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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살린 세 나라: 대만 일본 西獨

淸山에 2015. 11. 28. 13:37







대한민국이 살린 세 나라: 대만 일본 西獨

한국전으로 한국인과 미군 등이 피를 흘리는 사이 세 나라가 살아 났다.

趙甲濟  

  


 
한국전쟁 시기 일본이 경제부흥을 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인데,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나 연구서를 찾기 어렵던 차에 1985년에 나온 세 권짜리 맥아더 傳記(THE YEARS OF MacArthur)를 읽었다. D. 클레이턴 제임스가 쓰고 휴턴 미필린 출판사에서 낸 大作의 제3권은 '승리와 재앙'이란 제목인데, 여기서 흥미로운 통계를 발견하였다.


'일본에 끼친 한국전쟁의 영향'이란 소제목 하의 글에서 著者는 한국전쟁 시기, 일본은 유엔군의 병기창 역할을 하였다고 요약하였다. 전쟁이 나기 전, 1950년 봄 일본에 주둔한 미군은 6만 명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미국은 그해 9월까지 한국과 일본에 25만 명의 미군을 배치하였다. 1953년 1월까지 유엔군(육해공군)은 35만의 미군, 기타 연합군 4만4천, 한국군 37만 여 명 등 모두 76만8000명에 달하였다.


일본은 한국에 투입되는 유엔군의 훈련장이 되었다. 1952년까지 일본엔 2500개소의 각종 미군 시설이 들어섰다. 육해공군을 위한 훈련장, 특수전 학교, 사격장, 병원, 휴양소, 항만시설, 무기고, 공병 시설 등등. 건설 붐이 불었다. 미국의 기술과 자금이 일본의 노동력과 결합되었다. 駐日미국 대사 로버트 머피는 '놀라운 속도로 일본 열도는 거대한 보급창고로 변하였다. 이게 없었더라면 한국전쟁은 수행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고 했다.


1947년에 맥아더는 先見之明이 있는 조치를 취하였다. 작전 명은 롤업(Roll-up). 태평양 전쟁 때 중앙 및 남서 태평양 전선에 버려진 무기 및 장비들을 회수하여 수리하는 일이었다. 한국전이 나자 이 무기들이 전선에 투입되었다. 무기 및 장비들을 수리하는 일감이 일본 회사에 넘어갔다. 한국전 초기 넉 달 동안 일본 회사 등은 48만9000정의 小火器, 1418문의 대포, 3만4316개의 통제장비, 743대의 전투 차량, 1만5000대의 일반 차량을 출고시켰다.


전쟁에는 군수분야에 많은 인력이 투입된다. 맥아더 사령관은 이런 일을 주로 일본 인력에 맡겼다. 일본 人力을 사용할 수 없었더라면 미군은 약 20만~25만 명의 추가 병력이 필요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일본의 해상보안청 소속 기뢰제거 기술자 등은 유엔군이 북진할 때 한국전선에 투입되었다. 일본의 해운 철도 기술자들도 유엔군 소속으로 한국에서 활동하였다.


맥아더는 한국전이 시작되자 일본주둔 군수사령부를 창설하였다. 한국전선에 필요한 물자를 일본에서 조달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회사와 계약한 구매 액수는, 1950년에 1억8400만 달러, 1952년엔 8억2400만 달러, 1953년엔 8억600만 달러에 이르렀다. 당시 일본의 수출액은 10억 달러 수준이었다.


미국은 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다른 연합군을 위한 무기 및 장비뿐 아니라 한국인을 위한 구호물자도 일본에서 구매하였다. 이런 자금은 미국 정부와 원조기관에서 나왔다. 특별자금으로 구매된 물자의 액수는 1950~55년 사이 17억 달러에 달하였다(편집자 注: 군수사령부가 구매한 액수와 중복되는 부분이 있는지는 불명).


토요다 자동차 회사를 예로 든다. 이 회사는 1950년 6월엔 304대의 트럭을 생산하였다. 한국전이 터지고 군수용 주문이 쇄도하여 1951년 3월이 되자 매달 1500대씩 만들었다. 토요다의 가미야 소타로 사장은 이렇게 말하였다.


