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나의 이야기

052 큰 누님의 임종 소식을 듣고 대부분의 조카들에 연락으로

淸山에 2025. 9. 28. 13:54
 

 

 

상철아!

 

그간도 잘 지냈냐?

 

대구 삼촌으로부터

네 어머니의 임종과 그 장례까지 소식을 잘 들었다.

 

네 마음도 많이 아프다싶구나.

 

서울 이모와 오늘 통화하여 너희들의 각 입장을 이해한다.

 

삼촌이 다른 말은 하지 않을게.

 

삼촌은 오래전부터 “나의 이야기 My Story”를 써 약 53편 정도의 단락에 이 모든 자료는

A4용지로 240매의 글

300매의 사진

도합 540매의 내용이 되네.

 

한글만으로는 부족하여 종효와 원희에게도 읽혀지면 좋으리라 생각하고

영문 번역도 해야 했는데 나의 영어 실력으로는 엄청 힘들다싶던 중 구글 번역 통하여

몇 년 전 번역도 이미 다 마쳤네. 그러다 또 근래에 또 번역을 돌려 보니 좀더 구체적에 합당한 번역까지 들어 왔더라.

 

그래서 어느 부분은 내가 일부 수정 가감하여 아무튼 영문도 마쳤다.

이제 내 자녀(종효, 원희 : 너의 사촌)에게 각각 한글 영문 판 몇 버전으로 주려 한다.

 

하물며

나의 이야기 글은 나를 위주로 썼다지만 나의 가족 부모 형제 누님 그 조카들도 들어 있어

다시말하면 너의 외조부부터 외삼촌의 지금까지(1909년 부친 남희성 태어 나심 ~ 현재의 나의 삶 2025 3)이니 방대한 가족사가 되었더라.

 

그래서

몇 년 전에는 대구 삼촌, 일산 삼촌, 대전 둘째 이모, 서울 작은 이모, 이경애에 그 각 단원의 글을 카톡으로 보냈었다.

그 후 계속 또 글이 더해지며 이제 너의 어머니 임종 소식을 듣고 많은 슬픔이 겹쳤었다.

 

 

하여 이번에 서울의 남명숙 네 사촌에게도 연락하여 위 글을 다시 보내려는 중에 있었다.

상철아! 네 생각이 괜찮다면 너에게도 보내려는데 너의 생각은 어떻겠는가?

 

너에게 보낼 때는 이메일로 보내 원문 그대로 사진 까지 포함될 것이다.

 

카톡에는 장문의 글도 반토막으로 잘라지기도 하거니와 사진을 포함화면 전송이 되지 않아

카톡 글은 문장만 보내게 된다. 글 의 카톡도 보낼 수 있다.

 

이런 등 등 지금의 네 심정이 복잡할 터인데 나의 이런 뜻까지 더 너에게 심란하게 되지 않겠는가?

 

평온히 생각하고 답해 주면 고맙겠다.

 

 

뉴질랜드에서 너를 사랑하는 삼촌이

 

 

 

 

 






         





 

 

 

 

 

 

 

 

 

 

큰 형님의 딸 명숙이와 카톡 연결하여 근래의 모습 받았다.

 

그의 자매와 동생 그리고 남편의 모습에서

그리고 큰 형수의 모습을 보았으며 동영상이기에 음성도 잠시 들었다.

 

 55년 전 마지막 보았으니 그 음성도 귀에 선하구나

이제 95에 가까운데 목소리 모습은 정정하시다.

 

일찌기 남씨 가문 남복균을 만나 시집으로 1 5녀의 자식과 도 시부모 시동생과 시누이까지 온갖 시집살이 다 겪어야 했고 또 형님이 일찍이 1994 5 5(음력) 작고하였으니(1930 3 25일생) 64의 삶에 내가 가까이 하지 못함을 아쉬워 하였다. 

 

나는 뉴질랜드에 살았으니 대부분의 한국 형제 누나 일상사에 함께하지 못한 점이 많다.

 

 

아주 옛날에는 이렇게 멀리 떨어질 경우 거의 생사등도 모르고 지냈을터, 지금은 거리감은 멀어도 통신, 카톡, 등에 수시로 실시간 연결은 가능하여 지금의 세상은 편리함도 있네.

 

교통의 발달로 또 여건만 조성되어 있다면 비행기타고 서로 만나기도 하지 않던가?

 

너희들은 아직 젊게 보인다.

 

다들 어떻게 지나던고?

 

 



 



 



 

 

 

 

대전 큰 누님의 임종 소식에

 

몇 개월 카톡 문자 없던 대구의 형님께서

한국 시간 3 20일 목요일 저녁 8 14(NZ시간 3 21일 금요일 한밤12 14)

대전 큰 누님의 임종 소식을 문자로 보냈다.

1932년 생(?) ~ 2025 3 20일 영면이니 향년 93의 삶이되어 결코 작지 않은 천수에 가깝구나.

 

처음 형님으로부터 문자를 받을 때는 이곳의 한밤이었고 또 새벽이 되어서는 잠시 누님에 얼킨 옛 회상에 기도를 하였다. 이역만리의 거리라 가 볼수도 없었으니 흘러갔던 추억들을 꺼내며 교회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에 바빴다. 그 다음 날 토요일도 마찬가지로 뛰었고, 늦은 밤 시간 집에 돌아와 간간히 스치는 누나의 모습은 형님이 먼저 보내 주셨던 영정 사진에 눈이 머물더라.

 

아마도 삼일장이면 일요일 발인이 될터 나는 일찍 교회에 차를 몰아 예배에 들었고 또 점심 애찬도 교우들과 함께 나눴다. 또 은퇴장로들과 교회 중직 부서장 그리고 목사님과 회의를하였으니 은퇴장로들의 합의된 그 제시안에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받아드려야 할 엄중한 조건을 남기고 집에 돌아 왔다.

 

그러니 마음의 부담이 덜어지고 편안한 휴식의 시간이 되어

큰 누님의 임종 추모의 시간에 든다.

