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나의 이야기

01 부모님의 인연과 7남매 틈에서 막내로 태어남

淸山에 2022. 12. 27. 15:52

父親 南熙性    母親 朴三善  은 어머님이 뽕 키우는 기숙사에서 옷 만들 실 뽑기 작업을 하시다 17세의 나이에 가까운 종친의 중매로 만나 1929년에 결혼하셨다.

 

부친은 고성 남씨 秀文 할아버지 자손(나에게 어려서 어머님은 너는 경자 자손이라고 누누히 교육 시켜 그 경자 할아버지가 수자 문자 할아버지 되신다) 24세손이며, 廷植 할아버지에 은진 송씨의 할머니 슬하 3 3녀의 막내로 1909己酉 음력 12 5 熙性(빛날 희 성품 성)이시다.

 

본적은 대전시 호동 255번지(옛 지명으로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호동리 255)이다. 한밭이라 불리던 옛 명칭이 있으니 지금의 대전을 그렇게 호칭했다.

 

모친 朴三善 1912 12(음력) 생으로 2세 때 어머님(나에게 할머님)을 일찍 여의여 큰 이모님(어머님의 큰 언니)의 젖을 먹으며 자랐다고 들었다.

 

외가는 충남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옛 전북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가 되며, 외가 쪽으로 외삼촌 두 분과 두 분의 이모님이 계셨다.

 

경제적 어려운 시집살이에서 큰 형님 宓均미쯔오( 1930년생)를 낳고 부친을 설득하여 1931년경 현해탄 넘어 일본에 이주하였다.

 

당시는 일본 군국 강점기의 조선민족말살통치 정책으로 일제의 모진 탄압과 쌀 식량의 수탈이 심할 때였으니 그래도 서구 산업의 발전이 크게 앞서 있던 일본 본토의 삶이 차라리 더 희망이 있었을터 머나먼 바다 건너의 희망이 부풀었을 것이다.

 

일본 나고야名古屋 동부 쪽 옆 토요하시豊橋에 가까운 시골 간베神戶ガンベ 마을에서 귀국 1945년 후반까지 사셨으니, 그곳에서 큰 누님 花子하나꼬(1932년생), 둘째 형님 이와오(6.25전쟁 중 대전에서 병으로 사망), 셋째 형님 台均가쓰오(대구 형님 1937년생), 둘째 누님 晴江하루에(1940년생), 작은(서울)누님 正子마사꼬(1942년생), 작은 형님 照雄데루오(일산 형님 1944년생) 3 3녀를 더 낳으셔 시골 간베神戶에서 고물 모으는 생업으로 먹고살기에 괜찮으셨단다.

 

큰형님을 손 붙잡고 누님은 구루마에 둘째 형님은 어머님 등 뒤에 업혀 걸으며 고물 사러 다닐 때 동네 사람의 도움이 인정 넘치고 좋았단다. 또한 어머님은 자전거로 먼 시골도 다녔으니 돈벌이 일이라면 힘든 일에도 물불 가리지 않았으리라.

 

2003년 여름 큰 누님과 조카 상철이 그리고 그 아들 함께 나도 일본을 그룹 관광 후 누님의 기억만으로 예전 살던 고베의 마을을 찾아 간베神戶역 앞에서부터 걸어간 희미한 기억이 되살아나 옛 집터를 발견하였다. 1945년대 당시는 한적한 논밭 시골이었다는데 이제는 새로운 신축 가옥이 들어서 쉽지 않았을터 근처 동네 상점의 주인 이야기까지 주고받으니 누님의 12살 때 학교 동창도 만날 수 있었다.

(참고 - 10 고국에 머물 때 일본을 찾아 흔적을 돌아보다)

 

그 후 대한 조국 광복으로 고향 대전에 귀향(1945년 후반)하여 처음에는 산내면 호동(당시의 명칭) 큰 집에서 잠시 살다가 원동의 일본 적산 가옥을 구입하여 이사하였으며 이후 1949 3 17일에 내가 태어난 것이다.

