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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골짜기’에서 당한 ‘인디언 笞刑(태형)’ - ⑥

淸山에 2016. 6. 16. 18:20






‘죽음의 골짜기’에서 당한 ‘인디언 笞刑(태형)’ - ⑥

《6·25전쟁의 현장》

(6) / “우리는 10만 명의 피난민을 철수시켰다!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쾌거야!

한국판 ‘모세의 기적’ 아닌가!”

鄭淳台  
      


  
중공군 제113사단은 사전에 협곡지대를 선점했다. 하지만, 제2사단 정찰대의 사전 정찰에도 불구하고 이를 확인하지 못했다. 미 제2사단 主力(주력)이 전차·야포 및 각종 차량과 함께 좌우가 산으로 에워싸인 약 15km의 골짜기로 접어들자, 양쪽 山中(산중)에 매복하고 있던 중공군 38軍 예하 제113사단이 일제히 포위공격을 가했다. 미 제2사단 主力은 불과 반나절 동안 무려 3000여 명의 사상자, 3000여 명의 포로와 실종자를 냄으로써 이 골짜기에서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다. 이 최악의 참사를 미국 戰史(전사)는 ‘인디언 笞刑(태형·Gauntlet)’이라고 부르고 있다. 인디언은 敵軍 포로나 범법자를 처벌할 때 용사들이 두 줄로 나란히 선 다음에, 그 사이로 이들을 들여보내 통과할 때까지 흠씬 때리는 형벌을 가했다고 한다. 당시, 미 제2사단이 처한 상황이 바로 이러했다.  

  
묘향산 기슭에서 와해된 국군 제2군단


중공군은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의 자신감에 찬 공격 발표가 나오자, 공격의 길목을 노리고 있다가 逆攻(역공)을 하려 했다. 크리스마스 공세를 개시하고 난 바로 다음날인 1950년 11월25일, 후속부대의 집결로 36개 사단으로 증강된 중공군의 제2차 공세(1950년 11월25일∼12월10일)가 시작되었다. 중공군은 중부 산악지대에 새로운 부대를 집결시켜 눈사태와 같이 쏟아져 나왔다.


전선의 붕괴는 미 8군의 最右翼(최우익)인 묘향산 남쪽 기슭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德川(덕천)과 寧遠(영원)으로 진출한 국군 제2군단 예하 제7·제8사단이 중공군의 포위 공격 개시 하루 만에 무너졌다. 국군 제2군단은 중공군 1차 공세에서 상당한 타격을 받아 전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력 증강 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 가장 취약한 右翼(우익)의 산악지역을 맡게 함으로써 산악전에 능숙한 중공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여파는 곧바로 인접 부대인 미 제9군단에 미쳐 제8군의 右翼(우익) 전선이 차례로 무너지는 ‘淸川江(청천강) 도미노 현상’이 시작된 것이다. 중공군의 공격요령은 날개 쪽과 정면으로부터 계속 공격하는 동시에 유엔군의 退路(퇴로)에 미리 병력을 매복시키는 것이었다. 유엔군은 火力으로 이를 분쇄하려 했다. 하지만, 밀물처럼 몰려오는 人海(인해)의 파도에 휩쓸려 陣地(진지)는 잇달아 붕괴되었다.


1950년 11월 말, 유엔군은 한반도에서 東西(동서)의 폭이 가장 좁은 肅川(숙천)∼順川(순천)∼成川(성천)∼陽德(양덕)∼元山(원산)으로 이어지는 平壤(평양) 방위선에서 중공군의 진격을 저지하기로 작심, 각 부대는 절대적인 制空權(제공권) 아래 중공군과의 접촉을 끊고, 이 방위선으로 후퇴하게 했다.


국군 제1사단이 평양 북쪽 25km지점인 永柔(영유) 지역으로 철수한 지 이틀 후인 11월30일은 미군으로서는 잊을 수 없는 치욕의 날이었다. 마지막까지 전선을 지탱하던 미 제9군단 예하 미 제2사단이 軍隅里(군우리·지금의 개천)를 버리고 順川(순천)을 향해 철수하다가 빚어진 비극이었다.


‘죽음의 골짜기’에서 당한 ‘인디언 笞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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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우리 전투 상황도


미 제2사단은 당시 미 제9·제23·제38연대, 4개 포병대대, 1개 전차대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터키여단과 국군 제3연대도 배속되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7년에 창설된 미 제2사단은 지금 경기도 평택과 의정부에 주둔하고 있다. 애칭은 Indian head(인디언 머리). 그것으로 도안된 부대마크를 부착하고 있다. 


군우리 전투는 미 8군이 청천강에서 중공군에 패해 철수하게 되었을 때, 엄호부대로 미 제2사단이 철수하던 중에 중공군 제38군과 벌였던 사투였다. 미 제2사단은 군우리에서 전투 후 순천으로 후퇴하던 11월29일부터 12월1일까지 3일 동안 군우리∼순천 간 협곡지대에서 중공군의 협공을 받았다.
     
군우리에서 順川(순천)에 이르는 도로는 두 갈래다. 安州(안주)를 거쳐 서쪽으로 우회하는 도로와 직행하는 동쪽의 非포장 좁은 길이 있었다. 그러나 비교적 안전한 서쪽 우회도로는 철수하는 유엔군 부대들의 긴 행렬로 인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카이저 少將(소장)의 미 제2사단은 동쪽의 非포장의 좁은 길을 택했다. 그것이 직행도로이기는 했지만, 이 곳은 그야말로 ‘죽음의 골짜기’로 변모했다.


