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나의 이야기

02 국민학교의 어린 시절과 여러 해프닝

淸山에 2022. 12. 27. 16:14

신생 대한민국의 어려움이 백성들의 삶에도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로 연결되었다.

 

겨울의 학교 수업은 천막으로 지어진 교실 안 중앙에 난로가 설치되어 학교를 지키는 관리 어른이 각 교실에 나무와 석탄을 양동이에 수북이 쌓아 놓는다.

 

담임선생님이 이 난로를 피워 불길이 잘 붙어야 가까운 주변만 따스함이고 멀리 떨어진 곳에는 밖에서 스며드는 찬바람을 이기지 못하도록 움츠려 지냈다.

 

육십여 명의 학생이 한 반에 키 크기로 앞줄에서 차례를 주는데 나는 작은 키로 20번 정도가 되어 앞쪽에 앉았다.

 

어느 날 난로가 과열되어 그 불기운이 천막의 연결 부분에 붙어 천막 지붕이 불나 응급으로 학생들은 밖으로 내보내 천막은 훌렁 탔던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인동에 살던 친구들과 근처의 경부선 기차길 언덕에 오르면 철로를 따라 신기한 것들 많이 줍는다.

 

군부대의 이동 중 먹다 남은 C Ration의 깡통에서 쨈, 비스킷, , 사탕, 1회용 커피, 등 찾는 재미가 쏠쏠하였고, 때로는 지나는 기차에 손들어 “Give me 짭짭외쳐될 때 미군들이 던저주는 오렌지 , 초코릿 등은 배고플 때마다 찾는 명소가 되었다.

 

이렇듯 국가 사회 학교 등 모든 재정이 힘들 때 전염 질병의 뇌염은 특별히 주의를 받고 여름 방학에 들어간다.

 

이른 아침마다 꼭 학교에 출석하여 단체 준비 운동을 시키고 출석 받은 쪽지에 이름을 적어 방학 후 제출하도록 어린이 건강에 문교 행정의 지침이 떨어졌으니 개학하면 반 친구들 얼굴이 다 보이나 궁금도 하게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59년도의 사라호 태풍은 대단한 피해가 있었다. 대전천의 범람 직전까지 겪고 학교 근처의 길목은 몽땅 흑으로 뒤범벅이 되어 차량 통행이 어려웠었지.

 

119 소방차가 흙길 진흙으로 묻히자 미군 대형 트럭이 와 어렵사리 견인하는 장면을 목격하여 미제는 똥도 좋다는 이야기가 돌았으니.

 

대전천 인동 다리 밑에 어떤 창고가 빗물에 잠긴 것을 내려가 보니 초록 혹은 누런 군복 상의에 여러 훈장이 꽂혀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 생각하여 보니 군 전사자의 시체에서 수거한 업자가 사용한 창고로 알았으며, 어떤 때는 겨울철 학교 근처 논밭에 군복을 태워 여기서 얻는 부속 단추 신주 등의 철물을 거둬간다든지 하는 광경도 있었다.

 

심지어 커다란 창고 건물에 불하받은 그런 군복의 단추 등을 제거하는 일자리도 있었으니 수북이 쌓인 군복들의 숫자만큼의 자유대한의 군인이 나라 수호의 헌신 끝에 산화(흩을 산 꽃 화, 혹은 빛날 화)한 남은 흔적들이라 할까!

 

집의 일상 기구에 군 제품이 다양하게 흘러들어 온 야전삽, 도끼, 천막도 보였고 풀색의 군복은 단속에 쉽게 노출되니 검정 물감을 들이는 대전 천변의 광경과 시장 거리의 헌 옷 점은 군복을 변경시킨 옷 스타일이 많았다.

 

심지어 생선가게의 돈 담는 통도 손잡이 달린 빈 총탄 Ammo Box로 사용했으니.

 

4학년의 담임은 유영하 선생님(성함이 맞는지?)으로 수업 시간 가끔 북에서 살던 이야기를 종종 들려주었다. 어느 날 미술 시간에 밖으로 나온 우리들은 선생님의 설명에 따라 풍경화를 그리기도 하였으며 몇몇 친구는 그림을 잘 그려 그들이 부럽기도 하였다.

 

유 선생님은 그림을 잘 그리는 분으로 자주 미술 시간이 있었는데 하루는 선생님이 교탁에 앉아 있는 모델이 되고 그 모습을 그리는 시간에 나도 나름으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색 크레옹으로 색도 진하게 그린 그림을 제출하였었다.

 

그 다음 날 교실 뒤 학습자료 붙는 곳에 나의 그림도 여러 편의 그림 안에 끼어 있었는데 내 생각에는 모자란 그림으로 생각하였는데 당당히 그곳에 올려졌다는 것에 당혹스럽기도 부끄러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봄가을 학교 소풍날은 며칠 전부터 비만 내리지 않기를 기대하며 설레기도 하였다.