 

당시는 남북으로 갈라진 정치적 사회적으로 제주 4.3 사건, 대구 10.1 사건, .순 반란 사건 등 좌익 선동의 자유 대한 정부전복 시도로 선량한 백성들 죽음이 빈번하였었지.

 

하여 당시에는 일본에서 가져온 자금이 생활에 큰 보탬이 되었고 원동의 내가 태어난 집은 실내에 목욕 시설도 있는 규모로 제법 컸었다.

 

아주 어린 다섯 여섯 살 때 나의 기억에도 마당에 수돗가는 시멘트로 물이 저장되게 쌓였고 또 큰 창고 건물은 공장으로 사용하는 등 마당도 꽤 넓은 기억이 남는다.

 

아버님과 돌아가신 둘째 형님만 대전 집에 머물고 6.25 한국 전쟁 중 가족들이 외가 마전을 통하여 대구로 또 부산으로 피난 갔다가 고향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님은 북 괴뢰군의 후퇴로 진격해 올라 온 미군에 의해 환영 인파 속에서 인민군으로 오인 받아(말도 통하지 않아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는 동네의 이야기를 들었단다.

 

그리고 둘째 형님은 병이 악화되어 죽으셨다. 일본 생활 중 깊은 물 속에 빠진 후유증으로 마음고생이 컸던 형님은 가족 안에 검은 구름의 슬픈 흔적으로 부모님의 속을 많이 태우게 하셨다는 이야기를 누님에게서 들어 알고 있을 뿐 나는 기억이 전혀 없는 아기 때의 일이다.

 

이후 어머님은 부친을 찾는다며 거제포로수용소를 찾아다니느라 어린 나 보살필 틈도 없어 이때 어린 시절의 나는 홍역으로 적절한 약도 구하지 못한 채 이 후유증이 귀 고막을 터트려 사경에서 겨우 살아났으니 그때부터 터진 청각 손실은 그 후의 삶에 있어서 평생 일상생활이 어렵게 되었다.

 

1953 6 18일 전국 8개 지역의 포로수용소 안 반공포로 3 5천여 명의 탈출 석방 소식에 아버님을 모시려 대전역으로 향하는 어머님 뒤를 내가 따라간다고 집을 나섰었는데 아주 어린 나는(그때 만 4) 군중 틈에 어머님을 당시 6월의 더워지는 맑은 날씨와 수많은 군중 틈에서 잃어 울며 가며 따르던 기억은 지금도 남고 어디로 더 헤매었는지는 모른다.

 

아주 큰 세월 지나 누님에게 물어보니 나는 대전역을 지나 목척교 쪽으로 헤매는 모습을 어느 누가 파출소에 데려 주어 그곳에서 머물렀단다.

 

아버님을 모시고 집에 돌아온 어머님은 큰 잔치로 일가친척들과 담소하는 중에 막내 창균이가 보이지 않다고 말해 나를 찾았으니 시간도 한참 흘렀고 식구들도 나의 존재를 까마득히 몰랐다니 그때서야 웃음잔치에서 온 식구가 나를 찾는다 동네방네 대전 곳곳을 헤맸었고 누님들은 나를 어떻게 보살피지 못하고 뭐 했냐는 끄지람도 엄청나게 들었단다.

 

몇 시간을 찾아도 흔적이 없어 근심이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작은집의 형수님이 경찰에 근무하셔 그곳에도 나의 부재를 알리며 대전시 모든 파출소에 연락을 취한 후 늦은 저녁에야 내가 어떤 파출소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작은 집 형님이 자전거를 타고 나를 찾아와 나는 그 형님의 자전거 뒤에 앉아 울면서 집에 돌아온 기억이 난다.

