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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우리의 비극 - 미 제2사단, 인디언 태형을 당하다.

淸山에 2015. 6. 26. 16:28





군우리의 비극

미 제2사단, 인디언 태형을 당하다.

국방부   
  
*국방부 6.25 전쟁 60주년 기념사업단 자료

미 제 2사단, 인디언 태형을 당하다 (군우리 철수작전)

 

이 전투는 중공군 제2차 공세 시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방어선인 숙천-순천-성천-양덕선으로 철수할 때 엄호부대였던 미 제2사단이 군우리에서 순천으로 철수하면서 중공군 제38군 제113사단과 치른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미 제2사단은 중공군에게 퇴로가 차단된 가운데 11월 29일부터 3일간 철수하면서 약 80%의 병력을 잃는 대참사를 당하였다.

  

인디언 헤드(Indian Head) 부대와 인디언 태형

미 제2사단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7년 창설되어 제1·2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투에 참가한 전통 있는 부대이다. 6·25전쟁에는 8월 초 미 본토에서 증원되어 낙동강전선에 투입되었다.

미 제2사단은 부대마크의 심벌로 미국의 원주민인 인디언의 얼굴을 형상화해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부대의 별명이 인디언 헤드(Indian Head)였다.

인디언 태형(笞刑, Gauntlet)은 인디언이 적군이나 범법자를 처벌할 때, 두 줄로 늘어선 인디언 전사 사이로 이들을 들여보내고, 행렬을 빠져나갈 때까지 흠씬 두들겨 패는 형벌의 일종이다.

미 제2사단의 군우리 철수작전을 두고 역사가들은 “인디언 헤드 사단이 중공군에게 인디언 태형을 당하였다”고 평하고 있다. 중공군이 장악한 후방의 철수로를 통과하면서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을 빗대어 하는 얘기이다.

 

 




미 제2사단 부대마크



중공군 2차 공세로 크리스마스 공세는 저지되고…

유엔군의 11월 24일 크리스마스 공세는 11월 25일 중공군의 2차 공세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 미 제8군의 우익인 국군 제2군단은 묘향산맥에서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였고, 26일 덕천이 피탈되었다. 미 제8군 전체가 퇴로를 차단당할 위험에 직면하였다.

 

미 제8군은 28일 청천강 이남으로 철수를 지시하였다가 적의 계속적인 압력으로 29일 평양방어선인 숙천 - 순천 - 양덕 선으로 철수를 지시하였다.

 

군우리에서 희천 방향으로 공격하던 미 제2사단은 국군 제3연대와 터키여단을 배속받아 군우리 일대에서 적을 저지하고 있었다.

 

국군 제7사단 제3연대는 묘향산을 공격하던 중 중공군의 역습을 받고 철수할 때 퇴로가 차단되자 인접한 미 제2사단 지역으로 우회하여 철수하던 중 11월 26일 국군 제2군단의 명령에 의거하여 미 제2사단에 배속되었다.

 

미 제2사단장은 28일 청천강 계곡으로 진출한 중공군과 혈전을 벌여 많은 피해를 입은 제9연대를 군우리 남쪽으로 철수시켜 재편성을 하도록 하고, 미 제23연대를 구장동-군우리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북원에, 국군 제3연대와 미 제38연대를 사단 작전지역을 감제할 수 있는 비호산 남쪽에 배치하였다. 이때 사단의 좌측(청천강 서쪽)에는 미 제25사단이, 오른쪽(와원)에는 터키여단이 각각 배치되어 있었다.

  


제2사단의 군우리 철수작전 상황도

  

터키여단이 와원·신립리에 이어 봉명리에서 중공군 제38군과 결전을 펼친 29일, 중공군 제40군은 국군 제3연대와 미 제23연대를, 중공군 제38군은 미 제38연대를 공격함으로써 군우리 전투가 시작되었다.

 

터키여단을 공격하여 사기가 오른 중공군 제38군은 미 제38연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미 제38연대는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터키여단이 배치된 봉명리로 철수하였고, 이때 미처 철수하지 못한 터키여단의 잔여부대와 미 제38연대 제2·3대대가 혼재되어 유일한 철수로인 군우리-개천 도로는 대혼잡을 이루었다. 이때 중공군 제38군은 이들의 철수를 저지하기 위해 일부 병력을 개천강 남쪽으로 우회 침투시켜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132고지를 점령하였다. 사단이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자 미 제5공군은 야음과 악천후 등 최악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B-26 폭격기를 출격시켜 중공군을 공격하였고, 철수제대는 이 틈을 이용하여 개천을 빠져 나왔다.

