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곡사 13 - 가곡의 전환기 5
한 민족을 굴욕적으로 합방시킨 일제는 점차 그 수위를 점차올리면서 민족의 말살뿐 아니라,대외적인 야욕으로 줄달음치므로 1931년의 만주사변,이듬해의 상해사변으로 이어지더니 마침내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일으켜 이를 도화선으로 아시아의 식민화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한편1939년9월1일 유럽에서는 나치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하므로 세계제2차대전으로 치닫게되고 ,1941년12월8일 일본이 화와이 미군기지를 공격함으로 태평양전쟁이 일어남으로 그야말로 전 세계는 전쟁의 소용돌이로 말리게 되었다. 이러한동안 일본은 내실이 소흘히 됐으며,군벌이 정권을 장악하는 무단정치로 변하고,이러한 주위의 각박한 정세속에서 가장고통을 받는 민족은 우리민족이었다. 독립운동은 물론,우리의언행 하나 하나가 감시의 대상이되고 탄압의 구실만 찿으려 하였다. 뿐만아니라 민족적인 색체마져 제약을 가했고 우리문화를 말살하는 방법으로 끝내는 우리말 사용을 금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강압정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곡도 자유롭게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창작도 국내에서는 여의치 안았다.자유를 속박당한 식민지 민족으로서 노래로서나마 한을 달래고 저항의식을 키우고져한 가곡운동은 시련을 격게되었고 고난의 운명을 지게되었다.이틈에 일본창가가 들어와 우리양악계의 초창기에 약간 섞이더니,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른바 고가조의 유행가를 비롯한 일본유행가가 대량으로 유입되 염세주의적 퇴폐풍조로 이땅을 물들게 했습니다. 이것도 부족한듯 일제는 강제로 일본군가를 부르게 했고 군국주의의 일변도로 정책을 몰고 갔습니다. 따라서 우리의가곡을 부를 수 있는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으므로 일반 국민들도 우리가곡과 소원해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42년,김생려를 대표로 이인범 김철애 박봉주 김성태 그밖의 8명으로 구성된 후생악단이 조직되어 국내는 물론 멀리 만주에 까지 순회연주를 했습니다.이 후생악단은 후에 김성태의 스승인 현제명을 단장으로 이종태 김원복 윤기선 정희석 정영재 김학상 유경손 나운영 김영애 로 멤버가 바뀌었습니다. 후생악단은 현세의 사람들도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으나 본인도 여기서는 언급을 더이상 하지 않으며 ,지금 80대의 원로이신 김성태 옹으로 부터 직접 들었으면 하는 생각이다.그리고 그당시의 비슷한 처지에서 음악에 대항 향열 때문인듯하니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1942년에 또한 현제명이 미국 빅터와 콜럼비아 레코드회사와 전속 예술가로 계약되어 가곡등 레코드를 취입했고,이무렵 만주 신경교향악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동진이 가곡 "내마음" "수선화"를 작곡 하였다.그러나 이노래가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해방직후 이인범에 의해서다. 1943년5월에는 한규동 귀국 독창회가 부민관에서 슈베르트의가곡과 이탈리아의 가곡과 "마농레스코"의 아리아등의 레퍼터리로 있었고,이인범의 귀국독창회는 서울 부민관을 비롯 대구,부산 ,인천 전주 조치원,개성 평양,함흥,원산,청진등,전구구각지방과 만주에서 열려 선풍적인 환영을 받아 억압당한 가곡운동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한편 ,이은순도 그해7월 만주 봉천에서 "나비부인" "마농레스코"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등의 오페라 아리아를 가지고 독창회를 열었고,일본에서도 이창식이 동경군인 회관에서 독창회를 가졌으며 이듬해 동경 히비야 공회당에서 독창회를 가졌습니다. 1944년에는 우리나라의 주요한 관현악 작품으로 김성태의 "교향적 카프리치오"와 김동진의 "양산가"가 그것이다.