 

나의 이야기 001 부모님의 인연과 7남매 틈에서 막내로 태어남” 파일을 열었다.

 

3페이지에

 

내 나이 다섯 살 경의 어느 날 두 누님 함께 시집간 큰 누님 집에 간다고 삼성동 철교 다리를 건너는데 아래를 내려 보면 무서워 도무지 건너가지 못하고 멈추니 누나들은 양손을 잡아 건너자 하여도 나는 울며 망설였었다.

 

어쩌지 못하고 서성이니 뒤에 있었던 어떤 아저씨가 나를 번쩍 들어 건너 주었던 기억이 남는다. 물론 큰 누님 만나 맛있는 식사와 머물던 시간이 있었으니 한국전쟁 끝난 얼마 후의 열악한 사회 시절이었다.

 

형님 누님은 일본어 사용 중에 조국에 돌아와 한글과 한국어 해독에 어려웠으며, 부모님은 일본에서 살며 귀국 때 그래도 재정 여유가 있었다지만 신생 대한민국의 사업 요건에 적응하기 어려워 가까운 사람에게 돈도 떼이고 사업 실패가 거듭되었으리라.

 

시집간 큰 누님 집을 찾던 삼성동 철교를 건너야 할 그 망설임에 나는 철교 아래의 깊이 떨어질까봐 나는 겁에 질렸었는데 뒤에 있던 어떤 아저씨가 나를 번쩍 들어 올려 그 철교를 무사이 지나게 했으니 기분 좋아 날아 갈듯 걸음을 따라 누님집에 닿은기라. 그리고 동생들 넷이 왔으니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입안에 즐겁던 그 추억은 아마도 칠십 여 년이 더 되었다.

 

초등학교 때는 근처의 문창국민학교라 학교에 닿기 직전의 집에서 살던 기억이 그때는 큰 조카 경애와 상철이가 아주 어렸을 때인가?  얼마 후 인동시장 쪽에 잠시 살고 또 신흥동에 이사하였다.

 

나는 초등 6년을 졸업하고 1961년 대동에 위치한 대전 동중에 들어 갔다.

가끔 학교를 끝나 하교길에 향할 때 누님 집에 찾아 간다.

 

그러면 배고프지 않게 맛있는 쌀밥에 몇 가지 반찬이 나와 배 부르도록 먹었다.

특히 찹쌀고추장 그리고 깍두기 김치는 일품이었다. 당시는 냉장고가 없을 때인데 김치같으면 쉬지 않도록 가장 서늘한 곳에 보관하여 내 왔다.

 

이렇게 배도 부르면 경애와 상철이가 삼촌하고 신흥국민학교 운동장에 놀러가고 싶어 했다.

 

집문에서 나와 왼쪽 골목으로 잠시 후면 또 오른쪽 뚝 편으로 걸어 후문 쪽의 운동장에 진입한다.

 

그 중 놀이터는 가장 먼 곳이니 보문산 방향에 철봉, 시이소오, 원형철판이 돌아 가도록 되어 손 잡이 잡고 시계방향으로 돌리면 그 동력으로 돌아갈 때 살짝 그 철판위에 기대니 얼마나 놀이가 좋았던지.

 

경애도, 상철이도 엄청 즐겁게 놀았다.

 

해 저물게 놀다 집에 돌아 오는 길, 내가 상철이를 엎고 가니 힘들면 몇 번 앉아 쉬었다가 또 엎어 돌아 왔었다. 이런 즐거움을 기다리는 경애와 상철이를 핑게 되어 학교 후에 가끔 놀러 가면 나는 흰 쌀밥에 그 맛난 반찬에 배 부른 그것에 끌렸단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누님이 어느 날 오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때는 학교 가방을 집에 내려 놓고 찾아 가는 그래야 하기 때문에 오후 늦게 누님을 찾았다.

어느 시간이 되면 조카들이 더 놀고 싶어도 일어 나야 한다.

내가 오늘 온 이유 시간이 있기 때문에.

 

부엌 근처의 창고에서 쌀 한 말 가량을 밀가루 빈 자루에 이미 담아 놓아 그것을 내 준다.

 

밖에 외출하였던 매형이 돌아 올 시간이 되어 나는 속히 나와야 했다.

 

그 쌀자루 들고 혹은 어깨에 걸치며 돌아 오는 길이 얼마나 멀은지 그 쌀 무게에 몇 번 길 복판에서 쉬어야 했다. 인동 다리를 지나며 그 밑에 흐르는 내 천의 물도 구경하고 다리 결단에 쌀자루 올려 놓아 떨어지지 않게 손을 잡아 쉰다. 저녁 해 저무는 시각 집에 닿아 내가 얻어 온 쌀 자루의 곡식이 당시에 얼마나 귀했더냐. 당시의 식생활은 쌀 1/3에 보리쌀 2/3 비율이라 그래도 배만 고프지 않으면 좋은 날이여. 굶던 사람도 많을 때 식사 시간 때는 거지들이 몇 명씩 무리지어 집 대문을 두드리는 광경이 많던 시절이었다.

 

우리 집 사정을 너무 잘 알아 부모 가족형제들 잘 먹이려 매형 눈치 보며 건네 주던 쌀자루 지금도 생생히 추억으로 남았다. 이런 일이 내 일로 자주 다녔단다.

 

그리고 시내 시청 쪽으로 이사했으니 그곳이 선화동인가 모르겠다?

일제 시대 목조 건물 비슷 했고 실내에 화장실 있어 그래도 당시에는 가장 좋은 건축 집이 되었으니.

 

앞 마당 담에 모과 나무가 있어 가끔 모과가 노랗게 익어가면 그것을 가지고 여러 가지 만들었다.

 

술에 담아도 좋고, 모과를 칼로 잘게 잘라 그냥 시식하는데 그 신 맛은 엄청 강하고 향이 너무 좋았다.

 

이 시절은 상호와 윤경이가 어린애 시절이것지.

