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음악의 이해

한국 가곡사 B

淸山에 2010. 9. 18. 10:46

 

 

 

 

한국 가곡사 8 - 근대의 연주회
 
 
1920년, 군악대가 해산되고 민간 취주악대로 개편된 <경성악대>가 백우용의 지휘로 6월 파고다 공원에서 납량음악회를 열었고,이어 매주목요일 마다 시민을위해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또한 같은 6월에 경성악대의 협찬으로 미국인 구르브의 피아노와 김영희의 독창 최동준의 만돌린,김재호의 플릇 유도희 바이올린,의연주로 음악대회가 중앙기독청년회관에서 있었고,악영회(구르브 최동준 박태원 임배세)의 역주회가 이화학당에서 있었다.
 
한편,1920년5월4일 동아일보사 창간 기념으로 일본인 성악가 야나기가네꼬 독창회가 중앙기독청년회관 에서 열렸고,곡목은 오페라 마뇽 중에서"그대는 아는가 저남쪽 나라를" 베르디/마이야베르/웨브/등의오페라 아리아와 슈베르트/슈만/의 가곡등으로 제대로의 학구적형식으로의 독창회는 처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두말할것없이 당시 국내의 성악계를 무척 자극했습니다.
1921년에는 연희전문학교에 과외에 음악부가 조직되었으며,우리나라 악단의 중견 음악인들을 배출 시켰으며,"신선속곡집"을 준동서관에서 2월에 발간했습니다.
 
1922년에는<정악 구락부>가창립되어 연주와 계몽으로 활발한 연주활동을 했으며,1923년에는 외국의 정상급 바이올린 연주가가 내한했는데,2월C팔로,5월F크라이슬러,10월의J하이페츠 독주회가 하세가와공회당 에서 열렸으며,역시 국내의 바이올린계를 자극 했습니다.
 
7월에는윤심덕 (성악)한기주(피아노)의 연주회와,바이올린의 계정식이 유럽으로유학을 떠나는 고별 음악회를가졌는데 윤심덕의 독창 피아노의 김영환이 찬조 출연을 했다고 합니다. 이무렵에는 학생들의 음악회도 각학교의 학생회주최로 많이 열렸다고 합니다. 
 
1924년1월에는 홍난파 바이올린 독주회가 중앙
기독청년회관에서 열렸고 ,5월에는 김영환 홍난파 윤심덕의 출연으로 연희 전문음악회가 열리기도했다.
이무렵 외국인의 연주로는10월의 짐발리스트 바이올린독주회 ,1925년 2월과 3월에 있었던 프레미슬라브 부처의 음악회,6월에 있었던 에더워더 존슨 독창회 등을 들 수 있다.  
 
1926년에는 박경호와 미국인 선교사 후쓰 부인이  주측이 되어 중앙악우회를 조직하고 ,대략 15인정도의 인원으로 구성된 관현악단을 조직,활동함으로써 우리나라 관현악 활동의 시발점으로삼는동시에 악계의발전에 지대한 영향릉 미쳤다.
 
그리고 이해 11월에는 난파가 "조선동요백곡집"을 펴냄으로써 동요의보급에 박차를 가함과동시에
가곡창작에도 자극을 주었다.
 
1927년5월에는 일본인 소프라노 새끼야 도시꼬가 오페라 아리아와 리터등을 가지고 하세가와 공회당에서 독창회를,1928년5월에는 채규엽 독창회가,9월에는 권태호,안기영이 각각 독창회를 가지므로 성악에 대한 열의도 한층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곡목들은 대개 외국가곡과 국내가곡들이었는데 우리가곡은 아직창작가곡이 그다지 많지 않았고 그것도 외국곡의 선율에 우리말 가사를 붙인것이나  창가형식에서 크게벗어나지 못한 수준이었습니다.
 
1928년 11월에는김재훈 바이올린 독주회는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사라사테의 집시등을연주 ,고도의 기능을과시해 주목을 받았다.
 
1929년 2월에는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현재명의 귀국 독창회가 고봉경의 반주로 하세가와 공회당에서 열였다.이때의곡목으로 "집으로오라""석양"등의 자기작품과 마이야베르 작곡의 오페라 아프리카나 중에서"오낙원이여" 버라시네 작곡 오페라 로사린다 중에서 "전원의노래" 베르디 작곡 오페라 일트로바트로 중에서"마리놀라"등의 아리아와 페이 작곡 "내말을 전해다오"등이었다.
 
