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한민국 안에서는 정말로 극단적인 경우를 빼놓고는 상당수가 이제는, 이것은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적 공모에 의한 남침전쟁이었고, 이 전쟁을 막아 내는데 있어서 미국의 도움이 결정적이었고, 또 이 전쟁을 막아내지 못했다고 한다면, 우리는 공산치하에 살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공산치하에 살았다고 한다면, 지난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이 망하듯이, 우리도 다 망하는 거였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정말 대한민국을 건국한 것도 잘한 것이었고, 6·25를 그렇게 막아낸 것도 참 잘한 것이었고, 또 6·25를 북한의 남침을 막아내는데, 자기 목숨을 바친 많은 우리 호국 장병들, 다 훌륭한 분들이었다, 이런 생각으로 생각의 흐름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 연구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책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며, 그래서 우리로서는 6·25 전쟁 연구가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계속해야 된다, 이렇게 봅니다. 그런데 지난날 북침설이나 남침유도설을 전파했던 사람들은 지금도 뭐라고 얘기하느냐, 그 문서들을 못 봤던 것은 그때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공개가 안 되는데 어떻게 보느냐?, 그래도 내 입장은 변함이 없다, 나는 기본적으로 이 전쟁은 내전이었다는 것이다, 남침이냐 북침이냐, 그것은 중요하지 않고 민족 내부의 전쟁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나의 그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라는 책을 또 출판했습니다. 동아일보 제1사설(별지#1 참조 - 편집자註)이 그 입장을 통렬하게 비판을 했어요. 그런 역사인식을 버려라, 더 이상 세계와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을 기만하지 말라 라는 취지로 쓴 것입니다. ? 그래도 우리의 이 전쟁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연구는 계속되어야만 합니다. 어떤 각도에서냐 하면, 우선 김일성과 그 주변 세력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가 더 깊어져야만 됩니다. 아까 말씀 드렸던 제2기 때 나온 해석을 제시한 학자들은 오늘날에도 이렇게 말합니다. 흔히 남쪽에서는, “북한은 소련의 위성국가로 출발을 했다, 그것은 저 동유럽의 헝가리, 루마니아, 폴란드 , 여러 위성 국가들처럼 북한의 김일성정권도 하나의 위성국가로 출범했던 것이다” 라고 말하는데, “그거 아니다. 북한은 처음부터 자주적인 나라였다, 그 사람들은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정신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국가를 세웠다 이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소련군의 점령을 받긴 했지만, 그러나 조선의 정신을 지켜 나간 사람들이여서, 그 사람들을 동유럽에 비교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 학자들의 용어로는 김일성정권은 처음부터 자율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소련도 자율권을 존중해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북한을 처음부터 소련의 위성국가, 괴뢰정권, 이렇게 보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 이런 이론을 전개했던 겁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이른바 친북좌파세력 가운데 일부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어요. “봐라, 우리 남한은 미국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는 나라다, 그런데 북한은 처음부터 그렇게 자율성을 가졌던 나라다,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미국을 자주 간다, 왜 정통성이 없는 사람들이라 미국의 지시를 받아야 되니까, 그저 기회만 닿으면 백악관에 찾아가서 머리를 조아리고, 미국의 대통령이 몇 마디 지시해 주면 그걸 듣고 와서 또 정책으로 발표하고, 이게 남한의 실정이다, 그런데 북한을 봐라, 김일성이 어디 모스크바 갔다 북경 갔다, 그런 거 봤느냐? 가기는 간다 그래도 3년에 한번, 5년에 한번, 그저 이 정도로 가지, 늘 평양에 앉아 있는 게 이게 바로 자율성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글 쓴 사람들도 꽤 있어요. 이런 글들이 젊은 청년들에게는 상당히 다가옵니다. “우리는 자주성이 없으니까 백악관 자주 찾아가는데, 김일성이는 자주성이 있으니까 딱 버티고 있구나.” 이렇게 단순화되는 거예요. 북한을 점령하고 있을 당시의 소련군 고위 사령관들의 회고록이 많이 출판됐습니다. 역사는 속일 수 없게 되어 있어요. 저도 그 회고록들을 보고 놀랬습니다. 