언저진 쌀밥 고봉에 가득 그리고 그 고추장 맛과 깍두기는 빠지지 않아 또 다른 계절 반찬 몇 가지가 나에게는 진수성찬을 너의 외갓집의 경제 사정은 넉넉치 않아 고생이 많던 시절이었다.

 

해마다 명절이면 석교동 큰 집, 작은 집의 제사를 지내고 빠른 시간에 집에 돌아 왔다.

그리고 다음 목적지가 있었으니 집에서 나와 문창동에 사촌누님 집(영서내) 그러면 그 누님과 조카들이 좋아했었지, 매형이 계실 때라 설 날이면 세배를 꼭 하거든, 그래야 새뱃돈 나오지.

 

그 매형이 엄청 짜 큰 세뱃돈은 기대하지 않고 그래도 약간의 돈이라도 얻는다.

그 다음이 큰 누님 집이라. 매형도 엄청 돈에는 약했다. 나중에 누님이 별도로 새뱃돈 챙겨 주지만,

 

그 다음 코스가 둘째 누님 집이다. 집 거리와 방향이 그렇게 되었었다.

둘째 누님도 엄청 반가히 어린 동생 왔다고 진숙, 진선, 해영, 경숙, 주리, 진훈이 삼촌을 엄청 따랐다.

 

그렇게 한나절 돌아야 나의 호주머니에 머니가 좀 쌓인다.

 

호주머니에 머니니 이상하네!

우리 글 영어 단어 섞어 그래도 말과 뜻이 되는구나.

 

누님과 쌓인 추억이 엄청 많다.

삼촌은 고교 1학년 시절 몇 개월 다니다 학교를 그만 두었다.

 

그리고 형님이 중앙시장에서 건어물 장사에 도움으로 시장장돌뱅이로 들었다.

서울의 누님이 가끔 대전에 내려 오면 왜 학교 가지 않느냐 걱정하며 지금 학교를 다지지 않으면 나중에 큰 후회가 될 거야 . 잘 생각해라! 하거늘 집안의 형편에 형님 가게를 거들어 주는 것이 더 큰 일이라.

 

당시 내 나이 16-17때인데 얼마나 학생들이 부러웠던지 모른다!

한창의 사춘기 나이에 여학생과 연애하고 싶을 때인데.

 

어느 날 서울에 사는 내 고향 친구가 있었다.

강직이란 이름의 친구인데 그도 학교를 무엇으로 그만 두고 대전에 내려 왔단다.

그리고 내가 형님 가게 도울 때 그는 반찬거리 사러 자주 시장에 왔다. 그 역시 형님 일 도와 유성의 버스 종점 소장으로 있던 그 형님의 집안 돕는기라. 얼추 짝이 맞아 자주 만나고 놀러도 다녔지.

 

그리고 얼마 후 그는 다시 서울로 올라 갔단다.

아마도 여름 쯤 그 친구의 편지를 받았단다. 내용은 기억 없고 아마 그간도 잘 지낸다 정도겠지.

 

그런데 나에게 서울 누님에 놀러 갈 생각이 간절했어.

그래서 형수님에만 살짝 말하고 5일 정도 서울 구경하고 돌아 오겠다는 약속으로 서울 행 기차를 탔단다. 얼마나 신나던지, 잠시의 내 휴식 시간.

 

서울역에 도착하고 어떻게 찾았는지 북아현동 굴레방다리 이것이 지금도 기억나네.

그곳 가까이가 누님이 새 들어 살던 곳이다. 저녁에 누님을 만나 얼마나 즐겁던지 모른다.

 

이때 인숙이는 여고 1학년으로 이곳 고모와 함께 있었다.

그 다음 날 나의 행선지는 고향 친구 강직이의 주소만 가지고 흑석동을 찾았다.

 

겨우 버스 타고 한강 다리 건넜으니 당시의 모습은 그랬단다.

흑석동에서 그 옆의 현충원 직전의 약간 높은 언덕을 휘비며 주소에 따라 친구 집을 찾는거야.

 

지금은 주소 내용을 집 찾기 쉬었지만 당시는 한 집 주소로 온 동네를 후벼 다녀도 찾기 힘들게 어려웠다. 삼촌은 그런 것에 빠삭하여 얼마 후 그 집을 찾았다.

 

집 주인인듯 나의 문 노크게 말해 주기를 나같은 학생이 있고, 또 누님 형님 정도의 형제가 있다는기라.

 

그래서 확실히 찾았다 다행이고 그는 그 시간 없었으니 쪽지를 써 놓고 집에 돌아 왔다.

 

그날 늦은 저녁 이 친구 강직이가 누님집을 쉽게 찾아 왔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깨알같은 이야기에 옆에 있던 누님이 강직이는 지금 뭐하냐? 묻는다.

“학교 다니고 있어요” 누나가 듣다가 어떻게 학교에 들어 갔는지를 말하는데 그 아버지가 서라벌 고등학교의 선생님과 잘 안다고 그 힘으로 간단히 학교에 편입 복교 했단다.

 

그 말을 듣던 누님이 “혹시 너의 아버지 만날 수 있어?”했더니 그 다음 날 약속 되었다며 함께 그의 아버지 살던 미아리 길음 시장을 갔단다. 그 아버지께 인사하고 누님이 나의 학교 편입도 가능한지 물었더니 그 다음 날 빠르게도 하네. “나의 중학교 졸업 서류만 가지고 오라” 그러면 서라벌 야간 고등학교 2학녀 편입을 해준다는거야.

 

이 정도의 언질을 받고 북아현동 누님 집에 돌아 온 나에게 누님이 “창균아 학교 생활비 힘들겠지만 이 학교에 복교하거라” 간구하였다. 그렇게 사정을 모두 아는 내가 걸리는 게 하나 있던 것은 며칠 전에 큰 형수님께 5일간 서울 구경하고 돌아 오겠다는 약속이 있는데 철두철미 그 약속에 학교 편입은 언감생심 내 마음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거야.

