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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년 전 히틀러보다 4일 먼저 태어난 "위대한 독재자"

淸山에 2011. 2. 17. 13:08

 

 
 
120년 전 히틀러보다 4일 먼저 태어난 "위대한 독재자"
 
 
"The Great Dictator" - "The Great Dictator"
- Posted by ccooffee -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히틀러보다 4일 먼저 태어난 "위대한 독재자"

 
 그의 이름은 "찰스 채플린"이라고 한다.

 

 

 
 



-- Charles Chaplin Spencer, Jr., KBE --

올해로 그의 탄생 120년을 기리며
그의 생애와 그가 인류에게 남긴 위대한 전 작품을 여기에 소개하기로 했다.



영화 방랑자(Tramp)에서...


찰스 스펜서 채플린 경(애칭:챠리, Charles Chaplin Spencer, Jr., KBE, 1889.4.16-1977.12.25)
영국 영화배우.영화감독.코메디언.각본가.작곡가.영화 프로듀서이다. 

세계 영화 여명기에 수 많은 영화를 만들어 "희극왕"이란 별명도 얻었다. 

각종 미디어를 통해
지금도 언제나 그의 모습이나 그의 작품에 접근하기 용이하다. 



 
Buster Keaton                                                Harold Clayton Lloyd


버스터 키톤(Buster Keaton, 1895-1966, 미 희극배우.영화감독.각본가)
헤롤드 로이드(Harold Clayton Lloyd, 1893-1971, 미 코메디아언)과 함께
"세계 3대 희극왕"으로 불린다. 


나치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4.20-1945.4.30)를 조롱한
영화 "The Great Dictator"(위대한 독재자)로 유명하기도 하며
그 영화의 모델인 히틀러보다 생년월은 같은 1889년4월로 채플린이 4일 빠르게 태어났다.








      유년기의 챠리
      
 
부모는 뮤직홀의 엔터테이너였으나 챠리가 1살 때 이혼.  
11년 뒤에 부친은 알콜중독증으로 죽었다. 
모친 "한나 빌"(Hannah Hill)도 정신병을 알고 있어 시설에 수용되었다. 

가난한 밑바닦 생활에 쫒기는 챠리는
4살 위의 사촌형과 고아원이나 빈민 구제원을 전전하며
신문 등 판매원을 경험하면서 뮤직홀에서 팬트마임(Pantomime)극 등을 연기하며 일가를 도왔다.
 

10살 때에는 댄스를 전문으로 하는 극단에 입단하여 수업에 정진했다. 








할리우드의 채플린    

1809년 형의 권유로 명문 프레드 카노(Fred Karno) 극단에 입단
술주정뱅이 연기로 두각을 나타낸다. 

1913년 카노극단의 두번째 미국 순회공연 때는 "키스톤 코프"(Keystone Kops)의
유명한 프로듀서 마크 센네트(Mack Sennett)의 눈에 들어
주급 150 달러에 계약. 

희극배우로서 제1보를 내딨게 된다. 
1914년 영화 데뷰 첫 해에 만 34편의 단편에 출연. 



 
Mabel Ethelreid Normand                                                      Roscoe Conkling


당시 이미  키스톤 스튜디오(Keystone Studios)의
1910년대 무성영화 전성기의 대표적인 코메디안느(comedienne)의 톱스타였던
메벨 노먼드(Mabel Ethelreid Normand)나
희극배우 "뚱보" 로코스 애버클(Roscoe Conkling -Fatty- Arbuckle) 등과 함께 공연하여
순식간에 인기자로 변신했다. 

1915년 시카고 엣사나이 스튜디오(Essanay Studios)로 이적하여 주급 1,250달러. 

여기서 14편의 단편을 감독.주연했으며
더욱이 1916년 주급 1만 달러에 보너스 15만 달러라는 파격적인 계약금으로
뮤츄얼 필름(Mutual Film)으로 이적. 

여기서는 제작의 자유가 보장되어
보나 나은 환경에서 12편의 걸작을 세상에 내놓았다. 

1918년 자신의 촬영 스튜디오를 직접 설립하여
한 편 한 편마다 시간과 노력을 공들였다. 

퍼스트 내쇼널(First National, 뒤로 Warner Bros.와 합병)과 연간 100만 달러의 계약을 맺으므로 일약
세계적인 톱스타로. 



Douglas  Fairbanks                     Mary Pickford                        David Llewelyn Wark Griffith
 

1919년에는 절친한 친구
미국 출신 Douglas Fairbanks(본명:Douglas Elton Thomas Ullman)
캐나다 출신 Mary Pickford
그리고 미국 출신 David Llewelyn Wark Griffith와 함께
배급회사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United Artists Entertainment LLC,
약칭:UA. 현재 Metro-Goldwyn-Mayer Inc.,MGM의 산하 기업
)를 설립했다. 

1918년 건설된 "채플린 스튜디오"와 합쳐
자유롭게 영화제작이 가능하도록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공산주의 챠리  

챠리는 사이렌트 영화(Silent film or Silent Movie, 무성영화) 시대까지만 해도
상당히 독창적.창조적(Creative)인 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완벽주의로도 알려진 배우로서도 물론
프로듀서.각본가.디렉터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자신의 영화를 위해 작곡가까지 소화해 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전의 1936년 제작된
"모던 타임"(Modern Times) 작품에서부터
첨예한 "좌우 양파벌"의 심한 공격을 받게 이르렀다.   

이전 1932년에는 일본 방문기간 중에 발생한
국수주의자 장교에 의한 구데타 미수 사건으로 불리는
 "5.15사건"에서는 "일본에 퇴페문화를 흘린 원흉"으로서 주모자에 의한
"채플린 암살 미수사건"이 획책되었었다.  

더욱이 대전 전후의 전쟁
혹은 파시즘을 비판하는 그의 작풍이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소비에트 연방을 시작으로하는 동측제국과의 냉전이 시작된 미국에서
"용공적이다!"(容共的)라고 받아 들여졌다. 

이 때문에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특히 1947년 공개된 "살인광 시대"(Monsieur Verdoux) 이후에는
신랄한 비판(bashing)이 최고조에 달해 1950년대에 들어서 공화당 상원의원이며
반공산주의자 운동의 공격적 선봉장 조셉 맥커시(Joseph Raymond "Joe" McCarthy=McCarthyism)의
지휘 하에 공산주의자 소탕을 실시하는 "상원 정부활동위원회 상설 조사소위원회"에서
그의 "용공적이다"(容共的)라고 지적한 배우와 감독과 함께 수 차례나 소환명령을 받게 되었다. 



Verona Artista di strada in veste di Charlot Chaplin


그러나 그런 가운데 1948년에
프랑스 "영화 비평가 협회"는 그를 노벨 평화상에 추천했다.  

그 뒤로 1952년에 라임 라이트(Limelight)의 런던 프리미어쇼를 위해 영국으로 향하던 중에서
트르먼 정권의 법무장관으로부터 사실상 국외 추방명령을 받아
그 결과 자신의 뜻과는 무관했으나
스위스 로잔느 미국 영사관에 재입국 허가증을 반납하여
자신의 명성과 부와 성공을 가져다 주는 데 원동력이 된 미국과 결별한다. 

1954년에 세계 평화 협의회는 그에게 "평화 국제상"을 추서했다. 

미국을 떠난 챠리는
영화 사업은 거의 줄었으나
한편으로는 세계적인 명사로 존경받아
새로운 거주지로 정착한 스위스의 자택에는
루마니아 출신 피아니스트 Clara Haskil
  스페인 첼로리스트 Pau Casals
프랑스 전위 예술가 Jean Cocteau(장 콕토)
그리고 일본의 국제적인 가수.여우.정치가 야마구찌 요시꼬(山口 淑子, 홍콩영화 李香蘭에 출연
,
夜來香/蘇州夜曲/支那の夜) 등의 거물 인사가 방문하여 교우관계를 깊이했다. 


 
  Pau Casals                                                     山口 淑子


 
Clara Haskil                                                      Jean Cocteau


미완으로 끝났으나
"The Freak"라고 하는 날개돋힌 소녀가 여주인공의 영화화에 여념이 없었다. 

1965년에 유럽의 문화.사회.사회과학에 공헌을 평가하여 매년 수여되는
"Erasmus Prize"을 수여.
(상의 명칭은 르네상스 네덜란드 출신의 인문 주의자 Desiderius Erasmus에 유래)  

이 무렵 발간된 "나의 자서전"은 공전의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Officier medal of the French "Legion d'honneur" 

1971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프랑스 훈장 중에 가장 명예로운
 레지옹 도뇌르(ordre national de la Legion d'honneur) 추서.
 
   
               




사족(蛇足) :  미국내 공산 주의자와 소비에트의 관계  

당시에는 미국의 이데올로기(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 등)에 소련의 공산주의 사상이
요소요소 깊이 침투하고 있었다. 

영화산업에도 그 영향은 많이 미쳤으며
전 미국 대통령 로럴드 레이건도 할리우드의 배우시절 공산주의자와 사상 싸움으로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소련과 힘의 경쟁우위 정책을 쓰기도 했다.   





다음의 기사는
전후 반세기가 지나 KGB 내부의 자료에서 상세히 밝혀진 첩보활동의 실태와
미국 공산주의 협력자가 걸어 온 인생을 "Spies"(From Russia With Love)라는 소설에서 다루었으며
여기에 추가로 좀 더 그 내용을 소개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 소설의 기획 실현에는
전 KGB 요원 출신 Alexander Vassiliev의 존재가 크게 작용했다.      

         <><><><><><><><><><><><><><><>

         "Spies"(From Russia With Love)

          1933년 미국과 국교정상화를 수립하자
소련의 첩보기관은 곧 프로 스파이를 각 대사관과 영사관에 잠입시켰다. 

미국의 국가기밀은 갑짜기 모스크바로 흘러들기 시작했다. 
미국은 당시 첩보활동은 물론 국내의 공산주의자가 소련형 사회주의에 얼마나
기울고 있는지에 대해 거의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소련은 그 틈을 노렸다. 

전 국방장관 데이빗 서몬과 같이
돈 때문에 대량의 국가 기밀정보를 소련에 팔아 넘긴 협력자도 있었다. 
소련의 협력을 부정해 온 전 국무성 고관 알져 히스는 위증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한편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계획을 이끈 로버트 오펜하이머마저
KGB와 공모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원폭관련의 정보를 누출한 쥬리어스 로젠버그(Julius Rosenberg)에 대해서는
KGB가 관계한 새로운 첩보활동의 증거가 밝혀졌다. 

로젠버그의 주요한 협력자로 기술자였던 럿셀 마그넛트의 존재가 드러났다. 



 
Haynes and Klehr offer extensive information about the work Julius Rosenberg,
pictured with wife Ethel, did for the KGB


로젠버그는 1953년 처와 함께 사형에 처해졌으나 마그넛트는 2008년까지 살아 있었다. 
이 책자의 저자가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2007년에는 은퇴생활을 만끽했다고 한다. 
당연한 이야기기로 마그넛트는 취재를 거부했다.

이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사건은
하버드 대학 출신으로 30년대에 국무성 중남미 부문을 지휘한 "로렌스 다건" 사건이다. 
공산주의자를 신봉한 다건은 자신의 스파이활동에 의해 일신을 망치는 것을 두려워하며 살아 온 인물이었다. 





New Book Claims Ernest Hemingway Was A Soviet Spy


1948년12월 미 연방조사국 "FBI"의 사건청취를 받은 직후
다건 앞으로 KGB 첩보요원으로부터 연락처의 변경을 구하는 전언을 받았다. 
그 5일 뒤에 다건은 맨해턴의 16층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다. 
43살의 젊은 인생이었다. 
처와 4명의 자식을 남긴 채...  

이 책에는 30-40년대에는 500명 이상의 미국인 시민이
어떻게 소련의 첩보기관에 협력했는가 선명히 밝혀졌다.  

또한  구소련 국가보안 위원회 "KGB"나 적군 참모본부 정보국 "GRU"과
손을 잡은 많은 미국인은 국내외에 산재한 공산주의자를 지원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때에 따라 역사를 좌우하는 사건에 관계하면서
한편으로는 스파이적 자극에 넘치는  - 이 소설에서는 -  인간 드라마를 였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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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vey Klehr

출전 :
Spies(The Rise and Fall of KBG in America : From Russia With Love)
By John Earl Hayres, Harvey Klehr, Alexander Vassiliev, Yale Universty Press,
704pp, USD35.00.         
필자 : 캠브리지 대학 상급연구원
1987년 퓰리쳐 전기부문에서 수상하였으며 전후의 첩보활동에 관한 저술을 다수 남겼다.
  
  
   







채플린! 다시 아메리카로...     

1972년 아카데미상 수여식에 출석하기 위해 20년만에 아메리카 땅을 밟았다. 

이것은 그가 세계 영화에 끼친 위대한 불후의 업적을 치하기 위한 한편
공산주의자의 누명에 대한 보상과 은사였다.     
      






                          

             세기의 광대, 챠리 영원히 잠들다!                 
      
1975년에는 그때까지의 영화활동을 평가한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나이트 작위를 수여
찰스경(Sir Charles Spencer)이 되었다. 

그러나 공산주의 사상과  끝없는 헐리우드 여배우와의 스캔들문제 등으로
서훈이 상당히 늦어졌음을 알 수 있다. 







Statue of Sir Charles Spencer Chaplin, Jr., in Vevey Switzerland, Suisse   


1977년 크리스마스의 아침
매상으로 세계최대 식품 메이커 네슬레(Nestle S.A.) 본사가 있는
인구 약 1만 6,000명의 작은 도시 스위스 베베이(Vevey)의 자택에서 영면했다.
88세였다. 

사후 금전목적으로 묘에서 유해가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발생했으나
유해는 묘지근처의 옥수수밭에서 발견되었다. 

복수 범임에 의한 범행으로 추측했으나
폴란드와 불가리아의 2인조가 체포되었다.
 





레만호반(Lac Leman)





베베이의 레만호반(Lac Leman)에는 찰스경의 동상이 건립되어
                주위의 경관과 조화를 잘 이루어진 관광 명소의 한 곳으로 유명하다.                
   


※ 2010년4월28일 스위스의 "24 Wall"에 따르면, 스위스의 관광명소 레만 호반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의
채플린 동상에서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지팡이가 이번달 초에 도난당했다고 한다. 1982년 설치된 동상의 지팡이는
1989년에 처음으로 도난당한 뒤로 몇 차례 도난피해를 입고 있다.





찰리 채플린의 작품의 특징   

Ⅰ찰리 채플린의 캐릭터   
채플린의 가장 잘 알려진 역은 "작은 방랑자"(The Little Tramp)이다.     
거북하고 부자유스런 웃도리에 털털한 바지에 지나치게 커다란 신발
중산모(Bowler hat) 모습에 대나무 지팡이(Wand)
그리고 "독재자 특유"(?)의 콧수염의 인물로
오리와 같이 다리를 크게 벌려 걷는 게 걸음"의 특징. 

어디로 보나 홈레스(Homeless, 노숙자)임에는 틀림없으나
어딘가 신사의 풍채와 위엄을 겸비
우아한 주특기의 동작과 반골정신은 부르조아를 야유하며
권력에도 아랑곳없이 웃음으로 날려 보낸다. 

이 독특한 분장의 캐릭터는
1914년의 2번째 작품 "베네치아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Kid Auto Races at Venice)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다. 
※챠리 자신도 처음에는 반응을 기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뒤로 Tramp는 해학(골계)적 영화 가운데서도 페이소스(pathos, 애수)를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로 진화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정성(heartful)이란 요소가 가미되어
약자.빈자(프로레타리아)의 입장에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불평등의
"분노"를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Ⅱ 챨리 채플린의 작풍  
초기에는 짧은 작품이 중심으로
방랑자(The Vagabond)의 캐릭터와 같이
마음 부드러움 보다는 코믹컬과 비정함을 주체로했다.

일개의 빈곤계급의 시민으로써 당시의 세상이나 정부를 풍자한 것이 많았고
웃음 속에는 사상적으로 일체의 정치적인 조직·권력 따위를 부정하는 것을
아나키스트적(Anarchism, 무정부주의적) 요소를 추구하는 작품이 주류였다.
(마치 여자를 닮아 툭하면 싸우고, 주위와 트러불은 끊이지 않고
마지막에는항상 거짓 신분이 들통나 경찰과 숨박꼭질이라는 패턴) 

1917년 자립 재정/용감(Easy Street), 이민(The Immigrant)의 무렵부터
휴머니즘(humanism)의 요소가 현저히 나타난다. 

1918년의 개의 삶(A Dog's Life)에서 잘 알려진 "마음씨 좋은 방랑자"가 완성된 뒤로
어깨 총(Shoulder Arms)에서는 전쟁의 어리석음을 유머로 그렸으며
첫 장편에 해당하는 키드(The Kid, 1921)
알래스카를 무대로 한 황금광 시대(The Gold Rush, 1924)에 그 예술성이 최고점에 달했다. 




waterville town in County Kerry, Ireland



또 등지고 혼자 쓸쓸하게 사라지는 라스트신은
초기의 방랑자(The Tramp, 1915)에 처음으로 등장한 이래의 정석이었으나
 이것은 에드나 퍼비앤스(Edna Purviance)를 만나고서부터 창출된 것이라고 한다. 

이후로 아름다운 것에 대한 동경과 "방랑자의 눈빛"이 왜곡된 사회로 향하게 되면서
그 작풍도 크게 변하게 된다.  

헌신적이며 오직 한결같은 사랑을 그린 시티 라이트(City Lights, 1931)와 라임라이트(Limelight, 1952)
대불황 속에 발버둥치는 노동자의 실태를 통해서 행복의 실상을 그린 모던 타임즈(Modern Times, 1936)
반전 메시지를 포함한 이색의 불랙코메디 살인광 시대(Monsieur Verdoux, 1947)
혁명에 의해 나라를 쫒긴 뉴욕의 왕(A King in New York, 1957) 등등.
    
     



첼로를 켜는 채플린




에드나 퍼비앤스(Edna Purviance, 1895?1958)
무성영화 시대의 영화 여배우. 챠리의 영화에 챠리의 상대역으로 많이 출연
8년간 그의 작품에 약 35편에 출연했다. 

1915년 챠리가 엣사나이(Essanay Film)과 계약하여
촬영소에서 두 번째 영화 "A Night Out"을 촬영하고 있었다. 



Edna Purviance


챠리는 이 작품의 상대역으로 여배우를 찾고 있을 때에 스탭의 한 사람이 에드나를 소개한다. 

챠리는 그녀와 면회했으나 그녀가 희극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결국 그녀를 채용하였다. 
챠리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이 뒤로는 거의 대부분의 작품에 공연.등장하게 된다.  

챠리와 에드나는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자타가 인정하는 애인관계에 있었다. 
에드나가 출영한 마지막 작품은 파리의 여인(A Woman of Paris, 1923)으로 그녀의 첫 주연작품이었다. 

이 뒤로 그녀는 두 번 영화에 출연했다. 

첫 번째는 1926년 챠리가 프로듀스한 "The Sea Gull"(갈매기)와
"A Woman of the Sea"(바다의 여인)에서 또 다시 주연으로 연기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한 번도 일반에 공개된 적이 없으며
현재 이 필름의 존재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27년 공개된 프랑스 영화 "Education de Prince"(왕자의 교육)을 마지막으로 에드나는 은퇴했으나
챠리는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채프린 스태이지오 전속 여배우"로서
매주 150달러의 출연료를 계속 지불했다.  

그녀는 챠리의 영화에 출연하고 있던 어느 시점부터
그와 연애감정이 있었으나
1938년 항공기 파이럿와 결혼
결혼생활은 1945년 그 남성이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암으로 62세로 떠났다. 

캘리포니아 Glendale에 잠들고 있다. 
에드나는 만년에 챠리의 두터운 처우에 감사하며
한편 챠리는 그의 자서전에서 한결같이 그녀를 높이 평가했다. 






 Ⅲ 찰리 채플린의 페이소스 (pathos, 哀愁) 
채플린에 대해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그가 젊었을 때에 본 인상적인 "신"(scene)으로
도축장에서 양이 도망간 것을 보았다, 라는 이야기이다. 

물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쫒아 다니게 되며
양도 붙잡히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도망다닌다. 
인간과 양은 여기저기 부딪치며
또는 서로 뒤엉켜 뒤집어지기도 했다. 


그 광경에 옆에서 보고있던 사람들은 배꼽을 잡고 웃는 가운데
그는 "저 양은 울고있는 거다..."라고 느꼈다고 한다. 

채플린의 어머니는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인생을 팬트마임으로 표현
어린 채플린에게 인간관찰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영화에서는 웃음의 기폭제(?)가 되는  - 자신의 사이즈보다 지나치게 크고 찌그러진 - 
그의 구두에는 사실 슬픈 추억이 담겨있다. 

어느 년말
자선냄비의 스프를 먹을 것이 없는 슬램가의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기 위해
교회 사람들이 종을 울리며 다가 왔다. 




Hannah Chaplin (August 11, 1865 ? August 28, 1928)


병중이었던 어머니는
"챠리! 빨리 냄비를 들고 가 받아와라."고 채촉하였다. 

당황한 챠리는 자신의 신발이 눈에 띄지 않자
어머니는 "거기있는 내 신발을 신고가라!"고 했다. 
커다란 어른의 너덜한 신발을 신고
작은 발을 끌며 스프를 받으러 달려갔다. 

이러한 어린 유소년시절의 에피소드는
이후 만들어진 수 많은 작품 속에 단편적으로 촬영되고 있다. 

극단의 흥행으로 방미할 때 어머니의 입국허가가 떨어지지 않아 혼자서 떠났다. 

헐리우드에서 성공하고부터 어머니 한나를 영국에서 불러 와
해안에 있는 집 한채를 장만하여
시중을 잘 드는 부부와 경험 풍부한 간호부를 고용하여 같이 살게하였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아들의 미국에서의 성공을 이해하지 못한 채
챠리의 어머니 한나는 1929년 눈을 감았다. 

병상을 찾은 챠리는
"어머니는 더 이상 생활고를 느끼지 못하고 지내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뭔가? 걱정이라도 있는 것 같은 불안한 표정을 보았다."라고 후년 회상했다.   
   

 






Chaplin and Gandhi, 1931년9월 런던에서...