그때 명령계통이 어떠했냐 하면, 모스크바에서 평양으로 직접 지시하기도하고, 그래서 그 경우에는 평양에서 모스크바로 직접 보고합니다. 그런데, 통상적인 경우에는 모스크바는 하바로프스크에 지시합니다. 그때 하바로프스크에는 연해주군관구가 있을 때입니다. 연해주군관구가 소련의 연해주 뿐 아니라 북한을 관할하고 또 남한을 관할은 못해도 관심 대상 지역입니다. 그 연해주군관구의 최고 실권자가 누구냐, 바로 스티코프입니다. 이 스티코프가 뒷날 북한에 정권이 세워지니까 초대 대사로 부임합니다. 아마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에는 스티코프가 미소공동위원회 때 서울에 온 모습도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그 스티코프가 연해주군관구의 최고 실권자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평양에 지시도 내리고 평양의 보고가 스티코프에 올라가면 스티코프가 본 다음에 모스크바로 보내는 겁니다. 우리의 상식적인 생각엔, 소련이 얼마나 큰 나라입니까? 소련이 한반도의 108배의 땅입니다. 지금은 줄어들었습니다만, 그러면 북한이라고 하면 한반도의 절반이니까, 소련 전체의 200분의 1 밖에 안 되는 땅이니까, 그저 얼핏 생각할 때는 그 작은 나라에 대해서 스탈린이 그렇게 매일 같이 보고를 받고 매일 같이 지시를 하겠나, 이렇게 생각이 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닙니다. 스티코프한테 스탈린의 지시가 자주 내려옵니다. 그러면 스티코프는 평양에 확인하고, 실제로 평양을 여러 번 왕래해요. 현장을 파악하기 위해서. 그 스티코프의 보고서, 스티코프 일기, 이것이 다 발굴이 되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읽으면서요, 많은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어요. 우선 지금 제기되었던 문제, 과연 그때 북한이 자율성을 가진 나라였느냐?, 전혀 아닙니다. 스티코프가 하바로프스크에 앉아서 김일성이 너 좀 와라하면, 김일성이 비행기 타고 갑니다. “그 사이 어떻게 됐어?, 토지개혁은 어떻게 진행 됐나?”, “아 그거 안 되겠어.”, 이렇게 해“ 그게 다 문서에 나와요. 심지어 1946, 47년에 북한에서는 선거가 실시되잖습니까? 그때마다 스티코프가 직접 평양에 오고, 진남포, 해주까지 다 시찰합니다. 시찰하면서, 여기 선거현수막 이거 바꿔, 이거 가지고 안돼, 심지어 김일성의 연설문을 자기가 고쳐 써줘요, 고쳐 써준 것을 김일성이 읽은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무슨 자율성이 있습니까? 이것을 모르고 그 때 북한은 자율성이 있었는데, 남한은 자율성이 없었고 ― 이건 그러한 원자료들을 보지 않은 사람들의 얘기입니다. 제가 더 놀라웠던 것은, 공산통치라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더라고요. 황해도 해주에서 무슨 회의가 열렸어요. 그런데 그 회의를 할 때의 회의 계획서, 이것까지 다 북한점령군사령관에게 보고하더라고요. 국기 경례, 스탈린 대원수에 대한 인사, 그것까지 다 써 있어요. 누가 나와서 선동연설을 하면, 누가 박수를 치고, 그 시나리오까지 다 사령관 손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소련사령관은 그것을 보고 논평을 해요. 미군이 남한을 통치하는 동안에 미국의 백악관이나 미국의 본국 정부나 미국의 펜타곤에서 서울의 한인들에게 한인들이 지방에서 개최하는 회의에 대해 사전에 보고하고 검열을 받도록 지시를 했다는 것이 지금 문서로 나온 게 없습니다. 소련은 그만큼 철저하게 북한을 장악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건 뭘 말하느냐, 그때 북한은 우리가 배워왔던 그대로 소련의 위성국가였고, 자율성을 가진 나라가 아니었다, 이것을 우리는 확인하게 됩니다. 또 그 뒤에도 무슨 남쪽에서는 대통령이 자주 백악관을 가는데, 김일성이는 딱 평양에 버티고 있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오늘날과 같은 국제사회에서는 그저 조그마한 문제, 큰 문제만 생겨도 정상들이 만나서 머리를 맞대고, 이것이 국정 운영의 방법이지, 우리나라 대통령이 매일같이 청와대에만 앉아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국가가 제대로 돌아가겠습니까? 요새 보세요. 요새 김정일이는 중국 찾아 가느라고 정신이 없잖습니까? 저게 무슨 자율성 있는 나라입니까? ? 우리는 우리 남과 북의 역사해석을 다시 열심히 해야 되겠고, 그다음에 우리 대한민국이 얼마나 정말 세우기 어려운 나라를 우리선배들이 피땀 흘려 세웠는가? 이것을 우리가 새롭게 인식해야 됩니다. 해방 3년사를 공부하다보면, 그때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세워져야한다고 지지한 나라가 이 지구상에 거의 없었어요. 1943년 11월에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이른바 카이로 회담이 열리지 않았습니까? 미국의 루스벨트, 중국의 장개석, 영국의 처칠, 거기서 카이로 선언이 채택되고, 그래서 그 선언에서 이제 코리안 피플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인 듀코스(in due course),’ 적절한 과정을 밟아 자유와 독립을 얻게 한다 ― 우리가 초등학교 때부터 배웠잖습니까? 처칠이 얼마나 공부를 많이 한사람입니까? 그런데 처칠이 뭐라고 한줄 아십니까? 나는 그때 코리아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고 했어요. 