 

내 답이 없으니 누님이 물어 온다. 왜 그러냐고?

그래서 형수님께 약속했어 5일 서울구경 마치면 돌아 온다고.

 

순진한 내 말에 누님은 괜한 걱정하지 말고 너의 장래 생각이 중요한거야.

그 다짐에 그 다음 날 대전에 돌아 왔다.

 

물론 내 마음은 엄청 좋았지, 그동안 학교 가지 못해 멀리서 구경하던 친구들 여학생들 모습이 보이는데.

 

그러니 얼마나 내 속 마음이 좋았을 것은 누구나 집작 될 것이다.

 

조용히 돌아 온 나는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어머니도 듣던 중 막내가 서울로 학교 다닐 수 있게 되었다니 얼마나 좋아 했던지, 당시의 어머니 모습이 그려진다. 나는 그 다음 날 즉시 동중학교를 찾았다.

 

그 중에 내 동네 어귀에 살던 생물 선생님이 계셔 그 분에 나의 자초지종을 말 했다.

그 말을 알고 바로 나를 데리고 서무실로 향했다. 잠시 후 나의 졸업증명서를 발급 받았단다.

선생님이 도와 줘 십게 서류 받았으니 감사 인사 후 교문 밖에서 아리랑 담배 한 보루를 샀다. 종이에 포장하고 그 선생님을 다시 만났단다. 

 

선생님 고마워요 이것 선물인데 받아 주세요 했더만 선생님은 담배 피지 않다며 괜찮으니 너 공부 열심히 하거라 응원한다. 큰 인사 나누고 그 교문을 나왔다.

 

다음 날 서울로 올라갈 준비는 모두 마쳤다.

새벽 이른 시간 아마도 5 30분 일거야 서울행 기차 떠남이.

 

이른 새벽 어둠의 시간 어머니가 바리바리 반찬 챙긴 것 머리에 이고 나는 마지막 고교 1년 다니던 책가방에 그 낡은 교복 입고 대전 역으로 대전천 언덕을 걸었다.

 

1967 11 20일 쯤이다.

약간 싸늘한 기온에 어머니 옆에 내 발걸음이 얼마나 당당한지 꿈같은 그림을 그리며 대전 역에 닿았다.

기차표 구입하고 어머니를 뒤로 남긴 서울행 기차를 덜커덩 덜커덩 기적과 함께 서울로 향했다.

 

며칠 서울 머물다 내려 왔어도 형수님께만 서울학교에 들어 간다는 말 했고 형님은 뵐 면목 없어 만나지 못했단다. 어머니의 전송에 서울로 학창 시절 떠났으니 당시에는 서울 유학이었다.

 

푸른 꿈에 내 미래를 펼치는 동안 약 4시간 30분 이상의 기차 달리기는 서울역에 닿는다.

 

한걸음에 북아현동 누님 집에 와 누님께 그간의 이야기 다 했단다.

그리고 강직이 아버지 만나 졸업 증명서 드리니 그 날부터 서라벌야간고등학교 2학년 편입 학생이 된 것이다.

 

누님은 강직이 아버지에 감사 인사를 드렸지.

나는 내 친구 강직이가 뒤에서 버터 있기에 당시의 학교 들어 오면 신입생 기압 등 별의별 체벌 구타가 다 있을 때 나는 한 번도 학교 친구 기압 받지 않고 내 학창이 되었다.

 

 

몇 년 학교를 그만 두고 장사에 몰두하던 어린 청년이 공부 머리 들어가겠냐?

 

그 다음 날 부터 낮 시간 서울 종료학원에 등록하여 영수국(영어 수학 국어) 강의를 듣는다.

그리고 오후 5시에 수업이 시작되니 미아리의 학교에 들어 갔고,

한 달도 안되어 겨울 방학 맞았다. 1997년 문교정책에 예비고사제도가 처음 정책으로 발표하던 해 였단다. 즉 예비고사에 합격해야 대학 시험에 들 수 있는 제도.

 

그러했으니 공부 머리가 될지 모르지만 아무튼 공부는 해야 했단다.

언제나 늠름한 고교 교복 입고 학원으로 학교로 분주히 지내며 1968 5월은 학교 수학여행으로 경상도 합천 해인사. 그리고 경주 방문이었다.

 

용산에서 기차를 출발한 약 60여명의 학생과 인솔 교사는 새벽 김천에 닿았고 버스로 분승하여 합천 해인사를 찾았다. 천 년 고찰에 팔만대장경은 세계적으로 인정 받는 오래 된 목판본이구나.

 

미나리 산채 비빔밥으로 점심을 채우고 저녁 무렵 경주 불국사로 향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석굴암도 구경하고 불국사의 전경에 단체 기념 촬영도 이렇게 모두가 즐거운 추억으로 서울로 돌아 왔다.

더은 여름도 나는 공부랍시고 매진하건만 그 공부가 쉽지 않더라.

 

11월의 예비 교사 후 일단 합격을 받았으니 서라벌야간 고등학교에서는 몇 명 없더구만.

아무튼 삼촌은 내 얕은 실력에 겨우 경희대학교 농학과에 들었단다.

 

이 소식에 대전의 부모님과 형님 누님 모두가 얼마나 좋아했던지는 말로표현 힘들었고.

잠시 대전에 내려 왔는데 아버지는 집 앞뜰에 돼지 키워 그 큰 돈을 나에게 학자금에 내 놓는다.

형님, 누님 모두가 십시일반 나에게 도움으로 준 금액은 넉넉히 대학 입학금에 충당하였고 또 얼마는 나의 용돈에 들었다. 당시의 서울 유학은 비용이 많아 힘들었단다.

 

아버지, 큰 형님, 둘째 형님, 큰 누님, 작은 누님의 지원에 힘입어 서울로 돌아 왔다.

서울의 누님도 함께 도왔으니 1969 3월 입학식에 늠름한 대학 교복에 삼촌은 날개 단듯 하늘을 휘어 달렸다.  

