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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 소년이 격은 한국전쟁(11회)

淸山에 2011. 3. 31. 15:28

 

 

 
 
 
14세 소년이 격은 한국전쟁(11회)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꼭 읽히고 싶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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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개차(無蓋車)에 올라타다


고마우신 천안 아주머니 댁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몇 번이고 "고맙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느긋한 마음으로 천안역으로 향했다. 천안역은 피난민과 군인들로 가득 차 시끄럽고 무질서했다. 오랜만에 본 활기찬 세상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역사(驛舍)를 비집고 들어가 남행열차를 찾아갔다. 일반 객차는 보이지도 않고 화물칸만 있었다. 그나마 전부가 콩나물시루처럼 피난민들로 가득 차, 더 이상 끼어들 틈이 없었다. 새벽부터 모여들었나 보다. 화물칸이 부러웠지만 뒤끝에 매달린 지붕도 없는 석탄 실은 무개차만이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눈밭을 걷는 것 보다야 낫지 않은가!


서울에서 태어나서 서울에서만 살던 나는 방학 때 시골집을 기차를 타고 다녀 온 친구들의 얘기를 부러워했다. 기차를 탄다는 것은 내게는 멋진 낭만이었고 부러움이기도 했다. 48년  경인가 기차를 타고 개성으로 수학여행을 갔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개성하면 선죽교(善竹橋)나 송악산(松嶽山)을 떠 올리지만 기차를 타고 멀리 다녀온다는 것이 내게는 밤잠을 설치는 설렘이고 큰 사건이었다. 하지만 오늘 피난길에서 만난 지붕도 없는 무개차 가차여행은 즐거움도 꿈도 낭만도 없는 가혹한 여행이지만 포탄이 떨어지는 전선을 피해 살수 있다는 희망에 고마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들이 오르려하자 기차가 서서히 움직인다. 위험한 줄도 모르고 우선 등짐을 석탄차 위에 던져놓고 겁도 없이 움직이는 기차를 화차와 화차 사이 살얼음이 덮인 이음새에 발을 디디며 한사람씩 올라탔다. 육중한 쇠바퀴에 밟힐 수도 있는 위험한 짓을 철없는 아이들은 이 기차를 놓칠 수 없다는 조급함으로 겁 없이 매달리며 올라탔다. 우리들이 올라탄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석탄을 실은 무개차에 계속 기어올랐다. 이 기차가 조금 가더니 화물칸을 잊고 있었다. 차표를 끊고 탄 것도 아니어서 언제 떠나느냐? 물을 수도 없었지만 혹 내리라고 할까봐 조금은 걱정되기도 했다.


어느새 석탄 위에 빈틈없이 피난민들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석탄바닥에 마분지(馬糞紙) 쪼가리를 서로 깔아주었다. 추위를 이기려고 서로가 몸을 바짝 대고 앉아서 지고 온 이불로 온몸을 덮었다. 한참을 지나도 기차는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기차를 타고 있다는 안도감은 잠깐뿐이고 발끝부터 얼어 올라오며 온몸을 마비시킬 듯 덮쳐오는 추위 속에서 허기와 졸음이 함께 밀려온다. 추위와 허기와 졸음 중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잠을 자는 것뿐이었다.


자정이 지나서였나보다. 누군가가 큰 상자를 들고 와서
"배들 고프지? 이거 미제 ‘쇼빵’인데 내가 말이거든... 저기 미군들 기차 칸에서 뚜럭 쳐 왔거든... 나눠들 먹어!"
시원스럽게 말하는 품이 북한에서 온 피난민 같았다. 이 고마운 아저씨는 옆 석탄 칸에서 함께 피난하는 의리 있는 분이셨다. 미제 쇼빵을 듬성듬성 잘라서 석탄 칸 사람들이 허겁지겁 나눠먹었다. 차갑게 느꼈지만 부드러운 빵 속살이 입안에서 녹았고 허기진 속을 달래기엔 충분했다. 당시에는 어느 나라 말인지는 몰라도 식빵을 쇼빵이라 했다.
 

