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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긴 다리 설비 공중 투하, 중공군을 좌절시킨 미군의 보급[백선엽의 6·25 징비록-123]

淸山에 2015. 4. 17.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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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의 6·25 징비록-123]

끊긴 다리 설비 공중 투하, 중공군을 좌절시킨 미군의 보급
 백선엽

입력 : 2015.04.16 14:34 | 수정 : 2015.04.16 14:48

  


(15) 가장 추웠던 겨울


한계 드러낸 중공군


영하 40도에 두텁게 내려앉은 강설(降雪). 후퇴로는 모두 고지(高地)를 지나야 했던 까닭에 추위는 깊었고 지표를 뒤덮은 눈은 단단했다. 상대방과의 싸움에 앞서 이런 추위와 눈을 이겨야 했던 게 당시 미군과 중공군이 당면한 큰 과제였다. 그럼에도 서로 공방전은 모질게 이어졌다. 지형 때문에 생기는 애로(隘路)는 도처에 있었다. 협곡의 지형으로 길은 계속 좁아진 채 이어졌고 그 중간 어딘가에 미리 매복한 중공군이 나타날 경우 싸움은 여지없이 불붙었다. 고토리에서 황초령을 넘어서면 진흥리라는 곳이 있었다. 그 진흥리를 향해 후퇴하던 미군은 황초령 고개의 애로에서 다시 한 번 걸음을 멈춰야 했다.


미 1해병사단을 꺾기 위해 7개 사단을 동원한 중공군은 이미 황초령 일대에 매복한 상태였다. 미 1해병사단의 퇴로를 막아서기 위해 깊고 어두운 개마고원 지대를 줄곧 남하한 뒤 험준한 황초령 인근의 1081 고지에 다가서서 몸을 숨긴 상태였다. 따라서 미 해병사단은 이곳을 먼저 점령해야 했다.

  
 





	장진호 철수 작전 도중 고토리에서 숨진 동료 시신을 앞에 두고 미 해병이 기도를 올리고 있다.
장진호 철수 작전 도중 고토리에서 숨진 동료 시신을 앞에 두고

미 해병이 기도를 올리고 있다.   


고지를 탈환하지 못한다면 사단의 본대가 황초령을 넘을 때 막심한 인명피해를 감내해야 했기 때문이다. 먼저 이곳에 도착한 부대는 미 1해병사단 제 1연대 제1대대였다. 몇 차례의 공격을 시도해도 고지는 좀처럼 해병대의 수중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중공군 매복에도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날씨가 너무 추웠던 까닭이었을 테다.


영하 40도가 넘는 강추위에 충분한 동계 복장과 장비, 물자를 지니지 못한 채 매복을 하는 일은 사실 초인적인 인내력을 동반해야 했다. 중공군에게는 그런 강추위 속의 오랜 매복을 이겨낼 만한 물자와 장비가 부족했다. 소련에서 급히 만든 고무 운동화, 두터운 누비옷 정도가 중공군 각 장병에게 주어진 전부였다.


미숫가루 1주일 분량의 식량을 지녔기 때문에 이동은 재빨랐는지 몰라도 강추위 속에 몸을 보전할 만한 영양식은 꿈조차 꾸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런 부실한 복장과 장비, 매우 불량한 영양 상태로 며칠 동안 40도 이하로 내려가는 황초령과 개마고원의 추위를 이겨내며 매복을 견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점은 미 해병사단 본대가 도착하기 전 1081 고지를 점령해야 했던 1연대 1대대 해병대원들에게는 아주 다행이랄 수밖에 없었다. 강력한 화력을 동원해 몇 차례 공격을 벌이다 실패한 끝에 결국 1대대 해병대원들은 1081고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고토리에서 이동한 미 해병사단 본대가 황초령 초입에 발을 들여놓기 직전이었다고 한다.


800피트 상공서 던진 교량




기록에 따르면 황초령 일대에 매복했던 중공군의 상당수가 꽁꽁 얼어붙은 시체로 그냥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고 한다. 설령 얼어 죽지 않았더라도 대부분의 중공군 장병은 오랜 이동과 긴 매복, 밤이면 영하 40도 이하로 내려가는 강추위 속에서 거의 전의(戰意)를 상실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개 너머 남쪽의 진흥리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다른 관문이 또 버티고 있었다.


수문교라고 하는 다리였다. 이곳은 원산으로 상륙해 장진호를 향하던 미군이 넘어선 뒤 끊어진 상태였다. 협곡에 놓인 다리여서 장비와 물자를 끌고 이동하는 미 해병대원에게는 달리 우회로가 없어 반드시 지나야 했던 곳이다.

 


	고토리에서 진흥리로 향하는 중간 길목에 있던 수문교. 중공군의 폭파로 끊겼던 다리다.

고토리에서 진흥리로 향하는 중간 길목에 있던 수문교. 중공군의 폭파로 끊겼던 다리다. 


