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한국전쟁 史

6·25 戰爭을 어떻게 解釋해야 할 것인가?

淸山에 2011. 7. 20. 11:32

 

 

 
 
6·25 戰爭을 어떻게 解釋해야 할 것인가?
 

 
 -최근의 國內外 연구활동과 관련해-
金學俊(단국대 이사장)  
 

 

저에게 과분한 소개의 말씀을 해 주신 안무혁 이사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하여 자신의 젊음과 평생을 바치신 어른들이 많이 계십니다.
 
 또 대한민국이 세계적 관심과 국제적 존경을 받는 나라로 자리 잡을 때까지 여러 분야에서 헌신하신 어른들 역시 자리를 함께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합니다.
 
 6·25 전쟁 61주년이 내일로 닥쳤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6·25 전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라는 제목으로 제가 여러분과 함께 생각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부제에 소개되어 있듯이, 제 혼자의 의견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 전쟁에 관하여 국내외에서 많은 연구들이 나왔는데, 이 연구들을 종합해서 여러분에게 보고하는 형식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전쟁의 명칭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 전쟁을 한국전쟁이라고 불러왔는데, 이것은 영어의 ‘더 코리안 워 (the Korean War)’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적절한 용어가 아닙니다. 더구나 한국전쟁이라고 하니까, 한국, 대한민국 안에서 일어난 전쟁인 것처럼 오해 될 수도 있습니다. 영어식으로는 저 월남전쟁은 더 베트남 워(the Vietnam War)고, 우리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민족의 비극은 ‘더 코리안 워 (the Korean War)’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입장에서 볼 때는 한국전쟁은 적절한 용어가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 명칭들이 나왔습니다. 그 명칭들을 지금 소개할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기 때문에 그 부분은 모두 생략하겠습니다.
 
 저는 6·25 전쟁이 가장 완벽하진 않지만, 다른 어떤 명칭 보다 상대적으로 적합한 명칭이라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이 전쟁의 명칭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에 관하여 11년 전에 논문을 썼습니다. 그사이에 제기되었던 참으로 많은 명칭들을 일일이 고증을 하고, 그리고나서 “6·25 전쟁이 미흡하나마 상대적으로 적합하다” 라고 결론을 내렸더니, 일부에서는 “6·25 전쟁은 6·25를 상기하자” 라는 뜻으로 비칠 수 있고, 또 그것은 아물려야 할 민족의 상처를 다시 들추자는 의미를 가졌기 때문에 부적절하다고 반론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6·25 전쟁이라는 선택 이외에는 다른 선택이 있기 어렵다, 이렇게 생각해서 그 입장을 그대로 지켜 왔습니다.
 
 다행히 정부에서도 최근에는 6·25 전쟁이라는 명칭을 채택해서 저로서도 보람을 느낍니다.
 
 그러면 이 전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세 시기로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제1시기, 제2시기에 대해 단순화시킨 형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1시기는 국제적으로 이 전쟁은 북한의 남침에 의하여 일어난 글자 그대로 침략전쟁이라는 해석이 지배하던 시기였습니다. 남침의 배후에는 소련의 스탈린과 중공의 모택동이 있다, 스탈린과 모택동 가운데에서도 스탈린의 역할이 훨씬 더 컸다, 그래서 스탈린이 모택동을 끌어 들이고, 그다음에 김일성이라는 ‘괴뢰’를 앞세워서 대한민국을 침략하게 한 전형적인 공산주의자들의 세계공산화전략에 의하여 일어난 전쟁이었다 ― 이것이 제1기의 세계적인 연구의 흐름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당연히 그러한 해석을 받아들였고, 또 그러한 해석으로 교육을 시켜왔습니다.
 
 우리는 이 해석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으려니 믿었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 중반 이후에 이 해석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주로 서방세계의 학자들에 의하여 제기되었습니다. 그 논리는 이렇습니다. 우선 이 전쟁을 스탈린이 일으켰다는 증거가 없다, 더구나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때로부터 1년도 안된 시점에 어떻게 이러한 전쟁을 지원할 수 있었겠느냐? 그러니까 스탈린이 일으키고 모택동이 지원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얘기다, 그리고 김일성이 일으켰다고 보기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논리들을 제 나름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전쟁을 일으킨 사람은 맥아더다, 그때 맥아더는 미국의 극동군사령관으로 미국의 대통령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2차 대전의 영웅은 아이젠하워였기 때문에, 아이젠하워를 넘어서서 대통령이 되려면 큰 세계적인 업적을 내야 되고, 그래서 국민들에게 아이젠하워를 능가하는 영웅으로 비춰야 할 조바심을 갖고 있었는데, 중국대륙마저 공산화가 되니까, 맥아더는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켜서 한반도를 자유민주주의 아래 통일하고 그리고 그 여력으로 중국대륙까지 확전해서 중공까지 무너뜨리면, 이것은 글자 그대로 세계적인 영웅이 되고, 따라서 1952년의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대통령이 될 기회가 높다고 보고 맥아더가 꾸민 전쟁이다, 그런데 맥아더의 꿈에 일치될 수 있는 사람이 이승만이었다, 이승만도 당시 대한민국을 힘들게 세운 뒤에 여수순천반란사건, 또 계속되는 제주도에서의 반란, 이런 것들 때문에 시달리다 보니까, 큰 돌파구를 열기 위해서 고민하는 중에 맥아더의 전략과 맞아 떨어져서 맥아더와 이승만이 공모해 일으킨 전쟁이다, 그리고 거기에 장개석도 가담했다, 장개석도 대만으로 쫓겨가서 상당히 어려운 입장인데 맥아더의 꿈대로만 실현 된다면, 중국대륙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오니까, 그래서 맥아더의 대전략 아래, 이승만과 장개석이 함께 공모해서 북침을 한 것이다.
 
