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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

淸山에 2011. 2. 6. 17:24
 

 

 
 
정윤희...
어렸을적 그저 예쁜 배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최근에 다시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자료출처:다음, 네이버 이미지

 

 

 

 

 
 
 
다음은 http://blog.daum.net/bogdoll486/6027765 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정윤희는 여배우로서 짧지만 화려했던 시절을 누린 스타입니다.
그는 1975년 '욕망'이라는 영화로 데뷔해 총 36편의 영화를 찍고 84년 '사랑의 찬가'를 끝으로 스크린을 떠났습니다.
80년과 81년에는 2회 연속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해 연기파 배우로도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첫 영화 '욕망'에서 탤런트 노주현을 상대역으로 시작, 당대 최고의 남자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며 충무로 캐스팅 영순위의 여배우였지요 정윤희의 뛰어난 미모는
일본과 대만에도 알려져 외국 감독들에게까지 러브콜을 받을 정도였답니다.

또한 세계적인 톱스타들만 참석한다는 동경가요제에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초청 받아 영화 '러브스토리'의 스타 알리 맥그로우와 시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대만에서도 영화가 개봉됐었는데 정윤희가 대만을 방문했을 땐 수많은 취재진이 몰려나와 큰 뉴스가 되기도 했답니다. 당시 홍콩 최고의 무술스타였고 지금은
세계적인 스타인 성룡과 정윤희의 스캔들 또한 정말 유명했습니다.
첫눈에 반한 정윤희 때문에 성룡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너무 사랑하게 됐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였지요. 이렇듯 정윤희가 한류 최초의 스타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정윤희 (1954-/ 경남 통영출생)
정윤희 그녀는 1954년 충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빼어난 용모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어릴적 부산으로 이사와 당감국민학교를 거쳐 혜화여중.고를 졸업하였다.
소녀시절 무용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대학진학에 실패하자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 신인모집에 응모하였고, 당당히 합격하였다.
그러나 부모의 반대로 영화출연은 실패하였으며, 그녀는 좌절하였다.
 
그 이듬해 1975년 신필름에서 제작한 영화 <욕망>(이경태 감독)에 다시한번 출연교섭을 받았으며, 그녀는 부모님을 설득, <노주현>, <정소녀>와 함께 주연으로 등장하였다.
이렇게 우여곡절끝에 출연한 영화 <욕망>은 흥행에 실패하고, 그녀 역시 빛을 보지 못했다.
첫작품의 흥행실패로 실의에 빠진 그녀에게 TV쪽에서 연락이 오는데, 영화 <욕망>을 눈여겨본 당시 동양방송 TV국장으로 있던 <황정태>씨가
그녀를 <쇼쇼쇼>프로에 사회를 맡긴다. 가수 위키리와 공동사회자로 4개월정도 활동을 하였는데, 그즈음 해태제과에서 CF모델 요청이 들어왔으며, 그녀의 얼굴은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번째 영화 <청춘극장> 출연요청이 들어왔다.
당대 최고의 여배우 <김지미>나 <윤정희>가 모두 <청춘극장>의 <오유경>역으로 스타덤에 올랐던터라 그녀는 최선을 다해 연기를 해내었고,
상대역으로는 <신영일>, <김창숙>, <김희라>등이 열연하였다.
이 영화는 그해 추석 국도극장에서 개봉하여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정윤희>의 이름만은 확실하게 알렸다고 한다.
<청춘극장>이후 그녀는 TBC-TV 드라마 <맏며느리>, <청실홍실>등에 출연 높은 인기를 얻었고, 그녀는 영화나 TV에서 동시에 발판을 구축하며 일약 인기스타로 발돋움한다.

그녀가 짧은시간에 그토록 쉽게 부상한 것은 우선 시기가 좋았던 것이다.
60년대 후반 <윤정희>, <문희>, <남정임>의 트로이카시대가 형성되었고, 이때가 한국영화 최고의 전성시대라고 할 정도로 많은 영화가 생산되던 시절이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TV가 영화관객을 흡수하고 여배우들은 결혼과 유학등으로 영화계를 떠난다. 이후 약 3년간 스타공백기간이 계속되다가 다시 트로이카가 형성되었으니 즉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 세사람 인 것이다.
 