 

청운의 학창 시절 여름 방학 맞아 경북 의성 친구가 그의 집에 놀러 가자는 제안에 그 다음날 청량리 밤 기차로 중앙선에 올랐다. 다음 날 새벽 의성에 도착 또 버스를 갈아 타 지금도 그 지명을 모르는데 엄청 시골에 들어 그의 산골 집으로 몇 시간 산을 탔단다.

 

서울에 유학간 큰 아들과 친구가 방학 맞아 놀러 왔으니 그 부모는 얼마나 대접에 공을 들였겠니.

그의 남동생 여동생도 방학 맞아 시골집에 돌아 왔으니 조용하던 산골 계곡에 시글벅적했단다.

그 친구집은 방앗간 운영을 하여 그래도 그 시골에서는 유지급이었다.

 

며칠 간의 친구집에서 대접도 융승히 받고 또 그 고향 친구 만나 시골 막걸리 동동주 구해 함께 마셨던 그 맛도 기억난다.

 

이제 대구의 형님을 찾는다. 대구의 봉덕동이다.

형님은 미8군에 근무하여 형님 집에 가까운 곳에 있었다.

 

또 형님 형수님의 많은 용돈도 받아 대전으로 향했다.

나의 첫 귀향은 여름의 높은 기온도 아랑곳 없이 형님 가게에 들러 형님께 인사 드리고

곧장 큰 누님 , 작은 누님 찾았단다. 어린 막내 동생이 대학 들어 늠름한 창균이가 대견해 보였으리라.

 

언제나 였지만 큰 누님의 찹쌀고추장에 또 깍두기는 끊어지지 않게 그것이 기본에 넉넉한 맛난 밥은 나의 배를 즐겁헤 했단다. 매형께도 인사하고 조카들 이야기 나눠 다음은 선화동의 작은 누님집에 찾아

누님의 반가운 이야기는 시간이 멈추지 않도록 밤새 보냈다.

집에 돌아 왔으니 아버님도 막내의 학창 모습을 보느라 배 불렀겠지. 아버지는 겉으로 그 즐거움을 표시하지 못했지만 막내 어린게 서울에서 학교에 들은 것으로 힘이 났을 거야. 사실 대단한 대학교 학과는 이아었거든.

 

아무튼 이렇게 삼촌의 대학 시절은 활기찼었어.

누님 형님의 두둑한 용돈도 챙기고 서울로 돌아 왔으니 내 세상만 펼치면 되건만 당시의 박정희 치하에 국민의 엄청 큰 저항도 있어 대학교의 테모는 끊임없었다. 

 

체류탄의 자극에 눈물 범벅으로 이집 저집 담 넘어 도망하며 데모는 왜 극성이었을까?

허지만 그의 공적에 지금은 세계 10대 안에 든 경제 대국이 되었잖아.

 

대학 3년 시절 서울 누님은 북아현동 시장 골목에 작은 양장점을 인수 했단다.

아주 작은 2평 정도 규모?

 

그런데 그 양장점에 재단사, 미싱사. 시다 모두 4명이 있는데 재단사가 그 다음 날 그만 둔거야.

 

누님은 그 운영을 할 수 없게 되었네. 손님의 양장 치수를 줄자로 파악하여 포목에 그 사이즈별로 가위 잘라 재봉으로 들어 갈 각 기술자 중 재단사는 첫 작업의 시작이란다.

 

고민에 빠진 누님과 삼촌은 내가 재단을 배워 익히고 이곳에 적용해야 했단다.

근처 번화가의 양품점에 찾아 사정을 이야기 했다. 

재단의 방법을 개인지도 할 수 있는가?

 

당시의 젊은 분이 사장인데 내 사정을 듣고 그날 부터 개인지도 받았단다.

약 한달 만에 모든 과정을 배웠고 누님이 구입한 양품점의 주문을 늘려 갈 수 있었다.

 

시장의 작은 가게라 큰 손님은 없었어도 대전의 두 누님이 서울에 놀러 오셨다.

하여 내가 치수 재고 세 분의 누님 옷을 만들었단다. 그 옷을 입고 근처의 좋은 곳에서 함께 사진도 찍었으니 아마도 옛 사진첩에 그 모습이 있을 것이다. 세명의 누님이 나란히 찍은 사진.

 

아무튼 내가 여자옷 재단사 일은 과외로 했으니 그 소식을 들은 대구 형님이 놀랬단다.

대학 공부하는 동생이 양품 재단사 일을 한다고.

 

꾸지람도 들었으며, 아무튼 그 가게는 계속 운영이 힘든 뒷골목의 가게 였으니 말야.

 

해마다 대학 여름 겨울 방학이면 대전에 내려 와 부모님, 형님, 누님들 뵙는 것이 일상사 또 그 조카들 커 가는 모습은 또 빠르게 자랐더라. 가까운 삼촌의 서울 생활 이야기 들으며 너희들도 그런 꿈에 서울 유학이 있었겠지.

 

삼촌이 방학을 이용하여 대전 너희들 집에 찾으면 아무튼 그간의 궁금한 이야기 나눔이 첫째여,

 

그 다음은 막내 동생의 필요한 용동도 한 몫이 되기 때문에 이런 생각도 들었단다 방학이 1년에 몇 차례 더 있으면 어떨까? 괜한 나의 욕심이었지만 실상 너의 부모는 또 나름 경제적 제약에 어느 때는 돈에 시달리기도 했을 법이다. 

 

그래도 큰 누님의 형편은 경제적 넉넉했고, 작은 누님에는 매형의 비 경제 개념으로 고생이 많은 것 옆에서 자주 보았단다. 그때가 많이 흘러간 이제는 옛 일이라 말하지만.

 

서울 누님도 시집가 북아현동 전세집은 작은 형님과 함께였단다.

멀마간은 향숙이도 고등학교를 이곳에서 살며 다녔고, 또 문창동의 사촌 큰 누님 쌍둥이 딸 중 한 조카가 또 우리와 함께 생활 했다.

