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된 판단 착오
한편 갑천 東岸(동안)에서 논산-대전 도로를 방어하던 美 제19연대 2대대는 적의 격렬한 공격으로 진지를 고수하기가 곤란하게 되어, 대대 본부 가까이에도 포탄이 떨어지던 상황이었다. 그때 論山道(논산도)와 京釜道(경부도)에 적 전차가 진출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이것은 아침 일찍 뷰캠프 연대장이 3.5로켓포로써 파괴했던 전차였지만, 제2대대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적이 후방에 진출한 것으로 판단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제2대대(19연대)도 제1대대(34연대)도 대전 동부 寶文山(보문산)으로 후퇴했다. 이 적전 이탈도 뷰챔프 연대장에게 보고되지 않았다. 그 무렵, 대전 시내에서는 전방부대의 철퇴를 알지 못한 딘 사단장과 뷰챔프 연대장이 함께 있던 병력을 독려하여 침입해 온 적 전차를 3.5인치 로켓포로 격파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압력은 점점 거세져 당초 계획대로 7월20일 밤 12시까지 대전을 방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딘 소장은 예정시간을 앞당겨 예하부대에 후퇴를 명했다.
한편 뷰챔프 연대장은 “대전 동쪽에서 적이 접근중” “錦山(금산) 방향으로부터 적 차량 북상중”이라는 보고를 받았지만, 그것들은 사단수색대와 제21연대이라고 오판, 포격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로써 미 제24사단은 북한군에 포위되고 말았다. 세천터널을 장악하지 못해 완패
북한군 제4사단은 우회작전을 통해 대전의 남쪽과 동쪽에 침투했다. 특히 동쪽으로 진출한 부대는 대전 동쪽 경부선의 細川(세천)터널을 점령하여 미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세천은 6·25 당시엔 옥천군 군북면 세천리였지만, 지금은 대전광역시 동구 세천동이다. 경부선의 세천터널은 원래 제21연대가 지키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제21연대는 착오에 의해서인지, 세천터널을 지키지 않고 세천터널(길이 500m) 동쪽 1.3km에 위치한 증약터널(길이 1km)을 지키고 있었다.
필자는 최근 세천터널과 증약터널 사이의 세천역을 두 번 답사했다. 이제 세천역은 물자만 가끔 하역되고, 승객은 승·하차를 하지 않는 기차역이다. 높은 울타리로 막은 세천역은 출입구를 큰 자물통으로 닫아걸고 있어 점잖게는 출입할 수 없었다. 졸자는 유격훈련을 하는 자세로 펜스 옆과 벼랑 사이의 틈을 헤쳐가며 세천역 구내로 들어갔다. 驛舍(역사) 안에 역 직원이 모두 철수한 상태였다. 이러는 사이에 증약터널을 빠져나온 기차가 휙 달려오더니 정차하지 않고 세천터널 속으로 화살처럼 들어박혔다.
고지대에 위치한 세천역에서는 북쪽으로 4번국도와 경부고속도로가 내려다보인다. 6·25 때는 우리나라에 고속도로 같은 것은 없었고, 국도라 해봐야 폭 10m의 非포장도로였다. 그래도 이것을 ‘신작로’ 또는 ‘1등도로’라 불렀다. 요즘 건설된 경부고속철도는 세천역에서 산 하나 넘은 서남쪽을 달린다. 이렇게 세천역 부근은 우리 역사에서도 가장 예민한 클리토리스(陰核)에 해당한다. 서기553년, 백제 중흥의 군주 聖王(성왕)이 신라군의 포로가 되어 참수당한 곳도 대전 동구의 食藏山(식장산)과 옥천읍 管山城(관산성) 사이의 골짜기인 ‘구진배루’, 지금의 37번국도상이었다. 성왕이 참수당한 후 관산성에 포진해 있던 성왕의 아들 扶餘昌(부여창·성왕 전사 후에 즉위한 威德王)은 匹馬單騎(필마단기)로 탈출했지만, 그가 지휘하던 백제·가야·왜국의 연합군 3만 명은 거의 모두 전사했다.