인도의 어린이 간디들



인도 중부 도시 보팔(Bhopal)에서
동국의 상징인 마하트마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0.2-1948.1.30)로 분장한 어린이들. 
10월2일 세계 각 곳에서 간디 탄생 140주년을 축하했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간디의 탄생을 기념하는 메시지를 발표하고 Google도 축복의 의를 표시했다.
Reuters   
   09:53 October 2nd, 2009        
   


1월30일은
인도 "독립의 어버지"로 불리는 마하트마 간디의 기일이다.


2010년 이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항구도시이며
2010년 FIFA 월드컵 예선 조추첨이 실시되었던 더반(Durban/ City of Durban/ eThekwini) 앞바다에
간디의 유회 일부가 뿌려졌다.

남아프리카는 간디가 변호사로서 활약한 유서 깊은 나라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정치활동을 전개했던 곳이 었다.





비폭력을 호소하는 그 활동은
뒤로 남아프리카의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Apartheid)을 이끈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866년 인종차별주의 포스터(Racistcampaign poster)


간디의 유회는 1948년 암살 뒤에 남아프리카에도 일부 나누어졌으며
이날 행사장에는 간디의 손자 에라 간디(69세)씨도 출석했다. 
http://mohandasgandhi.wordpress.com/









               Ⅳ 찰리 채플린의  반나치주의   
1930년대부터 나치 지도자이며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에 강한 반감을 품게 되어
1940년에 공개된 "위대한 독재자"(The Great Dictator)에서는 히틀러를 통열하게 비판하고 있으나
"독재자" 제작시의 미국은 아직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고 있었으며
파시즘.독재체재 강화와 유태인에의 탄압강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한 히틀러에 대해서
"공산주의의 방파제"로 칭찬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아메리카 나치당에서 영화제작을 중지하도록 크레임(압력)을 걸기도 했다. 

한편 "독재자" 등에서 보이는 「채플린 =유태인」으로 인식하는 사람도 많으나
채플린 본인은 유태인이 아니다라고 한다. 

채플린은 카노(Fred Karno) 극단 소속 때나 초기 작품에서
유태인을 바보 취급하거나 야유하는 개그(gag)를 쓰고 있다. 
또 유태인이 아니라는 것을 표명하므로 반유태인의 집단으로부터 추앙받는 것을 두려워 했다고 한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유태인으로 생각되어 영광이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어
이것이 「채플린 =유태인」설의 근거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점에서 한때 "유태인설"이 퍼진 히틀러와 같은 소문이었다.  

그러나 채플린과 히틀러의 삶은 전혀 반대였다. 
그는 "히틀러를 웃음거리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생각한 채플린이었다. 
  








Limelight 중에서...


   Ⅴ 찰리 채플린의 완벽주의  
감독.주연뿐이 아니라 각본이나 연출까지 담당하여
"시티 라이트"(City Lights, 1931) 이후의 작품이나
1918년부터(The Bond 제외)의 "키드"(The Kid, 1921)
"황금광 시대"(The Gold Rush, 1925)
"서커스"(The Circus, 1928) 등의
과거의 작품을 리바이벌 상영용으로 재편집하여
자신 스스로 반주음악을 작곡한 일
겨우 수 초에 지나지 않는 "신"(장면)을 납득이 갈때까지 끝없이 반복하며 고쳐
업계 제일의 "완벽주의자"라고 불렸다. 

그 "서커스"에 있어서는
지상 수십미터의 높이에서 스턴트맨을 쓰지 않고 밧줄 타기를 피로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또 자신의 유일한 멜로드라마 "파리의 여인"(A Woman of Paris, 1923)에서는
영화작가로서 수완을 발휘하여 후세의 영화인에게 미친 영향을 지대한 것이었다. 

최후로 촬영한 작품 "홍콩의 백작부인"(A Countess from Hong Kong, 1967)에서는
지금까지는 감독.주연으로 철두철미한 연기가 주류였으나
, 여기서는 소피아 로렌과 말론 브란도라고 하는 당대의
두명의 대스타를 기용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위대한 천재의 범작(凡作)"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파리의 여인"은 채플린의 오랜 상대역 에드나 퍼비앤스(Edna Purviance)를
대여배우로 만들기 위해 제작된 것이기도 했으나
평론가들의 평가는 좋았으나
                                                             흥행에서의 성적은 별로였다.  
                                              






 채플린 영화의 기술적.음악적인 특징  

출영한 작품의 대부분이 사이렌트 영화로
이 때문에 "채플린은 토키(talkie/발성 영화)를 경멸하고
사이렌트에 고집했다."라고 하는 인상이 지금도 깊이 남아있다.   

사실은 경멸한 것이 아니라 방랑자의 이미지가 목소리로 인해
그가 의도한 영화의 효과가 줄어드는 것을 두려워했다고한다. 

1929년에는 미국의 대부분이 토키(talkie/발성 영화)로 옮겨 가는 가운데
팬트마임 예능이야 말로 세계 공통어라고 의심치 않은 채플린에게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실제로 1931년 "시티 라이트"(City Lights)에서는 전편에 걸쳐
처음으로 사이렌트이면서 효과음을 동반한 음악을 도입했다. 

1936년의 "모던 타임즈"(Modern Times)에서는 줄거리의 필요한 부분에 한해 토키를 사용하고
1940년 "독재자"에서 겨우 완전한 토키로 이행했다. 

그의 컬러작품은 마지막 작품인 "홍콩의 백작부인"뿐이었다.         

채플린의 또 다른 면모로는
음악가가 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916년에 "챨리 채플린 음악회사"를 설립하여
자작곡 3곡(Peace Patrol, Oh!That Cello, There's Always one                                You Can't Forget)을 출판했다. 

그러나 악보가 전혀 팔리지 않아 결국에는 곧 도산했다고 한다. 

1925년에는 "Abe Lyman 오케스트러"를 배경으로
Sing A Song, With You Dear In Bombay의 2곡을 레코딩하면서
지휘자로, 그리고 스스로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했다. 

악보를 보거나 쓰기는 못했으나
머리에 떠올린 멜로디를 피아노로 치거나
어렸을 무렵 독학으로 습득한 첼로나 바이올린(왼손잡이로 특주품을 사용)을 켜면서
한편으로 입으로 중얼거리는 것을 전속 music arranger(편곡가)가 악보를 만들어 가는 식이었다. 

채플린 본인이 작곡한 악곡으로는 "Smile"(Modern Times)
"테리의 테마"(Limelight)가 유명하다. 

푸치니의 아리아와 닮은 아름다운 "Smile"은
1954년 미국 재즈 피아니스트.가수 나트 킹 콜(Nat King Cole)의 노래로 대힛트하여
그 뒤로도 마이클 잭슨(Michael Joseph Jackson,1958 - 2009.6.25)이나
영국의 뮤지션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1954-) 등에 의해 단편적으로 커버(cover)되어 왔다.  

또 "모던 타임즈"(Modern Times, 1936)의 극 중에 채플린이 아무도 이해 할 수 없는
"엉뚱한 언어"로 부른 "티티나"는 로스앤잴스의 랩퍼(rapper) J-FIVE(본명:Jonathan Kovacs)에
의해 샘플링(sampling)되어 랩(rap)으로 불렸다. 

이곡은 일본 "토요다 자동차 ist "의 CM 송으로 커다란 화제를 불러왔다.     








채플린의 아카데미상  

1929년 "서커스"(The Circus, 1928)로 제1회 아카데미상 특별명예상을 수상했다.
"서커스"에서의 "각본.연기.감독.제작에 나타난 비범한 재능"에 대한 수상이었다. 

그러나 채플린은 수상식에 결석해
후일 상의 수여때에 "몇 명의 인간이 정한 상 같은 것은
그렇게 대단한 명예가 아니다. 

내가 필요한 것은 대중의 갈채다. 
대중이 나의 일을 칭찬해 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라며
받은 오스카상(Oscar Statuette, Academy Award of Merit)은 집안의 문 손잡이로 사용했다. 





1940년 "위대한 독재자"(The Great Dictator)는 작품상과 각본상을 수상했다. 

1972년 미국으로부터 추방당한 20년 뒤
제44회 아카데미상에서 두 번째 특별명예상을 수상했다. 
이것은 그를 지키지 못했던 미국 영화계로부터의 사실상 사죄의 뜻과
"영화를 20세기의 예술로 승화시킨 채플린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공적."에 대한 수상이었다. 

특히 이 수상식에서는기립박수(Standing ovation)가 5분 이상에 걸쳐 계속되었다는
현재도 그 예가 없을 정도로 최대의 축복을 받았다.  

자신 작곡의 "Smile"(Modern Times)은 식장 참석자 전원이 함께 불러
"채플린은 단지 이름 이상의 것
채플린은 영화용어의 하나다"라고 아카데미의 회장은 치하했다. 

그 뒤로 로스앤젤레스에서 "라임라이트"(Limelight, 1952)가 처음으로 극장공개되어
제45회 아카데미 작곡상을 수상했다.      



Charles Chaplin's star on the Walk of Fame


그리고 "Hollywood Walk of Fame"에서 이름이 지워졌던 사실도
이 20년만의 귀국으로 로스앤젤레스 시의회가 11대3으로 별표시의 플레이트(Charlie Chaplin's star)를
남기기로 가결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미국과의 사실상 화해를 의미한다.   






                                     영국 런던 중심부 Leicester Square에 있는 채플린 동상                         





당대 할리우드 최대 스캔들 메이커인 채플린   

영화 역사가 데이비드 로빈손에 의하면
채플린는 여성과의 관계로 "할리우드 기준으로 보면 얌전한 것이었다."라고 한다.  

그러나 채플린을 둘러 싼 스캔들은 매스컴의 최대 먹이감이 되어
후년에는 전시하.냉전기 미국의 평화사상에 맞물려 "Negative campaigning"의 목표가 되었다.  

"서커스"(The Circus) 촬영 중인 1927년
당시 부인으로부터 이혼소송.소동을 당해 자신의 사상활이 폭로되었다. 
합의금 62만 5천 달러를 지불하기로 결착했으나 이 소동은 당시 38살의 체플린은
마음고생로 흰머리가 될 정도였다.  

후년 그의 자서전에서도 그녀에 관한 것은 거의 쓰여있지 않았다. 

"서커스" 촬영 중의 화재
1929년에는 가장 사랑했던 여성 그의 모친 한나의 사망
그리고 이 시기는 채플린에 있어서 그리 좋은 해가 되지 못했다. 



Joan Barry


1943년 영국 여배우 조안 배리(Joan Barry, 1920-1996)으로부터 자식의 부권인지소송을 당했다.  
혈액감정에서는 채플린의 자식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으나
혈액검사를 무시한 무자비한 재판의 결과
1대11일의 배심원 평결로 부양의무를 짊어지게 되었다.  
배리는 이전에 총을 들고 채플린 집으로 돌입한 기행을 보기도 했다. 

1953년
후반생 대부분 반려가 된 우나(Oona O'Neil Chaplin, 1925-1991) 부인과 스위스로 이주했다. 

이 채플린의 스위스 이주는
"공산주의자의 박해와 싸우는 경골한 희극배우의 의지"라는 표현으로 칭찬 받기도 했다. 

한편 우익세력은 채플린의 정치적 사상을 문제시
그리고 그의 로리콘적(Lolita complex)에 대한 도덕적 비난으로 헐리우드 추방극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미국 국민은 이 추방극을 크게 반발
결정한 국무장관 앞으로 국내에서 수 만통의 항의 편지가 쇄도하여
국무장관은 특별히 "채플린씨가 미국에 있어서 위험한 인물이라는 분명한 증거는 있으나
지금은 밝힐 수 없다."라고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했다.              








채플린의 여자들과 그의 가족     




채플린경의 역대 부인들
Mildred Harris, Lita Grey, Paulette Goddard, Oona one il  



채플린경의 자식들
The Chaplin Family - Charlie and Oona with six of their children.



밀드레드 해리스(Mildred Harris,1901-1944) :
채플린의 첫 번째 부인이며 여배우 출신으로 1918년 결혼     

▶ 1919년 장남 노먼 스팬서 채플린 탄생(Norman Spencer Chaplin) 그는 생후 2일만에 사망.      





리타 그레이(Lita Grey, 1908-1995) :
 채플린의 두 번째 부인 1924년 결혼.     




▶ 차남 챨스 채플린 주니어 탄생(1925-1966) : 실질적인 장남 

▶삼남 시드니 알 채플린 탄생(1926 - 2009) :
배우로 라임라이트(Limelight),  홍콩의 백작부인(A Countess from Hong Kong)에 출연      

 


폴레트 고다드(Paulette Goddard, 본명:Pauline Marion Levy,1910-1990) :
채플린의 첫 번째 부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법적으로 결혼하지 않았다. 
부친은 유태인으로 그녀가 어렸을 때에 이혼하여 어머니 밑에서 자란 여배우. 
"위대한 독재자"(The Great Dictator), "모던 타임즈"(Modern Times)에서 채플린과 공연했다.      




우나(Oona -O'Neill- Chaplin, 1925-1991)
채플린의 네 번째 부인이며
193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극작가 유진 오넬(Eugene Gladstone O'Neill)의 딸인 그녀와 1943년 결혼 

▶장녀 제럴딘 체플린(Geraldine Chaplin, 1944 -) 탄생. 
              여배우 닥터 지바고(
Doctor Zhivago, - Doctor Zhivago, Prelude & "Lara's Theme -" 1965년)                    
챨리(Chaplin, 1993년)에 출연하였으며, 여배우로서 가장 유명하다. 

▶4남 마이클 채플린(1944-) : "뉴욕의 왕"(A King in New York, 1957년)에 출연       

▷장손녀 로드레스 채플린(1944-) : 여배우, 뮤지컬 비디오 J-FIVE Modern Times에 출연       

▷손녀 카르멘 채플린(1944-) : 여배우  

▶차녀 죠세핀 채플린(1949년-) : 여배우 영국 이야기 문학
제프리 초서의 걸작을 영화화한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에 출연.
일본 채플린협회 최고고문.         
 
▶3녀 빅토리아 채플린(1951-) :
여배우, "위대한 독재자"(The Great Dictator, 1940년)의 컬러판 메이킹 필름 발견.  

▶5남 유진 채플린(1953-) : 레코딩 엔지니어   

▷손녀 키에라 채플린 : 모델, 사업가      

▶4여 제인 채플린(1957-)  

▶5녀 아네트 채플린(1959-)

▶6남 크리스토퍼 채프린(1962-)   

                   





           채플린과 일본        
    
운전수로 고용한 코우노우 토라이치(高野 虎市, 1885-1971)의 성실한 자세와 직무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집안의 고용인이 일시적으로 모두 일본인으로 채워졌다. 

두 번째 부인 리타 그레이는 이때의 모습을
"마치 일본인 가운데서 생활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Toraichi Kouno


코우노우(高野)씨는 히로시마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1900년 15살 때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도미 처음 무렵에는 잡화상에서 일하고 있었으나
1916년 채플린의 운전수 모집에 응모하여 채용되었다.  

채플린이 특별히 일본인 운전수를 원했던 것도 아니었으며
코우노우(高野)씨가 채플린 팬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처음은 채플린의 운전수로 고용되였으나
뒤로 채플린의 주변에 관한 일까지 모두 담당하는 비서로 불리게 되었다.  

채플린이 친일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나 이것은 그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코우노우(高野)씨의 장남이 태어나자
채플린은 자신의 미들네임(스펜서)을 이름으로 주었다. 

1932년 채플린이 방일했을 때도 동행하였다.

1934년까지 채플린 전폭적인 신뢰로 비서로 근무했으나
갑짜기 해고된 이유는
당시 채플린의 부인 폴레트(Paulette Goddard)의 낭비벽을 지적하였으나
일본인에 대한 차별의식을 갖고 있던 그녀의 반감을 사게된 것이 원이다. 

그 뒤로도 채플린은 그가 다시 비서로 근무하도록 수 차례 의뢰를 하였으나
그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뒤 채플린은 그에게 막대한 퇴직금과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사의 일본 지사장 자리를 준비해 주었다. 

1941년6월 제2차 세계대전 전에
FBI 함정수사에 걸려 미국에서 스파이 용의로 체포되어 몬타나주 강제수용소에 6년간 수용되었다. 
석방후 미국에 머물며 전쟁 중에 미국 시민권을 잃은 일본인 권리회복운동에 힘썼다.   

그의 아들 스펜서는 전쟁 중 미군에 지원하여 일본군과 대전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1957년 일본으로 귀국하여
히로시마에서 만년을 보내다 1971년 86세로 사망했다.      



 
1925-1945 무렵의 카부키쟈(歌舞伎座)                                   1933년의 메이지쟈(明治座)  
     


채플린은 1932년5월14일 첫 일본 방문
이때 일본 청년장교들의 구데타인 5.15사건에 조우하게 되어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구데타 주모자들은 세계적인 VIP가 일본에 있는 것을 탐지하고 채플린 암살을 기도했으나
그들의 일행은 마침 카부키쟈와 메이지쟈(歌舞伎座,明治座)에서 일본 전통예능을 감상하고 있어
가까스로 난을 피하게 되었다. 

동경 제국호텔(帝國,
Imperial Hotel, Ltd.)에 숙박하며
  하코네 후지야(箱根 富士屋) 호텔 등에 숙박하며 여러 곳을 관광하며 소일했다. 



하코네 후지야(箱根 富士屋) 호텔


이 가운데 니혼바시(日本橋) 하나쵸우(花長)라는 가게에서 새우 덴뿌라(튀김)를 한 번에 36개나 먹었으며
더욱이 하나쵸우(花長)에서 수업한 요리사가 승선하고 있다는 히가와마루(氷川丸)에 승선하여 귀국했다. 




          1950대의 히가와마루(氷川丸) 현재는 요코하마항 요코하마 공원에 계류되어 관광 레스토랑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 뒤로도 새우 덴뿌라(튀김)을 줄기차게 먹어 "덴뿌라 남자"란 별명이 붙어 다녔다.     

1936년2월 두 번째로 일본을 방문했다. 

또 동년 5월에는 당시에는 애인 폴레트(Paulette Goddard)와의 신혼여행겸 세계여행 도중에
세번째 방일하여 선상에서 프랑스 전위 예술가 Jean Cocteau(장 콕토)와 합류
경도(京都) 관광을 즐겼다.  

이 때에 기후(岐阜)를 방문하여 나가라가와(長良川)에서 우카이(
?飼)를 감상했다. 

참고 : 우카이(?飼)는 가마우지를 길들여 물고기를 잡게 하거나
또는 그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




          
절묘한 손놀림으로 고기 잡는 모습을 보고
"원더풀"을 연발하며 환상적인 강위의 불빛에
"우카이는 한 편의 시이며, 우쇼우(?匠, 가마우지로 고기잡는 사람)는 시인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네 번째 일본을 방문했을 때도 다시 여기를 방문하여 감상했다.




영화  "The Kid"의 한 장면을 모티브로 2001년 만든 동상은
얼국 주름살 하나까지 훌륭하게 표현
게로(下呂) 온천 관광협회에서 본고장 헐리우드 조형작가에 의뢰하여 완성한 것이었다.

                                                                        

사족(蛇足) : 우카이(?飼)는 우스요가 바다 가마우지를 키우면서 길들여 은어 등의 물고기를 잡는 고기잡이 방법으로 나가라가와(長良川)의 우카이는 1,300년의 역사가 있다.  나가라가와의 우카이가 기후의 여름의 풍물로써 계승되어 온 것은 오다 노부나가나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당시의 권력자들에게 보호받아 오면서, 더욱이 메이지 23년부터는 궁내청에 소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식으로는 궁내청 시키부쇼쿠 우스요라고 불리는 나가라가와 우스요는 세습으로 전승되며 현재 기후시에서는 여섯 명이 활약하고 있다.  옛날을 떠올리게 하는 고풍스러운 우스요의 도구들은 원래 궁중 행사였던 때의 흔적(자취)으로 긴 역사를 이야기 하고 있으며, 여름밤에 화톳불을 피워서 우스요의 교묘한 솜씨로 줄을 당기는 손놀림에 가마우지가 연이어 물에서 자맥질을 하여 은어를 잡는다.  6척의 우카이 배가 횡렬로 강가를 내려가는 "소우가라미"는 대단한 장관이다.  나가라가와의 우카이는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져 국내외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 유명한 배우 찰리 채플린도 2번에 걸쳐 우카이를 보고 굉장히 감동했을 정도였다.  매년 5월11일 - 10월15일까지 한가을의 달 밝은 날과 물이 불어나는 때를 제외하고는 매일밤 행해지고 있다. 
http://www.welcometojapan.or.kr/convention/gifu/party.asp   
      


전쟁이 끝난 뒤 1961년에 우나(Oona -O'Neill- Chaplin)
장녀 제럴딘 그리고 장남 마이클을 동반하고 네 번째로 방일했다. 
고도 성장화로 급격히 발전한 동경의 모습을 보고 실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경도(京都)에 도착 "오래된 일본 역사가 숨쉬고 있는 모습"을 보고 기뻐했다고 한다.  1970년 오사카 만국 박람회 개최에 맞추어 일본측이 초청을 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채플린이 영화 중에 사용한
유명한 대나무 마디가 눈에 띄는 지팡이(Wand, stick)는 시가현 쿠사즈시(滋賀縣 草津市)의 특산품으로
여기의 대나무로 만들어 탄력성이 강하고 튼튼한 것이 특징이다.   

"철완 아톰"의 만화작가 데즈카 오사무(手塚 治蟲, 의학박사.의사, 1928-1989)는
생전에 "어떻게하면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만화를 그릴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무턱대고 채플린의 영화를 봐라! 거기에 모든 대답이 있다."라고 이야기했다. 
또 "나의 만화에는 채플린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라고도 했으며
실제 그의 만화에는 채플린을 모방한 캐릭터가 등장하고 있다. 









  채플린의 영화 작품은 각각 다음과 같이 나뉜다.       
채플린의 영화는 "키스톤 시대"에서 "영국시대"까지로 구분되며
여기에 각 시대별 대표작을 소개하기로 한다.