1976년 그녀는 <목마와 숙녀>(이원세 감독), <고교 얄개>(석래명 감독)등의 작품에 출연했고, TV드라마에 고정출연하게 되었다. 이후 수많은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활동한 그녀는 1980년과 1981년 연거푸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당돌한 말 같지만 이제야 연기가 어떤 것인지 알것같다”고 수상소감을 밝힌 그녀는 여배우로서 최고의 정상자리에 올랐으며,
출연작 <사랑하는 사람아>(장일호 감독)가 대만에서 흥행에서 대성공하고, 일본에서 초콜렛 광고와 달력의 모델로 활동하는 등 아시아의 연인으로 부상한다.
“동양의 꽃”이라 불리운 여배우 <정윤희>.
뛰어난 미모로 한시대를 풍미했던 그녀는 1985년 결혼과 함께 영화계를 은퇴, 현재 평범한 가정주부로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 정윤희 출연작목록(★표는 VHS ◆표는 DVD 출시작)
01. 1975. 욕망.
02. 1975. 청춘극장. ★
03. 1976. 목마와 숙녀. ★
04. 1976. 고교 얄개. ★
05. 1976. 핏줄. ★
06. 1977. 고교 우량아. ★
07. 1977. 얄개행진곡. ★
08. 1977. 임진왜란과 계월향. ★
09. 1978. 나는 77번아가씨. ★
10. 1979. 가을비 우산속에. ★
11. 1979. 꽃순이를 아시나요. ★
12. 1979. 도시의 사냥꾼. ★
13. 1979. 사랑이 깊어질때.
14. 1979. 우요일. ★
15. 1979. 죽음보다 깊은잠. ★
16. 1980. 강변부인. ★
17. 1980. 내가버린여자 2부. ★
18. 1980.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
19. 1980. 최후의 증인. ★
20. 1981. 사랑하는 사람아. ★
21. 1981. 아가씨 참으세요. ★
22. 1981.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 ◆
23. 1982.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
24. 1982. 아벤고 공수군단. ★
25. 1982. 여자와 비. ★
26. 1982. 여자의 함정. ★
27. 1982. 정부. ★
28. 1982. 벌레먹은 장미. ★
29. 1982. 춘희. ★
30. 1983. 땜장이 아내. ★
31. 1983. 안개마을. ★
32. 1983. 약속한 여자. ★
33. 1983. 질투. ★
34. 1984. 동반자. ★
35. 1984. 사랑의 찬가. ★
36. 1984. 속.사랑하는 사람아. ★
37. 1985. 제3편 사랑하는 사람아. ★

- 정윤희의 영화계 수상경력 -
제18회(1982) 백상예술대상 영화 여자최우수연기상 - 앵무새의 몸으로 울었다
제20회(1981) 대종상 영화제 여우주연상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제17회(1981) 백상예술대상 영화 여자최우수연기상 - 사랑하는 사람아
제19회(1980) 대종상 영화제 여우주연상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추억의 한국영화들을 수놓았던 수많은 여배우들 중에 70년대말 등장한 제 2기 트로이카라 불리었던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를 기억하십니까.
유지인이 서구적인 마스크를 자랑했던 배우이고 장미희는 동양적인 미모를 자랑했던 배우라면 이 정윤희라는 배우는 두 배우의 장점을 고루 갖추고 있으면서 왠지 슬픈듯한 큰 눈과 도톰한 입술. 그리고 유지인이나 장미희의 출연경력등과는 사뭇 다른 이채로운 경력으로 인해 더욱 기억에 남고 아쉬운 배우입니다.
[욕망]이라는 영화로 영화계에 데뷰한 정윤희의 초기작품들은 쉽게 말하면 요즘 흔히들 말하는 18금 영화에 주로 출연을 해오게 됩니다.
 
물론 그중엔 청춘물이었던 [고교얄개]나 [고교 우량아]같은 영화에도 출연경력이 있지만 [욕망]이나 [꽃순이를 아시나요], [나는 77번 아가씨], [사랑이 깊어질 때],
[도시의 사낭꾼], [죽음보다 깊은 잠] 등 제목만 들어봐도 왠지 내용이 심상치 않아 보이는 영화에 주로 출연을 해옵니다.
그렇다고 이 정윤희라는 배우가 뇌쇄적이거나 퇴폐적인 매력을 지닌 배우냐고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왠지 연약해 보이고 청순함이 돋보이는 배우였는데, 필연인지 우연인지 이상하게 그런 영화에만 출연해 온것이 지금 생각해 봐도 꽤나 기억에 남습니다.
그러던 그녀의 연기생활의 일대 전기를 마련한 영화가 바로 1980년에 출연했던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라는 영화였는데요. 훗날 [애마부인]시리즈를 탄생시켰던
정진우 감독이 연출을 맡고 이대근씨와 함께 출연했던 이 영화로 정윤희는 당시만해도 최고의 영화제였던 대종상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단순히
벗을 줄 아는 배우가 아닌 진정한 배우로서 인정을 받게 됩니다.
 