이로써 신라는 한반도에서 가장 경제력이 높은 한강·낙동강 유역, 둘 모두 차지하여 삼국통일의 지름길을 달릴 수 있었다. 대전전투에서도 이곳은 많은 사연을 남겼다. 대전전투 후 철수 시, 미 제24사단이 많은 손실을 입게 된 요인은 마달령 일대에 있는 세천터널과 그 북쪽을 지나는 4번국도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미 제21연대는 증약터널만 장악하고 그 서쪽의 세천터널에는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결국 大田에서 철수하던 병력들은 적의 세천터널 차단선을 돌파하지 못했고, 각 부대 및 개인별로 산악의 ‘길 없는 길’로 철수하게 되었다.
제21연대장은 사단의 철수로인 세천터널을 반드시 확보해야 했다. 병력이 부족하여 두 개의 터널을 모두 확보할 수 없었다면 당연히 대전에서 가까운 세천터널 쪽부터 먼저 확보해야 옳았다. 제21연대는 옥천-대전 가도(4번국도)에서 도로정찰을 실시하였는지, 또 정찰에 의해 적의 도로차단 기도가 드러날 경우 그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 두었는지, 지금으로서는 명확히 알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제1진지 점령시기를 놓쳤다는 이유만으로 제2진지에 눌러앉아 겨우 1km 남짓한 거리에서 빚어지고 있던 아군의 참극을 외면했다는 것은 군인으로서 용서받기 어려운 일이었다.
미 제24사단은 북한의 전력을 과소평가한 데다 일본 점령업무로 인해 실전훈련을 게을리 하여 전투력이 약화되어 있었던 만큼 전투 패배는 당연한 결과였다. 딘 장군의 실종
딘 장군은 7월20일 18시경 대전 시내 도로상에서 철수부대의 출발을 확인한 다음에 호위 차와 함께 沃川(옥천) 방향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앞장 섰던 호위차가 옥천방향 도로(4번국도) 들머리길을 지나쳐 錦山(금산) 방향인 17번국도로 잘못 들어서게 되었다. 17번 국도는 秋富(추부)에서 37번 국도와 만난다. 37번 국도는 최근에 聖王路(성왕로)로 명명되었다. 백제의 성왕은 관산성(지금의 옥천)으로 가기 위해 지금의 37번국도를 북상하다가 신라군의 매복작전에 걸려 斬首(참수)당했고, 딘 소장은 17번 국도로 남하했다가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
딘 사단장 일행이 5km쯤 남하하여 郎月里(낭월리·지금의 낭월洞) 부근에 이르렀을 때 금산 방향 도로가 적에 의해 차단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적의 습격을 받아 파괴된 차량과 부상병 몇 명을 만났다. 딘 장군은 부상병을 그의 전용차와 호위차에 실어 부관 클라크 중위가 인솔토록 하고, 자신은 남아 있는 병력을 수습하고 있는데, 때마침 그곳으로 온 반궤도 포차 1대에 나머지 병력을 실어 클라크 중위 일행을 뒤따랐다. 그들이 다시 1.5km쯤 남하했을 때 클라크 중위는 어깨에 적의 기관총을 맞아 부상했다.
어두워질 무렵, 이들은 도로 서쪽 고지에 이르렀다. 부상병들은 갈증을 호소했다. 사단장은 손수 수통을 들고 계곡으로 내려가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실신하고 말았다. 그 이튿날 새벽 3시가 넘도록 딘 사단장이 나타나지 않자 클라크 중위는 종일 그 부근 숲속에서 수색했지만, 딘 사단장을 찾지 못했다.
추락한 지 몇 시간 후 정신을 차린 딘 장군은 그 이튿날부터 벼 이삭을 씹으며 혼자 산야를 헤매었다. 그 뒤 딘 장군은 茂州郡(무주군) 赤裳面(적상면) 방이리 거주 박종구 씨 등의 도움을 받아 1개월을 더 산속을 헤매다가 鎭安(진안)까지 남하하였으나, 그가 도움을 청했던 한두규·최천봉(진안군 안천면 노성리)의 밀고로 完州郡(완주군) 상전면 운산리에서 적 자위대원 20명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날이 8월25일, 대전을 떠난 지 36일째 되는 날이었다. 당초 90kg이 넘던 그의 몸무게는 58kg으로 떨어져 있었다. 그는 3년의 포로생활을 마친 뒤인 1953년 9월4일에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딘 장군은 1981년 82세로 별세했다. 밀고한 두 한국인은 5달러에 해당하는 3000원 씩을 북한군으로부터 받았다고 한다. 수복 후 그들은 총살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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