중공군 제113사단은 사전에 협곡지대를 선점했다. 하지만, 제2사단 정찰대는 사전 정찰에도 불구하고 이를 확인하지 못했다. 미 제2사단 主力(주력)이 전차·야포 및 각종 차량과 함께 좌우가 산으로 에워싸인 약 15km의 골짜기로 접어들자, 양쪽 山中(산중)에 매복하고 있던 중공군 38軍 예하 제113사단이 일제히 포위공격을 가했다. 미 제2사단 主力은 불과 반나절 동안 무려 3000여 명의 사상자, 3000여 명의 포로와 실종자를 냄으로써 이 골짜기에서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다. 이 최악의 참사를 미국 戰史(전사)는 ‘인디언 笞刑(태형·Gauntlet)’이라고 부르고 있다.


인디언은 敵軍 포로나 범법자를 처벌할 때 용사들이 두 줄로 나란히 선 다음에, 그 사이로 이들을 들여보내 통과할 때까지 흠씬 때리는 형벌을 가했다고 한다. 당시, 미 제2사단이 처한 상황이 바로 이러했다. 미 제2사단의 와해는 엄청난 결과를 빚고 말았다. 平壤(평양)방어선의 동쪽이 텅 비게 된 것이었다. 미군 참전 이래 최대의 손실이었다. 


1950년 11월 하순부터 12월 상순까지 약 2주간에 걸쳐 실시된 중공군의 제2차 공세는 중공군의 기본전술에 대한 無知(무지)와 맥아더가 이끄는 유엔군의 중공군 輕視(경시)에 의한 작전실패였다. 중공군은 미 제8군과 미 제10군 사이에 80km에 달하는 空隙(공극)지대에 2개 군(중공군 제38군과 제42군)을 돌입시켰다. 이어 그 일부(중공군 제38군의 제113사단)을 남하시켜 11월28일, 미 제8군의 평양을 향한 퇴로인 청천강 부근의 三所里(삼소리)를 앞서 점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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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표창을 받은 뒤 촬영한 터키군 장병들의 모습




중공군 제2차 공세로 국군 제2군단이 무너지고 중공군이 덕천·맹산으로 진출하게 되자, 미 제8군 전체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제, 청천강 남쪽의 군우리와 순천 일대의 확보 여부가 미 제8군의 정상적 철수의 사활이 달려 있었다. 미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터키여단에게 덕천으로 이동해 중공군을 저지하라고 명했다.


터키여단(여단장 타신 야지시 준장)은 11월26일 군우리를 출발하여 덕천 방향으로 이동하다가 와원 일대에서 중공군 제38군과 조우했다. 1950년 10월17일 부산항에 상륙하여 참전한 이래 최초의 전투였다.


용맹한 터키 장병들은 그들 병력의 네 배가 넘는 중공군을 맞아 여단의 全장병(5000여 명)이 한 덩어리가 되어 11월27일부터 29일까지 3일 동안 처절한 혈투를 거듭했다. 이들의 선전으로 군우리∼용원리 협곡에 갇힌 미 제2사단에 대한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기여했다. 터키여단은 참전 유엔군 최초로 美 대통령으로부터 부대 표창을 받았다. 지금도 터키가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일컫는 것은 이런 血盟(혈맹)관계 때문이다.


트루먼의 原爆 암시: “보유하는 여러 兵器를 사용할 용의 있다”


1950년 연말은 유엔군의 최대 위기였다. 11월24일, 유엔군은 ‘크리스마스는 본국에서’라는 표어로 압록강∼두만강에의 진출을 시도했지만, 이것이 중공군의 제2차 공세와 정면으로 충돌하고 말았던 것이다. 유엔군의 공세는 저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공군의 人海戰術(인해전술)에 먹혀버리는 위기적 상황에 빠졌다.


미국 동부시간으로 11월30일, 트루먼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세계적인 動員(동원)을 호소했는데, 질의응답의 도중 충격적인 발언이 튀어나왔다.


“보유하는 여러 兵器(병기)를 사용할 용의가 있다… 原爆(원폭)의 사용에 대해서는 항상 적극 고려를 하고 있다.”


기자회견 후 報道(보도) 관계관이 대통령 발언의 해명하면서, “핵병기의 사용은 가볍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물 타기’를 했지만, 원폭 사용이 임박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트루먼의 발언에 충격을 받은 나라는, 소련으로부터 보복공격을 받을 공산이 가장 높다고 느낀 西유럽 참전국들이었다. 애틀리 英國(영국) 수상은 워싱턴으로 날아가,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핵병기 不사용의 언질을 받음으로써 소동은 대충 수습되었다.


트루먼 발언의 배경에는 1950년 11월 말의 단계에 있어서 핵병기의 전술적 사용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동시에 그것은 북한을 꼬드겨 전쟁을 도발시킨 소련과 제한적 在來戰(재래전)으로 미군을 코너로 몰고 있는 중공에 대한 경고였다.


丁一權, “자주적인 군사력 개발을 서둘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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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및 북한군, 유엔군의 攻防을 나타낸 지도(1951년 1월2일~2월28일)


제8군에는 평양과의 유일한 연결로인 청천강 부근의 三所里(삼소리)가 11월28일 중공군에게 점거되었음은 앞에서 썼다. 중공군은 총공격을 개시해 제8군은 총 붕괴의 위기에 몰렸다.   
    