 

 



미 제2사단장 카이저 소장

 

한편 미 제2사단의 오른쪽 전방이 위기상황에 몰리자 미 제9군단장은 미 제2사단장에게 군우리에서 순천으로 철수하여 성천 일대를 방어 중인 미 제1기병사단과 연결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령에 따라 미 제23연대는 개천에서 군우리로 철수하는 부대들을 엄호하기 위해 제3대대와 전차 1개 소대를 군우리 북쪽 3㎞ 지점에 배치하고, 주력은 군우리를 감제할 수 있는 개천강과 조통강(梧補江) 사이의 마장리로 철수시켰다. 그리고 국군 제3연대와 미 제38연대 1대대는 철수 중인 터키여단과 미 제38연대 제2·3대대를 엄호하기 위해 군우리 동쪽에 재배치되었다.

 

이날 군우리 북쪽에서 적과 접촉을 유지하고 있던 미 제23연대 제3대대와 전차소대는 군우리 동쪽에서 철수 중인 미 제38연대와 터키여단이 철수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 네 차례에 걸쳐 강력한 역습을 시도하였다. 철수제대의 마지막 부대인 국군 제3연대 주력이 군우리를 경유하여 안주 도로로 접어들자 북쪽에서 엄호하던 부대도 철수하였다.

 

이로써 미 제2사단은 청천강 하류 삼각주 지대의 전술적 요지인 군우리를 적의 수중에 넘겨주고, 이번 철수작전에서 최대의 격전이 예상되는 적의 차단진지를 돌파하기 위해 철수준비를 서둘렀다.

 

사단 철수로를 차단한 중공군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는 중공군 제38군의 제113사단은 28일 아침 군우리에서 순천에 이르는 삼소리와 용원리를 차단하였다. 야간에만 행군하던 중공군은 이 철수로를 차단하기 위해 국군으로 위장한 후 주간에 강행군을 하여 삼소리를 먼저 점령하였고, 제337연대는 삼소리 서북쪽의 용원리를 점령하였다.

 

이런 사실은 미 제2사단의 철수에 앞서 28일 미 제1기병사단 주력부대와 합류하기 위해 군우리에서 순천으로 이동한 미 제5기병연대와 전차소대에 의해 확인되었다.

 

제5기병연대는 삼소리 부근의 고지를 선점하고 있는 중공군과 밤늦게까지 치열한 격전을 펼친 후 순천으로 철수하였고, 또 미 제72전차대대 1개 소대는 영연방 제27여단을 지원하기 위해 군우리에서 순천으로 이동하던 중 2개 중대 규모의 적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았으나 장갑차의 보호를 받아 무사히 순천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는 중공군들

 

또 미 제2사단이 29일 05:00시에 청룡리의 초등학교 건물에 전방지휘소를 개설한 직후 순천에서 군우리로 보급품을 수송하던 터키여단의 수송대가“이 도로로 이동 중 적의 기습을 받아 겨우 탈출하였다”는 보고를 해 옴으로써 중공군이 도로를 차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에 미 제2사단장은 사단 수색중대에 용원역 남쪽 6㎞에 위치한 고개 부근을 점령 중인 적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수색중대는 제503야포대대의 화력지원을 받아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강력한 적의 저항에 밀려 정오 무렵 공격의 기세가 꺾였다. 이에 사단장은 제38연대의 1개 중대와 전차 1개 소대로 수색중대를 증원하였다. 이들 공격부대는 고개를 돌파하기 위해 저녁 무렵까지 격전을 벌였으나 차단진지 돌파에 실패하고 복귀하였다. 이 공격이 실패하기는 하였으나 적이 도로상에 장애물을 설치하지 않고 단지 화력으로만 도로를 차단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미 제9군단장은 미 제2사단이 퇴로를 차단하고 있는 중공군을 공격하는 동안 미 제2사단의 철수를 지원하기 위해 영연방 제27여단의 미들색스 대대를 격전이 펼쳐지고 있는 갈고개 남쪽 11㎞ 지점으로 이동시켰다. 미들색스 대대는 전차 1개 소대와 105㎜ 곡사포 대대를 지원받아 갈고개를 공격하였으나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공격이 저지되어 남쪽의 용원리로 철수하였다.