키스톤 시대(Keystone Kops)
1914  Making a Living        1914  Kid Auto Races at Venice          1914  Tillie's Punctured Romance


 
엣사나이 촬영소 시대(Essanay Studios)
1915  The Champion         1915  A Jitney Elopement               1915  The Tramp    
1915  The Bank                1916  Burlesque on Carmen             1916  Police


뮤츄얼 시대(Mutual Film)
1916  The Floorwalker         1916  The Fireman            1916  The Vagabond
1916  one  A.M.                       1916  The Count             1916  The Pawnshop
1916  Behind the Screen            1916  The Rink                1917  Easy Street
1917  The Cure                     1917  The Immigrant        1917  The Adventurer


퍼스트 내셔날 시대(First National)
1918  A Dog's Life                1918  The Bond                      1918  Shoulder Arms
1919  Sunnyside                   1919  A Day's Pleasure               1921  The Kid
1921  The Idle Class               1922  Pay Day                       1923  The Pilgrim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시대(United Artists Entertainment LLC, 통칭:UA)
1923  A Woman of Paris          1925  The Gold Rush           1928  The Circus
1931  City Lights                 1936  Modern Times            1940  The Great Dictator
1947  Monsieur Verdoux            1952  Limelight 


영국시대
1957  A King in New York        1959  The Chaplin Revue       1967  A Countess from Hong Kong



 키스톤 시대(Keystone Kops)     
- 총 3작품 -






무성영화(Silent film)의 전성기 시대로 1912년부터 1917년까지의 작품시기로 알려진.  무성영화 시대(silent era)는 또한 "은막의 시대"(Age of the Silver Screen)라고 한다.  사상 최초의 무성영화는 1888년 루이스 르 프린스(Louis Le Prince)가 만들었다.  사람들이 오크우드 농장공원(Oakwood Grange garden)을 산책하는 모습을 담은 것으로 2초 가량의 영화로, 제목이 《Roundhay Garden Scene》으로 붙여졌다.  실제 무성영화라고 하긴 해도 영화의 등장 배우의 대사를 대신 말해 주는 "변사"라는 해설자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 채플린의 월급은 주급 150 달러에 계약하여 희극배우로 첫 발을 들여 놓았다. 


1914년 『생계』  -8분52초- Making a Living

1914년 『생계』  -8분52초- Making a Living  


단편 무성영화(Silent film)로 채플린의 영화 첫 출연작품이다.
                당시의 채플린은 Mack Sennett가 설립한 Keystone Film Company와 계약하고 있었다.  







키스톤사는 Keystone Kops이라고 하는 무능한 경찰 일단이 펼치는
쫒고 쫒기는 것을 주축으로 하는 슬랩스틱 코메디(Slapstick comedy)를 양산하고 있어
채플린의 초기 작품도 여기의 흐름에 따른 것이었다. 







이 작품에서 체플린은
여자다운 사기꾼 모습으로 실크햇에 말쑥한 코트 차림으로 등장하여
"Keystone Kops" 등과 쫒고 쫒기는 연기를 피로하고 있다.      
 
   
Charlie Chaplin 1914 Making A Living          





1914년 『베네치아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 -6분06초- Kid Auto Races at Venice

 
1914년 『베네치아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 -6분06초- Kid Auto Races at Venice   
단편 무성영화(Silent film)로 채플린의 두 번째의 작품이다. 

                         Keystone Film Company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감독은 헨리 레이맨(Henry Lehrman).

채플린의 방랑자 분장은 여기서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며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작품의 하나로 알려졌다. 

이 작품에서 채플린의 역은
캘리포니아주 베니스에서 개최된 어린이 자동차 경주에서 관전자로 등장한다. 

채플린은 자동차 경주를 촬영하는 카메라 앞에서
줄곳 잘난 체하고 넉살좋게 앞에 나선다. 

자신이 카메라에 찍히려 하고
자동차 경기에 방해가 되기도 해
주위를 당황하게 하는 역을 연기하고 있다. 

이 영화는 실제 자동차 경기장에서 촬영한 것으로
              채플린은 다른 연기자와 함께 진짜 관객 앞에서 연기를 하고 있다.             

Charlie Chaplin - Kids Auto Race At Venice (1914)    




1914년 『틸리스 펑처드 로맨스』 -73분- Tillie's Punctured Romance


1914년 『틸리스 펀처드 로맨스』 -73분 - Tillie's Punctured Romance       

체플린을 영화계에 발을 들여 놓게한 무성희극의
             거물 프로듀서 M. 세넷트(Mack Sennett, 1880-1960)가 감독한 미국 최초의 장편 코메디. 

데뷰 다음 해부터 이미 32편에 출연
동시에 감독에도 취임한 채플린이 드물게 연기에만 전념한 작품이다. 

이야기는 결혼 사기꾼으로 분장한 채플린의 실패를 그린다.  

줄거리는 시골 농장주의 딸로
삼춘은 대은행 은행장이라고 하는 "따님". 채플린은 그런 그녀에게
"악마의 손"을 내미는 멋진(?) 결혼 사기극이다. 



Charlie Chaplin, Marie Dressler, as the farmer's daughter, and Mabel Normand


언제나 방랑자의 모습과는 달리
채플린은 교외를 산보하던 중에 테리가 던진 벽돌에 맞아 기절하여 그녀의 집에 운반되어 간다. 

테리의 집이 부자라는 것을 재빨리 눈치 챈 채플린은
곧 작전을 개시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돈을 훔쳐 채플린과 함께 도시로 향한다. 

채플린은 여자 친구 메벨 노만드와 결탁해서 술집에서 테리를 취하게 하여 돈을 빼돌려 흔적을 감춘다. 
그런데 그 직후 그녀의 삼춘인 은행가가 산에서 조난 당하여 거액의 유산이
테리에게 굴러 들어오게 된 사실을 탐지한 체플린은 당황하여
여자 친구 메벨 노만드를 버리고
테리 앞으로 돌아와 강제로 결혼식을 올려 버리는 채플린이었으나
구사일생으로 산에서 살아 돌아온 은행가가 집에 돌아오게 되자 지금까지
채플린이 기도했던 것이 모두 수포로 끝난다. 



Chased by the police and firing a gun,
Tillie Banks (Marie Dressler) pursues con artists Charlie Chaplin and Mabel Normand



마지막에는 테리와 메벨이 여자끼리 마음이 투합
채플린만이 악자가 되어 퇴장한다. 
실로 타애가 없는 작품.


1년간 출연한 작품은 무려 36편에 달하며 11월 키스톤사 퇴사 11월14일 엣사나사와 계약
Predicament Between Showers A Film Johnnie Tango Tangles  
His Favourite Pastime The Star Boarder Mabel at the Wheel Caught in a Cabaret 
Caught in the Rain  A Busy Day 
The Fatal Mallet Her Friend the Bandit The Knockout Mabel's Busy Day  
Mabel's Married Life  His New Profession The Rounders The New Janitor   
Those Love Pangs Dough and Dynamite Gentleman of Nerve His Musical Carrier  
His Trysting Place        Tillie's Punctured Romance  
Getting Acquainted  His Prohistoric Past   

CHARLIE CHAPLIN TILLIES PUNCTURED ROMANCE 1914        




엣사나이 촬영소 시대(Essanay Studios)
  - 총 6작품 - 
1916년 시카고 엣사나이 시대(The Essanay Film Manufacturing Company, Chicago, Illinois)사와
계약이 끝난 뒤로는 Mutual Film과 계약한다.  
이때 채플린의 1915년 월급 주급 1,250달러.     


1915년 『챔피온』 -30분46초- The Champion
 

1915년 『챔피온』 -33분46초- The Champion   
엣사나이(The Essanay Film Manufacturing Company, Chicago, Illinois) 제작 
General Film Company 배급 영화. 

미국에서는 "Battling Charlie", "Champion Charlie", "Charlie the Champion"의 타이틀로 소개되기 한다. 

채플린 감독.각본.편집.주연으로 출연한 복싱을 주제로한 "허둥지둥 허겁지겁"하는 작품
               희극영화"(?)의 흑백 무성영화. 

개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챠리(채플인의 애칭, 이하 작품 속에서는 "챠리"로 표현)는
어느날 구인광고에 복싱 챔피언의 스파링 상대를 모집한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먹고 살기 위해 응모하긴 했으나
자신의 바로 눈 앞에서 강하게 생긴 남자들이 줄줄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경악한다.  

그러나 챔피온의 스파링 상대로 죽던살던 링에 올라가야 하는 채플린
그의 주특기 "허겁지겁 얼렁 뚱당"으로 챔피언을 이겨 버렸다. 

새로운 챔피언 탄생으로서 시합에 임해 대단한 소동을 일으키며 링은 패닉상태에 빠진다. 
   

charlie chaplin the champion part 1            





1915년 『사랑의 도피』 -26분16초- A Jitney Elopement



1915년 『사랑의 도피』 -26분16초- A Jitney Elopement   

채플린의 엣사나이사의 다섯 번째의 사이랜트 작품으로 에드나 퍼비앤스(Edna Purviance) 등과 공연.   

  에드나는 어버지가 정해 준 백작과 결혼할 것을 기피하며
  연인 챠리와 눈이 맞아 "사랑의 도피"를 꾀한다. 

챠리는  - 미국에서 1914년에서 1916무렵까지 합승택시로 자주 사용된 -  "지트니"(jitney)에 
그녀를 태우고 사라진다.  



A scene filmed in Golden Gate Park


이 영화의 대부분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촬영되어
영화에서는 시내공원 "골든 게이트 파크"나 공원 서쪽에 있는 거대한 풍차 등을
당시의 귀중한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도움을 청한 그녀의 부탁을 받은 챠리는
어느 날 디너에 초대받은 백작으로 가장하여 에드나와 결혼하려고 한다. 
특이하고 진귀한 매너를 연발로 위험한 고비를 가까스로 넘기며
결국 에드나의 아버지는 속아 넘어간다. 

잘 속여 넘겼다고 생각한 순간 정말 백작이 나타나...    
스토리도 재미있으나
연출도 훌륭하다. 





특히 관객을 웃기기 위한 연출방법을 본작품에서 상당히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압권은 후반 부분의 카 체이스. 

아직 1915년 이라고 하는 시대에
이정도로 스피드감 넘치는영상을 촬영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실제 이 작품은 실험적인 의미가 포함된 작품이기도 한다. 

아직 카 체이스가 영화에 등장하지 않은 시대에
이 영상은 틀림없는 "epoch-making"(획기적)한 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가짜가 탄로나 추격전이 시작되는 신(지금의 영화도 비교하면 그다지 변한 것이 없다고 할 수도 있으나)
쫒고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되어 소동은 드디어 손댈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어 간다. 

마지막에는 모두 엉망징창이 되어 버린다고 하는 감상이었으나
이 작품은 쫒고 쫓기는 추격전이 길다. 






자동차에서 경찰이 떨어진다 든가
자동차로 남자를 끌고 간다든가
자동차를 부딪쳐 바다에 떨어뜨린다 든가...,
카 체이스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스릴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걸작 엔터테이먼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자동차를 주운 챠리와 에드나가 자동차를 움직이려는 신에서
돈을 넣으려는 장면이 있으나
이것은 이 당시 5센트 동전을 넣으면 움직이는 합승버스와 같은 것이 실제 있었던 것으로
그것을 이용한 개그이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는 특히 그러한 자동차는 아니었으나
5센트 동전을 넣어 보니 왠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Charlie Chaplin - "A Jitney Elopement"




1915년 『방랑자/트램프』 -19분36초- The Tramp




이 영화는 불어에서는 "샬롯"(Charlot), 이탈리아어에서는 "칼라토스"(Carlitos) 그리고 독일어에서는  
"베가본드"(Vagabund)로 불렸다.
 
 


1915년 『방랑자』 -19분36초- The Tramp      

에드나 퍼비앤스(Edna Purviance) 등과 공연.     
채플린은 이전에도 방랑자를 연기하고 있으나
"마음씨 좋은 방랑자"는 여기에서 처음 등장하게 된다.  

개그의 줄거리가 뛰어난 작품이다. 

즐거리 : "방랑자"(채플린)가 어느 농장의 딸(에드나 퍼비앤스)을 사랑하게 된다. 
어느 날 강도가 농가를 습격. 
딸이 강도를 만나자 챨리가 이것을 도와 준 것을 계기로
- 챠리는 이때 부상을 입는다. -  일가의 농장에서 일하기 시작해 만사 순탄하게 풀리는 듯 했다. 





어느 날 챠리는 딸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방랑자"는 일가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떠나기로 결심한다.  
간병후 에드나가 챠리 앞에 나타나 이별의 편지를 건넨다.  
챠리는 쓸쓸히 사려져 간다. 

농장을 떠나는 그의 뒷모습은
번갈아 가며 한쪽 발로 가볍게 뛰면서(skip) 그리고 지팡이를 휘두르면서
마치 그가 원래 온 곳으로로 되돌아 가는 것을 즐기는 것 같이도 보인다.     

Charlie Chaplin - "A Jitney Elopement"           




1915년 『은행』 -33분- The Bank   

1915년 『은행』 -33분- The Bank

에드나 퍼비앤스(Edna Purviance), 레오 화이트(Leo White) 등.   

         "방랑자"(The Tramp)에서 보여 준 관객을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 넣는
전형적 Slapstick comedy 영화에서 탈피한 보다 높은 드라마성, 슬픔으로 끝나는 작품이다.       

줄거리 : 챠리는 은행에서 청소부역을 연기
에드나 퍼비앤스는 미인 은행 비서를 연기한다. 





챠리가 이 은행비서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지레짐작하고 사랑에 빠진 챠리는 조촐한 꽃다발을 보냈으나
사실 에드나가 꿈꾸는 이상형의 연인은 엘리트 은행원이었다. 

불쌍하게 된 꽃다발은 쓰레기통 속으로 버려지고...
엣사나이 시대 작품 가운데서도 특히 평판이 높은 작품이다.  

작은 오해에서 생긴
신분이나 차원이 다른 연애비극을 코믹하게 그린 작품으로
챠리의 유머외 비극이 잘 융합된  훌륭한 단편으로 생각된다. 





버려진 꽃다발을 발견한 챠리나
엘리트 은행원의 넥타이를 보는 신(scene) 등...
인정을 잘 표현한 순간의 제스쳐가 돋 보인다.   
마지막으로는, 그 사랑이 성공한 것 같이 보였으나
사실은 모두가 헛꿈이었다는 줄거리. 

최후의 최후까지 충분히 즐기게 해 주는, 각본도 흠 잡을 곳 없는 작품이다.       
       
The Bank - Charles Chaplin          




1916년 『카르멘』 -37분- Burlesque on Carmen


1916년 『카르멘』 -37분- Burlesque on Carmen  

이 작품은 엣사나이사에서 1915년에 촬영하기 시작한 작품으로 
                제작비용 과다지출이 원인으로 챨리와 회사 사이에 재판으로 발전
채플린의 패소로 끝난다.  

에드나 퍼비앤스(Edna Purviance), 레오 화이트(Leo White) 등.       

작품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카르멘을 풍자화(parody)한 작품. 

챠리가 분장한 역은 당당한(?) 근위병 대장 돈 호세
  그러나 어딘가 개운치 않은 모습에다 실수 연발이다. 

그리고 그의 앞에 나타난 정열의 여자 카르멘. 

돈 호세는 그녀 때문에 인생을 망쳐가게 되는데...  

특히 재미있는 부분은
후반에서 검투 장면으로 싸우면서도 옷이 더렵혀지는 것을 신경 쓰면서
머리를 만진다든가 하는 챠리가 관객을 웃기게 한다. 

또 다리와 손이 밟히는 장면 그리고 돌에 걸려 넘어지는 장면 등등.                   

Charlie Chaplin - Burlesque on Carmen 1/8 (1915)          





1916년 『경찰』 -25분17초- Police


1916년 『경찰』 -25분17초- Police   
엣사나이사에서의 14번째 작품.   
에드나 퍼비앤스(Edna Purviance), 레오 화이트(Leo White) 등.   

                           줄거리 : 형무소에서 막 출소한 전과자(챠리)는
목사로 가장한 사기꾼에게 간단히 돈을 사기 당하자, 사바 세계(娑婆)가 싫어지게 된다. 

마침 이럴 때에
형무소에서 같은 방에 있었던 남자와 우연히 만나게 되어
함께 공모하기로 하고 어느 가정 집에 침입한다.  

발각된 두 사람은 경찰과에 둘러 쌓이기 된다. 
그들은 그 집의 딸(에드나 퍼비앤스)과 맞부딛치게 된다.  

챠리의 인격을 꿰 뚫어 본 에드나는 챠리를 변병해 주면서
그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마음을 고쳐 회심시키려 노력한다.  

챠리는 인정이나 애수(pathos)를 그리려고 주력한 작품 가운데 수작이라고 할 수 있는 한 편이다. 

뒤로 멜로드라마에서도 그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챠리이지만
그 선구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아름다운 부호 딸의 부드러운 마음씨에 자신 스스로 깊이 뉘우치며 개심하기까지를 
- 이 짧은 단편 속에 응축시켜 - 
이것으로 도둑질하려 해도 실수만 거듭하는 챠리
주특기의 웃음을 구석구석에서 엿 볼 수 있게 한다.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멜로드라마이다.   

또 에드나가 경찰에 통보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들은 천천히 여유있게 마실 것을 다 마시고 출동한다. 


Stills: Police 
Charlie leans out of the window, grabs the police officer's truncheon and knocks him out



시민을 위해 1초라도 신속히 현장으로 달려가야 하는 경찰에 대한 야유를 톡톡히(?) 그리고 훌륭히 표현
역시 챠리다운 놀라운 통찰력을 새삼 느끼게 해 주는 신이다. 

- 중략 - 

라스트 신
챠리의 눈앞에 보이는 곧장 뻗은 길. 

회심한 인간의 전도를 나타내고 있는 듯이 보여준다. 
어깨가 작게 보일 때까지 그 길을 곧장 걸어가는 모습에, 웬지 안도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
걷기 시작한 순간 다시 쫒기고 있었던 경찰에게 다시 발견되어
또 도망가기 위해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 오게 된다. 

결국 회개의 길이
그렇게 순탄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챠리의 뛰어난 천재적 감성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His New Job",   "A Night Out",   "By the Sea",  "Work",   "A Woman",   "Shanghaied",  "A Night in the Show" 엣사나이에서 1년간 주연한 작품은 14편 

Charlie Chaplin - Police (1916)          












뮤츄얼 시대(Mutual Film Corporation)
-총 12작품-  

이때 채플린은 주급 1만 달러에 보너스 15만 달러의 파격적인 계약으로 영화제작의 자유가 주어진다. 
       1916 - 1917년 무츄얼사에서 주연 출연한 작품   
가을 로스앤젤레스에 새로운 촬영소 건설 개시



1916년 『매장 감독』 -20분38초- The Floorwal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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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매장 감독』 -20분38초- The Floorwalker       

줄거리 : 채플린은 백화점 손님(방랑자)으로 등장하여
가게 책임자(Eric Campbell)가 돈을 빼돌리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쫒고 쫒기는 장면은 에스컬레이터에서 전개되어 아무리 달려도 반대방향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제자리에 서 있게 된다. 




관객을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 넣는 전형적 슬랩스틱 코메디(Slapstick comedy) 개그이다. 

이 영화는 에스컬레이터가 등장한 최초의 영화로 알려져 있다. 
에드나 퍼비앤스는 점장(가게 책임자)의 비서라는 비교적 작은 역으로 등장한다.   

The Floorwalker 1/3 (1916)           




1916년 『소방수』 -20분14초- The Fireman
 
1916년 『소방수』 -20분14초- The Fireman     

줄거리 : 조례와 출근의 신호를 혼동하는 얼빠진 소방수 챠리에게
소방서장은 언제나 화내기 일쑤이다.

        어느날 그런 서장(Eric Campbell)으로부터
"집에 불을 지를 테니 불끄러 오지 말라!"라고 보험 사기극을 제안 받았다. 

챠리로부터 일이 잘 되면
그 악당의 딸 에드나 퍼비앤스와 결혼약속을 다짐받은 서장은 흔쾌히 승락한다. 

계획대로 화재를 일으킨 악당이었으나
에드나가 집안에 있는 것을 모른채...    






챠리으로 분한 얼빠진 소방수는 혼자서 에드나를 구출하는
대활약한다고 하는 에피소드의 이야기. 

구출극에서 보여주는 놀라울 정도의 신체능력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무엇 보다도 재미있는 장면은 처음 소방서내에서 허둥지둥하는 장면이 압권이다.  

특히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장면은 2층에서 1층으로 파이프를 타고 내려오는 장면... 

이 외에도 화재를 알리는 벨을 일부러 끈 채
게임에 열중한다든가
식사의 스프를 접시에 담는 장면 등은 초기의 채플린 영화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또  필름을 역화전시키는 수법도 본 작품에서는 효과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역회전 시키므로 마차가 뒷모습으로 간다든가 하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묘사되고 있다. 

야외의 장면에서는 당시 캘리포니아 근교의 거리 풍경을 엿볼 수 있다.

Charlie Chaplin - The Fireman 2/3 (1916)             




1916년 『방랑자』 -21분22초- The Vagabond


   1916년 『방랑자』 -21분22초- The Vagabond   

1915년의 작품 "방랑자"(The Tramp)를 보다 발전시킨 드라마성이 높은 스토리의 작품이다. 

         바이올린을 켜며 떠돌이 채플린은 방랑 도중에 집시 거류지에서 학대받는
가혹한 운명의 딸(에드나)와 만나게 된다. 

못 본척하고 지나칠 수 없는 챠리는
 The Tramp에서와 같이 에드나를 도우려고 한다. 

거기게 저명한 화가가 나타나 소녀 에드나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다.  

그 그림은 세상에 빛을 보게되어 어느 부호의 부인의 눈에 띄게 되었다. 

그 부인은 에드나의 진짜 어머니로... 
웃음이 적은 작품에 비해 상당히 상당히 드라마성이 농후한 작품으로
1920년대의 키드, 서커스 등의 경향을 암시하고 있다고 하는 작품이다.  

실로 아름다운 이야기의 작품 
- 돈이 없는, 단지 부랑자라 해도 마음까지 오염되지 않은 약자에 대해 항상 애정을 쏟는 - 
챠리의 모습을 보게된다. 






그리고 사랑과 노동을 테마로 한 통렬한 비판이 숨겨져 있기도한 작품으로
한편의 휴먼 드라마로써 상당히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주는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여기에서 에드나 퍼비앤스는
이 영화에서 드물게 초라한 여성을 연기한다. 

며칠간씩이나 머리를 감지 않아 머리를 자주 글어야만 하는 여성이다. 
지금까지 그녀의 이미지와 다른 신선함을 느낀다. 

채플린의 수 많은 단편 가운데 어느 것을 먼저 보아야 할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 작품을 추천하고 싶다.  

특히 "키드"로 대표되는 것과 같이
후기 채플린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꼭...  

Charlie Chaplin - The Vagabond 1/3 (1916)         



1916년 『오전 한 시』 -17분18초- one  a.m. 

