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나의 이야기

053 우리에게 교회는 무엇인가?

淸山에 2025. 9. 28. 14:05
 

 



누구나 우리의 삶에 관련된 주위 인맥과 소속된 직장, 단체에 다 얼킨 문제가 있을 것으로 본다.

 

나에게는 교회가 그것으로 내 삶의 반 이상을 이에 벗어나지 못하고 관련되어 있기에 글을 적는다.

 

교회(Church)가 처음 나의 범위 안에 든 것은 1956년 경이 되겠다.

 

당시는 6.25 전쟁의 폐허에서 막 일어나려는 사회 전반으로 국가의 생존과 직결된 암울한 시기였다. 

 

내 나이 7살 직전이니 무엇을 알겠으며, 무슨 걱정을 했겠냐마는, 어머니 혹은 누나가 지어준 식사 앞에 꼬박꼬박 굶지 않는 것으로도 다행이거나 감사로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였겠다.

 

이때 근처의 교회에 찾아 간 크리스마스 직전 12 25일 즈음이니, 예배당에 가면 빵 혹은 과자나 사탕을 얻는 그런 것에 손 위의 누님 손을 잡고 끌려간 원동에 있던 교회가 기억되어 교회당에 가야 이런 달콤한 맛나는 사탕이 호기심을 발동했지않겠는가싶다.

 

당시는 의식주 어느 것 하나 번번한게 없었으니, 모든 것이 열약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곧 부사동으로 이사하였으니 근처에 교회가 두 군데 있었다.

 

하라는 공부보다 노는 것이 더 재미 있을 때라 한 겨울 눈 내리는 날 눈싸움 등의 놀이에 지쳐 추워지면 근처의 예배당은 열려 있는것을 알아 그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실내에 들어 장작 혹은 석탄 태우는 난로 가까이에 앉아 따스한 온기로 젖은 옷과 몸을 말렸었다.

 

즉 겨울의 추움과 크리스마스 전후에 교회가 주는 사탕 빵 혹은 과자가 잿밥이었었다.

, 여름 가을에는 갈 이유가 없다는 뜻이니, 한 철 겨울 때 그렇게 교회를 갔던게 다 였다.

 

그리고 조금 나이 들으니 별로 나에게 매력과 이익이 없어 교회는 동네에 보이는 건물로 지나쳐 자랐다.

 

지금도 그런 친구 모습이 떠 오르지만.

중학교 친구 중에 교회에 열심인 친구 몇이 있어 그들과 이야기 나누면 다른 친구와 다르게 누구를 아껴주고 사랑으로 대하는 정으로 느낌은 들었어도 그게 그런가 였었다.

 

나는 늦게 학업에 들어 대학도 졸업하고 군에 들어 일반 병사들보다 나이가 평균 2-4세 많던 시절의 군 생활을 맞았다.

 

당시의 사회 생활과 군 생활에 대한 이야기 많이 들었으니 그에 감당할 마음은 충분히 각오가 되어 있었지.

 

그렇게 조치원의 32예비 사단에 입소하고,

6주의 기본 군사 훈련 기간은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는지 모른다.

 

6주 훈련 중반부터 주일에 예배 보는 시간 허용하여 뜻밖의 근처 밖 교회를 찾게 되니, 그 예배의 찬송도 나의 마음을 위로하였고, 또 예배 후의 애찬 식사는 그야말로 세상의 가장 맛있는 진수성찬 밥이 되었던기라.

 

아마도 그때 병영에 남았던 훈련 동기들은 뙤약볕 혹은 고참들의 기합에 주눅 들겠던데 우리 몇 명은 이런 대접에 황홀했었지.

 

이것은 나에게 있어 뜻밖의 구원이었고, 이런 몇 주가 끝나 KATUSA군으로 평택에 들어 갈 때 또 얼마나 군대 운이 좋았다고 생각 했을까?

 

평택 교육대에서의 4주도 열심히 군 교회에 다녔다.

그리고 동두천 미2사단에 들어도 빠지지 않았으니 나의 주일을 맞는 일요일은자연히 군 교회에 가는 발걸음이 주어진 코스로 이미 선택된 약속이 되었구나.

 

생각해 보자. 군 생활에 한국부대건 미군부대건 자유롭지 못한 규율에 따라야 하고 또 외출도 없는데 뭐 하겠는가?

 

차라리 교회에 간다면 군 고참이 못가게 붙들지 못했으니, 나는 자연히 교회에 빠질 이유도 없었다. 그러면 평소의 군부대 보다 먹거리 좋은 기회와 자유 시간이 더 생겼다.

