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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년전 크리스마스 이브…흥남 부두에서 벌어진 기막힌 사건

淸山에 2013. 12. 25. 04:03

 

 

 

 

 

 

63년전 크리스마스 이브…흥남 부두에서 벌어진 기막힌 사건

이상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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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12월 24일 마지막 수송선이 떠난 후 폭파되는 흥남부두.

 1950년 12월 24일 마지막 수송선이 떠난 후 폭파되는 흥남부두.

입력 : 2013.12.24 22:56 | 수정 : 2013.12.24 23:13

 

1950년 크리스마스 때 흥남철수 작전이 진행됐다. 美 10군단은 병력과 화력을 온전하게 보존함으로써 후일 中共軍의 대공세를 막아내는 주력부대가 됐다. 中共軍 제9병단은 美 해병 1사단의 포위망 탈출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동부전선에서 美軍을 섬멸한 뒤 곧바로 서부전선의 美 8군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中共軍의 계획은 좌절됐다.

당시 김백일 장군은 피난민을 그냥 두고 철수하려는 미군 앞에서 "우리가 이들을 전부 데리고 걸어서라도 가겠다"며 맞섰다. 흥남철수 작전에서 피난민을 구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한 김백일 장군을 친일파로 몰고,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세운 그의 동상을 철거하려는 좌파 시민단체들의 요구가 수년째 집요하게 펼쳐지고 있다. 2005년 7월호에 게재한 월간조선 기사를 재개한다.

◇55년 만의 報恩

2005년 5월27일, 경남 거제도 신현읍의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거제 고현항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이곳이 노인들로 북적거렸다. 여기저기에서 투박한 함경도 사투리가 들려왔다. 1950년 12월 혹한의 흥남부두를 빽빽하게 메우고 서 있던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사지에서 구해 준 은인들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거제도에 세웠다. 거제도는 흥남부두를 떠난 10만여 명의 피란민들이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楊承浩(양승호·84)씨도 그중 한 명이다.

『1950년 12월24일, 1000명의 피란민과 함께 거제도 장승포항에 도착했습니다. 우리가 탄 배가 피란민을 실은 첫 배 같았습니다. 장승포 경찰서에서는 피란민들을 어디에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습니다. 경찰은 일단 우리를 인근 국민학교 교실에 배치했어요. 이북에서 나온 사람들이라고 경찰이 경비를 서더군요. 그런데 다음날부터 피란민을 실은 배가 막 쏟아져 들어오자, 경찰들이 경비고 뭐고 「알아서 다른 곳에 가서 살아라」고 합디다』

장승포에 살고 있는 尹末順(윤말순·82) 할머니는 부두에 내리는 북한 피란민들에게 주먹밥을 나눠 줬다. 배에서 내린 피란민들은 3일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상태였다.

『피란민들이 탄 배가 도착하면 주먹밥을 해서 광주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부두로 나갔지. 피란민들은 한 손에는 보따리를 들고, 다른 손에는 우리가 주는 주먹밥을 먹으면서 부두를 죽 빠져나오두먼』

◇인구 10만의 巨濟에 피란민 15만 수용

거제도에 도착한 피란민들은 주민들의 신세를 져야 했다.

그때 일을 기억하는 거제도 노인들은 『골방이나 창고에까지 피란민들이 들어찼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방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마을 어귀 공터나 산에 움막을 치고 살았다.

당시 거제의 인구는 10만 명, 피란민이 15만 명 이상이었다. 흥남철수작전으로 온 10만여 명의 피란민 외에 부산에 머물던 피란민 상당수가 거제도로 옮겨졌다.

장승포 주민 鄭元株(정원주·83)씨는 당시 피란민들의 생활을 생생히 기억했다.

