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화폭의 예술

와토 - Watteau, Jean-Antoine (1684~1721)

淸山에 2009. 9. 15. 06:40

 

 

와토 - Watteau, Jean-Antoine (1684~1721)  


  풍부한 상상력으로 로코코의 꽃을 피운 사람. 와토

 

La Gamme d'Amour. c. 1712. Oil on canvas. National Gallery, London, UK


장 앙트완느 와토는 북프랑스 발랑시엔 태생으로 부쉐, 샤르댕, 게인즈버러등과 함께 로코코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입니다.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회화를 지배했던 색채에 대한 금욕주의에서 벗어나 감각적이고
감미롭고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화려한 색채를 통해 로코코 회화의 전형으로 만들었던 작가입니다.
 따라서 와토의 작품을 보시기 전에 대략이나마 '로코코미술'에 대한 언급이 필요할 듯 합니다.



 

Mezzetin. 1717-19. Oil on canvas.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USA


▌Rococo 미술

섬세하고 우아하며 여성적인 것이 특징인 로코코 미술은 루이 15세 시대의 특징적인 장식 예술 및 장식품들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로코코는 1700년경 프랑스에서 등장하여 18세기말 복고풍에 밀려 후퇴할 때까지 유럽을 휩쓸었습니다. 로코코라는 말은 '조약돌'을 뜻하는 프랑스어인 '로카이유'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 단어는 루이 15세 치하의 상류 사회의 취향을 지칭하는 미술사가들의 은어였습니다. 처음에는 조롱의 뜻으로 자주 사용되었으나 요즈음에는 미술사가들에 의해 객관적인 의미에서 일정한 통일과 조화를 갖고 있는 예술적이고 장식적인 양식을 일컫는데 사용합니다. 부서지기 쉬운 호화로운 장식, 사소한 주제, 목가적인 시, 규모는 작으나 정밀한 조각등이 쉽게 눈에 띄는 것이 로코코의 특징입니다.

로코코 건축의 최초 작품은 로베르 드 코트의 베르사유궁전 예배당인데 메소니에, 보프랑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이어서 오베르, 가브리엘 부자와 쿠르톤 등이 활약하였고, 보프랑이 만든 오텔 드 수비즈의 타원형 살롱, 또는 가브리엘의 퐁텐블로궁의 회의실이나 베르사유궁전의 여러 홀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장식은 당시의 취미를 잘 전해주고 있습니다. 가구 분야에서는 C.크레상이 일찍이 레장스 양식을 완성하였고, 루이 15세의 궁정소속 가구 목수인 A.고드로라든지 P.미종, 독일 출생인 J.F.에벤이나 그의 제자인 J.H.리즈너 등도 유명합니다.

로코코 회화는 와토의 「시테르 섬으로의 탈출」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색과 선이 서로 융합되고 서로 연관되는 섬세하고 우아한 작품을 보이면서 「공원의 연회」 등 품위있는 궁정 남녀의 유희등의 걸작을 선보였습니다. 1730∼5년부터는 로코코의 또 다른 국면이 시작됩니다. 훗날 회화적 장르라 불리는 이 때의 특징은 비대칭적인 장식의 사용입니다. 피노가 실내 장식에서, 그리고 메소니에가 은공예에서 처음 시도했으며, 조각가인 몽돈과 퀴빌리에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로코코 양식은 먼저 프랑스에서 일어나 프랑스 왕권의 흥성과 함께 전유럽에 파급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이를 대폭적으로 받아들인 나라는 독일입니다. 독일에서는 1720년경부터 약 50년간 로코코 양식이 건축계를 지배하였습니다. 다만 독일의 로코코 양식에는 바로크적인 장중미가 많이 남아 있는데, 장중한 건축과 경쾌 화려한 내부장식이 색다른 대조를 드러냅니다.)


「시테르 섬으로의 순례」
 

Embarkation for Cythera, or The Pilgrimage to Cythera. 1717. Oil on canvas. Louvre, Paris, France



로코코 회화는 와토의 '시테르 섬으로의 순례'로 부터 비롯됩니다.
물론, 사랑하는 남녀 쌍들이 사랑의 섬을 순례하고 떠나는 단순한 광경을 그린 것은 아닙니다.
화면 오른쪽에 분홍 장미로 장식된 하얀 아프로디테의 조각상이 있고 아홉 쌍의 남녀가 각기 우아한 의상을 걸치고 관능과 쾌락의 섬을 막 떠나려 하고 있습니다. 뒤쪽으로 숲과 바다와 구름이 펼쳐지고 큐피트가 하늘에서 납니다. 그리고 땅 위에선 귀여운 개가 한 마리가 무심하게 놀고 있는 이 장면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화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늘어서 있는 세 쌍의 남녀 행렬이 사랑의 유희에 몰두했다가 시들어져, 마침내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가는 일련의 움직임을 순차적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 지상에서의 사랑이란 영원할 수 없으며 덧없고 허무한 유희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듯합니다.