 

또 교회의 고참들도 우리를 더 아껴 주었으니 더 좋은 군 생활은 자연히 굴러 들어온 호박밭이 되었단다.

 

1975년 말부터 막 진입한 사회와 직장과 또 결혼의 가정에 신경 쓰이지 사람이 간사한 것인가 

군 제대 후 사회 생활에는 왜 교회 가는 생각이 없었던지 모르겠다.

 

영원히 나에게 더 이상 교회에 관련이 없던가싶었다.

 

1982 10월 말 한국을 떠나 저 멀리 뉴질랜드로 향하여 일해야 할 녹용공장의 분주함에서도 한 해를 무사히 보냈고, 그 전쟁 후 30여년이 흘렀던 일이라 그런 것이 나에게도 생각에서 많이 없을 때인데 1983년 이후 홀로 있을 시기 어느 누군가 나를 찾아 온 한국전에 참전했던 분이 있었다.

 

그분의 성함은 지금 기억에 없었다.

다만 한국전 끝나 영국에 귀환하고는 뉴질랜드로 이민 와 어느 날부터 드네딘의  침례교 목사로 사역 중이었다.

 

아울러 그의 집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고서 그들 가족에는 어린 수양딸 한국인이 있던 것도 알았다.

 

생각하여 보라. 한국전쟁 참전 경험도 인생사 쉽지 않았거늘 또 교회 목사로 사역에서 언제 입양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그 딸이 한국 아이 였음을 나에게는 좋은 인연으로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아무튼 이 글을 쓰는 근래에 인터넷 검색으로 그 교회의 인적 사항을 알았다.

South Dunedin Baptist Church(414 king Edward St. Dunedin) 

southdunedinbaptist@gmail.com

Telephone

Alasdair Morrison:   0274 354 384

Kelvin Tetlow:         027 588 4856

Eleanor Moyle:      (03) 454-4586

그리고 담임목사가 될 분 모리슨께 전화 연락을 하고는 나의 궁금한 물음을 하였건만

그는 그 답을 잘 해 주지 못했다. 아마도 시간 세월이 한참 흘러 그 시절의 담임목사를 자세히 모르는가 싶었다. 

 

차후로 이 문제는 이메일을 보내 알아 볼 계획이다.

 

아무튼 그분의 영향에 그 교회는 몇 번 예배에 참석했었다.

그런데 당시(지금도 그렇지만) 영어에 익숙하지 못해 그 예배가 많이 낯 설었다.

 

그리고 또 나의 가족도 이곳에 와 함께 하는 시간 세월이 바쁘게 만들었었다.

이즈음 또 장옥윤 목사가 홀로 이곳 신학교에 유학와 있었으니 또 이런 인연이 되었다.

 

그들 가족도 이곳에 합류하여 두 가족 자주 만났고, 어느 날에는 그가 참여한 그곳 장로교회에 나를 권유하여 우리 가족도 그 교회에 다니게 되었단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우리 가족 4(이이는 유야 세례) 모두는 세례를 받았다.

 

나에게 다른 삶의 기회를 주니 나의 가족은 오클랜드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8 3 25일은 웰링턴의 김용환 목사님이 이곳의 유학생 교민을 위한 특별 예배를 보았다. 그리고 다음 달 1988 4 17일에 교민들을 위한 예배를 보았으니, 이것이 지금의 오클랜드한인교회 첫 창립예배가 되었다.

 

이 예배 후 나에게 주어진 임무가 총무와 회계였으니, 나의 나이 39살 때였다.

 

당시에 온전한 가족은 나의 가족뿐이라 대부분은 유학생 가족 혹은 아직 뉴질랜드 거주가 확정되지 않던 방문 비자의 교민 몇 가정뿐이었다.

 

1988 5월 말 경 우리 한국인 교회 예배에 한국 목사의 필요성에 결국 드네딘에 머물던 장옥윤 목사님을 선택하기로 회의에서 합의하였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말하는 교회 용어 목사청빙이었던 것이다.

 

이때 몇 교인들 사이의 분위기는 박노영 목사님을 뽑자는 학생들도 있었건만, 나에게 목사는 드네딘의 장옥윤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여 1989 1월 첫 부임 예배로 긴 시간 교회의 첫 사역자가 되었다.

 

이곳에 교민들도 늘어 대부분 오클랜드에 거주하게 되니 본 교회에 참석한 교인들이 많아졌다. 

 

이들 중에는 기독교인, 천주교인, 불교인, 종교가 없던 무교인 등 대부분의 교인이 참석하였으니 자연히 이곳의 관습과 이민 등의 삶에 직결된 정보 역활에 교회 참석이 좋았고, 또 시내 중심가에 위치하여 오고가는 길목이 좋았었다.

