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한국전쟁 史

14세 소년이 격은 한국전쟁(9회)

淸山에 2011. 3. 31. 15:33

 

 

 
 
 
14세 소년이 격은 한국전쟁(9회)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꼭 읽히고 싶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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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暴雪)


집을 떠나온 후 하룻밤도 마음 놓고 푹 자지는 못 했지만 오늘도 모두가 언 몸을 녹이지도 못 하고 함박눈이 퍼 붓는 눈길을 힘들게 걸어야만 했다. 기차 길을 따라가는 길이 가장 빠르고 남쪽으로 가는 확실한 지름길이라 했지만 중간에 폭파된 작은 다리라도 나타나면 몇 십리는 더 걸어야 했다. 또 다른 빠른 길인 국도(國道)를 찾기까지 헤맬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철길이 놓인 다리가 앞에서 끊겼다. 눈보라 속에 몇 십리를 더 걸어야 할런지 몰랐다. 혹 시골의 노인들이라도 만나면 남행길을 묻지만 오늘처럼 함박눈이 퍼붓는 날에는 인적(人跡)도 없다. 허허 벌판엔 우리 일행들뿐이다.


끝없이 쏟아지는 눈발로 앞길이 멀리는 보이질 않았지만 가끔씩은 침묵의 행군 속에서 일행의 생존을 확인해야 했다. 바람결에 돌며 날리며 춤추듯 떨어지는 눈송이들의 화려한 윤무(輪舞)에 취하듯 휘말려 나는 하늘 위로 걸으며 실신(失神)한 것 같았다. 나도 흩날리는 한 송이 눈이 되어 함께 빙빙 돌며 날고 있었다. 집을 나선지 며칠이 되었는지 기억도 잃었다. 이렇게 쓰러지면 가는 길이다. 폭설 속에서 하늘이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대자연의 무대에서 이렇게 죽음에 이른다면 객사(客死)로 발견되기 까지는 죽음도 낭만일수가 있을까? 죽음에 이르는 고통의 끝은 환희(歡喜)일지도 모른다.


지남(指南)의 방향도 잃었다. 나는 이미 땅을 딛고 걷지 않았다. 조금은 공중에 떠서 걷고 있었다. 정신도 혼미해지고 체중도 없이 쏟아지는 눈 속을 바람을 가르고 가고 있었다. 얇은 운동화 바닥에다 기우고 구멍 난 양말이 무릎 까지 쌓인 눈밭에 젖어 발바닥에서 무릎까지 감각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 동생들과 함께 살아 돌아오겠다는 어머니와 약속을 지켜야 한다.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어디선가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멀리서 내게 전해 오는 듯 했다. 눈 내리는 날처럼 세상이 조용한 날은 없다. 이런 대자연의 침묵보다 더 무거운 어머니의 간절한 아픔을 지고 우리 일행은 어딘가를 향해 계속 걸어야했다. 
 


 

외딴집


우리일행이 폭파된 다리 앞에서 방향을 바꾸고 헤매는 동안 많지 않았던 피난민들이 뿔뿔이 흩어져 우리들만 남아 걸었다. 온 세상이 눈으로 덮였다. 우리들이 걷고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도 몰랐다. 웬일일까? 대포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어느 쪽 군인도 만나지 못했으니 우리는 아직도 최전선 한가운데서 걷고 있는 거다. 이렇게 눈이 내리는 날엔 전쟁도 쉬여가며 하는지? 군인들도 우리처럼 모두들 지쳤나보다. 함께 걷던 군인부인이 침묵을 깼다. 
"애들아! 오늘은 너무 눈이 많이 내려 걷기도 힘드니 집을 만나면 일찌감치 쉬는 게 어떠냐? 모두 힘들지?"