1916년 『오전 1시』 - one  A.M. 

처음에 Albert Austin이 운전수역로 등장하는 것 이외에는 
마지막까지 챠리의 혼자하는 연극으로 끝나는 희귀한 작품이다. 

특별한 스토리는 없으며 심야 술에 취해 귀가하는 주인(챠리)이 침실까지 가면서
여기저기 가구에 부딪치며 발걸음이 저지당하며
끝에 가서는 욕실에서 잠드는 모습을 훌륭한 스타일로 보여주고 있다.  

챠리는 예전에 카노극단에서도 팬트마임의 주역을 담당한 적이 있으며
또 혼자서 연극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혼자 웃기는 역을 한 것이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영화에서 그러한 작품을 만든 것은 이것이 최초이자 최후였다.  

이 작품은 챠리가 혼자서 얼마나 웃길 수 있는지 테스트해 보았다는 의미로
사건적이며 의욕적인 영화였다고 할 수 있다. 

단 혼자서의 연기라고 해도 그 내용은 충실하고 재미있다. 

특히 "예상되는 웃음 보다 한발 앞서가는 웃음"이 우수하다. 

예를 들면, 술을 들려는 모습
2층에 올라가서 침대와 격투(?)하는 모습 등등. 

이 작품에 대해 "모든 의미에서 근대 영화의 완성을 알리는 작품"이라고 평가하기도 하는 정도이다.

Charlie Chaplin - one  A.M (1916)                 




1916년 『계산』 -20분14초- The Count

1916년 『계산』- The Count 

양복점 주인(Eric Campbell)과 그 가게의 견습생 챠리. 
챠리는 실수를 거듭하여 목이 잘린다.           

골치덩어리를 처리하여 시원한 양복점 주인은 손님 양복 주머니에서 만찬회 초청 티켓을 발견하여
그날 밤 백작으로 가장하여 연회장으로 외출한다. 
그러자 거기에는 챠리가...   
이 두사람은 부호의 딸을 노리고 대저택의 정원에서...
채플린이 가난한 사람과 부호를 연기한 그 콘트라스트로 상류계급층을 풍자한 작품이다.  

상류계급층의 풍자는 채플린의 18번. 

이 작품에서도 상당히 재미있게 그렸다.  

어느 작품에나 쫒고 쫒기는 장면은 등장하고 있으나
이 작품은 상류계급의 정원이 무대로 되어있기 때문에
바닦이 반들반들해 잘 미끌어진다.  

쫒는 측도 쫒기는 측도 줄줄이 미끄러져
다른 작품에서는 없는 숨박꼭질이 재미있다. 

여기에는 물론 필요 이상으로 바닥을 훌륭히 닦은 상류계급 사람의 생활에 대한 풍자적 비유가 섞여 있다. 

식사 신에서는 식사 매너를 냉소적으로 그려
역시 채플린다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수박을 잘라 먹는 신도 재미있다.
이 먹는 법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상당히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인상적인 신이라면
무도회에서 부호의 딸인 에드나와 챠리가 호흡이 딱 맞고 있다.     
   
The Count 1/4 (1916)        





1916년 『전당포』 -20분06초- The Pawnshop




1916년 『전당포』 -20분06초- The Pawn shop          

챠리는 전당포에 고용된 신입점원 에드나 퍼비앤스(Edna Purviance)는 전당포 주인의 딸.  

챠리는 손님을 저주하기도 하며 물건을 망가뜨리기도 하는 얼간이 짓을... 
그리고 동료와 싸움도 끝이 없다.  

드디어 주인으로부터 해고를 통고 받기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챠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가게에 남으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는 가운데
강도가 손님으로 가장하여 나타났다! 

다를 무서워 떨고 있는 가운데 정의감 강한(?) 챠리가 선두에 선다.   

챠리가 만든 뮤츄얼사 시대의 희극 가운데서도
소도구의 사용법이나 독창적 개그가 뛰어나
개봉 당초부터 수작으로 인정받은 작품이다. 

여기에서 챠리는 상당히 성격이 나쁜 점원역. 

가게 주인에게는 늘상 굽신굽신거리며 주인의 딸에게는 추파를 사용
동료에게는 심술궂게 대한다. 

전당포여서 돈에 궁색한 손님들 만이 찾아 오고 있으나
"이 시계를 팔지 않으면 오늘 저녁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라고 손님(Albert Austin)이 말해도
챠리는 모들은 척하며 "어떤 시계야!"라며 시계를 심술굿게 이리 만지고 저리 만지고 한다. 





결국 끝에 가서는
수리 불가능하도록까지 분해해 버리고 만다.
"이런 시계 누가 산데?"라며 집어 던져 버린다. 

이 작품은 이 시계의 분해 신이 가장 유명하며
 지금까지 다른 작품에서 보여준
애정에 넘치는 약자편에 선 챠리의 이미지와는 무척 동떨어진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있는 신으로는
사다리에 올라가 청소하는 신으로
사다리를 조금 쓰러뜨리지 않으면 닿지 않는 곳이 있어
사다리를 앞뒤로 흔들게 된다. 

이때 쓸어질듯 아슬아슬하게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챠리는
감히 경탄할 만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Charlie Chaplin - The Pawn Shop 4 of 8          





1916년 『무대 뒤에서』 -20분09초- Behind the Screen

1916년 『무대 뒤에서』 -20분09초- Behind the Screen     

이 영화의 공연은 에릭 캠벨(Eric Campbell), 에드나 퍼비앤스(Edna Purviance) 등.

영화의 촬영소가 무대로 드라마나 코메디의 무대 뒤에서 일하는 챠리가 일으키는 대소동을 그린 작품이다. 
또 무대 뒤의 현실을 폭로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러한 뒷편의 천편일률적인 사화를 풍자한 예리한 인간관찰이 엿보인다. 
캠벨역의 고리아스(Goliath)라고 하는 도구담당의 조수 데이비드(David)를 챠리가 연기하고 있다. 

이들의 이름은 구약성서 "David와 Golyat"에서 유래한다.  

챠리는 무대 뒤에서 일하는 도구담당이나 여기서도 얼빠진 짓을 반복하는 챠리는
같은 도구 담당으로 몸집이 큰 "거한 동료"에게도 꼼작 못하는 날이 계속되었다. 

어느 날 많은 도구 담당자들이 일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켜 파업을 일으켰다. 

챠리와 거한은 파업에 동조하는 것을 거부했으나
그 대신 돌아오는 일로 챠리는 또 얼빠진 일을 연발...     





이 작품에서 압권은
바닥의 구멍을 이용한 함정 소동. 
거한이 목이 끼이고, 여러 배우들이 빠지는 대소동...

여기서의 히로인 에드나는, 여배우 지방생이나 꿈은 이루지 못한다. 

남장차림으로 무대 뒤 스테이지에 등장한다. 
즉 남자로서 무대 뒷편에 잠입하였으나 에드나의 아름다움에 
- 남자라고 해도, 좀 무리는 있으나 - 
마치 코스플레이 같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영화 가운데, 처음으로 동성애가 그려진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챠리는 남장한 에드나가 여성이란 것을 눈치 채고도 그녀에게 키스한다. 

이 광경을 목격한 고리아스(Goliath)가 남성끼리의 키스로 착각
여자 훙내를 내며 두 사람을 조롱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챠리한테 발로 걷어 차이는 장면이 있다.   

전형적인 대소동극의 코메디 영화이다.  

Charlie Chaplin - Behind the Screen 1/3 (1916)         





1916년 『링크』 -20분24초- The Rink

1916년 『링크』 -20분24초- The Rink             

챠리의 코믹한 롤라 스케이트의 훌륭한 진짜 솜씨를 마음껏 보여준다. 

바람기 있는 부부, 레스토랑에서의 소동 등
1913년 카노극단 시절 닦은 솜씨로 롤라 스케이트 개그가 전개된다. 

이 것은 뒤에 "Modern Times"에서 크게 활약하게 된다.  

여기서 챠리는 웨이터로 등장하여 셀시 세르쨔 경을 속인다. 

에드나 퍼비앤스(Edna Purviance)는 사교계의 딸로 등장하며...       






바람기 있는 부부가 서로 배신하며 바람 피운며
처의 상대 남자와, 남편의 바람 상대 여성이, 사실은 아버지와 딸 사이이며
더욱이 챠리는 그 딸과 사랑에 빠진다. 

그래서 그녀를 바람 상대로 한 남성으로부터 챠리는 노여움을 사게된다. 
어느 날 우연히 그 5명 전원이 파티에 모이게 되었다.  
당영히 전원이 곧 거북해지면서 드디어 대소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원래 이 작품은
형 시드리 채플린이 쓴 각본에 영향을 받아 만든 작품이다. 

롤라 스케이트에 자신이 있는 챠리가
한 번 이런 작품을 꼭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지금부터 스케이트 지망생이라면
이 영화를 먼저 보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뛰어난 운동능력을 겸비한 챠리의 스케이트 테크닉은 울트라 테크닉이 때문이다.  

Charlie Chaplin - The Rink 1/4 (1916)         





1917년 『자립 재정』 -19분32초- Easy Street

1917년 『자립 재정, 용감』 -19분32초- Easy Street       

이 영화의 공연은 에릭 캠벨(Eric Campbell), 에드나 퍼비앤스(Edna Purviance) 등. 챠리역의 방랑자는 
   경찰관으로 직업전환, 마을의 부랑자를 퇴치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우고, 여성을 광인으로부터 구출하여, 마을에 다시 평화를 되 찾는다.  방랑자 챠리는 악의 근거지로 경찰관도 접근이 어려운, 무법이 횡행하는 빈민가(Easy Street)의 전도소의 미사에 참석한다.  

거기서 아름다운 딸(에드나 퍼비앤스)에게 설득되어 개심하게 된다.   
마음을 바로 잡은 그는, 경찰서 앞에 붙은 경찰모집 광고를 보고, 경찰이 되었다. 
초짜 경찰 챠리의 첫 일은, 악의 두목과 대결이다. 

경찰봉으로도 끄덕도하지 않는 거한을 상대로  용감하게 싸우는 챠리
가까스로 마을의 난폭자(Eric Campbell)를 가스등의 가스로 기절시켜 체포하는 데 성공한다. 

형무소에 쳐 넣었으나
그 뒤로 탈출한 난폭자를 다시 체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방랑자출신 경찰 챠리는
마약 중독자에게 잡혀 있던 딸을 구하는 등 대활약으로
마을의 평화를 되찾는다는 스토리의 훌륭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재미있는 요소라고 한다면
항상 경찰에 쫒기는 부랑자 출신의 챠리가 꺼꾸로 경찰이 된 진귀한(?) 작품.  

당시의 관객을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 넣는 전형적 "Slapstick comedy"에서는
경찰이란 모두가 악역으로 정해져 있서
키스톤 코프(Keystone Kops) 등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대에는 이것이 대단한 인기가 있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여기에 챠리가 경찰역으로 연기 해
경찰관을 영웅으로 그렸기 때문에 대단히 주목할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다시 되돌아 보면
거한과의 대결로, 잽싼 몸 움직임과 발 빠르게 도망다니며
악과의 싸움이다. 

이 소동극에는 빈곤, 기아, 폭력이 있으며,
그 이미지가 강렬히 뇌리에 오랬동안 남는다.  

빈곤과 폭력에 시달리는 마을을 구하는 사회에 대한 통렬한 풍자이다.     

채플린은 경찰역을 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이 넓은 세상에 색안경을 끼고 보는 직업이 있다면, 그것은 경찰관이다.  물론 경찰 자신 아무런 죄는 없으나, 그래도 닭 모가지가 잘려 나가는 것과 같이 경찰이 심하게 당하는 모습을 사람들은 열광한다."(특히 없는 사람에게 필요 이상의 권력을 남용하려 드는 그들의 생리에 대한 반감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1917 - Charlie Chaplin: Easy Street (part 2)         





1917년 『치유』 -19분36초- The Cure



 1917년 『치유』 -19분36초- The Cure          

출연은 에릭 캠벨(Eric Campbell), 에드나 퍼비앤스(Edna Purviance), 헨리 버그맨(Henry Bergman) 등.   

  부자들이 모이는 휴양소에 알콜 중독자 챠리가 나타난다. 
그의 여행가방에는 반입금지인 술로 가득 차 있다. 

다른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덩치큰 거한의 남자(Eric Campbell)를 화나게 한다든가
여성(Edna Purviance)에 반하기도 한다. 
그가 불법으로 몰래 반입한 술병으로 휴양소는 대소동으로 발전한다.  

수영복으로 갈아 입고 마사지를 받고 있는 중에 술병을 주인에게 들키게 되어
이것을 모두 창밖으로 버리게 된다. 

그러나 마침 버린 곳이 온천의 원천이 있는 곳으로
여기에 대량의 술이 흘러 들어간다. 

이 작품은 부랑자 신사의 이미지가 강한 챠리가
이번에는 상류계급의 신사를 연기한 작품이다. 

입고 있는 쟈켓의 색갈이 다르므로 금방 알수 있다. 
이 작품은 당시 노동자 계급 사이에서 퍼진 심각한 음주행위를 코믹하게 그린 작품이다. 





물론 술주정뱅이 하면 그가 18번으로
 챠리를 빼놓을 수 없으며
이 때문에 대단히 재미있는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여기서의 압권은
회전식 도어의 개그로 빙글빙글 언제까지나 회전하고 있어 좀체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도어에 목이 끼이고, 기부스한 다리를 도어 사이에 끼이기도 하며
"놀라울 정도로 훌륭한 타이밍으로 끼인다."라고 감탄할 정도로 정확하게 끼인다.  

가까스로 회전도어를 빠져나온 뒤로도 눈이 돌아갈 정도이다. 
몸을 기울여가며 계단을 올라 가기도 하고
빙글빙글 돌며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대단히 압권이다. 

최고이다. 

정말로 대단한 재주의 연기로 천재적임에는 틀림없음을 증명한다. 
여기서 또 한번 놀라운 장면은
마사지를 받는 신에서
너무나 난폭한 마시지로 마사지대에서 도망 다니는 장면으로 
- 가볍고 부드러운 몸놀림 - 
재빠르게 도망가는 법은 한숨이 절로 나올 정도로 감격적이다. 

결국 아름다운 여성 에드나(Edna Purviance)를 만난다. 

에드나는 술이 들어 있는 줄 모른 채 챠리에게 샘물을 권한다. 

챠리는 처음에는 권하는 대로 샘물을 받아 마신 나머지 드디어 취하게 되어
이것이 에드나로부터 미움을 받게 된다. 

미움받은 채 취해 버린 챠리는 수영장으로 뛰어드는 장면이...   

Charlie Chaplin - The Cure 1/3 (1917)   





1917년 『이민』 -23분57초- The Immigrant


917년 『이민』 -23분57초- The Immigrant   

이 영화의 공연은 웨이터역 에릭 캠벨(Eric Campbell), 이민자역 에드나 퍼비앤스(Edna Purviance), 
  농부.카페의 화가역 헨리 버그맨(Henry Bergman) 그리고 앨버트 오스틴(Albert Austin) 등.  

이 작품은 고도의 정치적 색채를 띤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 영화였다. 

그 이유로는
챠리가 이민국 직원의 궁둥이를 발로 걷어 차는 신이 있다.  

이것은 1952년 챠리가 공화당 상원의원이며 반공산주의자 운동의 공격적 선봉장 조셉 맥커시(Joseph Raymond "Joe" McCarthy=McCarthyism)에 의해 미국을 쫒겨나게 된
반미적 사상의 증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미국 의회도서관에 의해 미국국립 필름등록부에 "문화적, 역사적으로 중요하다."라고
등록되어, 영구 보존된 영화이기도 한 대단히 중요한 가치있는 작품이다.       


줄거리 :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는 배 위가 무대이며
타고 있는 사람들은 미국으로 부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로 모두 빈곤자. 

챠리도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배 안에서 도박판에 끼어 어쩌다가 대박 터뜨리게 된다. 
그런데 돈이 굴러 들어와 최고조의 기분일 때에
가난한 한 여성을 보고 불쌍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녀의 에이프런 포켓트에 살짝 전 재산(?)을 찔러 넣어준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모든 돈을 넣어주고 보니 자기 것이 없음을 깨달게 된다. 

조금이라도 자기 몫으로 되찾으려고 그녀의 포켓트에 손을 넣은 순간
마침 갑판위를 순찰하던 사람에서 들켜버리고 만다. 
물론 소매치기로 몰리게 된다.  

다행히도 그 돈이 원래 그녀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가 증언해 주어 겨우 없었던 일로 끝났다.  

게다가 뒤로 생각지도 않던 좋은 일이 생겨
결국 돈의 여유로 인해
두 사람 함께 행복하게 된다는 교훈적인 스토리이다.  

이 작품도 걸작으로 평가 받고 있으며
챠리의 중기 작품 가운데 특출하다. 

챠리는 이 무렵부터 미국 영화 속에 인간의 따뜻한 온정을 그리려고 하게 되었다. 

자신도 가난하지만
더욱 곤란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인정이 웬지 감동적으로 깊게 전해온다. 
그리고 자유에 대한 야유도 훌륭한 수법으로 그리고 있다. 
미국에 도착하기 직전에 자유의 여신상이 보이게 된다. 

갑판의 승객들은 모두 자유의 여신상을 보기 위해 와-- 아!하고 배 한쪽으로 몰려들자
그곳에 선원이 나타나 "어이! 전원이 한 쪽으로 몰리면 배가 기울지 않아?"라고 화내며
, 밧줄을 가져 와 사람들이 움직이 못하도록 하고 있다. 

자유를 상징하는 심볼이 눈앞에 있으면서도
밧줄로 경계를 만들어 자유가 손에 닿지 않음에 대한 비유를 그리고 있다.  

이 부분이 챠리의 천재적 창조성을 엿볼 수 있는 모습이다.    

Charlie Chaplin - The Immigrant 1/3 (1917)       





1917년 『모험』 -22분31초- The Adventurer

 1917년 『모험』 -22분31초- The Adventurer        


챠리가 무츄얼사와 계약으로 제작한 마지막 작품으로
이 시기를 통해 공연자였던
에릭 캠벨(Eric Campbell)이 1917년 음주운전의 자동차 사고를 일으켜 사망하여
캠벨에게 있어서는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그리고 에드나가(家)의 운전수역으로는
 오랫동안 챠리의 개인 비서로 신망이 두터운 일본인 코우노우 토라이치(高野 虎市)가 출연했다.  






공연자는 에릭 캠벨(Eric Campbell), 에드나 퍼비앤스(Edna Purviance), 헨리 버그맨(Henry Bergman),
코우노우 토라이치(高野 虎市) 그리고 앨버트 오스틴(Albert Austin) 등. 

탈옥수역의 챠리가, 형무소의 간수로부터 도망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도주 도주를 거듭하여 바다까지 도망하게 되었으나
이때 마침 바다에 빠진 여성(에드나)을 구해
그녀의 집에 초대되어 생명의 은인으로 환대를 받는다. 





그 여성은 판사의 딸이다. 
그런데 이 집에서 소동을 일으켜 경찰의 추적이...  
경찰로부터 도망가는 챠리는 앞에서도 뒤에서도 잘 알수 있으나
특히 이 작품에서 "도망 가는 법"이 재미있다.  상당히 교묘하다. 

뒤에 초대받은 집에서 건네 받은 파자마가
공교롭게도 죄수복과 같이 스트라이프 무늬였다는 것은 정말 감탄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는 챠리가 좋아하는 피서지 산타 모니카에서 촬영되었다.  

 
Charlie Chaplin: The Adventurer Part 2              




 퍼스트 내셔날  시대(First National Pictures)
- 총 9작품 -    

First National Pictures(뒤로 Warner Bros. Entertainment, Inc.,와 합병. Warner Bros.) 영화제작.배급회사이다.  뒤로 A Warner Bros. - First National Picture란 이름으로 약 30년 간에 걸쳐 영화제작을 하기도 했다.   이때 채플린의 월급 연간 107만 5천 달러 이상으로 계약.   



1918년 『개의 삶』 -34분36초- A Dog's Life





1918년 『개의 삶』 -34분36초- A Dog's Life        

방랑자역 챨리 채플린, 술집 가수역 에드나 퍼비앤스(Edna Purviance), 악한역에 앨버트 오스틴(Albert Austin) 그리고 가게 주인역 시드니 채플린(Sydney Chaplin) 등. 

챠리의 이부형 시드니 채플린(Sydney Chaplin)이 출연하고 있으며
이 형제가 영화에서 공연하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퍼스트 내셔날로 옮기고 촬영한 첫 번째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챠리의 역은
주인공 개 스크랩스(Scraps)의 조연 역활을 한다. 

챠리가 방랑자, 에드나가 술집의 가수로 각각 연기하며
챠리와 에드나가 보다 좋은 관계가 이루어지도록 스크랩스가 "도우미 역"을 한다.  





방랑자 챠리는 직업 구하기에 실패하자
한 마리 작은 들개를 무리에서 데려온다. 

이런 인연으로 개와 챠리의 공동생활은 시작된다. 

이 작품은 채플린 영화 가운데 가장 훌륭한
즉 웃음과 눈물의 챠리풍이 나타난 본격적인 장편으로
그러한 의미를 갖은 작품으로써는
이 세상에 있는 역사적인 작품이다. 

원제는 "A DOG'S LIFE"으로 직역하여 "개의 생활(삶)"이란 의미로
영화의 진짜 의미로는 "가난한 사람"이란 의미이며
또 "들개와 같이 초라한 생활"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부터는 챠리의 영화 역사
텀벙대는 대소동극에서 "스토리 작품"으로 이동기에 위치한다. 

언제나 같이 직업없이 건들 거리는 챠리.

직업을 찾고는 있으나
실수의 연발과 불운이 겹쳐 어찌할 방도가 없다. 

여기에 핫도그 장사꾼이 다가 온다. 
냄새만으로 견딜수 없게 되어, 하느님에게 "하느님! 도와 주십시오. 
틀림없이 내일이 되면 갚아 드릴테니, 지금 딱 한 번 훔쳐도 되지요?"라고 기원하며 핫도그를 훔쳐 버린다. 
먹으려고 할때에 뼈만 앙상한 개가 다가 왔다. 