같은해 또한 박태준의 동요집 "중중 때때중"이 발간되었는데 오늘날 까지 불리고있다.
  서양음악이 이땅에 처음들어와 민중에게끼친 여러각도의 영향은 대단했으며 국악의 음계와는 색다른 감으로 음악적 정서를 자극 했던것은 분명 했다.그러나 당시의 몰이해와 여건등이 음악의발전에 많은 장애가 되었다.양악을 익힌다는 안다는 혹은 알고싶다는 이러한 잠재적인 매력이 지금의 한국 음악계를 형성한것이라 생각 돕니다.
 
일제의 억압과 자유를 강탈당한 식민지 미족의 설움과 울분을 풀고 토로 할 수 있는 길은 노래가 가장 적당 했으리라,그래서 그러한 심정을 대변해주는 가곡을희구 했던것도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중의갈구를 충족 시킬 가곡이 많지 않았습니다. 이시기의 윤극영의 "반달"이 작곡동기와는 달리 나라잃은 슬픔을 대변해주는 노래로서 전국 방방 곡곡에 불리워 졌습니다.
 
그러나 ,많은 음악인들의 노력과 활동을 뒤로한채 진정을로 이땅에 정착 할 수 있는 가곡 형식을 모색하고 우리의정서를 공감 할 수 있는 근대적 감각으로 탈바꿈 하기위해서는 1930년대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한국 가곡사 9 - 한국가곡의 전환기
 
근대적 가곡의 형태로 전환기를 맞으면서 좀더 새련되고 멜로디의 독창적인 발로 가사의시적어울림 등이 발전된 음악적인 형식과 함게 이른바 예술가곡이라는 고매한 형식으로 모색하는 과정을 밟게되고 활발한 가곡 창작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1931년 현재명 작곡집 제1집이 발간되어,그가 미국유학 시절 작곡한 1923년대경의 작품"고향생각"등 10여편의 작품이 수록 되어있다.또10월에는 박태준의 동요곡집"양양 범벅궁"이 발간되었으며,같은해에 평양숭실학교에 다니고있던 김동진이 그의 처녀작"봄이 오면"(김동환 시)이 작곡되어 학생들을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1932년에는 당시 독일에서 서구전통의 음악양식을 습득하고 돌아와,새로운 본고장의 음악사조를 익히고 돌아와 활동하고 있던 채동선이 ,그의 가곡 발표회를 누이인 채선엽의독창과 김애식의 반주로 하세가와 공회당에서 열려 크게주목을 받았다.채동선의 가곡은당시로서는 서구의견고한 기법을 완전히 구사를해 앞선 작곡가로 인정을 받았다.
 
한편 ,이 해에 권태호의 독창회가 있었고 ,12월에는 정훈모의 첫독창회가 열려,신진소프라노로 주목을 받았다.이후에도 정훈모는 7회의 독창회를 갖는등 눈부신 그의 활약은 초창기 광야의 성아계에 지대한공헌을 했으며 오늘날도 그의 제자들은 곧곧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리고1932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조선음악가 협회가 조직되어 이사장에 현제명씨가 당선되었으며,이듬해 그는 작곡집 제2집을 발간 ,음악출판에도 가속도를 붙이며 가곡 보급에도 큰 몫을 하게되었다.
 
1933년10월10일에는 "현제명 홍난파 작곡발표회" 가 조선음악가협회 주최로 서울정동 이화학당 강당에서 열려 본격적인 자품발표회의 계기로 삼는 동시에 우리가곡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 했다는 측면에서 큰의의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시기의 작품을 대략 살펴본다면 홍난파의 "장안사" "옜강물 찾아와" "금강에 살으리랐다" "관덕정" "옜동산에 올라" "봄처녀" "그리움" "사랑" "입다문 꽃봉오리" 등의 가곡과 신민요 합창곡으로 "방아찧는색씨노래" "여름"등이있고  현제명의 "가고파" "뱃노래" "물방아" "절럼발이" "이마음" "그집앞" "산에올라" "새가되어 배가되어" 소경되어지다" "진달래"등의가곡들이 있습니다.
 