전날 밤 처마 밑 노숙으로 지친 우리들에겐 반가운 얘기였다. 그동안 하루에 겨우 한 끼 정도로 속을 채우고 걸었으니 모두 추위와 허기로 지칠 대로 지쳐있었지만 해가 지기도 전에 휴식을 한다는 건 포화(砲火)속에 쫓기며 남행하는 아이들에게는 불안하기도 했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멀리 외딴 초가집 한 채가 폭설 속에 신기루처럼 우리 일행을 반긴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어도 모두 그 외딴 초가집을 향해 갔다. 빈집 이었다. 담장도 싸리문도 없는 작은 남향집이다. 보따리를 마루에 풀었다. 새댁 둘이서 두 방 아궁이에 군불을 지폈다. 가마솥에 물을 끓이고 밥도 짓고 마당에 묻어놓은 김치 독을 열면서 아직 손도 안댄 김장김치가 있다고 모처럼 웃는다. 긴 겨우살이를 알뜰하게 준비해 놓은 주인 아낙에게는 참으로 염치없는 짓이다. 우리뿐이 아니라 모든 피난민들은 누구나 도착한 곳이 자기 집이다.


피난길에 해가 지면 누구든 아무 집에나 들러 씻고 먹고 묵었다. 뒤주도 열어보고 김칫독도 열어서 끼니를 해결 했다. 그 이상 바라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도둑질이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않는 것 같았다. 모두가 양심을 먼저 피난시켰는지는 몰라도 어쩔 수 없었다. 나도 그랬다. 집 주인에게 미안하고 당당하지는 못했다. 좀 켕기는 마음이야 어린놈에게도 있었다. 차라리 주인이라도 있었으면 했다.


며칠 만에 따듯한 물에 손발도 씻고 양말도 빨았다. 더운물에 발을 담그니 오랜만에 온몸에 피가 돌고 날을 것 같다. 새댁 두 분이 정성스럽게 차려준 밥상에는 김치와 김치찌개가 오르니 수랏상이 따로 없었다. 오늘처럼 포성도 들리지 않는 전쟁터에선 마음 한구석에 초조함과 더 큰 불안이 몰려 왔지만, 오늘은 폭설로 일찍 쉬었으니 내일부터는 강행군이다! 다짐하고 모두 일찍 따듯하게 잠을 자자고 했다. 
 

<사진 - 폭설(暴雪)속 피난민들>

 

미군의 강간(强姦)


우리들은 추위도 잊은 채 마루에 걸터앉아 며칠간 피난길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영웅담?(英雄譚)을 주고받았다. 두 새댁들도 머리까지 감고 나와서 밝은 모습으로 아이들과 함께 어울렸다. 새댁들과 처음으로 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모처럼 오붓하고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이때였다. 멀리 눈으로 덮인 논밭 넘어 에서 총을 든 미군 둘이 우리 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쉽게 알아봤다. 미군 병사였다. 전선에서 모처럼 만나는 미군이 반갑기도 했다. 우리들은 그들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나보다. 최전방 미군의 용감한 척후병(斥侯兵)일 꺼라 여겼다. 가까이 보니 젊은 미군 병사였다. 내게 가까이 다가서며 총을 드리대며 소리 지른다. "Hands up!"한다. 순간 두 손을 번쩍 들었나 보다. 이들이 우리를 인민군으로 잘못 알았나? 생각했다. 아니겠지? 두 놈이 서로 뭐라고 쏼라 쏼라(?)댔지만 "핸스엎!"외에는 쉽게 알아듣지를 못했다. 이놈이 중공군에 이어 두 번째로 내게 총구를 들이댄 녀석이다.