1950년 12월3일은 유엔군이 6·25전쟁에서 승리하겠다는 목표를 포기한 날이었다. 이날, 平壤(평양)방위선의 중앙부에 위치한 成川(성천·평양 동북방 16km)이 중공군에게 탈취되어, 이 돌파구로부터 大軍이 눈사태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항공기의 정찰에 의하면 중공군의 파도는 끝없이 이어져 山河(산하)를 가득 매우고 있는 듯했다. 이때 중공군은 병법상의 企圖秘匿(기도비닉)보다는 스피드를 重視(중시)해, 오로지 南進(남진)을 서둘렀다. 미 8군은 포위되었다. 유엔군이 처한 최대의 위기 중 하나였다.


여기에 이르러 맥아더는 다시 38선에의 총퇴각을 결단했다. 그리고 미 제10군단을 海上(해상)으로 철퇴시켜, 38선으로 후퇴하는 미 8군을 지원토록 지령했다. 이리하여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군사 전문가들은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에 대해 ‘철저한 오판’에 의한 ‘재난을 향한 눈 먼 행진’이라고 혹평했다.


1950년 12월3일, 워싱턴으로부터 “현재의 상황에서 제1로 고려해야 할 것은 귀하(맥아더)가 지휘하는 군대의 안전이다. 군대를 海岸堡(해안보)에 집중시키려는 귀하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지령이 내려왔다. 


이리하여 미군은 군사적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상황 하에서 정치목적의 좌절도 어쩔 수 없었다. 한반도에서의 전쟁 목적을 다시 변경, 어떻게 그들의 군대를 안전하게 보전하는가에 전념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국군의 상황은 참담했다. 미 군사고문단의 로버트 카메론은 한국군의 형편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한국군 사단에는 輕裝備(경장비)뿐이었다. 박격포와 기관총은 정상 수준의 일부만 지급받았고, 사단마다 1개씩의 105mm 輕砲大隊(경포대대)를 보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군단에는 포병이나 장갑차조차 없었고, 미군 지원부대도 全無(전무)했다.>
 
이때, 국군 제2군단 예하 3개 사단의 사단장들 중 두 명이 작전 실패의 책임을 지고, 군법회의에 회부돼 극형을 언도받았다. 얼마 후 사면돼 軍에 복귀되긴 했지만, ‘북진통일’의 꿈이 무너지는 가운데 발생했던 일이었다.


미 제2사단장 카이저 少將도 해임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의 士氣(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이런 와중에 “미군이 한국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철수한다”는 풍문까지 나돌기 시작했다. 후퇴 중 황해도 沙里院(사리원)에서 白善燁(백선엽) 제1사단장을 조우한 ‘多富洞(다부동) 전투의 전우’였던 미 제27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은 ‘철수 소문’에 대한 白 장군의 물음에, 이렇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미군이 철수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태를 너무 비관하지는 마십시오.”


38선에의 총퇴각 작전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총 3만6000명의 병력 손실을 냈다. 그 중 미군의 인적 손해는 중공 측의 발표로는 2만4000명, 미군 측의 발표는 1만7000명이었다. 美 합동참모회의 의장 브래들리는 그의 회상록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것으로써 한국전쟁은 승리로부터 급속히 패배로 전환되어 우리 軍은 史上(사상) 최악의 굴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당시의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장군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北進의 열기에 들떠, 참모총장인 나 자신부터 전반적인 事後 관망과 냉철한 정세판단에 소홀했던 점을 후회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전략적으로 북진 좌절의 원인을 따진다면, 맥아더의 전략을 억제했던 당시 워싱턴 당국의 책임으로 돌려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분석과 自省(자성)은 나에게 뚜렷한 主見(주견)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국가적으로 부여된 여건 下에서 최대한으로 자주적인 군사력 개발을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北 주민 300만이 한국을 선택


6·25동란 때 南下(남하)한 피난민은 북한 인구의 3분의 1인 300만이었다. 이것은 남북의 체제 경쟁에서 대한민국의 승리이자, 세계 공산주의 진영의 패배였다. 1950년 12월5일, 유엔군은 平壤(평양)의 주요 시설을 철저히 파괴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때는 중공군의 추격이 없어 이탈에 성공했다.


그러나 중부 산악지대로부터의 공산군 진격은 예상 밖으로 재빨랐다. 制空權(제공권) 下에 서해안 도로를 따라 차량으로 후퇴하는 유엔군보다 중부 산악지대를 도보로 남진하는 중공군 쪽이 오히려 앞섰다. 이 때문에 유엔군은 항상 옆구리와 등 뒤로부터 위협을 받으며 후퇴해야만 했다. 중부 산악지대에서 제2전선을 구성하고 있던 북한군 게릴라가 중공군의 南下를 유도하고, 도로를 보수하며, 식량 등을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유엔군의 후퇴에 따라 약 300만 명의 북한 주민이 남하했다. 300만 명이라면 당시 북한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다. 찬 겨울바람과 얼음이 떠다니는 대동강을 건너는 대열은 거의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피난민에게 이것은 미군이 지금 당장은 敗走(패주)하지만, 언젠가 다시 반격에 나설 것이라는 믿음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위기로부터 탈출한 유엔군은 12월15일, 38선으로 후퇴, 태세를 再정비했다. 이때 국군과 유엔군은 2주 동안 무려 300km나 후퇴했다.