이렇틋 초기의 작품들은 서구 민요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요형식의 단순것들이며
아직 창가나 찬송가의 냄새가 묻어난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신시의 경향에서 새로운 예술가곡의 차원을 이룰려는 노력과 한국적인 체질화에 무척 노력한 헌적은 오늘날의 한국가곡에 초석이 되었다는 점 에서 높이싸야 하겠다. 특히 현제명은 초기의 "니나" "나물케는 처녀"와는 달리 외국가곡의 모방은 많이 없어지고 자기의 독창성이 엿보이기도 함은 매우 고무적인 모양으로 받아드려지고 있다.
 
 
한국 가곡사 10 - 한국 가곡의 전환기 2
 
1934년 6월에는 김성태의 동요곡집 "새야새야 파랑새야"가 그의 첫 창작품으로 주로 재학중에 만들어진 것 입니다.이어 8월에는 이흥렬이 "바위고개" "어머니의마음"등이 들어있는 작곡집 제1집을 출간 했습니다.이흥렬은1909년 함남의 원산에서 태어나,1927년 일본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후,전공한 피아노 연주활동을 하면서 작곡을 계속 했습니다.그는 가곡,국민가요,군가,등 300여곡넘게 노래를 지었고,다른한편으로 음악교육에도 적절히 이바지 했습니다.중.고등학교를 거쳐 이화여대,1957년 고려대,1963년 숙명여대 음대학장을 역임 했다.
 
본격적인 관현악단으로 경성관현악단이 이종태 지휘로 창단 되었고,1935년에는 계정식 귀국 바이올린 독주회가,조선일보 주최로 전 조선 음악 콩쿠르가 처음으로 열렸다.그리고 이듬해인 1936년 경성방송국(현 KBS)ㅅㅗ속의 관현악단이 홍난파와 이흥렬을 중심으로 조직 되었고,이해에 채동선의 가곡 "그리워"가 작곡 되었다.
 
이 노래의 제목은 원래 정지용 시의 "망향" 이었으나,1966년경 이은상의 시로 바꾸어 오늘날의 "그리워" 로 된 겄이다.역시 당시로서는 기존의 풍을 탈피한 우리의서정이 깊게 베어 있다.처음 불리게된 계기는 동생인 채선엽에 의해서다.채선엽은 이해에 이본 동경에서 독창회를 가졌는데 이때 오빠의곡 "내마음은" "바다"등을 불러 청중들을 몰두 시켰다.
 
한편1936년에는 김세형이 "먼길"이라는 제목의 연가곡집을 길버터 모일의 성시를 주제로 ㅈㅏㄱ곡되어 ,서구의 완전한 작곡이론을 구사해 우리가곡의 발전에 일조를 했다고 볼 수 있다.이 연가곡은 후일 미국인 테너 해롤더 스펄링 에 의해 연주되었다.아참,2년전 "뱃노래"가 김세형에 의해 만들어져 이억만리 미국교포들의 사이에 불리워졌다.
 
김세형은 1914년 평양에서 태어나 숭실전문학교를 나와 미국으로 유학 채퍼먼대학 과 로스안젤레스 서부대학원를 나온후 귀국하여 1938년 이화여대를 비롯 1946년 서울대,1960년 숙명여대 음대학장 ,1963년 경희대음대 학장을 역임 했다.
 
한편 숭실 전문학교에 재학중인 김동진이 1933년"가고파" "발자욱" "당달구" 뱃노래" "부끄러움"등의 가곡과 관현악곡으로 "만가" "제례악"등이 발표되었으며.우리가 많이 부르는 가고파는 해방무렵 부터 많이 불려졌다고 한다.
 
김동진의 작품을보면 당시의 동요쪼나 창가 스타일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당시의가곡류 보다는 한걸음 더 갔음을 느낀다.요즈음의 가곡처럼 시성에 충실하며,멜로디의 흐름은 굉장히 표현적이며 악상의 전개는 현대의 가곡보다 더 자유롭다.주목되는 작품이다.
 
그리고,당시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있던 성악가 안기영이1933년 그의작곡집을 출판 했는데 이어 3집까지 출판 했습니다.
처음으로 실내악단이 조직된것도 이때쯤 인데,.홍난파 홍성유 이영세의 난파3중주단이 그것입니다.또한 만주에있던 조두남이 "선구자"를 작곡한 해도 이 해 인 것입니다.
 