『우리 뒤주 방에도 피란민들이 몇 명 있었어. 양식은 배급이 되었지만, 그 사람들 참 불쌍했지 뭐. 고향에서 금붙이라도 가져온 피란민들은 이를 밑천으로 장사를 했지만, 대부분 돈이 없으니까 산에서 나무를 해서 팔거나, 막노동을 했어. 그런 일거리도 거의 없었어』

포로를 상대로 장사를 해서 돈을 버는 피란민도 있었다. 포로수용소 철조망 너머로 먹을 것을 넘겨주면, 포로들은 옷가지나 모포를 던져 주었다. 피란민들은 포로를 표시하는 「PW」라는 글씨를 지우고, 국방색을 탈색한 후 시장에 내다 팔았다.

피란민들이 많이 머문 장승포항·옥포항·고현항의 부두는 좌판을 벌인 피란민들로 가득했다. 당시 거제도에서는 장승포항이 가장 번화했다.

피란민들은 부두에 나와 쌀·고무신·광목 장사를 하거나, 솥을 걸어 놓고 국밥·국수 등을 팔았다. 윤말금 할머니는 장승포 부두에서 국밥을 팔던 함경도 아줌마의 사투리를 잊지 않고 있다.

『「빨리 옵세, 오가리 마이 있소」 하고 소리치데. 나는 「오가리」가 뭔가 싶어 솥을 들여다봤지. 팥죽 같은 데 밀가루를 뜯어 넣은 것을 오가리라고 하데. 그 사람들 참 생활력이 강했어요』

함흥에서 거제도로 피란 온 崔元植(최원식·82) 前 잡지협회 회장은 『성포리 구장집에 아홉 명이 머물렀다』며 『아홉 명이 그 집에서 석 달 동안 쌀이고 김장김치고 다 먹었는데도 구장은 싫은 표정 하나 짓지 않았다』고 말했다.

『구장은 밤마다 우리에게 고생한다며 이불 속에 손을 넣어 보고, 먹을 것도 주었어요. 그렇게 인심이 좋을 수 없었습니다. 그 구장에게는 자식이 없어서 이제는 고맙다는 말을 전할 사람도 없습니다』

피란민들은 거제도에 짧게는 3개월, 보통 1~3년 정도 머물렀다. 거제도를 빠져 나간 이들은 부산에 나가 막노동을 하거나, 전국에 흩어져서 구두닦이·식당일·공사판 노동일 등을 닥치는 대로 했다.


◇ 포위된 美 제1 해병사단

6·25 때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丁一權(정일권) 장군은 手記에서 『나는 美 10군단장인 알몬드 소장의 철수계획을 들으면서 미국의 거대한 군사력을 실감했다. 그러면서도 그 막강한 해군력·공군력·지상군을 왜 전진공격할 때는 전면 가동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흥남철수는 함경남도 長津湖 일대에서 中共軍에게 포위된 美 해병1사단 1만2000명의 병력을 구출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美 해병 1사단이 괴멸될 경우 동부전선에 투입된 美 10군단 병력 10만5000명의 운명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崔秉具(최병구·75·現 서일大 영어강사)씨는 美 해병 1사단 5연대 E중대 민간인 통역관으로 長津湖 전투에 참여했다. 전쟁 전에 美 육군 군사고문단에서 일했던 崔씨는 인천상륙작전 직후 美軍에 합류했다.

崔秉具씨는 1950년 10월26일 美 해병대원들과 함께 원산에 상륙해 長津湖 쪽으로 북진했다. 崔씨가 속한 美 해병1사단 5연대는 7연대와 함께 長津湖 서쪽에 있는 유담리까지 들어갔다.

맥아더 사령부는 11월24일 한국전쟁을 끝내기 위해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 총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른바 「크리스마스 공세」였다. 서부전선을 맡은 美 8군은 곧바로 中共軍의 반격에 부닥쳤다. 서부전선 곳곳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흥남으로 철수하는 美 해병 1사단 병사들.
흥남으로 철수하는 美 해병 1사단 병사들.

戰勢가 급변하자 동부전선의 美 해병 1사단은 「長津湖에서 서쪽으로 약 90km 지점에 있는 무평리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서부전선에서 美 8군을 압박하는 中共軍의 뒤통수를 친 후, 8군과 함께 협공을 펼치려는 작전이었다.

