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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의 英雄: 레이몬드 G. 데이비스 대장

淸山에 2011. 11. 20. 14:50

 


 
 
 
장진호 전투의 英雄: 레이몬드 G. 데이비스 대장
 
 
 아무런 代價를 바라지 않고 韓國戰爭에 참전한 '역전의 용사'
金泌材    
 
 
 

1915년 1월13일 조지아州 피츠제럴드에서 태어난 레이몬드 G. 데이비스 장군(Gen. Raymond G. Davis, 사진)은 1938년 조지아 공대를 졸업 후 해병대 소위로 임관한 인물이다.
 
데이비스 장군은 2차 대전 당시 태평양 전선 과다카날과 펠릴리우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며, 치열한 공방전 끝에 자신이 지휘하던 대대 소대장 전원이 戰死 및 負傷을 당했다.
 
6.25전쟁 발발과 함께 한국전쟁에 참전, 1952년 美의회의 이름으로 대통령이 수여하는 최고 훈장인 ‘Medal of Honor’(명예훈장)를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6.25전쟁 당시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최고훈장’을 수여했다. 월남전에 참전하기도 했던 장군은 제3해병사단을 지휘, 1969년 ‘수훈훈장’등 총 20여개의 훈장을 수여 받아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6.15 전쟁당시 美 제1해병사단 소속의 중령으로 참전한 데이비스 대장에 관한 일화가 있다.
 
당시 중령이었던 데이비스는 1950년 8월 21일 아침 한국으로 파병되기 전 캘리포니아 州 팬들턴 출두명령을 받았다. 출두명령 2시간 후 美제7해병연대 1대대장으로 임명되었으나 대대 요원은 불과 수명밖에 없었고, 대대 막사로 예정된 천막에는 아무도 없었다.
 
데이비스 중령은 기간요원을 모아놓고 대대장으로서의 첫 번째 훈시를 하게 되었는데, 그의 훈시(訓示)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개 대대를 편성하는데 1주일 여유밖에 없다. 우리의 생애에서 이와 같은 중대한 책임을 맡게 된다는 것은 그렇게 흔히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대원의 60%는 예비역이다. 그 중에는 2차 세계대전당시 歷戰의 용사도 있지만 대부분은 경험 없는 예비역이다. 이들에게 전투준비를 시키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이것이 잘못되면 이들을 헛되이 죽게 하는 결과가 된다. 하루는 24시간뿐인데 우리는 그 24시간을 전부 사용해야 한다.”
 
이후 데이비스 대대장이 이끄는 美제7해병연대 1 대대는 1개월 후 인천에 상륙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반전된 1950년 11월24일, 맥아더 원수는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을 끝내겠다며 ‘크리스마스 대공세’를 명령했다.
이에 따라 美 해병대 1사단이 장진호 쪽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기사본문 이미지
조국과 가족을 그리워하며 쓰러져간 장진호 전투 참전 美해병대원들의 모습. 

그러나 이때 이미 중공군 9병단이 몰래 장진호 일대에 들어와 있었다. 9병단은 美 해병대 1사단이 내륙 깊숙이 들어오도록 허용한 후 크게 포위해 공격했다. 뒤늦게 사지(死地)에 들어왔음을 알게 된 美해병대 1사단은 방향을 바꿔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데이비스 중령은 중공군에 의해 고립된 해병중대를 구출하기 위해 부대를 인솔했고, 결과적으로 美 제10군단이 성공적으로 1950년 흥남 철수를 실시할 수 있도록 결정적으로 중요한 산악통로를 개통시켰다.
 
이후 美해병대 1사단은 결사적으로 포위 추적하는 중공군과 매서운 추위, 그리고 엄혹한 굶주림 속에서 상당수 대원을 잃고 간신히 흥남으로 빠져나왔다.
 
미국 전사(戰史)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중 하나로 기록된 장진호 전투에서 美해병대 1사단이 중공군 12만 명을 막지 못했다면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뀌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전투의 한 가운데에 데이비스 장군이 있었다.
6.25 전쟁이후 미국에서는 장진호 전투에 대한 수기(手記)가 여러 차례에 걸쳐 출판되었으며, 전투의 생존자 모임인‘초신 퓨(Chosin Few)’라는 단체까지 생겨났다.
 
장군은 여생을 불우한 재향군인을 돌보는 일과, 韓美 유대강화를 위해 헌신했다.
특히 워싱턴 소재 한국전 참전용사 위령공원 건립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한국전쟁 50주년 기념사업회’회장직을 수행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인 ‘자유 향유의 대가’에서 한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자유를 위하여 싸우는 사람은 혹독한 고난과 영웅적인 희생을 통해 강력한 힘을 향유하는 것이며, 평화란 진실로 힘을 통해서만 가능해 지는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만을 고집하던 자들의 목소리가 국민의지를 약화시켰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6.25 전쟁당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수많은 한국민을 공산군으로부터 구출하여 자유를 찾게 한 美 해병대 예비역 대장 레이몬드 G. 데이비스 대장(Gen. Raymond G. Davis)은 지병인 심장병으로 2003년 9월3일 조지아州 칸여스 소재 카운티 병원에서 永眠했다. 
 
 
김필재(金泌材)
 spooner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