새벽녘인가? 속을 채우고 졸음이 쏟아질 때 쯤 화물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이 기차가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 기차가 경부선임에는 틀림없었다. 이름 모를 역에 섰다가 떠나곤 했는데 서는 곳마다 북으로 향하는 화차에는 트럭이며 야포 탱크들이 실려 있었다. 다시 북진을 하고 있구나! 짐작했다. 석탄화물차에 무작정 올라탄 사람들은 당장 닥쳐오는 추위에 동사(冬死)를 걱정해야 했다. 하지만 추위만이 무서운 줄 알았던 우리 앞에 예상치 못한 또 다른 무서운 복병(伏兵)이 있었으니 가끔씩 닥쳐오는 굴속(터널)이었다.


기차 화통에서 뿜어대는 지독한 유연탄 냄새와 시꺼먼 끄름은 몇 번을 통과해야하는 터널 속에서 우리들을 질식직전까지 몰아넣었다. 시커먼 유연탄의 연기와 매캐한 냄새가 저승사자처럼 까맣게 우리를 덮쳐왔다. 그래도 걷는 것 보다야 나았을까? 석탄화물차에 실린 사람들은 한겨울에 온몸으로 달려드는 칼바람에 동사(冬死)를 걱정하며 서로가 생사(生死)를 확인하는 말을 건네면서 난로대신 따뜻한 인정을 주고받았다. 석탄 화물칸에 올라탄 수백 명은 며칠 동안 한 가족처럼 생사를 함께했다.




  
마지막 조찬(朝餐)


달리며 서면서 이틀은 걸렸나보다. 제복을 입은 철도국 직원들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모두들 기차에서 내리란다. "모두들 내리세요! 다 왔습니다! 여기가 종착역 서대전(西大田)입니다" 
짐을 챙기며 내리려 하는데 다리가 펴지지 않아 다리를 주무르며 겨우 일어나 움직이는데 화차 이음새를 딛고 뛰어내리니 날카롭게 찌르는 통증이 다리에서 온몸으로 퍼진다. 온 세상이 시끌벅적하다. 천안역보다 더 번잡하고 활기가 넘쳐보였다. 여기가 대전인데 서대전역이라 했다.


군인 새댁이 남의 집 부엌을 빌려 아침상을 차렸다. 몇 가지 찬도 준비하셨다. 천안 아주머니의 밥상을 받은 지 이틀만인가. 몸이 얼고 허기진 속에 모두가 먹는데 정신이 팔렸지만  새댁들은 권하기만 하고 드시는 게 별로다. 두 새댁은 숭늉까지 챙겨주신 후 결심한 듯
"그동안 고생 많았다. 이렇게 살아왔으니... 서로 의지하고 함께 와주어서 고맙다. 살아서 부모님들을 다시 만나서 잘들 살아라! 여기 안전한 대전까지 왔으니 너희들끼리 친척들을 찾아갈 수 있겠지? 부산이고 대구고... 여기서 우리 헤어지자!" 아이들이 예상했던 말이었다.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새댁들의 알리고 싶지 않은 부끄럽고 아픈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동안 신세도 많이 졌습니다. 너무 고마웠습니다. 저희들끼리 찾아갈 수 있습니다. 안녕히 들 가세요!" 달리 위로해 드릴 말을 찾지 못했다. 눈이 많이 내리던 날 두 놈의 양키 놈만 아니었어도 군인 새댁들과 함께 더 갈수가 있었는데 이곳 대전에서 헤어 질수 밖에 없는 새댁들의 아픈 비밀을 가슴 깊이 묻어두어야겠다고 다짐 했다. 마음이 아팠다. 누가 두 새댁에게 돌을 던질 수가 있으랴? 우리들은 서대전에서 이렇게 마지막 조찬(?)을 들고 군인새댁들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

 

