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곡사 21 - 6.25동란중의 가곡 운동 1953년 5월에 대구 문화관에서 하대응의 칸타타 "한마디 말씀" 이 자신의 지휘와 남산 합창단의 합창으로 발표되었고 10월에는 현재명의 창작 오페라 "왕자호동"이 서울시 공관에서 지휘 임원식 연출 이해랑 출연진은 이상춘 임만섭 이경숙 염경원 오현명 항병덕 김혜경 김학상 김정식등으로 초연되었으며,창작 오페라의 정착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11월에는 김대근이 진해 해군극장에서,12월에는 김창섭이 독일가고을 가지고 부산 남성여중 강당에서 각각 독창회를 가졌습니다.이해에 경희 대학교에음악과가 신설되었고,이듬해에 수도여자 사범대학교에 음악과가 신설되었습니다. 1954년2월에는 최영섭 가곡집 "소라"가 인천 문화사에서 출판 되었으며,3월에는 조상현이 배제강당에서 슈베르트 가곡을 가지고 독창회를 열었습니다. 7월에는 "김형주동요곡집"이 "산비둘기" "보리밭 머리"등 32곡을 발간 했으며,11월에는 배제강당에서 한경진이 독창회를 가졌다,그리고 12월에는 서울 조선호텔에서 한규동 이관욱 부부 독창회와 이중창의 밤이 있었습니다.김순애의 첫 "가곡집" 은 국민음악 연구회에서 발간 되었는데 "모란이 피기까지는" "찣어짖 피리""파초" "물레" "진달래" "해당" "눈"등 10여곡이 수록 되어있다/ 이쯔음의 작풍이랄까 간단히 보면 무리없는 풍부한 멜로디과다할 정도의 화성 그리고 조바꿈의 견실한 효과,즉 수법적인 면에서 서구의 전통적 탈피를 구가하고 있는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55년1월에는 조대훈의 독창회가 조선호텔 에서,2월에는 한국작곡가 협회에서 제1회의 작곡발표회가그리고 3월에는 이점희가 대구국립극장에서 김성태의 "산유화"를비롯해 그밖의 우리가곡 만으로 독창회를 열었습니다.
한국 가곡사 22 - 동란중의 가곡운동 1955년3월에 이흥렬이 "어머니의 마음" "바위고개" "봄이오면" 코스모스를 노래함"등이 실린 "이흥렬 가곡집"이 국민음악 연구회에서 발행 되었고,5월에는 김성태의 가곡 모음집 "봄노래" "한국 가곡집" 이 유정사에서 출판 되었다. 그리고 음악에서의 필수인 레코딩도 이루어 졌는데,김성태의 "사친"등 8곡이 이루어짐, 7월의 김재희 독창회 (배제강당) ,8월에 있은 광복10주년 예술제에서 김대현 작곡의 교성곡 "광복10주년"을 뺄 수 없습니다. 9월에는 한규동이 펴낸 "한국 가곡집"출판 기념음악회가 서울 시공관에서 있었는데 금수현의 "그네" 김대현의 "새우" "자장가" 김동진의 "가고파" "내마음" "뱃노래" "봄이오면" "수선화" 김성태의 "꿈" "동심초" "사친" "산유화" "이별의 노래""즐거운 우리집" "진달래 꽃" "한송이 흰 백합화"김세형의 "밤" "물 긷는 처녀" "뱃노래" "옥저" "찢어진 피리" 김순애의"네잎 클로우버"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운영의 "가려나" "달밤" 임원식의 "아무도 모르라고" "얼레빛" 윤이상의 "고풍의상" "추천" 현재명의 "고향생각" "봄처녀" "그집앞" "산들바람"희망의 나라로" 그밖의 오페라 춘향전의 아리아등 50곡이 수록 되어 있다. 이가곡집은 지금까지의 한국 가곡을 총 집대성 하였다는데서 그 한국 가곡사적 의의를 찿을 수 있을 것입니다. 10월에는 조상현이 제2회의 독창회를 "슈만의 가곡의 밤"이란 타이틀로 배제강당에서,또 한경진의 독창회가 같은 장소에서,그리고 11월에는 김혜경 독창회가 서울대 강당에서,12월에는 한규동이 조선호텔에서"프랑스 가곡의 밤"을 열었다.