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매창 – 몸을 가려서 누웠던 조선 대표적 기녀시인
부안읍의 진산인 성황산에 있는 서림 공원 입구에 조선 중기의 여류 시인 매창(梅窓)의 시비가 있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매창 시비에 적힌 시조>
![](http://cafe.chosun.com/img_file/club_file/74/cho/bbs/51/97702[20050801182433].jpg)
이화우(梨花雨)에서 추풍낙엽으로 이어지는 시간적 이별이 일순간 천리 공간을 뛰어넘어 그리운 임에게로
향하고 있다. 매창이 유희경과 이별하고 지은 이 시조는 <가곡원류>에 실려 전하는데 이별가로서 이보다
더한 절창(絶唱)이 또 없을 듯하다.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시인으로 평가받는 매창은 1573년(선조 6년) 부안현의 아전이던
이탕종(李湯從)의 서녀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가 계유년이었기에 계생(癸生), 또는 계랑(癸娘)이라
하였으며, 향금(香今)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계생은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으며, 시문과 거문고를 익히며 기생이 되었는데, 이로 보아 어머니가 기생
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생이 되어 그는 천향(天香)이라는 자(字)와 매창(梅窓)이라는 호(號)를 갖게 되었다.
조선시대 여성들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당호(堂號)를 가진 귀족 여성, 이름만 있는 기생들이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이름, 자, 호까지 지니며 살았던 것이다.
신분이 기생이었던 그에게 술에 취한 손님들이 덤벼들며 집적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매창은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지 않았으며, 시를 지어 무색하게 하기도 하였다.
다음 '贈醉客(취한 손님에게 드림)'이라는 제목의 오언절구는 이러한 경우를 당해 쓴 시이다.
醉客執羅衫
(취한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羅衫隨手裂
(손길을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어라)
不惜一羅衫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게 없지만)
但恐恩情絶
(임이 주신 은정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워라)
- 허경진 역 -
지봉 이수광은 매창의 이러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