒤늦게 피난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혹한의 칼바람을 맞으며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고 있다>
흑석동(黑石洞)에서 첫날밤을
용산 쪽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며 한강의 빙판길을 건너는 시간은 두어 시간도 더 걸렸나보다. 얼어붙은 강바닥만을 보며 오금이 저려오며 무사히 한강을 건넜다. 노량진 언덕에 올라 모처럼 바라본 강 건너 남산 밑 서울은 작은 불빛 하나 없는 칠흑 속이었고 강추위로 얼어붙은 한강줄기만이 희미한 형광(螢光)을 내비치고 있었다.
병환중인 老할머니와 부모님을 강 건너 북쪽 어둠속에 버리고 온 죄책감을 살아서 다시 한강을 건너오겠다는 다짐으로 “불효를 갚을 수 있을까?” 했지만 어둠보다 더 까맣게 타 들어가는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철없는 아이는 잠시 눈물을 글썽였지만 짐작이나 했을까? 바쁜 마음에 문안 쪽을 바라보는 것은 잠시였다. 하지만 무거운 마음은 계속 어머니를 그리고 있었다.
피난민 어른들이 걸어가는 길을 따라 큰길을 건너 언덕으로 한참을 쫓아 올라간 곳은 빼곡히 집들이 들어선 흑석동 어느 언덕배기였다. 그 많은 사람들이 마치 제집처럼 대문을 열고 들어가 짐을 내려놓고 벌써 이방 저 방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빈집들이 많아 우리들도 어느 집 방 한구석에 짐을 풀고 앉았는데 이제야 일행 다섯 명의 숫자가 다 있는지를 몇 번을 둘러보며 세어보았다. 누군가가 아궁이에 불을 지폈는지 한참 후에 방바닥에 온기가 올라온다. 낯선 잠자리지만 온종일 얼었던 몸이 풀리며 며칠 만에 모두가 정신없이 깊은 잠에 빠졌다.
이날 밤 배가 몹시 고팠는데 무엇인가를 먹고 허기를 채웠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나는 자다가 일어나 정신없이 변소를 찾다가 나는 윗목 한 구석에 아무렇게나 오줌을 갈겨 댔다. 아주 시원하게 싼 후에야 이곳이 방안 이였다는 생각에 정신이 좀 들었지만 이내 잠자리에 기어들었다. 다음날 아침 창피스럽기도 했지만 모두가 곤하게 잠든 틈이라 끝내 입을 다물고 등짐으로 지고 온 내 이불을 적시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도둑이 흠친 집에다 똥을 싸고 가면 안전하다고 하던데, 내가 쉬~하고 나온 것도 길조(吉兆)인가?
새벽 추위에 잠을 깨어 보니 함께 자던 피난민들이 이집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모두가 서둘고 있었다. 우리들도 쫓기듯 일어나 짐을 챙기고 그 집을 나섰다. 고갯길을 내려와 영등포를 거쳐 시흥으로 이어지는 낯익은 신작로(新作路)를 따라 걸었다. 우리들을 포성(砲聲)이 뒤쫓고 있었다.
< 사진 - 1951년 1월 서울북방에서 미군의 포화>
잊지 못할 할머니
한강을 건넜다는 안도감으로 조금은 긴장이 풀렸는지 추위가 온몸으로 덮쳐왔다. 잔설(殘雪)이 덮인 신작로와 과수원으로 보이는 언덕에 포탄이 떨어져 크고 깊게 파인 웅덩이들이 우리들의 갈 길을 재촉한다. 나이 드신 어른들은 이런 큰 연못만한 웅덩이는 삐이십구(B-29 중폭격기)에서 새우젓 독 만한 폭탄이 떨어져 패였다고들 했다.
한낮에 우리들은 지난 여름 묶었던 외가댁에 도착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간 안채에서도 아무 기척이 없다. 우리들이 사랑채 툇마루에 걸터앉아 시끄럽게 빈집임을 확인하려하자 안방에서 낯선 할머니가 "누구냐!" 하신다. 서울에서 온 아무개라고 인사를 드리자 서울 소식을 물으시는 외가댁 친척 되시는 ‘모사니 할머니’시다.
"외가댁 식구들은 모두 피난 갔는데 이 늙은이야 누가 잡아가겠어! 그래서 혼자 집을 지키고 있지. 다리도 끊어졌다는데 용케도 건너 와꾸나 배들 고프겠다. 찬은 없지만 밥을 먹어야지 춘 겨울에 어린것들이 먼 길을 떠나오다니 쯔쯔쯔..." 할머니의 따듯한 인정에 곧 구면이 되었다. 몸도 성치 않으신 할머니께서는 가마솥에 따뜻한 밥을 지어주셔서 저녁까지 잘 먹었다. 우물 물을 길어 손발도 씻고, 석유등잔에 불을 밝히고 아랫목 장판 바닥이 까맣게 누른 따끈한 안방에서 아이들은 할머니와 함께 잠을 청했지만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한밤중에 총을 들이댄 중공군(中共軍)
선잠을 자는데 몇 시 쯤 되었을까? 벽시계가 희미한 등잔불빛에 밤 12시는 넘었나보다.
