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교(鐵橋)위에 곡예사(曲藝師)들
아이들은 그동안 쌓인 피곤함에 추위도 잊고 돼지우리에서 깊은 잠에 빠졌는지도 모른다. 어제 밤 돼지우리에서 겨울밤 무섭게 몰아치는 강추위를 참아내고 아침까지 살아남았다. 동사(凍死) 직전까지 덮쳐 온 아침추위에 온몸은 사시나무 떨듯했다. 아이들은 새댁들이 꾹꾹 눌러 담아준 아침밥 한 사발씩을 해치우고 다시 기운을 차렸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모두가 버릇처럼 채비를 차리고 나섰다. 찾아갈 곳이 어딘지 분명치도 않았지만 뜨는 해를 바라보고 오른쪽이 남쪽이라 했다. 시골길이 동서남북으로만 뻗은 길도 아니니 국도(國道)나 철길을 타고 걷는 게 지름길이라는 아이들의 원시적 독도법(讀圖法)은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아침에 맑던 하늘이 어슬해 지면서 싸락눈을 뿌린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강인지 개울인지 그 위에 가로놓인 철길을 건너야 하는데 침목(枕木)위엔 살얼음과 눈으로 덮여있었다. 10여m 아래 얼어붙은 강바닥이 무섭게 내려 앉아있었다. 한 줄로 서서 손을 잡으며 뒤에서 등짐을 움켜잡고 건너는데 한발 한발 발 디딤이 짜릿한 실족(失足)의 공포가 머리카락까지 전해온다. 바라볼 땐 얼마 안 되었는데 올라타니 철교다리 끝이 멀리 걸쳐있는 것이 두렵다. 침목 한 칸 한 칸에 발을 옮길 때 마다 오금이 저려오고, 침목 사이로 내리다 보이는 강바닥이 천야만야(千耶萬耶)이다. 그래도 우리 일행 일곱 명은 심장의 박동마저 잠재우며 남행길 철교를 건너는데 생사(生死)를 걸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모두가 눈 덮인 철교를 무사히 건넜다. 식은땀을 흘리며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악몽(惡夢)에서 깨여난 것처럼 말없이 건너온 철교를 되돌아보며 표정도 없는 미소로 서로를 확인했다. 모두가 숨마저 죽이고 건넜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황소처럼 힘차게 뿜어 대는 콧김이 뿌연 하늘에 선명하게 번지며 사라진다. 다시는 이 짓을 말아야지 했지만 오늘이 두 번째다. 무모한 짓이었지만 그래도 빠른 길을 택한 어린 영웅(英雄)들의 다리엔 조금은 힘이 더 솟아 멈출 수 없는 남행길을 계속 걸었다.
눈 위에 버려진 천사
나즈막한 언덕을 옆으로 끼고 가는 길에서였다. 멀리서 포성(砲聲)이 들리더니 좀 떨어진 곳에서 폭발하곤 했다. 그동안의 체험으로 이 정도의 소리에는 엎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다. 포탄이 날라 오기 시작하면 불과 몇 초 사이로 계속 떨어졌다. 바람을 가르며 날카롭게 날라 오는 금속성(金屬聲)으로 들려오지 않으면 아이들은 전투경험이 많은 노병(老兵)처럼 낙하지점이 우리 주위가 아닌 것을 직감하고 태연했다.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 속에서 아이들은 이렇게 잘 대응하고 있었다. 그동안 며칠을 눈발이 거세게 퍼붓고 바람이 몰아치더니 벌판의 쌓인 눈은 높낮이가 멋대로다. 발목에서 허리까지 차기도 했다. 이런 시골길과 벌판을 찬바람 속에 걷고 또 걸어왔다.
며칠 전 있었던 기막힌 장면을 잊을 수 없다. 미 공군기에서 폭탄과 기총소사(機銃掃射)를 퍼부을 때였다. 모두가 이리 뛰고 저리 달아났다. 이런 생지옥 같은 불바다를 지나서였다.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딘지 보이지 않았다. 바쁜 걸음이지만 아이들의 호기심은 그냥 지나치지를 못 했다. 조급한 걸음을 잠깐 멈추고 찾아보았다. 허리까지 찬 눈 속에 천사 같은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싼 채로 눈 더미 속에 깊이 버려져 있었다. 나와 눈을 마주치자 방끗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 이럴 수가! 또 한 번의 괴로운 선택이 내 앞에 다가왔다. 어린 생명의 구원을 순간에 선택해야 하는 무서운 시험에 아이들은 갈등 했지만 잠시뿐이었다. 무슨 사연이 있어 천사 같은 아기를 눈 속에 버렸을까?