시테른 섬으로의 순례는 1717년 왕립회화조각아카데미에 의해 와토가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된 작품으로,
루벤스의 사랑의 정원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며, 로코코 미술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개방적이며 곡선이 주조를 이룬 화면 구성, 밝은 색채, 행복감과 노스탤지어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전체 분위기는 18세기 프랑스 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행복은 본질적으로 덧없는 것이란 의식을 작품 주제로 즐겨 사용했던 와토의 가장 와토적인 작품입니다.



 

그네


절대 권위를 내세우며 영원히 지지 않을 태양왕으로 군림했던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 궁을 중심으로 전 유럽에 군림하던 시대, 미술은 단지 왕권 강화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만 존재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루이 14세의 사망 이후 미술은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는 로코코 양식의 회화를 등장시킵니다. 로코코 미술의 근간을 이루는 작가는 말씀드린대로 와토입니다. <시테르 섬의 순례>를 통해 와토는 왕립 아카데미의 정식 회원으로 입회하게 되는데 당시의 아카데미적인 고전주의 양식을 거부한 왕립에서 와토의 입성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권위적인 미술만을 고집해 왔던 왕립 아카데미는 와토가 꿈꾸는 사랑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급기야는 아카데미의 회원들에게 ‘사랑의 향연'이라는 호칭까지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주제는 전형적인 로코코적 풍속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은 로코코 회화의 막내동이 격인 프라고나르의 같은 제목의 작품으로 이어지게 되지요. 그네를 미는 남자의 진지한 모습 , 그네를 타는 여자의 경쾌한 동작,  나무 그늘에서 그네타기를 즐기는 여유와 자유스러움, 사랑의 감미로움, 이것은 로코코 회화, 특히 와토 회화 세계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요소입니다.


 

놋그릇을 씻는 여인


▌플랑드르의 통속적인 풍속화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입니다. 와토 특유의 우아함이 보이지 않는 다는 데서 이 작품이 진품이라 간주할 수 없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물들이 보이는 동작의 경쾌함, 필촉의 경쾌함, 그리고 배후 풍경의 유연함 등에서 와토의 초기 화풍이 배어나옵니다.

 

Arlecchino Emperor in the Moon. 1708. Oil on canvas. Musee des Beaux-Arts, Nantes, France



이 작품은 희극의 한 장면입니다. 하지만, 희극의 장면을 직접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와토가 그의 보호자인 클로드 질로와 같이 생활하면서 보았던 질로의 판화를 본따서 그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참새 둥우리를 든 사나이



로코코의 서막을 연 와토는 풍부한 상상력의 소유자였습니다. "우아한 파티" 또는 "전원 파티"라고 일컫는, 작은 그림에 특히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이들 작품에는 은은한 새틴이나 비단옷을 입은 우아한 젊은 남녀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숲이 울창한 정원에서 음악을 연주하며 춤을 추고, 서로 농담을 주고받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이를 일컬어 로코코는 와토가 만들어 낸 ‘우아한 축제'라는 이름으로 명명합니다. 하지만 ‘우아한 축제'와 '사랑의 향연'으로 대변되었던 와토의 작품이 꼭 사치스럽고 화려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요절이 증명하듯 우울함과 어둠의 그림자가 이 장식적인 아름다움의 베일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두 쌍의 연인들



기타를 둘러 멘 피에로와 왼쪽 끝에 앉아 있는 아를 캥, 그리고 부채를 든 젊은 여자와 또 한 사람의 여자 으슥한 정원 한 모퉁이에 그려져 있다. 오른편 여자는 검은 가면을 피에로에게 내밀고 있으나, 그것이 그 어떠한 사랑의 표징인지 또는 어떤 무대의 한 정경 인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세태로 보아 두 쌍의 연인들이 들판이든, 실내든 사랑의 밀회를 즐기는 일은 아마 일상적인 풍속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와토가 그리는 사랑의 밀회는 단순히 감미로운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질투라든가 시기라든가 하는 미묘한 요소들이 끼어 들고 있습니다. 작품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 까닭도 있겠으나, 색채와 질감 묘사가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사랑의 모험을 하는 여인


와토는 어려서부터 많은 사람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리기 시작했고, 이 때부터 그의 스케치북은 감탄을 금치 못할 훌륭한 데생 작품이 가득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가 발렝시엔느를 떠나 파리에 건너간 것은 18세때의 일입니다.