 

특별히 먹거리 챙겨 주시는 기대감이 있어 그랬지. 소풍지역은 대부분 가까운 보문산 중턱이거나 혹은 대전천 상류로 호동 석교동 쪽이 된다.

 

아침부터 준비한 김밥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양은 벤또(도시락을 그렇게 불렀다)에 담았고 사과 한 개, 사탕 몇 알, 사이다 한 병 혹은 물 채운 물병, 삶은 계란 한 개. 마른오징어 한 마리 등 이런 정도가 헝겊 보자기에 쌓여 들러매고 가는 일상이었다.

 

지금같이 등에 메거나 옆에 차고가는 가방도 귀했으니 부잣집 친구 몇이나 이런 도구를 착용하였던 대부분의 촌티는 톡톡히 풍겼지.

 

얼마 후 당시의 유우현 선생님은 서울로 전근 가느라 헤어져 긴 세월로 묻혔었는데 내가 1978년 결혼 후 흑석동의 명수대 슈퍼에 근무하느라 동네를 지날 때 오가는 사람들 틈에서 그분을 흘깃 보고 나는 곧장 그분을 알아보았는데 그분도 나를 보았을지 모르지만 나는 더 아는 채를 하지 못한 것이 먼 훗날이 된 세월에 종종 아쉬웠다는 감정의 그때를 떠 올린다.

 

나는 또래보다 한 살 일찍 국민학교에 들어가 친구들은 대부분 나이가 한두 살 더 많다.

이런 친구들 틈에 동네 한 모퉁이는 우리의 본거지 놀이터가 있어 당시 학교에서 주는 숙제는 뒷전이여 친구들과 놀이로 시간이 모자랄 터일까?

 

별의별 재미있는 놀이가 많아 육체적 정신적의 자람으로  도움 받아 커 갔다.

 

이 무렵 작은 누님도 시집을 간다고 집안이 분주하였다.

 

어떤 분의 중매로 매형 가족이 집에 와 잔치가 벌어졌다. 당시 매형은 서울대 졸업반에 사법고시를 준비 중이었다.

 

우리 집안에서는 귀한 사위가 됨에 어려운 가정 살림에도 극진한 대접을 하였으리라. 시집간 누님의 시집살이 고됨도 동생들이 주눅 들지 않도록 놀러 가면 맛있는 대접 하느라 분주하였다.

 

시어머니가 얼마나 괴팍하였는지 나중에 이야기 들을 때 그 설움을 함께 삼키기도 하였다.

 

결혼 후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공군 법무관에 복무하시고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봉직하셨으니  충분히 자랑이 되었었다.

 

둘째 형님은 미군 부대에 근무하여 간혹 미군 보호 물자 중에 우리 가족에 필요한 것들을 가져오신다.

 

이 중에 나는 구두를 신을 수 있었고 또 옷도 걸치게 되었는데 웃옷은 잠옷으로 줄이 있는 면 옷이었다. 우습겠지만 이것이 나의 생활복이 되어 일상 시간 항상 입었다.

 

당시 검정 고무신이거나 혹은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데 나에게 주어진 구두는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기도 하였다.

 

부모님은 대전 중앙 시장 근처에 새 사업을 여셨는데 사업의 내용을 설명해야 이해되리라.

 

이용 손님들이 오락장에 모이면 어떤 시간대에 주먹만 한 플라스틱 공을 전기 선풍기로 띄어 올라가게 하고 떨어지는 공의 순서에 따라 색깔과 번호를 손님이 가진 판에 맞추어 보고 가로세로 혹은 대각선에 모두 맞는 번호판을 가지면 “빙고”라고 외쳐 그 빙고에 맞는 상품을 가져갈 수 있는 오락 게임이다 즉 빙고 게임장이 된다.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신생 오락장이며 이것으로 큰 사업이 될 것으로 사업장을 여셨다. 나도 개업식 날 가 보았고 가끔 학교 끝나 가면 음료와 간식을 먹을 수 있었다.

 

허나 얼마 후 이 사업도 닫게 됨은 큰 수익성이 없어서였겠다.  

 

하물며 이때 수거한 물품 중에 현수막에 사용한 빙고 광고 글을 나의 팬티로 만들어 입었으니 부끄러워할 수도 없는 시절이었다.

 

이후 어머님은 대전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셨다. 이곳에서의 수입이 우리 가정의 삶에 필수적이었다.

 

국민학교 3학년쯤의 여름 방학, 작은형님과 함께 마전 외가집에 가기로 하였다.

 

어머니의 고향으로 뭔가 그리움이 가득한 동경의 시절이었으니 아침부터 설레는 마음 가득 안고 인동 시장 네거리에 닿았다.

