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나의 이야기

00 나의 이력 년도별 정리

淸山에 2022. 12. 27. 15:42

父親 南熙性    母親  朴三善  은 어머님이 뽕 키우는 기숙사에서 옷 만들 실 뽑기 작업을 하시다 17세의 나이에 가까운 종친의 중매로 만나 1929년에 결혼하셨다.

 

부친은 고성 남 씨  10世孫 秀文 할아버지 자손(나에게 어려서 어머님은 너는 경자 자손이라고 누누이 교육 해 그 경자 할아버지가 수자 문자 할아버지 되신다)으로  24세손이며, 廷植 할아버지에 은진 송씨의 할머니 슬하 3 3녀의 막내로 1909 己酉 음력 12 5 熙性(빛날 희 성품 성)이시다.

 

본적은 대전시 호동 255번지(옛 지명으로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호동리 255)이다. 한밭이라 불리던 엣 명칭이 있으니 지금의 대전을 그렇게 호칭했다.

 

모친 朴三善 1912 1 2(음력) 생으로 2세 때 어머님(나에게 할머님)을 일찍 여의어 큰 이모님(어머님의 큰 언니)의 젖을 먹으며 자랐다고 들었다.

 

외가는 충남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옛 전북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가 되며, 외가 쪽으로 외삼촌 두 분과 두 분의 이모님이 계셨다.

 

경제적 어려운 시집살이에서 큰 형님 宓均미쯔오( 1930년생)를 낳고 부친을 설득하여 1931년경 현해탄 넘어 일본에 이주하였다.

 

당시는 일본 군국 강점기의 조선민족말살통치 정책으로 일제의 모진 탄압과 쌀 식량의 수탈이 심할 때였으니 그래도 서구 산업의 발전이 크게 앞서 있던 일본 본토의 삶이 차라리 더 희망이 있었을 터 머나먼 바다 건너의 희망이 부풀었을 것이다.

 

일본 나고야名古屋 동부 쪽 옆 토요하시豊橋에 가까운 시골 간베神戶ガンベ(나고야-간베 133km)마을에서 귀국 1945년 후반까지 살으셨으니, 그곳에서 큰 누님 花子하나꼬(1932년생), 둘째 형님 이와오(6.25전쟁 중 대전에서 병으로 사망), 셋째 형님 台均가쓰오(대구 형님 1937년생), 둘째 누님 晴江하루에(1940년생), 작은(서울)누님 正子마사꼬(1942년생), 작은 형님 照雄데루오(일산 형님 1944년생)  3 3녀를 더 낳으셔 시골 간베神戶에서 고물 모으는 생업으로 먹고살기에 괜찮으셨단다.

 

큰형님을 손 붙잡고 누님은 구루마에 둘째 형님은 어머님 등 뒤에 업혀 걸으며 고물 사러 다닐 때 동네 사람의 도움이 인정 넘치고 좋았단다. 또한, 어머님은 자전거로 먼 시골도 다녔으니 돈벌이 일이라면 힘든 일에도 물불 가리지 않았으리라.

 

2003년 여름 큰 누님과 조카 상철이 그리고 그 아들 함께 나도 일본을 그룹 관광 후 누님의 기억만으로 예전 살던 고베의 마을을 찾아 간베神戶역 앞에서부터 걸어간 희미한 기억이 되살아나 옛 집터를 발견하였다. 1945년대 당시는 한적한 논밭 시골이었다는데 이제는 새로운 건축 가옥이 들어서 쉽지 않았을 터 근처 동네 상점의 주인 이야기까지 주고받으니 누님의 12살 때 학교 동창도 만날 수 있었다. (참고 - 10 고국에 머물 때 일본을 찾아 흔적을 돌아보다)

 

그 후 대한 조국 광복으로 고향 대전에 귀향(1945년 후반)하여 처음에는 산내면 호동(당시의 명칭) 큰 집에서 잠시 살다가 원동의 일본 적산 가옥을 구입하여 이사하였으며 이후 1949 3 17일에 내가(昌均) 태어난 것이다.