 

화살을 빼앗긴 큐우핏


장난이 지나쳐 비너스로부터 화살을 빼앗긴 큐핏이 화살을 다시 뺏으려고 어머니의 가슴팍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이미 오래된 주제이기는 하나 이 작품의 구도를 와토는 베로네제의 작품에서 빌어 오고 있습니다다. 와토는 비단 베로네제 뿐만 아니라, 베네치아파의 여러 화가들, 즉 티지아노, 틴토레토 등의 작품을 통해 화려한 색채와 풍만한 육체에 접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와토의 비너스는 보다 우아하고, 색채도 담백하고 경쾌한 것이 특징입니다. 구도에 있어서는 인물을 전면에 크게 클로즈업시키고 원경을 멀리 생략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또한 특징입니다



 

주피터와 안티오페


루벤스의 회화를 상기시키는 작품입니다. 이 그림에는 베네치아풍과 플랑드르풍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으며, 여자의 나신과 남자의 나신과의 강렬한 대조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탈리아풍의 놀이


와토는 파리에 도착한 이후, 새로운 아름다움의 세계에 눈을 뜹니다. 이후그랑드 오페라극장의 장식화가였던 질로에게 배우고 이어 장식화가 C.오드랑의 조수가 되어, 주로 인물사생과 희극배우들을 스케치를 합니다. 오드랑은 당시 뤽상부르궁의 어용화가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의 접촉으로 궁전에 있는 루벤스나 플랑드르계 명화를 접하고 감화를 받게 되면서 그의 작품은 한결 깊이를 더해 갔고, 자신의 내면세계를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는 것이죠.


 

이탈리아풍의 세레나데


젊은 시절에는 후원자이자 미술품 수집가인 크로자를 위해 그림을 그렸고 후에는 후원자 없이 혼자 힘으로 작품 활동을 했는데, 작품을 중간 상인에게 넘겨 팔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면서 와토의 로코코 양식은 표현의 독특한 형태를 갖춥니다. 그는 경쾌하고 뛰어난 소묘력을 지닌 화가였습니다. 가벼운 붓놀림과 풍부한 색채가 전해 주는 화면의 아름다움은 보는 이에게 절로 감탄을 자아냅니다


 

조망


루이 14세의 죽음 이후 당대의 귀족들은 베르사이유궁을 떠나 자유와 사치를 풍미하며 파리의 대저택에서 도시 생활의 여유를 만끽하는데 로코코는 이들의 후원을 등에 업고 성장합니다. 이는 곧 자신들이 그 동안 갇혀 지냈던 구속에서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었죠. 사치스럽고 화려한 그들의 생활에 로코코는 필수 액세서리처럼 잘 어울렸고, 회화로 남겨지길 바라는 그들의 희망에도 어느 정도 부합되었습니다.



 

쟝 드 쥘리엔느의 초상


쥘리엔느(1686~1766)는 유복한 상인으로 와토의 가장 가깝고 헌신적인 친구이자 20점에 달하는 가장 훌륭한 와토 작품의 소장가이기도 했고 또 와토에 관한 많은 회상의 글을 남겨 놓았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쥘리엔느를 그린 이 작품은 그 진위를 놓고 끊임없이  이론이 제기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密語를 속삭이는 아를캥


이탈리아 희극의 아를캥이 광대 옷에 검은 가면을 쓰고 상대역인 콜롱빈(광대의 연인)에게 무엇인가 속살대고 있습니다. 이 두 중심 인물은 이탈리아 희극의 한 장면을 그려낸 것이며, 반대로 왼편 뒤쪽의 인물들은 와토만의 세계, 즉 '사랑의 향연(페트 걀랑트)'의 세계입니다. 화면 중앙 뒷면에 우뚝 서 있는 주상에는 장미꽃이 엉키고 있어 애욕의 상징으로도 보입니다.


 

철부지


실 타래를 들고 실을 뽑고 있는 시골 아낙네를 피리를 들고 밀짚 모자를 쓴 사나이가 엿보고 있습니다. 이 정경이 연극 무대의 한 장면인지, 아니면 어떤 풍속화적인 정경인지 또는 그 어떤 우의를 담은 그림인지는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주제부터가 와토로서는 예외적인 농촌 풍속을 다루고 있으며, 이 점에 관해서는 많은 전문가들이 플랑드르의 영향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음악 레슨



와토는 하청 화가로서의 현실적인 요구에 순응하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미적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당시 베르사유궁전을 중심으로 꽃핀 화려한 왕조문화의 궁전풍속을 비롯하여 주로 프랑스 상류사회에서 펼쳐지고 있던, 밝고 우아하며 어딘지 모르게 관능적인 매력을 풍기는 풍속이나 취미에 적합한 작풍을 전개하여  ‘아연’으로 불리는 로코코회화 특유의 테마와 정서를 확립하는 것이지요. 그의 페트 갈랑트 회화는 18세기 프랑스 회화의 주류를 이루면서 특히 부쉐와 프라고나르에 의해 계승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연관찰에 착실했던 영향 때문인지 그의 작풍을 이어받은 다른 로코코화가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풍요함이 그의 작품에는 깃들어  있습니다.