 

이즈음 이곳 오클랜드에 교민수가 부쩍 늘어 뉴질랜드한인회의 활동이 이전 웰링턴 본부보다 더 커졌다. 결국은 그 한인회를 이곳으로 옮겨 그 이듬 해 나는 그 한인회장의 후보로 올라 선거를 치렀다.

 

오클랜드 한인 회장에 출마한 황찬준은 일본 거주민으로 이곳에 온지 2년 미만의 당시에 약 60대였다. 나는 41세의 젊은이여서, 막중지세 선거였지만 나는 패했다.

 

이 선거에서 장옥윤 목사님은 교회에서도 나이 많은 황찬준을 뽑도록 돕는 등 나에게는 반대의 입장이 되어, 그것으로 나는 장옥윤 목사님의 사역에서 점점 마음이 떠나게 되었단다.

 

한창 바쁠 나의 사업 기간 중

한국 관광객을 직접 받아 뉴질랜드의 여러 곳을 답사와 관광하게 되었다.

내가 소유한 차량으로 두 대가 움직이니, 유학생으로 왔던 김형주라는 젊은 교민과 함께 관광을 인도하였고, 멀리 New Plymouth 라고 오클랜드에서 355km 떨어진 남쪽의 작은 공항에

그들을 내려 주고는 김형주와 나는 각각 차를 몰고 오클랜드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들과 5 6일 이상 함께 움직이느라 그간 피로도 엄청 들었었다.

293km 달린 점심 시간 즈음 로토루아에 닿았다.

 

이곳에서 Kentucky Fried Chicken을 구입하고는 오클랜드 쪽으로 차를 몰고 적합한 휴게소에 차를 세워 점심을 먹기로 하고는 차를 몰았단다.

 

이쪽 Moterway 국도를 자주 다녀보아 지역을 잘 알거든.

그렇게 차를 몰고 첫 휴게지역에 닿으니 차량이 많아 김형주와 다시 한 곳 더 차를 몰자고 떠났다.

 

그것이 나에게 큰 사고가 될 줄을 누가 알았겠나.

 

그간의 강행군으로 피로도 겹쳤겠다 또 아침부터 차를 몰고 귀가 중에 점심을 흘쩍 넘겨 이제 졸음이 한창 들을 때 였단다.

 

뉴질랜드의 수림 지역으로 커다란 많은 목재 차량이 수시로 움직이는 지역이었다.

그럼에도 졸리운 나의 차 운전은 잠시 어느 순간 깊은 졸음으로 들었던가싶구나.

 

내 차량이 오른쪽 차선을 흘쩍 넘어 결국은 그 바깥 벼랑에 처 박혔는데 고속도로를 넘긴 도로 옆에 바짝 붙은 빗물 빠지도록 패인 곳에 내 차의 바퀴가 걸려 더 이상 벗어나지 않고 꼼짝 못하게 멈췄다.

 

그 순간을 뒤에서 따라 오던 김형주가 오1 1 몇 마디 외쳤다가 순간의 내 모습을 확인하고는 그의 차를 뒤로 돌려 내 옆에 왔단다.

 

그 잠깐의 찰나에서 정신줄이 바짝 돌아 온 나는 뭔 일인가? 의식이 살았는데, 아뿔사 몇 m 옆에는 큰 깊은 계곡이 보였단다.

 

차량문을 열고 내렸다.

조심스레 옆 계곡을 내려 보았고, 이제 내 차를 어떻게 도로로 올려 놓아야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내 차 스스로 올라 오지 못하였으니 말이다.

 

김형주가 몰았던 봉고차를 함께 타고 다음의 큰 도시 Hamilton을 향해 달렸다.

잠시 후 도로 옆에 커다란 도로보수에 사용하는 불도저 한 대 있지 않은가?

그쪽에 차를 내려 그의 블도저 운전자에 사정을 설명하여 도움을 청했다.

 

그 불도저가 서행으로 사고 지점에 닿았다.

그리고 상황을 인식하고 그의 불도저 이용하여 기다란 철줄 이용하여 내 차를 견인하여 도로 위에 올렸다.

 

내 차의 상태를 점검하니 타이어 4개 중에 2개는 펑크가 났고 차례 아랫면은 심하게 돌과 흙에 휩싸였는데 그 아랫쪽의 상태는 더 이상 내려 볼 수 없었단다.

 

차 시동을 켜 보니 시동은 걸린다. 운전을 하니 차는 그런대로 움직이더라.