 

당시는 남북으로 갈라진 정치적 사회적으로 제주 4.3 사건, 대구 10.1 사건, 여순 반란 사건 등 좌익 선동의 자유 대한 정부전복 시도로 선량한 백성들 죽음이 빈번하였었지.

 

하여 당시에는 일본에서 가져온 자금이 생활에 큰 보탬이 되었고 원동의 내가 태어난 집은 실내에 목욕 시설도 있는 규모로 제법 컸었다.

 

아주 어린 다섯 여섯 살 때 나의 기억에도 마당에 수돗가는 시멘트로 물이 저장되게 쌓였고 또 큰 창고 건물은 공장으로 사용하는 등 마당도 꽤 넓은 기억이 남는다.

 

아버님과 돌아가신 둘째 형님만 대전 집에 머물고 6.25 한국 전쟁 중 가족들이 외가 마전을 통하여 대구로 또 부산으로 피난 갔다가 고향 집에 돌아 왔을 때 아버님은 북 괴뢰군의 후퇴로 진격해 올라 온 미군에 의해 환영 인파 속에서 인민군으로 오인 받아(말도 통하지 않아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는 동네의 이야기를 들었단다.

 

그리고 둘째 형님은 병이 악화하어 죽으셨다. 일본 생활 중 깊은 물 속에 빠진 후유증으로 마음 고생이 컸던 형님은 가족 안에 검은 구름의 슬픈 흔적으로 부모님의 속을 많이 태우게 하셨다는 이야기를 누님에게서 들어 알고 있을 뿐 나는 기억이 전혀 없는 아기 때의 일이다.

 

이 후 어머님은 부친을 찾는다며 거제 포로수용소를 찾아다니느라 어린 나 보살필 틈도 없어 이때 어린 시절의 나는 홍역으로 적절한 약도 구하지 못한 채 이 후유증이 귀 고막을 터트려 사경에서 겨우 살아났으니 그때부터 터진 청각 손실은 그 후의 삶에 있어서 평생 일상생활이 어렵게 되었다.

 

1953 6 18일 전국 8개 지역의 포로수용소 반공포로 3 5천여 명의 탈출 석방 소식에 아버님을 모시려 대전역으로 향하는 어머님 뒤를 내가 따라간다고 집을 나섰었는데 아주 어린 나는(그때 만 4) 군중 틈에 어머님을 당시 6월의 더워지는 맑은 날씨와 수많은 군중 틈에서 잃어 울며 가며 따르던 기억은 지금도 남고 어디로 더 헤매었는지는 모른다.

 

아주 큰 세월 지나 누님에게 물어 보니 나는 대전 역을 지나 목척교 쪽으로 헤매는 모습을 어느 누가 파출소에 데려 주어 그곳에서 머물렀단다.

 

아버님을 모시고 집에 돌아온 어머님은 큰 잔치로 일가 친척들과 담소하는 중에 막내 창균이가 보이지 않다고 말해 나를 찾았으니 시간도 한참 흘렀고 식구들도 나의 존재를 까마득히 몰랐다니 그때서야 웃음바다에서 온 식구가 나를 찾는다 동네방네 대전 곳곳을 헤맸었고 누님들은 나를 어떻게 보살피지 못하고 뭐 했냐는 꾸지람도 엄청나게 들었단다.

 

몇 시간을 찾아도 흔적이 없어 근심이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작은집의 형수님이 경찰에 근무하셔 그곳에도 나의 부재를 알리며 대전시 모든 파출소에 연락을 취한 후 늦은 저녁에야 내가 어떤 파출소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작은 집 형님이 자전거를 타고 나를 찾아와 나는 그 형님의 자전거 뒤에 앉아 울면서 집에 돌아 온 기억이 난다.