위기 때 빛난 美 해병대의 엘리트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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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은 장진호 근처의 하갈우리로부터 고토리,

진흥리로 빠져 나오는 철수작전에서 불굴의 용맹성을
보였으나, 이 기간 중에 全병력의 50%가 손실을 입는 苦戰을 치렀다. 


드디어 동부전선에서도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 닥쳐왔다. 10월26일, 원산에 상륙한 미 제1해병사단은 북한의 임시수도인 江界(강계)를 점령하고, 서부전선의 부대와 연결하기 위해 장진호 북방으로 진출하던 중에 영하 40도이라는 極寒(극한) 속에서 중공군 12개 사단에게 포위되었던 것이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1950년 12월1일∼12월11일에 걸쳐 미 제1해병사단은 柳潭里(유담리)로부터 興南(흥남)에 이르는 125km의 한 가닥 隘路(애로·어떤 일을 함에 있어 생기는 장애)를 복병의 공격을 뿌리치면서 돌파, 후퇴작전을 성공시켰다. 


물론 중공군의 전술적 拙劣(졸렬)함과 동계 장비의 빈약, 그리고 미 항공기의 보급품 투하 및 폭격 등 공중지원에 힘입어 虎口(호구)를 벗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죽어도 무릎은 꿇지 않는다는 프라이드와 엘리트 의식, 戰友(전우)를 버리지 않는다는 鐵則(철칙)에 바탕을 둔 미 해병대의 鬪魂(투혼)이 위기 극복의 정신적 支柱(지주)가 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미 제1해병사단은 중공군이 매복한 유담리 → 하갈우리 → 도토리 → 진흥리를 빠져나오면서 全병력 중 50%인 6000명의 人命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미 제1해병사단의 탈출작전의 결과, 중공군의 함흥-흥남 진출이 2주간이나 지연됨으로써, 동부전선의 我軍 부대들은 흥남으로 집결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되었으며, 곧이어 개시된 흥남 철수작전을 가능하게 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11월30일, 국군 제1군단의 前線은 白岩(백암)∼부령(두만강변 국경도시. 회령 남쪽 45km)∼富居洞(부거동)선이었다. 보급만 뒤따르면 단숨에 두만강에 도달할 기세였다. 하지만, “해상으로 철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생각지도 않던 철수 명령이었다.


국군 제3사단 主力은 城津(성진)에서 철수선에 승선했고, 군단 주력은 미 제10군단의 엄호아래 흥남으로 집결했다. 진정한 友邦(우방)인지, 어떤지는 비상시가 아니면 알 수 없지만, 흥남으로부터의 해상철수에 즈음해 미 제10군단장 알몬드는 그 眞價(진가)를 나타냈다. 국군 제1군단에 근무했던 장군들이 알몬드 장군에게 높은 평가를 서슴지 않는 것은 이 비상시기에 동맹군인 국군 제1군단의 철수를 먼저 배려한 그의 결심 때문이었다. 반면, 서부전선의 제8군은 전투에 지친 한국군을 後衛(후위·후방을 지키는 부대)로 지정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興南港(흥남항)에서는 12월10일부터 海上(해상)철수가 시작되었다. 미 제10군단은 국군 제1군단, 미 제1해병사단, 미 제7사단, 미 제3사단의 순으로 12월24일까지 승선하고, 부산항과 그 인접 항을 향해 출항했다. 이 敵前(적전) 해상철퇴에는 191척의 선박을 동원해, 장병 10만5000명, 화물 35만 톤, 그리고 南下를 희망했던 북한 주민 9만8000명을 승선시켰다.


제1군단 참모장 金鍾甲(김종갑) 장군의 회고에 의하면, 군단사령부가 江陵(강릉) 앞바다를 지날 무렵에 오키나와로 航進(항진)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강릉에 상륙해서 다시 동해안 작전에 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강릉 앞바다를 그대로 통과하자, 여러가지 루머가 들끓었던 것이다. 패전의 쇼크는 갖가지 비극적 억측을 나돌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국군 제1군단 장병이 승선한 LST들은 강릉 앞바다를 통과한 지 1시간쯤 후에 接岸(접안)했고, 곧 상륙 명령이 떨어졌다. 三陟(삼척) 북쪽의 동해시 墨湖港(묵호항)이었다. 군단사령부는 묵호에서 강릉으로 북상해, 동해안의 38선 일대를 방어하고 있던 제9사단(사단장 吳德俊 준장, 참모장 朴正熙 대령), 그리고 함께 묵호에 상륙했던 수도사단을 지휘, 다시 동해안 정면 방어에 임했다.


그렇지만, 제1군단의 지휘부를 오키나와로 옮긴다는 헛소문이 돌았다. 상륙지점이 극비였기 때문인지, 전황의 급격한 변화 때문인지, 혹은 맥아더 사령부가 전황을 悲觀視(비관시)했던 데 대한 반응인지, 아무튼 그것 중 하나의 이유 때문에 그런 소문이 돈 듯하다. 확실한 것은 중공군의 본격 개입에 의한 쇼크 때문임이 틀림없었다.   


흥남철수의 상황은, 몇 년 전 1400만 관객을 모은 흥행영화 <국제시장>의 도입 부분에 잘 그려져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상세히 거론할 것이다. 그 시절 흥남 철수 피난민의 애절한 심경을 표현한 강사랑 作詩(작시), 박시춘 작곡의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는 10년 전만 하더라도 부산의 영도다리 입구에 들어가면서 길바닥에 박힌 버튼 하나만 밟으면 자동적으로 흘러나왔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 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1·4 이후 나 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다
금순아 !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승달만 외로이 떴다.