 이렇게 논리를 전개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북침의 증거로 한국의 그 당시의 신문을 들고 나왔어요. 실제 제가 그 신문을 보니까. 어느 사단장이 “우리는 지금 해주를 점령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을 받았다. 그래서 지금 우리 부대는 북진 중이고, 멀지 않아 해주를 다 점령할 것이다”라고 발언했고, 이 발언이 신문에 크게 보도가 됐어요. 또 그뿐 아닙니다. 6·25가 일어나자마자 육군본부 정훈국이 계속해서 성명을 냈어요. “지금 괴뢰군이 남침을 했지만 그러나 우리국군이 계속해서 반격해 들어가고 있고, 여러 전선에서 모두 회복을 했고 해주를 점령했다는 말도 있고, 곧 점령할 것 같다는 보도도 있다” ― 이렇게 육군본부 정훈국이 실제로 발표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지금 말씀드렸던 미국의 어느 학자들은 그것을 내놓으면서 “이것이 바로 남쪽에서 전쟁을 시작했다는 증거 아니냐, 그리고 설령 북침을 안했다고 한다면 북한이 남침하도록 유도한거다, 북한이 남침하도록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다가, 북한이 멋모르고 내려올 때 반격을 가한 것이다” 여기서 나온 것이 바로 남침유도설입니다.
 
 그러면서 여러분 기억하시듯이 1950년 1월 달에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미국의 극동에서의 방위선을 이야기하면서 대한민국을 빠뜨렸습니다. 대한민국과 대만 모두를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시켰던 것이죠. “이것도 다 북한이 남침하도록 유도하기위하여 애치슨이 파놓은 함정이다” - 이런 식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요컨대 제2기에 등장한 이론은 남침은 말도 안되고, 더구나 스탈린과 모택동 이것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고 맥아더가 이승만과 장개석과 공모해서 일으킨 전면북침이거나 남침유도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이 이론들을 우리 대한민국 정부는 모르고 있었던지 묵살을 했어요. 왜냐하면 우리로서는 너무 가당찮은 이야기이니까 그저 몇몇 사람들이 하는 얘기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것이 미국의 중요한 대학들이 채택한 미국외교정책 분야의 책들에 실렸습니다. 그러한 이론을 내놓은 학자들이 그때로서는 미국외교정책분야에서는 지도적인 학자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책에 그렇게 쓰니까 남침유도설 또는 북침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하게 번져나갔습니다.
 
 거기에서 더 한걸음 나아가서 어는 학자는 이런 글까지 발표를 했습니다. 이 전쟁은 1950년 6월25일에 시작된 게 아니다, 이 전쟁은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갈렸을 때인 1945년 8월에 시작된 것이다, 연합국이 한민족의 의사에 어긋나게 남과 북으로 갈라놓으니까 한민족인 우리는 통일해야 되겠다, 이런 의욕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항일민족주의 게릴라운동을 벌였던 김일성과 그 주변세력의 눈으로 볼 때는 ‘친일파의 소굴’이 된 남조선을 해방해야 되겠다고 마음먹고 그때부터 해방을 계획한 것이다, 따라서 설령 북한이 남침을 했다하더라도 그것은 침략전쟁이거나 공산화세계전략이 아니고 같은 민족내부에서 민족주의세력의 주도로 분단국가를 통일하려는, 말하자면 민족주의통일전쟁이었다 ― 이렇게 봐야 된다는 이론을 영국의 한 학자가 냈습니다. 이것이 또 상당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는데 국내에서는 그것을 잘 모르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전쟁을 겪은 우리로서는 스탈린과 모택동의 음모에 따라 김일성이 남침해 내려왔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그런 얘기들이 나와도 “그 사람이 진상을 잘 모르고 말하는 모양이다” ― 이렇게만 생각했던 것이 그런 이야기들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배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호주의 저명한 변호사 출신의 교수가 있었습니다.
 
 영국에 가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됐는데, 이 사람의 평생연구는 만주국입니다. 그러면서 일본의 군국주의세력이 왜 만주를 침공해서 만주국이라는 괴뢰국가를 세웠는가, 평생연구를 해서 만주국연구에 있어서는 세계에서 제일간다는 평을 들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교수도 이 전쟁에 대해서 책을 출판했습니다. 남북을 비교해 보니까 북한은 일제와 만주국군에 맞서서 싸웠던 애국자들이 만든 나라인데 비해 남한은 만주국군대에서 장교나 한 사람들이 대한민국 국군의 중추가 되고 그런 사람들이 세운 나라다, 그러니까 그 애국집단이 반민족집단을 청소하겠다는 배경에서 전쟁이 일어났다고 해석했습니다.
 
