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한국戰爭 최후의 비밀 맥아더가 중공군 개입 가능성 무시하고 北進한 이유 밝혀지다! 趙甲濟 / 金永男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미군 정보기관, 맥아더-스페인 대사 대화록 감청, 擴戰 꾀하는 맥아더의 본심 파악해 트루먼에게 보고, 해임 ⊙ 丁一權, “맥아더는 이승만과 교감하에 중공군 개입 확신하고도 트루먼에게 이를 부인” ⊙ 폴 니츠, “맥아더의 교신 감청 자료에 의해 그의 진정한 목표는 중국으로 전쟁 확대임을 알게 되었다”
이승만과 맥아더는 중공군 개입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이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고 한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후 유엔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元帥)는 전략가로서 그의 명성에 금이 가는 실수들을 되풀이했다. 북진(北進)하는 미군의 지휘권을 8군(서부전선)과 10군단(동부전선)으로 나누었고, 양자 간에 공간이 발생하도록 해 중공군이 그 빈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만들었다.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무시했고, 중공군이 개입한 후에는 30만명에 달하는 중공군의 병력을 1만6500명에 불과하다고 과소평가했다. 1950년 10월 25일 이후 중공군이 출현해 교전을 벌였음에도, 11월 24일 ‘크리스마스 공세’라는 이름으로 유엔군을 계속 북진하도록 했다가 11월 28일 중공군의 기습을 받아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해하던 맥아더는 후퇴를 거듭하면서, 한때 한반도 철수 가능성까지 내비치는 등 패배주의적 태도를 취한다(《월간조선》 7월호, 〈현대사 발굴/ 대한민국이 지옥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 한국전쟁 5일간〉 참조). 이러한 맥아더의 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북진통일이 성사되기 직전, 중공군의 남침을 예측, 대비하지 못한 책임은 맥아더에게 있다. 전역(戰域)의 최고 사령관이었고, 유엔군 사령부로 들어온 수많은 정보가 남침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1950년 10월 15일 태평양의 웨이크 섬까지 날아온 트루먼 대통령에게, “중공군 약 30만명이 만주에 집결해 있지만 개입의 시기를 놓쳤다. 개입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공군력으로 도륙하겠다”고 안심시켰다. 李承晩, “맥아더와 나는 중공군이 나온다고 보아 왔다” '
정일권 전 육군참모총장.
|