또 한 중요한 것은 이해에 연세대학교에 종교 음악과가 신설 되었습니다. 1956년3월 양천종이 서울 시공관에서 독창회를 ,그리고 최영섭이 오페랏타 "운림지"를 서울 성좌사에서 출판 하였고,10월에 김상두의 제5회 독창회가(오페라 아리아의밤),11월에는 슈만 탄생100주년 기념음악회로 ㅇㅣ점희가 "시인의 사랑"을 가지고 대구 계성 강당에서,같은달 유태열이 독일 프랑스 가곡을 가지고 서울대음대 홀에서 독창회를 가졌습니다. 한국 가곡사 23 - 동란중의 가곡운동 한편,윤용하는 "달밤" "산골의 노래"등 ,11월에는 조념의 가곡 "꽃초롱"등 9곡이 발표되었습니다. 1957년5월에는 손윤열 도미기념 독창회(영락교회) 마금희 독창회(서울 시공관) 6월에는 안경심 독창회등이 있었습니다.7월에는 김형주의 작곡 발표회에서는 가곡 "첫치마" "자장가" "옜이야기" "뱃노래" "추도" "고향"등이 발표 되었으며,이는 한국적인 정서와 서정을 바탕으로 한국가곡의 새로운 어법을 모색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인 일로 받아 들여 집니다. 그리고 박중우가 서울음대 홀에서 "피아노 소나타" "바이올린 소나타" 한국가곡 몇점으로 발표회를 가졌고,10월에는 조상현이 서울대 강당에서 "브람스 가곡의 밤"을 가졌고,문위성 독창회가 김혜경 제2회독창회가 서울 시공관에서 있었습니다. 11월에는 이계석이 동요곡집 "잠자리"가예술교육 출판사에서 출판 되었고 12월에는손대업이 작곡집 제1집으로 동요곡을 주로 모음한 "새싹 노래선물"이 출판 되었습니다. 그리고 11월에는유태열이 제2회독창회가 서울대 음대 홀에서,이광ㅇ옥 한규동 부부 독창회와 2중창의 밤이 부산제1극장에서 있었습니다. 1958년7월조상현의 독창회,김달성의 작곡 발표회가 있었는데 이자리에서 "피아노 3중주곡" 연가곡 "사랑이 가기전에"등이 발표 되었습니다. 7월에는 서울 오페라단의 주체로 현제명의 오페라 "춘향전"이 서울 시공관에서 공연 되었는데 지휘에 현종건 연출에김학상 출연진엔 이경숙 장혜경 안형일 이우근 홍진표 김혜경 이영애 오현명 양천종 등이었습니다.그리고 이해에 특별한 연주회를 든다면 미국 성악가가 내한 하여 독창회를 열어 감명을 주었는데 5월의 리차드 턱커 와 9월의 마리아 앤더슨 이었습니다. 10월에는 이화여대 강당에서 김자경이 제1회독창회가,이상춘의독창회는 죠르다노 카치니,풋치니등의 작품을 가지고 서울시공관에서 각각 있었습니다.11월에는 "스페인 가곡의 밤"을 한경진이,또이상춘이 인천에서 제3회 독창회를 열었고 ,경희 대학교 음악과가 대학으로 승격한 것도 이해의 일 입니다. 한편 이무렵 소프라노 이경숙 이명숙 앨토 이정희 등이 미국 여러 곳을 다니며 활약을 해 미국 악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12월에는 "한국가곡 100곡집" 이 국민음악 연구회에서 발간 되므로 지금까지의 발전상을 총정리 하였다는 의미에서 탄력적인 토대를 마련 하였다는데서 상당한 의미를 부여 하고 싶다. 등제된 작곡가를 볼 것 같으면 구두회 김규환 김대현 김동진 김진균 김성태 김세형 김순애 김형주 나운영 박찬석 박태준 윤용하 윤이상 이동욱 이상근 이호섭 이흥렬 장일남 정대범 정윤주 정희갑 조두남 채동선 최영섭 하대응 현재명 홍난파등 28명이다. 한국 가곡사 24 - 6.25동란과 가곡운동 1959년3월에 박재열은 원각사에서 제1회의 작곡 발표회를 가졌는데 주로 기악곡 이었다.11월에는 마금희가 미국 카네기 홀에서 비발디 률리 헨델 사무엘 바버등의 가곡을 가지고 독창회를 열어 한국인의 성악적 기량을 과시 하였다.