 

이곳은 각기 방향으로 떠나는 시골 버스나 트럭의 정류장인 거라. 마전 방향으로 다가온 트럭이 있어 짐이 가득 실리고 우리는 그 위에 올라탔다. 차비를 얼마 냈는지는 모르겠다.

 

운 좋으면 공짜도 가능했으니깐. 뜨거운 여름 햇살을 곧바로 쬐면서도 시골길로 들어선 트럭은 뒤로 뿌연 먼지 내뿜고 산내면사무소 지나 점점 첩첩산중에 올랐다.

 

차량의 힘이 약하여 겨우 정상에 오르자 꼬불꼬불 내리는 마전의 작은 마을이 보인다.

 

내 생전 처음의 시골길이다. 길 건너 금산 길 방향으로 20여 분 걸어 길가에 참외밭 원두막에서 외사촌 형님을 만났다.

 

대전 도시의 고모네 동생들이 왔다고 잘 익은 개구리참외(껍질이 초록색)를 몇 개 따와 시원하게 먹었다.

 

그 외쪽의 산에서 졸졸 흐르는 시원한 샘물이 있는 두 분의 외삼촌 집은 산 중턱에 나란히 자리 잡은 초가집이었다.

 

반갑게 두 분 외삼촌 만나 인사드리고 양쪽의 외사촌도 여러 형님, 누님이 있어 말동무로는 나이 차가 없는 외사촌이 주로 우리를 데려 다녔다.

 

식사는 작은 감자 섞인 보리밥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하얀 쌀을 섞어 이것은 나의 밥그릇에 퍼 주어 특별 대우를 받았다.

 

이렇게 내 집을 떠난 첫 외출이 그다음 해에도 혼자 방학 맞아 찾도록 외가집의 추억은 내 마음에 자리 잡히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 나의 삶이 서울에서 그리고 뉴질랜드로 떠난 이민 생활까지 60여 년의 흐름으로 지난 2018년 한국 찾았을 때 대전의 작은 누님 조카 정진선정형외과에서 허리 치료를 마치고, 병원 앞에서 시내버스에 올라 혼자 그 추억 답방으로 마전 행 의 버스를 타고 가 보았다.

 

너무나 길었던 세월 흘러 외가집의 이야기는 더 이상 알지 못했기에 버스에서 내린 마전의 읍내에서 그 이상의 흔적 찾지 못하고 그냥 돌아온 일이 개운만 하지 않았다.

 

이즈음 해군에 복무하였던 큰 형님이 진해에서 제대하여 집으로 이사 오셨다.

 

큰 형수님이 조카를 안고 왔으니 집의 방 2개 중에 건너방은 형님이 사용하였다.

 

형님은 6.25 전쟁 중 해병대에 징집 입대하여 전쟁터 곳곳을 다니셨으며 김포 근처 부대 생활 중 형수님을 만나 결혼하여 진해에서 신혼살림과 제대를 맞아 집에 돌아왔을 때 조카 인숙이가 있었다.

 

형수님은 김포 출신으로 간혹 친정에서 돌아오면 인절미 떡을 몇 소쿠리에 담아 오셔 우리 가족에는 커다란 간식거리가 생겨 이날을 학수고대하였다.

 

어느 날 나는 친구들과 전쟁 이야기하는 중 우리 큰 형님이 별 셋 중장이라는  이야기를 하였었다.

 

놀란 친구들이 그럴 리가 있겠냐는 의문에 그 사실을 보여 주겠다고 집안에 데려와 벽에 걸려 있는 별 셋의 증거를 보여 주었었다.

 

ㅎㅎ 이것은 형님의 해군 제대에 해군참모총장 중장 정긍모 이름이 쓰여 있는 제대 증명서였으며 내가 착각을 하였던 것에 결국 친구들과 피식 웃고 간 헤프님이 있었다.

 

이 시절 집에는 부모님과 큰형님은 장사하시니, 이렇게 집에 남은 형님과 누님이 나의 주 생활에 함께함으로  나의 가까운 보호자가 되었다.

 

특히 작은 누나는 노래를 좋아하여 음악책에 나오는 동요와 가곡 그리고 세계 명곡을 소리 죽여가며 집에서 불렀었다.

 

이에 성이 차지 않으면 나를 데리고 가까운 학교로 혹은 학교 근처의 넓은 벌판에서 목청껏 불러가는 성악을 자주 접했다. 이런 배경에 나도 노래를 좋아하며 누나의 배움을 받아 자랐다.

 

동네에 한국전력공사 대전 지사에 근무하는 두 가족이 있었다.

