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 부모 형제들이 겪었던 일본 거주 생활과 나의 이민 삶 비교
2023년 1월 21일
오후에 원희를 카페에서 픽업을 기다리는 중 주위 거리에 모습을 보면서 거리에 오고가는 시민들의 각 일면들을 보노라니 이제야 이런 모습도 이상할 것 없이 낯은 익지만 첫 이민 생활에서는 조국의 대한민국과 상이하게 다른 분위기 풍습 등에 겪는 삶의 변화가 쌓여 지금의 오늘에 이른 나를 비교할 때 문득 부모님이 형님을 데리고 고향 한밭(지금은 대전)을 떠나 부산항에서 일본으로 떠나는 관부연락선 (덕수환德壽丸 혹은 경복환景福丸이 1909-1945년까지 부산항-시모노세끼항의 정기 여객선)을 타고 오사카 나고야 그리고 토요하시에서 작은 마을 간베에서 해방 전까지 머룰던 흔적도 상상하면서 비교를 해 보았다.
참고로 초기 관부연락선의 운항 시간에 부산항 출발 오전 6:30에서 11시간이 소요되어 조선 수도 경성(서울의 옛 이름)에서 기차를 이용하여 일본 동경까지 총 60여 시간이 이후의 증기기관의 발달에 55여 시간으로 단축한 발전도 있었다니 지금으로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든다.
선박 이용 운임에 1등 선실(운임 12원)이 있는 맨 위층에는 담화실, 레스토랑 등이 있어 일류 호텔을 방불케했다. 2등실(7원)은 그 밑층의 다다미 깔린 큰방이었다. 그러나 3등실(3원50전)은 맨 아래층, 돗자리 깔린 선반이 층층이 달려있는 형태여서 '누에 치는 곳'이라고 불릴정도로 열악한 조건이었다. 해방 전의 1원은 지금의 15,000원에 비교된다(쌀 가격으로 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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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환의 모습 Deok Soo-hwan's appearance
나의 경우는 1982년 11월 1일에 한국을 떠나 이듬 해에 들어 온 처와 종효에서 원희까지 태어나는 삶에서
1985년 8월에 한국의 짧은 방문 기회가 있어 이후 지금까지 몇 차례 이상의 방문을 보건데 부모님의 경우에는 단 한 차례 1931년 경 일본으로 떠나 1945년 8월 광복 이후 어느 날 조선으로 귀국한 것을 비교하면 내 부모형제의 이민 역사와 나의 가족 이민역사가 Overlap 되어 그 이야기를 상상해 보기로 머릿속에 남겨 놓았으니 오늘의 일기 내용에 당시의 기록 등을 발굴하여 상상의 나래 글 첫 단계는 이렇게 시작하였다.
오늘의 이 글은 내가 자라면서 옆에서 지켜 볼 때 알던 것과 남은 삶의 흔적에서 추측한 내용을 그리고 당시의 상황을 나타난 자료를 근거로 작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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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은 고성 남 씨 10世孫 秀文 할아버지 자손(나에게 어려서 어머님은 너는 경자 자손이라고 누누이 교육 해 그 경자 할아버지가 수자 문자 할아버지 되신다)으로 24세손이며, 廷植 할아버지에 은진 송씨의 할머니 슬하 3남 3녀(이 중에 남희태南熙泰, 남희근南熙勤 두 분의 형님 나에게는 큰 아버님)의 막내로 1909년 己酉년 음력 12월 5일生 熙性(빛날 희 성품 성)이시다.
본적은 대전시 호동 255번지(옛 지명으로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호동리 255)이다. 한밭이라 불리던 엣 명칭이 있으니 지금의 대전을 그렇게 호칭했다.
