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테일러 여사(Dame Elizabeth Taylor, DBE, 1932년 2월 27일~ 2011년 3월 23일)는 영국의 배우이다. 리즈 테일러(Liz Taylor)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1999년 DBE 작위를 받았다.
[편집] 생애
엘리자베스 로즈먼드 테일러는 1932년 2월 27일 런던의 햄스테드 지역에서 영국에 거주했던 미국인 부모 프랜시스 렌 테일러와 사라 비올라 웜브롯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눈의 홍채 색깔이 아주 드문 제비꽃 색으로 알려져 있다. 테일러의 오빠 하워드는 1929년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원래 캔자스 주 출신이었는데, 아버지는 미술상이었고, 어머니는 원래 ‘사라 소던’이라는 무대명을 가진 연극 배우로 1926년 뉴욕에서 결혼을 하면서 은퇴했다. 테일러의 첫 두개의 이름은 할머니인 엘리자베스 매리 로즈먼드 테일러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3세 때, 테일러는 바카니와 함께 발레 레슨을 받았다. 7세때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하기 위해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주한다. 1939년 그녀의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뉴욕으로 갔고, 그녀의 아버지는 런던에 남아서 사업을 마무리하고 11월 뉴욕에 도착했다.[1] 그들은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정착을 했는데, 그곳에서는 당시 사라의 가족들이 있는 곳이었다.
칼럼니스트 헤더 호퍼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이 인연이 되어, 부유한 영국 사업가이자 치버 코든의 약혼자였던, 유니버셜 영화사의 회장이자 대주주인 안드레아 베런스의 소개를 받았다. 베런스는 사라에게 엘리자베스를 코든에게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든은 엘레자베스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그녀는 카메라를 잘받아 외모를 돋보이게 하는 그런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2] 메트로-골드윈-메이어(줄여서 MGM)는 곧 이 영국소녀에게 관심을 나타냈지만, 제작자인 존 콘시다인과 비공식적인 오디션을 본 후에 테일러가 노래를 잘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계약을 하는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1941년 9월 18일 6개월 계약으로 주급 $100에 계약을 했다.
그녀는 9살의 나이로 《There's one Born Every Minute》에 데뷔를 했고, 이것이 그녀의 유일한 유니버셜 영화사의 작품이었다.
[편집] 경력
10살 때인 1942년 《There's one Born Every Minute》의 단역으로 영화 데뷔했다. 유니버셜 영화사와 계약이 작품 뿐이었던 《명견 랫시의 귀로》(Lassie Come Home)에서 대역을 찾던 MGM과 7년 계약을 맺는다. MGM과 계약 후 첫 작품은 헬렌 번즈의 역할로 샬럿 브론테의 소설을 영화화한 20세기 폭스의 1944년작 《제인 에어》였다. 이 시기에 다시 MGM 영화를 찍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가 같은 해 1944년 《도버의 하얀 절벽》(The White Cliffs of Dover)을 찍었다. 하지만 그녀를 스타돔에 올려준 것은 12살 때 찍은 MGM의 영화 《녹원의 천사》(National Velvet)에서 벨벳 브라운의 역이었다. 이 영화에서 그녀가 맡은 벨벳 브라운은 그랜드 내셔널에서 우승하기 위해 애매를 길들이는 소녀의 이야기였다. 이 영화는 또한 믹키 루니와 영국의 신인 안젤라 란스베리를 스타로 만들어준 작품이며, 1944년 12월 개봉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테일러의 삶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또한 이후의 많은 문제들이 이때 《녹원의 천사》를 찍다가 다친 척추로 인해 야기된 문제들이었다.
내셔널 벨벳은 박스오피스에서 4백만 달러를 벌어들였으며, 그녀는 3만 달러로 인상된 연봉으로 장기계약에 서명했다. 이 영화의 성공을 이어가기 위해 테일러는 또 다른 동물 영화 《용감한 래시》(Courage of Lassie)에 투입되었다. 1946년 이 영화의 성공으로 더 인상된 $1,500의 보너스와 주급 $750에 계약을 했다. 1947년 워너브라더스의 작품인 《아버지와 인생》(Life With Father)을 에서는 매리 스키너의 역을 맡았으며, 같은 해 《신시아》(Cynthia)에서는 신시아 비숍 역을 맡았고, 이듬 해 1948년에는 《쥬디와의 데이트》(A Date with Judy)에서는 캐롤 프링글 역을 맡았다.
이후 《녹원의 천사》, 《밝은 이야기》 등으로 셜리 템플의 차세대 소녀 스타로 활약했다.