 

그중 6.25 피난 중에 남한으로 내려와 가족을 이뤄 사시는 정ㅇㅇ 집에서 약 2년에 1회 구들장을 보수하느라 깨진 시멘트 돌덩이를 집 앞 공터에 버리면 동네 친구들은 여기에서 전기동선을 모우느라 힘든 일도 아랑곳 열심히 돌덩이를 깨트리는 작업을 한다.

 

이렇게 모인 동선은 엿장수가 올 때 많은 엿가락을 바꿔 먹을 좋은 수입이 되는기라.

 

이 집은 전기의 이용 방법을 알아 동선을 구들바닥에 깔아 겨울에 따뜻한 온돌의 집 구조로 만들은 것이다.

 

전기에 대한 기술자라 이런 내용을 알았으니 우리들은 엿이라도 바꿔 먹을 수 있는 고물 찾는 재미로 끝났지만 나중에 어른이 되어 전기장판이 상품으로 나온 것을 보았을 때 그 오래전의 동선 구들장은 전기의 이용을 잘 아는 전기 지식 없이는 불가능한 꽤 실력자로 생각이 들었다.

 

또한 당시는 전기 사정이 열악하여 집에 전기 들어오는 시간은 저녁부터 아침까지로 한정되는 간선 집이었는데 유독 그의 집은 24시간 전기가 들어오는 특선의 집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한전의 직원으로 특별 기술을 가진 자들만의 특권이라 하였구나.

 

나의 옆 이웃집으로 어수진의 가족이 살았다.

 

동네에서 뛰어놀던 어느 비 내렸던 여름날, 시장 다녀오는 그의 어머님을 동네 어귀에서 만나 인사하였다.

 

인자하신 그분은 나를 불러 지갑에서 돈을 꺼내 나에게 너 좋은 거 사 먹거라며 주니 얼마나 좋았던지.

 

감사의 인사 드리고 나는 인동 시장 골목으로 갔다. 이리저리 헤매다 펄펄 끓은 솥에 방금 내린 김 서린 속에 냄새 그윽하여 그 집에서 온면을 사 먹었다.

 

지금도 그런 면 맛을 잊지 못하여 그 이후 더 찾지 못했으니 어찌 그런 맛집이 없는가 의아해하던 적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 이야기도 또 있다. 이 일의 훨씬 전의 일이다.

동네의 박공희 친구와 여름날 아이스께끼 장사를 하기로 인동 시장길의 얼음 공장에 찾았다.

 

당시 아마 초등 3학년 쯤이렸다. 아이스께끼 통 중간벽에 얼음을 꼭꼭 밀어 넣어 보온의 장치가 되며 안쪽 공간에 그날 판매하게 될 양의 아이스께끼를 받았다.

 

아마도 20개 정도 받았으리라. 공희와 함께 이 통을 매고 소리 외쳐 팔아야 하는데 아이스께끼외침은 나오지 않고 교대로 매고 길거리를 다니다 찾는 사람에 하나씩 팔게 되었다.

 

이렇게 인동, 원동의 길을 걷자니 더운 여름 햇살에 땀은 줄 줄 흘러 그늘에 멈춰 통 위에 앉는다.

 

소리를 질러 외치지도 못하는 숫기로 원동 시장 건물로 들어섰는데 미처 몰랐던 바로 수진이 아버님이 장사하는 곳이었다.

 

우리를 본 그는 친구들 몫까지의 아이스께끼를 팔아 줘 기쁜 감정도 있었지만 동네 분에 발각된 수치심도 있어 빨리 자리를 뜨고 싶다는 마음뿐으로 나왔다.

 

시간이 지나자 통속의 아이스께끼는 녹아가는데 다섯 개 정도 남은 것이 아까워 우리는 녹아 진 것을 입으로 줄 줄 빨아 넣으며 자연히 녹은 것으로 만들어 결국은 반납을 하였다.

 

내용을 확인한 그 공장장이 판매량과 반품량을 계산하여 우리에게 떨어진 몫은 20환 정도 되었을까?

 

당시의 계산으로 찐빵 2개의 값이었다.

그때의 일 떠오르면 당시에는 얼굴이 훨훨 달궈지는데 부끄러움이란 느낌이 아직 철이 들지 않아서일까?

 

아이스께끼!”란 말도 외치지 못하고 아이스께끼를 팔은 녀석은 아마도 우리뿐이었겠다. ㅎㅎ

 

19605학년 마지막 학기를 마치고 새 학년 직전의 봄 방학 3월 경이다.

 

며칠 쉰다는 들뜬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나는 친구 이강직, 박공희, 양주석 나 넷이 만나 무작정 우리 서울 갈까를 내뱉고 함께 동네를 떠났다.

 

간간히 가랑비 내려도 대전 시내로 향한 변 도로를 걸었고 대전역을 통과 후 삼성동 북쪽으로 계속하여 회덕에 닿았다.

