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소위 부인들
얼마나 달려 왔을까? 배고프고 목마르고 추웠지만 이불을 진 등속에선 땀이 흘렀다. 뒤를 보니 도망쳐 나온 곳은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잠깐 쉬면서 주먹밥을 먹자고 했다. 사과만한 주먹밥이 등짐 속에서 원형을 잃었지만 깨소금이 고루 섞인 주먹밥은 아직은 온기가 가시지 않아 꿀맛이다. 피난길 아이들은 한겨울 낯선 벌판에서 초라한 먹을거리지만 소풍을 온 기분도 들었다. 우리가 쉬고 있는 동안 우리 앞을 지나가는 피난민들도 많았다.
누군가가 우리 일행을 지켜보고 있었나 보다. 다시 출발하려던 차에 새댁 같은 두 여인이 우리 앞에 다가섰다.
"너희들도 피난 가는구나! 그런데 어른들은 안계시고 너희들뿐이냐?" 묻 길래 앞뒤 사정을 얘기하니 반가워하면서 "잘 됐다. 가는데 까지 함께 가자!"고 했다. 두 새댁의 사정은 이러했다. 남편이 모 육군 수송대 소위인데 차를 가지고 온다고 해서 기다리다가 끝내 오지 않아서 늦게 이렇게 피난을 간다고 했다. 내 주제도 잊고 누나 같은 새댁들이 딱해 보였다.
"육군소위가 전쟁 중에 가족을 태워줄 차를 가지고 올 끗발이 있을까?" 생각했지만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눈치는 있었다. 잘 된 일이라 생각했다. 어린 녀석들뿐 이지만 두 새댁은 남자 다섯 명과 함께 서로 의지하며 가는 것이 조금은 든든했나 보다. 피난길에서 무슨 인연인지 이렇게 만난 우리 일행은 7명의 대가족이 되어 외롭지 않았다.
끔찍한 시체들
새로운 힘을 얻고 씩씩하게 우리는 얼마나 걸었을까? 그곳이 아마도 시흥역에서 안양역 사이였나 보다. 무시무시한 장면이 우리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열차 한대가 폭격을 맞아 불타고 나서 아직도 연기가 나고 있었다. 시꺼멓게 그을린 채로 서 있었는데 가까이 가니 수백 명의 시체가 여기저기 먼 곳까지 나둥그러져 있었다. 철로 길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 철길을 따라 걸어 온 우리들은 이곳을 피해 갈수는 없었다.
몇몇 다른 피난민들의 말로는 어제 밤 마지막으로 군수물자를 싣고 떠나려던 기차에 많은 피난민들이 곳간차(庫間車) 지붕 위까지 수천 명이 매달리며 올라 탓는데 이미 적진(敵陣)이 되어 몇 번이고 비행기에서 피난민들을 향해 "이 열차는 이미 적진 안에 있어서 곧 폭격을 하겠다! 피난민 여러분들은 빨리 내려서 걸어 가시요!" 라고 했다는데 일부 사람들은 믿지를 않고 그냥 기차에 매달린 채 폭격을 당했다고 한다. 상황이 급박하고 위험 할 때일 수록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하고 경고의 말을 믿었어야 했는데...
어제 우리도 외가댁에 들르지 않고 계속 걸어왔다면 저 기차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겠고 이렇게 참혹한 변을 당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가 내 며칠간의 피난길 경험처럼 어느 순간 판단에 생사가 달렸나 보다.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 해야 하나? 운명(運命)이라 해야 하나? 죽고 사는 문제가 어느 순간 아이들 판단에 맡겨진다는 것은 너무 잔인한 시험이 아닌가? 하지만 전쟁 속에서는 그랬다.
세상에 이토록 끔찍할 수가 없었다. 수십 미터로 날라 가 죽은 사람, 오장(五臟)이 밖으로 튀여 나온 사람, 꺼멓게 끄을러 얼굴 모습조차 일그러져 알아 볼 수도 없는 사람들. 팔다리가 따로 떨어져 나간 사람, 숨을 거두기 직전에 신음하는 사람들. 이들 중 지금도 잊지 못하는 참혹한 장면은 지난 밤 악몽처럼 또렷하다.