'미군의 주문은 우리 회사의 구세주였다. 기쁘기도 했지만 죄 짓는 기분이 들기도 하였다. 다른 나라의 전쟁을 즐거워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미군의 특별자금 구매액의 약 10%는 일본이 생산하는 무기, 탄약, 장비를 사는 데 쓰였다. 이는 일본 무기 산업의 부활을 촉진하였다. 극동사령부는 태평양 전쟁에 동원되었던 약1000개의 군수제조업체를 폐쇄시켰는데, 한국전이 일어나자 생산을 재개하도록 하였다. 1950년 8월 미국 합참은 '만약 세계 전쟁이 일어난다면 일본의 군수산업 능력을 미국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정하였다.


전쟁물자 생산 이외의 분야에서도 일본은 돈을 많이 벌었다. 일본으로 온 유엔군 소속의 군인들이 다양한 목적으로 돈을 썼다. 이들이 개인적 목적으로 쓴 돈은 하루 평균 100만 달러에 이르기도 하였다. 요코스카엔 일본 매춘부가 1500명으로 늘었다.


한국전이 시작되었을 때 일본의 제조업 생산량은 戰前(1934~36)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전쟁이 발발한 이후 제조업이 급속도로 회복되었다. 1950년 말엔 戰前의 94%, 51년엔 128%, 1953년엔 171%로 향상되었다. 제조업 종사자들의 임금 지수도 1950년 59.5(1960년을 100으로 보았을 때), 51년에 65.6, 52년에 73.5, 53년에 77.4로 급등하였다.


수출액은 1949년의 5억1000만 달러에서 1951년엔 14억 달러로 늘었다. 수입은 1949년의 9억500만 달러에서 1952년엔 20억 달러로 증가하였다. 도쿄 증권시장도 활성화되었다. 1950년 6월의 일간 거래액은 9470만 엔이었다. 1953년 2월엔 24억 엔으로 급증하였다. 1951년 초 요시다 수상은 의회에서 연설하면서 '최근 일본은 경제 회복과 부흥을 향하여 괄목할 만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한국전과 트루먼 덕분에 살아난 대만


1950년 6월24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週末을 고향에서 보내고 있었다. 토요일인 이날 오후 그는 비행기 편으로 워싱턴에서 고향인 미조리주 인디펜던스로 날아왔다. 밤 9시 잠자리에 들려는 대통령을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매릴랜드에 있는 집에서 걸어온 전화였다. 


 “각하, 매우 심각한 소식입니다. 북한군이 남한을 전면적으로 공격했습니다. 무초 대사의 보고에 따르면 그 전에 있었던 총격전과는 다른 본격적인 공격입니다. 유엔 사무총장에게 안보리 소집을 요청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즉시 워싱턴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애치슨은 말렸다.
 “야간 비행이 위험하고 국민들을 놀라게 할 필요도 없으며 이미 해야 할 조치는 취했습니다. 잠이 오시면 푹 주무세요”


 일설에 의하면 이때 트루먼 대통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개자식들을 저지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결정을 하는 데 1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곁에 있었던 딸 마가렛의 회고에 의하면 트루먼은 전화를 받고 돌아오면서 매우 격앙되고 걱정스런 표정이었다고 한다. 3차대전의 서곡이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다음 날 트루먼은 일찍 일어나 동생 비비안의 목장에 갔다. 그는 비비안의 다섯 손자 손녀들과 악수를 하고는 우유 짜는 기계와 새로 산 말을 살펴보았다. 그날 아침 신문과 방송에선 남침 소식이 보도되고 있었으나 트루먼은 한국사태에 대해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정오 직전 무초 대사가 보낸 전보가 그에게 건네졌다. 


 <공격의 양상으로 보아 한국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임이 분명해졌다>


 12시30분 애치슨 장관이 다시 대통령에게 전화를 했다. 통화를 끝낸 트루먼 대통령은 보좌관들에게 “즉시 워싱턴으로 돌아갈 것이니 오후 2시에서 2시15분 사이에 캔사스 시티 공항으로 집합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했다.
 