또한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아]라는 영화로 멜로배우로서도 인정을 받는 계기를 마련하는데요. 이 영화는 다들 아시겠지만 똑순이로 너무나 유명한 김민희와 함께 출연해 온국민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유명한 영화였습니다.
그 뒤로 3탄까지 제작이 되었으며 그 큰 눈망울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많은 남성팬들의 감정을 자극했음이 틀림없습니다.
또한 그녀는 정진우감독과 함께 또다시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라는 영화로 대종상 및 백상예술대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그후 안성기와 출연했던 [안개마을], 이영하와 출연했던 [진아의 벌레먹은 장미], 이덕화와 출연했던 [동반자] 등을 통해서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1984년 여름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른바, 정윤희 간통사건. 절정의 인기여배우였던 정윤희(30)씨가 유부남인 건설사 사장(38)과 그녀의 아파트에서 함께 있다가 남자의 아내와 그 처가식구들에게 발각되어 남자와 동반 전격 구속된 사건.
당시 남자는 2살된 딸과 4개월된 아들까지 있어, 정윤희씨는 그야말로 남의가정 파탄낸 죽일 X"으로 낙인찍히고, 양 TV에서 퇴출을 당하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연예계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남자는 곧 위자료 1억에 여자와 합의이혼, 정윤희씨와 그해 12월 결혼식을 올리게 되고, 연예계와 매스컴에서 사라져 그녀를 흠모하던 대한민국 남성들에게 영영 아쉬움만 남기게 된다.
 
당시, 완고한 사회분위기로 속사정은 상관없이 엄청나게 세간의 질타와 미움을 받았었다.
남자가 정윤희를 만난 당시에, 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아 별거에 위자료 다툼을 하고 있었던 사이였다고 한다. 전 부인은 거액의 위자료를 받고, 깨끗이 이혼해 주었으며.. 어린 두 아이도 정윤희씨가 맡아 기르게 된다.
그 뒤 정윤희씨가 낳은 아들까지 세 자녀를 정윤희씨는 정성스레 뒷바라지 하고, 살림살이도 열심히 해서 이웃에도 평판이 아주 좋았다 한다.
 
아무튼, 당시에는 가장 파렴치하고 금기시되는 범죄의 하나로 여겨지던 간통이었지만...지금 생각해보면, 정윤희씨가 여자로서 정말 한 남자를 사랑했던듯 싶다.
그리고,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에만 몰입하고 살아온 몇 십년을 보면...
참 연예인이지만 현모양처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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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2001년 8월호 여성중앙에 인터뷰 기사내용입니다.
 
서울 압구정동의 65평 아파트 자택에서 ‘주부 정윤희씨’를 만났다. 화장기 없는 그녀에게서 톱스타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전직 여배우는 여전히 강렬한 눈빛과 미모를 간직하고 있었다. 전성기 때보다 훨씬 편안한 표정과 함께.

결혼과 함께 무대 뒤로 사라진 배우 정윤희씨. 서울 압구정동의 한 아파트에서 세 자녀를 키우며 보통의 주부로 살아가고 있는 그녀를 만났다. 화려했던 톱스타의 흔적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아내, 엄마, 며느리로서 만족하며 살고 있는 올해 마흔일곱 살의 정윤희씨. 그녀의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을 소개한다.
취재·이창훈 기자
 