 

자전거 뒤에 손을 꼭 붙잡았는데 뒤로 떨어질까 봐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집에 온 후는 또한 기억이 남지 않는다. ㅎ ㅎ

 

 

1909 12 5 父親 南熙性(양력 1910 1 15일 토요일) 태어 나심
1912 1 2 母親 朴三善(양력 1912 2 19일 월요일) 태어 나심
1929   婚姻 날자 미상 

음력 양력 검색 싸이트

http://astro.kasi.re.kr/Life/pageView/8

1949 3 17 대전시 원동에서 南昌均  태어 나다(양력 4 15일 금요일)
1950 6 25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 전쟁
1951   피난 생활
1952   피난 생활에서 원동 집으로 돌아 옴
1953 6 18 반공포로석방에서 돌아 오신 아버님
1954   대전시 인동으로 이사
1955 1학년 대전 원동 국민학교 입학(작은 누나의 손 붙잡고), 부사동으로 이사, 문창국민학교 전학
1956 2학년  
1957 3학년  
1958 4학년 담임으로 유우현 선생님(그림을 좋아 하심)

 

 

1959 5학년  
1960 6학년 담임으로 구본문 선생님(작은 형님 충남대 동문)
1961  1학년 대전 동중학교 입학(대전시 대동 지역)
1962 2학년  
1963 3학년  
1964   3월 중학교 졸업 후 1년 재수
1965  1학년 보문 고등학교 1학년 입학 후 7월에 휴학, 형님 건어물상회에서 일하다.
1966   계속 형님 가게에서 근무
1967 11 서울에서 친구 이강직 만나다, 서라벌 야간 고등학교 2학년에 편입
1968  3학년 낮에는 서울 종로학원 다니고, 밤에 학교 등교. 졸업

 

 

1969  1학년 경희 대학교 농학과 입학. 당시 누님은 신도림동의 새 주택가에 이사하였다.
1970  2학년  
1971  3학년  
1972  4학년  
1973   2월 동 대학 졸업, 농학사 학위. 5 25일 육군 입대, 훈련 과정 후 KATUSA  8군 소속
1974   동두천 지역 미 2사단 근무
1975 11 3 父親 南熙性 향년 66세로 10 1()별세(1909 12 5 ).  30개월 복무 후 전역.
1976    
1977 4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정보국 심리전과 근무
1978 6 17 서울 종로예식장에서 오후 2시 김인희와 결혼식(신관 2층 봉황실)

 

 

1979   위 직장 사직. 흑석동의 명수대 수퍼 메니저 근무(처가댁 운영)
1980 11 25 아들 종효 흑석동 성모병원에서 태어 나다.
1981    
1982 11 3 홍콩을 거쳐 뉴질랜드로 취업 이민, Dunedin 거주
1983    
1984 2월 경  & 아들 종효가 뉴질랜드로 들어 옴.
1985 5 15 딸 원희 Dunedin Hospital 에서 태어 나다.
1986   가족 모두 영주권 취득(원희는 시민권이라 제외)
1987 8월 경 거처를 오클랜드로 이사. 선식 업 시작으로 그 후는 여행가이드를 겸 하다.
1988 4 17 한인교회 창립 예배(St Davids Presbyterian Church in Khyber Pass Rd.)

1988 9 1 56 Daventry  St. Waterview, 주택 구입하여 이사

 

1989 6월 경 Queen St. 지역에 한국상사 로 한국식품업 시작. 선식, 여행가이드 업무를 겸 하다.
1990    
1991    
1992    
1993    
1994 2 17 56 Daventry  St. Waterview 주택 매도하고, 23 fairlands Ave. 이사하다
1995    
1996   시내에 Lotte Duty Free 오픈하다.
1997   피지의 Nadi에 흑진주 Shop  오픈하여 김형주를 동업자로 보내다.
1998   피지 Shop  100% 인수하다. 그 해 11 20일 경 한국 IMF 위기로 각 면세점 Close.