챠리는 참담한 모습에 공감하여
나누어 주려고 하는데, 거기에 불독이 나타나 빼앗기고 만다. 
"나나 너나 같은 입장이네..."라며
그 개를 귀여워 하며 데리고 가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개와 공동생활은
어느 때는 소동을 일으키고
어느 때는 개의 활약으로 돈이 생기기도 하고... 서로의 우정이 넘칠듯이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 사용한 개는 스크랩스(Scraps)라는 헌옷같은 개로
이 개가 실로 멋진 역활을 소화해 내고 있다. 

챠리는 특별히 동물애호가는 아니지만
이 개를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찾아 다니며 구하여, 일부러 자기과 비슷하게 만들었다. 

경기가 불황인  밑에서 참담한 인간생활을 들개의 그것과 똑 같이 오버랩(overlap)시킨 특출한 아이디어였다.  채플린 특유의 웃음과 눈물을 공존하게 하는 코메디 스타일을 알리는 명작이다. 

  
A Dog's Life [Charles Chaplin-1918] 2/4            





1918년 『공채』 -5분- The Bond



챠리의 제작.감독의 프로퍼갠더 영화.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 정부가 발행한 전시공채의 일종인 "자유공채"(Liberty Bond)의 구입을 촉진하기 위해 1918년3월부터 6월에 걸쳐 할리우드 동료들과 함께 "자유공채 모집 캠페인"에 참가, 챠리가 미국 정부의 의뢰로 자비로 제작해 전미국에 무료로 배부되었다.  공연은 챠리의 처역 에드나 퍼비앤스(Edna Purviance), 챠리의 친구역 앨버트 오스틴(Albert Austin) 그리고 독일 황제역 시드니 채플린(Sydney Chaplin) 등.   



Douglas Fairbanks & Charlie Chaplin at the Treasury Building
on Wall Street promoting Liberty (War) Bonds (1918)


이 영화는 엄밀히 말하자면 영화라고 말할 수 없다. 
당시 대스타인 채플린을 이용하여 전시공채의 필요성을 알리려고
제작한 선전(프로퍼갠더) 영화에 지나지 않는다. 

우정.애정.결혼의 속박(=bond)에 대해서
각각 옴니버스(omnibus)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어 간다. 

인간으로서 이러한 속박(bond)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챠리가 설교하듯 가르쳐 준다. 

그리고 마지막에 전시공채(=liberty bond)도 같은 "Bond"로써
필요한 것이다! 라고 광고와 같이 호소하는 작품이다. 

지금의 TV CM과 같은 것으로 오락으로 보는 작품은 결코 아니다. 
더불어 이 작품은 영국에서도 전시공채 구입촉진으로 공개되었다.     

Charlie Chaplin - The Bond 1/2 (1918)          





1918년 『어깨 총』 - 44분24초 - Shoulder Arms



1918년 『어깨 총』 -44분24초- Shoulder Arms  

정식으로는 퍼스트 내셔날 시대의 두 번째 작품. 

무대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의 유럽전선. 

전선으로 동원된 일개 병사가
힘든 참호생활 가운데 "카이저" 빌헬름 2세(Wilhelm II, 1859-1941, 제9대 프로이센 국왕. 제3대 독일 황국황제)를 생포하기까지의 이야기이다.  





공연은 미군 병사역 챠리
프랑스 아가씨역 에드나 퍼비앤스(Edna Purviance)
그리고 미군 하사관.독일 황제역 시드니 채플린(Sydney Chaplin) 등. 

채플린의 feature film(장편영화) 가운데 가장 상영시간이 짧다.  






『어깨 총』은 지금까지 공개된 채플린의 영화 가운데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해 비평가나 매스컴으로부터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 새로운 희극영화의 장르를 확립함과
동 시대로서는 획기적인 작품이었다. 

이전과는 달리 희극영화에 전쟁을 테마로 한 것은 이 작품이 최초로 알려져 있다.  


줄거리 : 굼뱅이 미군 병사 챠리는
부대의 행진에 따라가지 못해 휴식이 되면 금방 잠에 빠지는...
전쟁터에서는 무기가 아닌 가재도구로 중무장한 챠리. 

격렬한 전투 속에서에 챠리가 떠올리는 것은 고향에서의 생활. 






전우에게 온 편지를 옆에서 곁눈질로 본다든가
호우로 물에 잠긴 대기참호 속에서도 고향을 떠올린다. 

어느 때 챠리는 적의 공격으로 집이 타버린 프랑스 아가씨(에드나)와 만나게 된다. 

그러나 에드나는 적군의 포로가 되어 버린다. 
과연 챠리는 그녀를 구할 수 있을까?  

- 중략-  

군부의 검열 대상이 되기도 했다.  
군부로부터 "현실이 아닌 것 같이, 리얼하지 않도록 하라!"라고 압력을 받았다. 

참호 속에서 비인간적인 생활묘사나 이상할 정도로 여러가지를 휴대한 야전 등이 모습을 우롱하므로
챠리 초기의 목적(?)이 달성된 눈에 띄는 작품이다. 


가장 재미있는 장면은
적군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나무가지와 풀로 위장한 모습으로 숲속을 헤메고 다니는 신(scene). 





흑백 영화란 점도 작용하여
챠리의 있는 장소가 진짜로 발견하기 어렵다. 

마지막에는 적군의 본부까지 단독진입 
- 이라기 보다는 들어가게 되었다. - 
교묘하게 도망다닌 끝에, 우군을 승리로 이끈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가 제일이다."라는 것이다. 

전쟁을 철저히 싫어했던 챠리의 비판정신이 돋보인다.     


사족(蛇足) : 채플린의 이부형 시드니 채플린(Sydney Chaplin)은, 채플린의 아버지가 집을 나간 무렵부터 어머니는 정신적(정신병)으로 이상하게 된다.  그들은 생애 죽을 때까지 대단히 사이가 좋았던 "씨 다른" 형제였다.  4살 위였다고 생각한다.  "씨 다른" 이유는, 당시 채플린의 어머니 한나 빌(Hannah Hill)은 꽤 남자를 좋아해 아버지가 출장 간 사이 다른 남자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  남의 집 사정 이야기는 여기서 마치기로 하고...  그래서 시드니는, 어린 가난한 시절부터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 온 형제였다.  어린 채플린를 항상 따뜻하게 돌보며 지켜준 고마운 형이기도 했다. 
채플린의 자서선에 그 무렵의 고생담과 형 시드니에 관한 애정이 가슴 아플 정도로 가슴에 전해 온다.    

charlie chaplin shoulders arms    





1919년『양지 바른 쪽』 - 33분23초 - Sunnyside 

Sunnyside

퍼스트 내셔날 시대의 세 번째 작품.
스토리적으로는 엣사나이 시대의 "The Tramp", "The Bank"
                  그리고 뮤츄얼 시대의 "The Vagabond"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 작품은 채플린이 슬럼프로
창조성이 저하된 때에 제작된 것으로 공개 당시 메스컴으로부터의 평가는 냉소적이었다.   

공연은 시골동네 최고 미인역 에드나 퍼비앤스(Edna Purviance), 에드나 부친역 헨리 버그맨(Henry Bergman) 그리고 동네 의사역 앨버트 오스틴(Albert Austin) 등.  


 



이 작품에서 챠리는 시골 잡화점 겸 여관의 종업원역으로 언제나 주인한테 당하기만 한다. 

소를 데리고 산책을 시키면
잃어 버리고
겨우 찾아다고 생각하면 소한테 치어 기절해 버린다. 

그러던 어느 날 도시에서 젊은 미남자의 신사가 동네에 나타난다. 

그런데 이 남자가 아가씨 에드나에게 호감을 나타낸다. 

애인 에드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챠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노력이 시작된다.  






- 중략 - 

이 작품은 1919년의 작품으로 채플린은 이미 결혼한 몸이었다. 
그는 1918년 16살의 여배우 밀드레드 해리스(Mildred Harris)와 결혼했다. 

이것은 첫 결혼으로
이 뒤로도 3번 더 결혼하게 된다. 

채플린는 영화에서는 대성공을 이룩해 역사상 그 이름을 남긴 인물로
세기의 천재로 인식되기 쉽다.  

그러나 사생활에서는 반듯이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에드나 퍼비앤스(Edna Purviance) "he Sea Gull"


그런데 그런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첫 결혼으로 달콤한 신혼 때 채플린이 만든 작품이
"Sunnyside".  Sunnyside Town에서 근무하는 호텔맨 챠리의 바쁜 나날과 비애를 통해
인간의 행복감에 대한 풍자를 표현하고 있다. 

Sunnyside, 즉 햇빛 비취는 양지. 

언제나 평화... 
그런데 챠리만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일해도 쉴 틈이 없다. 





이 영화에서 누가 뭐라해도 압권은, 졸도해서 챠리가 천사와 춤 추는 신(scene)이 유명하다. 
여기에서 "프로 팬트마임" 챠리의 기술을 감상할 수 있다. 

이 때의 댄스는
세계적인 러시아 발레 댄서 니진스키(
Vaslav Fomich Nijinsky)의
          "목신의 오후"(Prelude to the Afternoon of a Faun)를 흉내낸 춤이다.          
   

Charlie Chaplin Sunnyside 1 / 3             
      





1919년『하루의 행락』 -20분18초- A Day's Pleasure


1919년 『하루의 행락』 -20분18초- A Day's Pleasure      

A Dog's Life와 The Kid 사이에 촬영한 단편 작품으로
 이 작품은 채플린의 퍼스트 내셔날 시대에 전 작품 가운데서 가장 인상이 옅은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의 비평가들도 본 작품에 대한 반응이 없었다. 
공개 당시의 뉴욕 타임지는 "다른 코메디언 보다 재미있는 곳이 거의 없다."
(he is little, if any, funnier than many other screen comedians.)라고 평하고 있다. 

공연에는 에드나 퍼비앤스(Edna Purviance), 잭키 쿠건(Jackie Coogan)
그리고 헨리 버그맨(Henry Bergman) 등.         






이야기는 피크닉을 떠나는 일 가족이 참담하게 여러 고생을 격는다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 "어! 엣!"이라고 생각할 정도의 작품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흥미 진진한 채플린의 영화가
여기서는 어떻게 이렇게 되었나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솔직이 말하자면 그렇게 재미 없다고 볼 수 있다. 

어느 가족의 가장인 챠리가, 큰맘 먹고 가족을 데리고 외출하려 하고 있으나
거기에 여러가지 재난을 만나게 된다. 





이 무렵 미국에서는 마이카 시대가 도래하여
챠리는 여기에 착목해 챠리 일가가 자동차로 외출하는 신(scene)으로 시작된다.  

채플린 자신은 이 작품에 대해 "슬럼프 시기의 작품"이라고 뒤에 술회했다. 

특히 이 시기 챠리에게 있어 여러가지 복잡한 사건과 사생활의 트러불도 그 영향을 미쳤다. 

마지막으로, 채플린의 명작으로 꼽히는 The Kid
여기 등장하는 아동역 잭키 쿠건(Jackie Coogan)은
              사실 본 작품에서 The Kid 출연 테스트를 겸한 출연이었다.             

   Charlie Chaplin - A Day's Pleasure 1/5 (1919)         





1921년 『키드』  -68분- The Kid











1921년 『키드』 -68분- The Kid       

채플린의 명작, 세계 영화계의 불후의 작품.  

공연에는 에드나 퍼비앤스(Edna Purviance), 잭키 쿠건(Jackie Coogan) 등. 

The Kid는, 오프닝에서 "웃음과 거의 눈물의 이야기"라고 이야기 하듯
영화 사상 첫 희극과 비극의 융합이 효과적으로 섞인 "장편 희비극영화"이다.  

잭키 쿠건은 당시 보드비리안(경연극배우,Vaudevillian)의 배우에 지나지 않았으나
  - A Day's Pleasure에서 출연 테스트를 거쳐 - 
여기서 당시 7살의 나이에 일약 영화계 최고의 유명 아역배우가 되었다.  






줄거리 : 런던 변두리
남자에게 버림받은 젊은 여성(에드나 퍼비앤스)이 생활고에서 어린아이 처리에 곤란해 한 나머지
어느 부자의 자동차 안에 남겨 두고 떠나 버린다. 

모친은 어린 자식을 버렸다는 자신의 자책감과 후회를 느끼며 살아 가게 된다는...,
라는 모친역을 훌륭하게 연기하고 있다. 

거리의 부랑자 챠리가 그 아이를 데리고 가서 키우기로 한다. 
5년후, 성장한 어린이의 이름은 "키드"라고 불렀다. 

사냥 모자(hunting cap )에 허름한 스웨터 모습으로 등장. 
챠리를 도우며, 사기꾼 같은 속임수 상술로 연명해 간다. 
이때 여기에, 지금은 인기 절정의 대스타로 성공한 한 오페라 가수의 생모가 나타나는 데...

이 작품은 챠리 영화의 멜로드라마 가운데 최고의 걸작 중에 걸작으로 꼽힌다. 
"개의 삶"에서는 개를 귀여워하는 데 반하여
이 작품에서는 챠리 자신 여전히 가난한 입장에서 버려진 아이를 키우게 된다. 






처음에는 아이를 키울 여력이 없음을 알면서도
포기하려고 해도 차마 포기할 수 없이
결국 귀여워하며 돌보기로 한다. 

챠리의 애정이 눈물 겹도록 전해 온다. 

성공하여 부자가 된 여성은
어린 자식을 버린 죄악감을 버리지 못하여
벌은 돈으로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자선활동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자식이란 것을 모른 채 물건을 나누어 주는 사이
, 옛날 길거리에 무정하게 버린 자신의 자식을 기억에 떠올리게 된다. 

챠리 영화의 첫 장편
관객을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 넣는 전형적 "Slapstick comedy"와 같은 요소와 더불어
부랑자와 줏은 아이의 부자애에는 눈물의 감동적인 드라마틱한 연출이 대단히 훌륭하다.   







잠깐 그런데 여기 아역 잭키 쿠건(Jackie Coogan)은
당시 할리우드 영화관에서 영화와 영화 막사이에 자신의 어버지와 함께 출연(Vaudevillian)하여
춤 추던 작은 소년이었다. 

이 때가 그는 5살로 챠리가 가장 신뢰하는 일본인 비서 코우노우 토라이치(高野 虎市)가
그를 발견하여 챠리에게 직접 한 번 보러 갈 것을 권유한 것이 아역 발탁으로 이어졌다. 

잭키 쿠건은 그러한 챠리의 기대에 훌륭히 대답했다. 

잭키는 이 영화에서 지금까지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아역의 명연기로 극찬을 받았다.  
또한 실제로 촬영에는 고생과 정성을 많이 들였다. 

한 예로, 잭키가 팬케익을 구워 챠리의 아침식사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알리며
둘이서 같이 먹는 신(scene)이 있으나
이 신을 촬영하기 위해 5일간 씩이나 반복하며 정성을 들였다고 할 정도였다.  

또 이 "The Kid"라는 작품은 공개까지 갖은 고난과 우여곡절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영화가 공개되기 전인 1920년
챠리의 첫 결혼 상대 밀드레드 해리스(Mildred Harris)가 이혼소동을 일으켰다. 
16살에 결혼하여 이때 그녀는 아직 18세였다. 

그녀 자신보다
그녀의 어머니가 "결혼 위자료로 현재 촬영 중인 작품을 뺏어 오라!"라고 했다. 
이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 그녀는, 곧 완성 단계의 "The Kid"를 자기 것으로 하려고 한다. 

이것을 미리 눈치챈 챠리와 그의 비서 코우노우는
둘이서 아직 미완성 단계의 "The Kid" 필름을 12상자로 나누어 낡은 트럭에 실고 도피하게 된다. 

마치 진짜 챠리의 영화가 그대로 현실로 나타난 것과 같았다. 
도피행에 나선 일행은, 이전에 부정의혹 문제로 유명해진 올림픽 개최 예정지
유타주 솔트레이크 시티에 도착해 싸구려 호텔에 몸을 숨겼다.  

여기서 챠리 혼자 편집하여, 겨우 밀드레드의 손을 벗어나
"키드"는 무사히 1921년2월6일 뉴욕에서 개봉되었다. 

그 결과, 폭발적인 대히트 대기록으로
그로부터 3년간 이 "키드"가 전세계적으로 상영되지 않은 나라는 소련, 유고슬로비아, 콜롬비아밖에 없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된 "키드"였으나
이러한 배경과는 관계없이 작품 그 자체가 너무나 훌륭하다는 표현밖에는 없다. 
당시 점차적으로 무성영화에서 토키로 이행하기 시작하는 시기였으나
챠리는 끝까지 무성영화를 고집했다. 
"토키로 하면 말을 못 알아 듣는 사람에게는 내용의 전달이 어렵다."라는 그의 신념에서 였다. 

그 대신 이 무렵부터 챠리의 영화는 언어가 없는 대신, 귀가 아닌 "눈"으로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언어가 필요 없이, 자막도 없다. 
챠리의 영화는 영상 전체가 관객에게 직접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키드"의 내용에 접근하면
"관객 모두가, 이 영화에서 웃음과 그리고 한 방울 이상의 눈물을 흘리며 관람하게 된다.",
"그 여자의 단 한 가지의 죄라면, 어머니라는 것이었다.". 

폭소영화 가운데 눈물의 명작이다. 
정말 훌륭한 영화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가르쳐주는 작품이다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일생에 수 많은 명화라는 영화를 접한다. 
그러나 채플린의 『키드』 - The Kid를 보지 않고는 상당히 섭섭하다. 

일생 심금을 울리며 평생 기억에 남는 불후의 명작임을 의심치 않는다.  
무성영화 시대를 비록하여 영화사상 최대 걸작이다.           

The Kid, Charlie Chaplin, 1921         





1921년『아이들 클래스』 -25분04초- The Idle Class

1921년 『아이들 클래스, 골프광 시대』 -25분04초- The Idle Class   

출연 에드나 퍼비앤스(Edna Purviance), 헨리 버그맨(Henry Bergman) 등.
             건달에 성내기 쉬운 상류사회 신사와 부랑자를 1인 2역으로 연기하는 챠리의 희극. 
귀족적인 스포츠라며 골프를 싫어했으나, 신랄한 모습을 보여준다.  
High society를 훌륭하게 우롱한 단편으로 "채플린의 골프광"이라고도 한다.     

줄거리 : 챠리의 상류사회 풍자 영화는 이 것만이 아니지만
이 작품이 제일 강렬하고 그리고 재미있다. 

이 영화는 방랑자 챠리가 골프하는 신(scene)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한다. 

골프로 다른 플레이어에게 폐를 끼친 뒤에
이 일로 쫒기게 되어 가까스로 도피에 성공하는 듯하였다. 
이 여파로 상류계급 사람들의 가장 무도회에 들어가 섞이게 된다.  



Charlie and Edna Purviance in The Idle Class


이 무도회는 전원이 가장하고 있다. 
여기에 챠리가 섞여 들어가게 되자
주위 사람들이 룸펜(Lumpen, 부랑자)로 분장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훌률하다"고 칭찬한다. 

상류계급 사람들이 마치 챠리의 재능에 놀아나는 기분이다.  
그런데 챠리는 이 작품에서, 부자이며 행실이 좋지 않은 신사역을 동시에 연기하고 있다. 

이 부자와 부랑자의 얼굴이 똑 같아서
그 때문에 부랑자가 이 신사로 잘 못 알고 점점 곤란은 확대돼 가기 시작하는 곳이 재미있다. 

부자에게는 부인(Edna Purviance)이 있으나
부인에게 버림을 받아 어깨를 들섞이며 눈물 흘리는 장면있으나
자세히 보면, 어깨가 흔들리는 것은 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칵테일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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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인은 챠리를 자기의 남편으로 착각한다. 

가장 무도회에서는 재미있는 곳이 많이 있으나
결국 챠리는 여기서 나가게 된다. 
왜 그들은 그토록 허무해 보이는가? 
다들 왜! 너무나 시간이 남아 돌아 곤란해 있는가? 

왜 그렇게 할 일이 없는가? 
그리고 다들 희망이 없는 절망 같은 것을 느낀다. 
"돈은 있을 줄 모르겠으나, 나는 그런 곳이 싫다."라며 빠져 나간다. 

또 방랑의 시작이다. 
상류계급의 대단한 풍자이다. 

더불어 이 작품은 리바이벌 공개되었으며 이 때에 "골프광 시대"로 개명되었다. 

 
Charlie Chaplin - The Idle Class 1 / 3         





1922년 『월급날』 -25분24초- Pay Day


1922년 『월급날』 -25분24초- Pay Day     

공연에는 챠리의 처역 필리스 앨렌 (Phyllis Allen),  현장 감독역 마크 스웨인(Mack Swain), 
마크의 딸역 에드나 퍼비앤스(Edna Purviance), 챠리의 술친구역 헨리 버그맨(Henry Bergman)
그리고 채플린의 형 시드니 채플린(Sydney Chaplin)등.     

First National Films 시절의 7번째 작품이며, 마지막 단편에 해당한다. 

줄거리 : 건설 현장에서 육체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챠리
지각 출근 위에 실수를 거듭해 책임자로부터 심한 대접을 받는다. 






어찌 되었든 월급날
잔업수당이 잘려 항의 하기도 해 보았으나
결국에는 계산 잘못으로 여분으로 받은 월급까지 요령 부족으로 다시 밷어 내야했다. 
이렇게 챠리가 얼마되지 않은 월급을 받아 동료들과 밤 늦도록 술 마시고
그의 월급봉투를 장악한 공처(恐妻)가 기다리는 집으로 귀가하기까지를 그린 단순한 내용의 작품이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스토리에, 채플린은 여기에서 그만의 천재성이 발휘한다. 
일개 시민생활의 비애와 현재에도 통하는 곳이 많은 개그로 충만되어 있다. 

이 작품은 채플린의 후기 작품 가운데 가장 우수한 단편영화로 평가 받고 있다.  

빌딩 공사현장에서의 소동
그나마 내놓으면 용돈이 거의 바닥이 나버리는 얼마 안 되는
그런 월급을 노리는 챠리의 처의 모습
저소득 근로자의 비애를 탁월히 묘사한 작품이다. 

유산계급의 공허한 생활을 그린 "The Idle Class"와 비교해 보면
 채플린의 계급이나 노동이란 것에 대한 의식을 여실히 표현된 것을 알 수 있다. 

월급날이란 누구나 즐거운 날이지만
챠리의 경우 처가 항상 현관에서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다. 

어디에 가든 항상 처의 손길이 닫지 않은 곳은 없다. 
현대 샐러리맨의 비애를 챠리는 이미 그 시대에 표현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신(scene)이라면
공사현장에서 밑에서 위로 던지는 벽돌을 챠리가 화려하게 받는 장면.     