주위를 둘러 본 두 젊은 미군병사는 아이들과 젊은 두 여자만 있는 것을 안심을 했는지 총구를 내리고 “부산...”어쩌고 “트럭...”어쩌고 하는 말이 우리들을 차를 태워주고 피난길을 도와준다고 풍을 떨었다. 순진한 우리들은 미군들이 차를 태워서 우리를 도와 부산까지 태워준다고 알아듣고 좋아했다. 추호도 우리들은 그놈들이 딴 생각으로 찾아왔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두 미군은 피난민들이 가장 아쉬운 문제로 꼬시며 우리들에게 접근했다. 이놈들이 우리들의 반응이 호의적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이때였다. 두 놈은 총구를 두 새댁으로 향하더니 낚아채듯 끌고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놀란 두 새댁의 비명이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이놈들이 순진한 아이들을 속였구나! 할 때는 이미 늦었다. <양키 놈의 강간이다!> 알아차린 순간 어린 우리들로서는 총을 든 그놈들에게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해방 후 로스캐(Ruskii) 병사들이 평양에 들어와 북한 여인들을 무수히 강간을 했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미군들이 그랬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어 미군들은 언제나 우리를 돕는 선량한 사람인 줄만 알았다. 이놈들을 어떠칸다! 우리들을 믿고 함께 온 새댁들이 아닌가! 도와 줄 방도가 없는 내가 수치스럽게 당하는 것만 같았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 두 새댁의 외마디 소리가 문풍지 틈으로 계속 구원을 청했지만 마당에서 눈을 맞으며 고개만 떨구고 있는 나는 자신에게 절망하고 있었다. 속옷을 찟는 소리가 들려오고 저항하는 새댁들의 비명이 계속 울려왔지만 외딴집 밖에서는 누구도 새댁들을 도와 줄 사람이 없었다. 아이들은 절망의 늪으로 계속 가라앉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 후 두 양키놈은 후다닥 왔던 눈밭으로 도망쳤다.


새댁들의 오랜 통곡이 메아리도 없이 이름 모를 시골 눈밭에 묻혀버렸다. 중공군이 들어오면 부녀자들 에게 어떻게 한다고?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나쁜 양키 놈들! 분노밖에 할 수가 없었다. "아주머니! 울지 마세요! 우리가 동네를 잘못 찾아왔어요. 우리 피난민이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요" 위로의 말은 고작 이것뿐인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두 새댁은 하늘을 보고도 아무 잘못이 없었지만 마치 내 잘못으로 일어난 일처럼 이때부터 나는 두 새댁 앞에 죄인이 된 것처럼 마주 볼 수도 없었다.
 

내가 듣고 아는 한은 전쟁 중에 인민군이나 중공군이 한국 부녀자들을 희롱하거나 강간을 한 일은 없었다고 했다, 현장에서 즉시 사형에 처하는 무서운 군률(軍律)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어른들이나 선배들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그런 면에서 국부군(國府軍=蔣介石 군대)보다는 중공군이. 유엔군보다는 인민군이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지 않았나 생각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이런 것이 사실인 걸 어쩌랴? 얼마나 우리 한국 사람들을 우습게보았으면 함부로 이따위 짓을 할까? 어린 내 자존심을 짓밟은 그놈들에게 분노를 넘어 살의(殺意)마저 치밀어 올랐다. 이놈들아! 전쟁은 총질로만 이기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의 절규(絶叫)>



돼지우리에서 하룻밤을


해가 지려는데 치욕스런 현장을 떠나 다른 곳으로 찾아가려고 나섰다. 아까 그놈들이 달아난 곳에서 무장한 군인들 여러 명이 우리를 향해 지뢰탐지기를 앞세워 오고 있었다.
"여기에 미군 둘이 왔다갔는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한국인 통역 같은 사람이 묻는다.
"... ... ..."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전쟁터는 무서운 곳입니다. 왜 따로 다니십니까? 저희들이 안내 할 테니까 피난민들이 많은 곳으로 가십시오. 이곳은 많은 지뢰를 매설했는데 어떻게 오셨습니까?" 하며 지뢰탐지기로 길을 더듬으며 새로운 동네가 보이는 곳까지 안내하고 돌아갔다. 그들은 이전 집에서 벌어졌던 일을 알고 찾아왔던 것 같았다. 고맙기도 했지만 무마하는 방법이었나 생각도 했다.


이곳에도 몇 집밖에 없었는데 피난민으로 가득차서 우리가 쉴 공간이 없었다. 한참이나 찾아보았다. 부엌이나 헛간까지도 드려다 봐도 우리가 비집고 들어 갈 곳은 없었다. 어떻게 해서 두 새댁의 잠자리는 멍석을 깐 헛간에 겨우 마련해 주었다. 얼굴을 마주하기 민망했던 새댁들에게 어린것들이 배려했다. 하지만 서울을 떠난 후 아이들은 하룻밤도 언 몸을 제대로 풀지를 못했으니 오늘 밤도 잠자리 걱정이 태산 같았다. 많은 궁리를 해 보았지만 묘안이 없었다.  


