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음악의 이해

한국 가곡사 A

淸山에 2010. 9. 18. 10:39

 

 

 

 

 

한국가곡사 1 - 서문 - 1 


 
한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은 정말로 ,가장 소중하며  존엄한 순간인 것이다. 생명의고동 태동하는 숨결의시작 세상이라는 무대로의등장 ,이모든것을 소리(울음)로서 알리는것이다. 의미를 부여하면 할  수록 고귀한 사건의 첫번제 일인 것이다. 음정으로서의 피치는 a(라)음에 아주 가깝다고 한다.우리가 음을 사용함에 있어 a음을 기준으로한다. 연상해서 연구를 해보면 결과가 있지 않을까 하는부분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생명의 존엄성을 소리로서 외칩니다.이는삶에대한 의지의 본능이요. 아직은 구체화되지 않은 또 진행이없는 그야말로 하얀,꾸밈없는 솔직한 절규인 것이다.그리고 앞으로 많은 가치를 창출해 나갈 ,최초의 표현인 것이다. 인간은 장성해 가면서 자기를 발전 시키고 자기표현을 하고 자아를 형성함에 어ㄸ한 방식으로던 노래가 개입 되어 있다. 그것은 처음 씨족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요즈음의 시각으로 보면 어설푸지만 그나름대로는 그시대에 맟는 노래가 각분야(사랑, 종교, 전쟁, 제전, 놀이, 농사, 사냥,고기잡이, 기타) 에 밀착되 오늘날까지 이른다.인간의생활 그 자체가 노래의 역사인 것이다. 
-계속-         
                           

한국 가곡사 2 - 서문 - 2
 
우리민족은 노래와 춤을 좋아한다, 어느집단 어느시대에서도 노래는 조직의 융화나 시대의 흐름을 대변 하곤 했다.각지방에 남아있는 민요들을 볼것 같으면 우리조상들의 생활양식이나 감정 지방의 여러가지 특색들을 알 수 가있다. 서정적이고 흰옷을 잘입은 우리민족은 이처럼 노래가 민감하게 사회생활이나 개인생활에 밀착 되어 왔다.
 
삼국시대의 여러 가사들 통일신라의 향가 고려시대의 시조창 그밖의민요 세종대왕때의 종묘제래악을 비롯한 여러 음악들 이처럼 우리민족의 음악사는 다시한번더 위대하다.다만 아쉬운것은 그 대중성이 어느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 이다.그것을 잘계승 발전 연구 했었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듣고 있는 우리가곡도 서양음계에 자리를 내 주지는 안 했으리라 본다.
 
구한말 기독교와 더불어 이땅에 들어온 찬송가는 우리나라의 서구음악의 시초가된다.이찬송가의 멜로디는 실용성있게. 정감있게 ,뇌와 가슴을 적잖이 자극을 했을 것이다.그렇게 쌓이고 쌓여 가곡이 주류인 우리나라의 음악사에 숙명적인 고리가 되며 모체가 되었던 것이다.
 
19세기말 한반도를 둘러싸고 강대국 들은 이권을 다투며 풍운이 감도는 구한말을 기점으로 시작되며 아울러 한국음악사(서양음악)가 시작 되었다.
 
일제하의 수난시대 독립운동의 만주시대 ,8.15해방의감격,6,25사변의처참함,국토의분단,그리고 4.19의거와 5.16혁명,조국의근대화,민주화 ,올림픽등 민족역사의 커다란 전환기에서 ,흐르는 강물처럼 ,민족의절규로 혹은 민족의소원 희망으로 ,미족의기쁨과 환희로서 우리민족의 가슴으로 도도히 흘러왔다.비록 찬송가 이기는 하지만 서양음악의도입이 비로소 노래라는 위치로 우리가슴에 자리잡은 것이다,(대중가요도 마찬가지임) 위기때는 힘을,격동기에는 용기를,환란의시대에는지혜를,암흑의시대에는 희망을,이렇듯 민족정서의 비타민역할을 우리가곡은 했다.
 