 

어둠이 깊어 가면서 사단사령부 지역에도 적의 박격포, 자동화기, 소총사격이 가해지자 사단장은 사단예비로 집결 대기 중인 미 제9연대에 30일 08:00시 적의 차단선을 돌파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사단은 미 제9연대를 선두로 사단본부 - 포병 및 지원부대 - 터키여단 - 미 제38연대 - 국군 제3연대순으로 철수하고, 미 제23연대를 후위로 하는 철수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무렵 중공군 제38군도 삼소리·용원리 일대를 차단하고 있는 제113사단을 증원하기 위해 30일 새벽, 주력부대인 제112사단과 제114사단을 제113사단이 점령한 차단선 북쪽의 용흥리·쌍룡리 일대에 투입하였다. 이처럼 중공군의 차단선이 더욱 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이를 간파하지 못하였다.

 

죽음의 계곡에서 태형을 당하다

공격의 선봉에 나선 미 제9연대 2개 대대는 1개 전차소대를 앞세우고 30일 03:30분 집결지를 출발하여 06:30분에 사단사령부가 위치한 청룡참에서 약 1.5㎞ 남쪽으로 내려갔을 때 적의 집중사격을 받았다. 연대장은 즉시 차량제대를 적의 포병 사정거리 밖으로 철수시키고, 제2대대는 도로 서쪽의 고지를, 제3대대는 우측의 개활지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공격제대는 얼마 되지 않아 자동화기와 박격포로 무장한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수세에 몰렸고, 전차소대만이 적의 화망을 뚫고 남쪽의 용원리 부근에 저지진지를 구축한 영국군과 합류하였다. 사단은 09:00시경 이 위기를 타개하고자 국군 제3연대를 급파하였다.

 

정진(鄭震) 중령이 지휘한 국군 제3연대는 전방으로 이동하여 공격이 돈좌된 미 제9연대 제2대대 진지를 인수하였다. 연대는 10:30분에 공군의 근접항공지원과 미 제72전차대대 C중대의 화력지원을 받으며 운용리(청룡참 서쪽 마을) 남쪽의 중공군 진지를 향해 돌진하였다. 그 결과 20여 명의 중공군이 저항하는 첫 능선을 단숨에 돌파하고, 두 번째 능선으로 치달아 고지 정상의 점령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이때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가 일어났다.

 

도로를 따라 남진(南進)하고 있던 제72전차대대 소속의 전차가 공격 중인 국군을 중공군으로 오인, 전차포와 중기관총을 난사해 2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연대는 일단 후사면으로 철수해 재편성한 후 즉시 재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사격이 더욱 강화된 데다 대응사격을 개시한 미 전차가 또 오인사격을 하는 바람에 연대의 공격이 다시 돈좌되었다. 결국 연대의 공격은 불명예스럽게도 2차에 걸친 미 전차의 오인 사격으로 실패하였다. 


 



국군 제3연대의 공격이 실패할 무렵 사단의 후방지역을 엄호하던 미 제23연대장은 사단장에게 “항공폭격으로 적의 접근을 차단하고는 있으나, 군우리 부근의 적이 계속 증강되고 또 일부는 사단의 동쪽 방향으로 이동 중”이라고 보고하였다. 이로써 군우리-순천 도로에 집결된 미 제2사단은 진퇴양난에 빠졌고, 시간이 경과할수록 포위망은 점점 압축되어 왔다.

 

사단의 좌측 미 제1군단 지역에 군우리-안주-숙천-순천으로 연결되는 군단의 주보급로가 있었으나, 사단이 이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개천강으로 진출한 적의 감제하에 신안주로 역행군을 해야 하였고, 게다가 이 도로는 미 제1군단을 추격하여 안주 일대로 진출한 적이 점령하고 있어 사용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사단장으로서는 적이 점령하고 있는 차단선을 강력하게 돌파하면서 순천으로 철수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사단장은 미 제9연대와 국군 제3연대가 이미 공격을 퍼부어서 적의 방어력이 다소 줄었고, 중화기도 배치되어 있지 않으며, 남쪽에서 영연방 제27여단의 미들색스 대대가 공격하고 있어 사단이 무난히 순천으로 철수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였다.

 

미 제2사단은 다시 미 제38연대를 선두로, 사단사령부 - 각종 포병부대 - 공병부대 - 미 제9연대 - 국군 제3연대 - 터키여단 순으로 철수제대를 편성하였다.

 

이때 사단장은 보병부대도 가용한 차량을 이용해 최대한 탑승하도록 하여 전 부대가 정지하지 말고 계속 남쪽으로 이동하라고 강조하였다.