 그 교수는 “이 전쟁의 민족주의적 성격도 모르고 트루만대통령과 유엔이 개입을 했다, 이건 내버려뒀어야 할 전쟁이다, 트루만이 멋모르고 파병을 하고 유엔이 개입을 해서 이 전쟁을 길게 만들었다”고 말하면서 미국의 개입 유엔군의 개입 그 자체를 비판했어요.
 
 그때 미군이 안 들어 왔으면 그 전쟁은 김일성의 승리로 끝났다, 승리한 김일성이 숙청을 한다고 해야 과연 얼마를 했겠느냐, 많이 해야 10만 명이라고 치자, 많이 했다고 해서 그걸로 끝나는 것이었는데, 괜히 미국이 들어오고 전쟁이 3년 동안 계속되다보니까 10만 명이 뭐냐 수십만 명 이렇게 죽은 것 아니냐? 그러니까 그 피해자의 수만 따져도 개입이 잘못된 거다, 이러한 취지의 해석도 덧붙였어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왜 그런 이야기를 했겠느냐? 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호지명은 프랑스와 일본에 맞서 싸운 애국자였는데 남베트남의 지도자들은 프랑스군대와 일본군대에서 하사관 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무슨 정통성이 있는 사람들이냐? 그런데 왜 여기에 미국이 뛰어들었느냐 라고 반문하면서 베트남전쟁을 격렬히 반대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베트남전쟁의 시각에서 한국전쟁을 되돌이켜 보고 재해석한 겁니다. 마치 호지명이 식민지세력에 맞서 싸웠던 애국자였듯 김일성이가 그러했고, 그리고 베트남 남쪽의 지도자들이 식민지세력에 영합했듯, 코리아에서도 남쪽의 지도자들이 그러했다,
 
 이렇게 설명한 거예요. 그런데 또 한 꺼풀 벗겨보면 그 사람들 가운데 베트남전쟁에 징집될 연령에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베트남전쟁에 징집되고 싶지 않았기에 베트남전쟁을 반대하고,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는 안목에서 6·25전쟁까지 그렇게 보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이론들이 국내에 들어오면서, 국내의 이른바 반체제세력에게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던 것입니다.
 
 왜냐? 당시에 이른바 반체제세력은 “우리나라의 독재정권을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미국이다, 미국이란 나라의 정체가 바로 이렇다, 베트남에서 저 반제국주의세력을 타도하려고 하고 제국주의세력을 지원했듯이, 코리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그 현지의 지도자들이 민족주의세력이었느냐, 식민지통치세력에 협조한 반민족세력이었느냐, 이걸 가리지 않고 그저 자기네 입에 맞는 세력을 지원하는 나라다, 그래서 미국은 지금 자기네 입에 맞으니까 유신을 지지하고 있고, 5공을 지지하고 있다” ― 이렇게 해석하는데 도움을 주는 이론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2기의 책들이 국내에서 많은 번역판들이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6·25 전쟁은 기본적으로 민족해방전쟁이었다, 즉 일제에 맞서 싸웠던 항일게릴라세력이 일제에 협력했던 반민족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민족해방전쟁이었다고 해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민주화를 이룩하려면, 바로 이렇게 반민족세력을 지원하는 미국하고도 맞서 싸워야 된다” ― 이것이 반미운동으로까지 연결되는 한 요소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국내에서는 반공이라는 것은 허상이라는 해석이 확산됐습니다. 6·25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고 해석하게 되면, 반공이라고 하는 게 설 근거가 약해지는 겁니다.
 
 

 

 

 
 
 그런데 마침내 제3기에 들어서게 됩니다. 상황의 반전이 이루어지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말씀드리려면 제가 미국의 한 여류학자를 좀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캐스린 웨더스비라는 교수입니다. 이 교수는 원래 러시아 외교정책을 연구한 학자에요. 러시아 말도 유창합니다. 물론 러시아 문헌들을 다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어요. 미국의 인디애나대학교가 좋은 학교입니다만, 특히 인디애나대학교는 소련학이 강한 학교였습니다. 거기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그리고 플로리다주립대학교 교수를 하던 분인데, 이 분이 자기가 러시아 전공이니까 모스크바를 자주 왕래했습니다. 고르바초프 말기입니다. 고르바초프 말기에는 지난날의 통제가 상당히 풀렸기 때문에, 소련이 가지고 있는 비밀문서들을 읽기 시작했던 겁니다. 이 분이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러시아어가 능통하고, 러시아어 문서를 해독할 수 있고, 또 러시아 역사로 박사를 받았기 때문에, 모스크바에도 아는 사람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러시아의 비밀문서에 접근이 가능해졌어요. 그 결과 1990년부터 러시아 비밀문서에 근거한 논문들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발굴한 비밀문서들을 영어로 번역하고 거기에 자기의 의견을 덧붙이는 주석을 덧붙여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업적이었습니다. 앞에서 제2기를 이끌어간 대표적인 사람이 브루스 커밍스라는 학자입니다. 여러분의 귀에 익숙하실 것입니다. 이 교수가 한국전쟁이라는 글자 그대로 대작을 썼어요. 양으로만 볼 때는 대작을 써서 상도 여러 군데서 받았습니다. 이 책이 국내에서 정말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제3기의 시작은 바로 이 캐스린 웨더스비교수에 의해서 열리게 됩니다. 이 교수가 비밀문서들을 보니까, 이 전쟁은 확실하게 스탈린이 주도한 전쟁인 것입니다. 저희도 몰랐던 많은 비밀문서들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들을 보면 소련이 국가의 비밀문서들은 철저하게 잘 관리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우선 “전쟁을 해야 되겠습니다”라고 스탈린에게 계속 조른 사람이 김일성이라는 사실이 그 문서에 나오는 겁니다. 김일성은 그 때 평양주재소련대사이던 스티코프를 찾아가서 “전쟁을 해야 되겠습니다,
 