좀 떨어진 곳에 돼지우리가 있었다.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면 어떠랴! 눈보라 찬바람 피하고 하룻밤 묵는다면 돼지우리면 어떠랴! 상식을 뛰어넘은 아이들의 상상력은 기특했다. 돼지우리 칸을 넘어 들어가서 바닥을 치우니 냄새도 없고 뽀송뽀송했다. 건너편 언덕바지에 땔감인 동나무 덩이가 눈에 덮여있는 것이 보였다. 언덕으로 올라가 동나무 한 묶음을 끌어다 돼지우리에 지붕을 덥고 보니 하룻밤은 지낼 만 했다. 사방 2m 남직한데서 다섯 명이 빙 둘러 앉아 가운데에 화톳불을 지피며 밤을 새우기로 했다. 발도 녹이고 양말 운동화도 말리며 온갖 퀴퀴한 냄새에도 아랑곳 않고 당장은 지낼만했다.


시간이 지나니 화톳불 연기에 목이 칼칼했다. 눈도 맵고 바지 섶이 눌고 타면서도 등판은 얼어 들어왔다. 하나 둘씩 깊은 잠에 빠지는데 이러다 누군가가 동사(凍死) 할 수 있다. 추위에 잠들면 죽을 수 있다 해서 흔들어 깨우고 말을 걸어보지만 고개만 끄덕이고 잠에 빠지니 이러다가는 누군가가 얼어 죽을 수도 있다. “자면 안 돼! 자면 죽어!” 나는 울면서 잠이 든 동생의 따귀까지 때려가며 깨워 보았지만 쏟아지는 아이들의 잠을 깨울 수는 없었다. 허사였다.


나는 화톳불이 사그러지면 나뭇가지를 얹어가며 뚠 눈으로 밤을 새우려 했지만 오래 견디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한겨울의 긴 밤을 돼지우리에서 매서운 강추위에도 아침까지 살아남았다. 먼동이 트자 겨우 실눈을 뜨며 남자 녀석 다섯 명은 돼지처럼 우리에서 기어 나왔다. 온몸이 곤장이라도 맞은 듯 쑤시고 뻐근하고 저려왔다. 모두의 얼굴은 앙괭이가 되어 서울에서 떠날 때 모습은 아니었다. 사람의 목숨처럼 모지고 질긴 것이 없다 했는데 아이들에겐 너무 잔인한 시련이 아닌가!


추위가 뼈 속으로 스며든다. 추위를 견뎌내는 길은 따듯한 아침밥을 드는 것 밖에 없었다. 아침을 준비하려던 새댁들이 이 동네는 물이 귀하단다.
"괜찮아요. 눈으로 밥을 짓지요" 했다. 돌로 삼발이를 괴어놓고 장작에 불을 지폈다. 눈을 냄비에 녹이지만 밥 지을 물을 채우는 일에 이렇게 많은 눈이 들어갈 줄은 몰랐다. 끝없이 눈이 들어간다. 물이 귀하다 보니 쌀을 씻는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밥이 보약이다. 시원치 않은 옷을 입고 강추위에 한대 잠을 자고도 눈밭에서 감기가 든다는 것도 아이들의 피난길에서는 호사스런 얘기다. 하늘은 잠 못 드시는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를 받아 주셨나 보다. 


새댁들이 하늘에서 내려 준 눈(雪)물로 지은 밥은 하늘이 내려주신 생명의 밥상이고 혹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먹어야 한다고 간절히 기도하는 어머니의 눈물 같았다. 어디서 들었는지 새댁은 언제나 우리들에게 누른 밥과 숭늉을 끼니마다 후식(?)으로 권했다. "누른 밥과 숭늉을 마시면 객사(客死)를 안 한다"고 했다. 그런가? 사실여부를 떠나 아이들에게 베푸는 새댁들의 마음이 고마웠다. 모두가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 하나로 피난길에서 아이들은 우연히 만난 두 새댁과도 한 가족이 되어 낯선 길을 또 나섰다.  

<10회 예고>
*철교위에 곡예사(曲藝師)들
*눈 위에 버려진 천사(天使)
*이(蟲) 사냥
*고마우신 천안(天安) 아주머니


                                                                       - Posted by 민병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