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제2사단장 카이저 소장 한편 미 제2사단의 오른쪽 전방이 위기상황에 몰리자 미 제9군단장은 미 제2사단장에게 군우리에서 순천으로 철수하여 성천 일대를 방어 중인 미 제1기병사단과 연결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령에 따라 미 제23연대는 개천에서 군우리로 철수하는 부대들을 엄호하기 위해 제3대대와 전차 1개 소대를 군우리 북쪽 3㎞ 지점에 배치하고, 주력은 군우리를 감제할 수 있는 개천강과 조통강(梧補江) 사이의 마장리로 철수시켰다. 그리고 국군 제3연대와 미 제38연대 1대대는 철수 중인 터키여단과 미 제38연대 제2·3대대를 엄호하기 위해 군우리 동쪽에 재배치되었다. 이날 군우리 북쪽에서 적과 접촉을 유지하고 있던 미 제23연대 제3대대와 전차소대는 군우리 동쪽에서 철수 중인 미 제38연대와 터키여단이 철수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 네 차례에 걸쳐 강력한 역습을 시도하였다. 철수제대의 마지막 부대인 국군 제3연대 주력이 군우리를 경유하여 안주 도로로 접어들자 북쪽에서 엄호하던 부대도 철수하였다. 이로써 미 제2사단은 청천강 하류 삼각주 지대의 전술적 요지인 군우리를 적의 수중에 넘겨주고, 이번 철수작전에서 최대의 격전이 예상되는 적의 차단진지를 돌파하기 위해 철수준비를 서둘렀다. 사단 철수로를 차단한 중공군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는 중공군 제38군의 제113사단은 28일 아침 군우리에서 순천에 이르는 삼소리와 용원리를 차단하였다. 야간에만 행군하던 중공군은 이 철수로를 차단하기 위해 국군으로 위장한 후 주간에 강행군을 하여 삼소리를 먼저 점령하였고, 제337연대는 삼소리 서북쪽의 용원리를 점령하였다. 이런 사실은 미 제2사단의 철수에 앞서 28일 미 제1기병사단 주력부대와 합류하기 위해 군우리에서 순천으로 이동한 미 제5기병연대와 전차소대에 의해 확인되었다. 제5기병연대는 삼소리 부근의 고지를 선점하고 있는 중공군과 밤늦게까지 치열한 격전을 펼친 후 순천으로 철수하였고, 또 미 제72전차대대 1개 소대는 영연방 제27여단을 지원하기 위해 군우리에서 순천으로 이동하던 중 2개 중대 규모의 적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았으나 장갑차의 보호를 받아 무사히 순천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는 중공군들 또 미 제2사단이 29일 05:00시에 청룡리의 초등학교 건물에 전방지휘소를 개설한 직후 순천에서 군우리로 보급품을 수송하던 터키여단의 수송대가“이 도로로 이동 중 적의 기습을 받아 겨우 탈출하였다”는 보고를 해 옴으로써 중공군이 도로를 차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에 미 제2사단장은 사단 수색중대에 용원역 남쪽 6㎞에 위치한 고개 부근을 점령 중인 적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수색중대는 제503야포대대의 화력지원을 받아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강력한 적의 저항에 밀려 정오 무렵 공격의 기세가 꺾였다. 이에 사단장은 제38연대의 1개 중대와 전차 1개 소대로 수색중대를 증원하였다. 이들 공격부대는 고개를 돌파하기 위해 저녁 무렵까지 격전을 벌였으나 차단진지 돌파에 실패하고 복귀하였다. 이 공격이 실패하기는 하였으나 적이 도로상에 장애물을 설치하지 않고 단지 화력으로만 도로를 차단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미 제9군단장은 미 제2사단이 퇴로를 차단하고 있는 중공군을 공격하는 동안 미 제2사단의 철수를 지원하기 위해 영연방 제27여단의 미들색스 대대를 격전이 펼쳐지고 있는 갈고개 남쪽 11㎞ 지점으로 이동시켰다. 미들색스 대대는 전차 1개 소대와 105㎜ 곡사포 대대를 지원받아 갈고개를 공격하였으나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공격이 저지되어 남쪽의 용원리로 철수하였다. 어둠이 깊어 가면서 사단사령부 지역에도 적의 박격포, 자동화기, 소총사격이 가해지자 사단장은 사단예비로 집결 대기 중인 미 제9연대에 30일 08:00시 적의 차단선을 돌파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사단은 미 제9연대를 선두로 사단본부 - 포병 및 지원부대 - 터키여단 - 미 제38연대 - 국군 제3연대순으로 철수하고, 미 제23연대를 후위로 하는 철수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무렵 중공군 제38군도 삼소리·용원리 일대를 차단하고 있는 제113사단을 증원하기 위해 30일 새벽, 주력부대인 제112사단과 제114사단을 제113사단이 점령한 차단선 북쪽의 용흥리·쌍룡리 일대에 투입하였다. 이처럼 중공군의 차단선이 더욱 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이를 간파하지 못하였다. 죽음의 계곡에서 태형을 당하다 공격의 선봉에 나선 미 제9연대 2개 대대는 1개 전차소대를 앞세우고 30일 03:30분 집결지를 출발하여 06:30분에 사단사령부가 위치한 청룡참에서 약 1.5㎞ 남쪽으로 내려갔을 때 적의 집중사격을 받았다. 연대장은 즉시 차량제대를 적의 포병 사정거리 밖으로 철수시키고, 제2대대는 도로 서쪽의 고지를, 제3대대는 우측의 개활지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공격제대는 얼마 되지 않아 자동화기와 박격포로 무장한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수세에 몰렸고, 전차소대만이 적의 화망을 뚫고 남쪽의 용원리 부근에 저지진지를 구축한 영국군과 합류하였다. 사단은 09:00시경 이 위기를 타개하고자 국군 제3연대를 급파하였다. 정진(鄭震) 중령이 지휘한 국군 제3연대는 전방으로 이동하여 공격이 돈좌된 미 제9연대 제2대대 진지를 인수하였다. 연대는 10:30분에 공군의 근접항공지원과 미 제72전차대대 C중대의 화력지원을 받으며 운용리(청룡참 서쪽 마을) 남쪽의 중공군 진지를 향해 돌진하였다. 그 결과 20여 명의 중공군이 저항하는 첫 능선을 단숨에 돌파하고, 두 번째 능선으로 치달아 고지 정상의 점령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이때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가 일어났다. 도로를 따라 남진(南進)하고 있던 제72전차대대 소속의 전차가 공격 중인 국군을 중공군으로 오인, 전차포와 중기관총을 난사해 2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연대는 일단 후사면으로 철수해 재편성한 후 즉시 재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사격이 더욱 강화된 데다 대응사격을 개시한 미 전차가 또 오인사격을 하는 바람에 연대의 공격이 다시 돈좌되었다. 결국 연대의 공격은 불명예스럽게도 2차에 걸친 미 전차의 오인 사격으로 실패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