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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 소년이 격은 한국전쟁(12회)

淸山에 2011. 3. 31. 15:24

 

 

 
 
 
14세 소년이 격은 한국전쟁(12회)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꼭 읽히고 싶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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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끝내며


1950년6월25일 한국전쟁 발발/ 인민군 서울 입성/ 9.28 서울 수복/ 국군 압록강까지 북진/ 중공군의 참전/ 1951년 1.4후퇴/ 까지 격은 체험담을 기록해 보았다. 반세기를 훌쩍 넘는 시간을 기억해 내고 기록하는 것이 무모한 일이기도 했지만, 한국전쟁을 체험하고 기억하는 마지막 세대가 점차 사라져가고 있고, 과문한 탓이겠지만, 개인의 체험기록이 흔치않아 한국전쟁의 편린(片鱗)이라도 다음 세대에게 알리고 싶었고...


세상을 먼저 뜬 막내 동생에게서 받은 충격으로 함께 고생했던 체험담을 지체할 수 없었다. 지난해 12월부터 글을 쓰는 동안 기억속이 몇 번이고 하얗게 멈추면 되살리면서 기억력의 한계에 수 없이 머물기도 했다. 일제치하에서 태어나 2차 세계대전을 맞았고 해방 후 혼란기를 거처 6.25 한국전쟁을 겪었으니 태어난 시대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는 세대지만, 죽음의 두려움! 배고픔과 추위 속에서 살아남은 그때 아이들이 잊혀가는 한국전쟁의 작은 단면의 실상이라도 전후세대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8.15 해방 후 한국전쟁을 거처 오늘이 있기까지 우리나라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옮겨지고 오늘의 첨단산업사회로의 진입까지 오랜 동안 앞선 세대들이 겪은 전쟁의 고통뿐만이 아니라 오늘의 요만한 풍요는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그들이 겪어 온 인고(忍苦)의 일생을 거치며 얻어진 것이라고 적어도 깨어있는 젊은 세대에게 만이라도 알리고 싶었다. 앞으로 전개될 이 땅에 정의롭고 공평하고 평화로운 사회와 역사를 위해서라도. 


2차 세계대전 후 미소(美蘇)의 첨예한 냉전 속에서 소련은 해양을 향하는 부동항(不凍港)을 탐했으며, 역사적으로 해양세력에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던 소련은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 된다면 유사시 해양세력이 거처야 할 한반도가 소련의 방어벽 역할을 할 것으로 우려했다. 북한에 군사원조를 하며 전쟁을 부추겼던 배경은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 발발 시 미국은 3차 대전으로의 확전을 원치 않았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했다고 한다.


한편 1949년 미국은 태평양 방어선을 알류샨 열도, 일본의 오키나와와 필리핀으로 후퇴하는 “에치슨 라인”을 선언하고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해 버림으로서 남북한 간에 첨예하게 대치하던 군사력의 균형을 깨고야 말았다. 다음의 <참고>는 당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한반도에서 미국의 입장과 일정이다.


<참고>
*1949.5.07 투르만 미 대통령이 한국에서의 미군철수 발표
*1949.6.21 주한 미군철수 개시
*1950.1.10 미군의 태평양 방어선 후퇴(에치슨 라인)
*1950.5.18 미 국무성 고문 덜레스(이후 미 국무장관) 3.8선 방문 후 기자회견
           “한국에서 전쟁은 없다”
*1950.6.23(금) 주한 미 고문단장 윌리암 로보츠 기자회견
               “한국에서는 탱크전이란 없다“
*1950.6.24(토) 한국군은 2주간의 비상경계령을 해제하고 전방병력의 2/3를 “농번기 돕기 특별휴가”, 같은 날 연대장급 이상 육군회관 개관 행사에 참석 양주를 곁들인 댄스파티를 벌임.
*1950.6.25(일) 새벽 인민군 남침 개시


<사진 - 1950.5.18 3.8선을 방문한 덜레스 미 국무성 고문(이후 미 국무장관) 우측이 신성모 국방장관>


전쟁 일보직전의 3.8선의 상황을 알고 앞날을 훤히 내다보면서도 낙관으로 바라 본 미군의 한반도에서의 철수는 오판인가? 의도적인가? 미군이 철수한 후 군사력의 불균형한 공간은 북한과 소련에게는 놓칠 수 없는 남침의 기회이자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의 멍청한 오판이 아니었다면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한 것인가? 2차 대전 후 불경기 속에 미국의 군산복합체(軍産複合體)의 전쟁상인들에게는 ‘굿뉴스’가 아닐 수 없었겠다.   
 

북한은 남침이라는 원죄로 유엔 16개국 한국전 참전결의는 충분한 명분이야 분명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후 불과 한 달 여 만에 부산 근방을 제외한 전 국토를 장악한 인민군을 퇴치할 힘이 없었던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 속의 한국으로서는 16개국 유엔군 참전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다른 한편 2차 세계대전 마무리로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폭 두 방을 얻어맞은 후 연합군에 무조건항복(無條件降伏)하고 경제적으로 피폐해진 전범국(戰犯國) 일본이 불과 5년 만에 한국전쟁에 군수물자를 팔아 특수경기를 누렸으니 기막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한국전쟁은 외교력도 자위력도 경제력도 없이 국제정세에 어둡던 약소국(弱小國) 한국의 불행이었다. 한국전쟁은 전쟁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3년)동안 가장 많은 인명살상(300만명+)을 안긴 가장 치열했던 싸움이었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는지? 지금도 약소국들은 그들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용되거나 대리전쟁에 희생되고 있다.