이두작품의 초연은 국내서가 아니라 당시,만주의 신경 교향악단에 의해서이므로 당시의국내 사정을 잘 알 수 가있습니다. 1945년5월에는 서수준이 독창회를, 6월에는 마금희독창회가 부민관에서 있었습니다. 이땅에 서양음악의 도입 자체가 정식적인 제도권으로 부터의 도입이 아니고 찬송가라는 노래의 구전에서이다.즉 노래로 부터 시작 되었던 것입니다.이어 창가라는 서구가요 형식의 모방을 거치면서 함게 이론이도입되면서 우리가곡 창작이루어기시작한 1920년대부터 많은 가곡이 나왔고 또 일반 국민들에게 보급 되었습니다. 노래가 기악보다 대중에게 설득력과 호소력이 있다는 장점도 있어서이고,가곡은 민족적인 설움과 울분을 달래는데는 민족적 정서와 일치 하였던 것이다.지금까지의 가곡을 볼 것 같으면 감정에 민감하며,내용이 어둡고 표현이 암시적인 것도 다 시대의 산물 인지라 여하턴 가곡은 어떠한 매개체 여할을 한것은 분명해 보인다. 초창기 대부분의 작곡가들은 성악이나 기악을 겸해서 활동을 했다는사실과 범위도 동요나 가곡에 한 하고있다.그래서 가곡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양악사가 8.15해방 전 까지는 가곡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가곡의 시대라고 하는 일정시대에 우리가곡이 마음대로 활개를 치며 불리워진 것도 아닙니다.민족적인 색체는 물론 문화말살 정책으로 탄압을 받았고,제2차대전을 치르면서 극도에 달했고 우리의말과 가곡을 부르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 예술가곡의 형식이나 어법을 개발 발전시키는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따라서 한국가곡이 자유로히 불리워지고 이땅에 우리가곡의 정착을 위해서는 8.15 해방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한국 가곡사 14 - 8.15 광복과 가곡운동 구 한말의 어수선함과 당시의 사회상은 각 분야 다 마찬가지였겠지만 서양음악도 마찬가지로 체계적이지 못했다.도입자체가 선교사업의 부산물 이었으며,발전과정도 지금까지는 모방과 서양본래의 흉내 내지는 구태였다. 그러다 일제의 강압으로 발전에 많은 고초를 격었다. 그러므로 음악계 역시 주체성을 가지고 자유로이 활동한 시기는 8.15 민족 해방 이후라고 할 수 있으며,우리가곡도 진정한의미에서 이시기부터 이땅에 뿌리를 박기 노력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음악계는 그간 전쟁으로 단절되었던 구미 선진국 들로부터 한꺼번에 많은것을 배우고 섭취해야 했습니다.우리의것을 창조할 겨를도 없이 서구의 전통 음악을 소화하는데 급급했습니다.더우기 별준비없이 해방을 맞은터라 모든것이 혼란스러웠다.무질서와 가난 제도화되지않은 행정 혼란한 정치사정 이모든것들이 음악의 정책수립이나 활동은 지극히어려운 시기였으며,특히 사상적인 혼란으로 방향설정이 어려울 정도로 악단에 불안을 가져왔다. 그러나 8.15해방은 우리민족에게는 분명 새로운 역사이며 희망이었으며,전국방방곡곡에는 환희와 감격의 물결이 출렁이었으며 당시의 사회상을 말하듯 해방직후에는 민족적인 노래와 애국적인 가곡이 많이 나왔습니다. 현재명의 "대한의 노래" "독립행진곡" "아침해 고을시고"등과 같은 국민가요와 우리노래를 찾자는 마음에서 그간 빛을 보지 못했던 김동진의 "가고파" "내마음" 김세형의"뱃노래" 박태준의 "아!가을인가" 현재명의 "희망의 나라로" 홍난파의 "봉숭아""성불사의밤" 채동선의 "그리워(망향)" 이흥렬의 "어머니의 마음"등이 많이 불리워 졌습니다. -계속-
한국 가곡사 15- 민족의 해방과 가곡운동 해방직후인 1945년9월에는 민간교향악단인 사단법인 <고려교향악단>이창단 되었는데 이사장에 현제명 지휘에 계정식 악장에 김생려 로 조직되어 국내외 음악인들이 차치적으로 모여 활동을 시작 10월에 창단연주를 하였다.이후 우리나라의 교향악 운동이나 각계의 기악에 공헌한바는 부인 할 길이 없다. 11월에는멀리중국 북경에서 바리톤 김대근이 우리가곡등을 가지고 해방기념 독창회를 가졌고 12월에는김상두가 제3회의 독창회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주목 할 만한일로 경성음악학교가 세워져 이듬해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부로 편입 되었다는 사실이다.이는 우리음악사상 획기적인 일로 우리민족이 주체성을 가지고 공적인 제도권 내에서의 체계적인 음악교육의 산실로 음악도들에에게 크나큰 촉매로 작용 했으며 아울러 초창기의 완고한 보수성을 깬 결과이어서 우수한 인재들이 더욱 음악에 매진하는 기회를 각분야에 제공하게 되었으므로 해방후 이어 우리나라 음악발전에 모체가 되었습니다.