 

자전거 뒤에 손을 꼭 붙잡았는데 뒤로 떨어질까 봐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집에 온 후는 또한 기억이 남지 않는다. ㅎ ㅎ

 

내 나이 다섯 살 경의 어느 날 두 누님 함께 시집간 큰 누님 집에 간다고 삼성동 철교 다리를 건너는데 아래를 내려 보면 무서워 도무지 건너가지 못하고 멈추니 누님들은 양손을 잡아 건느자하여도 나는 울며 망설였었다.

 

어쩌지 못하고 서성이니 뒤에 있었던 어떤 아저씨가 나를 번쩍 들어 건너 주었던 기억이 남는다. 물론 큰 누님 만나 맛있는 식사와 머물던 시간이 있었으니 한국전쟁 끝난 얼마 후의 열악한 사회 시절이었다.

 

형님 누님은 일본어 사용 중에 조국에 돌아와 한글과 한국어 해독에 어려웠으며, 부모님은 일본에서 살며 귀국 때 그래도 재정 여유가 있었다지만 신생 대한민국의 사업 요건에 적응하기 어려워 가까운 사람에게 돈도 떼이고 사업 실패가 거듭되었으리라.

 

내 나이 여섯 무렵 대전 원동에서 살다가 인동 시장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였으니 아버님은 인동 시장에 싸전(곡식 판매)을 하였다.

 

내가 마실 삼아 시장 거리 다닐 때 아버님은 그 싸전을 정리하시고 동료 친구들과 함께한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당시는 사람들이 하루 삼시 세끼 끼니 걱정이 컸기에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라도 찾아 헤매야 하였다.

 

내 어린 친구들 함께 조그마한 보자기 들고 시장 바닥 특히 싸전(곡식 판매점) 근처에 엎드려 흘려진 곡식알이나 콩을 줍던 일이 있었다. 이럴 때 아버지 친구분이 나를 보면 불러 세워 한 주먹 곡식 알 혹은 콩을 쥐여 준 적도 있었다.

 

당시의 어린 놀이에 이것이 자주 있었으니 당시 먹거리가 얼마나 귀한 시절이었을까? 이렇게 주은 곡식 혹은 콩을 물에 씻어 화롯불에 볶아 먹던 맛 지금도 생생하다.

 

세월이 지나 나는 원동국민학교에 이른 나이에 입학하였다. 부모님이 장사하느라 집에서 나를 돌보는 위의 누님은 또 여자중학교에 가야 하는데 나를 집에서 살피느라 누님의 학교생활을 못하여, 나를 한 살 빠르게 입학시킨 것이다.

 

이날 둘째 누님은 원동 시장의 옷 가게에서 진열된 몇 개의 옷을 입혀 보고 나에 맞는 청색의 반바지(양편 어깨 너머로 끈 걸침)를 선택하여 왼편 가슴에 이름표 부탁하여 사준 기억도 난다.

 

보통 만 7세에 입학인데 만 6세의 나에게 일찍 학교로 데려갔으니 나는 신나 들떠 있으면서도 뭘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귀도 잘 안 들려 어려웠고 또 어린 나를 입학 시켰으니 저분이 나의 선생님이라고 얼굴을 잘 기억하라는 말뜻도 사실 못 알아들은 터였다.

 

그리고 그다음 날 등교는 바로 위 형님, 누님 따라 학교에 갔지만 나의 반을 잘 찾는지 뒤에서 숨어 보았단다. 어떻든 나는 어제의 선생을 따라 그 반에서 앉아 있었으니 이제는 마음이 놓였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초등학교의 생활은 시작되었고 또 끝나면 집에 돌아오는 길도 익혔으니 그렇게 학교생활은 당연한 일상사가 되었다.

 

어느 날은 큰 매형이 내 학교생활에 도움이 될꺼라 앉은 책상을 하나 만들어 나에게 끈까지 매 주었으니 그 당시의 학교 재정이 어려워 교실 부족에 운동장에서 혹은 비 오는 날이면 학교 복도에서 좁혀 앉아 교육을 하는데 없는 책상 대용에 이런 앉은 책상은 각자 마련해야 했었다.