 트루먼이 결단하고 애치슨이 이끌다

 워싱턴으로 날아가는 전용기안에서 그는 워싱턴으로 전화를 걸게 하여 저녁 식사를 겸한 고위 대책회의 소집을 지시했다. 약3시간의 비행시간중 트루먼 대통령은 깊은 생각에 들어갔다.  <나는 과거 민주국가들이 이런 공격을 저지하지 않아 침략자들이 그런 짓을 계속하도록 방치했던 일들을 생각했다.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자유세계로부터 아무런 저지를 받지 않고서 한국을 침략할 수 있도록 허용된다면 강한 공산국가를 이웃으로 두고 있는 작은 나라들은 협박과 공세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 이번 공격을 방치한다면 3차대전이 일어날 것이다. 비슷한 사건들이 2차대전을 불렀듯이>


 저녁에 전용기 인디펜던스號가 워싱턴의 국립공항에 착륙했다. 애치슨 국무장관,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들이 나중 만중 나와 있었다. 리무진을 타고 영빈관인 블레어 하우스로 향하는 車中에서 트루먼은 말했다. 


 “하나님에게 맹세코 그 자들이 代價를 치르도록 해주겠어”


 블레어 하우tm에는 14명의 최고위급 인사들이 모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는 전쟁 이야기를 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식사가 끝나고 식탁이 정리된 뒤 회의가 시작되었다. 딘 애치슨 장관이 상황 보고를 했다. 대통령은 참석자 전원이 발언하도록 유도했다. 러스크 국무차관은 “5년간 한국에 주둔했던 미국으로서는 특별한 책임이 있다. 한반도가 공산화된다면 이는 일본의 심장을 겨누는 匕首(비수)가 될 것이다”고 했다. 


 브래들리 合參의장은 “공산당에 대해서 선을 그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소련은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우리를 시험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회의는 트루먼이 주도했다. 그의 결심이 회의 분위기를 압도했다. 트루먼은 브래들리의 말을 받아서 “선을 단호하게 그어야 한다”고 했다.  “북한군을 저지해야 한다. 소련은 도박을 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이 또 다른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싫어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한국을 공짜로 삼키려 한다”


셔먼 해군참모총장과 반덴버그 공군참모총장은 해공군만으로 남침을 저지할 수 있다면서 육군의 투입을 반대했다. 트루먼은 회고록에서 “아무도 미국이나 유엔이 물러서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 이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선 무슨 수든지 써야 한다는 분위기였다”고 했다. 이날 회의는 트루먼이 결단하고 애치슨이 이끄는 형국으로 진행되었다. 


 애치슨이 건의한 정책들을 트루먼이 승인했다. 도쿄의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최대한 빨리 한국측에 무기와 보급품을 제공할 것, 미 공군력의 엄호 아래 주한미국인을 철수시킬 것, 제7함대는 필리핀으로부터 대만 해협으로 전개하여 중국의 공격에 대비할 것 등. 


 이 결정으로 대만이 亡國 직전에 살아났다. 그 전에 미국은 대만을 군사적으로 보호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공개적으로 천명하였었다. 중공도 대만을 점령하기 위한 상륙전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50년 중에 대만이 중공에 넘어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美7함대를 대만 해협에 배치, 중공군의 침략을 막기로 결정함으로써 오늘날의 번영하는 대만의 생존이 가능하였다.

 





韓國戰이 西獨을 살렸다.


1949년 9월 서독 수상으로 취임한 콘라드 아데나워는 언론 인터뷰를 통하여 서방의 방어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드러냈다. 아데나워의 논리는 간단하였다. 서독은 서방국가들이 자신들을 지켜주기를 바란다. 서독인들이 自國 방어에 기여함이 없이 서방국가, 특히 미국이 그런 西獨을 위하여 自國 병사들을 희생시키도록 요청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었다. 서독 스스로 방위력을 제공하여야 서독이 안전해진다. 소련의 위협에 노출된 西歐의 형편상 서독의 재무장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국내외의 비판이 많았다. 20세기에 두 차례의 세계전쟁을 일으켜 수천 만 명을 죽음으로 몰고간 戰犯국가가 또 다시 군사력을 건설한다는 것은 많은 유럽인드에겐 惡夢이었다. 물론 아데나워는 서독 국군의 부활이 아니라 유럽의 공동방위 기구에 소속된 武力의 건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1950년 5월9일 프랑스의 기획청 장관 장 모네는 외무장관인 로베르 슈만을 통하여 역사적 제안을 하였다. '슈만 플랜'으로 유명해진 이 제안은 프랑스와 독일의 석탄과 철강 생산을 兩國을 포함한 유럽 여러 나라의 공동 관리 기구 아래 두자는 것이었다. 이는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수적인 철강과 석탄을 공동관리함으로써 전쟁 준비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계산에 기초한 제안이었다. 이 제안은 오늘의 유럽공동체의 母胎가 된다. 즉 유럽 연방화의 첫 걸음이었다.