별안간 기관총 퍼붓는 소리가 가까이서 여러 번을 볶아대더니 조용해 졌다. 깊이 잠들 리 없었다. 그래도 몇몇은 따듯한 온돌위에서 모처럼 마음 놓고 깊은 잠에 빠졌다. 감나무 밑에 장독대와 우물이 있는 뒷마당에서 알아듣지 못할 말소리가 들려왔다. 유엔군들 중 어느 나라 군인들인가? 앞마당에서도 같은 말소리가 들린다. 그들이 이 집을 에워싼 듯 했다.
작은 창문 창호지에 손바닥만 하게 붙인 유리를 통해 바라본 앞마당에 건장한 군인들이 총을 겨누고 서성이고 있다. 불안한 나는 앉아서 계속 밖을 훔쳐보고 있었을 때였다. 우리가 자고 있는 안방 문을 부서져라 열어 제치더니 M-1 소총보다 더 크게 생긴 총 뿌리를 내 가슴에 찌르면서 알아듣지 못할 말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번쩍 들고 자고 있는 열 살짜리 막내 동생 등에 올라앉았다. 어떻게 그런 기특한 생각이 떠올랐는지 모른다. 그들이 연발로 총을 쏘아대면 모두가 죽겠지만 막내만은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장 우리 모두를 사살할 것만 같았다. 자다가 엉거주춤 일어나 총을 드리댄 쪽을 보며 모두가 온몸이 굳어지며 새파랗게 질렸다.
허연 누비옷을 입고 붉은 별이 붙은 털모자를 눌러쓴 이들은 바로 인해전술(人海戰術)로 밀고 내려왔다는 그 무서운 중공군이 아닌가! 할머니와 어린 녀석 다섯을 확인한 이들은 마음이 놓였는지 웃으면서 겨누던 총을 거두고 벽을 가르키며 계속 무엇을 찾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이 먹을 것을 찾는 줄 알고 일어나서 부엌으로 데리고 가서 가마솥을 열면서 밥 한 그릇을 보였더니 머리를 저으며 아니란다.
나를 끌고 나갈 때는 불안했다, 이방 저 방을 끌고 다니더니 헌책을 찾아 종이 한 장을 찢어서 ‘풍년초’ 같은 잎담배를 말아 피우며 내게 환하게 웃는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던 것이다. 아까 벽을 가르킨 것은 벽지(壁紙)였고 “지~ 지~”라고 했었다. 바로 종이(紙)를 찾았던 것이다. 그토록 무섭다고 알려진 거구의 중공군은 어린 우리들에게는 적대감이 없는 어느 중국 호떡집 아저씨 같았다. 얼마 후 4,5명의 중공군은 대문 밖으로 나갔다.
해가 뜨면 중공군이 몰려 온 이 작은 동네가 바로 쌕쌔기(제트 戰爆機)의 공격목표가 된다는 생각에 우리들은 오밤중에 몰려오는 잠도 마다하고 모여앉아 의견을 주고받으며 당장 이곳을 빠져나갈 피난계획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서둘러 모두를 깨워 앉혔다.
"해가 뜨기 전에 이곳을 피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 공습으로 죽을 수도 있다. 내가 이곳 지형을 잘 아니까 저기 둑방을 넘고 십리이상은 죽을 힘을 다해 남쪽으로 뛰어야한다!"고 하니 모처럼 따듯한 방에서 푹 자고 싶었던 어린 녀석들 모두가 동이 트기 전에 이곳을 떠야 한다는데 뜻을 같이 했다.
이 말을 옆에서 듣고 계셨던 할머니께서 한밤중에 밥을 지으셔서 깨소금을 넣은 주먹밥을 바가지에 잔뜩 넣고 보재기에 싸 주셨다. 쌀도 몇 바가지 주셨나 보다.
"조심들 해 가거라! 외삼촌댁이 계셨으면 좋았으련만 이것밖에 줄 것이 없구나. 지금 군인(중공군)들이 공회당(동 인민위원회=洞 사무소)에 몰려있단다. 저 군인들이 남쪽으로 가는 너희들을 보면 가만 안 있을꺼다. 공회당 쪽에서 안 보이게 조심해서 가야한다." 하셨다.
인정으로 보살펴 주신 고마우신 할머니께 작별의 인사를 드리고 공회당에서 안 보이는 돼지우리나 초가집 옆으로 허리를 굽히면서 있는 힘을 다해 둑방을 넘고 달렸다. 숨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새벽 추위 속에서 해가 솟을 때까지 뛰면서 걸으면서 남쪽으로 달려갔다.
<사진 - 미 해병 제1사단을 공격 중에 있는 중공군 제40군>
(8회)예고
*육군소위 부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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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노숙자(露宿者)들
Posted by 민병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