[편집] 성인 연기자
신부의 딸들(1950)에서의 엘리자베스 테일러
다른 아역 배우들과는 달리, 테일러는 쉽게 성인 연기자로 옮겨갔다.[3] 1949년 《공모자》가 나오기 전에 《타임》은 기사를 통해 그녀를 ‘엄청난 가치를 지닌 보석, 진정한 스타 사파이어’라고 찬사를 보냈으며, 헐리우드에서는 몽고메리 클리프트나 쿼크 더글라스 그리고 아바 가드너와 같은 차세대 스타로 손꼽았다.[4] 그 영화는 박스오피스에서는 실패했지만, 남 몰래 공산주의 스파이와 결혼한 21살짜리 연기를 한 16살의 테일러는 비평가들 사이에서 성숙한 연기로 칭찬을 받았다. 주당 2,000 달러의 새로운 급여조건 하에서 최초로 찍은 《만취》(1950)는 은막의 아이돌 밴 존슨과 짝을 맞춘 영화이지만, 비평가들과 박스오피스에서 모두 실패를 했다. 또한 그 영화는 새롭게 깨달은 그녀의 관능미를 과시하는데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박스오피스에서 성공한 최초의 작품은 로맨틱 코메디로 스펜서 트래이시와 조안 베넷과 호흡을 맞춰 케이 뱅크스역을 맡아 성인 연기를 한 1950년작 《신부의 딸들》이었다. 이 영화는 후속 편 《아버지의 작은 유산》(1951)을 내놓게 했으며, 같이 연기를 했던 스펜서 트래이스가 “지루하고, 지루했고 .... 지루했다”고 평한 작품이었다. 박스오피스에서는 비교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드라마틱한 여배우로서의 경력을 쌓게 한 테일러의 다음 영화였다. 1949년말 테일러는 조지 스트븐스의 영화 《젊은이의 양지》를 찍기 시작했다. 이 영화가 1951년 개봉되자, 테일러는 조지 이스트먼(클리프트)와 그의 가난하고 임신한 여공 앨리스 트립(쉘리 윈터스) 사이에 끼어든 망가진 사교계 명사 안젤라 빅커스의 연기로 환호를 받았다. 이 영화는 비평가들이 다음 50년 영화 역사를 통틀어 평판을 얻은 고전이라는 평과 같이 그녀의 연기 경력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었다. 뉴욕타임즈의 A.H. 웨일러는 "엘리자베스의 풍부하고, 아름다운 연기는 그녀의 경력에서 최고의 노력이다."라고 썼으며, 박스오피스 평론가들은 "테일러양은 아카데미상감이다."라고 언급했다.
테일러는 그 당시 자기에게 배정된 역활에 점점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 《맨발의 공작부인》이나 《크라이 투마로우》와 같은 작품에서 주연을 맡기를 원했지만, MGM은 그녀의 역할을 까메오나 기억에 남지 않은 영화들, 《Callaway Went Thataway》(1951), 《최고의 사랑》(1952), 《아이반호》(1952), 《모든 걸 다 가진 소녀》 (1953), 《호걸 브롬멜》 등에 배역으로 제한했다.
[편집] 영화
테일러는 1942년(10세)부터 2003년까지 수 많은 영화와 TV 쇼에 출연했다.[5]
[편집] 결혼
테일러는 8차례 7명의 남편과 결혼을 했다.
- 콘래드 닉키 힐튼 (Conrad Hilton Jr.) (1950-1951)
- 마이클 와일딩 (Michael Wilding) (1952-1957)
- 마이크 토드 (Mike Todd) (1957-1958)
- 에디 피셔 (Eddie Fisher) (1959-1964)
- 리처드 버튼 (Richard Burton) (1964-1975, 1975-1976)
- 존 워너 (John Warner) (1976-1982)
- 래리 포튼스키 (Larry Fortensky) (1991-1996)
테일러는 토드와 피셔와 결혼을 한 동안 크리스천 사이언스에서 유대교로 종교를 바꾸었다.
[편집] 자손
- 와일딩 (두 아들)
- 마이클 하워드 와일딩 (1953년 1월 6일)
- 크리스토퍼 워드워드 와일딩 (1955년 2월 27일)
- 토드 (딸 하나)
- 엘리자베스 프랜시스 리자 토드 (1957년 8월 6일)
- 버튼 (딸 하나)
1971년 테일러는 39세의 나이로 할머니가 되었다. 그녀의 임종 시 4자녀들과 10명의 손자 그리고 4명의 증손자가 곁을 지켰다.[3]
[편집] 사망
테일러는 말년에 여러 건강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7] 2004년에는 심부전증을 앓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고, 2009년에는 누수관을 교체하는 심장수술을 했다. 2011년 2월에는 심부전에 대한 새로운 증상으로 치료를 위해 세다스-시나이 메디컬 센터에 입원을 했다.
2011년 3월 23일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세다스-시나이 메디컬 센터에서 4명의 자녀들 사이에서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3]
[편집]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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