 

가는 도중 강직이 누나는 건빵 공장에 다니는데 집에는 항상 건빵이 가득히 있어 그의 집에 닿으면 건빵 먹을 수 있겠다 싶어 이야기 듣는 것만으로도 입속에 침이 꿀떡 고이고 벌써 배가 불렀다.

 

시골 동네에 목재가 집 골격으로 세워진 곳에 막 상량식을 하느라 고사 떡이 따스한 김을 피우고 있는 모습을 구경한답시고 우리는 이럴 때 고사가 끝나면 떡 조각이라도 얻을 기회가 있음을 잘 알아 떡시루의 김만 바라보았다.

 

고사 떡 시루 위에는 마른 북어와 돼지머리가 올려져 둘러 서 있는 우리들을 바라본다.

집주인 아낙의 비나이다 절 모습이 끝나자 떡시루 안의 떡을 칼로 자르고 한 조각씩 둘러선 구경자에 나눠 줄 때 나도 그 틈에 살짝 기대었으니 그 아주머니는 나에게도 한 조각 떡을 손에 쥐여 준다.

 

뒤에 기다린 친구와 골고루 나눠 먹으니 배 채울 양이 되지 못하였지만 없던 것 보다 좋았었지.

 

역 가까이 들어서는데 마침 하행선 쪽에서 빼에액 기적 소리로 들어오는 차 통을 바라보고 정차된 그 기차에 조용히 4명은 올라탔다.

 

객차 안에 들어서 바닥에 자리하여 앉았다.

덜커덩 소리 내며 창밖은 아름다운 시골 모습을 뒤로하며 기차는 달린다.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기차를 탄 모습이 된다.

그 기분 어떠하였을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다. 점차 북쪽으로 달리는 기차는 조치원 천안을 지났다.

 

해는 어둠이 깔리고 어둑한 시간 한쪽에 삶은 계란 한 꾸러미 구입한 청년분이 혼자 먹기 미안하였는지 나에게 계란 한 개를 준다.

 

고맙게 받은 나는 이것을 사 등분 하여 친구들과 또 나눠 먹었다.

 

서울에 가까울 무렵 강직이는 우리 일행에 주의를 설명하였다.

즉 조금 있으면 영등포에 닿는데 빨리 내려 살짝 개 구멍으로 빠져나가야 한단다.

 

강직이 외 3명은 모두 서울 촌놈이라 그가 말하는 대로 따라 해야 한다.

영등포역에 기차가 멈추었다. 뒤로 내린 우리는 역무원 모르게 밖으로 나갈 구실이 여의치 않자 강직이는 빨리 다시 기차에 올라가자고 말한다. 움직이는 기차에 겨우 올랐다.

 

다시 설명이 들어 온다. 조금 있으면 노량진인데 이곳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개구멍으로 나가야 한단다. 이 말 외 달리 할 일행 없었고 그가 오로지 우리의 인솔자라 일사불란하게 그를 따라야 했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차창 밖에 보이는 광경은 서울의 야밤이며 내리는 보슬비에 지나는 전차와 전선의 합선에 번쩍이는 불빛이 서울의 모습으로 이것은 신기한 광경이 되었다.

 

잠시 후 노량진에 기차가 멈추었다.

이 역사의 철망을 잘 아는 강직이가 우리를 인솔하여 뒷 구멍 철조망으로 갔다.

 

모두 올라 뛰어내려야 한다.

마지막에 오른 나도 내리는 과정에 옷 소매가 철망에 걸려 쭈윽 소리 내며 찢어진다.

겨우 몸 다치지 않고 길가에 내렸다. 이만하게 다행이다. 아무튼 감사하다.

 

떨어질 수 없는 강직이 따라 일행 모두가 따라갔다.

도로를 횡단 해야 하는데 강직이 외 아무도 움직이지 못한다.

건너에 있던 강직이 다시 이쪽으로 와 한 명씩 손 붙잡고 건너간다.

 

마지막에 나도 그의 손을 잡고 건너는 데 엄청 불안하였다.

왜 이렇게 번잡하냐? 도무지 차량을 피하여 건너갈 수 없겠네.

대전 바닥에서 자란 우리가 서울의 차량을 피하여 거리 횡단 하기는 쉽지 않았다.

 

노량진 본동에서 한강 모퉁이까지 그리고 흑석동에 접어들 때 강직이는 무슨 걱정의 불안을 얼굴에 보인다.

 

 아마 곧 그의 형님 누님을 보게 되면 혼 날 걱정이었겠다.

 

한강 건너의 불빛 야경은 반짝이며 이곳이 분명 서울임을 실감하여 내 기분이 어떠하였을지 생각하여 보라.