한반도라는 좁은 땅에서만 본다면 소련의 군사원조로 군사력을 키운 북한의 남침(南侵)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당시 미소(美蘇)의 냉전 속 기류를 냉정하게 본다면 한국전쟁은 미소(美蘇)가 자국의 이해(利害)에 암묵(暗默)으로 계산된 시차(時差)를 둔 전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부 전후세대의 북침이라는 주장은 전쟁을 체험한 세대에겐 설득력이 없다. 한국전쟁 발발 시점에서 어느 쪽이 먼저 침략을 시작했느냐 로 볼 수밖에 없다면. 


한국전쟁 60년이 지난 지금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 계속 머물 것이냐? 아니면 또 다른 어떤 구실로도 전쟁을 거처 분단 문제를 해결 할 것인가? 어느 쪽이든 더 이상 불장난을 해서는 안 된다. 한국전쟁에서 받은 아픈 상처로 적개심(敵愾心)을 품은 시각으로 남북문제를 풀려는 원한(怨恨)의 틀로는 또 다른 비극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대륙과 해양의 교량역인 작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입지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지혜롭게 대처한다면 한반도가 평화와 번영과 기회의 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위의 몇 줄만을 뽑아 이 글을 왜곡(歪曲)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전쟁 중 주한미군사령관 벤프리트 장군의 아들 벤프리트 2세 '지미'는 공군조정사로서 출격 중 북한상공에서 대공 포화에 희생되었고, 중공주석 毛澤東의 장남 모안영(毛岸英)도 북한에서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왜 이 이야기를 꺼낼까? 북진통일과 애국을 외치던 지도층의 자식들은 전쟁 중에 군 기피뿐만이 아니라 해외유학까지 보냈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우리나라 지도층의 실상이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남쪽으로 먼저 달아나며 녹음방송으로 "서울을 끝까지 사수하겠노라"고 서울시민들을 속이는 허위방송을 보내고, 1950년6월28일 사전 예고도 없이 한강다리를 폭파한 리승만 정부는 9.28 서울수복 후 피난 못한 정적(政敵?)들에게 도강파(渡江派) 비도강파(非渡江派)로 분류 매도했으며, 서울 수복 후 "서울시민들에게 사과 하시지요!"하는 측근의 진언(進言)을 끝내 외면한 지도자가 대통령직을 13년 동안 계속 유지했던 나라였다. 다만 국부(國父)로 자처했던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리승만의 역사적 평가는 여러분의 몫으로 남긴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선 위기에서 나라를 지키겠다며 엄동설한에 50만 명의 청장년들을 집단 남하시키면서 먹고 입고 덮고 할, 피 같이 귀한 예산을 착복해 얼어 죽고 굶어 죽인 소위 "국민방위군 사건" 등 한심한 사건이 일어났고, 힘없고 배경 없고 가난한 민초들이 전선에서 칼바람 맞으며 언 주먹밥을 녹여 먹으면서 싸우며 다치며 죽어갈 때 후방에서의 지도층의 위선(僞善)을 알리며 역사 앞에 고하지 않을 수 없다. 60년 후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나?


길게 본다면 전쟁은 영원히 승자도 패자도 없는 싸움이며, 인간 생명의 경시에서 오는 야만의 극치이고, 인간이기를 포기한 탐욕의 끝이 전쟁이다.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로서 개인의 체험담을 위주로 한 것은 개인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전쟁 속에서 개개인이 겪어야 하는 생사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피폐를 다시는 한반도 뿐 아니라 지구촌 어디에서도 재발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강한 메시지를 드리고 싶다.

글을 마치면서 피아(彼我)를 넘어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모든 사람들에게 정중한 진혼(鎭魂)의 뜻을 드립니다. 이 글 속에서 잘못 기록되었거나 그리고 부족한 부분은 읽어 주신 분들께서 많은 의견으로 채워주시기를 바랍니다. <14세 소년이 격은 한국전쟁>을 읽어주시고 따듯한 격려를 보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2009년 3월 민병설

<사진 - 1953년 7월 27일 하오 10시 정각부터 12분간에 걸쳐 조인된 정전협정문의 서명 - 이 휴전 협정문 서명에 한국군은 빠졌을 뿐만이 아니라, 참석자의 자리에도 못 끼였고, [국제연합군]이 [국제‘련’합군]으로 북한식 표기였으니 당시 한국전쟁 당사자여야 할 한국군은 제3자였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하는군요.>

<사진 - B29 중폭격기가 폭격중인 평양. 1952년 8월>


<사진 - 1950년 9월, 전란으로 불타버린 보신각과 그을린 보신각종>



<사진 - 한국전쟁 중의 崇禮門(1951년 3월) 숭례문의 훼손은 언제나 국민들의 아픔과 함께했다>


<사진 - 2008년 숭례문(남대문) 화재가 국운(國運)과 무관하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