 



흥남철수의 주역: 玄鳳學과 알몬드 군단장


“닥터의 말은 알아들었다. 나(알몬드 제10군단장)는 피난민 문제와 관련한 닥터의 말에 전면적으로 찬성한다. 다만 적은 興南(흥남) 남쪽 원산으로 急進(급진)하고 있다. 지금 단계에서 무엇 하나 확약할 수는 없지만….”


영화 <국제시장>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興南(흥남)철수 작전의 모습은 매우 감동적이다. 그 다급한 상황에서도 자유를 찾는 피난민들을 선박으로 南下(남하)시켰던 일은 미국으로서도 두고두고 자랑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 흥남철수 때, 북한 피난민 9만8000명을 미군 LST에 실어 남하시키기 위해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少將을 설득했던 인물이 누구인지는 영화 <국제시장>에서는 자세히 밝히지 않았다.

그가 바로 玄鳳學(현봉학)이라는 이름의 함흥 태생의 의사이다. 영화 <국제시장>에는 알몬드 군단장 옆에 서서 뭔가 간절히 호소하는 듯한 한국인 얼굴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의 이름과 경력 등은 모두 생략되었다. 세브란스 醫專(연세대 의대의 前身) 출신 의사로, 미국 유학 후에 귀국해 국내 최초로 임상병리실을 개설했던 현봉학은 기묘한 인연으로 미 제10군단에 근무하게 된다. 그 사연은 매우 운명적이었다.
 
1950년 6월28일 서울 함락 때, 그는 歸家(귀가)할 여유조차 없어 그냥 피난민 대열에 섞여들었다. 그는 피난지 부산에서 해군에 입대했다. 미국 유학에서 귀국한 지 3개월, 그는 의사로서 보다도 고급 영어를 하는 통역관으로 重用(중용)되었다. 같은 해 10월 중순, 현봉학 통역관은 미 제10군단장 에드워드 M. 알몬드와 처음 만났다. 알몬드가 마침 38선 북쪽 금강산 남쪽인 동해안의 高城(고성)에 주둔했던 우리 해병대사령부를 방문, 申鉉俊(신현준) 해병대사령관과 회담할 때 현봉학이 통역으로 배석했다. 그때 해병대는 해군참모총장의 지휘 하에 있었다.


현봉학은 알몬드의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맥아더의 심복이라는 정도의 인식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무렵 알몬드는 仁川(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이어 西海(서해) → 南海(남해)를 빙 돌아서, 동해안에 상륙한 다음 북한군을 추격하던 시기였던 만큼 그 위엄이 하늘에 닿아 있었다.


맥아더는 한국 전선을 둘로 나눠 서부 전선을 워커 중장에게, 동부전선은 알몬드 소장에게 맡겼다. 개성이 다른 2人을 통괄해 북진통일을 이룩하겠다는 맥아더 構想(구상)은 ‘1개 戰線(전선), 2인의 지휘관’이라는 兵法上(병법상)의 과오를 범했음을 앞서 지적한 바 있다. 


그야 아무튼 申鉉俊 해병대사령관과의 회담이 끝나자, 알몬드의 화제는 玄鳳學 통역관을 향했다. 영어를 제대로 말하는 한국인이 그리 많지 않았던 시대였던 만큼 당연한 관심이었다.


“貴君(귀군)의 고급영어에 깜짝 놀랐다. 어디서 배웠는가?”

현봉학은 이때 28세. 알몬드는 그 두 배의 연령이었다.

“貴國(귀국)의 버지니아州 리치몬드에서 배웠습니다.”

현봉학은 세브란스 의전에서 病理學(병리학)을 배운 후 미국에 2년간 유학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알몬드는 이렇게 말했다.

“놀랄 일이네. 나는 루레이(Luray) 출신, 같은 버지니아州이지. 州都(주도) 리치몬드로부터 그리 멀지 않아. 유명한 鍾乳(종유·탄산칼슘 성분이 흘러내려 만들어내는 형체)동굴이 있는 곳이야.”

“루레이의 종유동, 저도 그 곳을 알고 있습니다.”

“굉장하다! 수만리 떨어진 한국 땅에서 내 출신 州의 대학에서 공부한 청년이 있다니… 그럼, 貴君(귀군)은 버지니아州立大 의대에 다녔겠군.”

“그렇습니다.”

참모부장 에드워드 포니 大領(1965년 別世)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흥남철수 때 포니 대령은 ‘搭載(탑재)참모’를 겸했는데,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을 친절하게 도와주는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후일, 탑재참모로서 그는 ‘피난민 탑재를 위한 기술적 代案(대안)’을 작성해 알몬드 군단장을 설득했다.

“貴君의 출신지는?”

“함경남도 咸興(함흥)입니다.”

“뭐라고? 우리는 영어를 잘 하면서 함경도를 잘 아는 사람을 찾고 있어. 貴君이 딱이야!”

함흥에 사령부를 설치할 계획인 미 제10군단은 영어를 하는 현지인이 없어 몹시 난처해 하던 참이었다. 알몬드 군단장에게 현봉학의 등장은 안성맞춤이었다. 알몬드는 신현준 사령관에게 강청해, 현봉학을 미 10군단의 民事部 顧問(민사부 고문)으로 스카웃했다.  
    