갈림길에서


우리 일행은 5명으로 줄었다. 대포소리도 들리지 않는 서대전에서 포탄의 위협은 없었지만  앞으로의 대책이 막연했다. 누가 우리들을 반갑게 받아줄까? 소식 없이 먼저 떠난 몇몇 친척들은 모두가 대구나 부산으로 떠났으니 우리가 찾아가는 것을 반가워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생판 모르는 남들을 찾아갈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호남 쪽은 전혀 연고가 없었다. 그 후 들은 얘기지만 호남 쪽으로 피난 간 사람들은 대구나 부산으로 간 사람들보다는 후한 인심에 편히 지내고 와서 고마웠다고 했다. 사람들이 많으면 인심은 각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들의 짧은 회의는 쉽게 결론이 났다. “대구 부산 쪽으로 가자!” 우리들은 호남과 영남의 갈림길로 찾아갔다. 수천 명의 피난민들이 영남 쪽으로 가려고 몰려있는데 헌병들이 영남 쪽으로 가는 왼쪽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대구나 부산 쪽은 피난민들이 몰려서 먹을 것도 귀하고 잠잘 곳도 없으니 피난민 여러분께서는 호남 쪽으로 가십시오!" 헌병들은 영남 쪽으로 가려는 피난민들을 향해 계속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사정을 하며 “부산에 먼저 간 가족들이 있으니 보내 달라”느니 하면서 막무가내로 밀고 가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진 - 1.4후퇴 당시 국민방위군으로 동원된 청장년들>


 

몇몇 피난민들이 대구나 부산으로 가는 왼쪽 길로 들어서면 헌병들이 제지하며 밀고 밀리는 일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우리들은 헌병들과 우격다짐으로 이곳을 통과한다는 것은 어려운 줄 쉽게 알아차렸다. 분위기를 살피고 있는데 사복이나 허술한 군복을 입은 장정들이 총을 멘 몇몇 군인들의 지휘를 받으며 행진해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때다 싶어 헌병들의 눈을 피해 동생들과 조카들을 그 허술한 청장년들 사이에 한사람씩 끼워 넣고 무사히 왼쪽 길로 우리들은 하나씩 하나씩 모두 통과했다. 


우리들의 행동을 눈치 채고 감싸주며 행군을 한 아저씨들이 고마웠다. 이 허술한 장정 아저씨들이 바로 1.4후퇴 당시 50만 명의 청장년을 남쪽으로 후송하여 입대를 시키려했던 국민방위군으로 끌려가는 청장년 들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막중한 임무를 띤 방위군 지도층의 예산 착복으로 식량과 침구도 지급을 안 해서 5만~9만 명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고 영양실조에 걸렸다는 "국민방위군사건"으로 희생된 장정들의 일부인 것이다. 후에 알았지만.


이들 중 일부(35세~60세) 고령자들은 51년부터 종전 때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산악지역에서 등에 지게를 지고 탄약과 식량은 물론 사상자들을 날랐고 도로보수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산악지대가 많은 한국지형에서 벌어지는 전쟁터에서 지개만큼 고지대로 운반 할 수가 있는 간단한 운반도구는 아마도 세계에서 유일하게 지개밖에 없었다고 했다. 


군번도 없는 용사 "지게부대"는 KSC(Korean Service Co.)라고 불렀고 험한 산악지대로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지개에 감탄한 미군들은 이 지개를 영어로 A-Frame이라고 외지(外紙)에 소개하기도 했다. 힘없고 빽 없는 지개부대 대원들의 봉사와 희생을 그 후에 어떻게 보상되었는지는 몰라도 우리들은 그들을 기억해야 하고, 그 분들에게 한없는 동정과 위로를 보낸다. 힘없는 사회적인 약자들은 언제나 그렇게 고통 받으며 희생되었다. 


<사진 - 1951.5.20 전선에 배치 될 지게부대>



기적(奇蹟)


영호남 갈림 길에서 지혜롭게 빠져나와 대전역을 찾아 간 우리들은 용산 철도국에 근무하시는 외삼촌을 운 좋게 만났다. 반갑게 맞아 주시는 외삼촌이 너무 고마웠다. 우리보다 먼저 피난을 떠난 외삼촌 가족들은 모두 곳간차(庫間車)에 타고 있었다. 외삼촌댁 가족뿐이 아니라 이웃에 피난 못간 어려운 동내사람들을 모두 이 곳간차에 함께 태우고 오신 외삼촌은 인정이 많으신 분이셨다.


