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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 나의 모든 사업 정리 후 종효와 힌국 방문하던 일들
1998년 12월의 이야기 – 2023년 7월 19일에 작성하다
이제 지금 살고 있는 27 Oakley Avenue, Waterview, Auckland의 집에 이사하고 또 교회 생활을 다시 들어 간 후 1998년 12월 경 종효를 데리고 한국 방문의 기회가 있었다.
항공 요금의 차이가 없어 선택한 출국에 그리고 중국도 방문하는 스케줄을 만들어 중국 비자 발급도 받았다.
지난 긴 세월 나는 사업에 몰두하느라 쉬는 날도 없었던바 이제 그 모든 것 내려 놓고 자유인으로 지낸다는 것에 마음의 우려가 없지 않을까 주위에서는 염려로 보겠지만 나는 끗끗히 마음 상하지 않게 다짐하며 한국의 형제들 만났고 몇 날 후 종효와 함께 중국의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추운 기온의 베이징은 찌든 뿌연함이 서려 주요 도로가의 어둑침침함도 불결하게 보였다. 예약한 숙소에 여장을 풀어 시내의 구경도 하였으니, 여행사를 찾아 만리장성 관광 하루 코스를 가졌다.
베이징에서 동북 방향으로 약 77km 거리를 1시간 45분 가량 버스는 달려 거창한 입구의 만리장성에 닿았다.
몇 시간의 자유시간으로 7,8m 높이의 성곽에 올라 관광객의 흐름 따라 몇 백 미터는 올라 돌아 보니. 성곽 바깥은 북방 유목민족, 흉노족, 몽골족의 침략을 막느라 쌓여져 수많은 침략 전쟁사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곳 여행사도 어느곳 못지않게 수입을 올리려 관광상품 쇼핑 등에 빠지지 않더라. 먹는 식사야 뉴질랜드 중국 식당 이용할 때 맛 보던 것과 비숫하여 거부감은 없었다. 다음 날은 뉴질랜드의 박홍식 사장으로부터 들었던 북한식당의 냉면 맛을 찾아 베이징 중심지역의 옥유관을 찾았다. 당시만하여도 북한에 대한 접촉이 어려울 때라 종효에게도 사전 설명도 열심히 주어 위험 등등에 이해를 시켰다. 식당안에 손님은 우리 뿐으로 자리에 앉아 매뉴판의 냉면을 보고 주문을 하였다. 분명 북한 관리자겠지만 태연히 영어로 소통하여 음식만 넘기고 돌아 왔으니 1998년 경의 북한 체재 경각심은 아주 높을 때였다.
사전에 장옥윤 목사님을 통하여 숙소와 쇼핑 이야기를 참고하여 귀국 선물에 쇼핑의 거리를 알아 왕푸징 거리(王府井大街)을 찾아 보았다. 베이징 중심가 거리를 지나다 오클랜드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던 젊은 교민을 만났다.
세계가 그렇게 넓다는데 이곳에서 알던 교민을 만날 확률은 희박한데 그는 오클랜드에서 전문적인 사진관 장비를 차려 놓고 운영을 하여 나의 여권 사진도 이곳에서 찍었었다. 그 여권으로 베이징에 왔는데 그는 사진관 사업도 폐업하고 이곳으로 왔으니 새로운 판단에 중국의 새 분야에서 좋은 성과가 있기를 바랐다.
당시 1999년 시기이면 중국의 서방 경제 수출 대책에 푹 발이 빠졌을 때 북한은 김정일 체제 기아에 허덕이던 주민 200-300백만명이 굶주려 사망하던 시절이다.
베이징 관광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 온 나는 대구 형님의 딸 주현이의 결혼식도 참석하여 어머님도 뵙고 또 일가친척 형제 누님 대부분을 만났다. 주현이는 몇 년 전 오클랜드에 언어 연수로 몇 해 공부하느라 자주 만났었는데 귀국하여 연세대학에 편입을 하였었다. 이때 같이 뉴질랜드에 연수차 왔던 친구가 이창윤 장로의 형님 딸 조카였기에 이리저리 인연이 깊다. 이때 나의 첫 직장을 연결해 주신 홍용한 예비역 대령님을 만났다. 대구 형님의 손위 동서의 관계가 되어 반가웁기 그지 없었다.