 

이렇게 대전에서 누가 올라 오면 서울의 누님 집에 함께 찾는 것이고 또 작은형과 함께한 집에도 연관되어 조카들 같이 했던 일은 흔한 것이라 옛날은 그렇게 서로 도왔다.

 

대학 4년 졸업 후 1973년 군 입대에 삼촌은 동두천 미8 2사단의 한 예하 부대에 편입된 카추사 시절이 좋았었다. 넉넉한 대우 조건에 생활도 편하여 총 30개월의 복무로 제대하였다.

 

이 중에 1975년 여름 군휴가에서 대전의 어버님을 만나 뵈었다. 대전도립병원이 대흥동 초입에 있었는데 귀대 시간에 맞쳐 아버님은 예약된 병원에 들었고 삼촌은 귀대에 돌아 왔다. 

 

그리고 그 해 11 3일 병환에서 돌아 가셨으니 몇 달 전 함께한 모습이 마지막 생전의 모습이었다.

 

! 한가지 더 있구나.

삼촌이 군 시절 잠시 휴가로 서울에 오니 마침 대전의 아버님이 서울에 놀러 오셨더라.

그래서 함께 하루 지낸 것은 그 전 해의 모습이던가싶은데 아무튼 외출에서 집에 돌아오니 홀로 방 안에 계신 아버님 무릎으로 기도하는 모습은 내가 본 처음의 모습으로 무슨 기도를 하였을지 상상으로 생각하였단다. 

 

그때도 아마 건강이 좋지 않던 것의 기도였을까 혹은 자녀(즉 출가한 자녀나 아직 결혼 전의 자식)의 또 손자 손녀의 평탄한 제 한 몫을 기도했을까?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나는 밖으로 나와단다.

 

이런 등등 삼촌은 3분의 형님과 3분의 누님의 덕분으로 도움도 많이 사랑도 듬뿍 세상에 부럼 없었단다. 형제중 가장 자유분방하였으니 그 뒷 배경에 형님 누님의 있어 배짱이 두둑했었단다.

 

군 시절도 잠시 또 사회의 직장도 잠시 지금의 부인 만나 너희의 숙모 외숙모가 있었으니 얼마 후 또 뉴질랜드로 취업이민이 있었단다.

 

이것은 너희들 대부분 어려서부터 들었으니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얼마 전 큰 누님의 임종 소식에 며칠은 이곳 해결하는 일로 바뻤고

이제 여유의 시간들어 누님에 얼힌 추억 배경 삼아 삼촌의 옛 이야기 글을 지었다.

 

 6페이지 분량으로 한 단락을 마치며

큰 누님의 명복을 기도한다.

 

누님 보고 싶어요!

내가 가진 추억 꺼내며 이 글을 바칩니다.

 

동생 창균이 뉴질랜드에서

2025 3 25일 늦은 밤

 

 

 
지난 320일 오후에 엄마돌아가셨어요. 지병이 있으셨던건 아닌데 제가 임종 지켜드렸어요.
최근 치매증상도 보이시고 안좋으셨는데 그래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돌아가실줄은 몰랐어요. 
대구외삼촌과 서울외삼촌, 이모님들 모두 오셔서 함께 슬퍼하고 따뜻한 위로와 격려해주셔서 큰 위안이 되었어요. 
어제 아버지 계신 대전추모공원에 엄마 잘 모셔드렸어요. 그래도 큰 고생없이 가셔서 다행이다 싶고 좋은 곳에 가셨을 거라 믿어요. 
삼촌 건강하게 잘 지내세요. 엄마 영정 사진 몇장 첨부해드려요
 
이윤경의 카톡 답글

 




 

 

 

 

대학 3년 시절 서울 누님은 북아현동 시장 골목에 작은 양장점을 인수 했단다.

아주 작은 2평 정도 규모?

 

그런데 그 양장점에 재단사, 미싱사. 시다 모두 4명이 있는데 재단사가 그 다음엔 그만 둔거야.

 

누님은 그 운영을 할 수 없게 되었네. 손님의 양장 치수를 줄자로 파악하여 포목에 그 사이즈별로 가위 잘라 재봉으로 들어 갈 각 기술자 중 재단사는 첫 작업의 시작이란다.

 

고민에 빠지 누님과 삼촌은 내가 재단을 배워 익히고 이곳에 적용해야 했단다.

근처 번화가의 양품점에 찾아 사정을 이야기 했다. 재단의 방법을 개인지도 할 수 있는가?

 

당시의 젊은 분이 사장인데 내 사정을 듣고 그날 부터 개인지도 받았단다.

약 한달 만에 모든 과정을 배웠고 누님이 구입한 양품점의 주문을 늘려 갈 수 있었다.

 

시장의 작은 가게라 큰 손님은 없었어도 대전의 두 누님이 서울에 놀러 오셨다.

하여 내가 치수 재고 세 분의 누님 옷을 만들었단다. 그 옷을 입고 근처의 좋은 곳에서 함께 사진도 찍었으니 아마도 옛 사진첩에 그 모습이 있을 것이다. 세명의 누님이 나란히 찍은 사진.

 

아무튼 내가 여자옷 재단사 일은 과외로 했으니 그 소식을 들은 대구 형님이 놀랬단다.

대학 공부하는 동생이 양품 재단사 일을 한다고.

꾸지람도 들었으며, 아무튼 그 가게는 계속 운영이 힘든 뒷골목의 가게 였으니 말야.

 

해마다 대학 여름 겨울 방학이면 대전에 내려 와 부모님, 형님, 누님들 뵙는 것이 일상사 또 그 조카들 커 가는 모습은 또 빠르게 자랐더라. 가까운 삼촌의 서울 생활 이야기 들으며 너희들도 그런 꿈에 서울 유학이 있었겠지.