김자경은 제2회의 독창회를 이화여대 강당에서,고려오페라단은 서울 시공관에서 김대현의 오페라 "콩쥐 팥쥐"를 공연했는데 그진용은 지휘 김대현 연출 이진순 출연진은 박옥련 이동희 정문숙 장영 백석두 김대근 고형주등 이었다. 이래저래 동란을 거치면서도 우리의 음악인들은 각고의 노력과 고민의산물로 음악 발전의 역사를 쌓아 왔으며,우리가곡 또한 민족의 정서를 멜로디에 담으며 이가슴 저마음으로 저산맥 이강으로 굽이쳐 흐르며 민족의 감정표현 순화에 일조를 하며 발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무렵 주옥같은 가곡들이 솓아 졌는데,정윤주의 "석류" (1955) 이호섭의 "국화 옆에서" (1955) 윤용하의 "도라지꽃"(1956) 김달성의 "편편화심"(1957) 유신의 "바다"(1957) 하대응의"산"(1958) 김형주의 "임의 노래"(1957)"예전엔 미처 몰랐어요"(1958)"맘 켱기는날"(1958)김동진의"진달래꽃" "길" "초혼" "못잊어" 등이 있습니다. 대략 동란중의 음악활동과 작품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해방과 격동기를 맞으면서 작품들도 즉흥적인 작품들이 많으며,작품이 태어난 동기들도 어려운 시절을 대변하는지라 더 값지다. 점차 안정을 찿으면서 연주활동이 활발해졌으며,대부분의 음악인들은 피난중에 있었으며 때문에 수복에 시간이 걸렸고 1950년대 까지는 모든 창조 작업이 정상 일 수 없었습니다. 채동선은 1953년 부산 피난시절 모진 고생속에서도 한국 음악계의 앞날을 걱정하며 복막염으로 세상을 떠났으며,조두남은 피난지 마산에 눌러 앉아 지방 악단을 위해 헌신해 왔습니다.지금까지 보듯이 정상적인 음악활동 가곡활동은 어려웠으며 전쟁의 치유 보완 준비를 거쳐 그래도 1960년대의 음악활동과 가곡 운동은 많이 낳아 졌으리라 생각 합니다.
한국 가곡사 25 - 한국 가곡의 방향(60년대) 점차 사회가 안정되고 각분야의 발전은 사람들의 안식과도 밀접히 연관이 있으므로,가곡도 물이 솜에 빨려 들듯이 국민의 가슴속으로 퍼져 갔으며 인식과 관심도 면에서도 확연히 달라 졌으며 작곡가나 연주가들의 수준도 당연히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일반 음악회는 물론이고 특히,방송이라는 매개체는 가곡의 보급을 원활하게 해 주었다. 물론,정치적 경제적 성장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은 부인 할 길이 없다. 초창기의 가곡은 너무 틀에 밖혀 있었으며 멜로디 자체도 서구 음악의 흐름을 따 왔으며 형식면에서는 더 그러하다. 당여한 이치로 받아들이면서 시대의흐름과 그때그때의 상황과 어려운 여건들이 쓸기로운 우리의 음악인들에 의해 발전이라는 크나큰 결실로 일제의 강점기를 지나 6.25의 회오리 속에서도 일보 이보 의미있고 진실한 신념으로 노력 하였기에 60년대의 가곡은 좀 더 낳은 노래로 우리의 생활속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1960년5월 손대업의 동요곡집 "송아지" 가 음악 예술사에서 출판 되었고 11월에는 국립극장에서 조상현 독창회가 서울대 음대 홀에서 오현명의 독창회가 있었다. 그리고 한양대의 음악과가 설치 된것도 이해의 일이며,1961년1월에는 이계걱의 동요곡집"봄동산 꽃동산"이 음악 예술사에서,7월에는 구두회의 어린이 노래집 "백합화"가 신생사에서 출판 되었다. 1961년 8월15일에는 8.15 16주년 기념 음악회는 김성태의 칸타타 "비바람 속에"와 김동진의 칸타타 "조국" 이 임원식의 지휘로 거창하게 연주 되었는데,노래로서 음악으로 민족의 수난과극복 희망적인 미래의 염원을 갈구 하였습니다. 