등이 꺼멓게 타들어가 이미 죽은 엄마의 젖을 물고 울고 있는 갓난아기가 있었다. 무섭게 터지는 폭탄의 폭풍과 그 불구덩이 속에서도 엄마는 끝까지 아기를 온몸으로 감싸 아기의 생명은 구하고 마지막까지 죽음으로서 모성애를 보여준 자랑스럽고 눈물겨운 엄마였다. 이 가엾은 아기는 계속 울면서 죽은 엄마의 젖을 물고 있었다. 잠깐 눈길만 줄뿐 모두가 그냥 지나쳐 버렸다. 어렸다지만 나도 눈길을 돌린 그중에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이 아기를 어쩌랴? 이 아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 열차에 실린 군수물자가 무엇이기에 수백명의 귀한 목숨과 바꾸어야 했던가? 하늘이여! 하늘이여! 속으로만 외쳤다. 저들은 누구를 원망해야하나? 이런 끔찍한 시신들을 끝없이 건너뛰면서 발걸음은 남쪽을 향해 더 바삐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나도 두고두고 그 엄마와 아기 앞에 죄인이 되어 가슴이 메여왔다.
<사진 - 처참했던 당시상황을 말해주는 철마>
수원역이 화염에
마치 무서운 지옥문을 뛰쳐나오듯 우리들의 걸음은 더 빨라지고 있었다. 얼마를 더 걸었을까? 바람을 가르며 매서운 소리로 포탄이 우리를 향해 계속 날라 왔다. 순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그때마다 우리 일행은 눈밭에 납작 엎드렸다. 불과 백여 미터 앞에서 폭발했다. 둘러봤다. 모두가 무사했다. 살았다. 이렇게 포탄이 여러 차례 떨어졌다.
아주 위험한 판단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포탄이 우리를 향해 날아오는 소리와, 머리 위로 멀리 날아가는 소리를 구분할 수가 있을 만큼 아이들은 며칠 동안 어른들의 병정놀이 속에서 훈련이 되었나 보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전쟁터에서 하지 말아야 할 위태로운 병정놀이를 죽음의 공포 속에서 뛰며 엎어지며 일어서면서 배우고 있었다.
어느 쪽에서 퍼붓는 포탄인지는 알 필요도 없었지만 우리는 피아(被我)가 대치하는 한가운데를 걷고 있었다. 박격포탄의 날카로운 파편조각이 우리들 주위에 떨어지며 말라붙은 풀에 불을 붙인다. 빨리 전선(戰線)을 넘어서서 피해야한다. 하지만 UN군의 퇴각속도가 빠른 것 같아 걸어서 남하하는 아이들의 걸음이 그걸 넘지 못하고 있었다.
온종일 걸어와 해가 지려하는데 도착한 곳이 수원근처란다. 또 한참을 걸어서 수원역에 도착할 때였다. 미 공군의 전폭기가 수원역에 기총소사와 폭탄을 퍼붓는 것이 아닌가. 수원역에 중공군이나 인민군이 이미 와 있었나? 아니면 미군의 군수물자가 아직 쌓여있는지? 많은 피난민들이 수원역사 쪽에서 뛰쳐나오고 있었는데 내 눈으로 본 사상자도 한둘이 아니었다. 수원역이 순식간에 화염에 쌓였고 10여구의 시체들이 널부러졌다. 한순간에 일어난 참사 앞에서 우리들은 용케도 또 거짓말처럼 모두가 살아남았다.