 

1999 8월 초 한국상사 정리하고 건물 매도

1999 8 18 27 Oakley Ave. Auckland 에 주택 구입하여 이사하다. 한인교회 생활 다시 시작
2000   아들 종효로부터 컴퓨터 사용을 배워 활용하다
2001    
2002    
2003 7월 경 한국으로 가다. 긴 시간 쳬류. 8월에 일본 관광 그리고 가족의 삶 터 방문
2004    
2005 7 19 뉴질랜드로 돌아 오다
2006    
2007 5 3 음력 3 17일에 母親 朴三善 향년 95세로 별세(1912 1 2  음력)
2008    

 

 

2009    
2010 2 한인 교회 안수 집사 임직
2011    
2012    
2013 2 한인 교회 장로 임직
2014 4 3 오클랜드 한인교회 조충만 목사 임직
2015    
2016    
2017    
2018 4 30 NZ  한국  이태리  한국  NZ출국 그리고 귀국(10 2)

 

 

2019 12 한인 교회 장로 사임하여 은퇴
2020 2 29 오클랜드 한인교회 조충만 담임목사 사임. 전세계 코로나 Pandemic 대 유행
2021    
2022 7 31  3대 담임 목사 손기철 목사 임직식
2023    
2024    
2025    
2026    
2027    
2028    

 

 

 
사람은 낳아서 타지, 타국을 떠돌지만 죽어서 고향에 묻히고 싶다 하듯 혹은 고향 쪽을 바라보며 눈 감는다 하지 않았던가? 그러하니 살아 생전 고향, 고국에 자주 있고 싶다는 욕망은 평생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도 어머님이 늦게까지 생존하셨기에 2003년 체류 기간이 길게 잡혔고, 2007년 돌아가셨다 하여도 형님, 누님, 조카들이 있어 고향의 그리움은 지워지지 않았으니 지금도 그러한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형제 중 큰 형님이 1995년 경에 돌아가셔 현존으로 큰형수님, 형님 2, 누님 3분이 계신다. 물론 첫째, 둘째, 두 분의 매형도 돌아가셨지만.
 
큰 형님으로 조카는 남조카 1에 여조카 5. 그들에 또 자녀들 5 이상? +
큰 누님으로 조카는 남조카 2에 여조카 2. 그들에 자녀들 5 이상? +
둘 째 형님으로 조카는 남조카 1에 여조카 2, 그들에 자녀들 5 이상?
둘 째 누님으로 조카는 남조카 2에 여조카 4, 그들에 자녀들 17 이상? +
셋 째 누님으로 조카는 남조카 1에 여조카 1, 그들에 자녀들 2 이상
셋 째 형님으로 조카는 남조카 2, 그들에 자녀들 3
 
이러한데 ?의 표시는 특별히 그 조카를 자주 만나지 못하고, 또 형님, 누님께 이들의 이야기를 더 질문하지 않은 관계로 위에 적어 놓은 기호 ?는 추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의  + 는 또 결혼하여 자녀(나에게는 중손 뻘이 되는)
 
父親 南熙性과母親 朴三善 휘하에는 자녀 7, 손자,녀에 20, 증손자,녀에 37명 등 총 64명이 나온다. 그 가계도를 그려도 큰 지면이 필요하겠다.
 

 

 

 

 

족보 : 昌均 & 자녀

25帶 世孫이 된다.

 

南氏 본관(本貫) 고성(固城)

南匡甫

 

 行列이란? 같은 혈족 사이에 세계(世界)를 분명히 하기 위한 문중 율법(門中)이며, 이 름자 중에 한 글자를 공통적으로 사용하여, 같은 혈족. 같은 세대임을 나타내는 돌림자이다.

 

• 세()와 대()의 구분

 

시조(始祖) 1세로 하여, 아래로 내려 갈 경우에는 “”라 하고, 자신을 빼고 아버지를 1로하여, 올라가며 계산하는 것을 “”라 한다. 그러므로, 자기의 조상을 “몇대조 할아 버지”라고 하고, 자신은 시조 또는 어느 조상으로 부터는 “몇世孫 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고조 할아버지는 <나의 4대조 할아버지>가 되고, 나는 <고조 할아버지의 5세 손>이 되는 것이다.

 

족보 : 부친 熙性 & 큰 아버지와 자녀

족보 : 부친 熙性 & 큰 아버지와 자녀

족보 : 昌均 & 자녀 그리고 형님네 자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