1962년 4월에는 국립오페라단 창단 공연으로 장일남 작곡의 "왕자호동"이 초연 되어 큰 반영을 얻었으며,소재가 고전이었다는 점도 있었습니다마는 극적인 짜임새나 음악이 견실하고 풍부한 면에서 창작 오페라의 균형성을 잃지 않았다는 견지에서 좋은 평가를 내리고 있는 듯 합니다.이때의진용을 보면 지휘 이남수 연출 오현명 출연에는 안형일 이우근 김복희 황영금 변성엽 양천종 임만섭 김금환 우순자 윤을병 진용섭 윤치호 장동은 이지우 등 입니다. 4월에는 금수현 작곡집 "그네"가 새로이 출판사에서 9월에는 조두남 가곡집 '분수"가 정양사에서 그리고 12월 에는 정세문의 가곡집이 음악 예술사에서 이호섭도 가곡집을 내 , 음악 출판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져 우리 가곡의 일반보급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7월에는 김달성이 비엔나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국립극장에서 제2회귀국 자곡 발표회를 "현악 4중주곡" "피아노 소나타" 등 서구 본고장의 자곡기법을 세련되게 보여줬으며,독창회로는 6월에 조영호 (국립극장) 이명숙 이경숙 자매의 2인 음악회,이명숙이 일본 동경 아사이 홀에서 독창회를,11월에는 조상현이 "볼프 가곡의 밤"을 서울대 음대 홀에서,마금희가 시민회간에서 각각 독창회를 가졌습니다.
한국 가곡사 26 - 한국 가곡의 새로운 방향 1963년6월 김달성은 소월시에 의한 연가곡 "먼 후일"을 작곡 이명숙 오현명에 의해 연주 되었습니다.현대의 감각을 살려 음악적인 아카데믹한 작품으로 당시 주목을 받았다고 합니다. 11월에는 윤양석이 서울대 음대 홀에서 "목관5중주곡" "첼로 소나타" 등으로 작곡 발표회를 가졌고,10월에는 손대업이 작곡집 "꽃나팔"을(협성 문화사)발표하여 어린이들의 동요 작곡으로 활도이 컷습니다.12월에 오현명은 우리가곡만으로 독창회를 열어 무엇을 의미 하는듯 관심높게 평가 되었습니다. 그는 우리가곡의 발전과 보급에 열정을 보인점이 객관적인 그의 개인적 음악역사에서 나타난다 1967년 홍난파 채동선 현제명 김세형등의 작품으로 두번째로 우리가곡만으로 독창회를 열었다.1974년에는조두남 김동진 김연준 윤용하의 네작곡가의 작품을 가지고 우리 가곡의밤을 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곡을 부른다는 것은 단지 기록적인 것에만의 것이 아닌듯,우리시와 음성학적인면 우리정서의 중요성 특징 시의 연구등 다각도로 연구하고 있어 우리가곡운동에 각별이 이바지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1964년 하대응은 "못있어" "산" 등을 수록한 가곡집을 출판 했는데,작곡자 자신이 성악가라서 그런지 매우 성악적이고 노래의 흐름이 자연스럽다.그리고 10월에는 이계석의 동요곡집 "숲속의 아침"을발표 동요작곡가로서 활동을 가장 많이 한 작곡가 중의 한사람입니다.그리고 박준상의 작곡발표회와 박찬석의 독창회가 11월에 있었습니다. 또한 이 해에는 이경숙이 김성태의 "이별의 노래" "동심초"등을 김자경이 한국가곡과 민요등을 레코딩 했습니다.그리고 뒤질세라 이관옥도 "꿈" "그리워"등을 미도파 레코드사에서 녹음 하였습니다.한양대학교 음악과가 음악대학으로 승격한 일도 이해 입니다.그리고 특이한 일은 채동선이 세상을 떠난지 10년만에 1964년2월에 세광출판사에 의해서 출판되었습니다.