 

삼촌이 방학을 이용하여 대전 너희들 집에 찾으면 아무튼 그간의 궁금한 이야기 나눔이 첫째여, 그 다음은 막내 동생의 필요한 용동도 한 몫이 되기 때문에 이런 생각도 들었단다 방학이 1년에 몇 차례 더 있으면 어떨까? 괜한 나의 욕심이 있지만 실상 너의 부모는 또 나름 경제적 제약에 어느 때는 돈에 시달리기도 했을 법이다. 그래도 큰 누님의 형편은 경제적 넉넉했고, 작은 누님에는 매형의 비 경제 개념으로 고생이 많은 것 옆에서 자주 보았단다. 그때가 너무 흘러간 이제는 옛 일이라 말하지만.

 

서울 누님도 시집가 북아현동 전세집은 작은 형님과 함께였단다.

멀마간은 향숙이도 고등학교를 이곳에서 살며 다녔고, 또 문창동의 사촌 큰 누님 쌍둥이 딸 중 한 조카가 또 우리와 함께 생활 했다.

 

이렇게 대전에서 누가 올라 오면 서울의 누님 집에 함께 찾는 것이고 또 작은형과 함게한 집에도 연관되어 조카들 같이 했던 일은 흔한 것이라 옛날은 그렇게 서로 도왔다.

 

대학 4년 졸업 후 1973년 군 입대에 삼촌은 동두천 미8 2사단의 한 예하 부대에 편입된 카추사 시절이 좋았었다. 넉넉한 대우 조건에 생활도 편하여 총 30개월의 복무로 제대하였다.

 

이 중에 1975년 여름 군휴가에서 대전의 어버님을 만나 뵈었다. 대전도립병원이 대흥동 초입에 있었는데 귀대 시간에 맞춰 아버님은 예약된 병원에 들었고 삼촌은 귀대에 돌아 왔다. 그리고 그 해 11 3일 변환에서 돌아 가셨으니 몇 달 전 함께한 모습이 마지막 생전의 모습이었다.

 

! 한가지 더 있구나.

 

삼촌이 군 시절 잠시 휴가로 서울에 오니 마침 대전의 아버님이 서울에 놀러 오셨더라.

그래서 함께 하루 지낸 것은 그 전 해의 모습이던가싶은데 아무튼 외출에서 집에 돌아오니, 홀로 방 안에 계신 아버님 무릎에 기도하는 모습은 내가 본 처음의 모습으로 무슨 기도를 하였을지 상상으로 생각하였단다. 그때도 아마 건강이 좋지 않던 것의 기도였을까 혹은 자녀(즉 출가한 자녀나 아직 결혼 전의 자식)의 또 손자 손녀의 평탄한 제 한 몫을 기도했을까?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나는 밖으로 나와단다.

 

이런 등등 삼촌은 3분의 형님과 3분의 누님의 덕분으로 도움도 많이 사랑도 듬뿍 세상에 부럼 없었단다. 형제중 가장 자유분방하였으니 그 뒷 배경에 형님 누님의 있어 배짱이 두둑했었단다.

 

군 시절도 잠시 또 사회의 직장도 잠시 지금의 부인 만나 너희의 숙모 외숙모가 있었으니 얼마 후 또 뉴질랜드로 취업이민이 있었단다.

 

이것은 너희들 대부분 어려서부터 들었으니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얼마 전 큰 누님의 임종 소식에 며칠은 이곳 해결하는 일로 바뻤고

이제 여유의 시간들어 누님에 얼힌 추억 배경 삼아 삼촌의 옛 이야기 글을 지었다.

 

 6페이지 분량으로 한 단락을 마치며

큰 누님의 명복을 기도한다.

 

누님 보고 싶어요!

내가 가진 추억 꺼내며 이 글을 바칩니다.

 

동생 창균이 뉴질랜드에서

2025 3 25일 늦은 밤

 

 

 

 

 

혜영아!

 

오랫동안의 안부 모르고

이제 옛 회상으로 돌아 보니

가까운 혈육이 떠나는 슬품도 보았었다.

 

며칠 전 큰 이모의 임종 장례 소식 들으니

얼마나 마음이 착잡하던지 모르겠더라.

 

네 아버지(나에게 둘째 매형)도 오래 전에 보냈으니

다 세월 흘러 또 늙으면 맞는 인생사라 어쩌지 못했는데

또 큰 이모의 죽음까지 들어 보니 이제 삼촌도 떠날 날이 앞에 온 것을 느꼈다.

 

각자의 삶이 멀리 떨어저 왕래 소식 드물었지만

아주 간간히 들어도 거리의 먼 곳에서는 그림의 떡인냥 마음 속에서 그리움을 감당하였지.

 

이제 이런 생각이 들더구나.

 

삼촌은 교회의 장로를 은퇴하며

2018년 초부터 내가 그동안 살았던 “나의 이야기 My Story”를 적어오다

할아버지(남희성) 할머니(박삼선)부터의 흔적이 글에 들어와 지금까지의 나의 이야기에 관련된 모두 포함하여 글에 적었었다.

 

글을 거의 완성하고

또 검색도 하여 글 혹은 문자의 오타 수정도 하였고

또 관련 사진도 내가 소지한 정도에서 그 글에 함께 첨부하였었다.

아직도 그 글을 들쳐 보면 수정 오타 단어도 있을 때 정리한다.

 

그리고 2019년 경부터는 네게로 대구의 큰 삼촌, 일산의 작은 삼촌, 서울의 작은 이모, 대전의 너의 어머니, 그리고 대전의 경애 언니에게 매 단원의 글로 나눠 카톡으로 보냈었어.

 

그리고 그 글을 읽어 보고는 모두 좋아 했단다.

옛 날의 우리 가족 추억 회상이 되었으니 말야.

 

그리고 몇 해를 보냈더만

큰 이모의 임종 소식에 또 마음이 아펐단다.

 

그래서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는

각 조카들에 내가 적은 글을 나눠 보려면 좋을까? 등의 깊은 생각 고민 끝에

그래도 우리 가족의 삶의 역사가 담긴 것이라 너희들에도 나누면 좋지않겠던가싶었다.