당시, 알몬드는 陣中(진중)에서 매우 사치스러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물 마시는 컵도 極上品(극상품)이었다. 삼시세끼도 고급 레스토랑 수준이었다. 누가 이런 호화스러운 食器(식기)와 寢具(침구)를 가져다주었는지, 알몬드의 私物(사물)을 운반하는 데만 1∼2소대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검소한 목사 가정에서 자란 현봉학은 씀씀이의 차원이 다른 미국 장성의 모습에 아마도 문화적 쇼크를 느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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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현봉학 씨


현봉학은 1922년 함흥에서 현원국 목사의 네 아들 중 차남으로 출생, 함흥고보를 졸업했다. 함흥은 함경남도의 도청 소재지이며, 당시 북한에서는 평양에 이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西洋風(서양풍)의 도시라는 점에서는 평양을 오히려 능가했다. 그는 1941년 세브란스 醫專을 졸업했으며, 그의 부모 형제는 함흥이 공산 치하에 들어간 직후에 서울로 도피해 왔다. 그의 4형제 중 맏형은 이화여대 문리대 학장을 지낸 신학자 故 玄永學(현영학) 교수, 두 동생은 在美 소설가 피터 玄과 故 玄時學(현시학) 해군 제독이다.


평소, 그는 어린 시절의 소꼽동무와 高普 동창을 다시 만나는 꿈을 꾸어 왔다. 그 꿈은 이루어졌다. 현봉학은 미 제10군단과 함흥의 민간단체와 사이에 중개역할을 정력적으로 수행했다. 그의 전공분야인 병원뿐 아니라 학교, 기독교 교회와도 깊이 교제를 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 북한군을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로 몰아내기 직전의 유엔군 앞을 중공군이 막아섰다. 비교적 북진이 순조롭던 동부전선에서도 의심스런 양상이 전개되었다. 미 제10군단 사령부에는 이런 얘기가 나돌았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으로부터 후퇴명령이 내려왔다. 지금, 서부전선에서는 중공군의 공세로 退路(퇴로)가 끊겨 전멸의 위기에 처해 있다.”


“알몬드에게 直訴하는 수밖에 없다!”
 
현봉학은 미 10군단 사령부 내에서 돌고 있는 얘기를 듣고 자기 귀를 의심했다. 유엔군이 떠난 후 공산군이 들어오면 누가 유엔군에게 협력했는가를 철저히 조사할 것이다. 그러면 그의 친지와 친구들은 몰살당할 것이 뻔했다. 그 순간 그는 미 제10군단의 민사부 고문으로 활동한 것을 후회했다. 우선, 현봉학은 민사 부문의 직속 上官인 무어 대령과 만났다.


“대령, 내 말을 반드시 들어 주시오. 이미 함흥의 남쪽은 공산군의 세력 하에 있는 만큼 함흥 시민에게는 도피할 길이 없어요. 유엔군이 떠나고 난 후 공산군은 유엔군 협력자를 색출해 고문·살육할 겁니다. 유엔군이 협력자들을 버리고 간 것이 세계에 전해지면 미국에 큰 치욕이 될 것이오. 대령, 어떻게 하든 함흥 시민을 살려 주시오!”


무어 대령은 이렇게 답했다.

“닥터, 이건 전쟁이오. 전쟁에서는 軍이 우선입니다. 안 됐지만, 흥남항의 설비는 너무 빈약합니다. 나는 지금 우리 제10군단 예하 장병 전원이 탈출할 수 있을까, 어떨까를 고민하고 있어요. 닥터의 입장은 이해하지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면 안 됩니다.”

무어 대령은 자기 임무에 엄정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한 번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봉학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제는 알몬드에게 直訴(직소·절차를 밟지 않고 윗사람에게 직접 호소함)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알몬드 군단장은 매우 바빠 면담의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왜 그래, 닥터? 우울한 얼굴을 하고….”


우연히, 포니 대령과 마주쳤다 현봉학은 함흥 시민의 위기를 호소했다.

1950년 11월30일, 포니 대령이 알몬드 군단장과의 면담을 주선했다. 현봉학은 함흥 시민의 어려운 형편을 설명했다. 알몬드 군단장은 갑작스런 패배의 충격을 견뎌내며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개 통역의 호소를 끝까지 경청했다.

“닥터의 말은 알아들었다. 나는 貴君의 말에 전면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지금 무엇 하나 확약할 수 없다. 敵(적)은 함흥을 우회하여 남쪽의 元山 방면으로 急進(급진)하고 있다. 우리 7개 사단, 10만 장병을 우선 탈출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 피란민 문제는 앞으로 포니 대령과 상의하라.”


알몬드는 이렇게 대답한 후 대화가 끝났다는 몸짓을 했다. 현봉학은 순간 ‘한 번 더 호소할까’하고 머뭇머뭇 했다. 그때 포니 대령이 현봉학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禮를 표시하고 退室(퇴실)해야만 했다.

“닥터, 알몬드 군단장은 東京(맥아더사령부)의 양해를 얻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큰일에 부딪친 거야. 그러나 이만큼 호의적으로 대답했으니 너무 걱정하진 말게.” 

포니 대령의 위로에 현봉학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로부터 2주일간, 현봉학의 마음은 절망과 희망 사이로 오락가락했다.