그는 당시 일제의 압박을 피해 멀리 만주 목단강 근처에 살고 있을때,만주 벌판에서 이본군놔 싸우다 쓰러져간 독립투사들을 위대한 선구자로 노래한 것입니다.그러나 이노래가 널리 불려진때는 해방후 그것도 1960년대인 것입니다.
 
조두남은 1912년 평양에서 태어나 음악에 재능을 보이면서 외국인 죠셉 캔논스에게 사사 하고 11살때 첫가곡 "옜이야기"를작곡 하고 16살때 첫가곡집을 출판 하고 있습니다.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만주로갔으며 그의가곡 대부분은 이때작곡 되어졌습니다.
 
그는 해방후 하을빈에서 귀국해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6.25사변으로 마산으로 피신 그기에서 지방악단을 위해 헌신 했으며, 주요작품은 1937년 "제비" 1940년"산"1943년의"새타령" "그리움"등이 작곡되었고 가곡집도 옜이야기 외에 "고향" "분수" "산도화"등이 출판되었고,작풍을 간단히 더덤어 본다면 서구의 그것과 흡사한 점이 많으며 규칙적인 진동수의 음 진행으로 누구나 쉽게 힘차게 부담없이 부를 수 있는 곡이 많다.-계속-
 
 
한국 가곡사 11 - 가곡의 전환기 3
 
어느 분야이건 어느정도 발전을 보게되면 인간은 기록의 욕구를 떨쳐버릴 수 없게된다.
그것을 후 세대는 역사라는 이름으로 그분야를 배우고 향유하게 되는 것이다. 음악분야는 이점에서 매우 뒤 처지며 인간이 소리를 기록하게 된 것은 근대후반이다.
 
한편,이무렵 우리의가곡이 많이 불리우게되자 성악계의 움직임도 당연 활발해 졌다.작곡을 제1의창조라보면 그것은 악보상으로 자동 보존이 되는 것이다.성악,(연주)을 우리는 제2의창조라 한다.이것을 보존하는 데는 물질문명 이기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당연히 레코딩이 이루어 졌고,그현현을 살펴보면 ,현제명이"고향생각" 나물케는처녀" "니나"등을 직접불러
취입했고,안보승등이 홍난파의 가곡을 취입해서 가곡 보급에 일조를 했습니다.
 
1937년에는 박태현이 동요집 제1집을 발간 했고,순수한 민간 합창단인 경성 백조 혼성합창단을 조직해서 합창음악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했다,또한 이해에 경성음악 전문학원을 설립한 김재훈이 "바이올린 곡집"을발간하고 있고,채선엽이 일본 오오사카에서 독창회를 가졌고 김성태는 "말" "호수" "바다" 산넘어 저쪽"등의 가곡을 발표 했습니다.
 
1939년3월부터 시작한 경성방송국의 각곡보급을위한 방송은 방송사적으로나 우리가곡의 보급에는 일등공신인 셈이다.그리고 음악계의 여러분야를 거슬러 획기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또그위력은 대단 했다고합니다.
 
경성방송국은 작곡가들에게 작곡을 위촉 하였는데,내용은 가정적이고 생활적인것으로,이때의곡이 홍난파의 "산에들에" 현제명의 "눈오는 밤" 박경호의 "가을걷이" 김세형의 '바다" 이흥렬의 "어머니마음" 김성태의 "즐거운 우리집"등 20여곡이 된다.
한편 6월에는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제1회 전조선 창작 작곡발표회가 부민관에서 열렸습니다.이연주회는 유사이래 초유의 거사로 국내 창작계를 총망라해서 한국 작곡계를 집대성하고 ,그동안의 역량을 재검토하는 일대의 대 성사가 되었다.
 
작품은 가곡 합창곡 기악곡으로 ,가곡으로는 김성태의 "호면" "바다" 임동혁의 "전설" "이는 나를 사랑하는자" 박태준의 "산울림" "호박타령" "아! 가을인가" 김메리의 "너 어디로" 발자취" 박경호의 "사모곡" 이흥렬의 "바위고개" "봄이오면" "자장가" 연가곡으로 "나그네의 마음" 홍난파의 "고향생각" "옜동산에 올라" 입다문 꽃봉오리" '사랑" "관덕정" "그리움" "금강에 살으리랐다"가 과현악 반주로 불려졌고안기영의"작별" "꿈조차 속였세라" "오 나의 마음을" "마음의 등대" 부끄러움"이
 발표 되었다.
 