우리들뿐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아기를 보았지만 모두가 또 그냥 지나쳐 버렸다. 이 천사를 눈밭에 버리는 잔인함을 뛰어넘는 더 어려운 사정이 있었을까? 비정(非情)한 모성(母性)인가? 아니면 전화(戰火)속에서 실신(失神)한 엄마인가? 어찌하면 좋을까? 아기천사는 마지막 웃음으로 나와 함께 가자고 했지만 나는 영혼마저 눈 속에 파묻고 잔인하게 외면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상황이야 어떠했던 두고두고 그 아기를 안고 함께 못간 씻을 수 없는 죄책(罪責)을 나는 언제고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끝내 그 아기의 운명이 그 눈밭이었다는 생각에 어린마음에도 연민(憐憫)과 회한(悔恨)의 아픔이 충격으로 밀려왔다.
베들레햄 마구간에 태여 난 축복받은 아기예수는 이날 부끄러운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 눈밭에 버려진 아기로 보여주셨는지도 모른다. 생사를 넘어 영혼을 구원한다며 어려운 민초들을 눈밭에 남겨놓은 채 일찍이 남쪽으로 떠나간 당신들에게 눈 속에 버려진 아기천사의 애절한 미소를 아픈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죄인이 되여 보여 드리고 싶다. 전쟁은 왜 이렇게 스스로를 지킬 줄 모르는 아기들만이 아무 죄 없이 버려지며 희생되어야 하는지?
이(蟲)사냥
내려놓을 수 없는 무거운 마음으로 이날도 아이들은 계속 걷고 또 걸었다. 지칠 대로 지쳤지만 길로 벌판으로 논밭으로 걷는데 어린것들은 이골이 났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계속 걸어야하나? 추위 속에 쉬고 싶은 충동이 모두를 유혹하지만 동생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삼한사온이라 했나? 따뜻한 날도 있었다. 가끔은 양지 바른 곳에서 등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었다. 며칠이 지났는지 오늘이 며칠인지도 잊은 채다. 햇빛을 맞으니 졸음이 쏟아지지만 잠시라도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많은 생사의 갈림길을 거치면서 아이들은 계속 긴장과 공포로 예민해 졌나보다.
등짐을 내려놓고 가뿐한 몸을 햇빛에 맡기니 온몸 여기저기서 가려운 듯 스물스물 하다. 허리띠를 풀고 가려운 데를 긁어 봐도 끝이 없이 가렵다. 손에 잡히는 게 있었다. 이(蟲)가 잡혔다. 요놈들이 내가 집을 떠나온 후에 내 몸 이곳 저곳에서 엄청난 번식으로 대가족을 이루었다. 나는 나날이 바싹 말라가는데 그동안 요놈들이 내 몸을 축내고 있었다. 몇 놈을 감각으로 잡으니 보리알 반쪽만 하게 자라며 그동안 호강하며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그동안 갖은 고생하며 이곳까지 살아왔는데 어린놈들의 피를 빨다니 못된 놈! 방법이 없었다. 한번 가렵기 시작하니 온몸이 가려워 참을 수가 없다. 얼마나 가려웠으면 바쁜 길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윗옷을 홀라당 벗었을까? 매서운 추위가 앙상한 몸을 사정없이 덮친다. 바쁜 피난길에 이게 뭣 하는 짓인가? 한 겨울에 길가에서 훌훌 옷을 벗은 아이들 보다 더 놀라운 것은 이(蟲)놈들의 엄청난 번식력이다.
이(蟲)사냥이다! 옷 이음새 구석구석에 요놈들이 대를 잇고 있었다. 서캐까지 까놓았다. 한가하게 잡을 시간도 없다. 갈 길이 바쁘다. 옷을 턴다고 떨어져 나갈 놈도 아니다. 옷을 벗어 던지고 싶지만 갈아입을 옷도 시간도 없었다. 옷 끝자락을 잡고 돌이나 나무등거리에 몇 번이나 화풀이 하듯 냅다 후려쳤다. 속옷 군데군데 고놈들이 터진 피 자국이 쩜쩜이다. 그때 DDT(살충제)가 있을 리 없고, 옷을 삶아 입어야 하는데... 그동안은 왜 가려운 줄도 몰랐을까?