 지금 남쪽의 인민들은 내가 내려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이거 왜 장군님이 안 오시나, 다 이러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려가야겠습니다” 라면서 졸라요. 이게 스티코프가 모스크바에 보낸 문서들에 그대로 다 나와 있습니다. 스티코프가 김일성의 뜻을 스탈린한테 알리면, 스탈린은 “안돼, 안돼, 안돼”, 계속 이렇게 말했습니다. 1949년 가을까지는 스탈린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950년에 들어가면서 스탈린이 비밀리에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부릅니다. 비밀리에 김일성이 가니까 “그래 네가 하자는 대로 전쟁을 시작해 보자” 하고 또 몇 가지 지시를 해줘요. 그것도 문서로 다 나왔습니다. 김일성이 너무 좋아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자신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1주일 이내에 끝냅니다.” 이렇게까지 말하고 돌아갑니다.
 
 그러면 왜 스탈린은 1949년까지는 안된다고 하다가 1950년에 들어서면서 전쟁을 시작하기로 결심을 했는가? 크게 보면 첫째는 핵무기의 확보입니다. 그전까지는 원자탄은 미국만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탈린이 미국에 대하여 엄청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어요.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는 것을 본 것 아닙니까? 자기넨 없어요. 미국은 그것을 가지고 있어요.
 
 그뿐 아니라 미국은 계속 원폭을 더 개발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탈린은 감히 미국을 도발할 일을 할 수가 없다고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일성의 도발을 억제시켰던 것입니다. “당신을 믿고 내려갔다가 미국이 개입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이렇게 질문한 것도 문서에 다 나옵니다. 그러면 김일성은, “염려 마십시오. 미국이 절대 못 들어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1949년 6월 30일로 미군이 다 철군했잖습니까? 이렇게 철군한 사람들이 뭐 때문에 또 들어오겠습니까? 안 들어옵니다. 걱정 마십시오.” 이런 대화도 다 문서에 나옵니다.
 
 1994년 5월에 당시 러시아의 옐친대통령이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영삼대통령에게 많은 양의 비밀문서들을 넘겼습니다. 거기서도 이 전쟁이 스탈린과 김일성의 음모의 산물이라는 사실이 극명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스탈린도 49년 가을까지면 원폭을 손에 넣게 됩니다. 그러니까 미국에 대한 공포심이 많이 줄어들었어요. 스탈린이 원폭을 개발하는 과정에 대한 문서도 많이 발굴이 되었고 연구도 많이 나왔는데, 그걸 보면 자꾸 북한이 떠오릅니다. 어떻게 이걸 만드느냐 하면, 원자폭탄개발국가특별위원회라는 것을 만들고 그 위원장에 베리야를 임명합니다. 그리고 베리야에게 원수라는 계급장도 따로 붙여주고, 부총리 타이틀도 주고, 원폭을 만드는데 필요한 권리를 모두 베리야에게 일임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눈물겨운 것은 뭐냐 하면, 원폭을 만들려면 여러 가지 시설들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이 시설들을 죄수들을 동원해서 합니다. 그래서 소련 전국의 죄수들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권한도 부여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죄수들이 현장에 동원됩니다. 그래서 여기에 저기에 연구소 세우고, 실험실 세우고, 뭐 이렇게 많은 것을 세웁니다. 때로는 죄수들을 상대로 실험을 해요. 그러니 얼마나 비인도적이고 잔인한 일입니까? 저는 북한도 거의 비슷하게 그런 수준으로 작업을 해왔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니 정말 눈물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를 했던 후지모도 겐지라는 사람이 있잖습니까? 후지모도 겐지의 회고록이 우리말로도 번역이 되어서 두 종류가 나와 있습니다. 혹시, 읽어보시면 김정일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북한 정권의 본질이 어떻다는 것을 쉽게 알게 됩니다. 저도 그 책들을 읽으면서, “야, 이런 사람을 상대로 우리가 협상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의문도 때때로 갖게 됩니다. 후지모도 겐지는 13년을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를 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보다도 북한의 권력 핵심부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벌써 한 십년 전에 김정일의 후계자는 큰아들이 아니고 둘째 아들 김정은이 될 것이라고 예언을 했어요. 그게 그대로 맞았잖습니까? 그만큼 정통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 사람 책에 보면, 김기남이라는 사람 있잖습니까?, 선전선동담당비서 김기남, 그 사람은 김일성에게도 충성, 김정일에도 충성, 그러니까 오늘날까지 그대로 살아남아 고위직에 머물러 있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까지도 어느 날 김정일에게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해요. “지금 영변원자력시설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이가 다 없어지고, 머리칼이 다 빠져버리고, 너무 비참합니다.” 이렇게 말을 꺼냈는데, 김정일이 아주 냉담하게 반응하더라, 이런 구절도 후지모도 겐지의 책에 나옵니다. 김기남이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표현했겠습니까? 김기남이 같은 사람도 너무 상황이 처참하니까, 겨우 그 정도 얘기한 것 아니겠습니까?
 