끊임없이 독자엽서에 ‘소식이 궁금하다’며 등장하는 이름이 있다. 바로 ‘정윤희’다. 1970∼80년대 최고의 여배우로 활동했던 그녀가 결혼과 함께 무대 뒤로 사라진 뒤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까닭이다.올해 마흔일곱 살의 정윤희씨는 서울 압구정동의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중견 건설업체인 중앙산업 조규영 회장(54세)과 결혼, 2남 1녀의 세 자녀와 함께 오붓한 가정을 일군 것이다. 지난 7월 초, 정윤희씨는 ‘오랜만의 외출’을 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마련한 ‘한국 영화 명배우 열전’의 주인공으로 초대된 것이다. 결혼 후 매스컴과의 접촉을 꺼려온 그녀는 행사 기간 중 팔순의 노감독이 온다는 소식에 잠깐 모습을 드러내곤 이내 사라졌다. 얼마 뒤 압구정동의 65평 아파트 자택에서 ‘주부 정윤희씨’를 만났다. 화장기 없는 그녀에게서 톱스타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전직 여배우는 여전히 강렬한 눈빛과 미모를 간직하고 있었다. 전성기 때보다 훨씬 편안한 표정과 함께. “누추하지만 언젠가 한번 보셨으니까 부끄러울 것도 없어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우리 집은 변한 게 없죠? 그냥 이렇게 살아요.” 수년 전 이 아파트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변한 것은 없었다. 치장을 하거나 화려해 보이는 가구라곤 없이 수수한 모양새 그대로였다.
 
-세 아이 학교 보내고, 성당 나가고일주일에 한두 번 골프 치는 것이 일상-
올해 대학에 입학한 딸 윤경양이 엄마를 대신해 차를 준비했다. 기자에게 커피 취향을 물은 정윤희씨는 “윤경아, 설탕, 프림 다 넣고 엄마가 가르쳐준 대로 한번 해봐”라며 웃었다. “이제 이런 것도 조금씩 가르쳐요”라며. ‘도대체 기삿거리가 될 게 없다’는 그녀의 일상은 너무나 평범했다. 아침 6시쯤 일어나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대학 1학년, 고등학교 2학년(아들), 초등학교 6학년(아들)인 세 아이를 챙겨 학교에 보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일주일에 한두 번 친구들이나 친하게 지내는 학부형들과 골프를 치고 시장도 직접 다니고 아이들 돌아오기 전에 귀가해서 저녁 준비를 하고, 일요일마다 성당에 나가는 것이 변함없는 그녀의 일상이다. 다른 엄마들처럼 그러다보면 시간이 금방 간다는 것. 요즘은 방학이다보니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하지만 아이들이 어릴 때는 모든 것을 엄마에게 의지했는데, 나이가 들어가며 엄마와 얘기하는 시간도 적어지고 자기들 세계가 생기는 것 같다고. 가끔 그런 아이들에게 섭섭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건강하게 커가는 모습이 대견스럽다. “윤경이는 미대에 진학해서 도예를 전공하고 있어요. 틀에 박힌 생활만 하다 대학생이 되니 너무 좋아해요. 가끔 엄마 생활에 관심을 가질 정도로 컸죠. 고2인 용우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고 막내 용민이도 준비물 같은 것을 스스로 챙기면서 재미있게 학교 생활을 하고 있어요.”
 
요즘 가장 큰 걱정거리는 팔순의 시어머니가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남편이 3남 1녀 중 둘째여서 큰댁에 사시는 시어머니는 예전처럼 매일 오시지는 않지만 가끔 손주들을 보기 위해 들르신다고. 결혼하고 힘들었던 게 시댁의 가풍을 익히는 일이었다. 근검절약이 철저하고 같은 세대보다 좀더 구시대적으로 산다고 보면 되는 가풍이다. 지금 아파트는 13년째 살고 있다. 같은 단지 내에서 거실 바닥을 아파트 지을 때 그대로인 상태로 살고 있는 집은 자기 집밖에 없을 것이라고 한다. 명색이 건설업체 회장 집인데도 말이다. 바닥 일부가 썩어 바꾸는 게 어떻겠냐고 했을 때 남편은 “10 중의 9가 멀쩡하고 1이 썩었는데 어떻게 바꿀 생각을 하느냐. 생각이 잘못된 사람이다”라며 수리를 하도록 했다. 가구들도 새것으로 바꾼 것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수년 전과 비교해 유일하게 바뀐 것은 소파 천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결혼할 때 장만한 소파인데 그동안 두 번 정도 천갈이를 했다고.
 