아데나워는 이 제안을 즉각 수락하였다. 그는 슈만 장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제안은 불신으로 얼어붙은 이웃 관계를 새로운 건설적인 협조관계로 이끌 것이다>고 평가하였다. 1950년 6월20일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설립조약 작성 교섭이 시작되었다. 그 5일 뒤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한국전은 서독의 재무장과 NATO 가입의 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전쟁으로 미군 병력이 한국으로 집중되면서 유럽은 막강한 소련군의 위협에 노출되었다. 독일의 재무장을 두려워하던 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들도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이 상황을 이용한 이가 아데나워였다.


그해 8월17일 아데나워는 서독지역을 점령, 관리하고 있던 연합국(美英佛)의 고등판무관들에게 서유럽의 방어력 강화를 요청함과 동시에 서독의 경찰력으로서 15만 명의 방위대 창설을 신청하였다. 그 8월29일엔 뉴욕에서 열릴 예정인 미영불 외무장관 회담에 즈음하여 두 장의 각서를 작성, 제출하였다. 요지는 국제적인 서유럽군이 창설된다면 서독은 군대를 제공할 용의가 있으며 그런 공헌의 代價로서 서독에 평등한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미국도 서독의 재무장을 지지하게 되었다. 1950년 뉴욕에서 열린 미영불 외무장관 회담에서 딘 에치슨 미 국무장관은 서독의 재무장과 NATO 가입을 요구하였다. 서독의 재무장에 가장 신경을 쓰고 있던 프랑스의 르네 팔레방 외무장관은 이에 '통일유럽기구에 속한 구주연합군 창설'을 제안하였다. 서독군의 독자성을 제약하고 유럽 공동체의 관리를 받도록 하겠다는 계산이었다. 1950년 12월 브뤼셀에서 열린 NATO 이사회는 '스보포드 타협안'을 채택, 유럽연합군 창설을 계속 검토하는 한편으로 NATO를 군사동맹체로 강화하고, 서독의 재무장을 지체 없이 추진하기로 결의하였다.


서독 안에선 재무장에 반대하는 여론과 운동이 격화되어 아데나워의 지지율은 한때 24%까지 떨어졌다. 지방선거에서 집권 기독교민주당은 잇따라 패배하였다. 그러나 아데나워는 당당하게 맞섰다.


'스스로 안보를 책임지려 하지 않고 미국의 부모들에게 자식들을 희생시켜달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주권회복을 위하여서도 재무장을 불가피하다.'  


아데나워는 국방부 설립을 위한 준비 기구를 발족시키고 노동조합의 협조를 얻는 한편 主權회복을 위한 연합군과의 협상을 진행시켜 반대론을 눌렀다. 1952년 5월 본에서 '서방 측 3개국과 독일연방공화국의 관계에 대한 조약'이 조인됨으로써 서독은 주권을 회복, 국제사회에 복귀하고 NATO의 일원으로서 냉전 시대 서방세계 방어의 한 기둥이 된다. 서독의 재무장과 NATO 가입으로 이 기구는 강력한 유럽 군사동맹 기구로 발전할 수 있었다. 한국전은 대만을 살리고, 일본을 경제부흥시켰으며, 서독의 재무장을 독려, 소련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공산진영과 맞서는 자유진영의 방어망을 완성시킨 것이다. 韓美軍을 비롯한 유엔군이 흘린 피는 자유를 지키고 확산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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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에는 이전의 적대국이 협조와 지원과 동맹국이 되는가하면 끈끈한 동맹의 의지가 바뀌어 적대국이 되는 사례를 수 없이 보았다.
아울러 어느 나라로 인하여 이득을 보았다면 그 이득도 나눠 줘야 하거늘 일본의 대일청구권 자금과 서독의 긴요한 차관으로 60년대 한국의 5개년 경제계획이 성과를 얻은 것에 오늘날의 대한민국 경제 대국 위상을 만들었다면 또 한편으로 월남전쟁으로 인한 한국의 경제개발 자원 또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인과관계가 성립되니 "대한민국이 살린 세 나라: 대만 일본 西獨"의 글을 읽으면서 또 새롭게 흘러 가는 세계사를 지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