“피난민 10만 명을 군함으로 철수시킨 것은 세계사 최초의 쾌거”

1950년 12월4일, 미 제10군단은 사령부를 咸興(함흥)에서 동남방 16km의 항구 흥남으로 옮겼다. 12월14일 오후, 현봉학은 “군단장이 소집하는 회의가 열렸다. 닥터도 참석하라”는 무어 대령의 연락을 받고 함께 알몬드 군단장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이미 포니 대령 등 많은 고급장교들이 참석해 있었다. 그 가운데는 국군 제1군단장 金白一(김백일) 장군과 2명의 국군장교도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金白一 장군도 북한시민들의 피난을 위해 身命(신명)을 걸었던 군인이었다. 김백일 장군은 “함흥 피난민들을 LST(대형 양륙함)에 승선시키지 않으면, 국군 제1군단은 피난민들과 함께 陸路(육로)로 철수하겠다”고 極言(극언)을 했다는 것이다. 회의에서 알몬드는 다음의 要點(요점)만을 말하고 곧 해산을 선언했다.


“후방인 元山(원산)은 이미 적의 手中(수중)에 떨어졌다. 이제 陸路(육로)에 의한 탈출은 불가능하다. 탈출로는 海路(해로)뿐이다. 함흥에서 흥남으로 운행되는 深夜(심야) 기차에 약간의 餘力(여력)이 있다. 4000~5000여 명의 함흥시민을 이곳 흥남으로 운송하도록 한다. 조속히 수배하도록! 상황은 한없이 나쁘지만, 최악은 아니다.”
 
朗報(낭보)였다. 꽉 막혔던 가슴이 금세 풀렸다. 현봉학은 16km 거리의 함흥으로 달려가 이 吉報(길보)를 여러 민간단체들과 기독교인들에게 알렸다. 전달을 끝내고 함흥驛(역)에 나가 보았더니, 이미 5만을 넘는 인파가 驛前(역전) 광장에 모여 있었다. 혹한기인데도 미군 헌병은 몰려드는 인파 정리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결국, 기차에 탑승한 것은 우익인사와 기독교도 등이었고, 나머지 인파는 흥남으로 향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놀란 미군 헌병이 길을 가로막아 보았지만, 파도처럼 몰려오는 인파를 되돌리지 못했다. 군용 차량의 흐름에 지장을 주는 것 이외에 피난민들 속에 공산당 스파이가 섞일 우려가 매우 컸다. 그래도 인파는 미군 헌병의 저지를 뿌리치고 산길을 걸었다.


흥남항 부두는 피난민들로 흘러넘쳤다. 함흥 시민뿐 아니라 함경북도 방면으로부터 내려온 피난민들도 가세해, 그 수는 대번에 10여 만 명에 달했다. 미 제10군단은 자기들뿐만 아니라 피난민 10만 명의 식량과 숙소 문제에 직면했다. 그 중에는 친지의 가정 및 학교 내에 숙박할 수 있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만, 태반은 난방도 식수도 취사시설도 없이 주먹밥과 毛布(모포)만으로 영하 10도의 강추위를 견뎌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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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철수 당시, 피난민을 가득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의 모습. 


12월10일부터 미 제10군단은 해상철퇴를 개시하고 있었다. 한국군 제1군단, 미 제1해병사단, 미 제7사단의 順(순)으로 釜山(부산) 방면을 향해 출항했다. 뒤를 끊는 後衛(후위)부대의 역할은 미 제3사단이 맡았다. 


그러는 사이, 피난민들은 자기들의 차례가 오기를 학수고대를 하고 있었다. 凍死者(동사자)도 발생했고, 氷點下(빙점하)에서 아기를 출산하는 여성도 있었다. 사람들의 불안과 의혹은 짙어지고 있었다.


“혹시, 우리를 버리고 가는 게 아닐까?”


그러던 12월17일, 세 척의 LST(대형양륙함)가 흥남항에 입항했다. 이어 6∼7척의 수송선도 들어왔다. 12월19일, 피난민의 승선이 시작되었다. LST의 통상 승선 정원은 2000 명인데, 무려 5000명이나 탔다. 미국적 화물선인 메레디스 빅토리아호는 7600중량톤(dwt)인데, 1만4000여 명이나 승선했다.


뱃머리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중공군의 접근에 따라 피난민의 자꾸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안도르號·미라號 등은 거제도를 향해 출항했다. 1950년 12월24일, 승선을 완료하면, 미군은 흥남항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흥남 탈출 후 포니 대령이 현봉학에게 말했다.

“닥터, 우리는 10만 명의 피난민을 철수시켰다! 이건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쾌거야! 이것이야말로 한국판 ‘모세의 기적’ 아닌가!”
     
현봉학은 감격으로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한참 동안, 포니 대령의 손을 꼭 잡고 있을 따름이었다. 휴전 후, 현봉학은 本業(본업)으로 돌아가 임상병리학자로 활약하다가 2007년 별세했다. 에드워드 포니 대령은 少將(소장)으로 전역한 후 1965년 별세했다. 그의 증손자 벤 포니는 2009년, 전남 木浦(목포)의 영흥중학교에서 原語民(원어민) 교사로 부임·재직했고, 현재는 서울대 국제대학원에서 修學(수학)하고 있다.


金白一 장군의 동상을 모욕한 좌파들의 만행


흥남철수 때 10만 북한 동포의 피난에 身命(신명)을 걸었던 또 한 사람은 金白一 장군이다. 그는 함경북도 明川(명천) 출신이다. 서울 普成(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滿洲(만주)로 가서 奉天(봉천)군관학교에 5期로 입교했다. 丁一權(정일권) 장군과 동기생으로 봉천군관학교에서 성적 1∼2위를 다투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시 滿軍(만군) 대위로 복무하고 있었다.

