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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시간 사투… 인생 깨달음일까, 영웅의 귀환일까

淸山에 2011. 3. 18. 19:23
 

 

 
 
 

※ 아래 영화 칼럼은 인터넷신문 www.grassrooti.net (◀ 클릭)에 게시된 기사입니다.

 

127시간 사투… 인생 깨달음일까, 영웅의 귀환일까

 

바위와 협곡사이에 낀 팔을 잘라내다 ▶ 127시간

 

※ 아래 칼럼은 시사회 후기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불굴의 의지로 생사를 건너는 사람들의 이야기

 

미지의 세계에 도전해 개척하고 극한의 과정을 극복하는 것을 알피니즘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해 정상에 오르거나 설사 정상에 이르지 못했어도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간한계를 넘어선 산악인들을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진정한 등반의 가치를 몸으로 증명해 냈기 때문입니다.  

 

지난 2005년 히말라야 촐라체 북벽을 등정했다 손가락 9개와 발가락 10개를 모두 잘라낸 최강식씨와 손가락 8개와 엄지발가락 2개를 잃어버린 박정헌씨의 이야기를 소설로 녹여낸 박범신의 <촐라체>는 바로 그 경이와 감동의 기록입니다.

당시 줄 하나로 서로의 몸을 연결한 ‘자일파티’로 하산하던 강식씨가 23m 아래 크레바스에 빠져 두 다리가 부러지고, 정헌씨는 어깨와 허리 그리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극한의 상황에 놓입니다.

 

자일을 끊고 혼자라도 살고 싶으면서도 후배를 버릴 수 없다는 유혹과 갈등 속에 정헌씨는 강식씨를 끌어 올려 크레바스를 탈출합니다. 하지만 살인적인 추위의 촐라체는 그들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앗아 갑니다. 그럼에도 둘은 여전히 히말라야 설산을 오릅니다. 도려낸 손가락과 발가락 끝에서 새살이 돋아 나오듯, 살아 있는 한 산악인으로서의 삶은 매듭 지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삶을 향한 불굴의 의지로 생사를 건너온 이들처럼, 극한의 상황에서 삶으로 귀환한 실화가 17일 개봉됩니다.

 

 

2003년 미국 유타주. 친구와 함께 스포츠용품 판매점을 운영하던 아론 샐린턴(제임스 프랭코)은 블루 존 캐니언 단독 등반에 나섭니다. 좁디좁은 협곡을 능란하게 탄 뒤 암벽 사이에 낀 바위를 딛고 내려가려던 순간, 바위가 밑으로 떨어지고 아론도 함께 떨어지면서 바위에 암벽 사이에 팔이 끼고 맙니다. 어이없는 모습으로 자신의 팔을 보는 아론과 동시에 영화의 타이틀 <127시간>이 스크린에 적시됩니다.

 

양 어깨보다 겨우 반 폭 더 넓은 협곡 위로는 눈부시게 파란 하늘이 떠 있고 두 발은 간신히 돌덩이를 딛고 있습니다. 그가 지닌 거라곤 산악용 로프와 등산용 칼, 헤드렌턴, 캠코더 그리고 500㎖ 물 한 병과 약간의 간식거리가 전부입니다.

 

영화의 원제는 Between a Rock and a Hard place. 카메라는 바위와 암벽사이에 팔이 낀 절망적인 상태에 처한 아론이 자신과 가족과 친구 등 ‘그간의 관계’를 수십 번 곱씹고 성찰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 ‘127시간’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놓는 시간이자 삶에 대한 깨달음의 시간이며,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 관해 질문하는 날것 그대로의 생생한 시간입니다.

 

만약에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영화의 공간과 시간은 단순합니다. 하지만 생각거리는 제법 풍성합니다. 실화가 주는 생생함이 클로즈업될수록 풀샷으로 관망하던 관객들이 서서히 주인공 자리를 꿰차려하기 때문입니다. 관객들은 아론이 바위에 팔이 끼인 순간부터 “만약에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자문하고, 이에 대해 대니 보일 감독은 26살 청년 아론의 인생을 주마등처럼 흘려보내며 찬찬히 화답합니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리며 팔을 빼내려하지만 요지부동. 왼쪽 어깨로 바위를 치고 머리를 밑으로 집어넣어 밀어 올리며 악도 써보지만 꿈적도 하지 않습니다. 입으로 왼손의 시계를 푼 뒤 스톱워치를 눌러 시간을 재기 시작합니다. 도와 달라며 애타게 외쳐보지만 그의 절규는 그랜드 캐니언의 거대한 위용 속으로 소리없이 빨려 들어가 버립니다. 

 

배낭에 있던 장비들을 하나씩 바위위에 올려놓고 캠코더를 작동합니다. 등산용 칼을 집어 헤드렌턴을 켠 채 팔에 마비가 올 정도로 바위를 쪼아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계란으로 바위치기일 뿐, 간에 기별도 가지 않습니다. 로프를 위로 던져 몸을 공중에 매달고 잠을 청하는 사이 협곡에서 벗어나 훨훨 날아오르는 꿈을 꿉니다.


12시간이 지난 이튿날 아침. 협곡 위 뻥 뚫린 하늘 위로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가고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아닙니다. 이른 아침 창문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 온 햇살이 잠자는 이들을 깨우듯이, 갇힌 협곡 뒤로 한 줄기 햇살이 찾아듭니다. 왼발과 왼손을 뻗어 햇살을 움켜쥐면서 아론은 유년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회귀합니다. 그랜드 캐니언에서 아빠와 단 둘이 맞이했던 일출의 놀라운 광경 속으로.