미 1해병사단이 보여준 1950년 12월 크리스마스 공세 때의 장진호 지역 전투에서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며, 아울러 현대전의 전쟁 양상 중 핵심 개념을 보여주는 장면이 미 해병대원들이 이 끊어진 다리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과정에서 등장한다. 중공군은 이 수문교를 폭파하는 데 일단 성공했다. 미 1해병사단의 후퇴로를 절단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고토리 남쪽 6㎞ 지점에 있는 다리의 이름은 수문교. 전장 450m 구간 중 일부를 중공군이 끊는 바람에 미 해병사단은 어떻게 해서든지 다리를 복구하는 데 힘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재가 있을 턱이 없었다. 급한 후퇴의 과정에서 다리 복구를 위한 자재와 설비를 챙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 1해병사단이 이 다리를 복구하지 못한다면 문제는 여러모로 심각해진다. 병력을 이동시키는 과정이 우선 큰 어려움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다른 무엇보다 40대를 웃도는 전차와 1400대에 달하는 차량을 적진(敵陣)에 그대로 남겨둘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유일한 방도는 조립교를 미 공군이 옮겨오는 일이었다. 거대한 공수(空輸)작전이었던 셈이다. 미 1해병사단 공병대대장은 흥남에 있는 공병창(工兵廠)에 연락해 수문교의 끊어진 다리를 복구할 수 있는 조립교를 공수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말처럼 쉬운 작전은 아니었다.


도쿄에 있던 유엔군총사령부는 기술진을 흥남에 급파했다고 한다. 기술적으로 상당한 노하우를 요구하는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험준한 산악지대를 향해 막중한 교량 자재를 투하하는 일이었다. 공중에서 투하하는 자재와 설비는 땅에 닿는 순간 발생하는 충격으로 부서지기도 쉬웠다. 조밀한 산악지형이라서 정확한 투하지점을 잡아내는 일도 결코 쉽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군의 움직임은 매우 신속하고 정교했다. 투하 때의 충격으로 자재와 설비가 부서지는 상황을 감안해 미군은 모두 8개의 조립교 자재를 준비했다고 한다. 이어 C-119 수송기에 자재와 설비를 실은 뒤 800피트 상공에서 준비해 간 8세트의 조립교 자재와 설비를 투하했다.


밤중에 넘어선 황초령

기록에 따르면 조립교 세트 중 1개는 적진에 떨어졌다고 한다. 1개는 땅에 닿는 순간의 충격으로 부서졌다. 8개 중 6개가 결국 황초령을 넘어서려는 미 1해병사단의 수중에 들어왔다. 그에 따라 미 1해병사단 공병대대는 긴급 보수에 나섰고, 12월 9일 오후 3시경 다리 복구를 끝낼 수 있었다. 현대전은 강한 화력, 장병의 정신력과 전투력에만 의해 벌어지지 않는다. 대규모의 물자를 전선 곳곳에 투입하는 능력, 즉 보급의 문제가 현대전쟁의 승부를 가르는 중요한 변수다. 그에 못지않게 현대전은 ‘공병전(工兵戰)’으로도 부를 수 있다.


공병의 업무는 병력이 이동하는 하천과 산악에 먼저 다가가 이동로를 닦는 일이다. 아울러 후방의 보급로 개척과 보수 또한 공병의 몫일 수밖에 없다. 병력의 전진(前進)이 어려운 곳에 먼저 강력한 장비로 길을 터주는 일도 그의 역할이다.


보급을 신속하게 펼치기 위해 비행장을 닦아 공로(空路)를 통해 병력과 물자를 이동시키는 일도 공병의 업무다. 상륙작전 때 상륙 주정(舟艇)을 동원하고, 끊어진 물길을 잇기 위한 부교(浮橋)을 설치도 그의 일에 속한다. 따라서 공병은 현대전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어느 경우에는 공병의 활약 여부에 따라 현대 전쟁의 승패가 쉽게 갈리기도 한다. 공병의 운용은 따라서 그 군대를 지닌 국가의 이면(裏面) 실력을 엿볼 수 있는 가늠자이기도 하다. 미군은 그런 점에서 매우 강했다.

  

 




	대담한 공수작전으로 끊겼던 다리를 복구한 뒤 교량을 통과해 후퇴중인 미 해병대원.
대담한 공수작전으로 끊겼던 다리를 복구한 뒤 교량을 통과해 후퇴중인 미 해병대원


수문교 자재와 설비를 신속하게 현지에 투입하는 일은 훈련에 훈련을 거쳐야 가능한 일이었다. 미군은 전쟁의 여러 수요에 대비해 그런 훈련을 반복해서 실시했던 셈이고, 결국 퇴로 상의 매우 엄중한 기로(岐路)에 놓여 있던 미 1해병사단에게 조립교의 자재와 설비를 성공적으로 투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공군의 ‘체력’은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수문교 복구를 위해 미군은 매우 인상적이면서도 입체적인 작전 수행능력을 보여줬다. 수문교 인근에 매복 중이던 중공군은 그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사기가 떨어졌을 법하다. 수문교는 신속하게 이어졌고, 마지막으로 공격을 펼치려던 중공군은 미 1해병사단 7연대 1대대의 반격으로 속절없이 물러나고 말았다.


미 해병사단의 수많은 차량과 전차는 다리 위에 선 유도병의 안내를 받으면서 12월 9일 밤중에 수문교를 지날 수 있었다. 중공군은 의외로 이 시점 이후부터는 제대로 공격을 펼치지 못했다. 미 1해병사단은 험난한 고개였던 황초령을 통과했고 결국 무사히 진흥리에 진입할 수 있었다.


중공군은 늘 같은 패턴을 보이고 있었다. 초반의 공세가 변칙적이면서 화려했고, 또 강했으나 뒷심이 부족했다. 물자와 장비, 화력의 부족 때문이었다. 공격에 실패해도 줄곧 단일한 공로(攻路)에 집착하는 점도 드러났다. 차분하게 들여다보면 중공군의 밑천이 드러날 수도 있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시간과 여유 부족이 당시로서는 문제였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