합창곡으로는 김재훈의 "기엽" 추억" 박태준의 "부활" "평화"등이 있고 기악곡으로 박경호의 피아노곡 "원무" 채동성의 "바이올린 환상곡" 김세형의 "환상곡 작품32"혼난파의 관현악곡 "즉흥곡" "소선전곡"  "동양 풍의무곡"
등이 난파의 지휘와 경성 방송관현악단의 연주로 발표 되었습니다.그리고 김메리의 피아노 소품과 김재훈의 바이올린곡 "비가"와 "프레리디움 운트 알레그로" 임동혁의 관현악 작품 "소관현악을 위한 희유곡"등이 같이 발표되었습니다.
 

한국 가곡사 12 - 가곡의 전환기-4
 
조선교향악단이란 민간인 오케스트라는 한국음악사에 고무적인 일이며 음악각계에 미치는 영향은 늘 바라는 일 이지만 약간 쇼킹하면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추측된다.지금까지 소규모로 연주활동을 해온 관현악계는 발전적인 큰계기가 됨은 물론이다.박경호의 지휘로 부민관에서 창단공연을 가졌는데,곡목은 베에토벤의 에그몬트 서곡과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곡등이며,김성태작곡의 무용곡"흥부와 놀부"가 초연되었다.
 
한편,일본에서 성악수업을 마친 이인범이 전 일본음악경연대회에서 성악부 수석입상함으로서 그재능을 인정 받았으며,그는다시 이듬해인 1941년에 일본군인 회관에서 한국가곡과이탈리아및 일본가곡을 가지고 독창회를 열어 크게 성공 하였다. 또,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유선이 1940년 부민관에서 독창회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소프라노 김자경이 이탈리아민요 찬송가 등의노래를 미국에서 빅터 레코드에 취입 했으며,만주 신경교향악단의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하고 있던 김동진이 교향시"제례악과만가" 등의 관현악 작품을 발표학;도 했습니다.
 
이렇텃 이무렵 일본이나 미국 등지에서 음악을 공부하는 젊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특히 성악은 우리 젊은 연주가들의 제질이 외국에서도 인정을 받게되었고,서구의기술 기능을 완전히 터덕하여 비로서 정착의 단계에 이러렀다고 할 수 있다.또 한가지 관과 할 수 없는것은 실내악단의 활동이다.
 
피아노의 조옥윤 바이올린의 안성교 첼로의 전봉초의 피아노 3중주단이 역시 1940년 부민관에서 공연을 가졌고 바이올린의김생려 정희석비올라의최규영 첼로의 부라이스로 조직된 김생려 형악4중주단도 하이든 모짜르트 등의 고전 작품을 연주해 실내악 연주의 출발을 보였다. 이와 병행해서 바이올린의 정희석 피아노의 윤기선 첼로의 이강열의 멤버로 조직된 경성3중주단도 배제강당에서 베에토벤의 "피아노3중주곡 제7번"등의 곡목으로 연주 하였다.
 
1941년6월에는 경성중앙방송국에 합창단이 조직되어 김성태의 지휘로 방송과 연주로 합창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무렵 김성태는 가곡과 "현악4중주곡c단조"를 발표했습니다.
 
1945년 그의 스승인 현제명과 더불어 경성음악학교를 창설하고,고려교향악단과 서울 교향악단의 객원지휘자로도
활동 하였습니다.1946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으로 편입되어 동교 교수를 거쳐 학장을 역임,우리악단의 초창기에서 전환기를 거치는 동안 중견적인 활동과 공헌을 해 왔습니다.
 
특히 작곡가로서는 서양음악의 합리적인 이론과 수법을 완전히 체득하고 서구의전통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소화에서 ,이를 자유롭고 고매한 예술성 높은 수준있는 자품을 쓰는 중견작곡가 입니다.그의 실내악곡 관현악곡은 오늘날에도 자주 연주 됩니다. 가곡은 물론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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