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화폭의 예술

Georg Philippe Telemann

淸山에 2009. 9. 15. 06:43

 

 

Georg Philippe Telemann
 

 
      = Georg Philippe Telemann(1681 ~1767) = 독일의 작곡가. 매우 장수했던 게오르그 필립 텔레만은 아마 음악사상 가장 다작의 작곡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약 6000곡에 이르기 때문에 만년에는 작품 목록을 만들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쉿츠가 죽은 지 9년 뒤, 그리고 바흐가 태어나기 4년 전인 1681년 마그데부르크에서 태어나 베토벤이 태어나기 3년 전 함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것은 이미 유럽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라고 하는 신동을 절찬하고 또 잊어가던 무렵이었고, 또 에스터하지 후작이 자기의 악장으로 있던 요제프 하이든의 교향곡을 30곡 남짓 듣고 있던 무렵이었다. 텔레만은 목사의 집안에 태어나서 젊었을 때는 음악뿐만 아니라 법률, 지리, 라틴어, 그리스어 등을 폭넓게 배웠다. 12세 때 오페라를 작곡, 상연하여 호평을 받았고, 독일인 작곡가(로젠뮐러 Rosenmuller)나 이탈리아인 작곡가(코렐리, 칼데라)를 규범으로 하여 작곡을 하였는데 그것은 주로 독학이었다. 1701년에 할레에서 헨델과 알게 된 뒤 그는 법률 공부를 계속하기 위하여 라이프찌히로 갔다. 라이프찌히에서 그는 로마누스 시장에게 작곡가로서 인정받아, 성 토마스 교회를 위하여 2주일마다 칸타타를 작곡했는데 당시의 칸토르는 요한 쿠나우였다. 이윽고 법률 공부를 그만두고 음악에 전념하게 된 그는 라이프찌히 가극장의 지휘자가 되었으며 공개 연주회 조직인 콜레기움 무지쿰을 창설했다. 1705년에는 조라우에서 에르트만 폰 프롬니츠 백작의 악장으로 취임했다. 여기에서 그는 프랑스 음악에 열중하고 있던 주인을 위해서 륄리나 캉프라에서 착상을 얻은 작품을 썼다. 또한 주인을 따라 폴란드의 영지로 가서 민속음악이나 슬라브 춤곡에 친숙해졌다. 1706년 아이제나흐로 옮겨간 그는 바흐를 만나 그의 둘째 아들 칼 필립 에마누엘의 대부가 되었다. 1712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으로 이주하였고 1721년에는 함부르크로 옮겨갔다. 함부르크에서는 성 요하네 학교의 칸토르가 되었고 이 도시의 주요 5개 교회의 음악감독도 겸했다. 그는 일생을 이 고장에 머물렀는데 라이프찌히에서 쿠나우의 후임 자리를 놓고 바흐와 겨룬 적이 있다(1722). 그는 몇 차례 여행했을 뿐인데, 그 중 1737년에는 파리에 체류했다. 한자 동맹의 중심도시(함부르크)에 오페라나 종교음악, 콘서트 음악을 제공하는 것으로는 성이 차지 못한 텔레만은 1728년에 독일 최초의 음악지 신뢰할 수 있는 음악 스승 Der getreue MusicMeister을 창간하여 이것을 주도했다. 그리고 각지의 궁정에 신작이나 미간의 작품을 제공하고 계몽주의의 사상가, 시인, 작가의 철저한 연구에 종사하면서도 자기의 정원을 꼼꼼하게 손질할 시간을 갖는 활동가였다 (헨델은 그에게 매우 진기한 종류의 튤립이나 히아신스의 구근을 보내기도 했다). 만년의 그는 현악4중주와 같은 새로운 분야에서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또한 최후에 완성된 작품인 칸타타 이노 Ino(1765)는 글룩의 작품과 흥미 깊은 유사성을 나타내고 있다. 생전의 그의 명성은 그 시대의 누구보다도 높았는데도 사후에 텔레만은 아주 잊혀져 버렸다. 텔레만이 생전에 바흐로부터 획득한 무례한 승리의 대가는 후세 사람들에게 비싸게 치루어졌다. 프랑스에서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널리 유럽 전역에서 그 음악이 사랑을 받았던 이 인물, (생략) 저 신랄한 마테존조차도 단순한 찬양을 넘어 유일한 음악가라고 말했던 이 인물도 오늘날에는 잊혀져 버리고 멸시받기에 이르렀으며, 그를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다(1919 로맹 롤랑). 그러나 그 뒤 상황은 바뀌었다. 텔레만은 특히 LP 레코드 덕분에 재발견되었다. 바흐의 b단조, 텔레만의 C장조란 이미 19세기에 음악학자 필립 슈피타 Philipp Spitta가 한 말이다. 텔레만의 외향적인 성격과 가까이 하기 쉬운 재기가 이러한 경구(警句)를 낳게 했다. 게다가 바흐와 텔레만은 그들이 각기 유럽에서 차지했던 지위가 아주 달랐다. 매우 다양한 경향이나 흐름을 통합하고 융합시키는 능력에서는 바흐가 뛰어난 데 반하여, 텔레만은 전혀 반대로 모든 것에 순응하고 거기에서 이익을 이끌어내면서도 이른바 카멜레온처럼 그때마다 의상을 바꾸어 입었던 것이다. 그는 이처럼 당시 실천되고 있던 모든 장르의 이름을 높이고, 천성적인 호기심과 정신의 한없는 활력으로 서슴없이 최고의 수준에 놓을 수 있는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Dividend Day at the Bank of England 그 가운데는 심판의 날 Der Tag des Gerichts(1762)을 비롯하여 약 100개의 오라토리오, 하루의 때 Die Tageszeiten(1759) 등의 세속 칸타타, 44개의 수난곡, 페르골레지의 마님이 된 하녀(1733)보다 8년 전에 만들어진 부파적 막간극인 핌피노네 Pimpinone(1725)를 포함한 40곡의 오페라, 1년의 모든 요일과 축제일을 위한 칸타타 12년분, 600개의 프랑스풍 서곡, 유명한 식탁의 음악 Tafelmusik(1733)에 들어 있는 것을 포함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콘체르토나 실내악곡, 쳄발로곡, 가곡이 있다. 아마 그처럼 옛 폴리포니 음악과 갤런트 양식의 모순된 요구에 응하려고 애썼던 작곡가는 없을 것이다. 거기에 그의 영광(과거 및 현재의)이 있는 동시에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생전에는 바흐보다 명성이 있었던 텔레만의 파리 4중주곡은 플룻, 바이올린, 비올라 다감바, 통주저음으로 구성된 4중주 작품입니다. * 마 리 아 * Paris Quartets : B minor Quartet-B minor Quartet Holtslag, Peter (Flute) / Mackintosh, Catherine (Violin) Dreyfus, Laurence (Viol) / Haugsand, Ketil (Harpsichord) Paris Quartets : E minor Quartet-E minor Quartet Holtslag, Peter (Flute) / Mackintosh, Catherine (Violin) Dreyfus, Laurence (Viol) / Haugsand, Ketil (Harpsichord) Paris Quartets : G major Quartet-G major Quartet Holtslag, Peter (Flute) / Mackintosh, Catherine (Violin) Dreyfus, Laurence (Viol) / Haugsand, Ketil (Harpsich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