 아마 지금 북한에서 핵 개발 때문에 벌어지는 반인륜적인 반인간적인 작태는 뒷날 우리가 알게 되면 공분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스탈린이 베리야를 통해서 죄수들을 동원해 시설을 짓고 건설하고, 흙을 파내고, 핵실험에 마침내 성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스탈린이 자신감을 갖게 되었어요. 미국이 개입해 와도 우리도 핵이 있으니까, 미국이 우리한테 함부로 못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 1949년 10월 1일자로 중국대륙이 공산당 손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모택동이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언했던 것입니다. 이제는 스탈린이 훨씬 자신을 갖게 되었어요. 우리도 핵을 가지고 있다, 또 중국대륙이 공산당 손에 들어 왔다, 이렇게 되면 이제 한반도에서 김일성이 전쟁을 시작해도 우리에게 승산이 있을 수가 있다, 이렇게 믿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1950년 1월에 애치슨 국무장관이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말하면서, 그 극동방위선에서 한반도가 제외된 것을 보고는, 미국이 개입 안할 것이 확실하다, 이런 확신을 갖게 되니까 김일성에게 청신호를 보낸 겁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아주 빠른 속도로 많은 무기와 장비들이 북한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김일성은 자신감을 가졌던 거예요.
 
 그리고, 여기에 박헌영이가 부채질을 했습니다. 소련 문서에서도 다시 나온 것은 박헌영도 열렬하게 스탈린 앞에서 “전쟁을 해야 됩니다, 우리가 밀고만 내려가면, 지금 남한 지하에는 30만 명의 남로당원들이 있는데, 이 남로당원들이 일제히 봉기할 겁니다” 이렇게 부채질을 한 것도 박헌영입니다.
 
 스탈린이 참 교활한 사람입니다. 끝까지 모든 문서에서 스탈린이란 말을 안 써요. 싸인을 해도 필리프 그게 스탈린의 가명입니다. 역시 소련에서 그 수많은 유혈 권력투쟁을 이겨내고 정상에 도달할 때까지, 이 사람의 간지가 얼마나 많이 발달했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문서가 가명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스탈린이 그렇게 하고도 김일성한테 다짐을 받아요. 뭐냐, “당신이 직접 모택동한테 가라, 모택동한테 가서, 모택동의 동의를 받아라, 모택동이 동의를 안하면, 내가 이제까지 해준 얘기는 무효다”. 그런 취지로 해서 모택동을 끌어들여요. 그래서 김일성이가 북경으로 갑니다. 5월에 갈 때 박헌영을 데리고 가요. 둘이 같이 가서 모택동을 설득하고, 이렇게 해서 결국 스탈린과 모택동의 공모에 김일성 박헌영이가 함께 손을 잡아서, 6월 25일이란 D-데이가 잡히는 겁니다.
 
 이제 제가 앞에 말씀 드렸던 제2기의 좌파 학자들은 6월 25일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렇게 주장했다고 말했잖습니까? 그 이유 중의 하나는 6월 25일은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사이에 합의된 날도 아니고 그냥 김일성이는 있다가, 남쪽에서 뭐가 올라온다고 하니까,
 
 거기에 대응한 날이 6월 26일이다, 그러니까 6·25라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렇게 얘기 했던 거예요. 그런데 후르시초프 회고록은 믿을만한 회고록입니다. 후르시초프는 회고록에서 “그들은 모두 6월 25일에 전쟁을 하기로 합의했다”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 제3기에 들어오면 이 문서들이 발굴되는데 마침내 그때 옐친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에게 그 문서들 가운데 상당한 부분을 줬죠? 앞에서 말씀드렸듯, 김영삼 대통령이 이것을 공개함으로써, 캐스린 웨더스비가 그사이 진행했던 연구가 정확한 연구였구나 하는 힘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연구의 동향에는 반전이 일어납니다. 다시 단순화시켜 말씀드리면 제 1기의 흐름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이 전쟁은 스탈린과 모택동이 공모하고 그리고 남침을 열망하던 김일성이 이를 뒷받침하고, 그래서 합의된 날짜, 6월 25일에 일으킨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국제공산주의 음모의 산물로서의 남침전쟁이다- 이것이 이제는 국제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제2기의 학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당황하게 된 거예요. 이 문서들이 공개되기 전에는 김일성이 1950년에 모스크바를 방문했다는 증거를 내놓으라고 말했었는데, 이제 그 사실을 증명하는 문서가 나온 겁니다.
 