Charlie Chaplin - Pay Day 1 / 3            





1923년 『순례자』 -59분- The Pilgrim     



1923년 『순례자』 -59분- The Pilgrim         

공연은 브라운 양역에 에드나 퍼비앤스(Edna Purviance), 열차 보안관 등 1인2역 헨리 버그맨(Henry Bergman) 그리고 1인 3역 시드니 채플린(Sydney Chaplin) 등. 

이 영화는 제작기간에 1년이 걸린 작품으로
챠리와 오렛동안 콤비로 같이 연기해 온 에드나 퍼비앤스(Edna Purviance)와의 마지막 영화이다.  
또한 챠리에게 있어서 퍼스트 내쇼날 시대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죄수복의 챠리


챠리가 연기하는 탈옥수는
도망하기 위해 죄수복을 벗어 버리고 목사의 옷을 훔쳐 입고
목사가 되어 도주 중에 있다.  

- 도주 중의 챠리가 열차에 탄 장면으로, 옆 좌석에 앉은 보안관이 읽고 있는 신문의 기사에는,
자세히 보면 1922년5월17일자 신문으로 이름이 "Lefty Lombard" 혹은 "Slippery Elm"로 되어 있다. 



목사로 가장한 챠리


형무소의 식당 하수도관을 타고 하수 처리장으로 빠져나가 탈옥해
1,000달러의 현상금이 붙어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의 탈옥은 치밀하게 계획된 대량탈옥의 일환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는 어느 작은 마을에 도착하게 되나
그곳에서 웬지 알 수 없으나 환영을 받게 된다. 

사실은 이 마을에 새로 부임하게 되는
목사가 도착하기로 예정되어 있어 챠리를 진짜 목사로 착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날도 이미 저물고 하여 "잠깐이면, 좋다!"라고 생각해
교회에 가서 설교하기로 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교묘한 화술로 모두를 속이고 있었으나
점차로 설교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그 정체가 탈로나
보안관에게 쫒기기 시작한다.  

- 중략 -  

여기에서는 라스트 신이 감동적이다. 

챠리의 작품에서는 마지막 신에 "등진 채" 터벅터벅 걸어 가는 모습이 유명하나
이 작품에서는 또 다른 맛을 보여준다. 

라스트의 라스트까지 웃게 하는
감상이 끝난 뒤로도 그 여운이 오랫동안 시원하게 그리고 즐겁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Charlie Chaplin - I am Bound for Success - The Pilgrim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시대(United Artists Entertainment LLC, 통칭:UA) 
- 총 8 작품 - 

영화 배급회사로 현재는 거대 미디어 기업인 Metro-Goldwyn-Mayer Inc.,(MGM, 영화.TV 프로 제작배급회사)에 속해 있다.  1919년 챨리 채플린, 더글라스 페어뱅크스(Douglas Fairbanks), 메어리 픽포드(Mary Pickford) 그리고 감독 David Wark Griffith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들은 거대회사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창조적인 작품을 스스로 제작.배급을 목적으로 초기의 UA는 협동조합 형태로 설립되었다.       


 
1923년 『파리의 여인』 -84분- A Woman of Paris

1923년 『파리의 여인』 -84분- A Woman of Paris  

챠리의 히로인으로서 오랫동안 출연해 온 에드나 파비안스의 마지막 출연작.  

공연은 에드나 퍼비앤스(Edna Purviance), 헨리 버그맨(Henry Bergman), 칼 밀레(Carl Miller),
아돌프 맨주(Adolphe Jean Menjou) 그리고 시드니 채플린(Sydney Chaplin) 등.            

이 작품은 채플린 영화 가운데서도 가장 특이한 작품으로
감독에만 전념하고 챠리 자신이 18번인 방랑자 역으로 출연하지 않았다. 


 
에드나 퍼비앤스(Edna Purviance)


그리고 지금과 또 다른 점은 개그다운 개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아름다운 멜로드라마이다. 

단지 기차역에서 허리가 구부러진 운반역 포터로서
순간 카메오 출연(Cameo appearance / Cameo role, 가장 유명한 Cameo appearance로 꼽히는 것은 알프레드 히치코크 감독)하고 있을 뿐이다.  



에드나 퍼비앤스(Edna Purviance)와 아돌프 맨주(Adolphe Jean Menjou)


주의 깊게 눈여겨 보지 않으면
챠리의 출연 영화이면서도 챠리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관객이 대부분이다. 

이것이야 말로 채플린의 실제 의도였다.  

또 한 가지 지금까지의 채플린의 영화와 다른 점은
이 영화가 희극이 아니라 serious drama인 점이다. 

이 영화는 일반관객으로부터는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했다. 

지금까지 챠리의 인기는 상당한 것이 였으며
따라서 많은 관객이 챠리의 연기를 기대하여 이 영화의 상영에 기대했다.     



에드나 퍼비앤스(Edna Purviance)와 칼 밀레(Carl Miller)


줄거리 : 서로의 부모가 반대하는 쟝 밀레(칼 밀레)와 마리(에드나 퍼비앤스)는
파리로 도망가기로 약속하지만 출발 직전에 쟝의 부친이 급환으로 쓰러진다. 

이런 이유를 모르는 마리는 파리에 도착해 거기서 고급 창부로 성공한다. 

수년 뒤, 화가공부를 위해 파리에 도착한 쟝은, 마리와 재회. 

두 사람의 사랑은 다시 살아나는 것 같이 보였으나 운명의 장난과 같이 엇갈리기 시작하여
쟝은 절망한 끝에... 

Trailer for "A Woman Of Paris" (1923)            





1925년 『황금광 시대』 -96분- The Gold Rush







1925년 『황금광 시대』 -96분- The Gold Rush     

1924년 리타 그레이(Lita Grey)와 "황금 시대"의 주연 여배우로 계약
11월26일 그녀와 멕시코에서 결혼.  
   전위 예술가 쟝 콕토(Jean Cocteau)는 이 작품을 "사이렌트(무성영화) 예술의 최고봉"으로 절찬한 영화.
  
1923년 챠리는 친구이며 동업자인 더글라스 페어뱅크스(Douglas Fairbanks), 메어리 픽포드(Mary Pickford) 부부의 집을 방문했을 때
알래스카주 칠크트 고개를 넘는 발굴자 행렬의 사진을 보고 작품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이 아이디어에, 1848년 시에라 네바다 개척단의 비극을 도입했다. 
촬영은 이해 겨울부터 시작하여 처음에는 네바다에서 현지 로케로 감행했었으나 
채플린이 감기에 걸리기도 하고, 악천후로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채플린은 스듀디오에서 촬영하기로 변경했다. 
실내에 대형 눈이 쌓인 산과 마을의 세트를 만들었다. 
눈은 소금과 밀가루로 대용했다. 

또 이 영화의 히로인역이며 뒤에 챠리의 부인이 되는 리타 그레이가 임신했기 때문에 그녀의 역은 교체되었다.  

칠크트 고개를 넘는 끊없이 이어지는 발굴자 행렬의 신(scene)은 근처의 새클라멘토에 있는 노숙자(Homelessness) 등 600명을 동원한 것이었다. 

챠리의 영화로써는 이레적의 대규모로 동원한 로케이션을 감행하는 등
"채플린의 영화 가운데 가장 노력이 들어간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이 작품에서 챠리의 많은 영화에 출연한 에드나 퍼비앤스와 완전히 헤어지게 된다. 

처음에는 그녀를 주연배우로 할 생각이었으나
이 무렵부터 에드나는 너무 뚱뚱해졌으며
더욱이 스캔들에 휩쓸리기도 하여 채플린과 출연 계약을 맺기는 했으나 결국 주연으로 발탁되지는 않았다.  

채플린 자신 이 작품은
자신이 이상이라고까지 생각하고 있던 것으며
만년에 이르기까지 "채플린이라고 하면
먼저 이 작품의 챠리를 떠 올려주기 바란다."라고 이야기했을 정도였다. 





이 작품의 출연에는
부랑자역은 아니지만 눈에 익은 그의 모습으로 분장한 금 채굴자역 채플린(Charlie Chaplin)
술집 여자역 조지아 헤일(Georgia Hale)
지명 수배자역 톰 머레이(Tom Murray) 등. .  

줄거리 : 때는 골드러쉬로 들끓는 알래스카. 
새로 금광이 발견된 알래스카에 일확천금을 노리는 무리가 몰려든다. 

챠리도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최근 웬지 운이 안 붙어!!"라며
특별한 것도 없으며 막연히 알래스카로 향하게 되지만
엄청난 폭설을 만나게 되어 버린다. 

겨우 피난처로 피한 오두막에서 흉악범과 함께 지내게 되는 불운을 만나게 되었다. 





이 영화의 최대 압권은
오두막에서 일단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롤빵 댄스, 신발을 먹는 신, 챠리가 닭으로 변신하는 신 그리고 절벽에서 떨어질 듯한 오두막에서 가까스로 탈출하는 신 등등...인상적인 신(scene)이 풍부하여 "채플린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하는 팬이 많다.  


극한 상황에 달한 인간의 심리상태와 행동을 극명하게 표현해 주고 있으며
특히 챠리와 흉악범이 추위와 기아를 견디지 못해
챠리의 너덜너덜 낡은 신발을 삶아 먹는 신이다. 




골드러시 chkfdudwnddptj


여기서 챠리는 아무리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타인에 대한 부드러운 인정을
결코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신발을 먹게되자 먼저 부드러운 가죽 부분을 흉악범에게 주고 자기는 딱딱한 신발바닥을 먹으려 한다. 
이러한 섬세한 부분까지 신경이 미치는 챠리의 천성에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신발바닥을 먹는 신(scene)이 대단히 재미있다. 
신발끈을 스파게티와 같이 먹는다든가






신발바닥에 박힌 못을
마치 생선뼈를 발려내며 맛있게 먹는 신(scene)은 몇 번씩 보아도 감탄하게 된다. 

이 작품에는 인간의 예리한 각도에서 본 "채플린의 재능"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비극이 웃음의 정신을 자극해 주며, 웃음은 반항정신이다. 

자연의 위력 앞에서는 자신의 무력함 때문에 웃을 수 밖에 없으며
웃지 않으면 머리가 이상해 질 것이다."라는 채플린의 철학을 엿 볼 수 있다.    

이러한 감동에는 채플린 자신도 많은 고생을 경험한 산물이었다. 
이 신(scene)을 위해 63회나 반복해 가며 촬영을 했다고 할 정도로 정성이 담긴 역작이었다.  



골드러쉬 촬영중에서


그러나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너덜너덜한 신발을 먹는다는 행위는
그냥 챠리의 웃기기 위한 소재뿐 만이 아니라
챠리의 의사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한다. 

이 낡은 신발은 그의 지팡이와 함께 그의 "트레이드 마크"의 하나이다. 

이런 그것을 먹어 버린다는 것은
챠리가 챠리가 아님을 말한다. 

실제 챠리는 이 작품에서 지금까지의 챠리와 결별할 셈이었다. 
자료에 의하면 이 작품으로 챠리는 "영화촬영하는 일을 끝내려고 했다."고 쓰여있다. 

그 진위에 대한 것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 뒤로 챠리의 작품에 챠리가 지금까지의 "방랑자 스타일"로 출연하는 적은 거의 줄어들게 되었다.    






- 중략 - 

오두막에서 헤어져 산기슭로 내려와 광산동네의 신흥 도시에 도착한 챠리는
술집에서 만난 죠지아에 한 눈에 반한다. 

처음 챠리는 그냥 일방적인 짝사랑에 지나지 않았으나
죠지아도 난폭한 상대가 싫어져, 챠리에게 조금씩 마음이 기울어져 간다.  

산전수전 우여곡절 끝에 금광을 발견하여 백만장자가 된 챠리. 

돌아가는 배위에서 죠지아와 재회.  그리고 해피엔딩.  

Charlie Chaplin - The Gold Rush 1/10 (1925)           





1928년 『서커스 』 -72분- The Circus

1928년 『서커스 』 -72분- The Circus          

감독.각본.연출.음악.주연 채플린의 1928년 아카데미 명예상 수상 작품이다.  
처음 이 작품에서 아카데미 감독상.주연 남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었으나
명예상 수상에 그치고 노미네이트는 취소되었다. 

노미네이트가 취소된 이유에 대해서는 할리우드에서 반감을 산 것이라는 설이 있다. 
공연은 Merna Kennedy, Harry Crocker 등.  



Henry Bergman and Charlie Chaplin share a joke during a break in filming          


촬영 전에 영화 세트장인 텐트가 바람에 파괴되기도 했으며
4주간에 걸쳐 촬영한 필름을 현상실수로 사용불능이 되는 등,
이 작품의 제작에는 어려움 따랐다. 

또 채플린의 사생활에서도 두 번째 부인 리타 그레이(Lita Grey)와 이혼소동이 재현되는 가운데
심리적으로 다사다난한 시기에 제작된 작품이었다. 

이 때문인지 "채플린 자서전"에서도 채플린 자신 이 영화에 대해서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줄거리 : 서커스에 굴러(?) 들어가게 된 부랑자 챠리가
여기서 말타기 재주를 부리는 소녀에 매료되어 일으키게 되는 소동. 
그리고 실연하여 외톨이가 되지까지 훌륭하게 그리고 있다. 

이 무렵의 영화계 시대로는 드디어 "토키 시대"의 도래가 시작된다.   

그러나 챠리는 세계 중의 언어가 다른 점
자신의 작품은 대사없이
"눈으로 보는" 작품이기 때문에 토키는 필요없다고 "사이랜트"를 고집했다. 
하지만 "황금 시대"에부터 채플린은 "자신의 시대는 이미 지났다."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전 작품에서 신발을 먹는 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하여튼 이 작품은 챠리가 서커스단의 일원으로 묘기를 피로하는 장면이 여기저기 많이 있다. 

아무리 보아도 서투른 줄타기
진짜 호랑이 우리에 들어가 나오지 못하게 되는 신(scene)
어느 것을 보나 진짜 서커스보다 더 즐거운 서커스이다.  

여기에서 가장 압권은 챠리가 서커스 단원의 일원으로서 줄타기를 하게 된다. 
밑에서는 생명줄을 당기는 단원이
실수로 조종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여유의 미소로 연기를 피로하면서
차츰 생명줄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그러나 많은 관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찌되었든 건너지 않으면 안 된다. 

보기에 조마조마하며 위태로운 줄타기 모습은 관객을 즐겁게 하기는 커녕
초조하게 만든다.  

이 유명한 장면에 대해 어떻게 촬영했을까?라고 하는 의문은 갖게한다. 

사실 이 신은 챠리가 진짜로 지상에 수 십미터 높이에 밧줄을 걸고 건넜다. 
즉 스턴트맨의 역활을 본인이 직접한 것이었다. 

그는 매일 조금씩 밧줄의 높이를 높여 가며
연습을 거듭하여 이 신을 촬영하는데 성공했다. 

영화에 있어서 그는 혼과 생명을 건 것이었다.  
또 여기 이 장면에는 4마리의 원숭이가 조연으로 출연하여 줄타기 명인 챠리를 끝없이 방해한다. 



The circus monkeys make Charlie's treacherous trapeze walk trickier


챠리의 어깨와 머리에서 코를 끈질기게 갉고 있는 암컷 원숭이는 조세핀이란 이름으로
1949년 태어난 채플린의 차녀에게 이 원숭이의 이름을 붙였다. 
챠리가  이 원숭이의 연기가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를 말해 주는 에피소드에기도 하다.  

추가로 이 작품은
제작 당시 두 번째 부인 리타 그레이(Lita Grey)와 이혼소동 가운데 있어
챠리 자신의 심경소설 풍자영화라고 찬비양론이 일었다. 

그러나 이런 것과는 무관하게 가족과 즐길수 있는
"배꼽 빠질 정도로 눈물날 정도로" 훌륭한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재 공개판 영화에서는 챠리가 영화의 주제가를 직접 불렀다.  
 
 
Charlie Chaplin - The Circus part 1/8         





1931년 『시티 라이트』 -86분- City Lights

1931년 『시티 라이트』 -86분- City Lights    

공연은 방랑자 Charlie Chaplin, 꽃파는 처녀 버진 체릴(Virginia Cherrill), 꽃파는 처녀의 할머니 로렌스 리(Florence Lee) 그리고 부호 헤리 마이어(Harry Myers) 등.      

시각 장애자(盲人) 꽃파는 처녀를 거리에서 만난 챠리는 그녀에게 한눈에 반한다. 
없는 돈으로 꽃은 하나 사 준다.  

어떻게라도 그녀를 돕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그에게는 돈이 없다. 
그리고 어느 날 챠리는, 그녀의 가족이 월세를 못 내어
쫒겨나게 된 사실을 알게 됨과 동시에
맹인 치료에 성공한 의사의 기사가 신문에 실린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부터 챠리는 필사적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는 데...       



방랑자 Charlie Chaplin과 꽃파는 맹인 처녀 버진 체릴(Virginia Cherrill)


이 작품은 채플린의 영화 가운데 너무나 유명한 작품으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영화 미지막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신(scene). 

"서커스"에서는 챠리의 18번인 대소동의 진수를 보여 준 작품이라면
이 작품은 성을 중시한 멜로드라마의 진수,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다. 

원 신, 원 신이 대단히 훌륭하다. 
...앞 못 보는 처녀를 위해 돈 준비 하려고 한다. 






그러나 일자리에서는 목이 잘리고, 복싱으로 벌려고 해도 잘 안 풀린다. 
부랑자 챠리는 걱정으로 시름하고 있을 때 술에 취한 부호를 만나
그의 집으로 가서 1,000달러를 받게 된다. 

그러나 이 집에  마침 도둑이 들어 경찰을 부르게 되며
경찰이 출동해 집에 도착했을 때는 도둑은 이미 도주한 뒤였다. 

또 부호는 경찰이 도착했을 때는 술도 깨어 있어
, 부랑자에게 1,000달러를 준 사실을 잊고 있었다. 

경찰에게 의심받게 된 부랑자 챠리는 부호의 집에서 도주하기 시작한다. 





다음날 챠리는 이 돈을 꽃파는 처녀에게 집세와 눈 수술비로 1,000달러를 건네주며 악수하고 해어진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챠리는 경찰에 도둑으로 잡히게 된다.  
시간은 흘러...
형무소를 나온 챠리는 얼만가 걸어 가게 되자 눈 치료가 완료된 꽃파는 처녀와 재회하게 된다. 

눈 치료하기 전
그녀의 인상에는 챠리가 돈 많은 부호 신사였을 것으로 착각했기 때문에
눈 치료가 성공하여 눈앞에 챠리가 나타나도
자신은 눈앞에 있는 남자가 치료비를 지불해 준 은인이라고 눈치 채지 못한다. 

오히려 챠리의 초라한 방랑자풍의 모습에 측은하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동정하여 꽃과 돈을 건네려고 한다.  




방랑자 Charlie Chaplin과 꽃파는 맹인 처녀 버진 체릴(Virginia Cherrill)


그러나 챠리는 그녀가 실명에서 눈이 보이게 된 것은 기쁘지만
차마 자신의 초라한 진짜의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는 꽃과 돈을 건네 주는 순간, 
- 이전 그녀의 육감으로 - 그녀는 "이 손이다!"라고 알게 된다.
(그러나 사실은 이 중요한 순간의 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관객도 있다.)

눈 앞의 방랑자가
자신의 눈을 치료해 준 은인이라고... 처녀는 "당신이지요?"라고 한 마디 대사
영어로 "You!" 단 한 마디. 

지금까지 나는 이 한 마디가 이렇게 의미 깊은
너무나 훌륭한 대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왜나하면 「Can you see now?」 혹은 「Yes, I can see now.」라는 표현으로도 훌륭했기 때문이다. 
손을 잡은 순간 과거의 모든 기억이 되살아 난 놀라운 기억력
이러한 스토리는 채플린만이 가능한 것일까? 
감동했다.   

그리고 여기서 누구나 눈물을 흘린다.   

이 작품은
미국 음악협회 (American Film Institute, AFI - AFI's 100 Years…100 Movies)가
영화 역사 100년 100영화에 11번째로 선정된 작품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서 - 아카데미상 9회 수상 경력의-  음악을 담당한 영화 음악계의 전설적인 거장 Alfred Newman(1900-1970)에게도 관심을 갖을 만도 하다. 

그는 Les Miserables -1935,  History Is Made at Night -1937, 폭풍의 언덕 -1939,  The Grapes of Wrath -1940,
The Mark of Zorro -1940, The Keys of the Kingdom -1944, My Darling Clementine -1946, All About Ev-1950, Les Miserables(Susan Boyle, Elaine Paige) -1952, The Seven Year Itch(Marilyn Monroe, 한국공연-1955, Love Is a Many-Splendored Thing(모정) -1955, The King and I(Yul Brynner) -1956,  Anastasia-1956, South Pacific -1958, The Diary of Anne Frank(Miss Quack Quack) -1959, Airport-1970 etc.. 
수 많은 영화 음악을 남겼다.  


"City Lights"
일생에 몇 번씩 반복해 보아도 질리지 않는 명작 중의 최고 명작이다.  



Cit
y Lights Last scene


그리고 누구나
이 작품으로 가슴에 전해 오는 감동적인 "인간애"를 느껴보길 바라는 마음이다.   
    
 1932년 이 영화 촬영이 끝나고 채플린은 일본을 방문했다. 
이때 일본군부는 5.15 사건을 일으키면서
마침 방일한 요인을 암살하여 국제사회에 임팩트를 주려했었다. 
이때 채플린은 스모(일본씨름) 관전으로 위기일발의 재난을 피할 수 있었다. 

이 구데타 사건으로 당시의 수상 이누카이(犬飼毅)가 암살되므로 정당정치의 종말을 알렸다. 
그리고 4년 뒤에 다시 2.26 사건의 구데타로 군부의 정치지배가 결정적이 되었다. 

Charlie Chaplin City lights 1931 part1 9          





1936년 『모던 타임즈』 -85분- Modern Times




 『모던 타임즈』 이탈리아용 포스터


1936년 『모던 타임즈』 -85분- Modern Times             

채플린 감독.제작.각본.작곡을 담당한 희극영화로 채플린 대표작의 하나. 
공연은 불량소녀 폴레트 고더드(Paulette Goddard), 캬바레 주인 헨리 버그만(Henry Bergman), 공장 기술자 체스터 콘크린(Chester Conklin) 등.        

이 작품이, 인간을 기업의 이익을 내기 위한 도구로 여기는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비판한 영화. 
 