 

아직까지 영화는 아론과 관객 간에 일정한 간격을 둡니다. 아론과 관객이 동일시되는 감정이입의 단계로 나가기엔 아직 이르다는 것입니다. 아론 자신의 시선이나 그의 사건을 기록하는 카메라의 시선이 아닌 관객의 시선은 여전히 어두운 객석에 몸을 숨긴 채 협곡을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이 바닥을 드러내고 체력은 고갈되어 가는 데도 티끌 한 점 변화가 없으면서, 상황은 긴박해집니다.

 

자신의 오른팔을 쥔 채 진저리를 치는 관객들

 

24시간이 지난 뒤 아론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캠코더로 기록을 시작합니다. 그 와중에도 지프에 두고 온 오렌지 주스가 간절하게 떠오르는가 하면 각 얼음에 묻어둔 차디 찬 맥주와 콜라를 마시는 환각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 듭니다. 물은 바닥에서 찰랑거리고 대신 수통에 오줌을 받아 채웁니다. 그가 먹을 수 있는 거라곤 눈에 낀 콘택트렌즈와 오줌뿐입니다.

 

72시간이 지나면서 출발하기 전 엄마에게서 온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어린 시절 피아노 치는 동생을 비디오카메라로 찍으며 행복했던 시간이 되살아나고,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이들이 말없이 그를 바라보는 환영이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지금은 떠나버린 여친과 사랑을 나누던 아득했던 환각과 현실을 오락가락 하지만 정작 그가 꿈꿀 수 있는 것은 매일 아침 협곡 위를 날아가는 까마귀의 자유로운 비상(飛翔) 뿐입니다. 

 

96시간이 지나면서 협곡에는 절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웁니다. 희망에 대한 절박함은 경쾌한 호들갑으로 아론을 치환시킵니다. 그리고 캠코더로 1인 방송을 하며 ‘나란 인간’과 ‘그간의 관계’에 대해 화해를 청합니다. 그것은 엄마 아빠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후회이며, 여친이 이별을 고한 뒤 “너는 외로운 사람이 될 것”이라고 했던 말에 응축된 저간의 삶에 대한 반성입니다.

 

또한 그것은 하루 18분 동안만 허락하는 햇살의 따사로움에 대한 겸허함이며, 푸르게 열린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로 타는 목을 적시는 것에 대한 감사함이며, 살아 있다는 것 그 자체에 대한 행복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바위와 암벽사이에 끼인 127시간의 깨달음은 늘 자신이 먼저였던 이기적인 삶에 대한 그의 독백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그리고 127시간. 이윽고 캠코더 배터리가 수명을 다하고 아론은 등산용을 칼을 꺼내 썩어가는 살과, 힘줄과, 뼈를, 잘라내기 시작합니다. 그와 동시에 관객들은 자신의 오른 팔을 움켜 쥔 채 진저리를 치며 객석에서 걸어 나와 아론과의 동일시를 완성합니다. 

 

영웅 만들기의 배후에 도사린 한국 사회의 국가주의

 

아론의 극적인 생환은 CNN을 비롯한 방송매체를 통해 미 전역에 보도되고 그는 하루아침에 영웅이 됩니다. 127시간 동안 기록했던 사진과 캠코더와 깨달음을 모아 책으로 출간하고 돈방석 위에 앉았습니다. 꺾이지 않는 의지로 자신의 팔을 잘라 삶을 구한 그의 생존기는 뭇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예의와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니까요.

 

그럼에도 영화는 헛헛한 마음을 감출 수 없게 만듭니다. 삶에 대한 보다 깊은 성찰이나 인물에 대한 관조 대신 피상적인 회한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서만은 아닙니다. 할리우드의 영웅 만들기 공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시공간을 넘나드는 플래시백 기법과 역동적인 카메라와 몽환적인 장면 전환 등은 아론을 영웅의 귀환’으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 영웅 만들기는 지난해에 한국에서도 있었습니다. 산악인 오은선의 히말라야 14좌 완등입니다. KBS와 조중동이 앞장서서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 영웅이라고 추켜세우고, 이명박 대통령은 도전을 이뤄낸 인간승리이자 쾌거라며 축전을 띄웠으나 완등 여부에 대한 의혹이 불거졌고 결국 신화는 깨졌습니다.

 

축구나 육상처럼 계량화되거나 기록경쟁이 될 수 없는 고산 등정은 인간한계에 대한 도전의 역사입니다. 그럼에도 브랜드가 필요했던 자본과 영웅이 필요했던 매스컴은 14좌 완등이라는 이벤트를 합작해 연출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웅 만들기의 배후에는 세계 최초와 최고라면 어쩔 줄 몰라 하는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국가주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촐라체의 박정헌씨는 생환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산이 높아 다른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던 나에게 하나 같이 고귀한 다른 사람들의 산이 보였다”고. 올해 9월에 패러글라이더를 타고 2400㎞에 이르는 히말라야 산맥을 횡단할 계획을 세워 놓은 그에게 인생은 ‘마음속의 산을 등반하는 겸허함’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말처럼 길이 끊기고, 없어진 곳에서도 다시 시작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산악정신이며,

인생에 대한 깨달음 아닐까요?

 

(2011년작, 대니 보일 감독, 2월 17일 개봉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