무평리 공격의 선봉에 선 부대가 崔秉具씨가 속한 해병 1사단 5연대였다. 美 해병대는 11월27일, 서쪽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美 해병대는 유담리에서 채 5km 도 전진하지 못해 中共軍의 강력한 저항을 만났다. 崔秉具씨의 설명이다.

◇ 山을 이룬 中共軍의 시신

『유담리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밤새도록 총알을 있는 대로 쏘았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포위되었는지 어쨌는지도 모르고 몰려오는 敵을 쏘기에 바빴습니다. 中共軍의 군복은 뒤집어 입으면 하얀색인데 밤에는 사람인지 눈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습니다.

中共軍은 괴성을 지르며 나팔을 불면서 몰려왔습니다. 총도 없이 손에 수류탄 하나씩 들고 무조건 달려오다가 총을 맞아 죽습니다. 하루 저녁 전투를 마치고 중대장하고 中共軍 시체를 세는데 너무 많아서 도저히 셀 수 없었습니다』

11월28일 아침이 밝자 美 해병대는 中共軍에 포위당한 것을 알았다. 長津湖 서쪽 유담리에 있던 美 해병 1사단 주력부대인 5연대와 7연대, 長津湖 동쪽에 주둔했던 육군 2개 보병대대와 1개 포병대대 약 1만2000명의 병력이 고립되었다.

맥아더 사령부는 11월29일 해병 1사단에 「흥남으로 집결해서 교두보를 구축하라」고 명령했다. 포위된 美 해병대는 왔던 길을 되돌아 유담리→하갈우리→고토리→진흥리→흥남까지 240km 이르는 거리를 철수해야 했다.

이 루트는 「한국의 지붕」으로 불리는 개마고원 지대로, 해발 1000~2000m의 고산지대였다. 고토리에서 진흥리 사이에는 험난한 황초령 고갯길이 있었다. 中共軍이 이곳만 점령하고 있어도 사단 병력 전체가 꼼짝 못했다.

美 해병대는 中共軍뿐 아니라 추운 날씨와도 싸워야 했다. 기온은 낮에는 영하 20℃, 밤에는 영하 30℃ 이하로 떨어졌다. 동상과 설사 등으로 쓰러지는 병사가 속출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추위를 敵들도 겪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 中共軍, 추위와 굶주림으로 戰意 상실

< 소총의 기름이 혹한으로 얼어붙어 사격을 할 수 없었다. 자동소총도 불발이나 단발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경기관총은 어는 것을 막기 위해 2시간마다 사격을 해야 했고, 박격포 포판이 반동으로 얼어붙은 땅에 부딪혀서 금이 가기 일쑤였다. 트럭과 전차는 두 시간마다 15분쯤 가동시켜 놓지 않으면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땅 표면이 35cm 정도 얼어 야전 축성은 그야말로 중노동이었다. 고무를 많이 사용한 군화는 땀이 많이 차 가만히 있으면 곧 동상에 걸렸다. 시레이션은 겉은 녹일 수 있어도 속은 얼음덩어리가 남아 있어 복통이나 설사를 일으켰다. 부상자는 곧바로 동사하기 때문에 후송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마저 곤란했다〉 (한국전쟁: 日本육전사 연구보급회)

< 모든 것이 얼어 붙었다. 혈액이 얼어 병이 깨지고, 혈액이 용해되지 않고 튜브가 막혀 버렸기 때문에 수혈할 수 없었다. 붕대를 갈 수도 없었는데 그것은 장갑을 끼고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상처를 보기 위해 옷을 벗길 수도 없었다. 때론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더 좋을 때도 있었다〉 (美 해병대 戰史)

中共軍은 주로 밤이나 새벽을 틈타 공격을 해 왔다. 이들의 공격은 부족한 탄약과 형편없는 무기, 물자의 부족으로 미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했다. 中共軍은 박격포나 기관총 없이 주로 수류탄에 의존한 공격을 펼쳤다. 美 해병대원이 총을 쏘는 참호 1m 앞까지 기어와 수류탄을 던지려고 하다가 죽은 中共軍 병사들이 적지 않았다.