부친 남희성南熙性이 태어날 때 조선은 순종 즉위 3년 차에 일본의 강제 합방 직전 암담한 시기라 항일 의병이 전국에서 활동한 국가와 사회는 온통 일본의 강제 침탈에서 온 소식과 소문에 휩싸일 때라 廷植 할아버지에 은진 송씨의 할머니 슬하 3남 3녀 온 가족은 대덕군 산내면 호동리의 산골 집에서, 노심초사 전전긍긍 하였을 일반 백성들과 다르지 않았을터 옛 교육 방식에 따라 근교 서당에서 혹은 집안에서 ‘아들을 가르치지 않으면 우리 집을 망치고 딸을 가르치지 않으면 남의 집을 망친다’는 부모 교육 이념으로 천자문,동몽선습, 계몽편, 명심보감,소학, 사소절 그리고 한글을 배우며 성장하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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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 朴三善은 1912년 1월 2월(음력) 생으로 2세 때 어머님(나에게 할머님)을 일찍 여의어 큰 이모님(어머님의 큰 언니)의 젖을 먹으며 자랐다고 들었다.
외가는 충남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옛 전북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가 되며, 외가 쪽으로 외삼촌 두 분과 두 분의 이모님이 계셨다.
父親 南熙性 과 母親 朴三善 은 어머님이 뽕 키우는 기숙사에서 옷 만들 실 뽑기 작업을 하시다 17세의 나이에 가까운 종친 남용태(촌수로는 나의 조카 벌, 연세가 많아 우리는 아저씨라 부른다)의 중매로 만나 1929년에 결혼하셨다. 이듬 해에 큰 형님 宓均미쯔오( 1930년생)를 낳고 부친을 설득하여 1931년경 현해탄 넘어 일본에 이주하였다.
부모님의 교육 수준과 당시의 상황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살아 갔는가는 내가 직접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 거의 없어 부모님과 함께 하며 내가 옆에서 보았던 것과 간간히 들었던 가족 이야기 등을 종합하건데 아버님의 경우는 집안에 딸렸던 작은 가게에서 구멍가게를 열어 일상생활품을 판매하면 외상 장부 작성한 것을 내가 들여다 볼 경우가 자주 있어 그 적힌 내용을 보면 날짜 순서에 따라 한글로 혹은 한자로 적힌 글씨를 보던 것을 떠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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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의 주위 친구분들과 여름 초저녁에 시조 암송 노래 부르는 광경을 수시로 목격한 것과 종친회 남씨 족보 개정 때의 25-30년 주기로 개정판을 만들면 한자로 그 내용을 참고하기위해 한자의 쓰기 읽기 등은 필수적 교육에서 배웠다고 본다.
어머님의 경우는 열 일곱 결혼 전에 대전의 대처에서 옷 만들 실 뽑기 공장 기숙사 생활도 할 만큼 당시의 산업 근간 흐름에 따라 기본 글 사용 쓰기는 배웠을 것으로 사회 적응의 수준은 깨워 있었다고 보았다. 또 내가 자라면서 옆에서 본 어머님의 장사에 기여한 일 그리고 이웃 혹은 지역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 등 경우에 어긋나지 않게 처신한 선택을 볼 때 보통 사람보다 앞서거나 특출하였던 것을 안다.
즉 사람을 꽤뜰어 볼 줄 아는 능력, 그리고 사회와 당시의 정국 흐름 전망을 추이까지 예견 할 줄 아는 지혜가 대단하였음을 높이 평가 받았다. 하여 남씨 집성촌 호동리 촌 마을안에서 큰 형님을 데리고 아버지 설득하여 장도의 일본 이주를 하였을 당시에는 대단한 결심과 의지가 없었으면 선택하지 못하는 놀라운 결정이었고 앞서 잠간 서술하듯이 부산진-시모노세끼항-오사카-나고야-토요하시-간베의 족적 흔적을 나는 2003년 8월에 누님과 조카 가족 함께 찾아 볼 기회로 현장을 보고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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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나의 어린 시절 어머니에 기본 일본어 질문을 하여 배웠던 단어들도 있고, 또 어머님이 자전거를 운전하여 무거운 짐도 실고 이동하였던 이야기도 있어 삶에 적용한 생활력이 뛰어 났음을 알고 있었다.