한국 가곡사 27- 우리가곡의 새로운 방향 1965년 독창회로 활동을 한 성악가로 이춘성이 국립극장에서 3월에,황병덕이 일본 동경회관에서 4월에,9월에는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김옥자가 국립극장에서,11월에는 이상춘이 서울시민회관에서,12월에는 이인범이 국립극장에서 각각이 독창회를 가졌습니다.특히 이상춘은 매독창회 마다 우리가곡을 불러 우리가곡의 보급에 큰 공헌을 했을뿐 아니라 우리가곡의 창법과 발성에 일가견이 있어 젊은이들 사이에 시사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 가곡사 - 우리 가곡의 현실적 방향 1965년11월 현재명의 오페라 "춘향전"이 서울시민회관에서 김희조의 지휘로 공연 되었고 9월에는 이흥열 가곡집"너를 위하여"가 저음사에서 출판 되었다.그밖에도 많은 음악가들이 여러모양으로 우리의 가곡을 만들고 연주하고 보급하며 연구 하는 일에 박차를 가 하였습니다.국립극장에서 변성엽,임만섭,김대진,박성유,강상복,이성로가 각각 독창회를 가졌고,젊은 성악인으로박영희,윤옥희,김의창,한승희,김송죽,이상철,등이 독창회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두거장이 세상을 떠났습니다.윤용하가 서울에서 그리고 애국가의 자곡자 안익태가 9월17일(현지16일) 스페인 마르조카에서 각각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습니다.윤용하는 가난과 불우속에서 생을마친 작곡가로 "보리밭" "고독"등 10여곡의 가곡과 많은 동요를 남기고 있습니다. 안익태는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나와 일본 구니다치 음대와 미국 신시내티 음대에서 다시 수업한뒤 독일 낭만파 거장 리허르터 슈트라우트의 수제자로서 사사한 후 지휘자로서 세계를 누볐다.작품으로"한국 환상곡" "논개" "강천성악"등8편이 됩니다. 고인을 추도하는 음악회가 11월4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김만복의 지휘로 고인의작품 "한국 환상곡"이 서울 시립 교향 악단에의해 연주 되었습니다. 12월6일에는 홍난파,현재명 문화훈장 추서 기념음악회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이경숙,안형일,박노경,오현명,이인영,등이 출연해 고인들의 작품을 연주해 다시한번 우리가곡의 정립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 합니다.참고로 홍난파는 43세로(1941.8.30) ,현재명은58세로(1960.10.16)동이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편 1960년대에 작곡되고 불리워진 가곡으로는 김달성의 "진달래꽃"(1960)최영섭의 "그리운 금강산"(1963) 장일남의 "기다리는 마음"(1964)김성태의 "못잊어"(1965)구두회의 "사랭이와 씀바퀴"(1966)등이며 "선구자" "산" "그리움" "내마음"등은 일제시대에 작곡되었지만 이때에 많이 불리워지게 되었습니다. 1966년3월 김동진의 작품 발표회는 이미알려진 곡들을 포함 23곡의 신작들을 발표 하였습니다.그는 특히 판소리를 바탕으로 한 오페라의 아리아는 그의가곡계보를 총 망라해 심여를 기울인 분야로 토속적인 생활 감정이 묻어 있어 그의 가곡은 더군다나 빨리 대중속으로 파고 드는듯 싶다. 또 그는 훗날에 신창악을 주도해 본인이 직접 노래를 지도겸 부르기도해 관심을 끌기도 했습니다. 가곡의 발표는 계속 이어져 한국 음악 협회가 주최한 신작 가곡 발표가 11월 코리아 하우스에서있었는데,김성태 김대현 김동진 김순애 김달성 나운영 이흥열 정윤주등이 15편의 신작을 발표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