 

 

 

 

 

 

 

 

일제강점기부터 60년대 후반까지 서울의 대표적인 대중교통 수단

 

이윽고 강직이 형님 집 앞에 닿았다.

비 계속 부슬부슬 내리는 처마 한편에 우리 일행 3명 기다리게 하고 그는 집으로 들어갔다.

 

불러올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는 강직이 때문에 우리는 허기 진 모습에 긴장된다.

잠시 후 강직이 작은 누나가 와 우리를 부른다. 함께 하여 집안에 간장하고 들어와 앉았다.

 

큰 형님이 우리를 맞아 걱정의 이야기를 하신다.

여차 여차하여 이곳에 함께 왔다만 대전의 너희들 집에서는 어떤 난리 걱정이 되지 않느냐?

이제서야 대전에서 어떤 일들이 있을 것인가 생각이 들었다.

 

하여 그 큰 형님은 우리들에 모처럼 서울 왔으니 구경도 해야 하겠지만 대전의 각 가정 걱정을 생각하여 곧 내려가야 하지 않겠냐고 말한다.

 

당시의 통신 사정은 어려워 어떻게 연락할 방법 없었다.

 

늦은 밤 영등포에서 11시에 부산행 기차가 있어 이 편에 내려가라고 하시며 저녁의 식사로 급히 국수를 끓여 주셨다.

 

더 이상 혼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여 큰형님의 말씀 순종하는 도리 외에 없었다.

 

강직이와 작별 인사하고는 강직이 형님이 인솔하여 노량진에서 전차를 탔다.

 

신기하였다. 달리는 전차에서 빠앙! 소리 듣던 서울 모습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네.

얼마나 달렸는지 이제 내리자 한다.

 

영등포역에 닿아 역사에서 기차표 3장의 반 표를 끊으셨다.

이 시절의 반 표는 아이들에게 어른의 50% 가격에 표도 반쪽 크기만 가위로 잘라 준다.

 

그리고 11시 출발 시각이 남아 우리 일행 3명을 영등포 헌병대에 맡겼다.

자세한 이야기 들은 당직 헌병은 우리를 11시 기차 시간에 태워 주기로 인계를 받았다.

 

이렇게 11시를 기다리는 중에 갑자기 술 취한 사병 두 명을 붙잡아 온 헌병이 이 사병에 폭행을 하는데 엄청 세게 두둘겨 팬다.

 

차렷 부동의 자세에 꼼짝 못 하게 해 놓고 구둣발로 무릎 전갱이 질러 대는데 아파도 아무 소리 못 하고 복종하는 모습에 우리 일행은 겁에 질렸다.

 

이 일이 끝난 잠시 후 우리를 보고 그 헌병이 당직에 묻는다.

내용을 깨달은 그 헌병이 이제 우리를 앞에 세운다. ㅎㅎㅎ 어떠하였을지 짐작을 해 보아라.

 

술 취한 사병 같이 혼나지 않으려면 그의 말에 복종하고 따라야 함에 차렷 구령이 떨어지자 우리를 한 줄로 나란히 세웠다.

 

내가 일행 중 가장 작으니 앞에 섰고 내 중심으로 한 줄로 쭉 섰으니 뒷줄이 바르지 않음 보고 호령한다. 그리고 일장 훈시를 하는데 또다시 부모에 허락 없이 이렇게 무단가출하겠느냐 한다.

 

절대적으로 그런 일 없다고 소리 내어 복창하였다. 이제 됐다 하며 우리를 의자에 앉힌다.

.

11시 기차 시간 가까워지자 당직 헌병이 우리를 인솔하여 기차에 오르게 하고 대전역에 새벽 4시경에 닿으니 이곳을 꼭 눈 뜨고 기다렸다가 내려야 한다고 당부한다.

 

이것이 절대적이기에 신신당부의 주의 사항이다. 복창하고 기차에 편히 앉았다.

 

이제 3명이 교대로 눈 뜨고 대전을 벗어나지 않도록 보초 서기로 하였다.

그런데 보초 서던 친구마저 모두 쿨쿨 잠에 빠져 어느 순간 모두 눈 떠 보니 신탄진에 가까웠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구나. 이제 정신 바짝 차려 대전역 닿은 기차에서 내렸다.

 

무슨 두려움이 있겠는가. 반 표짜리 기차표가 쥐어져 있어 보무도 당당히 역사를 빠져나왔다.

 

순식간에 집 앞에 도착하여 각자 집안에 들어가야 하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아 처마 아래서 서성이고 있었다.

 

가까운 집에서 소근 거리는 소리에 나와 보니 ㅋㅋㅋ 어제 한바탕 이 동네에서 걱정 끼친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던가?

 

이 외침에 이 집 저 집에서 식구들이 나왔다.

 

새벽의 동틀 무렵이다. 동네의 모든 이웃이 나왔다.