中共軍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戰意를 잃은 상태였다. 미군이 접근해도 참호에서 도망가지 않고 스스로 포로가 되거나, 피란민에 섞여서 내려오는 자도 있었다.

12월1일, 美 해병대 5연대, 7연대는 유담리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다. 崔秉具씨의 설명이다.

『고지를 하나 점령한 후 부대를 통과시키고, 또 다른 중대가 고지를 점령하고 다시 부대를 통과시키는 식으로 후퇴했습니다. 황초령 부근에서 中共軍 30명이 포로가 되겠다고 따라오는데 아무리 가라고 해도 가지를 않습니다. 자기들은 공산당이 아니라 장개석 부대라며 막무가내로 따라오는 겁니다』

12월4일, 美 해병대는 유담리에서 22km 떨어진 하갈우리에 무사히 도착했다. 간혹 1km를 전진하는 데 평균 3시간 30분이 걸릴 정도로 힘든 철수였다. 하갈우리에는 美 해병대 지휘소와 보급기지가 있었다. 철수작전 4일 동안 발생한 해병대 부상자가 4400명, 사망자가 137명이었다.

하갈우리에서 집결한 병력은 1만여 명, 차량은 1000대였다. 하갈우리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美 해병대는 12월6일 하갈우리 집결지를 출발, 다음 철수지점인 고토리로 이동했다.

12월7일 아침 선두부대가 고토리 진지에 도착했다. 하갈우리에서 고토리까지 오는 과정의 전투에서 美 해병대는 사망 86명, 부상 506명 등 600여 명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 해병대의 철수에서 항공기 엄호는 절대적이었다. 항공기 때문에 中共軍은 주간에 부대 자체를 집결할 수 없었다.

中共軍은 항공기와 보병, 포병을 유기적으로 사용하는 미군의 전투기술을 당할 재간이 없었다.

<步·戰·砲·항공기 간의 협조는 놀라울 정도로 긴밀하였다. 從深 깊이 중화기를 사용했을 뿐 아니라, 자동경화기, 로켓, 무반동포 등을 잘 조정하여 배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화기들은 엄폐되어 있었다. 我軍이 70~100m까지 접근했을 때 갑자기 사격하여, 我軍의 전개를 곤란하게 해 많은 피해를 주었다> (中共軍 26군 노획문서)

수적으로 미군보다 많게는 10배나 우세했던 中共軍은 추위와 보급 부족으로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수송인원이 없어 보급추진이 안 되었고, 병사들은 찬 음식을 먹었다. 그나마 2일 동안에 감자 몇 개밖에 먹지 못한 병사도 있었다. 부상자는 제때 후송이 되지 않아 부상은 곧 사망이었고, 화포를 이용하려 해도 탄약이 없었다. 있다고 해도 불발탄이었다. 병사들이 눈 쌓인 지면에서 야영을 해서 손과 발이 얼어 수류탄의 안전핀도 뽑을 수 없었다. 박격포의 포신도 얼어 수축되었으며 포탄의 70%가 불발이었다> (美 해병대 공간사 및 노획한 中共軍 문서)

12월10일, 美 해병대가 마지막 관문인 황초령을 넘을 때 中共軍은 미군의 주력부대를 분산시키는 공세를 펼쳤으나 미군의 화력에 큰 힘을 쓸 수 없었다.

12월11일, 고토리를 출발한 美 해병대는 진흥리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별다른 저항 없이 트럭이나 기차 등으로 흥남으로 철수했다. 고토리-진흥리 간 전투에서 美 해병은 전사 51명, 부상 300여 명 등 도합 35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 美 해병대의 後尾를 쫓는 피란민들

피란민들은 철수하는 美 해병대의 後尾(후미)를 놓치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美 해병대가 고토리를 지날 무렵 피란민 수는 3500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철수 후속부대인 공병대가 가끔 피란민들에게 뒤쳐지거나, 이들과 섞여서 행군했다.