한국가곡은 우리민족의 얼과 슬기가 배어있고,조상의 심장이 뛰는 거울이요,공유의 정서와 삶과 애환의민속이며,희망의소산과,아울러 아름다운 유산인 것이다.그런고로 영원히 서로의 마음 어루만지고 ,기뻐게 ,힘차게,빠르게,느리게,부더럽게 ,크게혹은 작게 영원히 불러야 할 것이다. 
-계속-
 

한국가곡사 3 - 서양음악 이론의 유입
 
개화기 새로운 근대 물질 문명의 유입은 우리사회의 각 분야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다.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기독교 선교사들에의해 전해진 찬송가는 곶곶에서 조금식 불려졌고,시간이 갈 수록 좀더깊이알게 되므로 그구조나 수법에 관심을 가지면서 음악적인 이론은 자동적으로 유입이 되었다.그것이 대략 1885년경쯤 된다고 한다.
                                                                              
그러나 개신교의 선교사업은 1875년 중국 만주지방에서 스코틀란드 선교사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당시 사용하던 한문 성경을 하국인인 서상윤과 백홍준으로 하여금 번역케 해서1882년에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목각판으로 인쇄해서 봉천에서 출판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이때 이들 두사람은 황해도 일대에서 비밀리에 전도를 하면서 찬송가를 가르쳤다고 합니다.그러니까  합법적은 아니지만 1882년 이미 찬송가가 들어온 샘이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기독교와 더불어 서양음악이 들어오긴했으나 ,당시 서양은 후기낭만파의 전성기였는데 ,소나타나 교향곡 예술가곡과 같은 음악의 완전한 형태인것이 아니었음은 우리의 서양음악사가 가곡위주인 것은 나름대로 특수성 이라하겠다.
선교사들의 찬송가지도는 이론에 앞서 직접 노래를 불러 가르쳤습니다.음악이론은 지극히단순한 것든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전 1830년 조선 순조말 서양음악 악전에  소개된적이 있습니다.                        
실학자인 이규경은 그의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간단한 악전을 설명하고 있고,이책의 "성음위악변증설"이란 항목에서 서양음계는 7음이기초가 되어 이를 오선에다 적어 음의 높고 낮음을 표시 하며 이 음게명을 *도 레 미 파 솔 라 시 * 로읽는다고 설명하고 한자어로 번역해서 표시하고 있습니다   .
 
그밖의 반음관계 음표길이 박자의장단등도 함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이규경의 설명은 지극히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그 역사적의의는 대단히크다.   그러나 실제 악보가 실려있지 않기 대문에 서양음악의 도입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으며 이로부터 약50년뒤인 고종22년경 기독교의 찬송가 보급은 실질적인 우리나라 서양음악의 역사가 시작 되었던 것이다.
                    
                                       
한국 가곡사 4 - 창작군가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국제관계는 약육강식 내지는 개화된 물질문명을 귀중품과 서로 교역을 위한 외교대상으로 경쟁을 하게 되었습니다.미국,러시아,프랑스,등 선진 강대국들은 동양으로 눈을돌렸는데 우리나라도 예외없이 그들의 대상이되었다.당시 이러한 움직임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던 대원군은 철저한 쇄국정책으로 안으로의 혁신에만 힘을 기울렸다.
 
더우기 병인,신미 두 양요는 더욱 선진국들과 담을쌓고 개화문명을 받아들이지 않고,우리나라 개화운동에 앞장선 천주교를 탄압하는 등 강압적인 쇄국정책은 결국 우리나라의 근대화가 수년이나 뒤떨어지게 되었고 당연히 서구음악의 체계적 도입도 수년 뒤떨어 지게되었다.
 
대원군의 10년 섭정이 끝나고 민비가 정권을 잡자1875년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병자수호조약을 맺고 개국정책으로 전환되면서 강대국들은 앞을다투어 침투해 왔고 이러한 외세를 업고 개화당과 사대당이 대립하면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은 국내정세를 아주 혼란케 했다,
 
1885년 정부의 허가를 받고 처음으로 들어온 외국인 선교사 아펜셀라는 복음전파와 선교사업을 벌여 기독교의 교리를 가르치고 찬송가를 보급시켰다.그는 개화 운동과 신문화 운동에도 많은 영향을끼쳤다.최초의 신교육학교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을 세워 서구식 교육과 더불어 차송가와 외국노래를 갈쳤다. 이밖의 많은 미션계 학교에서 지도한 많은 음악교육들이 서구의 음악을 연구하고 깨우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잇습니다.
 
1893년에는 드디어 언더우더 목사가우리말로된 찬송가를 출판해 오선의 악보를 대중들이 처음으로 접했다.
1899년에는 미국인 선교사 배이드가 평양에 숭실학교를 설립,찬송가를 비롯 외국가곡들을 가르쳤다.당시로서는상당히 전문적인 교육기관으로 음악전문 지식을 많은 학생들에게 전달 했으며 후에 우리음악계의 선구자들을 많이 배출 되었습니다.
 