일본의 최종 삶의 지역은 당시 1945년 대동아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미공군의 대도시 공습 폭격으로 많은 피해자가
속출할 무렵에 토요하시에서 떨어진 작은 마을 간베神戶로 피신하였기에 가족 모두의 안전에 의한 선택이었음을 알아 또 한 번 놀라고 돌아 왔으니 내가 느끼는 어머님의 일상사 선택이 어떤 의미였는지 가늠하면서 이 글을 적는다.
1945년 8.15해방으로 가족 모두의 귀국 선택도 분명 어떤 동기가 있었을터 그에 대한 이야기는 주위로부터 듣지 못해 아쉽기는 하였지만 가족 모두의 안전하게 귀국후는 고향 대전의 터전에 닿아 시내 중심 지역 원동에 커다란 일본 적산 가옥을 구입하여 얼마의 세월이 지나서는 결국 이 글을 쓰는 내가 1949년 3월 17일에 태어나기도 하였으니 앞뒤의 가족 역사를 보건데 나의 존재는 어떤 경우에 없었을 것도 되거나 또 다른 가족의 이야기거리가 지어졌지 않았을까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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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흐름을 비춰 내가 존재한 다음 이 이야기가 만들어 진 역사의 갈림길 역사란 언제나 산 자의 이야기여 승리자의 이야기가 역사의 주체가 된 것에 이 글을 쓰는 순간만큼 큰 희열과 자부심에 쌓여 있다.
계속 적는다. 또 1950년 6.25의 전쟁은 우리 가족에게 어떠하였는가? 가족을 넘어 광복 신생 대한민국은 좌우의 이념 대립으로 피 터지게 죽는 일과 사회 전반의 혼돈 속에 북한 김일성 괴뢰군 침략의 전쟁은 단 며칠 만에 서울 함락과 밀리고 쫓기는 후퇴에 대구 가까이가 최종 방어선으로 풍전등화의 위기 조국이 유엔군의 속속 참전과 맥아더의 인천 상륙 작전의 승리는 또 다른 대한민국의 위기 탈출 기회가 되어 38선 넘어 평양 신의주 원산 흥남 그 위로 진격도 한반도 통일인가 싶었는데 이웃의 중공군 참전에 또 새로운 전쟁의 양상이 되어 밀리고 쫓기는 양상이 바뀌다가 몇 년 간 휴전회담의 결렬과 지속 등 최종의 순간 1953년 6월 18일 전국 8개 지역의 포로수용소 반공포로 3만 5천여 명의 탈출 석방 소식에 아버님을 모시려 대전역으로 향하는 어머님 뒤를 내가 따라간다고 집을 나섰었는데 아주 어린 나는(그때 만 4세) 군중 틈에 어머님을 당시 6월의 더워지는 맑은 날씨와 수많은 군중 틈에서 잃어 울며 가며 따르던 기억은 지금도 남고 어디로 더 헤매었는지는 모른다.
아주 큰 세월 지나 누님에게 물어 보니 나는 대전 역을 지나 목척교 쪽으로 헤매는 모습을 어느 누가 파출소에 데려 주어 그곳에서 머물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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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을 모시고 집에 돌아온 어머님은 큰 잔치로 일가 친척들과 담소하는 중에 막내 창균이가 보이지 않다고 말해 나를 찾았으니 시간도 한참 흘렀고 식구들도 나의 존재를 까마득히 몰랐다니 그때서야 웃음바다에서 온 식구가 나를 찾는다 동네방네 대전 곳곳을 헤맸었고 누님들은 나를 어떻게 보살피지 못하고 뭐 했냐는 꾸지람도 엄청나게 들었단다.
몇 시간을 찾아도 흔적이 없어 근심이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작은집의 형수님이 경찰에 근무하셔 그곳에도 나의 부재를 알리며 대전시 모든 파출소에 연락을 취한 후 늦은 저녁에야 내가 어떤 파출소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작은 집 형님이 자전거를 타고 나를 찾아와 나는 그 형님의 자전거 뒤에 앉아 울면서 집에 돌아 온 기억이 난다.