가끔씩 피란민 속에 섞여서 있다가 튀어나와 미군을 공격하는 中共軍 때문에 後尾를 맡은 미군들은 공포를 쏘면서 따라붙는 피란민들을 멀찍이 떼어놓으려 했다.

< 제1연대 2대대 B중대는 피란민들이 진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었다. 눈보라 속에 노인과 아녀자들이 불도 없이 눈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남루한 모습을 하고 있는 어린이들의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듣는 것은 해병대 병사들에게 무척 괴로운 일이었다.

피란민들을 진지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싶었지만, 中共軍이 피란민들 틈에 끼어서 진지 내로 들어와서 공격을 가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미군은 이들을 진지 밖에 둘 수밖에 없었다. 이날 밤 해군 위생병의 도움으로 아기 두 명이 출산했다> (한국전쟁: 日本육전사 연구보급회)

◇ 死地에 내몰린 기독교인들

당시 고려大 1학년에 재학 중이던 李鍾淵(이종연·77) 변호사는 전쟁이 나자 학도병으로 지원했다. 그 후 그는 美 해병대 1사단 연락장교로 파견되어 통역을 담당했다. 그는 長津湖 전투 때 사단지휘소가 있던 하갈우리에 머물고 있었다.

『내 임무는 하갈우리 중년 남자들을 동원해 지휘소 설치를 돕고, 공수 투하된 보급품을 회수해 오는 것이었습니다. 동원된 마을 사람들 중 세 명이 敵의 사격으로 죽었습니다. 하루는 어느 집을 방문하니 20명의 주민이 예배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울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5년간 공산 치하에서 박해받은 그들은 또다시 공산군에 점령되면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갈우리에 남아 있던 300명 주민이 같이 피란을 나왔습니다. 그들은 눈 쌓인 맨땅에서 잤습니다. 흥남부두에 도착하니 온 부두가 피란민으로 가득했습니다. 정말 비참한 광경이었어요』

함경북도 길주와 청진 방향으로 진격했던 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은 비교적 손쉬운 철수 작전을 펼쳤다.

韓永燮(한영섭·77)씨는 KBS 종군기자로 수도사단을 따라 청진까지 진격했다가 후퇴했다.

『저를 비롯한 수도사단 일부 군인들은 군함을 타고 먼저 청진항을 출발했습니다. 당시 청진·성진 등 다른 항구에서도 목선으로 피란한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 軍은 수복지역에서 치안유지를 했던 청년과 反共단체 사람들을 트럭을 동원해 육로로 먼저 피신을 시켰습니다.

성진과 흥남 중간인 이원에서 하룻밤 머무르는데 마을 노인들 20여 명이 몰려와서 애원을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은 늙어서 못 가지만 애들이라도 좀 데리고 가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배에 여유가 없다」면서 「걸어서 흥남으로 가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맥아더 사령부는 12월11일 원래 함흥과 흥남에서 강력한 교두보를 구축하려던 계획을 바꾸어 이북에서 전면철수를 결정했다. 이에 따라 美 10군단은 10일 안에 10만 명의 병력과 수십만t의 물자 수송을 끝낸다는 철수계획을 세웠다.

長津湖에서 철수한 해병대들이 흥남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193척의 함정이 사람과 물자를 싣기에 여념이 없었다. 12월12일 長津湖 전투에서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美 해병 1사단부터 배에 올랐다.

흥남 앞바다에서는 미주리호를 비롯한 13척의 美 항공모함이 中共軍 진지와 집결지를 향해 함포사격을 했다. 함재기들은 하늘에서 中共軍에게 폭격을 퍼부었으며, 흥남 시가지에 늘어선 곡사포는 북쪽과 서쪽을 향해 쉴새없이 불을 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