효자로도 널리 알려 진 분으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외조부의 묘소(墓所)를 매일같이 상복(喪服)을 입고 3년 탈상(脫喪) 때 까지 성묘를 하신 분이셨지요. 외삼촌께서는 시체발부는 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하시어, 이발도 안 하시고 다니셔서 용산철도국에서는 전설적인 털보직원으로 알려졌고, 전쟁 중에 산에서 숨다가 내려 온 간첩으로 몰려 군경(軍警)들의 검문에 여러 번을 곤욕을 당하시기도 하셨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분은 생활이 검소하셔서 당시에는 염색한 군복만 입으시고 신는 싸구려 지까다비(日語-地下足袋)만을 신고 다니셨으니 산에서 내려 온 간첩으로 오인하기가 십상이었다.


늦게 출발한 우리들이 대전역에서 외삼촌을 만날 줄이야! 누군가가 우리들의 피난일정을 기막히게 조절을 했는지? 막연하기만 했던 아이들의 남행길에서 의지할 집안 어른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 아닌가! 삼촌네 가족과 그 동내 사람들이 몰려 탄 화물칸은 발 디딜 틈도 없었지만 모두가 조금씩 양보하니 발은 뻗을 수는 없었지만 천안에서 타고 온 무개차에 비하면 추위는 훨씬 덜 했다. 곳간차 안은 공기는 탁했지만 사람들의 온기(溫氣)로 밀린 잠이 쏟아졌다.


대전에서 탄 이 곳간차도 쉽게 출발을 하지는 못했다. 전시 중에 기차는 군수송이 우선일 수밖에 없었다. 언제 출발하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모두가 느긋하게 기다렸다. 우리들이 탄 곳간차는 아마도 늦은 밤이 되어서야 출발했었나 보다. 다음 날인가 대구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어린 피난민들의 몰골은 먼저 남하한 사람들의 눈에는 상상을 뛰어넘는 거지 행색이었으리라. 아이들의 엉뚱한 피난계획과 판단이 포탄이 쏟아지는 생사의 고비마다에서 위험하기는 했지만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식들의 안위(安危) 걱정으로 뜬눈으로 새벽을 맞으신 부모님들의 간절한 기도와 하늘의 도우심으로 이룬 기적(奇蹟)이었다.


한강이 결빙(結氷)하는 영하 10~2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와 눈보라 속에서 얇은 옷을 입고도 감기도 한번 안 들었다. 굶듯 먹으며 노숙하며 포탄이 쏟아지는 피난길에서 아이들은 기적처럼 씩씩하게 살아남았다. 10살~16살들 일행 다섯 명은 대구로 부산으로 또는 제주도로 가깝고도 또 먼 친척들을 찾아 뿔뿔이 헤어져 살았다. 1년여 후에 서울로 올라가 부모님을 뵐 때까지 아이들이 격은 피난생활의 또 다른 차가운 삶의 체험담은 이후로 미루며 “14세 소년이 격은 한국전쟁”의 체험담은 여기서 끝내고자 한다.  


갖은 시련을 이겨내고 서울을 다시 찾았을 때 1년 전 약속처럼 동생들과 함께 살아 돌아 온 우리들은 부모님 앞에 자랑스럽게 안겼다. 철없이 집을 떠날 때 아픈 상처를 드렸지만 다시 만난 어머니의 눈물은 대견스러운 아이들과 함께하는 환희의 눈물이었다. 하지만 거동조차 불편하시고 편찮으셨던 가엾은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다. 외가댁에서 중공군을 함께 만나고 새벽에 우리가 피난길을 떠날 때 주먹밥을 싸 주셨던 모사니 할머니도 가셨다.


전쟁 중 피난길에서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도 기적적으로 함께 살아남았던 당시 10살짜리 착한 막내 동생은 그 후 부지런히 살아 1남 1녀에 손자까지 얻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았으나, 지난 2008년12월7일 69세를 일기로 안타깝게도 먼저 이 세상을 떠났다. 피난길을 함께했고 지금 살아있는 조카형제 중 동생은 뉴욕에, 형은 서울에 그리고 우리 형제는 모두 서울에서 건강하게 살고 있다. 지금은 모두가 인생의 석양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한국전쟁 중 피난길에서 공포와 기아와 추위 속에서 기적 같이 살아남은 그 소년들은 이름 없는 영웅들이었다.


<12회 예고>
*글을 끝내며

                                                                           Posted by 민병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