자전거 뒤에 손을 꼭 붙잡았는데 뒤로 떨어질까 봐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집에 온 후는 또한 기억이 남지 않는다. ㅎ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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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조국의 수호를 위해 산화한 많은 국군과 각기 피난의 남하에서 피아간의 폭격 등에 죽어간 민간인도 수 많이 발생한 것을 주위에서 보면 1950-1953 간의 전쟁에서도 가족의 안위와 생존의 기로에 어머님은 무엇을 선택하였는가는 가족 모두가 안전하면서도 위대하였다.
이후 지금의 휴전선을 깃점에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지금도 휴전 중의 대한민국이 휴전선 넘어 북한의 야욕에 굳건히 지키는 자유의 대한민국 국군은 군의 질과 군사 장비에도 셰계 어느 국가와 비교하여 우수함을 세계가 주목하고 있으니 이것 뿐이겠는가?
전국의 페허는 모든 산업 기반이 거덜났고 사시사철 백성의 먹거리 식량마저 부족하여 배 주리던 시절을 길게 겪느라 희망이 없는 대한민국의 위상은 당시 세계 153개국 중 152위의 빈국이었음은 자료로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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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찾는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 피기를 바라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영국의 학자 말마따라 한국의 모든 분야는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 꼴찌의 나라 바닥에 있었다. 이때 1961년 육군 소장 박정희의 5.16군사혁명은 나의 중학교 1년 시절이었다. 이전의 4.19학생 혁명도 신문으로 읽어 사회 전반이 어수선하던 중에
맞는 군사혁명의 변화는 무엇이든 머리에 박히는 속속 배움을 뛰어 넘어 별의별 변화 곡절이 나와 우리 가족 부모 모두에 직접적인 생각 사고 의식의 변화를 줘 시작은 미미하나 뭔가 꿈틀거리는 바닥은 새마을 운동 새마을 정신으로 ‘잘 살아 보세! 싸우면서 일하세!’사회 전반 서서히 변화의 바람이 사회 경제 등 각 분야에 영향을 미쳐 1964년 한국의 $1억 수출 달성을 기치로 비약적인 발전의 발전이 거둡되어 계획경제발전 60년 성과 2022년 현제 세계 8대 경제 대국에 올라 있다.
다시 일본에 거주하던 시절로 돌아 보는데 큰 형님 宓均미쯔오( 1930년생) 큰 누님 花子하나꼬(1932년생), 둘째 형님 이와오(6.25전쟁 중 대전에서 병으로 사망), 셋째 형님 台均가쓰오(대구 형님 1937년생), 둘째 누님 晴江하루에(1940년생), 작은(서울)누님 正子마사꼬(1942년생), 작은 형님 照雄데루오(일산 형님 1944년생) 등 3남 3녀를 더 낳으셔 시골 간베神戶에서 고물 모으는 생업으로 먹고살기에 괜찮으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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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형님과 누님의 연령으로 보건데 해방 직전까지 중학교 3년, 초등 6년, 초등 2년, 그리고 어린 유아 시절의 두 누님과 작은 형님 등은 모두 절대적 일본어 사용이 주 생활권에서 조선어(한국어)를 집에서는 필요에 따라 사용했겠다싶다.
훨씬 이전의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 피해가 넘치는 소문을 타 부모와 가족은 그에 따른 주의도 하였겠다. 다만 내가 직접 형님 누님으로 당시의 생활등 이야기를 들을 처지가 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였지만 결국은 지금의 이 들은 나의 추측에 그때의 인터넷 자료를 근거로 보는 것이다. 큰 형님은 1965-67까지 함께 장사를 도우는 시기에 있어 내가 직접 느낀 형님의 일은 사실에 가깝다.