 

피에로, 질르, [Pierro, Gilles 장 앙투안느 와토, 1718, 캔버스에 유채, 184 x 149cm루브르 박물관


거의 등신대로 그려진 이 작품은 "회화 예술의 정점, 인간 정신의 가장 빛나는 표현의 하나"라고까지 극찬되고 있는 작품입니다. 와토가 즐겨 그린 인물들 가운데 희극배우와 광대가 많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는 점입니다. 피에로는 웃고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삶의 애환과 비애를 안으로 삭여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아름다운 장식으로 치장한 인생의 화사함 뒤안에는 덧없고 서글프고 우울한 비애가 도사리고 있음을 직시할 줄 알았던 와토의  미학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후에 들라크루아에게 영향을 주었던 이 멜랑콜리(우수)는 원초적이며 현실적인 삶의 고단함을 인물에 그대로 투영시키면서, 인물보다는 배경을 통해 생의 허무함을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화장


은밀한 실내화라고 할 수는 있겠으나, 로코코적인 관능의 나체화라기보다는 오히려 플랑드르 또는 네덜란드의 풍속화를 떠오르게 하는 작품입니다. 실제로 와토에게는 이와 같은 풍속화적이고 플랑드르적인 사실주의의 일면이 있음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와토가 공상적인 우아함 과는 또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그는 그의 친구의 콜렉션을 통해 실지로 플랑드르파의 회화를 연구했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합니다. 와토는 이 작품 외에도 같은 주제의 작품을 2점 남겨 놓고 있으며, 그 중 이 작품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파리스의 심판, 장 앙투안느 와토, 1718, 패널에 유채, 47 x 31cm


파리스의 심판은 보티첼리, 루벤스등 많은 작가들이 그린 주제입니다.   루벤스는 파리스의 심판에 관한 그림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그렸던 것으로 유명하죠.   와토의 파리스의 심판은 작은 크기의 화폭이며 주제 자체를 두고 볼 때 어떠한 시적 발상에 의한 것인지, 또는 우의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방패를 들고 있는 이는 헤르메스이고, 사과를 들고 있는 이는 파리스이며, 뒷모습이 아름답게 묘사된 여신은 단 한 명뿐이어서 세 여신 중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불분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림의 제목이 말해주듯 "파리스의 심판"이 와토풍으로 재현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불안한 연인


와토의 상상 속 세상에는 사랑의 즐거움과, 아름다운 세상 풍경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화폭을 수놓는 인물들은 와토의 꿈에 등장하는 사랑의 주인공들입니다. 나무들이 우거진 한가로운 숲길을 걸으며 속삭이듯 노래하는 주인공들의 몸짓이나 표정의 미묘한 변화와 움직임에서 발견한 생명력을 흡사 카메라의 렌즈처럼 세밀하게 포착해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상상력은 결국 최후에서 큰 방향 전환을 가져옵니다. 그곳엔 사랑과 죽음, 생경함과 두려움이 함께 하게 되는 것이죠. 폐결핵 선고를 받은 이후 와토의 내면세계에는 어둠의 그림자가 더욱 짙게 드리워집니다


 

프랑스의 배우들



지병이었던 폐결핵으로 인해, 결국 37세라는 짧은 생애로 상상의 날개를 접고야 만 와토, 그의 회화에는 종교와 신앙을 주제로 한 것이 거의 없습니다. 지극히 인간적이고 지상적입니다. 화려함의 뒤안에 숨어 있는 깊은 슬픔과 우수, 그리하여 와토의 작품은 비오는 가을 밤에 남몰래 펼치는 어느 봄 날의 일기장과도 비슷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대의 섬에서, 오 비너스여, 내가 본 것은 오직,
내 모습이 목매달려 있는 하나의 상징적인 교수대뿐…
아, 주여! 내게 주옵소서, 내 마음과 몸을
혐오 없이 바라다 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보들레르, 시테르 섬으로의 여행 중에서-




자료출처: 21세기 미술사,
cgfa, youth.co.kr/onetart, grand collection.
음악: Dark Sanctuary / L'emprisonnee
  편집: Theatr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