"모던 타임스"가 미국 우파들에게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주의 작품으로 보였으며
 결국 이것은 1950년대 반공주의 광풍(狂風)인 매카시즘의 최대 피해자의 한 사람이 된다.  




Charlie Chaplin & Paulette Goddard & Henry Bergman (Modern Times, 1936)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
인간의 존성성이 잃어 가는 마치 기계의 일부가 된 것 같이 되어버린 세상을 웃음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채플린 자신이 스크린에서 처음으로 육성을 발한 영화로써도 유명하다.  

술집(Pub)에서 엉터리 외국어 프랑스풍의 티티나(Titina, Charlie Chaplin - Je cherche apres Titine)와
라스트 신에서는 스마일을 노래하는 신을
채플린 자신의 육성으로 들을 수 있다. 

흑백 사이렌트 영화이면서도 영화음악을 영상으로 올려
그 음악적 천재성을 보여준다.  

토키영화가 1927년 등장한 가운데
1936년 당시 세계에서 사이랜트 영화를 만들고 있었던 유명한 영화작가는
채플린 오직 한 사람 정도 였다고 한다.            

커다란 공장에서 일하는 공원 챠리는
컨베어 벨트로 차례차례로 운반되어 오는 나사
오로지 반복되어 나사 조이는 일에 드디어 발광하여 트러블을 일으킨다. 

병원 신세를 지게 되고 드디어 목이 잘린다. 

퇴원하여 거리를 어슬렁 거리는 사이 데모대에 참가하자
이번에는 주모자로 경찰에 체포
감옥행 그리고 감옥에서 탈옥수를 격퇴한 공적이 인정되어 모범수로 석방다.  





직장을 소개받아 조선소에서 일하면서 미완성의 선박을 진수시켜 또 목이 잘린다. 

거리를 방황하는 생활이... 그런 불운이 연속인 가운데
챠리가 어느날 거리의 외톨이 불량 소녀를 알게 된다. 

의기투합한 챠리는
두 사람을 위해 집장만 꿈을 가슴에 품고 분발해 일한다. 

백화점의 야간 경비원, 공장 기술자의 조수의 일자리를 얻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만다. 
게다가 경찰 신세를 지게 된다.  뒤로는 소녀가 일하기 시작한 캬바레에서 웨이터직을 얻어
여기서 성공하는 듯 했으나...         

이 영화에서 챠리가 거대한 기계 톱바퀴에 휘말리는 신은 너무 유명하다. 

Paulette Goddard는
지금까지 채플린의 작품에서 주연 여배우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활발하고 침착하고, 원기가 넘치는 미인 여배우이다. 

영화 전반 스토리는
원래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 줄 기계가
거꾸로 인간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야유이다. 

자동 식사기계의 장면도 유명하며 정말 즐겁다.   

이 작품에서 뭐니뭐니해도 특필할 만 한 사건은 역시
챠리가 자신의 음성으로 노래하는 신이다. 

어느 나라의 언어로 노래하는 것도 아닌 완전 "무국적 언어"
즉 챠리가 여기서 부르는 노래는 소리는 있어도 그 의미가 없는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로 노래를 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영화에서는 이미 토키가 주류인 반면
"챠리는 토키를 못한다."라는 악담(?)에 반발한 의사 표시이기도 하며
실제 목소리를 넣은 토키 영화라고 하더라도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해 본다. 

역시 채플린 다운 또 다른 패러디라고도 할 수 있다.     






 음악 -1 티티나(Titina) :
이 곡은 1917년 프랑스 작곡가 Biographie에 의해 "
Je cherche apres Titine"하고 하는타이틀로 작곡되어, 챠리의 영화에 티티나(Titina, Charlie Chaplin - Je cherche apres Titine)로 사용되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멜로디이다.            

2004년에는 로스앤젤레스 출신 가수 J-FIVE에 의해 "Modern times"이란 타이틀로
채플린의 음악과 함께 커버되어, 유럽을 중심으로 크게 히트했다. 

이 곡의 뮤직 비디오에는 채플린의 손녀가 출연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토요다 자동차, 캐논 카메라 그리고 NTT 기업의 CM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음악 -2 스마일(Smile) :
Smile(Michael JacksonDiana RossBarbra Streisand,
Nat King Cole,  and  Donna Summer-Live etc...)

이 작품의 라스트 신에서 인상적인 스마일(Smile)은 채플린이 작곡한 것으로
그가 작곡한 음악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곡이다. 

또 채플린이 미국을 추방된지 20년 뒤
다시 미국의 을 밟게 되는 계기가 된 제44회 아카데미상 수상식 피날레로
그가 오스카상을 받게 되는 순간 식장의 게스트 전원이 이 곡을 불렀다. 

               Charlie Chaplin - Modern times part 1/9            





1940년 『위대한 독재자』 -127분- The Great Dictator

브라질용 포스터

외국용 포스터



벨기에용 포스터




외국용 포스터



"위대한 독재자" 의 한 장면



"위대한 독재자" 의 한 장면



외국용 포스터



독일용 포스터


이탈리아용 포스터



포르투갈용 포스터


외국용 포스터


외국용 포스터



프랑스용 포스터

1940년 『위대한 독재자』 -127분- The Great Dictator                

제작비 200만 달러가 투입된 채플린 감독.제작.각본.주연의 아돌프 히틀러를 풍자한 영화이다.  공연에는 한나 폴레트 고더드(Paulette Goddard) 등. 

10월15일 미국에 처음으로 공개되어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한 작품이 되었다. 

1940년대의 미국은 나치 독일의 전쟁과는 무관한 평화를 향수하고 있었으나, 이 영화는 그런 미국의 세상과는 거리가 있는 내용이기도 했다.  히틀러와 나치즘에 대해 신랄히 대담하게 비난한 풍자 영화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채플린의 "최초의 토키 작품"으로써도 유명하며
더욱이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품으로써 영화사에 기록되었다.   






참고로 당시 독일과 삼국동맹을 맺은 일본에서는
공개 당시는 독일과 우호관계에 있었던 관계로 인해 공개되지 않고 있다가, 일본 첫 공개가 된 것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로부터 8년 뒤인 1960년에 실현되었다.     

체플린은 이 작품의 등장 인물에 토메니아(Tomainia)라는 가상 국가의 독재자와 그의 측근 등은
나치 독일의 간부의 이름을 이미지시키고 있다. 

아데노이드 힝켈(Adenoid Hynkel)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가비취(Garbitsch)는 요셉 괴벨스(Joseph Goebbels) 그리고 헤링(Herring)은 헤르만 괴링(Hermann Goring)으로 비꼬고 있다.         

영화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챠리는 가공 국가 토메니아(Tomainia)의 육군 소속의 무명의 이등병(이후 이발사 챠리)으로 등장한다. 
이발사 챠리는 전선에서 상관 슐츠를 구출함과 동시에 그가 소지하고 있던 중요 서류를 본국에 전하기 위해 비행기로 본국으로 향한다.  두명이 탄 비행기는 연료부족으로 추락하게 된다. 


슐츠는 살아서 중요서류를 전달하려고 하지만
  토메니아가 패전한 사실을 알게 되자 낙담하게 된다. 
한편 이발사 챠리는 기억을 상실하여, 병원을 빠져 나와, 게토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 
이후 20여년간 병원에서 지내게 된다. 

이 20년간 사이에 토메니아는 정변이 발생하여
아데노이드 힝켈(Adenoid Hynkel)이 독재자로 군림해,
가비취(Garbitsch) 내상과 헤링(Herring) 원수가 그를 보좌를 하며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정하며, 국내의 유태인들을 박해한다.              

                 




세계정복을 꿈꾸는 힝켈은
첫 작업으로 국내의 유태인 추방을 계획한다. 

한편 전쟁에서 기억을 상실한 유태인 이발사(채플린)는
그런 세상의 변화를 모른 채 귀국해, "한나"라고 하는 연인을 얻게 된다. 

그러나 힝켈의 계획은 실행되어
탄압이 격화 되는 가운데, 이발사도 한나도 잡히게 된다. 

그런데 힝켈과 이발사가 너무 흡사하게 닮아서
이발사는 독재자로 오인되어 점령국에서 연설해야 하는 꼴이 되었다. 

-  중략 -

1938년 채플린은 다음 작품 "독재자"를 준비하고 있었으나
차기 작품의 내용이 세상에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촬영이 개시된 것은 1939년에 되어서 였으나
그 과격한 내용 때문에, 제작중지를 요구하는 협박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함께 UA사를 설립한 맹우 더글라스 페어뱅크스(Douglas Fairbanks)가 급사하여
이때부터 채플린의 시련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채플린이란 사람은 정말로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히틀러에게 할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었다. 

원래 채플린은 『모던 타임즈』 다음에 이 작품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폴레트 고더드(Paulette Goddard)를 주연으로 비극영화를 만들 셈이었으나
세계 정세가 긴박해 지며, 히틀러가 빠르게 대두하기 시작하자
"할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될 시기가 왔다."라고 보게되었다. 

채플린의 그때의 감정이 그대로 영화에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서둘러 "위대한 독재자"를 만들게 되었다. 

이 작품에서는 채플린은 독재자 힝켈과 유태인 이발사를 1인 2역으로 연기한다.  

제작 기간 중에도 제작 중지의 협박이 끊임 없이 이어졌으나
이것에 대해 채플린은 라스트 신(scene)에서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향해 자유를 위해 용기를 갖고 싸우자고 호소했다. 


 
영화 "위대한 독재자" 속에서 사용된 "독재자 심볼마크" 


"위대한 독재자"의 압권은
자타가 공인하는 -영화 속에 처음으로 본격적인 자신의 육성을 넣은
- 마지막 6분 간에 걸친 일명 "세기의 대연설로 불리는 "신(scene)이다. 
이 연설의 장면은 가슴에 와 닺는 부분이 있다. 

이 영화는 단지 히틀러를 비판하는 것에 그치는 영화가 아니다. 





물론 내용은 히틀러를 통렬히 비판하고 있으나
이 영화를 제작한 배경을 알게 되면
이 작품는 진정 목숨을 걸고 만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먼저 당시는 히틀러가 대두하기 시작한 시대였다는 점
 개봉된 시기는 1939년9월9일로, 독일이 폴란드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영화는 점차로 긴박해져 온다.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채플린과 히틀러는 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나
단지 생일이 4일간 틀리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채플린이 히틀러 보다 4일 빠른 형님에 속한다. 

한쪽은 세계정복을 노리고
유태인 학살하는 반면
또 다른 한쪽은 전쟁을 저주하며
자유와 사랑을 사랑했다. 

이와 같이 상반된 극과 극의 형제(?)였다. 

어느 유명 영화 평론가는
"이 영화를 위해 채플린은, 보통 인간사회를 팬트마임으로 표현하는 것 이상을 피로했다."라고 했다. 
이 작품은 대폭소, 전쟁의 통렬한 비판을 섞어 가며, 조화를 이룬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그리고 채플린의 "트레이드 마크"인, 볼록한 모자, 너덜너덜한 구두, 헐렁한 바지에 대나무 지팡이의 모습. 
이런 것들이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사라지게 된다. 
채플린은 이렇게 하여 예전의 채플린과 조금씩 결별해 간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추가 한다면
이 작품은 채플린의 분노가 그의 재능과 함께 대폭발을 일으킨 작품이다.    




마지막 6분간에 걸친 챠플린의 "세기의 대연설"  
미안하다.  나는 황제가 되고 싶지 않다.  지배도 하고 싶지 않다.  가능하다면 원조하고 싶다. 
유태인도 흑인도 백인도 인류는 서로 도워야 한다. 
타인의 행복을 염원하며 서로가 증오해서도 않된다. 
세계에는 전 인류를 먹여 살릴 자원이 있다. 

인생은 자유를 즐기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탐욕이 인류를 파멸하고,
증오를 가져오게 하며
비극과 유혈를 초래했다.  

스피드도 의사도 통하지 않는 기계는 빈부의 차를 확대시켜
지식을 얻은 인류는 회의적이게 되었다. 

사상만이 존재해 감정을 잃었다. 
지식 보다 사려가 필요하다. 
사려가 없으며 폭력만이 남게 된다. 
항공기와 라디오는 우리를 접근하도록 해 인류의 양심에 호소하여 세계를 하나로 뭉치게 하는 힘이 있다. 
나의 목소리가 전 세계에 퍼져, 실의의 사람들에게도 전한다. 
이런 인간들은 아무런 지은 죄도 없이 고통받고 있다. 

인류여!  실망해서는 안된다. 

탐욕은 언젠가 사라지고
공포도 언젠가 사라져
독재자는 죽어간다. 

대중은 다시 권력을 찾게 되며 자유는 결코 잃지 않는다. 
병사제군, 희생하지 말라! 
독재자의 노예가 되지 말라!
그들은 제군을 기만하고 희생을 강요하며, 가축과 같이 부리고 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다!  마음도 머리도 기계와 같다! 
제군은 기계가 아니다!  인간이다!  가슴에 사랑을 품고 있다. 

사랑을 모르는 인간이 서로 증오하고 있다! 
독재를 배척하여, 자유를 위해 싸워, 신의 왕국은 인간 속에 있다!  모든 인간 속에! 
그리고 제군 속에!  제군은 행복을 창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인생은 아름답고 자유이며, 훌륭한 것이다!  제군의 힘을 민주주의를 위해 집결하자! 
보다 좋은 세계를 위해 싸우자!  청년에게 희망을 주고, 노인에게 사회 보장을 해 주자! 

독재자도 같은 약속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그들의 야심만을 채워 대중을 노예로 했다. 
세계에 자유를 가져오게 하고, 국경을 없애고, 탐욕과 증오를 추방하자! 
양식을 위해 싸우자!  문화의 진보가 전 인류를 인도하도록, 병사제군, 민주주의를 위해 단결하자!  ☜    




Vevey Swiss

 
1940년10월15일 또 다른 한 사람, 마음씨 "부드러운 독재자"- 채플린

히틀러가 태어나기 겨우 4일 먼저 런던 변두리에서 태어난 체플린. 

두 사람이 같이 50세를 맞이한 해 어느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 실렸다. 
"50년 전의 이번주, 챨스 채플린과 아돌프 히틀러가 여우 4일 차이로 이 세상에 태아 났을 때,
신은 상당히 야유적인 기분이었던 것 같다... 두 사람은, 각각 자신의 소신대로,
사회의 저변에서 허덕이는 수 많은 사람들의 기분이나 생각 그리고 희망을 대변해 왔다. 

생일이 앞뒤로 비슷한 것은 둘째치고
두 사람 다 똑 같은 작은 콧수염을 기르고
두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천재적인 공통점을 표출하는 운명이었다.  
왜냐하면 그 두 사람이 천재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로빈슨 저 "챨리 채플린(下)"-   
그리고 드디어 두 사람의 결정적인 대결의 시기가 다가왔다.  


  2003년1월24일 일본 NHK TV에서 스위스 시대의 채플린을 취재한 내용이 방영되었다. 
특히 의외였던 것은 당국이 그의 동향을 항상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중립국인 스위스 마저 감시하지 않으면 난 될 정도로 그는 요주위 인물이었을까?         


The Great Dictator  charlie chaplin -1940         





1947년 『살인광 시대』 -123분- Monsieur Verdoux

1947년 『살인광 시대』 -123분- Monsieur Verdoux   

채플린의 제작.감독.각본.주연으로,
"Citizen Kane"을 감독한 오손 웰즈(George Orson Welles, 1915-1985)원작의 미국 블랙 코메디(Black comedy, black joke, dark comedy, black humor, dark humor, or morbid humor)이다.     

30년간 성실히 근무해 왔던 은행은 불황이 닥쳐, 갑짜기 실직하게 되는 앙리 베르두(Henri Verdoux, 챠리 연기의 프랑스인).  그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위장결혼을 반복하여서는 상대를 살해해 보험금을 가로채 사업을 벌이는 등, ...결국에는 사형대에 오르게 되는 전말을 그리고 있다. 

- 중략 -  

지금까지 오랫 동안 등장했던 "방랑자 챠리"의 스타일을 버리고, 나이든 멋쟁이 프랑스인으로 등장하여, 채플린의 영화로써는 희극색이 상당히 눈에 띄지 않는 작품이다.  지금까지 채플린의 작품과 상이한 점은, 이전까지의 작품에서 수 많은 비판이나 야유.조롱을 영화에서 그려왔으나, 이 작품에서는 한층 독설적인(?) 블랙 코메디(black joke)가 된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채플린은 생전에 이 영화를 최고 걸작으로 평가했다. 
주인공이 사형대로 향하기 전의 대사, one murder makes a villain; millions a hero. Numbers sanctify"(한 사람 살해는 범죄자를 낳고, 백 만의 살해는 영웅을 낳는다.  수가 신성화한다.)  이 것은 원래, 영국 국교회 목사이며 노예제도 폐지론자 베일비 포튜스(Beilby Porteus or Porteous, 1731-1809)의 말로, 채플린의 대표작으로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 이 작품이 원인이 되어 채플린 배척운동이 점점 가속 1952년 미국 추방으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이 작품은 채플린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준 작품이 되었다. 
원작은 "시민 케인"을 감독한 오손 웰즈로 알려져 있으며 이것은 모델이 된 실제의 사건을 영화한 것이다.  

그는 전작품 "위대한 독재자"에서 독재자 히틀러를 통렬히 비판하여 커다란 반응을 일으켰으나
이 작품에서는 희대의 살인마를 그리는 것으로, 전쟁의 불합리한 살육을 고발하고 있다. 
의미는 깊은 작품이다. 



 『살인광 시대』 촬영 중의 망중한 챨리 채플린과 마서 레이(Martha Raye)


그러나 작품의 스토리만을 쫒아 가며 보면
그다지 웃을 신이란 만나기 어렵다. 
지금까지의 채플린의 작품에 익숙한 관객의 입장에서 
- 권성징악이나 휴머니즘의 작품을 기대하며 - 
보면 뭔가 부족함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Martha Raye (27 August 1916 ? 19 October 1994)  미국 코믹 여배우, 가수  
              Monsieur Verdoux (1947)   The Concorde: Airport '79 (1979)   The Martha Raye Show (1954-1956)   
             

그러나 이것은 채플린의 작품이며
"가로등"이나 "위대한 독재자"에서와 같이 마지막 부분에 압권은 역시 전개되고 있다. 

살인마가 잡혀 처형이 확전된 순간
- 전술한 내용의 -
명언을 남겨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이 작품은 처음 미국 사회에 당연하다고 할 정도를 받아 들여지지 않았었다.  
미국은 당시 "정의 전쟁"에 취한 시대였으며 이것과 반대로 가는 듯는 인상의 작품을 시도하였기 때문에
비난과 상영 보이코드가 꼬리를 이었다.  

1947년
드디어 "비미(非美)활동 위원회"는 채플린 출두를 요구

9월23일 "비미활동 조사위원회"의 소환장을 접수.

12월17일카톨릭계의 재향군인회가
사법성과 국무성에 채플린의 활동조사와 국외추방의 실행을 요구한다.




Charles Chaplin leaving America, New York, September 13, 1952


반국가 분자의 낙인이 찍혀
미국을 추방당하게 된다. 

그러나 전쟁을 마음으로부터 저주한 채플린은 그 출두요구에 응하지 않고 끝까지 거부했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서 내가 느낀 인상적인 신(scene)으로는
편안하게 사람을 죽일 수있는 화학약품을 거리에서 만난 젊은 여성에게 테스트하려는 장면에서
그녀와 이야기 중에 마음이 바뀌어 결국 테스트를 중지한다. 

역시 채플린은 "사랑"을 표현한 아름다운 신(scene)으로
       사랑을 사랑한 위대한 인간이었다.       

"Monsieur Verdoux" trailer         
 




1952년 『라임라이트』 -138분- Limelight


1952년 『라임라이트』 -138분- Limelight    

채플린 제작,감독.각본.음악. 

공연은 시드니 채플린(Sydney Chaplin), 제럴딘 채플린(Geraldine Chaplin, 채플린의 딸) 그리고 히로인역 크래어 부룸(Claire Bloom) 등.    

채플린의 라이벌이며
"세계 3대 희극왕"의 한 사람 버스터 키톤(Buster Keaton)과 첫 공연이 실현되었다. 
채플린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본래의 얼굴 모습으로 출연한 작품이며
동시에 미국에서의 최후 작품이다. 






이것은 공산주의 색출운동(Red Scare)이 원인이라고 한다.  

타이틀 "Limelight"란 
전구가 보급되기 이전에 사용된 무대조명기구로 무대의 인기 스타에게 비추는 라이트(조명기구)를 말한다.       


 
Claire Bloom(Patricia Claire Blume, 1931-) 부계 러시아계 유태인, 모계 폴란드계 유태인의 피를 이어 받은
영국 런던 출신 여배우. 어려서부터 발레를 시작, 발레무대에 섰을 무렵 채플린에 의해 라임라이트의 히로인으로 발탁되었다. 



출연작품 :  Limelight (1952)    Richard III (1955)   Alexander the Great (1956)   The Brothers Karamazov (1958)
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 (1965)    Daylight(1996)  etc... 



옛날 대인기 스타였던 피에로 칼베로(Calvero, 채플린)는
지금은 어느새 나이를 먹어 일거리가 없이 무대뒤로 사라져 가는 희극배우의 스토리이다.  

채플린도 어느새 진짜 나이가 든 것을 새삼 알게 된다. 
따라서 화려한 액션도 없다. 
그런 만큼 훌륭한 스토리의 작품이다.   






사실 이 작품은
채플린이 자신도 이미 나이를 먹었으며
"이것을 마지막 작품으로 해, 이것으로 은퇴하자."라고 생각한 작품이다. 

"Limelight"로 조용히 떠나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이 작품에서 잘 반영하고 있다. 

채플린은 지금까지의 작품에서는
라스트 신에, 끝없이 이어진 길을 등을 보이고 걸어 가는 장면이 많이 있었다. 
이것은 "다시 또 열심히 하자!"라는 격려의 의사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챠리 칼베로가 마지막에 죽는다. 
이것은 그의 작품 가운데 처음있었던 장면으로
"더 이상 나의 역활은 없다. 이것으로 나는 끝이다.  여러분 안녕히..."라는 의미로 받아 들여지는
너무나 섭섭한 라스트신이었다.  