흥남철수로부터 3개월 뒤인 1951년 3월28일의 사건이지만, 미 8군은 예상된 중공군의 4월 공세에 대처하기 위해 大邱(대구)에서 군단장 회의를 소집했다. 김백일 장군은 이 회의를 마친 후, 기상악화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歸隊(귀대)하다가 탑승했던 경비행기가 태백산맥 發旺山(발왕산)에 충돌, 34세 젊은 나이에 순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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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일 장군 동상에 검은천을 뒤덮은 모습. /ROTC
중앙회 홈페이지 캡처


김백일 장군의 동상은 이북5도민들의 성금으로 현재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세워져 있다. 그런데 2011년 7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거제 지역 10개 좌파단체 모임인 ‘거제시민단체연대협의회’가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김백일 장군의 이름이 올라 있다는 이유 등으로 그의 동상을 검은 천으로 덮고 쇠사슬로 묶는 만행을 저질렀다. 좌파들의 동상 철거 집행 작업은 참전용사들의 몸싸움에 의해 봉쇄되었다. 왜 김백일 장군은 좌파들에게는 ‘증오의 심벌’인가?


김백일(1917∼1951)의 원래 이름은 金燦圭(김찬규)였으나 “온 세상이 붉게 물들어도 나 하나는 청천백일 같이 살겠다”는 뜻에서 金白一로 개명하고, 1945년 12월에 동기생 丁一權(정일권) 등과 함께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1946년 2월 말, 軍事英語學校(군사영어학교) 졸업 후 중위로 임관하자, 전북 裡里(이리·지금의 익산시)에서 창설된 제3연대의 연대장 要員(요원)으로 부임했다.


그는 휘하에 金鍾五(김종오·후일 육군참모총장), 李翰林(이한림·후일 1군사령관, 건설부 장관), 白仁基(백인기·대령 때 戰死), 丁來赫(정래혁·국방장관, 국회의장) 소위 등을 거느리고 中隊(중대)를 창설하고, 이어 大隊(대대) → 聯隊(연대)로 확장시켜 초대 연대장에 취임했다.


1948년 10월19일 麗順(여순)반란이 발발하면, 즉각 제5旅團長(여단장)대리로 임명되어 順天(순천)에 이어 麗水(여수)를 탈환해 반란 진압의 주역이 되었다. 1949년 1월, 原州(원주)의 제6여단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5월4∼5일, 春川(춘천) 주둔 제1대대장 表武源(표무원) 소령과 제2대대장 姜太武(강태무) 소령이 부대를 이끌고 월북하는 반역사건이 일어나 引責(인책), 사직했다.

그러나 甕津(옹진)지구의 무력충돌이 확대되던 1949년 6월5일, 옹진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출동하여 북한군을 물리쳤다. 또 38선을 뚫고 남하한 북한 게릴라가 지리산 일대에서 준동하자, 落葉(낙엽)의 시기에 토벌한다는 작전에 따라 그는 1949년 9월28일부로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에 기용되었다. 약 3개월간에 걸친 지리산 토벌작전을 마친 그는 1950년 1월1일 大邱(대구)의 제3사단장으로 영전했다. 그는 野戰(야전) 스타일이었다.


그런 그가 6·25 남침전쟁 발발 2개월 전에 육본 행정참모副長이란 要職(요직)으로 전출되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미국에서 군사시찰 중이던 丁一權 작전참모副長의 대리로, 작전참모副長도 겸임했다.


낙동강 방어전 때는 제1군단장으로서 東正面(동정면)을 맡았다. 그는 제1선의 彈雨(탄우) 속에서 지휘 능력을 발휘했다. 1950년 9월 중순, 국군과 유엔군이 攻勢(공세)로 移轉(이전)하면 그의 제1군단은 보름만인 9월30일 38선에 1번으로 도착했다.


이어 10월10일에는 元山(원산)을, 11월 하순에는 고향 明川(명천)을 거쳐 淸津(청진)을 공략해 두만강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에 의해 흥남으로부터 海上(해상) 철퇴가 불가피해졌다. 흥남철수 때에는 미군 LST에 피난민을 실어주지 않으면 국군 제1군단도 해상철수를 하지 않고, 피난민과 함께 陸路(육로)로 南下하겠다고 강력하게 버텼다.


10만 명의 피난민을 군함으로 남하시킨 흥남철수로 유엔군은 도덕적인 면에서도 공산군을 압도했다. 그 후 대한민국의 경제적·정치적 성공에 의해 6·25전쟁은 미국 등 우방국들에게 ‘잊혀진 전쟁’ 또는 ‘잊고 싶었던 전쟁’이 아니라 ‘승리한 전쟁’으로, 세계 속의 한국은 ‘자유민주세계의 자랑스런 쇼윈도’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때의 월남 피남민들은 그 ’쇼윈도 속의 꽃‘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백일 장군이 왜 死後(사후)에 이런 수모를 당해야 했는가? ▲그가 滿洲國(만주국)의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滿軍(만군)의 위관 장교 시절 만주 지역의 共匪(공비)와 馬賊(마적) 토벌에 유능했다는 점, ▲1946년 10월에 올린 그의 결혼식이 호화스러웠다는 점(그것이 호화스러웠으면 과연 얼마나 호사스러웠을까?)이 그에 대한 비판의 대부분이었다. 그것은 조국을 위한 戰功(전공)에 비하면 그야말로 사소한 것들이었다. 김백일의 동상을 쇠사슬로 묶는 짓은 그가 지켜낸 대한민국을 모욕하는 행위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