 

그런데 학교 오고가는 중에 이것을 짊어진다는 무게감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철부지인 내가 잘 감당하고 견디어 온 것 보면 글쎄 운이 좋았겠던지.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목에 뱀집(生蛇湯)이 길가에 있어 그 구경의 흥미는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었다.

 

철망유리창 안에 많은 뱀이 뒤엉켜 꾸무륵 움직이는 모습은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웠는데 손가락으로 저 뱀을 가리켰을 때는 꼭 남의 발로 밟아 줘야 손가락 썩지 않는다는 낭설로 무의식으로 손가락이 올렸을 때 옆의 친구에게 밟아달라고 했던 해프닝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즈음의 또 다른 기억은 두 누님이 열심히 김밥을 만들어 작은 형님 함께 4명이 대전천 냇가를 건너 문창동 대흥동 경계의 들판을 찾아 무성한 풀밭 위에서 원적(소풍)의 즐거운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맑은 여름 날씨에 당시는 드넓은 벌판이니 인적도 드문 곳이었다.

 

어느 날은 홀로 세수를 하고 물을 머리에 발라 단정히 거울 앞에서 빗은 후 서정 누님 집에 간다고 혼자 인동 옆 대전 냇가를 돌 징검다리 건너 찾아간 적도 있었다.

 

당시의 나이에 길 잃지 않은 것만 보아도 참으로 똘망했었다.

 

몇 개월 후 뜨거운 햇살의 여름, 부사동으로 이사한 집이 있어 직전의 원동에서 인동으로 이사한 광경도 모두가 눈에 선하고 또 이날의 말 구르마에 온 짐을 실고 동네분들의 도움으로 함께 떠나는 새 주택가는 갓 들어선 신흥 주택가 동네로 근처에는 밭으로 들려 있었다.

 

나는 가까운 거리의 문창국민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코앞이 학교이니 얼마나 편했겠냐.

 

이곳은 신생 건립 학교로 건물도 부족한 교실의 반 이상은 천막을 세워 안에서 공부를 했다.

 

대부분 학생이 멀리 대흥동에서, 천동에서 신흥동에서 원동의 국민학교에서 모였으니 대부분이 전학 온 학생으로 이뤄졌었다.

 

즉 나의 학년부터가 정식 1학년부터였고 2-6학년 선배들은 모두 타지역 학교에서 전학 왔다고 할까

 

이 시절 큰 형님은 해군에 복무하느라 진해에 있었고, 큰 누님은 시집갔으니 집에는 부모님과 두 형님, 두 누님이 함께한 식구였다.

 

집 앞의 넓은 밭은 주택가로 변신하면서 변두리로는 문창동 석교동을 통하여 그들은 대전 시내로 들어서기 위해 우리 동네를 통과하게 되었다.

 

석교동, 호동의 일가 친척도 오고가네 꼭 집에 들러 가시니 언제나 우리 집은 중심 요충지 였었다. 멀리 출가하신 고모님 세 분 (고모부 趙薰, 都相讚, 閔丙薰)들도 친정이라고 오시면 아버님은 즐겁게 맞아 줄 귀한 어른이 되셨고, 또 외가 쪽에서도 외삼촌 사촌 형들도 심심치 않게 대전에 오시면 들르셨다.

 

또 아버님은 항렬로도 당시 윗대에 속하며, 나는 25세손이 되어 음력 10월의 時祭가 되면 5대조 이상의 제사를 음력 10월에 각각 올린다.

 

이때는 관계된 자손이 올리는 제사로 제주는 그 자손의 큰 집에서 준비하고 휘하의 자손은 모두 참석하여 지냈다.

 

어린 시절은 가세가 기울어 먹고 살기도 힘들었었다. 시집간 큰 누님은 가끔 매형이 안 계실 적에 나를 불러 하얀 밀가루 포대에 쌀을 담아 줘 집에 가져가라 심부름을 시키기도 여러 차례 있었다.