나도 누나의 손에 붙잡혀 집에 들어갔다.

 

혼날 걱정이 마음에 꽉 찼는데 부드러운 어머님이 피곤하였을 터 잠을 자라 하신다.

 

이불 속에 들어간 나는 잠시 피곤의 몸부림에 깊은 잠결에 들어갔고 잠시 후 바깥 동정 아이들 소리가 난다.

 

살짝 잠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온 동네 친구들이 다 모였다.

얼마나 걱정하였으며 궁금하였을까? 모두가 나를 주시하고 쳐다본다.

 

! 헛기침 내뱉고 입을 열었다. 너희 중에 누구 서울 구경해 본 적 있어?

아무도 없는 것 뻔히 알고 있으니 역시 조용하다.

 

! 서울 정말 멋져. 전차가 길거리에 부응하고 지나며 차량이 얼마나 많았던지.

서울이 얼마나 크던지. 정말 대단하이.

 

나의 서울 소식에 귀 귀을이고 동네 친구들은 부러움으로 쳐다본다.

 

잠시 후 다른 서울 동행 친구들도 나왔다. 모두 집에서 혼나지 않았단다.

어제저녁은 동네 모두가 없어진 4명을 찾느라 온 대전 바닥을 뒤졌단다.

 

그리고 아무 소식 못 듣고 한 밤 12시는 통행 금지 시간이라 각 가정의 걱정이 되었지만 어느 꼬마의 이야기에 우리 일행이 “서울 가자고” 떠났다는 이야기 하여 이러했을 것으로 추측도 하였단다.

그런데 하루 만에 이렇게 모두 돌아왔으니 얼마나 다행이었겠는가?

 

이제는 또 다른 이야기로 당시의 먹거리는 철 따라 나오는 과일이거나 고구마, 감자, , 과자, 사탕 이런 정도인데 배부르게 먹기란 또 어려웠던 시절이다.  

 

어느 시간 배도 고플 때다. 작은형님이 조용히 나를 불러 인동 다리 가까이 길로 걸었다.

 

시설도 보잘 것 없는 조그만 중국 식당인데 아무튼 이런 식당도 처음으로 들어 온 때라.

 

주문한 음식 한 접시가 나왔는데 젓가락에 집어 양념에 찍어 먹는다. 입속에서 씹어지는 고기 맛 함께 얼마나 맛나던지. 당시는 이 음식 이름도 몰랐지만 들어 보니 탕수육이란 음식인기라.

 

벌써 육십 년도 더 되었는데 이렇게 처음 겪던 추억은 잊지 않고 세월 훨훨 지나도 샘 솟는다.

 

1960년 국민학교 6학년의 담임은 구본문 선생님이시다.

그는 대구 형님의 충남대학교 동문의 친구로 겨울의 어느 날 나는 썰매를 가지고 밖의 개울가 꽁꽁 언 얼음 위에 썰매를 타는 재미로 즐거웠었다.

 

이때 두툼한 오버를 걸친 선생님이 지나다 나를 보았는데 공부는 않고 이런 놀이에 있던 내가 부끄럽게 숨고 싶은 마음이었으니, 겨우 인사하고 도망쳐 집에 돌아왔지만 학교에서 혼날 생각이 가득하여 어처구니없게 재수 없단 탓만 했었구나.

 

당시의 썰매는 철삿줄을 울타리 친 어디서든 훔쳐 와 보잘것없는 연장 톱이라도 빌려 좌우 두 각목 밑에 철삿줄을 못으로 고정 시켜 위에 송판을 엇대면 설매가 되며, 꼬챙이는 손가락잡이에 마쳐 아래에 기다란 못 혹은 철사를 끼워 넣고 뾰족하게 바위에 갈면 되는기라.

 

대전천 얼음 위에 혹은 근처 논밭의 고인 물이 얼어 그 위가 얼음터가 되었다.

미끌한 얼음 위에 달리는 썰매의 맛은 기가 막히도록 재미있었다.

 

또 이 썰매를 가지고 기다란 그리고 높은 고갯길을 찾아올라 위에서 썰매를 타고 내려갈 때의 미끄러지는 순간은 세상에서 가장 빠른 뭔가에 실렸다는 쾌감에 온 세상을 휘달리는 기분 그것이었다.

 

해마다 추석이 다가오면

오곡백과 무르익어 배주릴일 없겠는데 *

시방이야 먹거리에 넘치는게 넘쳤지만

그어릴땐 쌀밥가득 구경만도 배부르고 *

추석오면 때때옷에 온세상이 푸르렀네

 

명절 전날이면 아버님 심부름으로 큰집 작은집에 고기 한 덩이와 齋受用 술 한 병씩 갖다 드리러 대전 변두리 석교동 시골길을 다녀온다.