-결혼 초 적응 힘들었던 건 시댁 가풍 시간이 지나며 옳다는 생각에 말없이 따라-
남편 조규영 회장도 검약이 몸에 밴 스타일이다. 양복 바지 짜깁기를 많이 해 세탁소 아저씨에게 부끄러울 정도다. 얼마 전 백화점 세일 행사 때 남편의 바지를 하나 사서 슬쩍 걸어놓았다가 혼이 난 적이 있다. “예쁜 것 하고 싶으면 당신이나 하라”고 한다는 것. 그래서 3만원짜리라고 거짓말을 했다고. “처녀 때 제가 얼마나 펑펑 쓰고 살았겠어요. 결혼하고 첫 월급을 받았을 때 일주일 쓰고 나니 없었어요. 시댁 식구들이 얼마나 한심했겠어요(웃음). 그래도 어머님이나 애 아빠가 잘 참고 이끌어주셨어요. 결혼 초에는 이런 가풍을 이해 못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옳다는 생각을 했어요. 옳은 거니까 따라가는 거죠. 안 그러면 살 수 있겠어요?(웃음).” 인자하면서도 심지가 굳은 시어머니는 여고 선생님을 하셨는데, 3남 1녀의 자식들을 키우며 언제나 ‘이것 먹어라!’가 아니라 ‘이것 먹어볼래?’의 권유 방식으로 교육을 해왔다. 며느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법이 없었다고. “결혼 초에는 살림을 못해 쩔쩔맸어요. 처음부터 제가 살림을 잘할 리가 없잖아요. 그래도 어머님이 잘 이끌어주셨어요. 친정 어머니 이상으로 잘해주셨죠. 저는 친정 부모님이 다 안계시니까 막연하게 그리워했던 어머니를 시어머니에게서 느꼈으니까요. 그런 어머님이 몸이 편찮으셔서 걱정이에요.” 시어머니도 근검절약이 몸에 밴 분이다. 시집와 첫 명절 때 세뱃돈으로 1만원을 주셨다.
 
지금도 액수는 변함없이 1만원이다. 어른들은 1만원, 아이들은 5천원으로 정해져 있다. 며느리 생일 때 시어머니는 5만원을 주신다. 그것도 지금까지 변함없는 액수다. “제겐 남들 5백만원보다 소중하게 느껴져요”라며 웃는다. 이 가정의 생일 파티는 누구 생일이든 똑같은 모양새라고 한다. 꽃다발과 함께 단골 한식집으로 온 식구가 가서 냉면을 한 그릇씩 먹으면 끝이라는 것. 그러면 돈을 벌어 다 어디에 쓰는 것일까. 운동과 먹는 것에 아끼지 않는단다. 가족들 건강과 안전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 것. 양복 바지를 짜깁기해 입는 조회장은 아내가 9년 동안 탔던 승용차를 벤츠로 바꿔주었다. 정작 본인은 국산 중형차가 적당하겠다고 했는데도 말이다. 동네 근처만 오가며 5년째 타고 있는 벤츠는 앞으로 5년은 더 탈 생각이라고.가끔 부부가 함께 골프장에 나가기도 한다. 18세 때부터 골프를 친 조회장은 실력이 수준급이고 배우 시절부터 치긴 했지만 자신은 ‘여자로서 다른 사람에게 방해 안 될 정도’의 실력이라고 한다. 일하면서 외로움을 많이 느꼈던 정윤희씨는 가족애가 끈끈한 집안으로 시집와 허전한 부분을 모두 채우게 됐다. 어느 날 자신의 생활이 감사하다는 생각에 성당에 나가게 됐고 세례도 받았다. 성당에 함께 나가자는 아내의 권유에 남편은 가끔 성당 앞에까지 아내를 데려다주는 것으로 ‘성의 표시’를 하곤 한다.
 
-보수적이고 표현 안 하는 남편 변함없는 모습에 믿음 깊어져-
결혼생활이 행복하다고 느꼈을 때 성당에 나가게 됐고 세례도 받았다. 성당 한 행사에 참석해 활짝 웃는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조회장은 표현이 없는 편이라고 한다. 바깥일을 집에서 얘기하는 법이 없어 사업이 잘되고 있는지 어떤지도 모른다고. 보수적인 면 때문에 결혼 초에는 많이 힘들었다. “아침 일곱 시 딱 그 시간에 출근해 제시간에 들어오는 사람이에요. 요즘은 일주일에 절반쯤은 좀 늦지만요. 자신에게 철저한 사람이구요. 운동을 좋아하는데 헬스를 쉬는 법이 없어요. 보통 사람 같으면 가끔 빠지기도 하잖아요. 그런 법이 없어요. 질릴 정도라고 하면 좀 심한가요(웃음). 그런데 변함이 없으니까 신뢰가 가요. 믿음이 점점 깊어지는 거예요. 한마디로 심신이 건강한 사람이에요. 남자는 그래야 될 것 같아요. 내 아이에게도 그런 남편을 얻어주고 싶어요. 아이들에게도 엄하고 보수적이지만 자상한 면도 많거든요.” 큰아들 용우군의 현재 꿈은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고 막내아들 용민이는 꿈이 왔다갔다한다. 부모로서 어떻게 키우고 싶다는 생각은 없고, 본인들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생각이다. “주위에선 유학 안 보내느냐고, 뭘 셋을 다 데리고 사느냐고 납득이 안 된다는 분들도 있는데, 아직 유학을 보낼 생각은 없어요. 공부 잘하고 성실하면 보내지만 놀기만 하고 게으르면 보내지 않는다는 게 아빠의 확고한 생각이에요.” 주부로 살면서 처음엔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들 때문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 살림하다보면 집에서 입은 채로 시장도 가야 하고 화장 안 한 채 다니는 것이 보통인데, 화장하고 꾸미고 나갈 때는 ‘어머! 정윤희야, 아직도 여전해, 그래도 정윤희인데!’ 하는
 