 또 “1950년 5월에 김일성과 박헌영이 북경을 비밀 방문하여 모택동과 회담했다”라고 그런 글을 쓴 사람이 있었어요. 그런데 제2기의 학자들은 “그날 모택동 생일 축하하러 갔냐?” 이렇게 비웃음으로 책에 썼습니다. 그런데 갔다는 게 다 문서로서 입증이 되었지 않았습니까? 이제 제2기를 지배했던 학자들의 입지가 약화된 겁니다.
 
 국내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국내에서 뉴라이트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런 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6·25 전쟁에 대한 인식의 중대한 변화입니다. 그러한 문서들이 공개가 되고, 그러한 문서들의 입각한 새로운 해석들을 받아들이게 되니까, 우리가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구나, 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때 미국이 안 들어왔더라면 유엔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모두 공산통치 아래 살 뻔했다, 이걸 깨닫게 된 겁니다. 그 결과 지난날 이른바 친북좌파에 속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양심고백을 하면서, 내가 지난날 잘못 생각했다. 이제는 대한민국을 지켜야 되겠다, 이렇게 선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 안에서는 정말로 극단적인 경우를 빼놓고는 상당수가 이제는, 이것은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적 공모에 의한 남침전쟁이었고, 이 전쟁을 막아 내는데 있어서 미국의 도움이 결정적이었고, 또 이 전쟁을 막아내지 못했다고 한다면, 우리는 공산치하에 살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공산치하에 살았다고 한다면, 지난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이 망하듯이, 우리도 다 망하는 거였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정말 대한민국을 건국한 것도 잘한 것이었고, 6·25를 그렇게 막아낸 것도 참 잘한 것이었고, 또 6·25를 북한의 남침을 막아내는데, 자기 목숨을 바친 많은 우리 호국 장병들, 다 훌륭한 분들이었다, 이런 생각으로 생각의 흐름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 연구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책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며, 그래서 우리로서는 6·25 전쟁 연구가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계속해야 된다, 이렇게 봅니다.
 
 그런데 지난날 북침설이나 남침유도설을 전파했던 사람들은 지금도 뭐라고 얘기하느냐, 그 문서들을 못 봤던 것은 그때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공개가 안 되는데 어떻게 보느냐?, 그래도 내 입장은 변함이 없다, 나는 기본적으로 이 전쟁은 내전이었다는 것이다, 남침이냐 북침이냐, 그것은 중요하지 않고 민족 내부의 전쟁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나의 그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라는 책을 또 출판했습니다. 동아일보 제1사설(별지#1 참조 - 편집자註)이 그 입장을 통렬하게 비판을 했어요. 그런 역사인식을 버려라, 더 이상 세계와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을 기만하지 말라 라는 취지로 쓴 것입니다.
 
 ? 그래도 우리의 이 전쟁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연구는 계속되어야만 합니다. 어떤 각도에서냐 하면, 우선 김일성과 그 주변 세력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가 더 깊어져야만 됩니다. 아까 말씀 드렸던 제2기 때 나온 해석을 제시한 학자들은 오늘날에도 이렇게 말합니다. 흔히 남쪽에서는, “북한은 소련의 위성국가로 출발을 했다, 그것은 저 동유럽의 헝가리, 루마니아, 폴란드 , 여러 위성 국가들처럼 북한의 김일성정권도 하나의 위성국가로 출범했던 것이다” 라고 말하는데, “그거 아니다. 북한은 처음부터 자주적인 나라였다, 그 사람들은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정신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국가를 세웠다 이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소련군의 점령을 받긴 했지만, 그러나 조선의 정신을 지켜 나간 사람들이여서, 그 사람들을 동유럽에 비교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 학자들의 용어로는 김일성정권은 처음부터 자율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소련도 자율권을 존중해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북한을 처음부터 소련의 위성국가, 괴뢰정권, 이렇게 보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 이런 이론을 전개했던 겁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이른바 친북좌파세력 가운데 일부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어요. “봐라, 우리 남한은 미국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는 나라다, 그런데 북한은 처음부터 그렇게 자율성을 가졌던 나라다,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미국을 자주 간다, 왜 정통성이 없는 사람들이라 미국의 지시를 받아야 되니까, 그저 기회만 닿으면 백악관에 찾아가서 머리를 조아리고, 미국의 대통령이 몇 마디 지시해 주면 그걸 듣고 와서 또 정책으로 발표하고, 이게 남한의 실정이다, 그런데 북한을 봐라, 김일성이 어디 모스크바 갔다 북경 갔다, 그런 거 봤느냐? 가기는 간다 그래도 3년에 한번, 5년에 한번, 그저 이 정도로 가지, 늘 평양에 앉아 있는 게 이게 바로 자율성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글 쓴 사람들도 꽤 있어요. 이런 글들이 젊은 청년들에게는 상당히 다가옵니다. “우리는 자주성이 없으니까 백악관 자주 찾아가는데, 김일성이는 자주성이 있으니까 딱 버티고 있구나.” 이렇게 단순화되는 거예요.
 