<사진 - 저 멀리 오른쪽에 탑처럼 생긴 (연기 나는 밑에) 건물이 남쪽에서 지금의 수원역 쪽을 보 고 찍은 것입니다.(1951년4월)>
어린 노숙자(露宿者)들
수원역을 멀리하면서 해가 질 때까지 우리들은 다시 남쪽으로 걸었다. 어둠이 찾아오자 멀리보이는 초가집으로 향했다. 집이 두어 채 있는 외딴 마을이었다. 열려있는 대문으로 들어갈려니 방과 마루, 부엌, 곳간마저 피난민으로 가득 차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옆집도 마찬가지였다. 저녁은 무엇으로 어떻게 해결했는지 기억이 없으나 아마도 밥을 짓고 땅에 묻어놓은 김장독에서 김치를 퍼다가 먹었을 거다. 밥을 짓는 것 외에는 무엇을 더 끓여 먹을 수도 없었고 밥과 김치 이외는 사치한 생각이고 기대하지도, 할 수도 없었다.
방마다 피난민들이 이미 들어서서 우리 일행이 한곳에서 잘 수는 없었다. 이방 저 방으로 분산해서라도 추위라도 피하려 했다. 조금은 공간의 여유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려하니 이미 차지한 어른들이 못 들어오게 한다. 먼저 차지한 어른들이 자기네 가족끼리만 발이라도 쭉 뻗고 편하게 자겠다는 심뽀다! 아이들은 말도 못하고 그렇게 방에서 쫓겨나왔다. 어려울 때 사람들의 밑바닥은 드러나게 마련이지만 아이들만 못한 속 좁은 어른들은 어디서든 있게 마련인 세상이니 어쩌라! 혹한 속에서 아이들과 함께하기를 차갑게 거부한 어른들은 순진한 아이들에게 무서운 이기적인 삶을 가르치고 있었다.
사정을 할 수도 있었지만 아이들은 자존심을 지키다가 이날 밤 고생을 사서했다. 이렇게 방에서 쫓겨난 아이들은 그 집 대문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고, 처마 밑 둔덕에 모두들 서 있다가 별 변통이 없자 그 자리에서 다리를 모으고 쪼그리고 앉아 이불을 덮고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초가집 짧은 처마에서 떨어지는 눈 녹은 낙수 물이 고드름을 타고 떨어지며 무릎을 덮은 이불을 적신다. 똑~똑~똑! 떨어지는 낙수를 세며 새벽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시간은 차라리 정지된 시간 속에 벌어지는 형벌(刑罰)의 유희(遊戱)같았다.
온몸이 추위 속에 뼈 속까지 서럽게 저려왔지만 어쩔 도리가 없어 졸며 깨며 하면서 새벽을 기다리는 아이들은 긴 겨울밤이 원망스러웠다. 두 동생을 책임을 지겠다고 데리고 왔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한대(寒帶)잠을 재우는 것 이였으나 얼려 죽일 수는 없었다. 일행 중 한살 위 ○基 조카가 말했다. 추위에 잠들면 얼어 죽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나서 깊이 잠든 녀석들을 몇 번이나 깨웠다. 생사(生死)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지만 나부터 잠이 쏟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이 살면서 편한 잠을 자는 것처럼 행복한 일도 없나보다. ‘하늘은 참을 수 있을 만큼 고통을 준다’고 했다. 잔인했던 긴 겨울밤도 아이들의 아픔을 밟고 새벽 동이 트였다. 새벽하늘에 눈을 떳지만 다리가 펴지지 않고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아이들 모두가 동사(凍死)의 문턱까지 갔었나 보다. 모두가 선수들이 준비운동 하듯 온몸을 움직인 후에야 새댁들이 차려 준 아침을 뜨고 버릇처럼 또 길을 떠나는 우리 일행이 대견스러웠다.
"어릴 적 고생은 은전(銀錢)을 주고 산다"고 했다. 자주 들어온 어른들의 말씀이었지만 나는 이렇게 괴로움을 당하고도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겪어 보지도 못한 훈장(訓長)님들의 교훈일 뿐이라 생각했다. 뿌연 하늘이 짙어지니 오늘도 눈을 퍼부을 것만 같았다.
<사진 - 후퇴하는 미군들(1951년 1월)>
(9회)예고
*폭설(暴雪)
*외딴집
*미군의 강간(强姦)
*돼지우리에서 하룻밤을
Posted by 민병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