한국 영상자료원 행사에 참석해 사인을 해주고 잇는 '주부 정윤희씨' 행사 성격이 어떻든지간에 그녀는 최대한의 성의를 표시했다.
반응이지만 그냥 나가면 ‘어머! 정윤희 아냐, 정윤희가 어쩌다 저렇게 됐어?’ 하는 반응이니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더라는 것. 하지만 지금은 ‘얼굴이 두꺼워져서’ 개의치 않고 다닌다. 일일이 신경을 쓰다가는 불편해서 생활이 안 될 것 같더라는 것. 그래도 가끔 알아보는 사람들 때문에 가족들에게 불편을 주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 그러나 정작 세 자녀는 엄마가 영화배우였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딸 윤경양은 한국영상자료원 행사 때 엄마와 함께 가 엄마가 출연했던 영화를 보며 슬프다고 눈물을 흘리고, 끝났을 때는 좋아하더라는 것.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배우에서 어떻게 하루아침에 주부로 변신할 수 있었을까. 다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녀는 “그럴 생각 없어요”라고 잘라 말한다. 그리고 되묻는다. “지금 내가 나가서 무슨 일을 하겠어요?”라고. “배우로서 최선을 다하지 못한 점에 대해 많이 후회했지만 미련은 없어요. 그래서 지금 현재에 충실하려고 해요. 주부로서 최선을 다하는 거죠. 아이들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고, 살림하고…. 아이들에게도 ‘엄마는 배우로서 최선을 다하지 못해 후회하고 있다. 공부도 때를 놓치면 엄마처럼 후회하게 된다’고 말해요.”
 
-아이들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이주부로서 제일 큰 바람-
20대의 모습만 팬들의 기억 속에 남겨둔 채 ‘배우 정윤희’도 나이가 들어간다. 스스로의 표현대로 50을 바라보고 있다. 누구보다 화려한 젊은 날을 보낸 왕년의 톱스타는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자연스럽게 생각해요.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만큼 저도 나이가 들어가는 거니까요. 알차게 그날그날 열심히 살려고 노력해요. 아이들이 아직 어리니까 하루가 빨리 지나가요.” 성당에 갈 때마다 그녀는 아이들 모두 잘 자라고 식구들 모두 건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아직까진 부부 모두 건강한 편이지만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늘어가니 건강을 걱정할 나이가 된 것 같단다.
 
수년 전이나 지금이나 ‘주부 정윤희씨’의 생활엔 큰 변화가 없었다. 기자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해서인지 “심심하게 살죠?”라며 웃는다. 그러니 어찌 보면 심심한 인터뷰가 돼버렸다. 얼마나 자극적인 기사가 많은 세상인가. 그러나 본인이 만족하며 열심히 살고 행복해하는 모습은, 설사 심심한 기사가 되더라도 변화가 없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일 것이다. “독자 엽서에 제 이름이 나온다는 건 너무 안 보이니까 궁금해서 그러시겠죠. 관심 가져주시는 것은 고맙죠. 너무 평범하게 잘살고 있고 지금 생활에 감사하고 있어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조용히 있으면 아주 잘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주시면 고맙겠어요."

출처 : 여성중앙 2001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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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 짧지만 화려한 삶을 살았던 배우 정윤희...
많은 예쁜 여배우들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배우라고 생각한다.
아쉬운것은 그녀의 작품과 많은 기사들이 없음이 안타까울뿐이다.
여자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어머니로서 쉽지 않은 선택을 해야만 했던 배우 정윤희...
그 심정을 알수는 없지만,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는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행복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