 

몇 번 오간 길옆 밭고랑에는 붉어진 수숫대 하나 푸윽 고개를 숙이고 알알이 맺힌 곡식이 붉으읍게 햇빛에 비쳐 보여 저것이 내 입맛을 당겼었네.

 

지금이야 이런 것 먹는 사람 보기 힘들겠지만 그때만 해도 먹거리라고는 감자.고구마.찐콩.옥수수.수수., 땅콩 등 주로 곡식류가 대부분이라 길거리에 널려진 것 보면 다들 저 껍질들이었다.

 

이중 수수 하나가 어찌나 먹고 싶던지 지나던 길옆에 푹 고개 숙이고 있는 것은 나 보기 수줍어 그렇던가?

 

몇 번 지나가던 길에 저뇬(이렇게 불러 보자)에 눈독을 들인게 몇 번째 후 더이상 지났다가는 남이 먼저 가져갈 것 같아 그날 돌아오는 시간에 D데이로 누가 안 보는 것 틈타 중간 줄기를 꺾었다.

 

쉽사리 꺾이지 않아 한참 잡아당겨서야 겨우 끊었고 가슴은 킁당 킁당 소리가 어찌나 천둥 같던지 숨을 한참 고르고 재빨리 이곳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와서는 나만 아는 한곳에 숨겨 놓았다.

 

추석 전날이었으니 그러잖아도 먹을 게 많아 좀 더 지나서 먹어도 되겠고.

 

명절이 지나 이제 새로운 입맛이 동할 때 이것을 솥에 올려 아무도 모르게 푸윽 찌었다.

 

뜸이 푸윽 들게 찌고는 꺼내 한 알을 입에 넣고 입으로 오물락조물락 돌리곤 껍질은 뱉고 알곡을 배 속에 넣을 때 그 맛 기막히더라.

 

이 수수 알은 며칠 지나서 먹어도 맛이 나는 것 아마 아시는 분도 계시리라. 이렇게 하여 한동안 이 맛에 살맛도 났다.

 

그 동네는 우리 집안 집성촌이라 아마도 내 모르는 아저씨뻘이나 조카뻘의 밭이라 그 후 그곳을 지날 때마다 나를 지목하고 보지 않을까 걸음을 빨리했던 일도 있었다.

 

때는 흘러 흘러 사십 년이 훌쩍 지난 즈음 그때 생각을 떠올려보니 하나만 남긴 것은 씨앗으로 남겼을 것이 내가 꺾은 일로 인하여 다음 해 씨앗 장만 못 한 그 농부 생각에 어찌나 죄송스러운 어린 철부지 일이 추석이 다가올 때마다 생각이 떠오른다.

 

한 알 썩어 죽어서 수천 개의 곡식을 키워 준다면 그 당시의 한 수숫대에는 몇 섬 곡식 맺을 것이며 사십 년이 흘쩍 지난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 할 계산에 이 글 쓰는 시간 엄청 부끄러움이 달려온다. (해마다 추석이 다가오면 -

10 Sept 2005 글 썼던 것을 옮겨 넣음)

 

1960 4 19

어린 나이에도 사회가 혼란한 모습을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3.15 대통령 부통령 부정선거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궐기로 최고점에 도달하였다.

 

친구들은 구경하러 간다고 함께 멀리 불탄 집을 찾아 가 보았다. 어떤 집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불에 탄 흔적은 집터에 모두 재로 변해 있었다.

 

그 집의 가족인 듯 재로 변한 흔적에서 건지려는지 재 속에서 뭐를 찾는 모습이 보인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 집의 주인은 3.15선거에 어느 정도 지체 높은 자의 자택으로 성난 데모 궐기자들이 불을 질러 이렇게 재만 남게 되었단다.

 

이때 나는 국민학교 6학년 졸업반이었다.

학교 반 친구 중에 한 친구가 있었는데 이름은 기억에 없다. 멀리 떨어진 대전 천 건너 효동에 살았다.

 

학교 끝나 그의 집에 갔다.

그의 다락방에서 옛날 사진첩을 꺼내 보여 주는데 멋진 말을 타고 군복에 기다란 칼 차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설명한다.

 

일제 강점기에 그 가족의 자랑이었을 텐데 이 시기 친일파로 숙청 받아 풍비박산風飛雹散된 가족의 한 면이 보인다.

 

국민학교 졸업의 준비에 졸업가 부르던 기억이 있다.

 

1절 후베들 선창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

풀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며

우리는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2절 졸업생 답창

잘있거나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 갑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새나라의 새일꾼이 되겠습니다.

 

3절 선.후배 제창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면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들도 이 다음에 다시 만나세

 

중학교 진학은 1차 시험 한밭 중학교에 떨어져 대전 동중학교에 들어 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