 북한을 점령하고 있을 당시의 소련군 고위 사령관들의 회고록이 많이 출판됐습니다. 역사는 속일 수 없게 되어 있어요. 저도 그 회고록들을 보고 놀랬습니다. 그때 명령계통이 어떠했냐 하면, 모스크바에서 평양으로 직접 지시하기도하고, 그래서 그 경우에는 평양에서 모스크바로 직접 보고합니다. 그런데, 통상적인 경우에는 모스크바는 하바로프스크에 지시합니다. 그때 하바로프스크에는 연해주군관구가 있을 때입니다. 연해주군관구가 소련의 연해주 뿐 아니라 북한을 관할하고 또 남한을 관할은 못해도 관심 대상 지역입니다. 그 연해주군관구의 최고 실권자가 누구냐, 바로 스티코프입니다. 이 스티코프가 뒷날 북한에 정권이 세워지니까 초대 대사로 부임합니다. 아마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에는 스티코프가 미소공동위원회 때 서울에 온 모습도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그 스티코프가 연해주군관구의 최고 실권자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평양에 지시도 내리고 평양의 보고가 스티코프에 올라가면 스티코프가 본 다음에 모스크바로 보내는 겁니다. 우리의 상식적인 생각엔, 소련이 얼마나 큰 나라입니까? 소련이 한반도의 108배의 땅입니다. 지금은 줄어들었습니다만, 그러면 북한이라고 하면 한반도의 절반이니까, 소련 전체의 200분의 1 밖에 안 되는 땅이니까, 그저 얼핏 생각할 때는 그 작은 나라에 대해서 스탈린이 그렇게 매일 같이 보고를 받고 매일 같이 지시를 하겠나, 이렇게 생각이 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닙니다. 스티코프한테 스탈린의 지시가 자주 내려옵니다. 그러면 스티코프는 평양에 확인하고, 실제로 평양을 여러 번 왕래해요. 현장을 파악하기 위해서. 그 스티코프의 보고서, 스티코프 일기, 이것이 다 발굴이 되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읽으면서요, 많은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어요.
 
 우선 지금 제기되었던 문제, 과연 그때 북한이 자율성을 가진 나라였느냐?, 전혀 아닙니다.
 
 스티코프가 하바로프스크에 앉아서 김일성이 너 좀 와라하면, 김일성이 비행기 타고 갑니다. “그 사이 어떻게 됐어?, 토지개혁은 어떻게 진행 됐나?”, “아 그거 안 되겠어.”, 이렇게 해“ 그게 다 문서에 나와요. 심지어 1946, 47년에 북한에서는 선거가 실시되잖습니까? 그때마다 스티코프가 직접 평양에 오고, 진남포, 해주까지 다 시찰합니다. 시찰하면서, 여기 선거현수막 이거 바꿔, 이거 가지고 안돼, 심지어 김일성의 연설문을 자기가 고쳐 써줘요, 고쳐 써준 것을 김일성이 읽은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무슨 자율성이 있습니까? 이것을 모르고 그 때 북한은 자율성이 있었는데, 남한은 자율성이 없었고 ― 이건 그러한 원자료들을 보지 않은 사람들의 얘기입니다.
 
 제가 더 놀라웠던 것은, 공산통치라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더라고요. 황해도 해주에서 무슨 회의가 열렸어요. 그런데 그 회의를 할 때의 회의 계획서, 이것까지 다 북한점령군사령관에게 보고하더라고요. 국기 경례, 스탈린 대원수에 대한 인사, 그것까지 다 써 있어요. 누가 나와서 선동연설을 하면, 누가 박수를 치고, 그 시나리오까지 다 사령관 손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소련사령관은 그것을 보고 논평을 해요.
 
 미군이 남한을 통치하는 동안에 미국의 백악관이나 미국의 본국 정부나 미국의 펜타곤에서 서울의 한인들에게 한인들이 지방에서 개최하는 회의에 대해 사전에 보고하고 검열을 받도록 지시를 했다는 것이 지금 문서로 나온 게 없습니다. 소련은 그만큼 철저하게 북한을 장악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건 뭘 말하느냐, 그때 북한은 우리가 배워왔던 그대로 소련의 위성국가였고, 자율성을 가진 나라가 아니었다, 이것을 우리는 확인하게 됩니다. 또 그 뒤에도 무슨 남쪽에서는 대통령이 자주 백악관을 가는데, 김일성이는 딱 평양에 버티고 있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오늘날과 같은 국제사회에서는 그저 조그마한 문제, 큰 문제만 생겨도 정상들이 만나서 머리를 맞대고, 이것이 국정 운영의 방법이지, 우리나라 대통령이 매일같이 청와대에만 앉아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국가가 제대로 돌아가겠습니까? 요새 보세요. 요새 김정일이는 중국 찾아 가느라고 정신이 없잖습니까? 저게 무슨 자율성 있는 나라입니까?
 
 ? 우리는 우리 남과 북의 역사해석을 다시 열심히 해야 되겠고, 그다음에 우리 대한민국이 얼마나 정말 세우기 어려운 나라를 우리선배들이 피땀 흘려 세웠는가? 이것을 우리가 새롭게 인식해야 됩니다.
 