그래도 루즈벨트가 코리아에게 독립을 줘야겠습니다 라고 제의해요. 처칠은 코리아에 독립을 준다는 말이 밖으로 나왔다가는 아시아에 있는 영국 식민지들이 독립을 달라고 할까봐 반대했습니다. 그래도 루스벨트가 버텨서 코리아는 독립해야 한다는 취지의 한 구절이 들어갔던 겁니다. 해방되고나서 대한민국이 세워질 때까지 모든 자료들을 보면 볼수록 그때 이승만과 같은 걸출하고 신념 있는 지도자가 아니었으면, 대한민국을 세우기 어려웠습니다. 그 어려움을 이겨내서 대한민국을 겨우 세운 겁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세워졌기 때문에 북한의 남침이 시작 되었을 때, 막아 낼 수가 있었고,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있으니까 미국이 도와주고 유엔이 도와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전쟁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바로 우리 민족의 근대사를 새로 연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에서 처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상과 부상, 즉 장관과 차관을 임명하잖습니까? 그 임명하는 과정도 소련 문서에 그대로 나왔어요. 평양에 있는 소련점령군사령부가 명단을 만들었어요. 상, 부상 다 만들어서 김일성이 불러서 맞춰봅니다. 이렇게 하자, 그래도 김일성이 한 두 사람 더 추천하더라고요, 그러나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것을 모스크바에 보고해요. 그것을 스탈린이 봅니다. 봐서, 그래? 이렇게 했어? 아 그래 좋아 그렇게 해. 그래서 발표된 것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내각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에서 처음 초대 내각을 구성해서 발표할 때, 트루만이 그 명단을 봤다든가, 국무장관이 봤다던가,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 국내에서 일부 세력은 “대한민국은 무슨 미제가 만들어 낸 나라고 자주성이 없는 나라인데, 북한은 자주성이 있는 나라이다.” 이런 말이 어떻게 나옵니까? 그런데 이런 식의 교육이 지금도 부분적으로 진행이 된다니 걱정스럽습니다. 그래서 저는 6·25 전쟁 61주년을 맞이하는 이즈음에 우리는 6·25 전쟁에 대해서도 더 깊이 있게 연구를 해야 되겠다. 지금 연구 안 된 분야가 참으로 많아요. 개별적인 전투에 대하여, 그리고 어떻게 그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는가? 등등 아직도 많은 주제들이 남아 있습니다. 호국하신 분들에 대하여 국민이 감사할 줄 알고, 최근에 보면, 우리 정부가 6·25때 전사한 병사들의 유해를 발굴해 내고, 국립현충원에 모십니다. 잘하는 겁니다. 그래서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 국가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사람들을 존중할 줄 알아야, 그래야 뒷날 또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 자기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람들이 뒤를 이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6·25 전쟁이 미제국주의가 일으킨 것에 남조선이 뒤따라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가르쳐서야 누가 그 전쟁에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존경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6·25 전쟁의 성격도 분명하게 규명을 하고, 그래서 제대로 다음 세대에 가르쳐 주고, 그래서 다시는 이 땅에 6·25전쟁과 같은 남침전쟁이 일어나지 못하게끔 우리가 경각심과 마음의 자세를 새롭게 해야 됩니다. 전쟁의 형태가 달라 질수 있는 거예요. 9·11 테러가 뭐였습니까? 전쟁의 개념을 새롭게 바꿔 놓은 것 아니겠습니까? 북한도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 터이니까, 다시 6·25 남침전쟁과 같은 것은 못할지라도, 여러 가지 새로운 전술, 전법을 개발하고 거기에 필요한 요원들을 길러내고 있을 터인데 여기에 우리가 경계심을 이완시켜서는 안 되겠습니다. 특히 문제는 핵무기입니다. 지난번 일본에서의 핵 원전이 뭘 보여 줍니까? 관리만 잘못해도 야단나는 겁니다. 북한이 우리한테 핵무기를 안 쓴다 하더라도 저 사람들이 핵시설의 관리를 제대로 못하면 그 재앙은 우리 모두에게 곧바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6·25전쟁은 그 자체로서 깊이 공부하되, 그러나 앞으로 북한이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새로운 형태의 전쟁에 대해서도 미리 깊이 공부하고 거기에 대비하는 이러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이제 제2의 6·25를 막고, 이 땅에 평화를 뿌리 내리게 하는 정책이 아니겠는가 하는 말씀으로 오늘 제 발제를 끝내겠습니다. 여러분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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