 

사단은 정오가 조금 지나자 후위를 담당한 제23연대의 엄호하에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중공군은 사단의 철수를 저지하기 위해 인천참과 그 남쪽 갈고개 일대에 아군으로부터 노획한 M-39 수송차, M-4 전차, 2½톤 트럭 등으로 그 전날까지 없던 도로장애물을 새로 구축하고 저항하였다. 이로 인해 사단의 이동이 잠시 주춤하기도 하였으나 선두로 나선 9대의 전차제대는 이들을 도로 밖으로 밀어내고 14:00시경 남쪽의 영연방 제27여단 전초가 배치된 지역을 통과하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영연방 제27여단은 미 제9군단에 군우리-순천 도로가 개통되었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선두 전차를 후속하던 부대들의 상황은 아주 달랐다. 전차가 차단선을 통과하자 중공군 2개 연대는 미리 인천참 일대의 차단선에 배치한 30∼40정의 기관총과 10여 문의 박격포를 이용해 후속부대에 집중적인 사격을 가하였다. 이 포격으로 철수제대는‘일단 정지-공중폭격 간 대기-출발’을 반복하였다. 이처럼 미 제38연대는 총격전과 이동을 반복하면서 15:00시께 중공군의 저지선을 통과하였다.

 

이어서 제9연대가 갈고개 저지선을 통과할 무렵 양쪽 단애에서 중공군의 치열한 사격이 개시되었고, 도로에는 20여 대의 고장난 차량이 흩어져 있어 엄폐물이 되기는 하였으나 연대가 신속히 돌파하는 데는 장애물이 되었다. 이때 사단이 지원 요청한 항공기들이 적진을 강타하였고 도로상의 차량들이 불타기 시작하였다. 공중폭격으로 적의 사격이 주춤한 틈을 이용해 미 제9연대도 이동을 완료하였다.

 

죽음의 계곡’ 으로 불리는 갈고개 일대에서 중공군의 공격에 파괴된 미 제2사단의 화포와 차량들

 

뒤따르던 포병부대 중 미군이 보유한 유일한 8인치 곡사포인 제17야전포병대대는 포 1문을 포함해 약간의 손실을 입고 차단선을 돌파하였으나, 다른 포병들은 양 측방이 고지로 둘러싸인 갈고개 부근에서 증강된 중공군에 의해 다시 포위되었다. 적중에 고립된 포병부대들은 장비를 유기하고 병력만 철수하였다. 그러나 포병부대가 철수한 이후부터 적의 저항이 현저하게 감소되어 그 뒤를 후속한 국군 제3연대와 터키여단은 적의 경미한 저항을 격퇴하고 순천으로 철수하였다.

 

한편 후방을 엄호하던 제23연대장은 어둡기 전까지 후속부대의 철수가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하고 좌측 미 제1군단의 신안주-숙천 도로를 이용하여 철수할 것을 건의해 승인받았다. 연대장은 도로가 협소해 야포의 철수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철수 20분 전까지 보유한 전 탄약을 사격한 후 야포를 파괴하고 일몰 직전에 미 제1군단 엄호부대인 미 제5연대 진지를 경유하여 순천으로 이동하였다. 이로써 피로 얼룩진 미 제2사단의 군우리 철수작전은 일단락되었다.

 

군우리 철수작전은 적정을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애로(隘路)지역의 돌파를 강행하려다가 진퇴양난에 몰려 무려 3,000여 명의 사상자와 포로 및 실종자를 발생하게 하였고, 각종 화포와 기동장비를 유기하는 참극을 빚었다. 이후 미군들은 청룡참에서 갈고개까지 10㎞ 계곡을‘태형(笞刑)의 계곡’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12월 1일 집계에 의하면 11월 후반 미 제2사단의 전투로 인한 사상자는 4,940명이며, 이중 90%인 4,500명은 25일 이후 군우리전투에서 발생하였다. 이러한 손실은 사단 병력의 1/3에 해당되는 숫자이며, 이로 인해 사단은 편제상 인원에서 8,662명이 부족하게 되었다. 또한 장비의 손실도 인원 손실에 못지않게 컸다. 수백 대의 차량과 야포 114문, 제2전투공병대대의 공병장비 대부분, 예하부대가 휴대하고 있던 통신장비의 20∼40%가 손실되었다.

 


북으로 끌려가는 미군 포로들.

 







중공군에 포위되어 유기한 미제2사단의 무기와 장비들.


 

재정비 없이는 전투에 투입할 수 없을 정도로 피해를 입은 미 제2사단은 이후 부대를 정비하기 위해 전선을 떠나 영등포에서 재정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