참 교수진을 볼것 같으면 현재명 김성태 김원복 계정식 김생려 김흥교 등의 진용이었습니다. 한편,당시의 사회적 흥분 감격 환희 우리노래에대한 갈증은 심화되어있었으며 이러한가운데 국민음악연구회에서 해방직후 많이불리워진 애국적인 국민가요를 모아 "애국가 집" 이 또 김성태에의해 "한국 민요집" 이우종사에서 발행되어 우리가곡의 보급에 기여 했습니다. 4월22일에는 채동선이 작곡한 교성곡 "조선" 이 연주되어 또한번 시대의 감격과 함성을 대신해 주었으며,4월에는 김창섭이 독일가곡을 가지고 독창회를 열었으며,5월에는 최초의 민간오페라 단체인 "국제오페라사"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이인선을 중심으로 창립되었고,김순애가 경기여고 강당에서 작곡발표회를 가졌는데 "동경" "밤" "낙화" "네잎 클로우버"등의 가곡과"바이올린 손나타" "현악4중주" 피아노곡 "황혼의 변주곡"등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해6월에는 김창락이 프랑스 가곡을 가지고 베재중학 강당에서 독창회를,11월에는 정훈모가 연가곡 "아름다운 물방아 아가씨" 를 가지고 시공관에서 독창회를 가지고 ,1947년 김창락이 다시 포레의작품을 가지고 배제강당에서독창회를 가졌는데,이후에도 그는자주 프랑스가곡을 취급해 당시로서는 귀한존재였다고 합니다.또5월에는 김상두가 네번째독창회를,고태국이 대구공회당에서 제1회의 독창회를,그리고 11월엔 이관옥이 서울 부민관에서 그리그의 가곡을 가지고 독창회를 열었습니다. - 계속-
한국 가곡사 16 - 민족의 해방과 가곡운동 해방의 기쁨과 감격 주체성을 가지고 정통성의 뿌리를 만들어 가며 몇년의 음악활동은 그전의 분위기,사회성,목적성,예술성,및 대중성은 확연히 다른것 이었으며,수준도 많이 향상된 세련되고 아카데믹해 졌습니다.음악인들은 활동이 거듭될수록 ,또한 인간적 관계도 돈독해지기도 했으며 복잡 다양했으리라 생각합니다. 1949년1월에 국내음악인들의 모임인 한국 음악가 협회가 처음으로 결성되어,음악인들의 총집결 단체의 구실을 하게되었고,회장에 현재명이 선출 되었습니다. 3월에는 임만섭이 서울 시공관에서 오페라 토스카중의 "오묘한 조화" 리골렛또중의 "여자의 마음"등 아리아를 가지고 제1회의 독창회를 가졌고,4월에는 서영모가 서울 시공관에서 슈우만의 "시인의 사랑"을 가지고 독창회를 가졌습니다. 6월에는 최영섭이 인천 미국 공보관에서 제1회 자곡 발표회를 열어 가곡"소라" 등 6곡과 피아노 환상곡 "해변의회상"등의 작품을 발표 했습니다. 그리고 조두남의 가곡집 "옜 이야기" 의 발간과 현대적인 수법을 모색한 윤이상의 가곡집 "달무리"의 출판은 빠뜨릴 수 없는 부분들이라 생각되어 집니다.7월에는 시공관에서 서수준의 지휘로 고려 합창단 창립공연이,10월에는 김대근 독창회가 같은 장소에서 열렸습니다.
한국 가곡사 18 - 해방과 가곡운동 마음펴고 눈치코치 없이 자유롭게 가곡을 비롯한 많은 창작활동의 성과는 여기저기에서 나타났으며,음악계에서는 마침내 현재명이 우리의 고전을 소재로한 오페라 "춘향전"을 작곡 1950년5월 서울 시공관에서 공연되었습니다.작곡기법이나 멜로디의 흐름이 서구의 전통을 따르기는 합니다마는 우리의 고전을 소재로 한 것과 최초의 그랜드 오페라 라는 점에서는 대단한 성과 임에는 분명 합니다.출연진을로는 지휘에 현재명 연출에 유치진 배역으로 이상춘 이인범 사상필 이관옥 이금봉 김혜란 이정희 김학상 김학근 정영재 오현명 전영식 이영순 등이었습니다. 한편 같은5월에 멀리 미국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김자경이 독창회를 열어 절찬을 받기도 했습니다. 해방후의 가곡활동및 창작활동은 일제의 시대와는 양과질 목적과태도 등 여러면에서 비할바가 못되나,....... 아직도 미군정하의 사회현실은 많은 제약이 있었다. 정리되지 않은 사회질서 여러정책들의 불투명 가시지 않은 구태 ,그러나 이열악함속에서도 우리의 성악가들은 우리의가곡을 열심히 불러 일반 대중들에게 보급 했습니다.( 김천애 이인범 김혜란 이관옥 김대근 김상두 정훈모등) 불리워진 가곡들은 주로 홍난파 현재명 김성태 김동진의 가곡들 이었습니다마는 이무렵에 작곡된 신작들은 이전시대의 애국적 민족적인것 보다는 서정적이며 목가적인 것들이었습니다.김순애의 "4월의 노래" 나운영의 "강건너간 노래" "별과 새에게" "접동새" 이상근의 "가을 저녁의 시" 등도 이시기의 작품입니다. 그러나 우리가곡이 새로운 면에서 우리의 몸에 맟게 우리의 어법에 맟게 체질적으로 형태를 확립하고 다각도로 고민하는중 6.25 라는 민족의 전란으로 휘 말리고 말았던 것입니디. 