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나의 이야기

043 가족 이야기 옛 생각을 돌이켜 보며

淸山에 2025. 9. 15. 14:04

2023 09 01일 금요일

 

여느때 보다 일찍 원희가 나를 깨웠다.

이 시간 나는 핸드폰에 웹을 열어 유튜브를 감상 중이었지.

원희의 카페 일 시간 6 30분 제 1차 근무 시간에 따라 집에서 6 13분 경 떠났다.

간밤의 기온이 차갑게 내렸는지 차 앞창 유리에 얼음이 약간 낀 것으로 차가운 기온을 알 수 있었다.

유리창 부러쉬를 켜 놓고 물을 뿜으며 차를 달려 큰 도로에 인접하고 곧장 Motorway에 접근으로 들어 갔다.

이 시간의 차 흐름은 평소보다 이른 시각이라 차 흐름이 적당하게 멈춤 없이 달려 간다. 수 없이 달려 본 곳이라 매 시간의 차 흐름 감각을 잘 알아 차라리 약간 이르게 출발할 때를 더 선호하는 편이다.

 

6 30분 직전에 카페에 닿아 나는 원희에게 나의 커피 한 잔을 부탁하였다.

근처에 적당히 차를 주차하고 약 2분 후에 찾으니 막 준비한 나의 커피와 중국인 동료가 준 호떡 같은 빵을 먹으라고 준다. 중국인 동료는 우리의 찐빵, 만두, 호떡 같은 밀가루 빵을 가끔 집에서 구워 원희에게 주기에 이것을 집에 가져 오면 나, 그리고 처가 즐겨 고맙게 기다려 먹는다. 한국식에서 약간 벗어나지만 이런류의 밀가루 빵이면 우리들의 옛날 입맛에 가까워 싫지많은 먹거리에 괜찮았다.

 

곧장 내린 원두 커피의 쓴맛에 입을 넘기며 고요한 찻길을 달리니 옆 쪽 Auckland Domain Park 넓은 운동장의 잔디위에 허연 살얼음인지 혹은 짙은 서리인지 허옇게 뿌려 있어 오늘 새벽의 밤 기온 차가움을 알 수 있었다.

 

신호등에 잠시 차 머물 때 웬지 모를 문득 누님의 고마움이 떠 올랐다. 세 분의 누님에 또 세 분  형님의 살가운 情感이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기질이기에 아버님 어머님의 내가 아는 삶을 떠올리며 내가 기록하였던 나의 이야기 My Story’글을 비쳐 보았다. 까마득한 나의 어린 기억에 어머니로부터 들은 갓 시집 온 돌다리 석교동의 시집은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의 첫 생활 풍경을 이야기 한 것으로 그것이 유일한 내가 들은 어머니의 첫 시집 모습이어서 그것을 토대로 나의 이야기글 옮겨 적어 더 검증 혹은 살 붙일 이야기도 모자란채 아쉬운 나의 이야기 글을 상상나래 폈었다. 형님 누님의 정을 내려 받은 나의 삶에 근원은 아바지 어머니의 그리운 정이 깃들여 형제누님 모두에 나눠 오늘의 나는 그 모두를 감사하게 느끼니 자랑스럽다.

 

뜻밖에 오늘 이런 추억이 떠올라 계속의 상상 중 운전하던 차는 집에 도착하게 된 오늘 아침이다.

평소같으면 집에 돌아와 곧장 침대에 들어 2-3시간 더 잠으로 끝났는데 오늘 만큼은 컴퓨터 스위치 켜 열었고 아침에 얻은 커피와 또 살짝 구은 밀가루 빵으로 뱃속 채우며 매일 하던 컴퓨터에 여러 창 열어 서류 파일도 준비해 놓았다.

 

나의 이야기파일에서 初頭나의 이력 년도별 정리를 보면서 부모님의 만남과 시집 생활 그리고 일본으로 이주의 과정을 살펴 보았다. 이미 부모님의 당시 상황 기록은 내가 들은 것과 또 당시의 시대 배경을 상상하여 즐거리를 컴퓨터에 남겼으니 달라질 것이 없거니와 이제 그때의 광경을 깊이 생각해 보니 몇 가지 더 생각의 깊이를 들여봐야겠다는 뜻이 섰었다. 즉 그 당시 그렇게 찢어지게 가난한 시집의 삶에서 큰 형님(南宓均미쯔오  1930년생)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으로의 이주를 생각하였다면 그때의 이주 비용 등도 적지 않은 금액일터 그 자금을 어떻게 감당하였는가?였다. 그리고 당시의 부모님은 22, 19세에 고향 한밭(대전) 돌다리 호동을 떠나 먼 타국 일본의 삶이란 앞으로 닥칠 새로운 세상의 변화에 도전할 때 과연 잘 감당하리란 보장은 언감생심 가슴에 새긴 용기 배짱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고향 집을 떠나 일본의 어느 곳에 정착 할 때까지의 생계비 등을 보면 얼마만큼의 비용이라도 큰 몫돈 일터 어떻게 그 자금을 마련한 것이며 또 그 돈 아끼려 뱃삯과 음식, 거주 비용 등에 얼마나 시달렸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이 문제는 내가 1982년 뉴질랜드에 들어 와 녹용 공장에서 근무하며 또 수 개월 홀로 지날 때 내가 감당하던 모습을 비쳐 볼 때 부모님의 조선 땅 부산 현해탄 건너 일본의 이동 과정 정착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부모님 곁을 떠나 서울 학창 시절로 또 결혼하고 얼마 후 뉴질랜드로 떠나고, 이후 지금까지 45년의 세월 흐르느라 가까이 어머님 곁에서 이런 이야기 등을 듣지 못하다 이제야 그 당시의 이야기 즐거리를 담으니 너무나 빈약한 가족사 과거는 확인할 기회 조차 없었으니 아쉽기는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부모님 살아 생전에 이런 이야기 들을 순간이 왜 없었는가? 아마도 부모도 또 나도 그럴 생각이 각각의 바쁜 삶에 생각 겨를 조차 없었더구나.

 

어찌어찌 수 년 전 나이 이야기구상에 각 연령 성장 별 이야기 남겨, 그 자료가 모두 컴퓨터에 저장되어 여러 차례 수정 보완 정정에 지금에 이르렀지만 오늘과 같은 생각은 또 하나의 추가 글이 첨가되어진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현해탄 이주 일본의 삶의 증언이 거의 없어 해방 후 가족 모두가 잘 귀국한 것에 14-5년 간의 일본 체류 삶은 괜찮았을 것으로 건너 띄어  그 이후 나의 주 삶 이야기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의 이야기는 대부분 끝을 맺었다.

 

돈암동 그리고 미아리 고개
길음동
길음 시장
 
부산의 조경순, 의성의 배국희, 영천의 이규호, 옥천의 김영호
 
등 잘 못 쓴 글의 수정도 생각나 다시 고쳐 쓴다.
 
강릉에서 걸어 설악산 입구까지 약 60키로의 거리 중간에 지나는 차에 손을 들어 입구까지 차편 얻어 탔다.

 

오늘의 옛 기억을 찾아 다시 꺼내 읽으며 몇 가지 틀린 내용은 수정과 첨가를 하여 당시의 추억으로 스며드니 지금도 새롭고 당시의 상황으로 깊이 빠져든다. 그렇게 추억은 맨날 내가 사는 힘의 원동력이 되였다.

 

지금까지 수 백 번을 꺼내 읽어도 질리지 않는 나의 이야기에 중반을 읽고 오늘 하루도 추억의 힘으로 남은 시간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