오랜만에 내 몸을 보니 쑥 들어간 배에 갈비뼈엔 피골이 상접했다. 추워서 이 사냥도 빨리 끝내고 옷을 입으니 이처럼 따뜻할 수가 없었다. 어린 사냥꾼들은 한겨울에 부끄러운 추억을 남기고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는 피난길을 서둘러 걸어갔다. 해방 전 국민학교에서는 가끔 이(蟲)잡는 시간이 있었는데 이 한 마리를 잡아 선생님에게 드리면 간유(肝油) 한 알씩을 주었는데 이를 못 잡아 간유를 못 탈 때는 이 잡은 아이가 부럽기도 했었다. 아마도 이(蟲)를 모아 간 곳은 보건연구소 같은 곳 이였나 보다.
고마우신 천안(天安) 아주머니
이날도 걷고 걸으며 점심때가 지났지만 점심이란 이미 옛 얘기다. 운 좋게 우물을 만나면 찬 냉수 한 바가지로 빈속을 채우곤 했다.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포화 속에서 죽음은 두려움이지만 배고픔은 최소한의 자존심과 인격마저 벗어던져야 하는 서러움 같은 것이다. 이날도 해가 질 때까지 걷기로 했다. 하늘 높이 은빛 비행기가 흰 꼬리를 그리며 북쪽으로 날라 가기도 하고, 야전색(野戰色) 얼룩무늬의 헬리콥터가 요란하게 오가기는 했지만 최전선에서 들리던 대포나 기관총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조용한 것도 불안했다. 조용한 곳이 피아간의 포탄의 낙하지점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얼마를 더 걸었을까? 기차의 기적이 들린다. 잘못 들었나? 어디쯤 기차가 와 있나? 기차에서 울리는 기적(汽笛)이 분명했다. 하지만 저 기차를 잘못타면 몰살당하는 게 아닌가? 했지만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이미 최전선을 벗어났구나! 살았다! 겁 없이 포탄 속을 헤집고 걸어왔던 우리들은 큰 고비는 넘겼나 보다. 해가 질 때쯤 어느 민가(民家) 앞에 다 달았다. 그동안 걸어오며 피난민들이 몰려갔던 그런 빈집이 아니었다. 그냥 밀고 들어갈 수가 없어 문밖에서 한참이나 서성이고 있었다. 이런 서성임은 오랜만에 되찾은 염치였나 보다.
오랜만에 질서가 자리한 세상을 찾아온 아이들은 이 집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동안 고된 남행길에서도 씩씩하게 걸어왔던 그런 당당함도 잃고 의기소침(意氣銷沈)해지는 나 자신에 놀라웠다. "너희들 피난 가는 길이구나?" 우리들의 초라한 몰골을 보셨는지 깔끔한 아주머니 한분이 나오셔서 물으셨다. "네~ 부산으로 피난 가는 길입니다" 어디로 갈지도 모르면서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일행이 일곱 명인 것을 보시고는 흠짓 하시는 것 같았지만 어린 녀석들이 안쓰러웠는지 이내 넉넉한 표정으로 다가 오시더니 "저 앞이 천안역인데 내일쯤 남쪽으로 떠나는 기차가 있으니 오늘은 우리 집에서 묵고 내일들 떠나거라! 어서들 들어와요! 배들 고프겠구나!"
이제야 우리들이 '천안'까지 온 줄 알았다. 하늘아래 제일 편안한 곳이 천안(天安)이라 했던가? 흔히 듣던 천안삼거리나 능수버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고맙게도 천안에서 큰 인심을 만난 것이다. 전쟁 통에 고약한 게 인심이라 하지만, 세상은 우리들의 생각처럼 선과 악으로만 그을 수는 없는 것이 아이들이 피난길에서 보고 느낀 것인지도 모르겠다. 서울을 떠나오면서 피난길 객지에서 처음으로 별에 별 사람들을 스치고 지났지만 어린 아이의 눈으로 바라 본 세상 사람들은 거의가 아이들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분이 우리들을 돌보아 주신다고 해서가 아니라 각박한 세상에 초면인 우리들에게 마음을 열어주신 천안 아주머니의 호의에 몇 번이나 “고맙습니다!”고 했다. 인정이 많으신 고마우신 천안 아주머니셨다. 하지만 우리들은 집을 떠난 지 며칠 사이에 이렇게 뻔뻔스러울 수가 없었다. 당연한 것처럼 몰려 들어가 씻고 싸고 나서 천안 아주머님께서 정성스럽게 차려주신 저녁상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게걸스럽게 해치웠다. 어린 걸신(乞神)들은 피난길에서 체면을 벗어던진 지가 꽤 되었다.
<11회 예고>
*무개차(無蓋車)에 올라타다
*마지막 조찬(朝餐)
*갈림길에서
*기적(奇蹟)
*글을 끝내며
Posted by 민병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