15년 이상 일본어 사용 중에 한국으로 귀국한 형님의 우리 말 발음은 일본어 억양에 베어 우리 말 발음이 어눌한 것은 있었다. 당시는 일본어 사용도 곳곳에 있어 대표적인 단어는 우리말이나 일본어에도 생활에 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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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의 경우 장사의 외상 값 적는 공책에 한글과 한자를 병행하여 나도 사업상 수시로 확인하면서 들여다 보았다. 큰 누님의 경우 2003년 함께 일본 관광하면서 마지막 날 도쿄에서 누님 가족과 나만 남아 별도의 신간센 이용하여 오사카, 나고야, 토요하시를 거쳐 간베 가족들의 고향을 찾아 볼 때 누님의 옛 동창을 만나 그들이 서로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큰 누님의 당시 일본어가 되살아나 서로의 의사 표현에 막힘이 없었던 것을 보았으니 적어도 큰 형님, 큰 누님, 대구 형님까지는 그들의 일본에서 사용한 일어에 의사표시는 잊지 않고 되살아 났겠고, 작은 누님 두 분과 작은 형님은 너무 어린 시절이라 곧 도착한 조국의 언어에 묻혀 우리말의 사용으로 생활에 익숙하였겠다는 추측하며 나는 이 글을 쓴다.
이것과 함께 나의 가족 종효와 원희의 예를 상호 비교 하겠다.
두 자녀의 어린 시절 철저히 영어에 익숙하도록 가급적 우리말에 주의는 하지 않았고, 오클랜드로 이사하여 점점 늘어 나는 한인들의 규모에서 1988년 경 교회의 예배에 가면 몇 아이들이 있어 끼리의 만남에 우리말 영어 병행하여 불편이 없었는데 조금 더 지나 오클랜드에 한국학교 개설에따라 종효와 원희에게 한국어 공부도 부모의 입장에서 열심이 되기를 바라며 이들은 자랐다. 물론 한글 공부에 한글 읽기 쓰기란 과정이 쉽지는 않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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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빠르게 흘러 이들도 모두 성인으로 자라있는데 이들이 각 직장에 다니며 영어권의 일상은 당연히 원만하겠지만 집에서의 우리말 사용에는 부모와 의사 소통이 막히는 경우를 서로가 알기에 이 점이 나나 처에게 부담을 알고 지내 온다. 즉 종효와 원희에게 나의 속사정의 이해는 어렵고 대강의 뜻 알아 차리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니 더 욕심을 부리면 무엇하랴.
결론으로 이제의 세상은 인터넷 등의 일일 실생활권에 세계의 곳곳 뉴스 변화를 실시간대에 찾아 보기에 세상은 그렇게 넓은 것 같지만 곳곳의 흐름은 시시각각 똑 같은 시간대에 연락이 되는 신 세상에 살고 있다.
이에 영어는 전세계의 제1 공용어가 되고 다음으로 각각의 모국어가 혹은 그 이상의 이웃 국어도 사용하는 것을 보며 세상의 의사 소통은 큰 거부감 없이 두려움마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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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고국을 찾고 싶다면 그 편의도 쉽게 선택하여 다녀 올 수단이 많아 선택의 폭은 넓고 많아졌다.
그리고 형제 자매 친척 친구에 소식 연락도 핸드폰의 카톡에 부담 없이 무한대 사용이 가능한 IT기기에 힘입어 인간 문명의 발전 발달은 어디까지 펼쳐질지 그 가눔을 초월한 새 세상이 무한하구나.
아울러 나의 뉴질랜드 이민 삶이라하여도 전세계의 모든 정보 변화 등이 실시간 들어 오는 인터넷 생활권에 들어 부모의 1930-1945년대 이민 생활하고는 비교 차원이 다르며 이 글에 오른 아버님은 1975년(10월 1일)에 작고하였고 큰 형님은 1994년(5월 5일)에 또 어머님은 2007년(3월 17일)에 작고하셔 또 남아 계신 누님과 형님의 연세도 많아 형제의 만날 인연도 얼마되지 않았다는 흐름을 비껴가지 못함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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