서양음악이 들어온 초기에는 연주단체나 연주의형식조차 없었다.여러가지의 여건이나 기타의조건들이 여의치 않았을것이다.그러나 유독 군악대가 창설 되었다는 사실은특이할만한 일 입니다.
 
광무4년 1900년 정부는 선진국들의 군악대의 활동에 자극받아 군악대창설을 공포하고 ,독일인 "엑케르터"를초빙해 시위연대 군악대를창설 하였다.엑케르터는 독일 드렛덴 음악원에서 오보에를 전공한 사람으로 취주악 지휘자인셈이다. 그는 또 일본군악대를 육성한 사람이기도 하다.
 
여하튼,시위연대 군악대는 최초의 연주단체이자 양악 합주단체로는 효시라 할 수 있다.
엑케르트는 군악대 연주를 통해 우리나라 음악발전에 많은공헌을했다.그는2년후 정부의위촉을받고 한국군가를 작곡했다.비록 외국인의 손 이기는하지만 이 군가가 창작가곡으로서는 우리나라 최초의가곡이 되는 것입니다.
 

한국가곡사 5 - 창가

서양음악이 학교에서 정식 교과로 채택된 것은 1904년입니다.물론 그전부터 미션계통의 학교에서 조금식 가르쳤지요.당시 학교졸업식에 창가를 했으며,신문의 학생입학 광고에 창가라는 과목이 끼여있다.창가라는 의미는 일반적으로 노래 한다는 뜻이지만 당시는 음악을 한다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그후 일제하에서도 음악시간은 창가시간으로 통용되었으며,해방전까지 그대로 사용되었다.
 
시대는 변했으며 세상은 많이 바뀌어저,새로운 물질문명의 개화 바람을타고 서양음악에 뜻을 둔사람들이 많이 나와 곧곧에서 열의를 보이면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서양음악은 발전에 속도가 좀 붙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이시기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김인식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평양에 장로교 예배당이 세워지고 그안에 보통학교(초등학교)를 설립 찬송가를 가르쳤으며 뒤에 중학교가설립되어 정식으로 교과목에 창가시간이들었으며 ,김인식도 이중학교에서 배출된 사람이다.
 
그는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재학시 선생을 대신해 학생을 가르쳤다고한다.선교사들로 부터 외국가곡과 찬송가 및 음악이론을 배워 우리의민요형식을 빌어 당시의 창가조의가곡을 작곡 하기도했다.1904년 19세때 자신의시에 '학도가'를작곡해 대중에 유행 시켰으며,양악의 선각자 역할을했다.
           
       1  학도야 학도야 저기 청산 바라보게
         고목은 석어지고 영목은 소생하네.
       
 
        2  동반구 대한의 우리청년 학도 
            놀기를 좋와말고 학교를 나가보자.
 
창가가 학교 교육의 한 과목으로 채택되어 가르치게 되자,한층더 발전을 보였는데 그것이 창가집의 발간이다. 오느날 교육부에 해당하는 한국학부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음악교재인 "보통교육 창가집 제1집" 이 정부인쇄국 인쇄로 발간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창가집이 발행된지 3개월후 ,1910년 치욕의 한일합방으로 일본의 창가를 그대로 받아 드렸던 것이다.    
                                                                                               
                                        
한국 가곡사 6 -조양 구락부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전문 교육기관 이다.(1909년)
창가가 점점 대중에 퍼지고 ,사람들의 관심을 가지면서 이에대한 연구와 학습은 당연하며 ,여러방면으로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으므로 보다더 체계적이며 제도권으로의 교육이 필연적으로 탄생했으니 이름하여 "조양구락부" 라 헀다.새로운 창가를제정하는 동시에 서양악기를 구입하고 악보를 편찬 하는 목적으로 뜻 있는 음악청년들로 시작되었다.
 
조선악과와 서양악과로 나누어 현금,가야금,양금,생황,단소,풍금,바이올린,음악이론을 가르쳤는데 1913년 "조선정악전습소"라고 명칭을 바꾸어 실질적인 음악전문 교육기관으로 발전 하였습니다.이전습소를 제1회성악과와 제2회풍금과를 나온 '염광섭'과 제2회 바이올린과출신인 '하대흥' 숭실학교 를나온 김인식 등이 교사로 활동했습니다.
 