 

하여 카톡으로는 그 방대한 글을 보내기 싶지않아 너의 이메일을 알아 보았던기라.

 

이 글은 모두 삼촌의 위주로 작성한 것이기에 너의 아버지 어머니 혹은 네 형제들의 이야기는 많지 않아. 그렇지만 차후에 계속 쓰는 중이라 그때는 또 너의 가족 관련된 글도 남기게 된다.

 

아무튼 네가 모든 이 과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네 이메일로 보낼 테니, 글의 방향, 언어체, 또 통상 네가 보기에 틀린 점도 있을 수 있다. 그런 것은 알려 주면 차후 수정 가감이 되니 괜찮고, 혹시 글 중에 이런 사진이 첨부되면 좋겠거니 네가 보관 중의 사진도 있으면 나에게 보내 주렴.

 

 

고맙다.

이렇게 연락이 되어 감사한다.

 

추기 :

네 사촌 들에도 각각 연락하여 이메일 주소를 받는 중이다.

그러면 그때부터 각각의 사촌들에 글을 보내겠다.



 

 

 

 

명숙아!

 

오랫동안의 안부 모르고

이제 옛 회상으로 돌아 보니

가까운 혈육이 떠나는 슬품도 보았었다.

 

며칠 전 큰 고모의 임종 장례 소식 들으니

얼마나 마음이 착잡하던지 모르겠더라.

 

네 아버지(큰 형님)도 오래 전에 보냈으니

다 세월 흘러 또 늙으면 맞는 인생사라 어쩌지 못했는데

또 큰 고모의 죽음까지 들어 보니 이제 삼촌도 떠날 날이 앞에 온 것을 느꼈다.

 

각자의 삶이 멀리 떨어저 왕래 소식 드물었지만

아주 간간히 들어도 거리의 먼 곳에서는 그림의 떡인냥 마음 속에서 그리움을 감당하였지.

 

이제 이런 생각이 들더구나.

 

삼촌은 교회의 장로를 은퇴하며

2018년 초부터 내가 그동안 살았던 “나의 이야기”를 적어오다

할아버지(남희성) 할머니(박삼선)부터의 흔적이 글에 들어와

지금까지의 나의 이야기에 관련된 모두 포함하여 글에 올렸었다.

 

글을 거의 완성하고

또 검색도 하여 글 혹은 문자의 오타 수정도 하였고

또 관련 사진도 내가 소지한 정도에서 그 글에 함께 첨부하였었다.

 

그리고 2019년 경부터는 대구의 큰 아버지, 일산의 작은 아버지, 서울의 작은 고모, 대전의 둘째 고모 그리고 대전의 경애에게 매 단원의 글로 나눠 카톡으로 보냈었어.

 

그리고 그 글을 읽어 보고는 모두 좋아 했단다.

옛 날의 우리 가족 추억 회상이 되었으니 말야.

 

그리고 몇 해를 보냈더만

큰 고모의 임종 소식에 또 마음이 아펐단다.

 

그래서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는

각 조카들에 내가 적은 글을 나눠 보려면 좋을까? 등의 깊은 생각 고민 끝에

그래도 우리 가족의 삶의 역사가 담긴 것이라 너희들에도 나누면 좋지않겠던가싶었다.

 

하여 카톡으로는 그 방대한 글을 보내기 싶지않아 너의 이메일을 알아 보았던기라.

 

예전에 너의 이메일 주소도 있었건만 네가 사용하지 않아 없어졌구나.

 

아무튼 이제 네게 너의 남편 이메일 주소를 줘 그곳에 이용하여도 무방하나

아무래도 우리 가족사가 포함된 글이라 네가 생각하여 네가 만든 이메일미면 더 좋겠던데.

그래도 네가 이해하면 너의 남편 이메일에 보내 주겠다.

 

그런 생각도 염두에 둬 나에게 알려 다오.

 

이 글은 모두 삼촌의 위주로 작성한 것이기에 너의 아버지 혹은 네 형제들의 이야기는 많지 않아. 그렇지만 차후에 계속 쓰는 중이라 그때는 또 너의 가족 관련된 글도 남기게 된다.

 

아무튼 네가 모든 이 과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네 이메일 혹은 너의 남편의 이메일도 괜찮은지 알려 주기를 바란다.

 

고맙다.

이렇게 연락이 되어 감사한다.



 

 

 

 

혜영야!

 

오랫만이구나.

뉴질랜드 외삼촌이다.

 

네 어머님도 평안하냐?

또 너의 가족도 잘 지내는지 궁금하였다.

 

그제에 대전 큰 이모 임종에 장례까지 마치니

모든 삼촌과 이모들의 심정도 착잡하겠더구나.

 

다 세월이 나이가 차면 또 죽음으로 헤어지기 때문에 어느 누구인들 비껴 가지 못하리.

 

이제 그 심정에 너에게 이 이메일이 전하기를 소망하였다.

 

잘 지내고 어머니에 효도하여라.

 

그럼 또 자주 연락을 바란다.

 

안녕

 

오클랜드의 작은 삼촌이

 

 

 

 

 

 

 

 

jhnam@megazone,com

 

주호야!

 

오랫만이구나.

뉴질랜드 작은 아버지(삼촌)이다.

 

네 부모님 모두도 평안하나?

또 너의 가족도 잘 지내는지 궁금하였다.

 

그제에 대전 큰 고모 임종에 장례까지 마치니

모든 삼촌과 고모들의 심정도 착잡하겠더구나.

 

다 세월이 나이가 차면 또 죽음으로 헤어지기 때문에 어느 누구인들 비껴 가지 못하리.

 

이제 그 심정에 너에게 이 이메일이 전하기를 소망하였다.

 

잘 지내고 어머니 아버지 효도하여라.

 

그럼 또 자주 연락을 바란다.

 

안녕

 

오클랜드의 작은 삼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