아무튼 그 불도저 운전자에 감사를 표하고 우리는 해밀턴으로 서행하여 달렸다.

 

이 사고 후 집에는 경찰서에서 벌금 딱지가 우편으로 왔다. 그때의 불도저 운전자가 신고한 덕분이더라. 눈 감아 줘도 되건만 그가 보는 사고는 사고였으니 경찰에 신고했으리라.

 

오후 5시 직전 도착한 첫 타이어 수리점에 차를 맡겼다.

타이어 2개 새것으로 교환하고 그것으로 오클랜드에 올 수 있었다.

 

이만하게 다행이었지 그때의 사고 시간으로 돌아가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했었다.

아마도 죽다 살았지싶구나.

 

! 주님 감사합니다.

순간의 주님 찾던 감사가 떠 올랐다.

그때는 교회를 찾지 않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이때부터 교회의 생각이 간절했고, 언젠가는 내가 몸 담던 교회에 갈 것을 머리에 담았었다.

 

그리고 세상이 사람을 변하게 한다고 또 바쁜 나의 일상 사업에 몰두하다가 

1997 11 22일 김영삼 정부의 안일한 외환 위기에 따라 IMF가 철퇴를 내렸구나.

 

아마 그때에 한국 전반에 걸쳐 직장인 가족 생계, 직장 폐쇄 등의 커다란 시련에서 대한민국의 나라 자체가 국가 부도로 사라지는가 싶었었다.

 

이때 나는 피지의 진주 매장 Nadi에 있었다.

갑짜기 몰려온 위기에 몇 일 지나 이곳 매장을 임시 닫고 오클랜드로 올라 왔다.

 

그리고 오클랜드의 Lotte Duty Shop 롯데면세점(나의 선물점 명칭)도 폐업의 수순으로 돌입했다. 매월의 월세 납입을 미루는 중 그 회사가 나의 사정을 알고는 그들이 나의 사업체 문 열쇠를 바꿔 나의 출입을 못하게 하였단다.

 

이때는 대부분의 고가 귀중품을 이미 정리 한 후라 큰 손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매장에 남은 것으로 인하여 더 이상 접근 못하고 나는 손을 들어 포기하였다.

 

이런 손실로 인하여 마음도 많이 피곤했었다.

그동안 나는 교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골프도 나가지 않았고, 또 낚시 천국의 나라에서 낚시도 가지 않았으니, 나에게의 휴식이 지나면 또 여러 일(관광안내, 사업이민자 통역, 배 선식, )이 바쁘게 줄이어 나왔었다.

 

그런 중에 한국의 부도 직전이 되었으니, 나에 관계된 사업체도 하나 씩 정리하여 문 닫는다.

 

일식 식당의 사업체 건물도 매각하고, 또 처음 시작하였던 한국 식품점도 건물 매각하여 남은 돈이 지금 살고 있는 주택을 구입할 정도의 자금이었다.

 

그리고 나는 오로지 내 사업에 열중하여 엄청 잘 되는지 않았지만

1997 11월의 한국 IMF사태가 터지는 것으로 나의 확장된 주 사업들이 문을 닫게 되었다.

 

그 손실은 엄청 타격이 커 피지에 세운 면제점부터 사업 문 닫고, 오클랜드의 선물면세점도 문 닫는 격동에 나의 삶은 변곡점으로 나락에 들었다.

 

하물며,

처음의 한국상사(한국 식품점)도 또 일식점도 순서에 따라 사업을 팔거나 문 닫아야 했다.

토소 일식점 건물을 팔았다. 그리고 다음 해 한국상사의 건물도 팔았다.

 

그리고 지금의 살고 있는 27 Oakley Avenue, waterview, Auckland에 이사하여 지금에 이른다.

 

이것이 나에게 남은 마지막 재산이랄까?

 

그 해에 다시 교회를 찾았으니 내가 교회에 발을 끊고 약 7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이때 다시 교회에 가자고 가족에 말을 했는데 처는 어느 교회냐고 물어 지금의 한인교회라는 내 말에는 많은 실망을 하였었다. 왜 하필 이 교회냐 했단다. 다른 교회도 많은데 선택하면 좋지 않을까 걱정으로 말했었다. 

 

그럼에도 나의 성격과 나에게는 오직 이 교회 우리가 처음 정들던 교회이기에 긴 설득으로 다시 장옥윤 목사님을 만났다.

 

그는 이런 우리의 마음을 모르고 옛 정에 나온 것으로 우리를 대해줘 아무튼 나의 새로운 교회는 모든 일에 열심으로 성도가 되어 힘썼다. 

 

당연히 목사님은 좋았지. 내가 교회에 열심인 이상 모든 면에 나를 먼저 생각 했으니까.