제2회 출신인 이상준과 성악과와 기악과를 나온 난파 와 홍영우도 여기서 교편을 잡았다.
선교사로부터 서양음악을 배우기도한 이상준은 우리의고전음악을 채보해 1913년 "놀양"등 16곡을 채보해<조선속곡집>을 발간했습니다.뒤에<신유행창가><조선신구잡곡><보통악전대요>등을 펴내어 양악의 대중화에 기여했으며1918년에는 중등음악교재로의 "창가집"을 발간 하였다.이상준의 시곡으로된 "야구가" "효순"등 34곡이 실려있으며 개인 작곡집으로는 최초이다.
 
한편,1910년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음악과가 설립되어 ,1914년 임배세 김형준 정사인등을 배출 했으며,당시 서양음악의선각자로 활약한 음악가 중에 김영환을 빠떠릴수없는데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음악학교를 거쳐 유일한 관립 학교인 우에노음악학교에서 독일 ,일본교수들로부터 정규적인 지도를받고 귀국해서 연희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활발한 연주활동을 펴 초창기의 양악발전에 시금석이 되었다.
 
김영환은 피아니스트로서뿐아니라 창작에도 몰두해,학교교가라든가 간단한 가곡 등 도 작곡했으며,1919년 기독교 청년회관을 중심으로"경성악우회"를 조직해 홍난파 김형준 등과 그해 1월13일 차립연주회를갖고 조직적인 양악 보급운동에 첫 선을 보이기도했습니다.     
-계속 -
 

한국가곡사 7 - 최초의 예술가곡 "봉숭아"
 
한일합방 이후,일본은 식민지 정책을 더욱 조엿고 우리민족을 강압적으로 탄압하며,수탈과 민족문화 말살의 초강수를 선택,나라를 잃은 민족으로서 쓰라린 굴욕과 한을 달래면서 ,저항과 망명 여러각도로 민족정신을 깨우치고 ,근대화의 후진을 개탄하고 구미선 진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음악에 뜻을 둔 사람도 일본이나 구미 각국으로 유학해서 새로운 음악의 기능과 지식을 배우고 돌아와 국내에서 활동하는 사람도 많아 졌습니다.
 
이시기의 음악활동은 물론 자유롭지 못하였으며,망국의 서러움을 달래는 한을 심는 내용이나, 압박으로부터의 자유나 평화를 갈구하는 마음 등을 자유로이 표현을 할 수 없었다.다만 은유적 의인적으로 혹은 적당한 늬앙스를 풍기며 서서히 근대적 예술가곡의로의 면모를 갖춰가기 시작했습니다. 산모의 고통이라 할까? 뭐 그런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대표적인 가곡이 홍난파의 "봉숭아"이다.
삼일운동 이듬해인 1920년작곡되었으며,대중적으로 불려지기는 22년뒤인 1942년이다.울밑에선 봉숭아는 우리나라이며.........
 
난파는 1897년,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16살때 조선정악전습소를 입학, 2년후 졸업해서 교사로 2년간 재직하다가 일본으로 유학,1931년 미국으로 건너가 셔우드대학에서 연구하고 귀국해서 이화여전 강사로,경성방송국 양악책임자로
관현악단을 조직 활동 하였다.
 
가곡 "봉숭아"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근대적 풍을 지닌 신류의 노래였다.민족의 처량함과 비통한 슬픔을 표현한 애수에 찬 선율은 민족의 정서를 잘 표현했으며 지금까지 한국가곡의 등대지기 역할을 한 샘이다.저항의노래 어쩌면 우리의 역사와도 같은 이 단어, 이시기에 우리가곡이 처음으로 태어났다? 
생각하면 할 수록 자꾸자꾸 생각의 파장이 잘게 잘게 일어난다.또 일을킨다.
 
김천애에의해 처음으로 불리워진 가곡 "봉숭아",그때는 일본이었고 그해가을 귀국해서 서울의 부민관(전 국회의사당) 평양 키네마등 여러곳에서 불러 청중들의 가슴을 쳤다고 합니다.그러나 일본경찰은 이노래를 금지시켰으니. 또 한번의 설움을 축척하며 뒷날 우리가곡의 명곡 탄생에 밑거름으로 동결 되었다. 끝으로 섭설한 애기,필자가 아쉬운 부분은  난파선생이 친일파였다는 사실이며,한국가곡의 선구자라는 하나만으로 존경을 한다.
 
 
 
 
퍼옴
 http://blog.naver.com/chang4719/60003015893
차한잔 네이버 블로그에 감사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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