- 중략 -      
그런 어느날 아파트 1층에 사는 테리(Terry, Claire Bloom)라는 이름의 댄서(발레)가 자살을 기도하여 의식불명이 된 것을 구해 함께 살게 되었다.  테리는 언니가 창부가 되어 자신의 렛슨비용을 지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충격을 받아 그녀의 다리가 마비되었다.  커다란 실망으로 살려는 의욕을 잃게 된다.  이 댄서는 정신병으로 자신은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나, 챠리의 헌신적인 격려의 도움으로 점차 회복하여, 현역으로 복귀하여 작곡가 네이빌(Neville, 시드니 채플린)에 마음에 들게 되어, 신작 발레 제1 댄서로 발탁되어 일약 유명스타 댄서가 된다. 







한편 칼베로는 컴백에 실패
  - 반대로 테리의 격려를 받는 입장이 되어 - 예전 자신의 전성기와 현재의 사실에 고뇌하며, 마지막 한 번만이라도, 무대에 서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테리에 반한 네이빌(Neville)은 그녀에게 고백한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칼베로에게 있었다.  테리는 칼베로에게 결혼하자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칼베로는 자신의 연령 차이와 테리의 순풍 만범의 현재를 비교, 구혼 이야기를 일축해 버린다. 
칼베로는 그녀의 곁을 떠나 길거리의 악사로 나선다.  
그와 헤어진 뒤로 테리는 유럽 각지에서 흥행은 절찬받게 된다. 
그 한편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네이빌은 출전하게 된다.  



Charlie Chaplin (background) & his children Michael, Josephine & Geraldine.(Limelight, 1952)


런던으로 돌아온 네이빌은 테리에게 결혼을 재촉하지만 테리에게는 아직 칼베로를 잊을 수 없었다. 
어느날 길거리에서 칼베로와 재회하게 된 테리는
다시 한 번 그를 무대에 세우기 위해 준비한다. 
재기의 무대에서 열연하는 칼베로에게 관중은 아낌없이 박수를 보낸다.  

칼베로는 너무나 열연한 나머지 무대에서 떨어진다. 
이런 것도 모른채 테리는 무대에서 춤을 피로한다. 
그녀의 각광을 받는 모습을 보며 칼베로는 조용히 숨을 거둔다.  

마지막으로 채플린은 전작 "살인광 시대"에서부터 미국 정부의 눈에 거슬리게 되었으며
당시의 트르먼 정부는 채플린의 추방을 결정지었으며
채플린은 이것으로 미국에 마지막 작품으로 남겼다. 

또 그는 예전의 대스타로, 현재의 심정을 예견하며 그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칼베로(Calvero, 채플린)는 진짜 채플린이었던 것이었다.         

Charlie Chaplin and Buster Keaton (limelight)       






 영국에서의 작품활동 시대 
-총 3작품-   
1957년 『뉴욕의 왕』 -110분- A King in New York




1957년 『뉴욕의 왕』 -110분- A King in New York    

채플린 감독.주연의 희극영화로 채플린의 마지막 주연작이다. 
미국의 정치와 사회를 비꼬고 있다.  

1952년 미국에서 추방된 뒤로 제작이 시작되었으며
미국 추방에 대한 분노 그리고  보복성 작품이다. 

이 작품 말미에 채플린은
재판관을 향해 호수로 물을 뿌리는 장면은 
- 미국 재판관에 대한 - 
분명한 항의 그리고 분노를 나타내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미국에서는 1976년에 겨우 공개된 작품이었다. 



A King in New York,   Charles Chaplin



영화는
"현대생활의 고민 하나에는 혁명이 있다."(One of the minor annoyances in modern life is a revolution.)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유럽의 가공의 나라 에스토로비아에서 혁명으로 나라를 쫒겨난
이골 샤도브(King Igor Shahdov, 챠플린) 왕은 거의 무일푼으로 미국에 건너 왔으나(망명)
동행한 수상에게 증권서류 등을 도둑맞게는 등
여러 사건을 격으며 도망하듯 다시 미국을 떠나기까지를 그린 작품이다.  

왕은 원자력을 사용하여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려고
원자력 위원회와 접촉을 시도한다. 

어느 만찬회에서(왕의 무단으로 TV 중계되고 있다.) 연극경험이 있다는 것을 밝히자
그 뒤로 TV 광고의 의뢰가 쇄도한다. 

처음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 듯한 왕이었으나 뒤로 생활자금을 벌기 위해 여러 광고에 출연한다.  


Stills 1 : A King In New York 

 
King Shahdov (Charlie Chaplin) considers a face lift


어느 진보주의학교를 방문한 왕은

 루퍼트 맥카비(Rupert Macabee, Michael Chaplin)란 10살짜리 천재 소년을 만난다. 

그는 학교신문 편집자로 역사에 조예가 깊어
왕에게 아나키즘(Anarchism, 무정부 주의자/자유연합주의)을 설교한다. 

루퍼트는 어떤 정부도 신용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나
그런 그의 부모는 공산당이었다. 

점차로 왕 자신이 공산당원이라고 의심받게 되어
맥카시(Joseph Raymond "Joe" McCarthy)의 "비미활동 위원회"에 소환된다. 

왕은 겨우 용의를 벗게 되어
이혼하여 지금은 파리에 살고 있는 전 왕비와 재회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루퍼트의 부모는 투옥되어
위원회는 소년에게 부모의 친구들을 밀고하도록 강요한다. 

소년은 왕과 재회했을 때
부모의 친구의 이름을 밀고한 사실로 애국자로 추앙 받으나
죄의식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Stills 2 : A King In New York

A new arrival in New York deposed monarch King Shahdov (Charles Chaplin) braves a press conference


왕은 맥카시의 이런 공산주의 적발 소탕작전에 질린 나머지
소년에게 부모와 함께 유럽으로 오도록 초대한다. 

본 영화에서는 "비미활동 위원회"에 대한 공격과 더불어
미국 상업주의와 포퓰러 음악(Popular music), 영화에의 조소가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 자신 "뉴욕의 왕"은 나의 영화 가운데 가장 반항적인 것이다. 라고 이야기했다.   

채플린 자신은
이 작품에 대해 "새로운 Modern Times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확실히 미국의 상업주의, 기계주의, 매카니즘을 통렬히 야유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Stills 3 : A King In New York 

 
Unknowingly watched by millions on television, King Shahdov (Charles Chaplin) dines at Mrs Cromwell's (Joan Ingram)



즉 "비미 활동 위원회"라 든가
국왕까지 TV 광고에 이용하려는 현대의 상업주의
천재소년의 동심까지 교묘히 이용하며
, "비미 활동 위원회"에 밀고하도록 강요하는 미국인들...     

마치 명작 "Modern Times"에서 보여준 "비인간"이 여기서 더욱 위력을 발휘한 듯한 느낌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천재 소년 루퍼트 맥카비(Rupert Macabee, Michael Chaplin)는
채플린의 8명 자녀 가운데 장남이다. 

이 외의 자녀가 출연한 작품으로는 "Limelight" 속에 길거리에서 오르골(자명금/自鳴琴)을 듣고 있는
세명의 어린이 가운데 한 명에 자녀가 출연했다.      

 
Charlie Chaplin: A KING IN NEW YORK    





1959년 『채플린 회고』 -128분- The Chaplin Revue 

1959년 『채플린 회고』 -128분- The Chaplin Revue      

『A Dog's Life』(개의 삶), 『Shoulder Arms』(어깨 총), 『The Pilgrim』(순례자/가짜목사)의 3편을 정리하여,
채플린 자신이 작곡과 나레이션으로 재편성한 영화.      

1962년6월27일 옥스포드 대학의 명예 박사학위 수여
        1964년 채플린의 전기가 출판되었다.                

Charlie Chaplin Revue           





1967년 『홍콩의 백작부인』 -108분- A Countess from Hong Kong


『홍콩의 백작부인』  스페인용 포스터 -1



『홍콩의 백작부인』의 영화 한 장면 


『홍콩의 백작부인』  스페인용 포스터 -2

1967년 『홍콩의 백작부인』 -108분- A Countess from Hong Kong      

채플린은 이 영화에서 감독만 담당했으며
, 그의 유일한 컬러 작품영화이며 주연에는 여배우 소피아 로렌과 남우 마론 브란도가 출연했다.  

또 채플린이 감독한의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주연을 연기하지 않은 작품은
1923년 "파리의 여성"과  이 작품뿐이다.  

그리고 "홍콩의 백작부인"은 그의 마지막 유작이다.  

출연 배우는 말론 부란도(Marlon Brando), 소피아 로렌(Sophia Loren),
채플린의 차남 시드니 채플린(Sydney Earle Chaplin)
그리고 여기서의 챨리 채플린(Charlie Chaplin, An old steward)은
거의 마지막 부분에 카메오 출연(cameo role or cameo appearance)하고 있으며
이것은 그가 영화 속에서 보여준 마지막 그의 모습이었다. 






본 작품은 제작비 추정 3백 50만 달러를 투입했으나
흥행에서 실패하여 비평가들의 평가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채플린 자신이 작곡한 극중의 음악 "This Is My Song"은
영국 가수.배우 패투라 클락(Petula Clark, -Love
This Is My Song/C'est ma chanson- 1967)의 가창으로
힛트곡이 되어 제작비의 적자를 만회했다고 한다.          
                         
  줄거리 : 주 사우디 아라비아 대사로 임된된 오그덴 미아즈(Ogden Mears, 말론 브란도)는
세계여행을 마치고 귀국 도중에 호놀루루로 향하는 배 위에서 였다. 




pagne Charlie  Charlie Chaplin with Sophia Loren at his birthday party in 1966.


그는 전에 기항한 홍콩에서 러시아로부터 온 백작부인
나타샤(Natascha, 소피아 로렌)를 만난다. 

그녀는 매춘행위를 강요하는 홍콩을 도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가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오그덴이 승선한 배에 몰래 타 밀항을 기도하게 되는데...  

- 중략 - 

이 작품은 채플린이 반 장난삼아 제작한 작품이다. 
채플린은 생애에 81편의 영화작품을 제작했으며,이 작품은 그 81번째에 해당한다. 
여기에 채플린의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그는 마지막 작품을 제작하면서
"까다로운 녀석(?)을 모으자!"라고 착상
먼저 주인공에 말론 부란도(Marlon Brando)를 기용했다. 
말론 부란도는 "전선"(On the Waterfront, 1954)에서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 수상. 



ChamMarlon Brando and Charlie Chaplin


"대부"에서 노미네이트 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했다. 
이와 같이 뭔가 반항적인 스타일을 고집하는, 그리고 하여튼 취급하기 까다로운 배우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채플린은, "나는, 그를 잘 부려 보겠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히로인은 누구를 선발할까? 
"제일 스케일이 큰 배우는?"
"제일 아름다운 미인은?"
이런 식으로 하여 주연 배우들이 결정되었으며
여배우로는 이탈리이 출신 소피아 로렌(Sophia Loren, 본명 : Sofia Villani Scicolone)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그런데
채플린은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 부리기(?) 힘든 - 말론 브란도를 어떻게 농락하였을까?
채플린은 먼저 한 마디 한 마디 그가 납득할 때까지 설득을 계속하며
"자네, 이 가운데서 one   scene만 직접 감독하라."라고 채플린은 제안했다.  

이렇게 하여 출연한 말론 브란도는 "채플린의 영화를 내가 감독했다."라고 자랑할 수 있게 된 셈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말론 브란도가 직접 메가폰을 들고 감독한 one scene"이 어느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미 두 사람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말론 부란도가 상당히 기뻐했다는 것 만은 틀림없었다고 하는 사실은 틀림없다.  
그리고 말론 부란도를 그런 방법으로 쉽게 부리는 사람은
당시 77세인 채플린 밖에 없다며 채플린도 자랑했다. 
결국 두 사람 함께 자랑 자랑이었다.    

상당히 줄거운 "러브 코메디"이다. 
"영화사에 남을 걸작"까지는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싱글벙글 웃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집중하며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뒷 맛도 상단히 시원한 채플린의 작품이다.  



Director Chaplin Dances with his daughter Geraldine Chaplin as Marlon Brando watches in preparation
for a scene in A Countess From Hong Kong (1967).



또 이 작품에는 채플린 일가가 등장한다. 
두 번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Sydney Earle Chaplin은 배우가 되어
이 작품에서 중요한 하베이(Harvey)역을 연기한다. 

선상의 댄스 파티에서 말론 부란도(Marlon Brando)와 춤 추는 여성은
채플린의 딸 Geraldine Chaplin으로
  그녀는 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 1965) 출연한 배우로 유명하다.   

영화에서 와이키키 호텔에서 테니스 라켓을 들고 나오는 소녀 두 명은
  죠세핀과 빅토리아 채플린. 

가족을 영화의 여기저기에 출연시킨 것도 채플린의 "장난기"에서였다. 

물론 채플린 자신도 출연한다. 

"Two scene"에만 등장하여 15초간의 대사와 얼국 표정에 팬트마임을 보인다. 



Sophia Loren and Charles Chaplin


이 뒤로 채플린은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Sir" 칭호를 받고
1972년 아카데미 특별상 수상을 위해, 20년만에 미국 땅을 밟게 된다. 

이때 채플린은 "Thank You"라고 인사하며 상을 받았다.  

과거 자신을 추방한 나라에 대해서도 그래도 감사했다. 

수상식 밤 필하모니홀에서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Kid" 그리고 그 외의 작품이 상영되어
채플린이 무대
그리고 관객석에 모습을 보였다.  

이 마지막의 "위대한 광대", "세기의 광대" 그리고 "미국 3대 희극배우"를 보기 위해...
입장료의 암표는 30만 8,000달러였다.    

A Countess From Hong Kong (1967)      

        

source
 The TIME 100: Charlie Chaplin  :  http://www.time.com/time/time100/artists/profile/chaplin.html
Charlie Chaplin Website   :  http://www.charliechaplin.com/
The Chaplin Museum  :  http://www.chaplinmuseum.com/
The Charlie Chaplin Archive   :  http://www.charliechaplinarchive.org/
"My Autobiography"  :  Charlie Chaplin(Simon & Schuster, 1964)
Chaplin: His Life and Art (David Robinson. McGraw-Hill, second edition 2001)
etc...






























영화 채플린(Chaplin)

채플린(Chaplin)은
1993년 공개의 영국영화로 찰리 채플린의 생애를 그린 전기영화이다. 
제65회 아카데미 주연 남우상
제46회 영국 아카데미 주연 남우상을 각각 수상했다. 





    See more... Charlie Chaplin pictures   

             -- Gallery --                 


Chaplins in Ireland     

Charlie Chaplin with his wife Oona and two of his daughters,
Geraldine (on horse) and Jane, near a lake in Ireland, 1965



Chaplins in Cherbourg     

Chaplin and family arrive at Cherbourg aboard the Queen Elizabeth liner in 1952.



Charlie Chaplin marries Oona O'Neill





Charlie Chaplin and His Daughter   

Charlie Chaplin and his daughter Josephine during filming of the movie "A Countess From Hong Kong" (1967), which he also acted in and scripted.



Charlie Chaplin and Paulette Goddard 

Paulette Goddard was a child model who transitioned smoothly into movie stardom.



Chaplin and Gandhi          

 Charlie Chaplin meets Mahatma Gandhi in London in 1931.



Genius, Squared: Einstein and Chaplin     

Albert Einstein and Charlie Chaplin at the premiere of Chaplin's masterpiece, "City Lights." Of the crowds that followed them, separately and when they attended events together, Chaplin told Einstein, "People cheer me because they all understand me, and they cheer you because nobody understands you."



Chaplin and the Churchills       

Winston Churchill with his family and Chaplin at the Churchill home in Kent, 1931.



Dancing Lessons      

Charlie Chaplin with the great Russian ballerina Anna Pavlova.



(Music Video) Pablo Casals - Saint-Saens' The Swan (1925);
Featuring Anna Pavlova (1907)
 
  
1914 Between Showers (kortfilm)
1914 A Busy Day (kortfilm)
1914 Caught in a Cabaret
1914 Caught in the Rain (kortfilm)
1914 Cruel, Cruel Love (kortfilm)
1914 Dough and Dynamite (kortfilm)
1914 The Face on the Barroom Floor
1914 The Fatal Mallet (kortfilm)
1914 A Film Johnnie (kortfilm)
1914 Gentlemen of Nerve (kortfilm)
1914 Getting Acquainted (kortfilm)
1914 Her Friend the Bandit (kortfilm)
1914 His Favorite Pastime (kortfilm)
1914 His Musical Career (kortfilm)
1914 His New Profession (kortfilm)
1914 His Prehistoric Past
1914 His Trysting Place
1914 Kid Auto Races at Venice
1914 The Knockout
1914 Laughing Gas
1914 Mabel at the Wheel (kortfilm)
1914 Mabel's Busy Day
1914 Mabel's Married Life
1914 Mabel's Strange Predicament (kortfilm)
1914 Making a Living (kortfilm)
1914 The Masquerader (kortfilm)
1914 The New Janitor (kortfilm)
1914 The Property Man
1914 Recreation (kortfilm)
1914 The Rounders (kortfilm)
1914 The Star Boarder (kortfilm)
1914 Tango Tangles (kortfilm)
1914 Those Love Pangs (kortfilm)
1914 Tillie's Punctured Romance
1914 Twenty Minutes of Love (kortfilm)

1915 The Bank
1915 By the Sea (kortfilm)
1915 The Champion
1915 His New Job
1915 His Regeneration (kortfilm)
1915 In the Park (kortfilm)
1915 A Jitney Elopement
1915 A Night Out
1915 A Night in the Show (kortfilm)
1915 Shanghaied (kortfilm)
1915 The Tramp
1915 A Woman (kortfilm)
1915 Work

1916 Behind the Screen
1916 Charlie Chaplin's Burlesque on Carmen
1916 The Count
1916 The Fireman
1916 The Floorwalker
1916 one        A.M. (kortfilm)
1916 The Pawnshop (kortfilm)
1916 Police!
1916 The Rink (kortfilm)
1916 The Vagabond

1917 The Adventurer
1917 The Cure
1917 Easy Street
1917 The Immigrant

1918 The Bond (kortfilm)
1918 A Dog's Life
1918 Shoulder Arms

1919 A Day's Pleasure (kortfilm)
1919 Sunnyside

1921 The Idle Class
1921 The Kid
1921 The Nut

1922 Nice and Friendly (kortfilm)
1922 Pay Day

1923 The Pilgrim
1923 Souls For Sale
1923 A Woman of Paris

1925 The Gold Rush (Guldfeber)

1926 A Woman of the Sea
1928 The Circus (Cirkus)

1928 Show People

1931 City Lights

1936 Modern Times

1940 The Great Dictator (Diktatoren)

1947 Monsieur Verdoux

1952 Limelight (rampelys)

1957 A King in New York

1967 A Countess From Hong Kong (Grevinden fra Hong-Kong)






희극왕 챨리 채플린의 기념관 오픈 예정
2012년 스위스 레만호가 내려다 보이는 옛 채플린 저택을 개조하여 건축된다.
수 많은 무성영화 작품을 남겨 희극왕으로 불리는 채플린의 유품을 전시하는 기념관이 개관하게 된다.

그가 만년을 보낸 스위스 서부 베베의 언덕에서 레만 호수가 바라 보이는
채플린의 구저택을 개조하는 것으로 내년 봄 주택내에 새로운 전시관의 건설공사에 착수하게 된다.



Lake Geneva = Lac Leman

수목이 울창한 언덕에 있는 구저택의 
대지 약 2,700평 위에 약 572억원을 투자하여 정비하는 기념관은
채를린 가족이 지낸 구저택과 새로 건설하는 전시관으로 구성되며
주차장으로 사용하던 곳은 카페로 개조한다.
Geneva jiji -12/26/2009


1975년10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2세로부터 나이트 작위를 받다.
1976년6월30일 "일하는 것은 사는 것, 나는 살고싶다."
1977년10월15일 베베이에서 서커스를 보기위해 채플린은 마지막 외출을 한다.
1977년12월25일 크리스마스 날 아침 영면하다. 향년 88세.





2010년4월12일
찰리 채플린이 등장하는 개인 기록영화가 최근 미국에서 처음으로 공개됐다.

총 11분에 달하는 이 8㎜ 흑백필름은 채플린과 교분을 나누었던 BBC 기자 알리스테어 쿠크가
1933년 촬영한 것으로, 채플린과 쿠크, 채플린이 영화 "모던 타임스"에서 공연했던
폴레트 고다르(Paulette Goddard)가 채플린의 요트 "만병통치약 호(Chaplin's yacht, Panacea)"를 타고
캘리포니아의 카탈리나 섬으로 주말 항해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필름은 쿠크의 딸 수전 쿠크 키트리지(Susan Cooke Kittredge, 61세)가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것이다. 

오랜 기간 BBC의 특파원이었던 쿠크는
PBS 방송의 "명작극장(Masterpiece Theatre)"을 진행했으며
그의 고정 라디오 프로그램 "미국으로부터의 편지"는 영국에서 58년간 계속됐다.


 
 

 그는 2004년 3월30일 95세를 일기로 뉴욕의 아파트에서 사망했다.  
 키트리지는 바로 이 필름을 복원했다. 
 최근까지 이 필름은 2007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한 영화제에서 한차례 공개됐다. 

 버몬트주 셸번에 살고있는 키트리지는 그리스도연합교회 목사로
지난 7일 버몬트주의 주도 몬트필리어의 한 교회에서
버몬트자선위원회 행사의 일환으로 100여명의 관객이 모인 가운데 이 필름을 상영했다. 


 그는 카메라 작동에는 썩 뛰어나지 않았는데 이 필름에서
채플린과 쿠크는 마치 오랜 친구들인 것처럼 팔짱을 끼기도 하고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노래하고 빈둥거리기도 한다.  

쿠크가 긴 파이프를 물고 있고
채플리는 계속 그에게 머리를 돌려 볼을 갖다대는 장면도 있다.

 채플린은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와 나폴레옹
영국 황태자의 흉내를 내기도 했다.

고다르는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2010년7월17일
"찰스 채플린"이 24살때인 1914년에 제작한 필름이 최근에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이 필름은 존재는 확인이 되었으나 그 행방을 알 수 없었던 것으로
미국 아칸소주의 골동품 시장에 한 영화사 전문가가 지난해 가을 100달러에 구입한 것이었다.

u-tube
http://www.youtube.com/watch?v=aoJ4KGvBFXs

"도둑잡히다"라는 제목의
이 영화에서 채플린은 조연역 경찰관으로 출연하고 있으나
미국 영화제에 곧 공개될 예정으로 있다.


Tks...!
- Posted by ccooffeeLa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