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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즐거움과 슬픔을 몇 번이나 누릴까 - 일타홍(一朶紅)
신윤복의 월하정인(月下情人)
희음 (戱吟 장난삼아 지어본다) - 심희수(沈喜壽)
朝朝弄侍婢
조조롱시비
不謂室人知
부위실인지
偶泄閒消息
우설한소식
還慙白髮垂
환참백발수
아침마다 계집종을 희롱하며
집 사람이 알리라곤 생각지도 않았는데
어쩌다가 쓸데없이 소식이 새나가
하얗게 센 백발이 부끄럽구나.
달구경(賞月) - 일타홍(一朶紅)
亭亭新月最分明
정정신월최분명
一片金光萬古情
일편금광만고정
無限世界今夜望
무한세계금야망
百年優樂幾人情
백년우락기인정
우뚝 솟은 초승달은 밝기도 하니
한 줄기 빛에 만고의 정이 실려 있네
예나 지금이나 온 누리를 밝히는데
백년의 즐거움과 슬픔을 몇 번이나 누릴까.
심희수와 일타홍의 헌신적 노력과 사랑으로 관직에 나가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 쯤,
일타홍은 고향 금산으로 가고 싶어 했다. 그런 중에 심희수의 금산군수 발령은 일타홍에게는 금의환향의 기회. 고향으로 달려가 부모 친척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위로한다.
그 후,일타홍은 자신의 할 일이 끝났음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주검을 각오하고, 시 한 수와 유언을 심희수에게 남긴다. 비록 천기(賤妓)지만 한 남자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쳤고, 그리고 진정한 사랑의 힘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시사하고 그녀는 갔다.(조선해어화사)
아래의 유탁이란 시는 일타홍의 유언에 따라 일타홍의 상여가 선산인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원흥리로 가기 위해 금강(錦江)가에 이르자, 홀연히 가을비가 소소하게 내려 사람의 마음을 한 없이 구슬프게 했다.
이때에 심희수는 사나이 가슴을 여매는 아픔을 주체 할 수 없어 흐르는 강물에 마음 씻고, 내리는 빗물이 님의 별루(別淚)구나, 하며 한 편의 시로 애달픔을 달랜다고 한다.
희수는 할 수없이 노수신(盧守愼)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고 2년도 못 되어 고금의 시서(詩書)를 모조리 통달하고 22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3년 뒤에 문과에 급제했다.
일타홍의 정성어린 이야기가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가자 친히 불러 말했다 “정말로 아름다운 사랑인지고!” 일타홍아, 그래 네 소원이 무엇인고?” “저의 남편을 금산 군수로 제수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곳은 저의 고향입니다.” 그렇게 해서 심희수와 일타홍은 금산에 내려와 행복하게 살았으나 어느 날 사랑하는 모든 것을 뒤로 남겨둔 채 일타홍이 죽었다. 심희수는 일타홍을 버들상여에 싣고 가며 울며지은 유탁(有倬)시는
이별눈물(有倬) - 沈喜壽
一朶芙蓉載柳車
일타부용재유차
香魂何處去躊躇
향혼하처거주저
錦江春雨丹旌濕
금강춘우단정습
應是佳人別淚餘
응시가인별루여
일타홍의 연꽃은 상여에 실려
향혼(香魂) 어딜 가며 주춤대나
비단강(錦江) 봄비에 붉은 명정(銘旌) 젖어드니
아마도 고운 우리 님의 이별 눈물 그 아니랴
일송 심희수의 묘
일송 심희수(沈喜壽)와 부인 광주 노씨(光州盧氏)의 쌍분으로 조성된 묘 왼쪽으로 오래된 상석과 기념비가 놓여있다. 오래된 상석으로 미루어 일타홍(一朶紅)의 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만 하고 있다고 한다.
심희수(沈喜壽 1548∼1622)조선 중기 문신. 자는 백구(伯懼), 호는 일송(一松)·수뢰루인(水雷累人). 본관은 청송(靑松). 1570년(선조 3) 진사시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갔다. 157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1591년 응교·간관(諫官)이 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 의주(義州)로 선조를 호종하였다. 같은 해 도승지·형조판서를 거쳐서 호조판서가 된 뒤에 관서의 굶주리는 백성구제에 힘썼다. 그 뒤 홍문관·예문관대제학, 우의정·좌의정을 지냈다. 1615년(광해군 7)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있을 때 허균(許筠)과 중국 야사에 나타난 종계문제(宗系問題)로 다투다 축출되었다. 저서로 《일송집》이 있다. 상주(尙州) 봉암사(鳳巖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
一松 沈喜壽와 기생 一朶紅의 사랑
15세 미소년이었던 일송 심희수는 대가집 연회에 가서 선녀같은 기생 일타홍을 보고 사모의 정을 가진다. 10여일 후 글방에서 귀가 중 말을 타고 오는 도중 일타홍을 만나 며칠을 함께 지내게 되지만 일타홍은 이런 생활은 장구한 계책이 못되니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자고 한다. 일타홍은 낭군은 도량, 재주, 품격으로 보아 일찍 과거 급제하여 영상을 지낼 관상이므로 과거급제하면 3일 안에 반드시 만날 것을 맹세한다.
심희수는 일타홍을 그리워하여 침식을 폐할 정도였으나 일타홍을 만날 생각으로 과거시험 준비에 진력하였다. 그 와중에 장가를 들었으나 금실이 좋지 못했고 결국 소년 등과하여 일타홍을 만나게 된다. 심희수는 일타홍을 집으로 데리고 왔는데 예의범절도 빈틈이 없고 여공도 정교하였다. 후일 일타홍은 미미한 병에 걸리더니 고통도 느끼지 않고 숨을 거두었는데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인생의 생사장단은 한가지이며 군자에게 은혜와 사랑을 받아 한이 없다. 낭군의 옆에 뼈가 묻혀 지하에서 다시 만나 모시는 게 소원이다 라고 하였다.
심희수는 일타홍의 시신은 손수 염하여 첩을 귀장하는 예는 없으나 다른 연고를 대어 말미를 얻고 고양의 선영 안에 장사 지냈다.
일타홍이 죽고 난 뒤부터 집에 크고 작은 길흉사가 있을 때마다 반드시 일타홍이 꿈에 나타나 예고를 했는데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그러던 중 꿈에 일타홍이 나타나 심희수의 명이 다했으니 맞아 뵈올 날을 기다리겠다고 말했는데 일송 심희수는 과연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금산의 향교입구에 있는 비석중에 前郡守沈政丞喜壽去思碑(전군수심정승희수거사비)
라고 씌여 있는 비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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