한국 가곡사 19 - 민족의 비극 6.25와 가곡운동 1950년 6월 25일,날벼락의 민족상쟁의 전쟁이 일어났다.모든분야가 그러하듯이 음악계도 큰 수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해방후 몇년간 주채적으로 쌓아온 음악의 터전은 전화속에 송두리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대부분의 음악인들은 부산 대구로 피난을 갔으며혹은 이북으로 피납되어 지리멸렬이 되었고 작품 악보 악기들은 불타버렸거나 분실 되었습니다.특히 당시 교향악단은 귀중항 악기와 악보를 미쳐 피난시킬 여유도 없이 몽땅 분실해,뒤에 재건 하는데 무척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물론 정상적인 발전을 핳 수 가 없었고,음악인들은 우선 호구지책을 강구 하기에 바빴습니다.그러나 창작 활동은 계속 되었고,피난지 부산에서는 연주회도 계최데는 정렬 내지는 여유도 보였습니다. 음악인들은 육군 종군 작가단을 조직해 군부에 들어가 선무공작 등 정훈분야에서 활약하는 사람도 많았고, 9.28수복후 음악인들이 모여 해군당국의 협조로 해군문화선무대를 조직해서 음악활동을 계속했습니다. 1951년 전대원이 해군문관으로 임명되어 해군 정훈음악대로 발족하게 되었습니다. 이정훈음악대는 관현악을 비롯해서 합창 독창 독주 등의 다양한 연주를 할 수 있도록 조직되었으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연주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해군당국의 협조 덕분 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이러한 시대의 국민감정을 대변하는 노래는 당연히 군가와 국민가요였으며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한국가곡사 20 - 6.25와 가곡운동 한편,순수예술가곡도 많이 작곡 되어졌으며 그내용들은 대체로 공통적이며 작곡자 자신의 체험적 경험을 토대로 생산된 가곡들이기에 비애와 단장의 내용들을 지닌 것들이 많았습니다. 김성태의 "이별의 노래" (1951) "한송이 흰 백합화"(1953) 이호섭의 "울음" (1950) 김대현의 "자장가"(1952) 정세문의 "옜이야기"(1952) 윤용하의 "보리밭"(1952) 김동진의 "7월의 노래" "샘가에서" "나동강" "낯선 마을에서" 조념의 "보리피리"(1952)등이 피난시절 작곡된 곡들 입니다. 이호섭은 오페랏타 "이별곡"을발표했고 조선일보의 신인 음악회가 재개된것도 1950년의 일입니다. 1951년6월에 군산극장에서 천길량의 제1회독창회가 있었고 7월에는 현재명의 오페라 "춘향전"이 지휘 현재명 연출 이진순 출연진으로 이상춘 사상필 홍춘하 김혜란 김학상 신선자 오현명 김응자등으로 부산과 대구에서 공연을 가졌다. 또 10월에는 김대현의 창작오페라 "콩쥐 팥쥐"가 지휘에 김대현 연출에 이진순 등으로 부산과 대구에서 초연되어 해방 후의 한국적인 오페라의 창작에 모색한점은 좋은일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11월에는이상근이 마산 국제극장에서 첫 작곡 발표회를 가져 새로운 작품의 경향을 모색한 점도 우리음악사의 작은 발전인 것이다. 1952년5월에는 부산 대구 마산 극장에서 김대현의 오페랏타 "사랑의 신곡"이 공연되었고 ,6월에는 부산 남성여고 강당에서 두번째의 김순애 작곡 발표회가 있었습니다.특히 가곡의 밤 이라 이름하고 가곡만 발표를 하였는데 "모란이 피긲지는" "물레" "파초" "진달래" "낙화" "찢어진 피리" "해당" "눈"등이 발표 되었습니다. 12월에는 이상근이 부산피난시의 이호여대 강당에서 "피아노 3중주곡" "현악4중주곡"등으로 제2회의 작곡발표회를 가졌고 역시같은 달에 나운영의 가곡집"양 아흔 아홉" 이 출판 되었는데 민속적인 체질을 현대적인 기법으로 처리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으며,같은해 12월에는부산 남성여고 강당에서 오현명의 독창회가 있었고 ,이호섭은 전남 광주극장에서 칸타타 "자유"를 발표 하고 있었습니다.
퍼옴 http://blog.naver.com/chang4719/60003015893 차한잔 네이버 블로그에 감사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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