 해방 3년사를 공부하다보면, 그때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세워져야한다고 지지한 나라가 이 지구상에 거의 없었어요. 1943년 11월에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이른바 카이로 회담이 열리지 않았습니까?
 
 미국의 루스벨트, 중국의 장개석, 영국의 처칠, 거기서 카이로 선언이 채택되고, 그래서 그 선언에서 이제 코리안 피플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인 듀코스(in due course),’ 적절한 과정을 밟아 자유와 독립을 얻게 한다 ― 우리가 초등학교 때부터 배웠잖습니까? 처칠이 얼마나 공부를 많이 한사람입니까? 그런데 처칠이 뭐라고 한줄 아십니까?
 
 나는 그때 코리아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고 했어요. 그래도 루즈벨트가 코리아에게 독립을 줘야겠습니다 라고 제의해요. 처칠은 코리아에 독립을 준다는 말이 밖으로 나왔다가는 아시아에 있는 영국 식민지들이 독립을 달라고 할까봐 반대했습니다.
 
 그래도 루스벨트가 버텨서 코리아는 독립해야 한다는 취지의 한 구절이 들어갔던 겁니다.
 
 해방되고나서 대한민국이 세워질 때까지 모든 자료들을 보면 볼수록 그때 이승만과 같은 걸출하고 신념 있는 지도자가 아니었으면, 대한민국을 세우기 어려웠습니다. 그 어려움을 이겨내서 대한민국을 겨우 세운 겁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세워졌기 때문에 북한의 남침이 시작 되었을 때, 막아 낼 수가 있었고,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있으니까 미국이 도와주고 유엔이 도와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전쟁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바로 우리 민족의 근대사를 새로 연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에서 처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상과 부상, 즉 장관과 차관을 임명하잖습니까? 그 임명하는 과정도 소련 문서에 그대로 나왔어요. 평양에 있는 소련점령군사령부가 명단을 만들었어요. 상, 부상 다 만들어서 김일성이 불러서 맞춰봅니다. 이렇게 하자,
 
 그래도 김일성이 한 두 사람 더 추천하더라고요, 그러나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것을 모스크바에 보고해요. 그것을 스탈린이 봅니다. 봐서, 그래? 이렇게 했어? 아 그래 좋아 그렇게 해. 그래서 발표된 것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내각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에서 처음 초대 내각을 구성해서 발표할 때, 트루만이 그 명단을 봤다든가, 국무장관이 봤다던가,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 국내에서 일부 세력은 “대한민국은 무슨 미제가 만들어 낸 나라고 자주성이 없는 나라인데, 북한은 자주성이 있는 나라이다.” 이런 말이 어떻게 나옵니까?
 
 그런데 이런 식의 교육이 지금도 부분적으로 진행이 된다니 걱정스럽습니다. 그래서 저는 6·25 전쟁 61주년을 맞이하는 이즈음에 우리는 6·25 전쟁에 대해서도 더 깊이 있게 연구를 해야 되겠다. 지금 연구 안 된 분야가 참으로 많아요. 개별적인 전투에 대하여, 그리고 어떻게 그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는가? 등등 아직도 많은 주제들이 남아 있습니다. 호국하신 분들에 대하여 국민이 감사할 줄 알고, 최근에 보면, 우리 정부가 6·25때 전사한 병사들의 유해를 발굴해 내고, 국립현충원에 모십니다. 잘하는 겁니다.
 
 그래서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 국가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사람들을 존중할 줄 알아야, 그래야 뒷날 또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 자기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람들이 뒤를 이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6·25 전쟁이 미제국주의가 일으킨 것에 남조선이 뒤따라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가르쳐서야 누가 그 전쟁에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존경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6·25 전쟁의 성격도 분명하게 규명을 하고, 그래서 제대로 다음 세대에 가르쳐 주고, 그래서 다시는 이 땅에 6·25전쟁과 같은 남침전쟁이 일어나지 못하게끔 우리가 경각심과 마음의 자세를 새롭게 해야 됩니다.
 
 전쟁의 형태가 달라 질수 있는 거예요. 9·11 테러가 뭐였습니까?
 
 전쟁의 개념을 새롭게 바꿔 놓은 것 아니겠습니까? 북한도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 터이니까, 다시 6·25 남침전쟁과 같은 것은 못할지라도, 여러 가지 새로운 전술, 전법을 개발하고 거기에 필요한 요원들을 길러내고 있을 터인데 여기에 우리가 경계심을 이완시켜서는 안 되겠습니다. 특히 문제는 핵무기입니다. 지난번 일본에서의 핵 원전이 뭘 보여 줍니까? 관리만 잘못해도 야단나는 겁니다. 북한이 우리한테 핵무기를 안 쓴다 하더라도 저 사람들이 핵시설의 관리를 제대로 못하면 그 재앙은 우리 모두에게 곧바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6·25전쟁은 그 자체로서 깊이 공부하되, 그러나 앞으로 북한이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새로운 형태의 전쟁에 대해서도 미리 깊이 공부하고 거기에 대비하는 이러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이제 제2의 6·25를 막고, 이 땅에 평화를 뿌리 내리게 하는 정책이 아니겠는가 하는 말씀으로 오늘 제 발제를 끝내겠습니다.
 
 여러분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