 

춘궁기가 되는 이른 봄 3, 4월 때 말려 두었던 시레기 풀어 보리 섞인 죽으로 배 불려야 했거늘 몇 번 앉았다 일어나면 곧 소화되어 혹은 방귀 몇 차례에 배 속은 빈 속의 공간 소리만 들릴 때도 있었다.

 

입는 옷차림도 열악하여서 한 겨울 추울 때는 추위의 고생이 또 얼마나 심했던지.

 

각종 물자도 귀할 때라 학교의 교과서 학용품 등 그 질을 논할 수 없었다.

외국의 구호 물품으로 학교에서는 연 1회 정도 우유가류 배급도 있었고 또 점심시간에 각자 양은 컵을 개인 소지하여 펄펄 끊인 우유를 한 컵씩 받아 마실 기회도 있었다.

 

또 전국 학생들에게 학교별 단체 기생충 약을 공급받아 교실에서 그 약을 복용 후 학교 수업을 단축하여 집에 오는 날도 있었다. 그리고는 다음 날 회충이 몇 마리 변() 속에 섞여 나왔는지 확인하여 학교에 보고도 하였구나. ㅎㅎ

 

이렇게 철부지 어려서의 시절 1956-7년 시절, 동네에 사는 판사 집 딸 박광숙이하고는 잘도 어울려 놀았다.

 

광숙이는 한 살 어렸고 그의 오빠 박현이는 나 위의 형님이 되어 가까이 지냄을 좋아했었지.

 

그의 아버님은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아침저녁 관청의 차량으로 출퇴근 모습이 보였으니 주위에서는 대단한 집안으로 올려 보았었다.

 

당시의 나는 그 대단함이 어느 정도인가를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아무튼 광숙이는 언제나 가까이 동무 삼아 주위 동네에서 혹은 가까운 대전천에 내려가 멱도 감고 오는 시간이 즐거웠었다.

 

한여름의 어느 날 멱 감으러 가자고 말하여 동네의 한 텃밭 공간에 신발을 감춰 놓고 냇가 천에 들어가 신나게 물놀이하고 돌아오는 길 각자의 고무신을 찾으니 온데간데 없어 맨발로 집에 돌아온 적이 있었다.

 

나중에 다시 찾아보니 그 고무신들은 근처 깊은 똥통에 누가 던져 넣어 잃은 것으로 간주하였지만.

 

이 일 후 광숙이는 좀처럼 얼굴을 볼 수 없도록 바깥출입이 드물었고 얼마 지나 그들은 법원 근처 선화동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이삿날 우리 친구들도 함께 살림 옮기는 도움 주고 그 달구지 따라 선화동의 집까지 따랐더니 저녁 식사 대접까지 받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이후 또 그 집은 서울로 이사했다는 소식이 마지막이었으니 까마득히 잊었지만

 

나중에 나도 훨훨 자라 대학 시절 서울의 그의 집 찾아 현이 형님과 가족 만났고 오직 광숙이만 보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광숙이를 보고 싶었던 기대는 쓸쓸함만 남는 옛일이 되었다. 많은 세월 흐른 후 작은 누님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었는데 광숙이의 언니 박광자는 작은 누님의 호수돈여자고등학교 동창으로 그 언니에 대한 이야기에 언니의 남자 친구로 인한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극심한 정신 고통을 받았다는 말이 생각나 그 동생 광숙이를 내가 좋아하도록 함께 자라는 것을 애당초 막기 위해 내가 알지 못하게 이사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1960년 경 부모님의 사진에서 발췌한 아버지

 

2000년 경 대구 형님 집에 계실 때 어머니

 

1970년 경 대구에서 형님과 아버지

 

아래 사진에서 발췌한 아버지 영정 사진

 

1960년 경 아버지 어머니

 

2000년 경의 어머니와 대구 형님, 대전 둘째 누님, 그리고 일산 작은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