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누나는 작년에 서울 장춘동 쪽 이사 후 짐 정리하고 가족 사진첩도 들여다 보면서 나와 종효, 원희의 사진을 찾게 되어 핸폰에 찍어 며칠 전에 나에게 보내주었다. 종효, 원희가 어릴 때 서울 방문때 찍은 옛 사진들이라 반가웠고, 또 내가 미쳐 모르는 사진 하나 껴 있어 누나에 물어 보니 어머니 옛 사진이라 하였다.
뜻밖에 들은 이야기에 그 사진을 한참 들여다 보고 우측 아래에 압인 도장이 찍힌 것이 보여 누나의 추측과 함께 증명서 관계 서류에 찍힌 가장 오래 된 사진임을 알았다.
팔십 여 년 전의 사진이라 이것의 더 확실한 내용을 알 수 없어 안타까운데 큰 누님 혹은 대구 형님께 추후 여쭈어 보기로 하였으나 오늘의 한방 허리 통증 치료를 받는 시간 엎드려 누워 있으니 어제의 어머니 옛 사진에 그 배경을 그려 보는 추억으로 까마득한 상상을 나래삼아 달렸다.
찍힌 싯점을 보니 1945년 직전이지 않나 싶더라. 일본의 나고야 혹은 간베 였으며 어머니의 서른을 갓 넘은 시기였다. 어떤 증명서(혹은 여권?)에 첨부된 증명사진에 얇은 흰 계통의 반 팔 부라우스에 벨트를 맨 치마의 옷은 그 당시 가장 큰 멋을 내어 찍었으리라. 당시의 시기에 사진 찍을 경우가 드물어 확실히 증명서 발급 등에 쓰였던듯 몸치장과 또 한국(당시의 조선 땅이었으면 치마저고리 차림이겠지만 그것의 준비가 없어 일본의 삶에서 가장 양장 차림으로 추측하여)이 아닌 것으로 가정한다.
사진에 보인 얼굴 모습에 어머님의 서른 초 인자한 하얀 얼굴이 인상 깊구나.
고향 한밭(대전의 옛 이름)을 1931년 떠나 멀리 이국의 나고야와 토요하시 그리고 간베의 삶에 자녀 7남매(나를 뺀 형님 4분 그리고 누님 3분)를 키우던 갓 서른 넘은 시절이었으니 자녀들 육아에 또 생활전선에 엄청 바쁘게 지냈던 시절인데도 고생의 흔적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님은 생활력이 강한 면모가 있어 자전거를 타고 멀리 큰 짐을 옮기는 일도 어렵지 않게 잘 적응하였단다.
그리고 저 사진 직후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자유 조선 땅 고향으로 모든 가족의 귀향에 현해탄 바다를 가로질러 대전에 오기까지 엄청 힘들었을 긴 여정도 어머님은 잘 감당하였구나.
당시의 조선 땅은 남북의 이념 경쟁과 좌익의 시위 선동에 사회 불안으로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1948년 신생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2년 후 1950년 6월 25일의 한국전쟁에 휩쓸렸을 때 나에게는 갓 돌을 넘은 유아기에 외갓집 마전을 거쳐 대구, 부산으로의 긴 피난 생활과 또다시 고향 대전으로의 귀향에 전국 곳곳은 전쟁 피해 상황과 산업 피해에 또 엄청난 국군 사망과 백성들 또 일가친척들의 죽음까지 우리 집에서는 둘째 형님의 병고의 사망까지 겹쳐 부모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펐을까?
6.25전쟁의 휴전 이후 어려운 조국의 생활상은 삼시세끼 식사도 여의치 않았고 산업의 경제 여건도 여의치 않아 그야말로 당시의 대한민국은 당시 유엔 140여개 국 중 최하위의 빈곤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자라면서 매일 먹는 양식의 부족으로 하얀 쌀 밥 먹는 날 보다 검은 보리밥이 대부분인 나날을 기억하고 있다. 입고 다니는 옷과 신발도 참 귀했었다.
일본에서 귀국하여 대전 중심가의 일본 집을 구입하여 넓은 주택에서 살던 기억이 있는데 부모님의 사업에 많은 돈을 잃어 근처의 인동 시장쪽에 이사하고 또 부사동의 신생 주택가로 이사하는 나의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내가 기억되는 집의 삶에는 굶주림과 어려움이 항상 따라 다녔었다.
더구나 6.25전쟁 중의 피난 시절 나는 둘째 누나의 등에 업혀 가족과 함께 대구 부산으로 이동하는 큰 고생도 겪었다는 이야기를 들어 추측만하였었다.
또 서울 수복 이후 대전으로 귀향하여 아버님은 미군의 오해로 인하여 포로로 잡히고 포로 수용소 생활이 되었으니 어머님은 그 사실을 안 이후 아버님을 찾기 위한 각 수용소 찾는 일에 겹치니 집안에 머물 시간보다 밖에 머물 시간이 많아 당시의 나는 너무 어린 유아때부터 점차 자라는 어린 시절에 넉넉한 음식 섭취가 부족하여 자람에 성장이 부족하였고, 또 유아 홍역의 수난에 적당한 의료 치료 받지 못한 일이 결국은 평생의 내 귀 왼쪽 청각을 잃는 장애로 살게 되었다. 지금 같은 의료 시설로 보면 그런 고막 상실이 되지 않을텐데 당시의 한국 산업과 생활 등에는 최하위 빈곤 국가에 언감생심 이렇게 살고 있음에도 감사해야 하니 지금은 추억의 흐름으로 흘쩍 뛰어 넘는다.
1953년 6월 26일 반공 포로 석방에 어머님은 대전 역으로 아버님 마중 나가는 일에 나는 어머님 떨어지기 싫어 그 뒤를 몰래 따라 나서다 대전 중심가 어느 곳에서 울며 혜매는 신세에 결국은 근처의 파출소에 맡겨지는데 우여곡절 끝에 육촌 형님의 자전거 뒤에 타고 집에 돌아 오는 순간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추억으로 떠 올라 한방 치료 끝나 집으로 돌아 오는 차 운전에 그 순간이 흘러 나왔다.
결국은 어머님 떨어지기 싫었던 그 어린 시절(당시는 나의 만 나이 4살 2 개월 때) 무작정 걸어 따랐던 기억이 이렇게 생생할지 몰랐다. 아울러 어머님은 그 삶속에 언제나 잘 감당하려는 의지가 강하여 어제 보았던 어머님의 젊은 시절 모습 사진이 크게 내 마음 속에 스며 들어 이 글이 지어나오게 되었다.
내가 ‘나의 이야기’글 지으며 부모 형제들 포함 나의 모든 삶의 흔적을 글에 옮겨 놓아 이제는 시간도 한참 지났는데, 오늘 같이 새로운 자료로 인하여 또 글을 짓게 되어 나의 회상 글에 껴 놓는다.
2024년 3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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