 

내가 다시 교회에 들어 선 때 1999년 전후로 이 교회에서는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 다른 곳에 교회를 세워 목사님을 부르고 예배를 하여 온 과정을 많이 들어 왔었다.

 

하물며 교회안에 교인들과 사역자 간의 이해 관계에서 당시에도 5-7개의 새 교회가 늘었었다. 지금은 모두 45-50여개의 교회가 되었지만.

 

심지어 본 교회는 1998년에 핸더슨 지역의 건물을 구입하여 교회로 새 단장하여 건물로도 규고가 크고 그 주차장 면적도 알맞게 있는 제대로 된 교회였다.

 

당시의 교인 수 550-600여 명이 되었으니 제일 큰 교회라 하여도 무방했다.

 

호사다마란 고사성어가 있듯 우리 교회에도 그런 문제가 몇 차례 들었다.

 

심지어 2007년 경 유숙 부교역자 관계로 이상한 눈초리 의심을 하여 장옥윤 목사님은 오클랜드지방법원의 사법 심판에서 어떤 죄 성립 없음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었다.

 

이때의 변호사 비용도 장 목사 개인 부담이 엄청났다.

 

그러나 본 교회가 소속된 PCANZ장로교에서는 종교 재판의 긴 시간을 거듭하고, 결국은 장옥윤 목사를 목사파면이라는  결론을 가지고 교회에 통보하는 것으로 들어 왔다.

 

당시에 나는 장로 중직이라, 교회에는 두 장로가 그들의 노회 결정을 통보 받았다.

 

나는 그들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완강한 의지를 보였고, 그들은 다음의 절차 “목사청빙”의 수순에 당황하였다.

 

나와 교회의 교인들이 모두 뭉쳐있었기에 노회의 다음 수순에 방해가 된 일로 잠시 조용할 때, 노회의 임시당회장으로 오신 Rev. Peter Bristow 목사님의 제안에 관대한 우리의 뜻을 존중하겠다 함으로 교회는 평온과 다음 수순의 청빙이 이뤄졌고, 결국은 조충만 목사님을 청빙하여 2014 4월부터 2022년까지 교회는 좋았었다.

 

이번의 교회 문제점이 커지며 손기철 목사님의 2022 7 31일부터 지금까지의 어떻게 될지 그 후일은 예상 못한다.

 

아주 작은 소소한 일이 이렇게 번질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손기철 목사님은 교인들로부터 신퇴 상실이 차차 눈덩이처럼 커져 가는 중이다. 제방의 작은 구멍이 이렇게 크게 구멍이 되어 확산되는 이것으로 둑이 무너질 것을 아직 아무도 모른다.

 

우리 인간은 모두가 미래 불확실성에 답을 모르기 때문에 방활이 생겼지 싶구나.

 

오직 전지전능의 수 하나님의 뜻이려니 기도하며 마음의 평온을 갖는 중이다.




 

 



이창만 집사님!

지난
3 9일 수요일의
수요예배에
이창만 집사님의
근심에 잠긴 모습이
지금도 제 심금에 깊이 자리 하였습니다.

얼마나 아픈 마음이었는지 저는 그때 받은 집사님의 눈 빛에서 뭔가 하소연하고 싶은 느낌이 있었는데 제가 바로 다가가지 못함에 지금도 눈물이 잠기네요.

이창만 이국연 집사님의 가족과 또 월남국수 사업체 등 갖은 고생의 일상에서도 영주권 받은 후,다소 마음이 핀 것은 사실인데,

어찌 2024 1월의
.고등부 수련회에서 겪은 자녀들의 일에서
많은 고민과 번민에 교회의 손기철 목사님을 원망해야 하는 아품이 쉽지 않았을터,
그러부터 1년 넘게 버티어 오시다 교회를 원망하셨으니 제가 그 일을 미쳐 몰랐던 것도 참 미흡했지만 집사님의 가족은 어디에 하소연도 못하고,
하물며 남창균 장로는 전혀 모르쇠였으니 답답했었지요?

그후 며칠 지나며
대부분의 실체 파악하면서,
도저히 교회 내에서 해결은 어렵다 판단으로 노회에 문을 두드렸습니다.

교회적으로 봤을 때 조금 늦었지만,
  이제라도 과감히 노회의 중립적, 공평성을 알아 기다리는 중입니다.

이제
  그곳에서
두 번째 진행 편지는
아마도 이번 주 중에
실무 청문회가 수립되어
몇 교인이 올린 청원서에
조사가 들어설 것입니다.

집사님 가정 모두에
평안의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