연루한 어머님도 종효 함께 보느라 아들에게 가족 혈연의 소중함을 알리는 계기로 그를 한국에 함께 왔던 것이다.
누님과 형님 또 조카들도 대부분 만났으니 대전 둘째 누님의 조카들은 대전, 성남 분당에 살아 서울에서 머물 때 분당의 조카들도 만났다. 2000년 중 주리는 아이들의 언어 연수에 특별한 관심에 결국은 그 이듬해 오클랜드에 세 자녀 데리고 경숙이 가족 자녀 둘과 함께 이곳에 왔다.
그들의 집을 내가 살고 있는 Waterview지역으로 잡아 주고 그들을 가까이에서 도왔다. 얼마 후에는 혜영이네 아이들 셋도 도착하여 세 자매 아이들 모두 이곳 주위에서 살아 내가 옆에서 도울일에 약 2년 간 그들의 유학 연수는 나의 삶 속에 함께 하였다.
이들 모두가 귀국하고 얼마 후 나는 2003년 7월 경 한국에 머물 긴 계획으로 도착하였었다. 이 시기 분당의 조카들 집도 여러 곳 찾아 오래 머물기도 하였거니와 주리 남편은 치과 병원을 운영하여 내 치아 검진도 정기적으로 받았다.
어느 날 경숙이가 커피 Shop에 납품하는 쿠기를 만들어 빵공장을 운영하기에 내가 조력으로 빵 제조 보조자로 근무를 하였다. 물론 월급을 정하여 조카가 주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 조카가 합당한 운영에 나의 봉급 책정이 과하지 않았는지 미안하였었다. 그 때 경숙이 아파트에서 숙식 제공 받고 공장에서 일하였는데 삼촌이라 크게 도와 주는 인심으로 대했을지 모르겠구나. 몇 해의 장기 한국 체류를 마치고 뉴질랜드로 돌아 간 후 주리네는 카나다 이민에 자녀들 데리고 갔다가 영주권을 받고 아이들이 잘 성장하고 학업 마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이럴 즈음 대전의 누님 막내 아들 정진훈이 아이들 가족 영어 교육에 뉴질랜드로 오고 싶었던 것을 내가 처의 거절로 좋은 답을 주지 못한 아쉬움에 그들은 카나다로 방향을 돌려 결국은 카나다 영주권까지 잘 획득했다는 페이스북의 글을 보며 안심하고 그들을 축복하였는데 가끔은 페이스북의 글에 그들의 삶 동향이 올려져 반갑게 읽어 본다.
이런 중에 “나의 이야기”글 전체에서 왜 조카 정주리, 정경숙, 정혜영 가족 이야기 뉴질랜드 체류 과정이 뻐졌는지 의아해 곰곰히 생각하여 보니 이제라도 그에 해당한 글을 지어 넣어야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나는 형제 누나 들의 각별한 도움이 많아 내 삶 전체에 차지하는 비중 또한 깊었다.
이러함에 그들의 자녀 즉 나의 조카들에 관심도 빠지지 않아 연결 또한 각별하였으니 이들 중에 그들 이야기에 대한 글을 지으면서 함께 지냈던 오클랜드의 일들이 추억에 꼬리를 물고 되살아 난다.
삼춘이 함께 옆에 있어 그들의 이국 생활에 어떤 도움이 되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함께 돕고 돕는 삶의 연속이었다.
그런 애정의 연장에 먼 흣날이 된 지금에 그들 또한 나이들어 아이들은 벌써 큰 성인의 청년을 넘고 있으니 앞으로는 그들의 무대가 된다. 기대할 만하구나.
조카 정진훈은 Facebook 싸이트에 가담하여 나의 활동은 없지만 내가 관심 가진 분야의 동향에 항상 빠지지 않고 올라 와 이들이 잘 지냄을 즐긴다. 나머지 조카들은 대전 작은 누님 편으로 안부를 들어 형제간 혹은 삼춘 조카 사이의 관계도 카톡이란 싸이트 연결이 고맙기 이룰데 없구나. 얼마나 편리하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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